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고통 면죄’란 부도수표 남발에 “인간성의 배신” 일갈

[특집대담] 종교학자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편(상)

삶/고통, 죽음 등은 종교의 출발이요 종말이라 할만큼 종교적 담론 안에서 자주 회자되는 주제들이다. 이러한 주제들과 관련해 종교들은 앞선 성인들의 문답에 근거해 각기 나름의 답을 제시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답들 중에는 삶의 다차원성을 무시한 채 보편성 혹은 전체성이란 이름으로 신앙하는 개개인의 ‘다양성’을 억눌러 왔던 것들도 분명 있었다. 종교가 때때로 인간 해방, 즉 인간 구원이 아닌 인간 억압의 기제로 작용해 왔다는 비판을 받아온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본지는 계사년 신년특집으로 그간 신앙인들이 비판적 성찰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의심없이 수용했던 삶/고통, 죽음 등에 관한 종교의 가르침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종교의 종교로서의 제 자리 찾기와 더불어 인간 해방의 길에 작은 등불을 비추고자 하는 시도다. 형식은 대담으로 진행되며, 내용은 파트별로 신학/철학/종교학 편으로 구성된다. -편집자주

▲종교학의 권위자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좌)를 지난 23일 오전 아산나눔재단 회의실에서 만났다. 대담에 참여하고 있는 정 교수와 김진한 편집국장(우) ⓒ베리타스 

- 우리의 삶 속에 내재된 ‘고통’ 그리고 ‘죽음’이란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하게 하는 사건들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유한성을 초월하고픈 욕망이 표출되는 지점들이기도 한데 이를 ‘힘에의 숭배’라는 인간의 원초적 종교성과 맞닿아 있는 문제라고 봐도 될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요. 한계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한계 없음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죠. 그렇기 때문에 유한에 대한 인식이 무한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은 당연한 얘기구요. 유한에 대한 인식이 무한을 적어도 상상하게 하죠. 지금 우리가 이해하는 종교라고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출현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고 볼 수 있겠지요. 종교라는 것은 무한에 대한 관심이고, 종교라고 하는 것은 유한한 것을 넘어서는 것으로 정의할 적에 말이죠. 그런 전제 하에서 종교의 기반이 될 수 있다고 얘기를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전제에 대해서 내가 왜 관심을 가지냐 하면 유한에서 무한을 상상할 수 있는 상상의 내용이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힘에의 숭배’로만 가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 때 힘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규정되는지 모르지만, 예를 들어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무한한 힘, 그런 것으로 귀결하는 것은 아니죠. 반드시 그렇게 귀결하지는 않죠. 예를 들면 문화·역사적 맥락에 따라서 완전성으로 귀결할 수 있고, 코스믹 프린스플(Cosmic Principle)이라고 하는 우주적 원리에 도달할 수도 있는 것이고 말이죠. 유한한 삶을 살다가 유한의 한계에서 뭔가 이것을 넘어서는 어떤 다른 것을 상상하는 상상의 내용이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일정하지는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단서를 붙이면서 이 얘기에 동의를 하고 싶어요.

유한의 경험, ‘힘에의 숭배’로 필연적으로 귀결하진 않아
문화·역사적 맥락에 따라 우주적 원리, 온전성에 도달할 수도

그러니까 어쩌면 포촉할 수 없는 어떤 신비를 경험하게 하는 계기일 수도 있거든요. 그것이 꼭 어떤 인격적인 신, 그가 갖고 있는 절대적인 권위에 필연적으로 귀결하는 것은 아니죠. 조금 다르게 얘기해 보면 시적인 상상력으로 끝날 수도 있어요. 그것으로도 충분히 유한에 대한 자기의식을 무한으로 연결시키는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게 할 것이에요. 반드시 그것이 종교적 기반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다는 말이죠.      

한계라고 하는 것이 대단히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적 현실에서 볼 적에 벽에 부딪히면 뚫고 나가고 싶은 것이니까.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을 해요. 정치도, 과학도 그렇거든요. 한계에 도달했을 적에 이것을 어떻게 뚫고 나갈까 말이지요. 한계라는 것이 의식이 되니까 말이죠. 그 원인을 낳게 한 또 다른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니까요. 늘 유한에 부딪혀 무한을 상상하고 말이지요. 그런 유한성의 경험이 드러나는 독특한 현상 중의 하나가 종교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이죠. 또 다른 삶의 형태가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으니까요. 

자살하고 끝날 수도 있어요. 유한의 경험 속에서 말이죠. 거기서 끝나는 것이 오히려 해답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죠. 그런 다양한 반응 속에서 어떤 것을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종교학적 입장이 바로 그런 것이죠. 종교 현상이라는 게 아주 독특한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요. 인간의 경험 속에 있는 어떤 것이라고 보니까요. 어떤 독특한 스타일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그 어떤 독특한 스타일을 사람들이 종교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죠.”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가 무종교의 시대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며 종교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하여 보편적으로 열어놓고 논의의 장을 이어갔다. ⓒ베리타스

- 우주적 원리도 종교라고 할 수 있는 것이겠군요.

“유교가 그런 것이죠. 인간은 도라는 것이 있다. 거기서부터 일탈하면 안 된다. 우주적 원리거든요. 또 본래 인간이라는 것은 온전한 것이다. 그런데 욕심 때문에 미망에 빠졌다. 그게 불교구요. 사람은 이렇게 부정적으로 살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그러면 자살하는 것이고요. 자학을 통해서 그 상황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죠. 자살이라는 심리가 독특한 게 죽으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인데 비극적인 것은 무엇이냐 하면 죽으면 문제가 없어지는데 문제를 고뇌했던 나도 없어지죠. 그게 허무죠. 그래서 비극적이라고 하는 것이지, 분명하게 해답의 출구를 모색하는 과정 속에서 선택된 행위거든요. 유한을 경험해서 벗어나려고 하는, 꼭 무한이라는 것과 연결되지는 않더라도 하여간 유한을 경험했던 그 경험이 모색한 출구의 하나의 양태이죠. 그런 속에 종교라는 것이 있는 것이고요. 절대적인 힘과의 만남으로 귀결하는, 역사 문화적 맥락에서 그런 문화를 형성하는 종교를 요새 사람들이 기독교라고 얘기를 하는 것이죠.”  

- 바야흐로 우리는 무종교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제도로서의 종교가 거부되고 있으며 과학주의에 경도된 일부 무신론자는 인간의 종교성마저 ‘사치’라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서 온전히 해명되지 않는 ‘고통’ 그리고 ‘죽음’이란 사건은 종교, 아니 종교성을 요청하고 있다고 봅니다. 종교학자로서 인간과 종교, 인간과 종교성을 떼어 놓을 수 있다고 봅니까?

“질문이 복합적이라 답을 하기가 좀 힘듭니다. 먼저 무종교의 시대라는 판단에 저는 동의를 하지 않아요. 또 제도 종교의 배척이라는 현실 묘사도 바른 기술이라고 보지 않고요. 또 과학주의가 반드시 무신론자를 낳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구요. 인간의 종교성이 사치라고 얘기하는 현상에 대한 묘사도 보편적인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흥미로운 것은 이 질문이 제시하고 있는 이런 얘기들, 무종교의 시대, 제도 종교의 배척, 과학주의와 무신론, 인간의 종교성이 사치라는 판단을 현대가 하고 있다는 이런 판단이 상당히 설득력을 지니고 이야기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특정한 종교,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출원된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종교학에서의 종교란…“인간의 일상적 삶의 현상”
무종교 시대, 제도 종교 배척, 무신론, 종교성 사치 등에 동의 못해

왜 그러냐 하면 무종교의 시대라고 하는 것을 종교라는 개념을 조금 달리 규정을 하고 보면, 종교라는 게 뭐냐 말이에요. 꼭 종교학적인 입장이라고만 얘기할 수 없지만, 전 기본적으로 종교라고 하는 것이 인간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하는 자각, 그리고 인간이 이 문제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존재라는 자각이 만들어내는 문화 현상이라고 생각을 해요. 인간은 문제를 가진 존재다. 그러나 문제를 가진 존재라는 것에서 머물지 않는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뚫고 나가서 해답을 추구하고, 확보할까 이런 것이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종교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렇다면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문제를 자각하지 않는 인간이란 없어요. 또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지 않는 인간이란 없어요. 그렇다면 무종교의 시대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러니까 종교를 어떻게 규정 하느냐가 중요해요. 특정한 종교가 포퓰라리티(Popularity)를 갖느냐 안 갖느냐는 판단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인간이 문제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자각이 없다든가, 문제의 정황에서 해답을 추구하는 의도가 없다든가 하는 것은 서술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종교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이 물음이 결정이 되는 것인데 무종교의 시대라는 말은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자기의 포퓰라리티가 적어지니까 그런 판단을 하면서 얘기들을 한단 말이죠. 그랬을 때 그리스도교가 종교에 대해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으니까 퇴락하는구나하고 공감을 한다 이것이죠. 그런 뜻에서 종교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이 문제는 전혀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제도 종교의 배척이라고 하는 것도 그래요. 제도 종교 싫어하죠. 그런데 그것은 제도 종교가 갖고 있는 관성적인 현존의 스타일 때문에 싫어하는 것이에요. 인간은 더불어 살 수 밖에 없어요. 조직을 갖지 않으면 안돼요. 조직에 귀속 되어야 살아요. 더군다나 종교를 감동 공동체라고 해봅시다. 인간의 어떤 문제에 대한 해답을 공유한 사람들이 감동적으로 모인 커뮤니티가 제도화되고, 조직화되고 역사적으로 전승되고 그런 것이 종교라고 이름 붙여진 것이에요. 그런 종교가 없어질 수가 없어요. 달라질 뿐이죠. 제도 종교의 퇴락이라고 얘기를 할 수 있다면, 어떤 다른 조직이나 커뮤니티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을 보면서 얘기를 해야죠. 그랬을 적에 요즘 많이 얘기들 하는 개인화 되었다는 것 있잖아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커뮤니티에 나를 커밋(Commit)해서 사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개인적 입장에서 나를 돌보면서 산다. 그렇게 해서 상당히 개인주의화 되었다고 얘기를 할 것이에요. 그러면 개인주의라고 하는 것이 또 다른 제도냐고 물을지도 몰라요. 지금 제가 얘기 한대로라면 공동체에 속하지 않으면 안되니까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문화가 그런 개체들을 용인하는 문화라고 한다면 커뮤니티의 개념도 달라져야죠. 그런 면에서 볼 적에 제도 종교에 대한 배척이라고 하는 것은 정확한 서술이 아니라고 생각을 해봅니다. 다른 형태의 종교가 끊임없이 대체된다는 말이죠. 그런 점에서 얼터너티브 릴리전(Alternative Religion)이라고 하는 말은 옳죠. 또 다른 대안적인 것이 자꾸 생기고 있고요.

그런가 하면 또 다른 문제가 뭐냐 하면 현대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성 중 하나가 펀드멘탈리즘(Fundamentalism)이 이전 보다 더 강화되고 있거든요. 상당히 모호하고 혼돈스러우니까 더 심플하고, 더 강력하고, 그런 신념 속에 안주하고 싶어 하는 것이죠. 근본주의거든요. 근본주의적인 제도 종교들은 전부 강화되고 있어요. 특정한 종교 현상에 준해서 다른 종교 현상의 변화를 간과하고 있다고 한다면 바로 그런 얘기인 것 같아요. 제도 종교 배척이라고 하는 것이 말이죠. 전혀 다른 형태로 나타나고 있거든요. 또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정치도, 경제도 종교는 아니더라도 종교적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거든요. 옛날에는 그렇게 강하지 않았거든요. 이른바 우리가 전통적으로 얘기하는 종교 아래에 있었어요. 그러나 지금 그것이 종교를 좌우해요. 경제력이, 정치력이 종교를 좌우해요.

현대의 종교, 모호한 현실 이겨내려 근본주의 강화해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시적 진실 있기에 사치 아냐”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는 현대 종교가 모호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근본주의를 강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종교와 과학을 단순히 개념적으로 분리하는 것 보다는 경험적 세계를 돌아보고 새로운 관점을 가지라고 목청을 높였다. ⓒ베리타스

과학주의라는 것도 그래요. 우리가 종교와 과학을 개념적으로 분리된 개체로 생각을 해요. 그런데 실생활에서는 과학자가 교회 다니고 있고, 우리는 과학을 다 사용하고 살고 있어요. 왜 그런데 개념적으로 분리시켜서 별개의 개체로 생각을 하느냐 말이에요. 처음부터 문제 제기가 잘못된 것이죠. 개념으로 현실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소통을 위해서 현실적 경험을 추상화한 언어에요. 그런데 그 개념이 논리적으로 상충한다고 하면 다시 경험적 현실로 돌아와서 정말 어떻게 있나 하는 것을 살펴야 해요. 그런데 그것을 안 보고 개념의 세계에서 놀거든요. 개념의 논리가 전개가 되고요. 헤겔이 역사철학에서 종교 얘기를 했는데 종교학에서는 간단히 얘기를 해요. 헤겔의 종교는 헤겔의 논리 속에는 있어도, 실제 역사적 경험 속에는 없다는 얘기를 하거든요.

지금 우리가 그런 문제에 빠져서 사이언티즘 그러면 무신론자. 굉장히 개념적인 것이거든요. 그 무신론도 내가 주장하는 유신론에 공감하지 않는다는 얘기죠. 정말 그 사람들이 신비를 부정할까. 예를 들면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이 일상을 넘어서는 어떤 다른 일상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까. 그렇게 되면 과학을 못하죠. 그러니까 무의미한 논쟁이죠. 창조론, 진화론 같은 것처럼 이 세상에 그렇게 소모적이고 비생산적인 논의가 없어요. 현실 속에서 같이 살면서, 과학의 도움을 이렇듯 받으면서 말이죠. 과학의 도움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거든요. 도덕적인 규범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과학적 툴과 과학적 인식론이 필요하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간과하고 개념적으로 얘기를 해요. 과학 하는 사람은 무신론자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개념의 세계에서 노는 것이에요. 저는 밤낮 그것을 뭐라고 하냐면 지적 부정직이라고 해요. 그런 점에서 과학주의가 반드시 무신론으로 귀결된다는 얘기에 공감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또 인간의 종교성이 사치라고 하는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겠죠. 그런데 전 그렇게 생각을 하지는 않아요. 그렇게 대담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만약 그런 얘기를 한단 말은, 사치라고 하는 것이 낭비라는 얘기인데, 생산적이지 않고 소모적이며 너무 많은 것을 지불한다는 얘기인데 종교가 과연 그런 것일까 전 그렇게 생각하질 않아요. 어떤 특정한 종교의 특정한 모습을 그렇게 비판할 수는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생각을 해봅시다. 예를 들면 시는 대단히 비현실적이에요. 시적 서술을 논리적으로 얘기하면 전부 거짓말이에요. 그런데 시적 진실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러니까 종교 현상이라는 게 가지는 것이 뭐냐. 종교적 진실이라고 하는 것이 있거든요. 기적의 이야기 같은 것 말이죠. 종교적 진실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이요. 과학적 서술로는 말이 안돼요. 그러나 오병이어의 이야기를 들으면 감동이 있거든요. 그 감동이라는 것은 산문의 논리로 풀어지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랬을 적에 우리 일상생활 속에 오병이어의 이야기가 사치냐? 아니거든요. 시라는 게 사치냐? 아니거든요. 시를 읽는 게 사치냐? 아니거든요. 그 감동이 필요한 것이라면 그 감동이 낳은 진실이라는 게 있는 것이거든요. 만약 이런 과학자들이 있다면 이것도 문제라고 생각을 해요.

물론 사치인 측면도 있겠죠. 그런 측면도 있어요. 예를 들면 문자주의적인 것 있잖아요. 예를 들어 창조설화 속에서 과학을 찾는 것처럼 미련한 짓이 없거든요. 그런데 그것 하는 종교인들, 신학자들이 있거든요. 그것이 과학적 진실이라고 얘기하거든요. 그러면서 과학을 부정하거든요. 사치죠. 아니 자기기만적인 사치죠.

그래서 ‘고통’ 그리고 ‘죽음’ 이런 것들이 종교를 요청한다고 할 적에 종교라는 게 뭐냐 하는 것이죠. 그 개념을 조금 더 보편적인 것으로 논의의 장으로 끌어올 수 있어야죠. 그러니까 종교란 개념을 얘기할 적에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공유되는 장으로 내려놓고 종교 얘기를 하기 시작해야지. 그랬을 적에 종교학에서 쉽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이 문제를 자각하고, 문제에서 해답을 추구하는 존재, 그 존재가 낳는 독특한 문화라는 것을 종교라고 전제하고 얘기를 해보자. 그러면 얘기가 되죠. 기독교도 그렇고 불교도 그렇고 과학도 그렇고 그런데 왜 종교는 종교라고 하는 독특한 제의가 있고, 신화가 있고 그런가. 그때부터는 얘기가 되는 것이죠. 그 이전까지 종교란 이런 것이다. 딱 못 박아 놓고 시작하면 아무 얘기도 안되죠. 내 주장을 승인하느냐 안하느냐만 문제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종교학에서 얘기하는 것이 특정 종교의 자기주장의 논리는 인류의 종교 경험을 서술할 수 없다. 그것은 안 되는 것이죠. 그런 자리에서 생각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인간과 종교성, 별개 아니다
“정치, 경제 그리고 종교도 인간의 삶의 현상”

마지막으로 인간과 종교성의 관계에 대한 물음에 대한 답변인데 제가 말씀 드릴 수 있는 것은 종교는 인간의 삶 속에 있는 현상이라는 것으로 이해를 했으면 좋겠어요. 관계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말이죠. 종교성이라는 게 따로 있고, 인간성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말이죠. 그랬을 적에 종교성은 아마도 신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하는 전이해가 있는 것이거든요. 그게 아니라 인간의 삶 속에 있는 현상으로 이해하면 당연히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이죠. 종교인이든 아니든 간에 인간의 삶 속에 있는 현상이니까요. 종교성과 인간이 연결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얘기는 둘을 별개라고 하는 것을 전제한 것이니까요. 그 이전에 종교도 인간의 삶의 현상이라고 보면 너무 당연한 것이죠. 정치도, 경제도 인간의 삶의 현상이듯 종교도 인간의 삶의 현상이다. 다만 그 경험을 초월이라고 하는 개념으로 표출할 수 있을 뿐이지 말이죠. 그런데 그 경험 자체는 현실이지 않습니까? 그런 답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 이 질문에서는 결국 중요한 부분이 종교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인 것 같습니다.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가 '고통'에 대한 본질 탐구 보다 '고통'에 대한 의미를 추출해 내는 것의 유의미성을 강조하고 있다. ⓒ베리타스

“그렇게 되면 물음이 달라질 것 같아요. 이 질문 자체가 특정 종교의 현실에 입각해서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에 그 종교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얘기 밖에 될 수 없는데 그렇게 될 때 적어도 종교학의 입장에서 적어도 ‘종교’를 어떻게 보느냐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이 질문에 대해 제가 메아리를 칠 수가 없게 되는 것이거든요.”

- 이제껏 던진 질문은 특정 종교의 입장에서 제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앞으로는 좀 더 보편적으로 열어놓고 종교라고 하는 것이 단지 특수한 종교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삶의 현상에 이름 붙이는 것을 전제로 해서 논의가 진행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포스트모던하다고 그럴까. 어떤 딱지를 붙여서 제 얘기를 평가할지는 모르겠는데 본질에 대한 탐구라는 것이 우리를 얼마나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이게 만드나. 그래서 얼마나 결과적으로 자기 기만적이게 만드냐를 알 수 있습니다. 종교라는 본질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탐구하는 것 보다는 종교라는 언어 자체를 서술 개념으로 디스크립티브 컨셉트(Descriptive Concept)로 얘기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종교가)어떤 것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지, 본질에 대한 것은 아니라는 것으로 얘기를 하는 것이죠.    

‘고통’에 대한 본질 탐구는 공허만 불러와
‘고통’에 대한 의미를 어떻게 추출해 내느냐가 중요

본질을 뭐냐 물을 수 있고, 더 넘어가서 이게 왜 있느냐 물을 수 있어요. 그것이 본질적인 문제죠. 왜 있느냐. 하이데거가 얘기한 것처럼 왜 있는 것 있고 없는 것은 없을까? 그에 관한 무수한 얘기가 있었어요. 결국 그 얘기가 본질에 대한 추구라고 하는 것이 어떨 때 의미를 갖느냐 하면 현실 적합성 여부가 그 논의의 가치를 결정했어요. 현실 적합성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렇다면 본질이 뭐냐고 하는 것보다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존 양상, 현존의 실태에 대한 물음을 직접적으로 묻는 게 더 낫다는 것이죠. 내가 지금 고통을 받고 있는데 고통이 뭐냐 아무리 얘기를 해도 해답이 되질 않아요. '악마에게서 주어진 것이냐' '고통이란 게 본래부터 있는 것이냐' 아니면 '고통이 나에게로 우연하게 떨어졌느냐'   문제는 지금 직면하고 있는 고통의 의미를 내가 어떻게 추출해 내느냐가 중요한 것이거든요. 그래서 그 고통의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이거든요. 그것은 본질하고 상관없는 것이거든요. 고통은 있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때론 우리가 고통의 본질에 대해서는 말해도 고통을 어떻게 직면하느냐 하는 얘기는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공허해지죠.

그래서 종교라는 게 뭐냐 보다도 종교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느냐에 초점을 두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요. 종교는 있으니까요. 종교라고 카테고라이즈하는 어떤 것은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것이 별개적인 게 아니고, 경제, 역사, 정치에 다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인데 그런데 그래도 서술 개념으로 Descriptive(디스크립티브) 카테고리로 요것(테이블과 컵을 가리킴)은 다 물건임에도 요건 컵이라고, 그런데 컵이라고 하는 본질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깨지면 고만이니까. 그러나 편의를 위해서 디스크립티브 카테고리를 만들었을 때 여기는 물을 담을 수 있고 저기는 물을 담을 수 없다는 그 차이를 우리가 서술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것이나 마찬가지죠. 종교라는 디스크립티브 카테고리가 있다. 그때는 얘기할 수 있죠. 그러나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처음부터 그러면 컵하고 흙하고 구분이 안 되는 것이죠. 흙으로 빚어 만든 것인데 말이죠. 종교 논의를 어떤 자리에서 어떻게 시작해야 하느냐가 참 문제에요. 그런 자리에서 보면 얼마나 우리가 비생산적인 종교 논의를 하고 있을까? 그래서 자꾸 허공을 집고 있을까? 조금 다르게 보면 얼마나 쉬운 얘기인데 그런 느낌이 들어요.”   

- ‘고통’ 속에 있는 인간은 원초적 종교성에 편승해 초월적이고 무한한 신 이미지를 그리고, 그런 신을 요청하는 자세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분명 자신이 부딪히고, 극복해야 할 ‘고통’을 다른 누군가, 즉 신에게 맡기고는 자신은 손을 놓고 마는 ‘무책임성’을 유발시킵니다. 이렇듯 초월주의적 신관은 인간의 비인간화를 조장한다는 측면에서 ‘고통’을 ‘고통’ 그대로 직시하지 못하게 하는 부작용을 낳는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러니까 아주 간단히 말씀드리면 신을 믿는다는 그 믿음 자체가 인간을 게으르게 한다는 말이죠. 자기 할 일을 안 하게 하고, 신에게 다 맡기고 말이죠. 신의 도구화라는 말을 쓰거든요. Instrumentalisation of God(인스트루멘탈라이제이션 오브 갓). 고통에 직면할 때마다 요술램프처럼 싹 문지르면 딱딱 심부름 해주는 신으로 생각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신의 도구화라는 말을 씁니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것은 먼저 고통 앞에서 인간이 그것에 대한 책임 주체로서 자의식을 가지느냐 가지지 않느냐 하는 것이 초월자의 현존을 의식하는 것과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에요. 이른 바 종교가 어떻게 고통을 설명하고 있고 신자가 이를 어떻게 생활화 하는 데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드러낼 것이라고 생각해요.

특정 종교의 ‘고통’에 대한 설명, 신자들의 반응 좌우해
그리스도교, 책임 주체와 전지전능한 神 간 끊임없는 갈등 초래해

특정 종교가 고통이란 것이 뭐냐고 어떻게 설명하는 데 따라서 태도가 달라진다는 것이죠. 반드시 무책임한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고통과 직면해서 종교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 고통에 대한 책임 주체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고 말이지요. 하여간 종교가 고통을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람들이 고통의 의미를 뭐라고 하느냐 말이지요. 기독교에서 복잡한 게 그런 게 아닙니까? 예를 들면 죽음은 저주거든요. 하여간 죽음을 그리스도교처럼 무섭게 얘기하는 종교가 없어요. 처음부터 저주 받지 않았으면 죽음이 안 왔을 것이니까. 그렇게 서술이 되고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독특한 죽음관이 무엇이냐 하면 죽으라고 하는 것이에요. 죽음 권면의 문화에요. 그래서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는 얘기를 해요. 그 일련의 과정이 있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저주에서 벗어나질 못해요. 그렇게 고통을 설명하고 있거든요. 그러면서도 축복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 그런 것들이 전부 신에게 귀일 되는 것이죠. 그렇게 설명을 하게 되면 그것에 대한 반응이 달라진다구요. 그럼 절대적으로 (신에게)의존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 길 밖에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불교와 같은 경우는 설명이 다르거든요. 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심 때문에 고통이 생긴다고 보거든요. 너 자신이 욕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얘기를 하거든요. 그래서 내가 책임 주체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책임 주체라고 하면서 신은 전지전능한 분이라고 하거든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죠. 그래서 기독교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너무 잘 설명하려고 다듬어서 교리를 만들어가지고 스스로 교리에 묶여 가지고 말이죠. 논리성을 상실하니까 말이죠. 오히려 욥기처럼, 문학이죠. 문학적 상상력에서 생겨난 것이지만, ‘정말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이 고통에서 당신의 뜻을 찾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되었을 적에는 책임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죠. 문학적 이메지네이션에서 전개된 그런 반응 말고는 그리스도교는 철저하고 모순된 논리로 인간이 책임 주체일 수 있는 것일까 책임 주체가 되면 오만해 지는 것이 아닐까 그런 갈등을 끊임없이 낳게 하죠.

그런데 결국은 ‘당신의 신비 속에 있습니다’ 하고 내 할 일 하는 것 밖에 없거든요. 그게 해답 아니에요? 심지어 이런 예가 있어요.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고통을 설명하느냐 하는 문제로 귀결할 수밖에 없는데 대학 나온 상식적인 중견 사회인이 자기 자식이 병들었는데 병원에 안 갔거든요. 왜 그러냐 물으니 하나님이 병 들으면 기도하면 고쳐준다고 하셨는데 내가 병원에 (자식을)데려가면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 아니냐 하는 그런 주체가 되는 것이거든요. 지금 얘기하시는 그런 걱정이 맞죠. 문제는 특정 종교가 어떻게 고통을 설명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반응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어요.

다만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자의식은 스스로 부딪힌 사태에 대해서 책임 주체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특정 종교가 가지는 ‘고통’의 설명에 의해서 결정이 되어 버려요. (특정 종교가)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따라서 책임 주체가 되느냐 의존적으로 사느냐가 말이죠.”

- 그렇다면 있는 그대로의 ‘고통’을 직시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인간에게 요구되는 신관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자기가 경험하고 자기가 상상한 어떤 절대적인 존재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인격적인 신이든 우주적 원리든, 근원적으로 온전한 존재든 상관없이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것과의 대화라고 할까요. 그게 가능한 신이면 돼요. 어떤 신관이어야 하느냐? 인간과 더불어 논의할 수 있는 그런 신 말이죠. 의인화해서 얘기를 하는 것인데 그게 어쩌면 또 다르게 얘기하면 자기와 자기와의 대화라고 얘기할 수도 있을 것이에요. (고통이라는 게)‘이게 대체 왜 생겼냐?’ 하면서 스스로 끊임없이 묻는 것 있잖아요. 그러니까 물음을 제기하고, 그 문제를 가지고 끊임없이 논의할 수 있는, 적어도 내 상상의 구조 속에서 경험의 구조 속에서 말이죠. 그런 신이면 좋겠는데 일방적으로 복종을 해야 한다든지 일방적으로 수용해야 된다든지 그렇게 되면 그것은 아니죠. 그때 생겨지는 것이 뭐냐 하면 문자주의적인 맹목적인 추종이랄까요? 내가 추종하고 있는 문자와 다른 문자가 등장했을 적에 생기는 혼란 있잖아요. 자기의 파산을 경험하게 되고 말이죠.

초월주의적 신관에서 대화하는 존재로서의 신관 전환 요구돼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가 ‘고통’의 자리에서의 올바른 신관으로, 대화하는 존재로서의 신관이 요청된다고 말하고 있다. ⓒ베리타스 

때문에 끊임없이 얘기할 수 있는 존재, 이것이 해답이라고 스스로 확인했을 적에 살다보면 그 해답이 또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또 열어놓고 물어볼 수 있는 그런 존재 말이죠. 그런 존재로서의 신이 등장한다면 될 것 같은데 그리스도교의 신도 사실은 그런 존재거든요. 유대교 전통 속에서 본다면 신이 그렇죠,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게 신과 겨뤄서 이겼다는 얘기 아닌가요? 끊임없는 대화가 가능한 존재라는 것이죠.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는데 내가 네 신앙을 알았으니까 죽이지 말라고 하는 얘기도 종교사적 입장에서 보면 다른 것 아니거든요. 고대 근동 지방에 초생아 희생제의. 첫 아이를 낳으면 신에게 바친다고 하는, 그것도 원천적으로 따져 보면, 문화적으로 따져보면 초약권을 사제가 가지고 있었거든요. 사제의 자식이지, 신에게 바쳐야죠. 그런 것에 대한 저항이거든요. 신에 대한 저항이거든요. ‘난 못 받치겠습니다’ 하고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곧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이것이 옳다고 믿어서 내가 이렇게 행동 하겠습니다’ 하고 신에게 얘기했다는 것이죠. 그것이 신앙이라는 말이죠. 신이 이렇게 해라해서 그대로 좇아간 것이 아니라 말이에요. 그런 해석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아브라함을 신앙의 조상이라고 하는데 결국 신을 믿고 자기 마음대로 한 것이란 말이거든요. 신은 바치라고 했는데 틀림없이 넌 나를 이해해주고 사랑해 줄 것이라는 것이죠. 그런 신이 요청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 앞서 설명한 ‘종교’라는 관점에서 볼 때 고통의 자리에서 꼭 신관이 요청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짚어 볼 수 있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질문의 맥락하고는 상관없는 얘기이지만, 우리가 종교 언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종교 언어는 인식의 언어가 아니에요. 고백의 언어에요. 내가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을, 고백해서 생겨지는 리얼리티(Reality)를 서술하는 것이에요. 그런 현실을 서술하는 것이에요. 예를 들면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해요. 안 예뻐요. 미스코리아가 더 예뻐요. 그런데 이런 언어는 인식의 언어에요. 그런데 이 여자가 제일 예쁘다고 정말로 진실하게 얘기하면 이것은 고백의 언어에요. 대단히 주관적이고요. 자기 경험에서 얘기하는 것이거든요.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객관적인 보편성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정직성이에요. 내가 사랑하니까 예쁜 것입니다. 종교 언어는 그런 것이에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게 객관적으로 실증되어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내가 고백했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을 신앙하면서 살아가는 것이거든요. 삶의 현실 아니에요? 종교도 그런 삶의 현실이거든요. 그렇게 이해를 하면 신이 있어 어떻다는 게 아니라 사실은 인간의 고뇌가 신을 낳고 있는 것이에요. 그 고백 속에 신이 현존하고 있는 것이에요. 꾸며낸 환상이 아니에요. 실제 경험에서 생겨난 것이에요.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환상이 아니에요. 환상일 때는 끝나는 것이에요. 환상이 아닐 적에 지속이 되는 것이고요. 그게 삶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전부 서술의 언어로다가 표현을 하려 하죠. 심지어 신학 조차도요. 종교 언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봐요.”

- 인간이라는 게 사실의 언어로만 구성될 수 없고, 고백과 주관과 경험을 뺀 인간은 존재 할 수 없다는 면에서 옳은 말로 들립니다.

“저는 늘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신학이라고 하는 것도 가장 성숙한 신학은요. 신을 만들어내는 신학이거든요. 자꾸 다른 신을 만들어요. 그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고백을 해서 말이죠. 추론을 해서 논리적 귀결로 만드는 게 아니라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얘기해서 현대의 다신론은 신학자들이 만들어요. 그런데 그것이 좋은 얘기에요. 사실은요. 한국적 신학이 있을 수 있고, 본회퍼적인 신학이 있을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 신을 자꾸 만들어내야 한다는 말인가요?

“성숙한 신학은 신학을 만들어 내는 신학”

“신성 모독적이라고 얘기를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그게 저는 늘 종교를 얘기할 적에 우리 일상적인 삶의 경험과 다르지 않은 경험이라고 하거든요. 사랑의 경험이란 것을 그렇게 하고 있는데 종교도 마찬가지로 그래야 된다는 것이죠.”     

- 종교적 가르침에 의하면 고통은 크게 두 가지로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고통을 과거로 소급해 해명하려는 인과율적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의 보상 즉,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보는 목적론적 해석이 그것입니다. 해명되지 않는 ‘고통’에 신음하는 인간에게 이러한 종교적 가르침은 분명 등불로 작용할 것이라 여기면서도 두 가지 해석 모두 현재 겪는 ‘고통’이란 실체를 오히려 은폐시킬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상술한 바와 같이 ‘고통’에 대한 위의 해석들 중 어느 것 하나도 인간 ‘고통’의 문제를 온전히 해결해 줄 것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고통관들의 한계를 짚어주고, ‘고통’에 대해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있다면 말해 주십시오.

“굉장히 복합적인 질문입니다. 인과율적 해석과 목적론적 해석은 비록 개념적으로는 나뉠 수 있더라도 실제로는 그 둘이 명확히 구분이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것이 합쳐진다는 얘기를 하셨는데 결국 어떻게 해석되든 고통은 그것이 무의미하지 않은 것으로 수용될 적에 비로소 극복이 됩니다. 의미 없으면 절망하고 좌절하니까요. 하여간 의미를 추출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말이죠. 또 어떤 설명이든지 그것이 설명으로 받아들여지는 한 그 설명이 은폐할 별개의 고통이 따로 있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것을 은폐하지 않았느냐. 어떤 설명이든 고통은 고통대로 다 드러나는 것이죠. 고통의 문제에서 어떤 설명이 일부를 가려놓고 일부를 대답하는 것은 없을 것 같아요. 인과론적 설명이든 목적론적 설명이든 간에 일단 그 고통을 다 드러내는 것이지, 일부를 가리고 대답하고 있다고 보진 않아요. 다만 그 특정한 설명이 마땅치 않다고 보는 자리에서 너는 고통의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목적론적 입장에서 보면 인과론적 설명이 너는 고통을 다 드러내놓지 않느냐하고 특정한 자리에서는 그렇게 얘기를 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것은 밖에서 얘기하는 것이기에 또 다른 문제에요. 설명 자체가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비판에서 등장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하나의 고통에 대한 설명이 이뤄졌을 때 그것이 가지고 있는 고통관의 한계를 말하는 것은 자기 정당화를 위해 타자를 간섭하는 것이지, 옳은 얘기는 아닌 것 같아요. 그런 자리에서 본다면 모든 고통에 대한 설명은 상대적으로 보면 한계가 있다고 얘기 할지 몰라도 그 자리에서는 제각각 자기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당성을 가질만한 역사 문화적인 맥락 속에서 그런 대답이 출원했을 것이며. 그러니까 대답으로 수용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일단 승인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그러니까 다른 것을 제기하면서 우리 것이 대답이라든지 우리도 너희도 아닌 제3의 대답을 찾자 든지 하는 얘기는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단 해답이 이뤄졌다고 하면 그 해답 주체들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자기 적응성을 갖기 위해 또 다시 자기를 변주시켜 나갈 것이에요. 그래서 역사적으로 보면 교리라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해왔죠.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은 그들 스스로 다할 것이니까요.”   

- 인과율적 해석이 현재 고통을 겪는 나를 과거에 종속시키는 반면, 목적론적 해석은 현재 겪는 고통을 수단화시키는 면이 있다는 점에서 고통이란 ‘실체’를 은폐시킬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가 ‘고통’에 대한 잘못된 종교적 가르침으로, ‘고통’에서 면죄 받을 수 있다며 부도 수표를 남발하는 현대의 종교에 날선 비판을 가했다. ⓒ베리타스 

“그런데 문제는 인과율적인 해석이 함축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게 뭐냐. 과거의 원인이 지금의 현실을 낳는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그런 원인을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열려진 것입니다. 인과가 원인을 얘기해서 결과가 이렇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해답이 안되죠. 지금 삶이 어떻게 온전해지느냐. 또 다른 과를 만드는 인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를 함축하고 있거든요. 그것은 목적론적인 것이기도 하죠. (인과율과 목적론이)전혀 따로 구분되어 있질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거든요. 목적론적인 얘기도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얘기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살아왔다는 얘기는 이렇게 잘못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고통에 빠졌다는 얘기죠. 그러므로 이 고통을 어떻게 넘어서서 이렇게 살지 말아야 되느냐 하는 것이 목적론적인 얘기거든요. 사실 이런 구분이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것이죠. 어느 쪽에 방점을 두느냐 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이에요. 그러나 어떤 것도 그런 일련의 맥락을 간과하면 사실 해답 기능도 못하는 것이죠. 그런 점을 주목해 봤으면 좋겠어요.

우리도 그렇거든요. ‘누가 아프고 사고를 당하면 내가 뭐 잘못한 게 있었나’ 그런 얘기를 하거든요. 또 ‘거기 머물러 있으면 되나 앞으로 잘될 것이라고 생각해야지’ 그러고 있거든요. 무슨 굉장한 형이상학적인 논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아주 일상적으로요. 그렇게 살거든요. 신학적으로 설명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데도요. 그러면 종교인 아니면 살 수 없게요? 종교에 대한 아무런 의식 없이도 잘 살고 있거든요. 종교인들은 그 사람들이 미련하고 아직도 깨달음이 없다고 할지 몰라도 말이죠. 필부필부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현실을 갖는 것인데 다만 어떤 사람이 그것을 종교적인 스타일로 드러내면서 살 뿐인 것이죠. 어떤 사람들은 애써서 일하고 월급 받아 가면서 살면서 행복을 느끼면서 살구요. 어떤 사람은 막 벌어야 살잖아요. 그 차이죠. 종교인이 이런 사람들, 비종교인들이 저런 사람들이겠죠. 그렇게 이해하면 되는데 왜 그렇게 어렵게 복잡하게 이해하고 사나 하는 것이죠.”      

- 종교는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칭송을 받기도 하나 그에 못지않게 ‘고통’을 가중시키기도 한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종교가 ‘인간을 병약하게 만든다’거나 ‘민중의 아편’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은 ‘왜’ 일까요? 연장선상에서 ‘고통’에 대한 잘못된 종교적 가르침의 예가 있다면 무엇이고, 신앙인들이 ‘고통’을 대하는 기본적 자세는 어떠해야 한다고 봅니까?

“칭송 받을 때, 비난 받을 때 맥락이 다르거든요. 칭송 받을 때라고 했을 적에는 종교를 일단 긍정적으로 전제를 할 때에요. 비난 받을 때에는 종교를 부정적으로 전제를 하고 얘기하는 것이거든요. 전제가 달라요. 현상은 똑같은데 말이죠. 그런 것을 생각하고 싶고, 간단하게 칭송 받는다 비난받는다고 얘기할 수가 없어요. 어떤 전제 속에서 칭찬을, 어떤 전제 속에서 비난 받는다고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전제가 다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처음부터 부정적으로 보는데 하나도 긍정적일게 없죠. 이렇게 죽 검토해 보니까 부정적이라는 게 아니거든요.

인간이 ‘고통’에서 면죄 받을 수 있다는 부도 수표 남발 지적
소박하게 인간적 범주서 놓고 볼 때 인간성의 배신

그런데 중요한 것이 본질적으로 저는 종교가 고통과 연계해서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때는 종교가 고통의 의미 있음을 천명할 때고 부정적으로 평가 받을 때는 종교로 인해서 인간은 고통에서 면죄 받을 수 있다고 얘기할 적에 부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 같아요. 예수 믿으면 고통에서 벗어난다. 사업에 실패하지 않고, 대학에도 다 붙고, 지진 일어나도 넌 안 죽고, 고통에서 면죄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게 종교가 잘못 가르치는 것 같아요. 종교가 고통에 대해 제대로 가르칠 때는 언제냐 고통이 의미 있다, 그래서 수용하고 넘어서라고 가르칠 적에 긍정적인 것이죠. 그러나 고통에 대해서 면죄될 수 있다고 가르치면 참 잘못된 것 같아요. 인간은 고통에서 면죄될 수가 없어요. 예수도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간단한 것이죠. 그런데 현대 종교가 갖는 가장 큰 문제는요. 인간은 고통에서 면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부도 수표를 남발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사람들은 또 그것을 사요. 전 종교가 그래서 나쁘다는 게 아니라, 아주 소박하게 인간적인 범주에서 볼 때 인간성을 그렇게 배신할 수가 없단 말이에요. 종교라고 해서 문제가 아니라, 인간성의 배신이 문제란 말이죠. 어떤 사기꾼도 그런 사기를 칠 수가 없어요. 그렇게 얘기를 하고 싶어요.”    
 
-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활동할 당시 썩을 대로 썩은 가톨릭교회에서 면죄부를 발행하던 것과 유사한 모양으로 오늘날 종교가 고통에 관한 한 면죄 성격을 띠는 부도 수표를 남발하고 있다는 지적으로 이해하면 될까요?

“그것도 참 정직한 분노였을 것 같아요. 자기 자신에게 정직한 분노 말이죠. 제도적 권위가 손상되었다는 얘기도 아니고, 종교의 자유가 억압되었다는 얘기도 아니고, 정의감 이렇게도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아주 소박하게 (인간적인)분노가 있었을 것 같아요.”(계속) 

종교학자 정진홍 교수는

1937년 11월 23일생으로 서울대 종교학과와 서울대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미 샌프란시스코신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덕성여대 교수, 명지대 교수,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한국종교학연구회 회장, 한국종교학회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문화관광부 21세기 문화정책위원장,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 굿소사이어티 공동대표,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아산나눔재단 이사장으로,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울산대 석좌교수로 활동 중에 있다. 황조근정훈장(제17회 수당상 인문사회부문, 2008)을 수여했으며, 저서로는 『우주와 역사』 『종교학 서설』 『한국종교문화의 전개』 『종교문화의 이해』 『종교문화의 인식과 해석』 『하늘과 눈수와 상상』 『마당에는 때로 은빛 꽃이 핀다』 『경험과 기억』 『열림과 닫힘』 등이 있다.

[대담= 김진한 편집국장, 사진편집 및 정리= 이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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