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복음의 힘, 숙명론적 폐쇄적 인과율 고리 끊어내”

[특집대담] 신학자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편(상)

삶/고통, 죽음 등은 종교의 출발이요 종말이라 할만큼 종교적 담론 안에서 자주 회자되는 주제들이다. 이러한 주제들과 관련해 종교들은 앞선 성인들의 문답에 근거해 각기 나름의 답을 제시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답들 중에는 삶의 다차원성을 무시한 채 보편성 혹은 전체성이란 이름으로 신앙하는 개개인의 ‘다양성’을 억눌러 왔던 것들도 분명 있었다. 종교가 때때로 인간 해방, 즉 인간 구원이 아닌 인간 억압의 기제로 작용해 왔다는 비판을 받아온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본지는 계사년 신년특집으로 그간 신앙인들이 비판적 성찰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의심없이 수용했던 삶/고통, 죽음 등에 관한 종교의 가르침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종교의 종교로서의 제 자리 찾기와 더불어 인간 해방의 길에 작은 등불을 비추고자 하는 시도다. -편집자주

▲대담은 지난 23일 오후 4.19 공원 앞 작은 찻집에서 진행됐다. 좌측부터 김진한 편집국장과 신학자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본지 자문위원).

- 개인의 도덕적 악, 사회 구조적 악 나아가 자연적 악 등에 의해 고통으로 점철되는 것이 바로 우리네 인간사회가 아닐까합니다. 이러한 고통의 현실에 직면한 우리는 고통을 크게 두 가지로 이해하려 합니다. 하나는 고통의 원인을 과거로 소급해 해명하려는 인과율적 해석을 하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 겪는 고통을 수단, 즉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하는 목적론적 해석일 것입니다. 문제는 두 가지 해석 모두 현재 겪는 ‘고통’의 실체를 자칫 은폐시킬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해석 중 어떤 것을 적용하고자 한들 인간 ‘고통’의 현실이 온전히 극복된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이번 대담의 큰 주제가 신학, 종교학, 철학 세 분야에서 인생 속에 있는 고통, 고난 그리고 그것의 극점인 죽음을 주제로 한다니까 관심이 많습니다. 그 주제를 놓고 볼 때 사실 나는 신학의 영역이지만 종교학과 철학과 서로 중복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어요. 어쩔 수 없이 그것은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순수신학이라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죠.
 
오늘날 우리사회 전체는 소위 웰빙의 바람이 불어서 행복하고 건강하고 잘먹고 잘사는데 초점이 놓아지고 있어요. 오죽하면 종교 영역까지도 그리스도교 안에서의 메시지가 주로 축복에 초점이 맞춰지잖아요. 소위 삼박자 축복이 대표적으로 이를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가 성서 메시지의 일부분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물질적, 정신적, 영혼적 행복과 밝은 면만을 강조하고 실질적으로 우리 삶 속에 엄존하는 고난과 고통 그리고 죽음에 관한 설교나 메시지는 별로 하질 않고 있어요. 종교 내지 오늘날 현대인들이 그런 문제를 도리어 기피하고 도피하려는 무의식에 종교마저도 아부를 한다고 할까, 호응을 하는 것이어서 건강한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주제로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앞서 질문에서 악이라는 말을 쓸 때, 즉, 개인이 경험하는 고통의 근원, 어디서 악이 나오느냐고 할 때 개인적 악의 체험, 사회 속에서의 악의 체험, 자연 속의 악의 체험이란 말을 했는데 이게 전형적인 기독교적 발상이라고 봐요. 악은 선의 반대 개념인데 선, 악이라고 하는 말 속에는 이미 가치와 의미가 들어있잖아요. 더 나아가서 의지적 요소가 있단 말이죠. 그런데 ‘자연에서 우리가 악을 말할 수 있는가’ ‘자연의 악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반성을 해야 합니다. 실질적으로 화산이나 대홍수나 쓰나미를 통해 인간이 고통을 당하고, 아픔을 겪을 때 그것이 신의 진노나 징벌이라고 쉽게 해석을 한다 할지 이런 것은 기독교가 모든 것을 선악의 이분법이라든지 인격적인 자신의 사고습관을 자연에까지 투사해서 그렇게 보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자연 속에는 악이 없어요. 자연은 글자 그대로 자연(自然)일 뿐이죠. 홍수가 나거나 쓰나미가 나거나 화산이 터지면 크리스천도 무슬림도 무신론자도 다 재난에 휩쓸리니까요. 일단 자연 속에는 자연 그 자체는 악이 없다라고 보고 싶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 인간이 자연의 영역까지 관여를 해가지고 그것을 통제하고, (우리가 자연의 분노라는 표현을 쓰지만)재난을 일으킴으로써 생기는 자연으로 말미암은 인간의 고통과 고난 때문에 자연으로부터 악을 추구하면 결국 인간의 어떤 의지와 도덕적 책임 문제가 거기에 따르게 되니까 그런 면에서야 이해를 할 수 있으나 일단 자연 그 자체는 악이 없다고 봐요. 동양 고전에서도 그래요. 천지인은 불인하다. 인간은 인간이 가장 존엄하다고 보지만, 하늘과 땅, 자연은 어질지 않다는 것이거든요. 옛날 시대에 제사를 지낼 때, 지푸라기로 사람 형상을 따가지고 제사를 지낸 뒤 제사 끝내면 그 사람 모습의 지푸라기가 길바닥에 버려지고 태워지듯이 자연은 설혹 (지푸라기가)사람일지라도 그들과 똑같이 대한다는 옛말이 있듯이 여하튼 그렇습니다.

▲김경재 교수는 본격적인 대담을 진행 함에 있어 대전제를 깔고 시작했다. 전제인 즉, 함석헌 선생이나 간디가 썼던 명제인 “생명이 있는 곳에 고난이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일단 말씀하신 것 속에서는 두 부분이 중요하네요. 사회적, 개인적 악이 어디서 왜 발생했느냐 하는 원인을 캐내서 그것이 인과응보적 사상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그 원인을 캐들어가서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악을 극복하려는 입장과 미래지향적인 것을 얘기하셨는데 그것도 악을 극복하고 해석하려는 하나의 인간적인 종교적인 심성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인간이 악과 고난과 고통을 당할 때 나의 목회 경험에서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납득할 수 없다는 데서 제일 큰 고통이 오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리적으로라도 설명이 되면 좀 고통이 덜해요. 아무런 설명과 이해가 안되는 고통을 당할 때 인간이 겪는 고통의 아픔은 배가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과율적인 과거 원인 규명적인 고난과 고통의 극복이나 미래지향적 사고나 고난과 고통을 당하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종교적인 통찰이고 지혜죠. 전 그 점에 있어서 동전의 앞, 뒤와 같이 둘다 다 귀중하고 필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먼저 언어에 있어서 고통과 고난이란 말이 혼재가 되는데 나는 고통보다는 고난이 종교적으로 더 적절한 말이라고 봐요. 고통은 글자 그대로 고가 올때 우리가 느끼는 통증을 말하는 것이고. 굉장히 심리적이고 감각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것이라면, 고난은 고가 올때 난처한, 험난한 정신적 육체적인 모든 것을 다 포괄하니까요. 가령 함석헌 선생이나 간디는 이렇게 대명제를 설정했어요. "생명이 있는 곳에 고통이 있다." "생명이 있는 곳에 고난이 있다" 이것이 오늘 나의 대담 전체의 제1명제로 받아들여요.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탐욕과 욕심과 개인적인 집단적인 이기심 때문에 고통과 고난을 가중시킬 수 있고, 증폭시킬 수도 있고 그것이 폭력으로 변할 수 있지만 하여튼 생명으로 존재를 하려는 곳에는 자연스럽게 고난이나 고통이란게 있기 마련이다. 이것을 대전제로 하고서 둘째 단계로 들어가야 한다고 봐요.

일부 기독교인들 고난의 책임 신에게로 돌려
고통·고난에 대한 도피주의 행태 지적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먼저 고통과 고난의 모든 책임을 하나님에게 돌리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또 선의 힘과 악의 힘.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으로 말하자면 선신과 악신이 있어서 사탄의 파워와 성령적 파워의 아마겟돈적인 전쟁의 결과로 악과 고통이 우리 개인과 사회 속에 있다고 해서 인간의 자기 책임과 공동체 책임을 못 보는 결론에 떨어지게 됩니다. 또 고통과 고난의 현실성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가벼운 사고는 고난, 고통 도피주의를 발생시킬 수 있고, 외부에 신에게 운명에게 역사에게 전가시킴으로써 결국 인간이 그저 내 책임은 없고, 인간이 약하기 때문에 고난의 희생자가 되었을 뿐이다라는 무의식적인 자기 도피를 일으키게 한다고 봐요.

또 "생명이 있는 곳에 고난이 있기 마련이다"한 것은 왜 그러냐고 할 때 나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고난이 발생한다고 봐요. 우선 인간이 인격적 가치에 눈을 뜨게 되었다는 데 있어요. 단순히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증식하는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라, 살아가되 진, 선, 미를 추구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봐요. 보다 더 진실한 삶을 추구하려고 발버둥을 치기 때문에 그것이 좌절되는 어떤 힘 앞에서 고통과 고난을 느끼는 게 아닌가 생각하거든요. 단순히 생물학적 고통이라고 하면 그것은 일반 동물하고 똑같겠죠. 일반 동물도 병에 걸리면 통증을 느끼듯이 인간도 질병으로 인한 고통으로 통증을 느낄 수 있죠. 물론 그런 고통도 고통이죠. 근데 그런 고통 이외에 고통을 안당해도 될만한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고, 고통이 타자에 가해져서 받는 고통과 고난이 있는데 여하튼 고난과 고통은 인간이 단순한 생물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발돋움 때문에 거기에 부딪히는 역풍이 고난으로, 고통으로 감지된다는 것이에요. 공기가 있는데 폭풍이 불어치는 것은 공기의 이동 때문에 내가 공기를 저항해서 힘있게 앞으로 달려가면 달려갈수록 공기의 저항을 받듯이 생명 혹은 창조 질서 속에는 우리가 신앙고백적으로 말하면 본래적인 창조 질서 혹은 생명 질서가 있는데 그것을 인간이 의지적으로,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혹은 누적된 역사에 의해서 그것이 뒤틀려지고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려는 과정 가운데서 오는 고통, 그것의 누적이 나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고통. 이런 것이 인간의 고통사 속에서 훨씬 더 크다고 봅니다.

가령 근대사에서 김구 선생을 비롯해 위대한 삶을 살아왔던 모든 분들도 편안하게 자연에 순응해서 살려고 작정했더라면, 그 분들이 고난과 고통을 겪지 않았어도 되죠. 그 분들이 민족이네 나라네 독립이네 국가네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인간이 가치를 추구하고, 의미를 추구하고, 뜻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현실에 대해서 저항하고 극복하고 보다 바람직한 생명 질서로 회복을 하려는 몸부림 때문에 고난이 그들에게 오는 것이죠. 그래서 고난은 그런 인간의 가치와 의미 추구, 뜻 추구, 의지적 결단 문제와 굉장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을 해요. 인간은 그러므로 고난과 고통의 피해자이면서도 가해자일 수 있는 양면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말이죠. 그것을 봐야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의 문제를 직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고통’은 생명의 원리라는 대전제를 깔고 고통의 문제를 논하셨는데 그렇다면 고통이란 선도 악도 아닌 자연과 같이 중립적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인가요? 결을 같이 해서 고통을 인격화하지 말라는 말인지요?

'고통, 혹은 고난은 생명의한 원리'(간디, 함석헌)임을 강조하는 의미는 다음같습니다. 첫째, 물질단계에서 생명단계로, 생물학적 단계에서 정신적 단계로, 단순히 정신심리학적 생명단계에서 영성적 생명단계에로 생명의 질적 체험과  생명현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고난’과 ‘고통’이 동반되고 그것을 감당하면서 돌파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가령 엔트로피 물리법칙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지연스런 물질 분자들 구성체가  무질서로 변화하는 것을 극복하고 유기체적 생명체로 지탱되기 위해서 몸이라는 생명은 끊임없이 무질서화에 맞서 싸우면서 고통·고난을 받는 것이지요.  동식물적 생명단계가 도덕- 정신적  가치세계를 지키고 이루기 위해서는 고통과 고난을 감내해야 합니다. 시련과 핍박을 견디고 영혼의 고귀함을 지키려면 순교자는 고난과 고통을 이겨내고 감당해야 함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이 있는 곳엔 고통,고난이 있다"는  근본 전제가 성립된다는 말입니다. 고난과 고통이 생명 한복판에 현존하는 것을 가볍게 회피하려는 인생관과 세계관을 비판하는 자세이지요.

- 고통과 더불어 사는 것이 인간의 존재 방식이라는 말로 정리를 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다음으로 제기될 수 있는 물음으로는 고통을 대하는 자세가 아닐까요? 인간의 삶에 엄존해 있는 고통을 그저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하는 물음으로 좁혀 볼 수 있겠습니다.

▲김경재 교수는 불교와 기독교가 연꽃 위 평화로운 미소의 고다마 붓다와 십자가에서의 일그러진 얼굴의 예수상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이 고난·고통을 대하는 자세가 다르다고 설명했다. 장공 김재준 목사의 말을 빌려 "이 두 상징이 고난을 대하는 종교의 두 패러다임을 보여주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중요한 질문입니다.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특징이 거기서 드러난다고 보는데 불교는 불국토(佛國土)를 실현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한다고 보지는 않아요. 불교의 근본 종지를 꿰뚫고 보면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도리어 고통을 고통이라고 느끼는 인간의 아집과 집착 때문에 생긴다고 봐요. 불교가 말하는 삼라만물의 인과연에 인해서 모든 만물이 관계되고 발생하고 생기는 인연생기법을 꿰뚫어 직시하면 그것이 해탈인데 해탈을 해버리면 사회 속의 불의한 구조나 제도나 악의 현실이 있더라도 그것에 매여서 좌지우지 당하지 아니하고 초탈하게 살 수 있는 것이죠. 그런 쪽으로 많이 강조를 합니다. 불교쪽에서는 말이죠. 불교를 나타내는 상징 중 연꽃이 있습니다. 고통의 현실에서 마치 연꽃이 뿌리를 내리는 더러운 오물 밑바닥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합니다. 거기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요. 또 물결이 출렁이는 역사의 시간의 소요와 요동에도 물들지 말고, 진흙에 뿌리를 내리고 줄기로 수중을 뚫고 나와서 수면 위로 연꽃을 피우란 말이거든요. 인간의 삶은 그래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런 면을 존경하면서도 연꽃이라는게 뿌리가 건강하지 못하고 줄기가 통과하는 물이 오염되어 있으면 꽃도 아름답게 필 수 없으니까 연꽃을 아름다운 꽃으로 피우지 못하게 하는 병든 토양, 병든 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죠. 고통과 고난의 현실이 왜 일어나는가 하는 고요한 명상과 선적 수행을 통해서 고난과 고난의 현실을 도리어 터득함으로써 일체의 소요로부터 자유로워라 하는 마음의 평정, 마음의 해탈 못지 않게 고통의 현실을 일으키는 개인적, 사회적, 제도적 악의 요소를 제거해서 지금 고통 당하고 있는 생명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이 내 마음의 안심입명을 추구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보는게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그렇게 표현을 해요. 늘 보다 더 건강하고 아름다운, 소위 샬롬적인, 생명과 평화와 정의가 실현되는 생명 현실을 지향해서 노력하고 추구해야 한다고 보죠. 그래야 할 당위적인 세상, 당위적인 생명 상태를 적극적으로 지향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쪽이 더 강한셈입니다. 그래서 그런 노력을 해나가는 속에서 더욱 고통과 고난이 증폭되지 않느냐는 비난을 받기도 하죠. 이야기가 너무 형이상학적 쪽으로 흘러들어갔는데 불교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는 고다마 붓다는 연꽃 위에서 고요하게 해탈의 경지에 들어간 미소의 모습이란 말이에요. 불국사의 불교의 상징이 연 위에 앉아있는 해탈하는 고요한 평화의 모습이죠. 반면 기독교는 33세의 젊은이가 십자가 위에서 울부짖고 고통당하는 십자가 고상을 종교적 상징으로 삼았단 말이에요. 장공 김재준 목사는 이런 표현을 썼어요. 고다마 붓다의 연 위에 앉아 있는 미소의 포즈, 십자가에서의 예수의 고난의 포즈. 두 포즈는 인간의 종교의 두 패러다임의 대표적인 특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다고 했는데 여하튼 기독교는 고난의 현실에 대해서 그것이 본래적인 창조의 축복의 모습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인간의 개인적, 집단적 악에 의해서 축적되고 형성된 비생명적 폭력과 억압 앞에서 저항하고 극복하려는 종교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 뚜렷해요.

얼마 전 폴 니터가 와서 불교 대표와 대담을 했는데 거기서도 분명히 드러났거든요. 양쪽에서 서로 존경하고 배울 것은 배우지만 서로간 특성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볼 때 한국 기독교는 대단히 성경적이고 복음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이라고 말은 많이 하는데 한국인의 많은 사람들이 현실적으로는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린 아이들의 교육현실, 생계현실 속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현실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고난 극복의 노력, 고난을 유발시키는 사회적, 개인적, 집단적 폭력과 은폐된 악에 대한 저항의식이 대단히 약화된 개신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것은 종교, 특히 기독교가 현실에 눈을 돌리고 종교가 소위 부르주아화 해 가고 우리만 행복하고 축복 받으면 됐지 하는 것에 머물러서 입니다. 삶 속에, 생명 속에 고난을 근원적으로 극복하려는 성서적인, 예언자적인 정신을 소홀히 한게 아닌가 합니다.”

- 숙명론을 조장하여 인간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한 종교적 가르침을 말하자면 통상 사장되었다고 보는 카스트제도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인도에 가서 절감하게 느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인도는 위대한 종교 국가요, 철학의 국가로 아는데 현실적으로 인도를 가보면 불교를 탄생시킨 나라에 불교는 거의 없구요. 통속적인 힌두교와 전통적인 일종의 무속종교라고 볼 수 있는 그런 종교 속에서 (이미 헌법이나 지성사에 의해서는 극복되었다 정복되었다고 말하는)고대 브라만족의 카스트제도가 생활 속에 너무 깊이 깊이 뿌리를 내려가지고 인도 사회가 정말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을까 우려가 됩니다. 겉으로 보면 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그들은 굉장히 삶의 질이 높아졌다고 미사여구를 늘어놓는데 인도 인구 10억 중 3,4억의 삶은 사실 너무 비참해요. 그 비참한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서는 문제가 많다고 봅니다. 오늘날 인도 사회 뉴스를 보자면 버스 속에서 여학생을 겁탈하는 강간 사건이 자꾸 터져서 인도 사회를 소란하게 하고 있습니다. 문명 국가라는 나라에서 왜 그러는 것일까요? 사회 구조적인 인간악에 대한 현실을 직시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보거든요. 인도 사회를 그렇게 만든 근본을 보니까 카스트제도의 업보설이 그들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더라구요.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업보의 결과를 통해 윤회하는 과정이니까. 내가 오늘 카스트제도 맨 밑바닥의 가정에 태어나서 경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리고 교육적으로 모든 이런 고통과 고난을 받는 것은 자기 생애의 과거가 그랬든지 지난 조상들이 그랬든지 그런 업보 때문에 지금은 이 시대에는 그것을 감내하는 시기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없어요. 말하자면 숙명론에 빠지는 것이죠.   

“복음의 힘, 숙명론적 폐쇄적 인과율 고리 끊어내”

▲김경재 교수는 과거가 현재를 완전히 구속하거나 제한하는 숙명론적 폐쇄적 인과율을 끊어내는 힘이 바로 “복음의 힘”임을 역설했다.

그래서 종교가 잘못 가르치면 그렇게 되어버려요. 아시아 종교들 중 상당수가 현재 인간의 개인과 가정과 집단에 내리 덮이는 소위 악의 힘, 고통과 고난을 운명과 숙명론으로, 조상의 탓으로, 종교적 업보설로 그것을 그저 인내하도록 가르치는 그런 요소가 없지 않아 있는데 나는 기독교가 들어와서 깨트려야 할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그것이라고 봅니다.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이 이성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정적 요소가 창조 질서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큰 문제가 돼요. 그러나 인간의 이기심이나 집단적 지배 욕망 등이 증폭되어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김으로써 타자에게 고통과 악을 가중시키는 것을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이거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반신앙적이고, 비성경적이죠. 그런 것에 대해서는 초대 우리 한국 기독교의 태도가 옳았다고 봐요. 사주팔자도 부정하고, 아무튼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새 역사를 내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나 만들어낼 수 있다. 과거가 현재를 완전 구속하거나 제한할 수 없다. 그것을 끊어내는 힘이 복음의 힘이라고 말이죠. 새로운 생명 질서를 창조해야 하고 악은 극복되어야 할 부정적 측면이 분명히 있다고 뚜렷하게 자각하고 가르치는 종교가 기독교라고 봅니다.”

- 지금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뿌리깊은 업보설, 인과응보적 사고를 끊어내는 것이 복음의 힘이었는데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성서에서 소개되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이 이야기를 가만히 살펴보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예상치 못한 전혀 다른 제3의 답변을 주십니다. 현재 겪는 고통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하는 목적론적 해석을 제시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고난’에 대한 인과응보적 해석을 폐지하신 것으로 봐도 될까요? 

“중요한 점인데 소위 도덕 세계나 윤리학이나 종교학에서 가장 문제시 되는 것이 인과응보설인데 모든 종교 속에 그것이 있습니다. 인과응보(因果應報). 원인을 제공하는 행동과 생각을 했으면 거기에 합당한 과가 생기는 것이고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죠. 인과응보의 사상 속에는 인간의 도덕적인 선악 행위를 주관하고 감독하는 절대자 신, 브라만, 부처님, 염라대왕이 있어서 그런 악한 행위를 하는 사람을 마치 판검사가 다 조사를 해서 기록에 남겼다가 죽은 다음 사후에 그에 대한 죄값을 선고를 내린다. 이런 관점에서 인과응보란 그에 응하는 보답 혹은 보복을 한다는 의미로도 새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문제에 관해 신구약 성경을 보면 인과응보적인 요소에서 살려야 할 점은 살리면서 그것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이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성서 전통 신앙에서는 쭉 흘러 내려왔습니다. 대표적으로 구약에서 이 문제를 가장 고민한 것이 지혜문학 욥기죠. 욥기서의 핵심은 왜 선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과 행복을 보장하는 율법을 주셨는데 율법대로 철저하게 준행해서 사는 사람이 더 비극과 고통을 겪고,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 없는 것 같이 행동하고 사는 사람이 더 잘먹고 잘사느냐는 것에 대한 질문이거든요. 그것을 드라마틱하게 욥이라고 하는 가정의 파산을 통해 드라마로 희곡화 한 것이죠. 욥의 세 친구가 나타나서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문제가 그것입니다. 욥 너 자신이 깨끗한지 모르지만 너도 모르는 사이에 네 자녀들이 무의식적으로 죄를 지은게 있지 않겠느냐. 어떻게 하나님 앞에 네가 자신만만하고 깨끗하다고 절대 선하고 옳았다고 할 수 있느냐.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분이 아니다. 뭔가 네 가족이나 자녀 속에, 오늘 네가 당하는 고통의 원인을, 말하자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런 징벌을 받는다는 것이란 합니다. 끝까지 인과응보론을 주장하는 것이에요. 그 논리를 가지고 추궁해 들어가는 거에요.

‘고통’에 대한 인과율적 해석 폐지해야 하는가?!
조건 지어진 인간의 특수성 고려할 때 여전히 유효

그런데 욥이 저항하는 것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돌아가신 문익환 선생에게 구약신학을 배운 것 중 사실 그거 하나만 남아요. 욥은 친구들의 비난을 거절한 게 아니라, 내가 지금 고통을 당하는 이유가 내가 깨끗하고 선하고 내 자손들이 흠없는 데도 고통을 당하는 것이 억울하다고 항변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욥의 차원은 한 단계 높은데 가정의 고통과 고난을 과거의 죄에 대한 신의 징벌로만 해석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깨끗하다는 말이 아니라요. 그게 묘한 면이 있죠. 뒤집어서 말하면 욥은 하나님이 그렇게 인간의 과거의 죄를 꼬박꼬박 다 기억해 가지고 아주 엄정한 대심문관처럼 판검사처럼 연약한 피조물들의 죗값을 꼬장꼬장 묻고 따지는 그런 하나님이라고 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죠. 다른 이유가 있을텐데 그 이유를 지금 당장은 모르니까 내가 죽은 다음에 가죽의 옷을 벗어버린 다음에라도 하나님 왜 그러셨습니까 내가 하나님께 한번 여쭤보겠다는 것이 욥기의 핵심이란 말이죠. 다시 말하면 인과응보설을 완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과응보의 한계를 설정하고 고난이 인간 삶 속에 있는 것은 단순한 도덕적 인과응보 이상의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을 기독교는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까 말한 예수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역설적 표현이기도 하고요. 결국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더 높은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 이야기 말하고자 함 아니겠어요.

문익환 목사는 뭐라고 말하냐 하면 마지막에 욥이 종교적 신비체험을 하는 찰나의 순간에 왜 나의 가문에 납득이 안되는, 도덕적 합리주의로서는 이해가 안되는 일들이 오니까 그의 항변과 질문이 더 이상 질문이 되지 않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욥의 마지막 고백이 내가 이제까지는 주님에 대해서 귀로만 들어왔고 알지도 못하는 소리로 하나님께 대들고 따졌는데 내가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오니 내가 참회하나이다라는 고백을 하잖아요. 소위 인과응보라는 것을 오늘로 말하면 인과율입니다. 물리학에서의 원인과 결과에서처럼 도덕적 세계에서 원인과 결과. 인과론이거든요. 종교와 기독교가 말하려는 것은 인간의 삶 속에서 고난과 악을 인과율적으로 풀어서 해결할 것은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사회 속에 축적된 악, 신의 이름을 가지고 권력을 독차지 하는 것에 대해 보다 인간적 삶을 위한 제도적 실현을 하라는 것입니다.  최근에 보니까 프랑스 혁명 일어날 당시 루이 14,15세 잘먹고 잘 살았더만. 베르사유 궁전에서 무도회나 열고. 왕권신수설에 근거해서 말이죠. 거기에 성직자들도 야합을 했지요. 신의 이름으로 그 시대 농노들과 대부분의 시민들의 고통과 악을 그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거든요. 사회 모순으로 터져나온 것이 프랑스 혁명이었던 것이죠.

바울도 갈라디아서에서 그렇게 율법이 아닌 은혜라고 강조를 합니다. 그런데 잘 봐야 하는데 너희가 뿌린대로 거두리라는 얘기도 있어요. 악을 심는 자는 사망의 열매를, 성령 안에서 심는 자는 생명을 거둔다. 심는대로 거둔다라고 하는 말 속에는 인과응보적 사고가 있다는 것이에요. 예수께서도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도 다 같은 이해죠. 인과응보론의 양면을 봐야 한다고 봐요. 그것은 종교에서 중요한 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아까 말한 힌두교의 인과응보가 이상하게 종교적 억압 기제, 이념으로까지 둔갑을 해서 숙명론적으로 카스트제도란 관념의 이론으로 변질해 버리면 안되겠지만 인간적 사회적 삶 속에서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나 문명 속에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비극에 있어서는 유효한 것이거든요. 예를들면 원시 시대는 자연이 주는 고통이 90%였다면 지금 시대는 거꾸로죠. 인간 역사와 사회가 주는 고통이 90%고 자연 재난은 10%에 불과합니다. 90%의 인간이 저지르고 증폭되어가는 고통의 원인, 악의 원인은 인과적 원인을 살펴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단 말이에요. 사회적, 제도적 바른 질서 수립을 위해서 말이지요. 그 속에 정의(justice)라는 요소가 기독교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나 신학에서는 그런 문제만 다 해결이 되면 인간의 삶 속에 고난과 고통이란 것이 없어지느냐. 대표적으로 질병 같은 것이나 사고사나 말이죠. 자연히 죽음의 문제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죠.

지금 결론은 그래요. 어제도 나는 설교에서 그렇게 설명을 했는데 내가 스무살 때 넌크리스천 가정에서 갑자기 신학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이전에 6.25 직후에 10살 전후로 해서 광주 집에서 머무른 기억이 있습니다. 늦 여름 초가을이 되면 섬돌 아래서 귀뚜라미가 울곤 했는데 우는 귀뚜라미의 처량한 초가을의 소리를 듣던 10살 먹은 소년이 귀뚜라미에 이런 질문을 한 것 같아요. “귀뚜라미야. 내가 너를 이렇게 쳐다보고 있는데 나는 너보다 몸도 크고 머리도 발달하고 지식도 있는데 너는 내가 쳐다 보는 이것을 아느냐” 귀뚜라미가 알리가 없잖아요. 귀뚜라미도 하나의 생명체고 인간도 하나의 생명체로서 생명체가 갖는 생명의 매카니즘의 공통요소가 있지만 소위 진화곡선에서 인간이 도달하는 정신의 자기초월 능력이나 자기성찰 능력 그리고 진·선·미 추구 능력이나 이런 것은 귀뚜라미는 모른단 말이죠. 내가 비록 어리지만 인간으로서 도달해 버리는 정신적인 한 단계, 두 단계 높은 차원을 같은 1미터 내지 2미터 안의 동일 시공간에 있다고 해서 다 같이 똑같이 느끼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귀뚜라미는 모르죠. 내가 10살때 느낀 것을 70살이 지난 지금도 똑같이 생각해요. 내가 아무리 그동안 학문을 하고 성인이 되고 자연과학의 지식을 얻게 되고 등등 다해서 10살때 비하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지식을 쌓았죠. 그러나 현재적 시간과 공간의 인과율과 우리 삶의 그 구조틀을 인간은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 틀 안에서 사물을 이해하고 생각을 하려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섭리나 성경 外 이야기가 납득이 안되는 거에요. 허무맹랑한 소리처럼 들릴 때도 많고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창조의 질서는 인간이 지금 이해하고 규정하고 설명하는 소위 우리가 자연의 법칙이라고 말을 하든 혹은 도덕의 법칙이라고 말을 하든 그것보다 더 크고 넓고, (차원적으로 말하자면)다차원적인 세계인 것 같아요. 귀뚜라미는 자기가 경험한 그 세계 밖에 모르듯이 인간은 날고 뛰어도 시공 4차원의 세계와 인과율적인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계속) 

[대담= 김진한 편집국장, 사진편집 및 정리= 이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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