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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래 마을에 심겨진 씨앗(20)

소래 마을에 심겨진 씨앗(20)Dec 30, 2011 09:23 AM KST

소래 마을 출신으로서 기독교 신앙과 애국심의 정화(精華)로서 김마리아의 존재처럼 선명하고 비장(悲壯)한 존재는 없다. 다른 분들도 다 우리나라의 교회사와 애국운동에 어디에도 빠지지 않는 귀중한 자취를 남겼지만 김마리아의 행적은 마치 한 토막 드라마와 같이 우리의 가슴을 저리게 하는 감동을 준다. 김마리아는 소래 마을 김 판서 댁의 삼대 김윤방(金允邦)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마을 사람들은 보통 이 가정을 [좌수 댁]이라고 부르며 존경하였다. 그 집안은 하인과 소작인들만도

[이충범의 길에서][13][정말 따듯한 세상]

[이충범의 길에서][13][정말 따듯한 세상]Dec 26, 2011 01:05 PM KST

인생은 참 얄궂다. 정말 만나기 싫고 다시 보기 싫은 사람은 꼭 다시 만난다. 야곱을 보면 우리 인생이 그런가보다 싶다. 그렇게 피하고만 싶던 형 에서, 얼마나 그 만남이 힘들었으면 천사인지 하나님인지 하고 씨름까지 하는 악몽에 시달려야만 했을까? 그런데 그 재회는 야곱의 걱정대로 비극이 아니라 오히려 화해였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이승에서 쌓아둔 그런 불화를 다 털어 버리고, 서로 화해하고 용서한 후에 천국으로 오라고 우리를 이렇게 재회하게 만드시는지도

소래 마을에 심겨진 씨앗(19)Dec 21, 2011 10:03 AM KST

남궁혁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에 대하여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오직 그의 외할아버지 임씨가 구한 말 승지(承旨)와 평안감사를 역임한 고관이었다고 한다. 그를 귀여워 한 외할아버지를 따라 평양 감영으로 가서 일곱살이 될 때까지 있었다.

[이충범의 길에서][12][빛고을을 뒤로 하고]

[이충범의 길에서][12][빛고을을 뒤로 하고]Dec 12, 2011 07:55 AM KST

숨쉬기도 힘들도록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숨죽이고 있는 사이 버스는 광주에 접근해가기 시작했다. 무심코 버스 밖을 내다보니 가뜩이나 숨쉬기 힘든 내 가슴이 더 죄어온다. 멀리 보이는 아파트숲, 버스 옆으로 쌩쌩 달려가는 승용차들, 거리를 가득 메운 상점들과 사람들, 바로 그 흉물스러운 대도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떠난 지 며칠 됐다고 이런 풍경이 엄습해오자 가슴이 확 막혀왔다. 버스는 새로 지은 대형 터미널로 들어섰고 눈치 보며 차에서 내린

[김경재] 한류(韓流)에 대한 문화신학적 조명(완결)

[김경재] 한류(韓流)에 대한 문화신학적 조명(완결) Dec 08, 2011 08:43 AM KST

지구촌이 나날이 가속화 되어가면서 문화들은 상호교류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문화혼종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한류’ 중에서도 K-Pop 장르는 그 변화속도가 다른 문화콘탠츠에 비하여 빠른 것을 볼 수 있다. 예술 비평가 이동연의 말을 들어보자.

[김경재] 한류(韓流)에 대한 문화신학적 조명(3)

[김경재] 한류(韓流)에 대한 문화신학적 조명(3) Dec 05, 2011 08:07 AM KST

조지훈(1920-1968)은 민족성이라는 것은 동일한 풍토적 환경에서 역사발전을 겪으면서 집단생활을 하는 동안에 형성된 공동적 마음바탕 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한민족의 성격은 풍토적 특성으로서 ‘대륙성’과 ‘해양성’ 두가지가 서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았다. 대륙성이란 대륙적 지질 기후 풍토가 주는 대륙적 웅혼성일 터인데 이것이 민족성 속에 역동적 ‘격정성’을 길러주었고, 해양성은 남방적 해양에 접해있음으로 인하여 길러지는 예술적 ‘평화성’을 길러주었다고 분석한다.

[이충범의 길에서][11][길에서 이탈하다]

[이충범의 길에서][11][길에서 이탈하다]Dec 05, 2011 07:58 AM KST

터미널에서 나와 삼남대로인 831번 지방도로를 타기 위해 걷기 시작했다. 오래 된 고도이다 보니 나주는 도시 자체가 유적지나 다름없다. 사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터미널도 예전 나주성 동쪽 문이 있던 자리였다. 그 외에도 나주엔 수많은 지석묘들과 삼한시대의 천년 유적지들이 널려 있고 나주향교를 비롯하여 여러 채의 대궐 같은 고가들이 즐비하다. 원래 부자동네였기 때문에 조선시대에 지은 호화주택들이 남아 있는 셈이다. 게다가 나주엔

소래 마을에 심겨진 씨앗(18)Dec 05, 2011 07:29 AM KST

김필례 선생이 일본 유학을 마친 후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일생동안한 일은 너무나 방대하고 다양하여 그 과정을 한 줄기의 전기(傳記)로 기록하기가 난삽(難澁)하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그의 업적을 분야별로 구분하여 기록하고자 한다. 그러자니 자연히 앞뒤의 순서에 혼란이 올 수도 있음을 말해둔다.

소래 마을에 심겨진 씨앗(17)Dec 02, 2011 03:31 PM KST

김필례는 1908년도에 드디어 일본 유학을 가게 되었다. 오빠 김필순은 당시 최신 스타일의 양장의상을 사주었다. 여지껏 한복만 입고 자라난 김필례로서는 참으로 황홀한 호사였다. 이처럼 김필순은 일찍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린 여동생을 사랑하고 돌보아 주었던 것이다. 일본으로 떠나는 날 어머니가 서울역으로 전송하러 나왔다. 그는 김필례의 두 손을 잡고 당부하였다

[김경재] 한류(韓流)에 대한 문화신학적 조명(2)

[김경재] 한류(韓流)에 대한 문화신학적 조명(2)Dec 02, 2011 08:26 AM KST

한류가 발생하고 진행되어가는 이유는 여러 가지 복합적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주요한 동기들 즉 국가 문화정책과 문화산업적 요인, 한국민의 문화적 능력과 집약적이고도 중층적인 근현대 사회변동 경험에서 축적된 역동적 역사체험, 전자정보 기술혁명이 가져다준 미디아의 위력, 그리고 쏘련 사회주의 몰락이후 전개되어가고 있는 지구촌의 자본주의적 세계화라고 부르는 경제질서가 복합적 원인으로서 작용했다.

[김경재] 한류(韓流)에 대한 문화신학적 조명(1)

[김경재] 한류(韓流)에 대한 문화신학적 조명(1)Nov 30, 2011 07:18 AM KST

2011년 늦가을 11월, 4회에 걸쳐 논의되고 있는 한국문화신학회와 연대기독교문화연구소 공동주최의 심포지엄 주제는 ‘한류와 정의’ 이다. 이 큰 주제를 기독교문화신학의 관점에서 고찰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필자는 심포지엄의 주제에 대하여 ‘문화신학’의 과점에서 접근하는 것이므로 ‘문화신학’이란 무엇을 어떻게 하려는 신학의 한 전문분야인가 ‘한류’와의 관련해서 잠시 먼저 언급할 필요가 있다

[정재현] 믿음과 삶(5)

[정재현] 믿음과 삶(5)Nov 21, 2011 12:31 AM KST

‘왜 믿는가?’를 물으면서 우리는 믿음과 구원 사이에 깔려 있는 너무도 당연한 듯이 보였던 고리를 끊어내어야 한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 고리야말로 믿음을 결국 구원에 대한 욕망으로 전락시키는 족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믿음이 ‘깨달음’이나 ‘갈고 닦음’을 거부해 왔기 때문이다.

[정재현] 믿음과 삶(4)

[정재현] 믿음과 삶(4) Nov 19, 2011 07:05 AM KST

그렇다면 우리는 왜 믿는가? 대답하려면 다소 당혹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 물음은 사실상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뿌리에 깔려 있는 물음일 뿐 아니라 거슬러 ‘무엇을 믿는가?’보다 앞서 물어져야 할 물음이다. ‘왜’가 그럴 듯하게 깔리지 않고서야 무엇이 ‘무엇’이든 별 뜻을 지니지 않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사에서 ‘왜 믿는가?’라는 물음은 믿음의 뿌리에 대한 불경스러운 시비라는 판단과 함께 신성모독의 죄명이 뒤집어씌워진 채 억눌려져 왔다. “믿는다면 무조건 믿을 일이지 어디서 감히 ‘절대적인 믿음’에 대해 ‘왜’를 묻는가?”라는 불호령과 함께!

[이충범의 길에서][10][겁나는 태양, 겁나는 동학군]

[이충범의 길에서][10][겁나는 태양, 겁나는 동학군]Nov 18, 2011 07:16 AM KST

이 세상에서 이렇게 달콤한 잠이 있을 수 있을까? 이른 아침에 눈을 뜬 것은 알람도, 모닝콜도 아니었다. 그 날 아침 나는 방안으로 가득 들어오는 강렬한 아침의 해님과 창 밖에서 지저귀는 새 소리에 잠이 깼다. 참 그리웠던 기상의 순간이다. 그리고 잊고 있었던 아침 모습이었다. 정말 오랜 동안 나는 옆 사람의 뒤척임, 알람소리, 위층 이웃의 샤워하는 물소리나 러닝머신

[정재현] 믿음과 삶(3)

[정재현] 믿음과 삶(3) Nov 15, 2011 08:33 AM KST

그렇다면 과연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실 이 물음은 앞서 살폈던 ‘무엇을 믿는가?’라는 물음과는 정반대로 막상 대답을 하려면 너무도 막연하다. 믿음과 ‘무엇’을 이으면서 나올 수 있는 두 개의 물음들이 이토록 대조적인 형편에 처하게 되는 것이 꽤 오묘한 일이지만 이는 결국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볼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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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비판에서 신앙성찰로(6): 포이어바흐의 무신론적 통찰을 중심으로

"식전이나 식후 혹은 이기주의의 기도가 아니더라도 고통으로 가득찬 기도, 위안을 찾는 기도조차 응답해 줄 의무가 신에게 있는 것이고 그런 인간의 고통에 참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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