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종교가 만병통치약 자처하면 아무 병도 못 고쳐”

[특집대담] 철학자 엄정식 한양대 석좌교수편(상)

삶/고통, 죽음 등은 종교의 출발이요 종말이라 할만큼 종교적 담론 안에서 자주 회자되는 주제들이다. 이러한 주제들과 관련해 종교들은 앞선 성인들의 문답에 근거해 각기 나름의 답을 제시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답들 중에는 삶의 다차원성을 무시한 채 보편성 혹은 전체성이란 이름으로 신앙하는 개개인의 ‘다양성’을 억눌러 왔던 것들도 분명 있었다. 종교가 때때로 인간 해방, 즉 인간 구원이 아닌 인간 억압의 기제로 작용해 왔다는 비판을 받아온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본지는 계사년 신년특집으로 그간 신앙인들이 비판적 성찰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의심없이 수용했던 삶/고통, 죽음 등에 관한 종교의 가르침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종교의 종교로서의 제 자리 찾기와 더불어 인간 해방의 길에 작은 등불을 비추고자 하는 시도다. 형식은 대담으로 진행되며, 내용은 파트별로 신학/철학/종교학 편으로 구성된다. -편집자주

▲엄정식 한양대 석좌교수(좌)와 본지 김진한 편집국장(우)이 ‘신년대담- 삶/고통, 죽음에 대해 묻다’에 참여하고 있다.

- 종교적 가르침을 놓고 볼 때, 고통의 문제는 매우 심각하고도 중요한 담론 중 하나일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삶을 가리켜 고해(苦海)라고까지 하지 않습니까? 철학적 관점에서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 ‘고통’은 어떤 지위를 갖고 있습니까?

“철학적 관점에서 고통을 포괄적으로 말하는 것은 좀 막연하고 추상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철학자나 철학적 사조에 따라 입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러셀(B. Russell)이 그의 [서양 철학사] 서문에서 지적한 것처럼 철학이 신학과 과학 중간쯤에 위치한다고 보았을 때 고통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생물학자나 의사라면 고통을 인간이 한 생명체로서 갖는 어떤 현상으로 보겠지만 종교인, 특히 승려나 성직자의 입장에서는 삶 그 자체가 ‘고통의 바다’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철학자라면 양자의 입장 사이의 어떤 지점에 서 있으리라고 판단됩니다. 과학적 성향이 있는 사람은 과학 쪽으로, 종교적 취향이 있는 사람은 종교 쪽으로 좀 더 가까이 가 있겠지만요. 여하튼 철학에서도 고통은 어느 정도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지만 그것을 완전히 극복한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고통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분명히 부정할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는 삶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그것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비유라면 모를까 저로서는 문자 그대로 ‘삶이 고해’라는 입장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제 생각에 삶은 고통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안락하고 유쾌한 부분도 많이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다면 ‘고통’이라는 표현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지요. 그늘이 양지를 더욱 빛나게 하는 측면이 있듯이 말이지요. 무엇보다 고통의 문제는 삶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근거로 해서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고통이란 개념이 유의미한 표현이라면 뭐가 아니란 뜻이 있어야 된단 말이죠. 우리가 괴로울 때는 인생 전반이 다 고통 덩어리로 느껴질 때도 있지만, 가령 자기가 원하던 대학에 합격한다든지, 취직이 되었거나 어떤 지위에 올랐다든지 할 때 그 희열은 말할 수 없는 것이거든요. 그렇다면 그것은 삶의 한 부분이 아닌가? 그래서 고통을 우리가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너무 과장해서도 안 된다는 입장입니다. 객관적 사싱을 왜고하는 것은 삶의 문제를 풀어가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질 않는다고 보고요. 또 삶 속에 고통의 위치와 위상, 비중이 어떠냐를 일관적으로 일반화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보았을 때, 저러고도 살 수가 있나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은 굉장히 행복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는 것이거든요.

이 문제를 철학적 관점에서 어떻게 다루는가 하는 것은 참 난제라고 봐요. 철학 역시 시대의 산물입니다. 고대 철학, 중세 철학, 근대 철학, 현대 철학의 입장에서 고통이나 죽음, 삶을 보면 이해가 달리 해석될 수 있고 강조하는 점이 다를 수 있도 있는데, 그런 관점을 우리가 염두에 두고 이 문제에 접근하면 앞으로 입체적 이야기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그렇다면 어느 지점(고대, 중세, 근대, 현대 철학 중에서)에서의 고통에 대한 이해가 오늘날 우리 한국사회 현실에서의 고통의 문제를 풀어갈 때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지금 얘기한 것처럼 고통의 위상의 무엇인지를 생각할 때, 저는 그것을 삶의 일부라고 보거든요. 반칙도 게임의 일부란 말이 있듯이 즐거움이나 행복이 그런 것처럼 고통이나 불행이 삶의 일부란 말입니다. 물론 고통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객관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삶의 일부란 말이고, 또 생각보다는 그것을 단순히 부정적으로만 볼 게 아니라 상당히 긍정적으로, 나아가 필요한 일부이기도 하다는 그런 관점을 저는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철학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을지는 조금씩 얘기를 더 풀어가면서 나오겠지만 고통을 굉장히 중요하다고 보는 관점을 우리는 스토아 학파의 입장에서 찾을 수 있고 그것이 또한 한국사회에서 고통의 문제를 풀어갈 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이론적으로는 기독교가 성립되었을 때 이 학파로부터 많은 이념을 받아들이기도 했지 않습니까?

▲엄정식 교수가 스토아 학파에서의 ‘고통’의 이해로 자신의 고통관을 풀어나가고 있다. 

스토아 학파에서의 고통 이해…“고통 부정하지 않아”
“고통을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는 자세 요구돼”

스토아 학파에서는 고통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또 단순히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만 삼지도 않습니다. 극복해야 하겠지만, 극복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기꺼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죠. 그런 비유가 어떨지 모르지만, 사람이 100프로 건강한 사람은 없어요. 이빨이 쑤시든지, 시력이 안 좋다든지, 어디가 가렵다든지 등 완전무결한 건강체는 있을 수 없어요. 그러나 어느 정도 아파도 보통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데 큰 지장이 없으면 병원에 갈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어떤 때는 어느 정도 아팠을 때 조금 더 생동감이나 긴장감이 생기고 아주 중병에 걸렸을 때는 삶 전반에 대한 성찰이나 반성도 일어날 때가 있잖아요. 마찬가지로 삶에서 고통의 위상은 그런 역할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고통을 어떻게 다루느냐, 관리하느냐에 따라서 오히려 그것이 있었던 게 더 좋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회상해 봐도 그 어려웠던 시절이 아름답게 여겨지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고통이 지금의 내 삶을 더욱 구성지게 하지는 않았는지, 그런 식으로 다각도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단 말입니다.

고통을 우리는 이와 같이 여러 맥락에서 다룰 수 있습니다. 좁게는 개인적 차원에서 육체적 통증 같은 것을 염두에 둘 수 있지만 자연적 재난이나 질병, 그 밖에 사회적 갈등이나 국가간의 전쟁 등 인류에 대한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고통에 이르기까지... 그런데 이러한 것을 일률적으로 다루기는 어렵겠지요. 이중에서 자연적인 것은 의학이나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극복될 수 있겠지만 인간적 갈등은 그 원인이 발생하지 않도록 수양이나 교육을 통해서 혹은 사회의 제도적 개선을 통해서 제거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 정리를 해보자면, 고통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볼 것은 아니고 그것이 나의 삶을 구성하는 일부분이 될 수 있는 것이고, 더 나아가 지금 현재 내가 있기까지 고통이 기여한 바가 없다고 할 수 없단 얘기이며, 극복되지 못할 고통에 대해서는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라는 말씀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볼 때 극복되지 못할 고통이 있을 수 있겠으나 극복이 가능한 고통에 있어서는 종교적 가르침이 상당한 기여를 한 바가 없지 않습니다. 종교는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는 고통이라면 지금의 삶의 자리에서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이러 저러한 가르침을 준수하거나 수행하면 된다는 가르침을 주어왔습니다. 극복될 수 있는 ‘고통’에 대한 철학적 가르침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조금 전에 스토아 학파를 얘기했지만, 네로 황제 때 노예출신의 철학자였던 에픽테토스의 말이 생각납니다.  그는 근위병의 사생아로 태어났으나 마커스 아우렐리우스가 가장 존경한 철학자이기도 했는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이 세상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내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에 의하면 이 두 부분의 구분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은 받아들이고, 어쩔 수 있는 부분은 극복한다는 게 삶의 지혜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대개 혼란이 어디서 오는가 하면 어쩔 수 있는 것은 놔두고, 어쩔 수 없는 것을 극복하려 할 때 삶이 지리멸렬해지고 혼란스러워 진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중세에 와서 이러한 사상에 영향을 받아  기도문으로 정리가 된 것이 있는데, 대강 이렇습니다. ‘하나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해낼 용기를 주시고, 할 수 없는 것은 기꺼이 포기할 체념을 주시고,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분별할 지혜를 주소서’라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회자되는 기도문이죠. 그것이 고통의 문제를 접근하는데 도움이 되는 틀인 것 같아요.

이러한 지혜는 한국적 상황에서 특히 절박하게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하면 된다’는 신념이 지나쳐서 할 수 없는 것도 무리하게 해내려 시도하고, 할 수 없으면 다른 사람들이나 사회, 국가를 탓하기도 하며, 남을 해치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반칙을 범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이것도 여의치 않으면 고생을 극복하고 능력을 기르는 대신 요행을 바라는 경향이 있는데, 여러 종교학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염려하듯이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이른바 ‘기복 신앙’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팽창하는 이유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제가 고통의 문제와 관련하여 자신이 지닌 능력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저는 이러한 입장이 단순히 ‘스토아적’이라기보다는 넓은 의미로 ‘철학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별의 지혜를 갖추려면 먼저 소크라테스적 자아의 인식이 전제 되어야 하거든요. 그것은 보편적인 차원의 고통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실존적 결단을 해야 한다는 의미로 그러한 자아 인식이 요구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누구냐를 물을 때 각자 다른 대답이 나올 것이고, 따라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도 달라질 수밖에 없지요. 거기에 고통을 염두에 두면 감당할 만한 혹은 감당해야 할 고통이 있고, 어쩔 수 없는 고통이 있다는 것이죠. 물론 인간의 문화사 자체가  어찌해볼 수 없다고 생각한 바로 그 한계를 극복하는 것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우리가 지혜롭다면 천방지축 날 뛸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리고 종교의 힘이, 가령 기독교나 불교, 힌두교나 이슬람교 등이 그 한계점을 드러내 주는데 기여했지만 동시에 그것을 초극할 수 있는 방법을 나름대로 제시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라는 역설적이고 모순에 가득찬 존재를 받아들임으로써 고통을 받아들이고 동시에 뛰어넘게 하는 힘을 불어넣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저는 양상은 다르지만 다른 종교들도 이러한 기재를 나름대로 갖추고 있다고 봅니다.

가령 기독교는 자아를 초월하여 고통을 초극한다는 방식으로, 불교은 자아를 내재화하여 고통을 무화하는 특징을 보인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고통이 나에게 장애가 될 수 없게 만드는데 공통점이 있다고 봅니다. 고통의 존재 이유가 뭘까요? 누구인가 나를 괴롭혀서 고통을 주려고 하는데 정작 내가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면, 가령 나를 감옥에 가둬놓았는데 여전히 나는 자유롭다면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말하자면 그런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죠. 고통을 다루고, 관리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철학적으로 표현을 하자면 자아 인식을 전제로 해야 이에 걸 맞는 대응 방식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스토아적 고통관 이해가 오히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솔직한 ‘고통’에 대한 이해가 될 수 있겠다는 말씀 같습니다. 솔직하게 고통을 대할 수 있게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있는 그대로요. 왜냐하면 객관적 사실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으면 거기서부터 도출된 당위는 잘못된 것일 수 있단 말이지요. 그런데 종교에서 그것을 어느 정도 과장할 수밖에 없는 것은 종교가 대중에게, 특히 고통받는 대주에게 우선적으로 다가가야 하기 때문임에 그럴 것입니다.  종교가 인간으로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며 억압 받고 고통 받는 자들에게 더 절박하게 다가가야 하기 때문에 약간 과장되는 부분이 있어야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과장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그게 그 사람들을 치유하는 데 바람직하지 못할 수도 있거든요.”

- 각 종교의 섣부른 종교적 가르침이 ‘고통’을 있는 그대로 못 보게 하는, 즉 있는 그대로의 ‘고통’을 은폐하여 삶을 제대로 못 살게 하는 역기능을 초래할 수도 있단 말씀인가요?   
 
“제가 조금 전에 질병의 예를 들었지만, 질병처럼 고통에도 분명히 자기 치유의 부분이 있는 것이거든요. 그 부분은 스스로 치유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잖아요. 우선적으로 자기 고통을 정확하게 인식하게 하고, 스스로 극복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게 하며, 그리고 안 되는 것은 받아들이게 하고 그리고는 그 나머지 부분을 도와줘야지. 그렇게 하지 않고 만병통치약의 자세를 취하면 오히려 그야말로 마약 소리를 듣게 되는 것 있죠. 그것으로는 아무 병도 못 고칠 뿐만 아니라 증세를 더욱 악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철학자이며 정치철학자인 칼 포퍼(Karl Popper)는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만병통치약은 아무 병도 못 고친다’고 말이지요. 내가 종교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염려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점이지요.

“종교가 만병통치약 자처하면 아무 병도 못 고쳐” 
 
또 한 가지 극약을 과다 복용하면 너무 의존적이 되어서 나중에는 자생력을 전혀 잃어버린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간 혹은 교파 간에 지나친 경쟁이 벌어져서, 그야말로 우리약이 더 좋다는 식으로 과다 선전을 하면 오히려 환자들을 양산하고 그 증세를 더 악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지금은 무한 경쟁의 시대인데 이런 사회에서는 당연히 낙오자가 나오게 마련이거든요. 우리는 다 평등하다, 잘났다는 인식 때문에 낙오자가 되었을 때 뭔가 자기가 좀 부족하다는 생각은 안하고 남의 탓을 한단 말이지요. 그러다 보면 자기 분수를 지켜서 정공법을 쓰려고 하지 않고 무슨 변칙을 쓰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죠.  오늘날 이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고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 같이 생각한다는 점을 주시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흔히 택하는 변칙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요행을 바라는 것이거든요. 범죄를 저지르고 싶지 않지만 요행을 바라는 이들 중에 종교를 찾는 사람들이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요행에 부응하는 것이 마치  고통에 대해 특효약을 주는 것 같은 자세를 취하면 고통을 해결하거나 극복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가중시키고 재생산 시킨다는 게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는 염려스러운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확고하고 튼튼한 자아의식에 기반한 자기 치유의 능력을 원천적으로 마멸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일부 종교계나 학계로부터 연예계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치유’에 지식인들이 이른바 ‘힐링’이라는 미명 아래 치유에만 몰두하고 대중들이 여기에 열광하는 것은 그러한 점에서 우려될 만한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고통을 너무 쉽게 처리하려는 안일함과 조급함의 표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철학적 통찰이라는 것은 결국은 소크라테스적 성찰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너 자신을 알라’는 말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네가 너로서 너답게 존재하라는 뜻이거든요. 남 흉내 내지 말고, 자신을 과소평가하거나 과대망상증에 빠지지 말라는 말이지요. 현대에는 사람들을 과대망상증에 걸리게 하는 정치적 제도와 쾌락의 광장으로 내몰아가는 경제적 구조, 그리고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문화적 양상이 현대인의 자아를 상실하게 하는 시대적 징후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너무 급속한 산업화와 민주화의 부작용으로 그 정도가 매우 심각하고 광범위 하단 말입니다. 그게 염려스럽습니다.”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자아를 성찰하는 자아 인식과 맞물려 있는 문제임을 확인한 엄 교수가 소크라테스의 격언 ‘너 자신을 알라’는 의미를 새삼 새기고 있다.  

- 종교에서는 ‘고통’을 가치중립적으로 여기기보다 인간의 의지적 요소를 투영해 악(惡)으로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때문에 이 ‘고통’을 극복해야 할 것으로 보고, 각기 수행 혹은 교리적 가르침을 준수할 것을 강요합니다. 철학에서도 ‘고통’은 극복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간주합니까?

“제 생각에 고통이 삶의 한 부분인 이상 단순히 극복의 대상이라고 간주해서는 안 되며, 또 그것을 극복하려고 한다고 해서 모두 극복되는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더구나 모든 고통이그 자체로서 본질적인 악은 아니며 따라서 모든 쾌락이 선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고통을 통해서 더 큰 선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오히려 그것을 회피할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맞서서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한다고 봅니다. 사실 수도자들이 수행에 임한다든가 일반 신앙인들에게 교리적 가르침을 준수하기를 강요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희곡에서 비극이 오히려 영혼의 정화에 더욱 효과적이듯이 고통이나 고난을 극복하려고 급급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삶의 완성을 위해서 역이용하는 지혜가 필요하겠지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고통에는 그 종류나 수준이 다양하기 때문에 접근하는 방식도 달라야 하겠지요. 어떤 의미로 인간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 ‘장애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 연민을 가지고 합심하고 협력해서 고통을 극복해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중에서도 까닭 없이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침팬지나 다른 짐승들, 심지어 식물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여기서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베푼다는 의미의 ‘사랑’이 아니라 고통을 공유한다는 의미로 ‘동참’ 혹은 ‘공감’한다는 자세가 필요하겠지요. 

한편, 고통이 자기 자신의 것일 때는 그것을 최소화하거나 회피하는데 급급하기보다는 당당히 맞서서 대적하고 필요하다면 그것을 역이용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요. 에너지 불변의 법칙처럼 고통 전체의 양이 일정하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나 자신이 감당하지 않으면 결국 다른 사람이나 후손이, 혹은 국가나 사회가 감당해야 하는 측면도 있으니까요. 심지어 인류가 이런 저런 이유로 고통을 회피하여 지은 죄를 홀로 감당하는 ‘십자가’의 상징적 고통도 있지 않습니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자꾸 ‘고통’ 받는 인간이 종교적 가르침을 구할까요? 듣기로는 현재 겪는 고통이 뭔가 해석이 되고, 설명이 되면 참을 만한데 그 고통이 납득이 안 될 때 가장 큰 고통이라고 합니다. 내가 지금 겪는 고통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고, 어떤 이유가 있어서 처절하리만큼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이냐에 대한 해명, 해석, 설명. 사실 이런 부분에 도움을 얻고자 종교적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그런데 주요 종교적 가르침을 살펴보면 고통의 현실에 직면한 우리는 고통을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는 현재 겪는 ‘고통’의 원인을 과거로 소급해 해명하려는 인과론적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 겪는 ‘고통’을 미래의 보상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이해하려는 목적론적 해석일 것입니다. 각각 인과율적 고통관, 목적론적 고통관으로 새길 수 있는데 이러한 고통관이 우리가 현실에서 부딪히는 ‘고통’의 문제를 온전히 해명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그런 종교적 가르침에서 고통 받는 인간이 일단은 평온을 찾는다고 생각해요. 모든 책임을 내가 질 것은 아니구나 하고 말이죠. 그것은 상당히 심리학적으로 봐도, 특히 상담심리학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기법이라고 봐요. 상대방을 일단 안정시킨다는 점에서 그렇지요. 그런데 사실 그 반대의 겨우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지요. 나만큼 다 열심히 노력하고 힘들게 살았는데 어떻게 나만 잘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고, 또 당연히 그래야 정직한 것이겠죠. 잘 될 때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안 될 때만 조상 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사실 저는 아직 어릴 때 부모님을 여의었는데, 주어진 상황에 비해서 일이 잘 풀린다는 느낌이 들 때는 ‘부모님의 음덕’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합리적으로 그것을 설명할 도리가 없거든요. 그런데 그러한 차원을 넘어 인과적 연쇄를 계속 추적하면 윤회설을 만날 수 있고 체인으로 추적해 나갈 수 있고, 궁극적 원인인 초월적 ‘창조주’의 개념을 도입할 수도 있겠지요. 이러한 우주론이 고통의 문제와 만나면 각기 인과율적 고통관과 목적론적 고통관으로 발전한 것 같은데, 모두 ‘보편적 인과론’이라는 진리를 형이상학적으로 전제하기 때문에 철학적으로는 논증하는데 부담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인과론의 보편성이나 초월적 존재의 예외성을 입증하는 것은 철학적으로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합리적으로 논증할 수 없는 것을 가장 효과적이고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것이 주로 상상과 상징에 호소하는 신화적 설명이거든요. 가령 아킬레우스 같은 용장이나 아프로디테와 같은  여신은 신들을 등장시키지 않으면 ‘합리적’으로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일단 우리 마음을 안심시키고 신념체계의 정합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합리적인 체계를 세워준다는 것이죠.

고통의 목적론과 인과론도 서로 굉장한 차이점을 지닌 것처럼 보이나 사실 공통점이 더 많다고 봅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표현에 나타나 있지요. 둘의 공통점이 결국 ‘참고 견디면 좋은 일이 올 것이다’라는 가르침으로 귀결되는 것이거든요. 설명하는 방식은 달라도 메시지는 같은 것이죠. 이생에서 아니면 저 세상에서라도 보상받기 위해서 어떤 의미에서 윤회를 동원하고 천국을 상정하면서 말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러한 신학적 혹은 종교적 설명의 공통점은 철학적으로 입증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히 우리에게 고통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는 희망과 인내와 용기를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네 개인에게 아니면 네 후손에서라도, 혹은 내세에 인류 전체나 모든 생명체에 고통 없는 세상이 찾아오리라는 그런 메시지를 여기 담고 있다는 것이죠. 그것은 정말 정신 병리학적으로도 좋고, 상담기법으로도 좋고, 그리고 철학적으로도 어차피 논증되지 않는 것을 구태여 거부할 필요는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을 너무 강하게 쓰면 인과론이든 목적론이든 둘 다 그야말로 패배주의나 숙명론으로 가게 될 위험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잘 알려진 것이지만 성 아우구스티스와 펠라기우스 사이에 유명한 신학 논쟁이 있지 않습니까? 구원에 관한 이 논쟁에서 펠라기우스는 상당히 합리적인 사람이라 우리가 얼마나 기도 잘하고, 합리적이고 선행을 많이 베푸는지에 따라 구원의 확률이 높아진다고 주장했지요. 그런데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렇게 안 보잖아요. 그것은 ‘하나님의 내심을 들여다보고 하는 소리다’라는 것이죠. 꼭 효도할 때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해야 한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이것을 좋아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것을 하면 난 효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부모님의 심중을 꿰뚫고 있다고 공언하는 셈이거든요.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을 간파하고, 그래서 구원과 은총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관할이지, 우리가 이러쿵 저러쿵 할 일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며 결국 그게 정통 신학의 ‘도그마’로 정해졌지요. 처분은 하나님께 맡겨드린다는, 그런 자세가 더 바람직한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저는 우리가 매사에 어느 정도 회의적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회의주의가 항상 나쁜 것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한계상황을 절감한다는 뜻이거든요. 그것이 신학적으라 종교적으로는 어떤 함축을 지니는지 잘 모르겠지만 철학적으로 는 인식론적으로나 가치론적으로 매우 주요한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우선 그 자체로서 설득력 있고 실제로 사회생활을 다는데 있어서도 겸허와 체념의 미덕을 터득하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너 자신을 알라’는 그 말이 하필이면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 벽에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신이 함직한 소리거든요.  물론 그것을 소크라테스는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깊은 성찰을 통해 영혼을 정화하라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만.” 

- 종교에서는 회의주의가 굉장히 엄격히 억압되어 왔고, 배제되어 왔었습니다. ‘고통’을 극복하는 믿음 수행에 있어서 물음이나 회의는 장애물 취급을 받아온 게 사실입니다. 지금 말씀하신 바에서 종교에서의 회의주의에 대해 성찰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 같습니다.

“근데 거기서 회의 하는 내용이나 대상이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회의할 여지도 없고,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에 대한 해석들이 있잖아요. 성경의 모든 내용이 의심할 여지없는 하나님 말씀이다. 거기까지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무수한 해석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아폴로 신전에서 신탁에서 신탁 받을 때도 그 신관들이 무녀가 방언을 내뱉으면 그것을 해석해 주거든요. 그런데 신관들이 제가 연구해 본 바에 의하면, 일곱이나 있었어요. 그래서 거기서 해석이 만장일치 되어야 그게 신탁의 얘기로 권위를 가졌다는 것이거든요. 신의 말씀을 우리가 제대로 다 해석할 수는 없다는 뜻이거든요. 그게 해석학의 어원이고요. 그것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건전한 회의 말이죠. 회의 자체를 위한 회의가 아니라, 좀 더 나은, 가까운 신의 메시지로 다가가기 위한 회의 있잖아요. 그것은 굉장히 바람직한 회의고, 고통을 이해하는 데에도 굉장히 도움이 된다고 보는 것이에요.”

- 종교적 가르침과는 달리 철학에서는 ‘고통’을 어떤 방법으로 극복할 것을 제안합니까? 에피쿠로스 학파를 위시해서 공리주의에 이르기까지 쾌락주의자들은 ‘고통’과 상반되는 ‘쾌락’을 추구함으로써 ‘고통’을 줄여나가는 방법을 택했는데 이는 ‘고통’이 지닌 비중을 무시한 것이 아닌가 조심스레 문제를 제기해 봅니다. 제 말인즉슨 ‘고통’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 ‘쾌락’을 놓고, 저울질을 하려는 것은 그 판 자체가 잘못 짜여 진 게 아니냐는 말입니다. ‘고통’을 대하는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우리 삶에 엄존해 있는 그 무거운 ‘고통’이란 짐을 회피하려는 도피주의적 태도는 아닐까요?

“제 생각에 질문이 좀 이상하게 들리는데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기보다, 쾌락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 때문에 오해가 발생한 것 같아요. ‘쾌락’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직감적이고 육체적인 관능적 쾌락을 연상하게 되잖아요. 술 마시고, 춤추고 실컷 먹고 말이지요. 그러나 에피쿠로스가 자기 제자들을 가르칠 때 ‘헤도네’(hedone)를 추구하라고 하는데, 쾌락주의(hedonism)의 어원이 되는 그 어휘의 뜻을 정확하게 짚어 보면 한 마디로 ‘흐뭇한 상태’입니다. 그것은 ‘감각의 평형 상태를 유지하는 즐거운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신의 모습이 이럴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습니다. 가령 깔깔 웃고, 쾌락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뭔가 부족한 사람이 보이는 모습이거든요. 무엇인가 갑자기 충족을 느낄 때 말이지요. 감각적이고 육체적이며 관능적인 쾌락을 경험할 때 그런 모습을 보이지 지성적이고 정신적이며 관념적인 즐거움을 경험할 때에는 흐뭇하고 균형 잡힌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의미의 쾌락을 그는 ‘헤도네’라고 부른 것이거든요.

그래서 이 사람은 쾌락을 두 종류로 나눠요. 고통을 수반하는 쾌락과 그렇지 않은 쾌락이 있는데 전자를 피하고 후자를 추구하라는 것이 핵심적인 사상입니다. 어떤 쾌락은 내가 경험한 후에 고통이 너무 많이 따라오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고통을 추구해 버린 것 있죠. 그런데 그것에 비해 고통을 수반하지 않는 쾌락이 있어요. 예를 들면 격조 높은 우정 같은 것 말이죠. 에피쿠로스는 결혼도 결국 고통이 더 많이 수반되는 쾌락이라고 보고 독신으로 은둔 생활을 했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쾌락주의라는 것을 통념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만약 현명한 쾌락주의자라면 무차별하게, 가령 한 시간 즐겁고 열흘 간 병드는 쾌락을 추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쾌락주의자가 아니고 ‘고통주의자’라고 해야겠지요.

공리주의(Utilitarianism)가 히도니즘(Hedonism)이라고 할 때에도 그런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쾌락주의는 동시에 행복주의라는 말이고, 개인적 차원에서 단순히 ‘안심입명(安心立命)’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그것을 극대화한다는 의미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이 공리주의의 이념입니다.       

따라서 우선 여기서 공리주의자들이 말하는 ‘쾌락’이란 넓은 의미의 ‘행복’과 같은 뜻이고 쾌락의 추구는 그만큼 상대적으로 고통을 감소한다는 뜻이니까 그러한 방법이 삶에서 고통이 지닌 비중을 소홀히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 싶네요. 밀(J. S. Mill)에 의하면 예수도 넓은 의미의 공리주의자라고 보니까요. 참고로 이미 언급하기도 했던 포퍼는 쾌락을 추구하기보다는 고통을 줄여가는 것이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제안하기도 합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그러한 방법을 선호합니다. ‘선’의 이름으로 ‘악’을 조장한다든지, 쾌락의 이름으로 고통을 추구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철학사를 보면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와 에픽테토스의 고행주의는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 같지만 깊이 음미해보면 결국 마음의 평정, 혹은 나름대로의 ‘구원’이나 ‘해탈’을 얻는 것이 궁극적 목표라고 할 수 있지요. 다만 이들 사이에 서로 접근하는 방식이나 강조하는 점이 다를 뿐이지요. 저는 이미 언급했다시피 삶에서 고통이 필요하고 또 내실 있는 삶을 위해서 소중한 자산이 되기도 한다는 입장입니다. 더구나 고통을 극복한다든지 회피하는데 치중한다면 살아가는데 있어서 노력을 경주하지 않고 요행을 바라거나 반칙을 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쾌락주의나 행복주의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공리주의자들은 어떤 의미로도 고통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다루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한 가지 흥미있는 일화가 생각납니다. 사도 바울이 AD 50년경에 아테네를 방문했을 때  두 학파가 치열하게 다투는 모습을 사도행전(17장 18절)에 전합니다. 그게 바로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가 싸우고 있던 것이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사실 깊이 자신들의 입장을 심화하면 서로 양립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보완 관계에 까지 있을 수 있었는데 이쪽은 고통을, 저쪽은 쾌락을 강조하다 보니 서로 과장하고 오해를 한 것이죠. 그 현장을 바울이 목격한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지금 보니까 그것은 한 동전의 양면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엄정식 교수는 인간 자아의 구조를 능력, 욕구, 상황이란 세 변으로 이뤄져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그러면서 이 세 변이 괴리 현상을 일으킬 때 바로 ‘고통’이 발생한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때문에 ‘고통’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세 변의 균형"에서 찾았다.

- ‘고통’에 대한 많은 얘기들이 오고 갔습니다. 교수님은 지금 ‘고통’을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고통’과 더불어 사는 것이 인간 실존임을 상기할 때, 현재 겪는 ‘고통’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고, 그 문제를 풀어나가는 실마리를 어디서 찾아낼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인간 실존을 말할 때 그것을 너무 보편적이고 추상적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실존은 개인적 차원에서의 결단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단은 항상 구체적인 상황에서 내려지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지금 저에게 있어서는 고통의 구조랄까 하는 것이 자아 인식의 구조하고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거든요. 가령 우리가 흔히 고통이라든지, 문제 상황에 부딪힐 때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을 실감하게 되잖아요. 그 질문과 함께 ‘내’가 갑자기 구체화되고, 클로즈업 된다는 것이죠. 그 전에는 나는 막연하지만 하나의 객체로서 살아갔는데 어떤 문제 상황, 고통을 당할 때 내가 갑자기 크게 확대되고 실체적인 주체로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고통에 따른 ‘문제 상황’이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을 때 발생하게 마련이거든요. 다시 이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욕구는 있는데 능력이 없다든지, 능력도 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경우로 분석이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그 문제 상황을 구체화 하면 ‘나’라는 존재가 하나의 욕구를 가지고 있는 존재임과 동시에 어느 정도의 능력이 있고, 또한 항상 구체적인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나 공동체에 대하여 당위나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입장에 처해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이것을 자각했을 때 ‘나’는 나의 모습이 나의 욕구와 능력과 당위라는 세 변으로 이뤄진 하나의 삼각형으로 이루어졌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누구인지 안다는 것은 이 삼각형의 크기와 형태의 구조를 안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내가 문제 상황에 처하여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괴리 현상을 일으켜서 이 삼각형이 너무 일그러졌거나 제대로 세 개의 각을 형성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고통이란 뭐냐 막연하게 그렇게 물을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내가 어떤 욕구가 있는데 능력이 부족하거나 능력이 있더라도 상황이 허락지 않을 때 나는 어떤 종류의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부딪힌 구체적 상황 하에 있어서 선택은 반드시 자신의 욕구와 능력과 당위가 지니는 함수의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여기서 고통은 욕구가 강할수록 더욱 커진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자아의 구조 뜯어보면 능력, 욕구, 상황이란 세 변으로 이뤄져 있어”
“세 변이 괴리 현상을 일으킬 때 고통이 발생해”
“고통의 문제 해법은…세 변의 균형을 맞추는 노력 전개해야”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해법은 뭘까요? 요구를 줄이거나 능력을 늘려서 균형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여의치 않으면 시간을 얻어서 상황이 호전되기를 기다리거나 그렇게 되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A분의 A가, 즉 능력(Ability)과 욕망(Ambition)이 1l이 되도록 균형을 맞출 때 행복하다고 봐요. 그랬을 때 다시 강조하지만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능력을 기르든지 아니면 욕구를 줄이든지 해서 상황에 적응하는 길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중에 어느 것이 적합한지는 일률적으로 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각자의 기질과 상황 그리고 이에 근거한 결단과 선택의 문제이니까요. 바람직한 삶에서 자아의 인식이 전제가 된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요.

기질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절대로 욕구를 줄이고 싶지를 않아 해요. 극단의 예가 알렉산더 같은 사람이죠. 하늘에는 태양이 하나인데 왜 땅에는 왕이 여럿인지 의문을 던질 정도로 그 사람은 능력을 길어서 정복의 길을 가는 것이거든요. 또 드라마틱하게 말하자면 다른 극단에 있는 사람이 디오게네스인데, 그는 통나무 속에 살면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 이상을 절대로 바라지 않았죠. 그러나 둘 다 자기가 군림하는 왕국의 왕들이거든요. 말하자면 자기를 극기를 통해서 제어한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능력을 극대화해서 천하를 다스린 사람이죠. 그런데 디오게네스가 알렉산더를 거느릴 수 없듯이 알렉산더가 디오게네스를 다스릴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조금 단순화해서 얘기했지만 우리는 각자가 자신의 삶을 자기답게 자기로서 살아가야하고 고통을 다루는 메카니즘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무엇보다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자아 성찰입니다. 특히 고통을 당하면 유난히 판단력이 흐려져져 분별력을 잃게 되잖아요. 그래서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차분하게 깊은 성찰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소크라테스적인 자아의 인식입니다. 내가 지금 도대체 누구인지를 끊임없이 묻는 거죠.

우리가 현대사회에서 굉장히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다고 봐요. 사람들이 단군 이래 제일 잘 살고 잘 먹고 있는데 왜 이러냐고들 하는데 그것은 역사적 내성이 없는 사람들의 얘기처럼 들립니다. 우리는 그동안 치열한 전투에 임하는 전사들처럼 앞만 보고 마구 치달려 왔다는 것입니다. 싸움에는 어느 정도 이겼는데 여기서 얻은 것들이 전리품에 불과한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왜 그동안 그토록 처절하게 싸웠는지 그리고 내가 얻어낸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에게는 전사들을 양산하는 ‘훈련’만 있었지, 중세적 의미로 ‘기사’들을 길러내는 진정한 의미의 교육이 없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 사회에서 유난히 리더십이나 창의력의 결핍을 느끼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 시대 자체가, 현대가 일반적으로 그러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특히 우리나라는 급속한 산업화와 민주화로 그게 집약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상황에 있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통과 불만과 갈등이 한꺼번에 분출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정치적, 제도적, 사회적 차원의 개선이 필요하겠지만 우리들 각자가 좀 더 깊이 성찰하고 반성하여 성숙한 시민이 되도록 애쓰는 것이 더욱 시급한 문제라고 봅니다.

저는 여기서 종교와 언론, 그리고 교육계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것이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인데, 여기서 조차 선정주의와 배금주의 등 세속적 가치의 추구에 여념이 없으면 밝은 미래를 기대하기가 어렵지요. 희망은 많이 가질수록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람직한 것이고 실현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그러므로 제대로 관리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 ‘고통’을 회피하는 방법 중 또 하나가 있다면 ‘자살’ 문제를 들 수 있는데 이것도 일종의 범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까?

“자살은 상당히 복잡한 문제라고 봅니다. 그것은 우선 자기가 자기 자신을 죽인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솔직히 말해서 우리에게 그렇게 할 권리가 어디 있습니까. 내 목숨은 필요에 따라 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사실 나의 어떤 부분이 순전히 나 자신의 것입니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잘못된 인간관, 말하자면 추상적인 개인주의와 무책임한 자유주의에 근거한 부분도 많다고 봅니다. 우리는 구태여 하나님을 일컫지 않더라도 우선 역사와 시대와 사회의 산물입니다. 부모와 친지와 동료를 들먹거리지 않고는 나를 규정할 방법조차 없습니다. 나는 한 때 괴롭기도 하겠지만 내 부모의 소중한 자식이며 내 나라의 자랑스러운 국민이기도 합니다. 법철학적으로 권리는 누구인가의 의무를 함축하는데 그러한 존재를 살해할 권리를 누가 준 것이며 누구의 의무입니까.

저로서는 자살은 무책임하고 다소 교활한 수법이라고 봅니다. 너무 쉽게 고통을 해소시키는 방법이라고 보지만 고통을 해소하는 주체가 존속되어야 하는데 일단 죽고나면 ‘해소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그것은 사실은 죽고 나면, 고통이나 쾌락도 없어지고 삶과 죽음의 의미도 살아진다고 봅니다. 그냥 무덤의 차디찬 고요만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이것을 우리는 좀 도 진지하고 차분하게 바라봐야 한다. 자살은 지나치게 확신에 찬 생사관을 반영하기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고통의 문제를 종교나 철학 뿐 아니라 병리학적 혹은 의료 윤리학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그 어떤 경우이든 이미 언급한 소크라테스의 자아인식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 고통의 문제를 풀어가는 하나의 방법론을 제시해 주셨는데 말하자면 욕구와 능력의 균형을 어떻게 맞추느냐가 관건이란 말씀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 고통을 자아성찰의 계기점이 될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결코 부정적으로만 바라봐선 안 된다는 것임도 재차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욕구와 능력에) 제가 하나 더 한 것은 ‘상황’입니다. 예들면 내가 어떤 여자를 좋아하고 그 여자도 나를 좋아하는데 우리 집안이 서로 반대하는 것 있잖아요. 그랬을 때 그 로미오와 줄리엣이니 얼마나 많아요. 그랬을 때 그 고통에 죽는 게 해법이 아니라, 그 때 자기가 적극적으로 무엇을 해보는 것 있잖아요. 필요하다면 우회작전, 포위작전을 쓰고 말이죠. 아버지의 친구에게 가서 호소하고, 아버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강한 사람을 찾아서 말이죠. 절대적으로 시간이 필요한 것이거든요. 그것이 해법이라는 것이죠. 딱 그 세 개의 삼각형으로 선명하게 보이는 것 있잖아요. 대체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구를 과다하게 확대 시키잖아요. 쾌락의 광장으로 우리를 막 끌어 들이잖아요. 일단은 먼저 내가 지나친 것을 분수에 안 맞게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먼저 점검해야 할 것 같아요. 내가 봐도 이건 당당하게 할 만하고 해야 된다고 생각될 때에는 밤을 새서 능력을 기르고, 인맥을 넓히는 게 따라와야 하는 것 있잖아요.

자살하는 사람에게도 이런 얘기를 좀 해주고 싶어요. 너무 무책임한 게 아니냐고요. 언제 한번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얘기인데 한 친구가 심각하게 자살을 고민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자살이 무엇이냐 물었어요. 그랬더니 친구가 ‘내가 스스로 결단을 내려서 날 죽이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너의 어떤 부분이 네 것이냐’고 물었거든요. 계속 물었어요. 입은 옷도 자기 것이 아니고, 유전 인자까지 다 들어가면 자기 것이라고 할 게 따로 없더라구요. 하나님까지 들먹거릴 필요 없이 말이죠. 따져보면 교육도 그렇고 전부 말이죠. ‘그것을 죽이는 것이야 네가’라고 말했죠. 사실 깊이 생각하면 자살은 성립이 안 되거든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에요. 무엇인가 상황에 대한 잘못된 판단, 부풀려진 인식에서 혹은 피해망상증이나 그런 것에 걸려있는 것이죠. 쿨하게 우리가 팩트를 분석해 보면 정말 씩 웃게 된다구요. 별 것 가지고 그랬냐고 말이죠. 그런 자세가 고통에 태클하는 자세라고 보거든요.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 고통이 완전히 소멸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머지 고통은 두려워하거나 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강조한 바와 같이 당당하게 맞이하여 자신의 삶속에 흡수하고 오히려 그것을 승화시켜 활력소로 역이용하는 것이 좋겠지요. 그러나 여기서 고통을 과장하거나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필요한 부분만 괴로워하는 성찰이 요구됩니다. 물론 앞서 언급했듯이 어떤 종류의 고통에 내가 구체적으로 당면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전제로 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계속)
 

철학자 엄정식 교수는

1942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철학과와 서울대학교 신문대학원을 졸업했으며, 국제 로타리장학생으로 도미해 웨인 주립대학교 인문학 석사학위와 미시간 주립대학교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아메리카학회 회장, 분석철학회 회장, 철학연구회 회장, 서강대학교 대학원장, 하버드대학교 철학과 풀브라이트 교환 교수, 철학문화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문진포럼 기획위원장,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및 한양대학교 석좌교수로 활동 중에 있다. 저서로는 『지혜의 윤리학』 『비트겐슈타인과 분석철학』 『확실성의 추구』 『분석과 신비』 『철학으로 가는 길』 『자아와 자유』 『비트겐슈타인의 사상』 『철학기행: 우리는 누구인가』 『당진일기』 『길을 묻는 철학자』 『나루터 가는 길』 『소크라테스, 인생에 답하다』 등이 있다.

[대담= 김진한 편집국장, 사진편집 및 정리= 이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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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폴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3집(2023년 12월)에 발표된 '폴 틸리히의 성령론: 경계의 신학에서의 "영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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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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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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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