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빈무덤 설화, 어떻게 볼 것인가”…부활신앙의 의미는

[특집대담] 신학자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편(하)

삶/고통, 죽음 등은 종교의 출발이요 종말이라 할만큼 종교적 담론 안에서 자주 회자되는 주제들이다. 이러한 주제들과 관련해 종교들은 앞선 성인들의 문답에 근거해 각기 나름의 답을 제시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답들 중에는 삶의 다차원성을 무시한 채 보편성 혹은 전체성이란 이름으로 신앙하는 개개인의 ‘다양성’을 억눌러 왔던 것들도 분명 있었다. 종교가 때때로 인간 해방, 즉 인간 구원이 아닌 인간 억압의 기제로 작용해 왔다는 비판을 받아온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본지는 계사년 신년특집으로 그간 신앙인들이 비판적 성찰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의심없이 수용했던 삶/고통, 죽음 등에 관한 종교의 가르침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종교의 종교로서의 제 자리 찾기와 더불어 인간 해방의 길에 작은 등불을 비추고자 하는 시도다. -편집자주

▲대담에 참여하고 있는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오른쪽)와 김진한 편집국장(왼쪽).

- 고통 아니, 고난의 극점인 ‘죽음’에 대해서는 어떤 이해를 갖고 있습니까?

“기독교가 말하는 죽음의 문제도 그것으로부터 깨달음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봐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내세에 대한 소위 영원한 생명을 지금 있는 이 시공속에서 겪는 인간의 실존적 삶의 연장(extension) 혹은 장소 이동으로 생각하는 데 그치거든요. 마치 천국이란 게 어디에 있어서 (지상에서의 삶)그대로 가서 똑같이 산다고 생각하는 것 처럼 말이지요. 인간의 인지 능력이 아직 그만큼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는 단계로 집단적 성숙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공 4차원의 인과율적인 우리 인간의 실존적 사고 범주, 사고 틀을 연장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 그것을 넘어서고 싶어요. 제가 이해하는 성서 신학도 초대 그리스도교도 바울이 말했듯이 우리의 몸에는 육신의 몸도 있는 것처럼 영체의 몸, 영혼으로 된 몸도 있다고 생각을 해요. ‘별의 영광이 다르고 해의 영광이 다르다’(고전 15장)고 예민한 영적인 체험과 통찰을 보여준 바울이 쓴 언어 보다 더 적절한 언어 표현이 사실 불가능하다고 봐요. 어떠한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표현을 써도 말이지요. 때문에 예수나 바울이나 초대 교회의 영성가들이 도달했던 영적 감수성의 표현을 빈 마음으로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것을 전제하고서 저는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나 죽기 이전의 인간의 삶의 과정 속에 있는 여러가지 질병을 비롯해 고통과 고난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더 큰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을 해요. 또 그것들(고난과 죽음) 너머에 대해서도 예수님이나 바울은 그것으로서 모든 것이 다 끝이 아니라고 하잖아요. 만약 그 다음은 허무와 무 밖에 없다고 하면은 인간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것은 단지 생물학적 100년 동안에 바르게 살고, 잘 살고, 잘 먹고, 의롭게 살고 진실된 삶을 살고 하는 이야기 밖에 남는게 없는 것이죠. 신학적으로 말하면 창조질서는 그것을 감쌀 만큼 더 크고 넓고 깊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지나친 스펙큐레이션(speculation)을 하는 것은 금물이라고 봐요. 성서가 증언하는 계시적 말씀을 일단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더 큰 생명의 하나의 계기이고, 또 하나의 전환과 변화의 모티브란 말이죠. 그 다음은 네가 관여할 게 아니다란 말입니다. 우리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거예요. 성경은 하나님이 해준신다고 자꾸 말하거든요. 예수의 부활까지도 플라톤과 달리 예수 속에 영원부터 있는 불멸의 영혼이 죽지 않고 살아났다는 이런 소리를 하질 않아요. 뭔가 하나님을 그를 일으켰다고 초대 사도들이 증언하지 않습니까? 예수가 죽음에 매여있을 수 없기 때문이죠. 예수님이 살아계시던 중 그 분이 가졌던 절대 사랑, 하나님에 대한 신실, 인간에 대한 또 참에 대한 그리고 뜻에 대한 화신체로서의 내적인 속 사람은 죽음도 감히 건드릴 수 없다는 성서의 확신이 있다고 봐요. 그런데 그것마저 예수가 스스로가 자연적으로 영생 불멸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 분을 사망의 고통에서 부르셔서 전혀 새로운 생명의 질서로 옮기시고 주가 되게 하셨다는 게 초대교회의 증언이 아닙니까?”

“고난 그리고 죽음, 더 큰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한 부분”
“빈무덤 설화, 어떻게 볼 것인가”…기독교가 말하는 부활신앙의 의미는

“처음으로 조직신학자로서 고백을 말하지만 제일 어려운 조직신학적 문제는 바로 빈무덤 설화라고 봐요. 현재 네 복음서 속에 예수를 묻었던 돌무덤 속에 시체가 없어졌다고 하는 것을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어요. 당시에 설왕설래에서 퍼졌던 소문에 따르면, 유대 사제들은 예수가 죽어도 부활한다는 예수 제자들의 소문을 듣고 예수의 시체가 없어지자 누가 도적질 해 갔더라는 루머를 퍼뜨립니다. 예수 부활의 놀라운 사건의 현실성을 은폐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얘기가 나오잖아요. 나의 신학 형성에 중요한 가르침을 준 폴 틸리히는 가정을 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이 단순히 시체 소생은 아니잖아요. 만에 하나 유대 사제들이 퍼뜨린 소문처럼 정말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들이 예수를 너무나도 사랑해서 그냥 내팽겨칠 수가 없어서 뒤늦게라도 선생님께 사과하는 마음에 시신을 밤에 빼내어 다른 곳에 모셔둠으로써 빈 무덤이 되었다고 칩시다. 그래서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신앙이 무효가 되느냐? 틸리히는 그렇지 않다고 봐요. 예수가 가지고 있던 육체의 발견 유무를 떠나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은 그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다고 혹 불트만이 말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의미론적, 실존적 부활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불트만과 바르트가 양 극점에 서 있다면 틸리히는 중간쯤 서 있어요. 어차피 창조라는 것은 매순간 인간의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의 사건의 연속인데 부활체도 마찬가지 아니냔 말입니다. 틸리히의 말은, 부활체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이 꼭 예수가 33년 동안 끌고 다녔던 육체의 세포가 있어야 부활이 되느냐 이 말입니다. 모든 육체는 자연으로부터 와서 다시 자연의 부속물로 다시 돌아가듯이 예수의 시신도 그렇게 되었다고 해도 부활하신 부활체를 초대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경험할 수 있고 만날 수 있었다는 거예요. 이게 중요한 부분이거든요. 그렇지 않고 예수의 삶과 죽음이 예외 케이스가 되어 버리면 안 되거든요. 예수는 우리 생명의 맏형이고, 우리 생명의 글자 그대로 아키타입이란 말이죠.

또 하나는 글자 그대로 하나님은 없는 데서 있는 것을 불러일으키시는 분이기 때문에 예수의 육체, 그 자체마저도 전혀 다른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키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납득이 잘 되지 않지만 빈무덤이 있는 이상 우리는 그렇게 고백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초대 교회의 결론인 것 같아요. 바울마저도 예수의 시신이 어디서 발견되었는데 영체로 부활했다는 말은 안하잖아요. 죽음에 대한 문제로 오래전부터 생각을 해왔는데 가장 크게 걸려있는 문제가 그것이에요. 보통 사람들은 다 죽잖아요. 성서의 근본적인 구약성서의 가르침은 사람이 흙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죠. 인간의 육체 자체의 자연과의 연대성, 자연과의 공속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단순히 물질주의적 환원주의와는 달라서 분자생물학적인 물질의 덩어리가 자연적으로 영적인 영물이 될 수가 없고, 고대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의 생명의 입김이 불어 넣어졌다는 표현을 통해 단순히 분자생물학적으로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과학이 영원히 밝히지는 못하지만 어찌됐거나 플러스 알파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생명이 생명 되게 하시는 관여 혹은 선물 혹은 개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인간의 모든 유기체 세포에 있어 자기 조직화 과정을 거치든, 형태장 이론을 거치든 말이죠. 자연과학이나 분자생물학은 가장 미세한 설명을 다해도 빈 공간이 생기는데 화이트헤드 같은 과학자는 바로 그 빈 공간을 가리켜 신이라고 말을 해요. 모든 것은 구체적으로 창발하는 데 필요한 여러가지 현상들이 있는데 그것들이 불교식으로 하자면 여러가지 원인이, 인연이 모여지면 자동적으로 꽃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화이트헤드는 이를 ‘구체화의 원리’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 ‘구체화의 원리’가 곧 하나님, 신이라는 주장을 펴는 것이죠. 화이트헤드는 합리적이며 새로운 형이상학적 실재론자니까 그렇게 재미없게 표현을 했지만, 여하튼 뭔가 형이하학적으로 다 설명될 수 없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20세기 아인슈타인과 똑같은 천재 물리학자가 그걸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훨씬 더 그것을 강하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하나님이 거둬 가시는 것이고. 하나님에게로 나와서 하나님 안에 거주하다가 하나님에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 기독교의 큰 생명관 아닙니까?

이야기가 많이 산만해졌는데 다시 죽음을 어떻게 보느냐로 돌아가 봅시다. 죽음에 국한한다면 성서의 구약학자들은 (죽음에 대한 이해가)두 견해로 갈라지는 것 같아요. 요새 김이곤 한신대 명예교수(구약학)가 특별히 강조하는데 본래 구약성서에서는 인간이 자연사로 죽는 것을 당연하게 본 거예요. 죽는다는 현상이 죄 때문도 아니고, 죄의 징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저 자연 질서라는 얘기죠. 히브리인들은 그렇게 봤고,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렇게 봤어요. 같은 구약성서를 공부한 사람이라도 죽음을 인간의 자연적 질서가 아니라 하나의 변질태, 즉 변화된 형태라고 보는 사람은 놀랍게도 장공 김재준 목사에요. 그러면 장공이 요새 말하는 비평학적 성서연구를 하지 않거나 소위 자연과학적 지식이 없어서가 아니거든요. 장공도 구약학자예요. 구약 고대 문서의 이해가 보다 더 신령해요. 훨씬 더 보수적이에요. 죽음은 정상태가 아니라 비정상태라고 보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고까지 얘기는 안 하셨어요. 여기까지 일단 두 견해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죽음’에는 자연적 해석과 반자연적 해석이 있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두 가지 해석 중 어느 한쪽만 택할시 발생하는 문제들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그리고 전자에서는 ‘죽음’이란 (가치)중립적이나 후자에서는 다시금 ‘죽음’을 ‘악’으로 인격화 하는 시도가 생기는데 각각 장점과 단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죽음 현상을 두 가지 측면에서 볼 때, 자연스러움과 비자연스러움의 양면이 있으며 각각 정당성이 있지요. '죽음을 자연스러움의 자연질서'로 이해한다고 말할 때, 소위 천수를 다누리고 생물학적 몸이 노쇠하여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죄 혹은 악과 연계하여 생각하는 태도는 않된다는 입장입니다. 죽음의 비자연스러움을 강조할 때는 죽음을 반자연적인 것으로 보는 입장인데, 그럴 때 죽음은 천수를 다 누리지 못하고 죽는 죽음들, 예들면 병사, 사고사, 순교사, 테러희생자, 정치적 부르이에 의한 고문사, 빈곤아사등입니다. 그런 즉음은 <죽임의세력> 에 주목하고 <죽임의 세력>을 극복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하게 갖지요.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죽음>에 대한 지혜의 깨달음을 , 유교는 <주검>에 대한 바른 인간적 예를 가르지지만, 기독교는 <죽임의 세력>을 문제삼는 종교란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 교수님이 생각하시기에 죽음은 자연적인 것인가요? 반자연적인가요? 혹 교수님은 어느 입장에 더 가깝습니까?

“인과응보설의 양면을 봐야 하듯이 (죽음에 대한 이해도)양면을 봐야 한다고 봐요. 한쪽만을 말하면 분명히 문제가 생깁니다. 제가 소박하게 정리한 바로는 기독교의 사생관이 간단치 않다는 것입니다. 단선 악기 연주가 아닌, 네 가지의 핵심적인 것이 그 안에서 소위 지평융합 되어 있다는 것이에요. 하나는 고대 이스라엘의 사생관입니다. 그것은 김이곤 교수가 대표하는 것이죠. 인간은 죽고 일정한 기간 세상을 살다가 죽으면 스올(Sheol)로 가 그림자가 되어서 하나님을 찬양도 못하게 됩니다. 뱀의 껍질, 매미의 껍질 같은 그런 존재처럼 밖에 존재하지 않는 스올이 된다는 것이죠. 혹은 조상 안에 잠들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관심은 일차적 관심은 죽음과 죽음 이후가 아닙니다. 그만큼 삶에 철저했고, 삶이 귀중했던 것이죠. 아주 리얼리스트들입니다. 땅에 살아 있는 동안에 건강하게 일하고, 노동의 대가로서 젖과 고기를 먹고 또 영혼자 앞에서 생명의 축복을 찬양하며 감사하며 사는 것이 최고다라는 것이죠. 이러한 히브리적 사유가 중요합니다.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는 기독교의 사생관이 "네 가지 핵심 사상으로 지평융합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중동 문화 전체가 이제 헬레니즘의 지배를 받으면서 플라톤의 영육 이원론이 전세계를 풍미했단 말이죠. 그것이 유대교에도 깊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영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고, 육체는 사멸하지만 영혼은 본래부터 있었던 불멸성 때문에 불멸하는 것이라는 영혼불멸설이 나오는 것이죠. 그것이 기독교를 거의 지배를 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이러한 사생관은 앞서 말한 이스라엘의 소박한 사생관하고는 정면 배치가 돼요. 이러한 소박한 이스라엘의 사생관은 유대인인 바울에게나 베드로에게 여전히 나타납니다. 예수가 부활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다시 살려야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 자체가 불멸성이 있어서 다시 산다고 보지 않는 거예요.

세 번째 기독교의 사생관을 구성하는 요소는 묵시문학적 종말론이에요. 페르시아, 제2의 바벨론 앗수르의 포로로 끌려갔다가 이란, 이라크쪽에서 올려오는 소위 오늘 순복음 교회를 지배하는 사탄의 파워와 하나님의 파워의 아마겟돈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형국이라고 보는 것이거든요. 의인이 억울하게 죽은 것이 방치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신정론에서 위배되니까 우리 현실 세계는 삶의 세력과 죽음의 세력의 전투고, 마지막에 하나님은 의인을 일으킨다고 하는 묵시문학적 종말 사상이 기독교 안에 들어왔어요.

그리고 마지막 요소가 실질적인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 이후 초대 교회 공동체가 체험했던 예수의 신비스러운 현존 체험이거든요. 이것이 단순히 그들의 시각의 착각이거나 정신적 이상적 혼돈이라고 보기에는 그런 것을 경험하고 난 뒤에 그 공동체가 보다 더 인간답고 생명있고 평화로운 공동체로 변하잖아요. 어떤 종교적 환상을 겪고서 그렇게 변화가 되질 않아요. 예수의 십자가와 십자가 이후 예수의 부활의 현현체험. 그것이 결정적인 기독교의 부활관의 핵의 눈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앞서 말한 세 가지 요소가 비빔밥처럼 섞여져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성서 여러 군데에서 목사님들은 관심과 필요에 따라 그 중에 어느 하나만을 고르는거예요. 실제로 묵시문학적 요소를 자꾸 강조하는 어떤 시골교회 목사님은 죽은 다음에 매장을 해야지 화장도 못하게 합니다. 에스겔서를 특히 문자무오설을 주장하니까 우리 몸의 시신이 자연 속으로, 세포로 돌아가더라도 하나님의 전능에 의해서 다시 모아라 하면 뼈다귀와 세포가 모아져 부활한다고 하니까 말이죠. 그런 철저한 문자무오설과 묵시문학 사상이 결합이 되는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본래 기독교의 부활과 사생관의 4분지 1만 말하는 것이죠.”

“한국교회, 플라톤의 영육 이원론에 근거한 영혼불멸설에 빠져”
“기독교 사생관, 네 가지 핵심 사상으로 혼란 중에 있어”

“또 오늘날 대부분은 기독교적 부활관이라기 보다는 플라톤의 영혼불멸설에 지금 빠져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김이곤 교수처럼 기독교라는 것은 모든 긴긴 역사 과정 속에서 영적인 고난과 진통을 겪고 승화하고 꽃핀 결론이지,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고 있는 것이 성서의 오리지날한 초창기 기독교 사상이기에 그것이 오리지날이고, 기독교라고 말하는 것도 한계가 있거든요. 그것이 말하는 중요한 의미는 당연히 살려내야겠죠. 그래서 다시 돌아오면 고대 이스라엘의 사생관, 플라톤의 영육 이원론, 묵시문학 요소가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또 바울의 서신 속에 어떻게 녹아져서 형성되었는가를 밝혀내야 해요. 지금 한국 기독교가 사생관에서 큰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내가 말하듯 조직신학적으로 설명을 못하니까 그 중에서 성경에서 자신에게 적합하거나 혹은 인상 깊은 내용을 골라 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지 않느냐고 하면 그것 사이에 생기는 자가당착, 곡해 등의 문제가 있어요.

지금까지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모든 학문 이론과 종교와 윤리와 철학이 결국 인간의 정신적 능력으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소구라파의 그리스 철학이고, 동양의 지혜 철학의 대 원칙인데 인간이 있다면 있는 것이고, 없다면 없는 것 아니란 말입니다. 그게 표준이거든요. 인간의 이성이, 인간의 지성이 생각하고 설명하고 말할 수 있는 것만 실제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말하지 말자는 것이죠. 혹은 말해도 의미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교과서 적어도 적어도 대학의 과정 속에 종교와 신학 이야기는 배제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의 사적인 문제이고 관심거리라는 거예요. 학문의 영역 안에서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은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초월한 영역이니까요. 인간은 인간 이성 안에서 설명되는 것만 진리라고 하겠다고 하는 것이죠. 하이데거는 이러한 식의 투쟁이 존재망각 시대를 불러일으켰다고 한탄을 했죠.

나의 신학의 큰 틀은 보니까 그 두 가지 중에서 무엇을 받아들이겠는가 결단이 필요한 것 같아요. 신학자는 하나님에 대한 학문이지만, 인간의 이성과 지성의 한계 안에서만 이야기 한다고 한다면 별로 할 말이 없어요. 철학이나 도덕이나 사회학에서 하는 말 이외에 더 할 말이 없다고요. 근데 신학이 말하려고 하는 독특한 자기 영역의 진리의 지평을 아까 말한대로 질적인 차원이 다른 새로운 지평을 인간 학문의 로직(logic)의 틀 안에 시간, 공간, 인과율, 실체(substance) 이 네 가지 프레임의 틀 안에서 신학이 말하려고 하는 진리를 말하려고 하면 설명이 안되거든요. 자가당착이죠. 그것 가지고는 설명할 수 없는 차원의 세계를 언급하려고 하니까요. 신학은 어쩔 수 없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지성과 이성의 도구를 최대한 활용은 하지만 소위 우리가 말하는 계시적 차원, 계시적 진리의 조명의 영역을 겸손하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봐요. 내가 철학자가 아니고 신학자인 이유가 그것이죠. 아까 말한대로 죽음과 고난도 더 큰 하나님의 큰 생명, 창조질서를 구성하는 한 부분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가 일반 순수한 지식인들로서는 받아들이기가 참 어렵죠. 인간이 말하는 모든 것은 소위 칸트가 말하는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여야 하고,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진리여야 한다고 한다면 기독교는 사실 별로 할 말이 없어요. 그러나 신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라는 소설을 쓰는 것은 위험합니다. 성서도 조심하고 있다고 봐요. 바울마저도 장차 우리가 어떻게 될런지는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다만 우리가 새로운 생명의 차원으로 높이 들리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처럼 될 것이라고 우리가 믿는 것 뿐이죠. 그렇게 말했을 뿐이지 그것이 이러쿵저러쿵 천국에 가보니까 무엇이 어떻게 되었다느니 소설은 안 썼거든요. 신학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신실성과 사랑을 믿는 신앙의 차원으로 은총으로 감사로 믿음으로 믿고 기다릴 것이고 우리의 생명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면 확신할수록. 그리고 내가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하는 것처럼 영혼 불멸의 존재, 신적 존재였다가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가 아니고 우리가 본래 흙이고 먼지였던 존재였는데 우리가 생명 동산에서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입김이 깃들여져서 잘 살아보라 행복하게 살아보라 평강과 정의와 사랑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라고 한 현실적을 삶을 보면 볼수록 그것이 신비롭고 기이하고 그것이 그렇게 되어있지 못한 현실에 대한 죄송함과 그것을 바로 잡으려고 하는 정의로운 운동이 일어나는 것이죠.

거듭 말하지만, 한국 그리스도교는 그 면에 있어서도 별로 통일이 안되어 있는 거예요. 가장 큰 문제는 소위 부활신앙과 플라톤의 영육 이원론은 전혀 다르다고 해서 둘 중 하나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어떤 변형을 거치면서 수용이 되었죠. 플라톤이 말하는 영육 이원론이 아닌 영혼의 불멸 신앙을 기독교 신앙은 갖고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는 것은 내가 아까 말한 네 가지 요소가 하나님 신앙과 곁들여서 다시 신학적으로 담론을 정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학자들은 학문적으로 연구해 본 결과 플라톤의 이원론이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비성서적인 것이다라고 아무리 말해봤자 로컬 처치에서 교인들은 그렇게 믿지 않잖아요. 믿지 않으니까 설명을 안해주고 그냥 다른 것이다라고 말하면 말이 안되는 것이죠. 신학이 무책임한 것이죠. 신학자가 그것을 통전하고 그 핵심적인 요소가 어떻게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예수 부활 신앙의 고백 속에서 (해석학적 용어로 말하면)지평융합해서 설명해 낼 능력이 없는 것이야.

이것은 버려야 하고 저것은 버려야 하고 극단으로 하면 불트만의 실존론적 부활이 남든지, 민중신학자들의 민중의 생명 속에 부활하는 것 뿐이지 다른 것은 없다라고 말하는 사회과학적인 부활이 되든지, 그것은 아무 필요도 없고 죽은 다음 우리 영혼이 천국 간다고 하는 순복음 스타일이 되든지 각양각색이에요. 한국 기독교가 겉으로는 기독교라고 하지만 사생관에 있어서 큰 차이, 아니 혼돈을 보이고 있어요.”

- 고통에서 시작해서 죽음을 넘어서 부활의 문턱까지 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죽음’의 의미를 돌아 볼때. 성경에서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합니다. 이 같이 창조주는 인간의 몸을 한 번 죽는 것으로, 그리고 또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사는 것으로 그 생명의 프로세스를 만들었습니다. 왜 굳이 그렇게 했을까 혹시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창조주가 이런 프로세스를 정하셨다면 분명 죽음에도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고 보는데 그것이 무엇일까요?

▲“창조주 하나님이 살고 죽다 또 다시 새로운 생명 질서에서 살아가는 생명의 프로세스를 왜 만드신 걸까요?”라는 물음에 김 교수는 죽음학에서의 나비 비유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좋은 질문이에요. 그런 면에서는 소위 과정신학적인 발상법이 많은 도움이 된다고 봐요. 흔히 죽음학에서의 비유지만 많이 논의하는 것이 하나의 나비가 알에서 7,8번의 형태 변화를 통해 나비가 되거든요. 알에서 태어나 땅속에서 7년간 인가 몇년 있다가 고치를 짓고 또 한번의 형태 변화를 겪어서 형형색색 무늬를 가진 날개를 갖고 날아가는 나비의 모든 과정을 인간이 경험해 보면서 말이지요. 지금 죽음학에서 제일 설득력 있는 비유로 그것을 들어요. 생명이라는 게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라 어떤 완성 단계로 가기까지는 여러가지의 단계를 거칠 수 있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나비를 예로 들은 것이죠.

창조주가 생명의 프로세스를 만든 이유는?!
“인간 생명을 어떤 완성 단계로 이끄시려는 것”

떼이야르 샤르뎅의 진화론적 생명관을 보면 생명, 지금 인간 생명의 전 단계로서 여러가지 단계가 있었단 말이에요. 지금까지 인간은 100년 밖에 못사니까 1000년, 5000년까지는 들어오지만 백만년, 천만년, 1억 되면 숫자 개념이지 인간 개념으로 안들어온단 말이에요. 그런데 분명히 그런 긴긴 생명의 과정을 통해 현재의 인간 출현 상태가 되었으니까요. 이것이 이것으로서 끝이라는 보장은 없을 것이고, 더 높은 차원의 생명의 승화를, 뜻하시는 창조주 신앙을 고백한다면 하나님이 피노키오 할아버지처럼 목공소에서 땅땅 자기가 주물러 만들어 가지고, 그런 기계적 생명이 아니라 그 스스로의 자유와 자기의지의 결단과 신적인 성품을 점점 더 닮아가서 그것이 신의 은총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스스로 자기를 형성해 가면서 생명의 완성단계에 도달하게 하도록 이끌어가시는 긴긴 섭리의 손길을 떼이야르 샤르뎅은 믿었던 거예요. 때문에 오메가 포인트라고도 말하고요. 지금 성서가 말하는 기독교의 문명의 전환은 이제 막 시작이라고 봐요. 떼이야르 샤르뎅은 주장은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세상의 성급한 서양 신학자들은 기독교가 그동안 가지고 있는 자기의 영적인 창조의 에너지가 다 바닥나서 동양의 종교 철학에게서 귀동냥을 하려고 하는데 떼이야르 샤르댕은 그렇게 안 봤어요. 2000년이란 건 지질학자의 눈으로 보면 하루 밖에 안되는 것이고, 초대 기독교와 예수와 바울이 말한 영적 진리가 정말 보편적으로 우리 인간들에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고 설명이 되고 또 삶이 변화가 되려면 몇천년, 몇만년 필요할지 모른다는 거예요. 기독교가 갖고 있는 비전, 인간의 미래에 대한 전망은 이제 막 시작 단계로 보는거에요. 그렇게 긴 눈을 가질 필요도 있다는 면에서 저는 동의합니다.”

- ‘고난’과 ‘죽음’이란 씨줄과 날줄로 엮인 우리의 ‘삶’을 대하는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나의 진정한 관심은 사후의 생명에 대한 성서적인 예수와 바울과 초대 그리스도교의 원캐리그마에 그 뿌리를 놓고 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나의 일차적 관심은 죽음이나 죽음 이후가 아니라 지금 살아있는 시간 동안에 인간이 너무나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내 자신을 돌아봐도 말이죠. 살아있는 세계의 신비로움과 기이함이 칠십을 넘으니까 조금씩 보이거든요. 이 신비함과 기이함을, 아까 섬돌 아래서 우는 귀뚜라미 얘기를 했지만, 인간이라는 게 예수 말씀처럼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집 몇평짜리 구할까 하면서 허송세월을 다 보낸다는 것이지요. 이 생명 시간이 단 한번 있는 기회인데 이것이 출현하기 위해 얼마나 긴긴 과거의 시간이 농축되고 축적되어서 여기 탄생이 되었는가 하는 자기 생명의 존엄에 대한 놀라운 감탄, 탄성, 감사 그리고 나를 둘러싼 대자연의 신비로움과 다른 생명의 메카니즘에 대한 놀라움, 기이함에 대한 찬양 그리고 아름다움. 이런 것들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천분지 일, 만분지 일도 아직 모른다고 봐요.  

그것을 더 많이 강조해줘야 하지 않나요? 중고등학생들 봐요. 중고등학생이 학교에서 대학입시 성적이 잘 안나온다고 해서 3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는 그런 학생들이 수십명씩 나오는 세상에서 종교가 해야할 일은 뭘까요? 종교는 죽은 다음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거 못지않게 지금 너희 생명이 출현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왔다고 하는 통시적인, 전체적인 시각을 주어서 자기 생명의 존엄을 깨닫게 하고, 나 뿐 아니라 고통 당하는 이웃 생명이 그렇다는 것 역시 알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 삶의 자세가 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요? 정말로 종교와 신학이 해야 할 일은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생명의 신비로움과 기이함에 대한 깨달음, 각성, 조명 등 그곳에 훨씬 더 강조점을 둬야 한다고 봐요.

그런데 오늘 한국 기독교의 큰 문제가 주로 존 번연의 천로역정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2천년의 기독교 역사가 그랬으니 흔히 지금 사는 삶은 잠깐 지나가는 과객의 여관방에 불과하고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다가 악이 관여하고 사탄이 지배하는 현실 세계니까 죄 많이 짓지 말고 그저 예수 잘 믿다가 천국가서 영생 복락을 누리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깡패가 득실거리는 동네니까 얼른 그냥 옆에 꽃밭도 보지 말고 문화관도 들어가지 말고 빨리 이 동네를 지나쳐 버리자는 이런 세계관을 지금 거의 주입하고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이것과의 싸움이 나의 신학자로서의 싸움이라고 생각을 해요. 나의 생각이 보다 더 복음적이고 성서적이라고 봐요. 영원한 생명에 관한, 삶에 대한 신앙을 사도 바울, 예수가 나보다 훨씬 더 깊은 경지에 들어간 분들입니다. 내가 날고 뛰어도 그들이 표현한 것 이상으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어요. 그러면 그럴수록 문제는 죽음에 대한 이해는 삶에 대한 이해의 다른 측면이라는 것이거든요. (죽음을)이해하면 이해할수록 현실의 삶에 대한 진지함과 감사함이 생깁니다. 만약 윤회설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 나라에 가서도 백번이라도 더 창조주에게 이 세상에 갔다오겠습니다하고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이제서야 세상의 것이, 꽃 한송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니까요.

20세기 후반부에 각 자연과학 분야가 발달해서 분자생물학, 지질학, 천문학에 우주에 뭐가 많이 나오잖아요. 이제 막 동이 튼 것이죠. 그러나 누군가 말했듯이 인간의 학문 총체는 과일로 말하면 과일껍질 부분을 더듬어서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하다라는 것입니다. 그 깊은 속살이나 깊은 씨앗은 모르고, 껍질 부분을 그저 우리는 더듬어 알고 있다고 보는 것이잖아요. 그 생명의 신비로움과 기이함과 존귀함에 대한 감탄이 죽음이 더 가까이 오면 올수록 나에게는 점점 더 커지는 것이에요. 이 눈을 될 수 있는대로 젊은 세대들에게 더 일찍 뜨이게 해줄수 없을까. 젊은 세대들은 가정을 이루고, 직장을 가져야 하고  경쟁을 해야하기 때문에 그럴 겨를이 없거든요. 또 달리 생각하면 과연 없을까요?

살아보면 예수의 말씀이 딱 맞아요.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중요하지만 그것이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좀 불편하지 않을 정도만 있으면 되는 거고요. 젊은 세대, 중고등학생들이 입시문제로 성적이 잘 안나와서 자살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 간접적으로 우리가 죽이는 것이거든요. 사실 타살입니다. 우리 사회 전체가 지금 집단 타살을 하고 있는 것인데 그런것을 바로 잡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다시 한번 인간이 16세기 근세 인간 이후에 생명이라는 것을 정말 실증적, 소위 유물론적 환원주의로만 봐왔던 그것의 한계를 서서히 깨닫게 한 것이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여 아닙니까? 그런 선상에서 기독교가 갖고 있는 정직하면서도 굉장히 다차원적인 생명과 죽음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는 어느 종교에 내놔도 뒤떨어지지 않는 풍부한 자산을 가지고 있다고 봐요. 아까 말한 네 가지. 기독교의 생명관과 사생관을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가 어떻게 절묘하게 융합, 융합이라는 것은 하나 하나가 살아있는 게 아니야. 화학적으로 말하면 녹아서 융해되어 전혀 새로운 화학물이 되었다고 하는 화학적 용어입니다. 영어로 퓨전이지요.

바울 사도의 고린도전서 15장 속에는 바울의 사생관, 부활관 속에는 네 가지 요소가 다 있어요. 각각 따로 노는 게 아니라, 산소와 수소가 결합되어 물이 된 것 마냥 영적인 지평융합이 된 형태로 그가 체험한 종교적 체험 형태로 있기 때문에 그 세계에 대한 해명과 조명이 필요합니다. 한국 기독교를 말하자면 너무나 보수적인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것 같아요. 보수적인 프레임의 특징은 물리학적으로 말하면 중세기적이 아니면 기껏 발전해야 뉴톤적 프레임이거든요. 뉴톤적 프레임이라는 것은 시공간의 인과율적인 프레임인데, 지금 화학적인 영역에서의 양자 물리학적 측면에서만 봐도 기독교가 갖는 사생관을 전혀 새롭게 이해할 만한 요소가 충분히 있어요.

예를 들면 소위 영혼수면설 교리가 있잖아요. 이것 때문에 루터도 고민을 많이 했어요. 죽음이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잠든 것입니다. 종말의 날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영원의 잠은 시간의 흐름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우리가 밖에서 볼 때는 24시간, 100년 잤다고 보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이미 잠 속에 들어갔기 때문에 시간이 없는 거예요. 종말의 날에 일으키면 죽는 순간과 부활하는 순간이 맞닿아 있단 말이죠. 그러면 현대 카톨릭 신학자나 개신교 신학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냐면 잠들었다는 것은 죽었다는 것에 대한 하나의 현상적 설명이고, 언제 부활하느냐 종말론적 묵시문학의 사람들이 생각했던 몇십만년 뒤 14만 4천이 다 차야 부활하는게 아니라, 죽음 직후에 부활을 한다고 봐요. 죽음 직후에 어떤 형태로든 변화가 온다고 봐요. 칼 라너를 비롯한 카톨릭 현대 신학자들과 개신교 대표적인 사람들도 다 그런 입장이라고 봐요. 그러니까 육체의 몸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맞죠. 그러면 새로운 하나의 영적인 존재 양태를 인간이 경험해 본 적이 없거든요.

바울이 그래서 은유로 흙으로 된 몸이 있는 것 같이 신령한 몸도 있느니라고 표현을 한 것인데 이 영체가 단순한 정신 현상은 아니라는 것이에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식의 세계, 관념의 정신은 아니고, 체는 체인데 그게 영체라고 스프리츄얼 바디(spiritual body)라니까 이해가 안되는 것이죠. 그런데 나는 이해가 안되는 논리를 이해가 안되는 것으로 잠정적으로 놔두자는 거에요. 단순한 관념적 의미적 존재가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물질적 존재도 아니고, 영적인 존재로서의 존재 양식이 하나님의 창조질서 속에서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부활이란, 개체와 전체 구분을 넘어서는 것”
“생명은 전체로서의 하나이면서 개체일 수 있다”

“그런 존재는 우리가 지금 땅에 생각하는 객체와 전체, 이것과 저것,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영적 존재는 마치 물리학에서 빛의 이중성 처럼 빛이 파동이면서 입자이듯이 개체, 개체의 영체이면서 전체에 퍼져 있을 수 있는 영체라는 것이죠. 생명은 전체로서의 하나이면서 개체일 수 있다라는 말입니다. 현재로서는 납득이 안될 거예요. 현재는 개체, 개체로 있고 이 개체들이 모여 사회라는 전체 생명을 이루고 있잖아요. 그런데 물리학에서 빛은 어떻게 실험하면 입자인데 어떻게 실험하면 파동이듯이 말이죠. 사후 영체도 나는 그렇게 이해를 합니다.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냐 하면 교회 예배양식에서 우리 죽은 성도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영원한 생명의 하나의 부활한 영적 생명체로서 영광에 참여하고 있다는 말도 성립되는 것이죠. 동학에서는 성령출시설이라고 해요. 부활한 죽은 자기들의 수운 선생과 모든 앞선 선배들은 지금 이 세상 속에 출현한다는 것이에요. 이 세상의 생명 속에 있다는 거예요. 지금 이 세상 생명과 같이 일하고 있다고 봐요. 그 성령출시설이 3대 교주 손병희의 중요한 교리 중 하나입니다. 바꿔 말하면 동학 교도들은 그 교리를 못 따라 가지만, 그 교주들은 특히 손병희는 죽은 다음에 영계에서 따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이나 불교에서 말하는 서방정토를 인정안하는 것이죠. 지금 생명의 현실 세계에 산자나 죽은자나 같이 어울려서 새로운 신천 신지를 이루기 위해 일하고 있다고 하는 전체로서의 생명 이해죠. 그 전체는 항상 지금 여기, 이 지구 생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장점이 있죠.

그런데 우리 기독교는 창조주의 신앙 안에서 보면 지구 생명이 높고 광활한 우주 생명 속에 특이하고 중요하지만 이것이 전부라고 봐야할 이유는 없어요. 우리가 신앙적으로 용어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어떤 차원이 다른, 우리가 굳이 언어로 쓴다면 초시간적인 영적 하늘 공간.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하늘적인 시공간을 기독교는 말한다고 몰트만은 봐요. 상상을 불허하죠. 우리는 경험을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초대교회 예수의 부활체의 현현체험. 문이 닫혀있는데 홀연히 나타나고요. 예수의 부활 현현이 아니고서라도 칼융의 비인과적 동시성의 체험이라는 게 있잖아요. 심층심리학에서도 텔라그라프도 아니고, 적어도 물질적 신호체계가 가질 않았는데 부산에서 자기 아들이 죽는 순간에 서울에 있는 부모가 이상한 예감을 느끼고 나중에 몇월 몇일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것은 비인과적 동시성의 원리라고 말이죠. 서남동 선생님도 그 경험을 했어요.

민중신학자인 그는 합리적인 이성 신학자라고 말하지만, 그 분이 말하지 않는 그런 면이 있어요. 자기 아들이 지난번 말했잖아요. 영수라고 문익환 목사 아들하고 중학교 3학년 때, 학교에서 물리실험을 하다가 터졌어요. 그 때 서남동 선생은 부산에 있었어. 부산에서 강연하고 여관에 와있는데 아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 뒤 곧바로 전보가 왔는데 급상경 요망, 영수 부상. 서남동 선생이 칼융에 관심이 많았던 이유가 그것입니다. 심층심리학에서는 현대물리 과학의 인과율적인 법칙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인과율적인 법칙은 뭐냐하면 뉴턴적인 시간과 공간 개념을 전제로 한 법칙이죠. 공간이 절대 공간이 있고, 시간의 연속적인 흐름이 있고, 그러므로 아무리 멀든지 가깝든지 그 사이에는 시간의 격차가 있고, 동시성이라는 것은 일어날 수 없다고 보는 것이죠. 0.00001초라도 차이가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바르트에게 영원이 뭐냐고 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을 무한히 연장하는 시간도 아니고, 시간이 없다는 무시간성도 아니고. 시간은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과거라는 시간을 기억속에서 과거 시간이라는 개념을 갖고, 아직은 오지 않았지만 미래의 희망과 기대라는 의미에서 미래 시간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어거스틴때부터 그것을 깨달았죠. 실질적으로 실존은 순간 순간 현재 밖에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과거는 기억 속에 존재하는 시간이고 미래는 기대와 희망 속에 존재하는 시간이고 말이죠. 인간은 순간 순간 찰나밖에 없지만, 인간의 실존이 시공간의 인과율적 제약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에 있으면 미래에 아직 없어, 미래에 태어날 우리의 손자놈은 현재도 미래에도 과거에도 없어요. 우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따로따로 계기적으로 경험하는 피조물의 존재 방식을 갖고 사는데 죽음 이후에 영원한 하나님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가 통일된, 통전된 동시적 시간이라고 했어요. 그것을 ‘시간의 충만’이라고 봤어요. 현대 신학자로서 상당히 인간의 언어의 한계에서 예리한 통찰이라고 봅니다.

임사체험자들이 그런다고 하잖아요. 자기들이 죽는 순간에 과거 자기 생애 전체가 파노라마처럼 홱 지나간다고 해요. 그런 경험을 많이 해요. 그런데 왜 일어나는 줄을 모르죠. 나는 자연과학의 불만이 뭐냐 하면 어떤 기억이라는 게 인간의 뇌신경의 무엇의 과학적인 전자기적인 어떤 작용의 메카니즘을 거쳐서 인간의 마음의 영상이 드러나는 것인데 그것이 어디에 어떻게 저장이 되었다가 그것이 재생이 되는데 그것도 일사불란하게, 순간적으로 파노라마처럼 영화보듯 필름처럼 드러나는 것에 대해 왜 그러는지 과학이 설명을 안해주거든요. 그 처럼 우리 삶의 실존 속에서도 죽음의 순간에 그런 경험을 하듯이 바르트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무시간적 존재도 아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런 시간을 영원히 늙은 할아버지처럼 사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충만한 시간이고, 그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로 통째로 사시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에 초대받는다는 것은 그런 시간적 존재 양식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현재, ‘과거-현재-미래’ 시간 구분의 프레임을 갖고서는 이해가 안된단 말이에요.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인간의 제약적 언어적 수단을 통해 설명해 낸 책들을 볼 때 바울 사도와 예수가 설명한 것 보다 더 절묘하게 설명해 놓은 글을 못봤어요.

예수님이 사두개인들과 부활 논쟁을 할 때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라고 말씀을 하셔요. 다른 복음서는 거기서 끝나는데 누가복음서는 한 마디가 더 붙어요. 만약 앞에서 끝났다면 고대 이스라엘 백성의 사생관의 정직한 표현이다 정도로 해석되는 데 그쳤을 거예요. 실제로 그렇게 해석하는 주석가들도 많거든요. 하나님은 죽은 뒤에 관심을 안한다는 거죠. 그렇게 된다면 기독교는 지금 살아있을 때의 인간이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만을 관심하는 종교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누가복음은 앞에 한 구절을 더 붙여놓기를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살아있느니라고 했어요. 지금 살아있는 자와 과거에 살았던 자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자가 하나님 앞에서는 지금 현재적으로 살아있다는 얘기거든요. 그런 표현을 우리가 초대교회 복음서 기자가 우연히 적어놨다고만 볼 수 있을까? 전 그렇게 생각을 안하거든요.

정리를 하자면 현재 한국교회와 한국사회가 너무나 현세적인, 물질적 존재가 되어버렸어요. 영혼이나 인간의 삶의 깊은 의미나 소위 우리 조상들이 말했던 진, 선, 미, 거룩한 성 등에 대한 관심이 점점 멀어져 가는 즉물적 존재가 되어버리고 있어요. 웰빙의 문화, 죽음을 도피하는 문화 심지어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장례문화가 상업화 되면서 죽음 자체가 대단히 비인간적으로 처리가 되기까지 하잖아요. 죽음을 단순히 신속히 시신을 처리하는 처리 과정으로 전락하면 전락할수록 살아있는 생명의 가치도 소모품의 효용가치만을 따지는 존재가 되니까. 죽음과 죽음 이후를 어떻게 진지하게 생각하느냐는 미래의 문제가 아니고 지금 삶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어요.

그래서 교회가 훨씬 더 고통과 고난 그리고 죽음에 대한 문제를 더욱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첫째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하되 성서를 구성하는, 그것이 하루 아침에 단선 악기 연주가 아니고, 네 가지의 거대한 관현악의 소리와 같은 거에요. 고대 이스라엘의 사생관, 헬레니즘의 사생관, 묵시문학적 사생관, 초대 그리스도교의 삶과 죽음 부활 현현에서 온 사생관. 이것이 마지막에 통전되면서 바울과 사도들이 증언했던 그 사생관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말고 제대로 통일시켜 내는 과제가 놓여진 것입니다. 그것이 신학적으로 목회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합니다. 내가 판단하기에는 작금의 한국교회는 순 엉터리에요. 지금 한국교회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그걸 해낼 지적 능력이 없으니까 한 쪽만 잡고 늘어지는 것이에요. 때문에 그 만큼 설득력도 없고 어떻게 보면 천박해지고 우스꽝스럽게 되는 것이죠.

불행하게도 한국교회를 지배하는 실질적 사생관은 플라톤의 이원론 아니면, 묵시문학적, 현실도피적인 종말론적 사생관이 주도적 역할을 해서 기독교의 사생관은 한국인에게 새로움의 충격과 매력을 주는데 실패하고 있다고 봐요. 왜냐하면 플라톤의 사생관은 소박하지만 샤머니즘적인 사생관이 어느정도 다 커버하고 있어요. 죽은 다음에 저승에 가서 잘산다는 거 아니에요. 기독교가 새로울 게 없어요. 묵시문학적 사생관은 특이하긴 한데 이건 현대 과학적 세례를 받은 현대인들에게는 황당무개한 이야기로 들리니까 거기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지 않아요. 기독교가 말하고자 하는 복음의 중요한 것이 고난을 직시하면서도 그것을 더 높은 생명의 차원으로 돌파해 내고 승화해 내는 용기와 지혜, 그리고 생명의 비극의 꽃이라고 볼 수 있는 죽음마저도 죽음을 제자리에 놓으면서도 그것을 더 높은 차원에서 극복하는 복음의 놀라운 소식이 들리지 않아요. 그런 것에 대한 본질적인 것을 보여주는 메시지가 내 귀가 먹었는지 안들려요. 교회 가서 1년 내내 52주 설교를 들어봐도 그런 내용을 진지하게 말하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런 것을 바로 잡았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는 오늘 여기 21세기 한국 동아시아의 시공간 속에 살고 있는 나와 우리라고 하는 생명 공동체가 얼마나 서로 서로를 아껴주고 귀하게 생각하고 창조세계의 경이로움과 선물에 감사하고 바르게 의미있게 살아가야 하는 삶에 대한 새로운 재각성의 운동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난과 죽음을 이야기 하는 근본적 목적이죠.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있는 우리 생명들의 좌절을 방치하고 있는 책임에 대해 목사의 한 사람이자 신학자의 한 사람으로 굉장히 많은 죄책감을 갖고 있어요. 우리가 그들을 죽이고 있는 것 같아요.”

▲김경재 교수는 고통과 죽음으로 둘러싸인 인간 삶의 실존을 깨닫기를 바랐으나, 동시에 이러한 고통과 죽음을 너무 미화시키는 것에는 경계심을 나타냈다.

- 정리 해보자면 지금 시공간에 살고 있는 인간 실존이 고통 그리고 죽음과 더불어 살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이제 가치 문제로 넘어가겠습니다. 고통이나 죽음을 나쁜 것으로 이해하고 공포스러운 것으로 이해한 나머지 이를 회피하려는 시도들이 계속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교수님은 이렇듯 회피하고 싶은 고통과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오히려 삶을 직시하게 하는 계기점들이라고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여기에 덧붙일 얘기가 없을까요?

“예를 들면 성 프랜시스 같은 성인은 마지막에 죽음마저도 ‘내 사랑하는 누이여’ 이렇게 부를 정도로 죽음을 원수로 보지 않고, 가깝게 친근한 벗처럼 생각했어요. 이러한 신앙의 차원까지 가기는 솔직히 어렵겠죠. 일단 전 삶 속에 있는 고통과 고난 그리고 죽음을 미화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특히 고통과 고난이 여러가지 불의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발생을 해서 타자의 생명에 고통과 고난을 가중시킬 때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절대 필요한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 좋다고 선언하신 창조세계에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이 생명의 한 질서이고, 과정이라 하지만 그것이 아픔이고 고통으로 다가올 때 하나님이 그것을 묵인하시는가 혹은 허락하시는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루터부터 시작하여 많은 신학자들이 진지하게 고민하며 그 문제에 대해 질문을 많이 했어요. 거기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에요. 하나는 전통의 완전한 초월신론입니다. 태초에 천지 창조를 하시고 창조의 원칙과 원리를 창조하신 다음에 자기가 창조하신 세계를 초월해서 자기가 그 세계를 관조하고 계신다는 것이죠.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신론(deism)이죠. 그것이 중간 형태로 완화된 것이 초월적 유신론이거든요. 전적인 초월적 하나님 신관이죠. 한국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칼빈적)신관이거든요. 그래서 현실의 고통과 아픔과 고난과 죽음이 우리 피조물들의 억울한 일거리처럼 느껴진단 말입니다.

“초월적 유신론의 한계 지적, 신관 루비콘강 건넜다”
“신은 수난 받으시나 창조세계에 매이는 분은 아냐”


그런데 분명한 것은 소위 과정신학의 신관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에베소서 4장 6절만 보아도 우리가 믿는 한 분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초월해 계시지만, 진정한 초월은 만유 위에 계신 하나님이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신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거예요. 이 성경 구절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과정 신학자가 말하는 대로 하나님은 피조물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전혀 감지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고통을 함께 체험하시고 함께 나누신다고까지 나갈 수 있는 것이거든요. 그것이 너무 형이상학적이라면 말을 바꿔서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다라는 말이 관념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면 부모 따로 있고 자식 따로 있지만 자식의 고통과 병고에 시달림을 볼 때 부모는 그 고통을 같이 느끼죠. 그렇지 않다면 부모의 사랑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이해가 안되죠.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과정 신학적인 신관을, 신학적으로 말하면 범재신론이라고 표현하잖아요. 우리는 지금까지 초월주 하나님만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의 삼분지 일만 강조하는 것이죠. 초월하시는 하나님은 세계에 유폐되거나 세계에 갇히거나 세계에 운명적으로 매인 하나님은 아니에요. 자유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의 절대 자유가 그의 절대 사랑과 신실하심 때문에 스스로 피조물의 고통과 고난 속에 깊이 개입하신다는 것이거든요. 고난을 함께 나누시고 그것의 극복을 위해 같이 일하고 계시다라고 생각을 하자는 것이죠. 이것이 오늘날 소위 가장 진보적인 사람들이 갖고 있는 신관이고 고난에 대한 이해인 것 같아요.”

- 다른 말로 하자면 신의 수난가능성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까?

“수난당하고 있는 피조물의 고통에 참여하니까 수난당하고 있다고 말을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너무 단정적으로 말을 해버리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매이게 되어버리잖아요. 화이트헤드는 사실 거기까지 가요. 화이트헤드는 철학이고, 우리는 신학이기 때문에 그렇죠. 화이트헤드의 프로세스의 리얼리티를 보면 신이 세계를 구원한다는 말이 진실이듯이 세계가 신을 구원한다는 말도 진실이다. 소위 안티 테제의 변증법적 양면을 다 말하거든요. 우리는 그렇게까지는 말하지 않잖아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은 그럴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운명이나 숙명으로 보지 않아요. 기독교는 어디까지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 때문에 하나님의 자유의 속성 때문에 그리고 신실하신 속성 때문에 피조물을 당신의 사랑의 대상으로 선택한 이상 그의 운명과 기쁨과 슬픔과 고난에 참여하실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시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의 극복을 독불장군으로 혼자서 초자연적 힘을 빌려가지고 우당탕탕 해버리는 독재 군주의 위력의 과시로서 해결하지 않으시고, 이것이 기계가 아니고 인격적 생명체이기 때문에 그것의 스스로의 성장과 성숙과 발전을 이뤄가며 고난이 극복되도록 하기 위해서 신은 계속 우리를 설득하시고 동행하시고 우리의 친구로서 동행자가 되신다는 것이 오늘날 범재신론관의 핵심이거든요.

“사랑의 속성 때문에 우리와 함께 고통하시는 하나님”
“종교의 과제, 고난·죽음 통해 삶 성찰해야”
“젊은세대 죽음 방조, 우리가 그들을 죽이고 있어”


전통적 보수적 신관에서는 난리 나겠죠. 적어도 지구의 크리스천의 삼분지 일이 초자연적 신관이 가지고 있는 장점도 있지만, 하지만 그것만 고집하면 무수히 많은 모순이 생긴단 말이죠. 궁극적으로는 신정론 문제가 그래서 생긴 거예요. 그 절대 초월의 신이 우리를 이렇게 방치하고, 이 땅에 이해 못할 억울한 일들이 너무 많은데 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무능하든지 그런 신은 없든지 둘 중 하나라고 결론이 나는 거예요. 제2차 대전 아우슈비츠의 죽음 이후에, 홀로코스트 이후에 인간은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넌 거에요. 신관에서도요. 그 말은 결코 초월적 유신론관은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신관으로 더 승화되고 바꿔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 보수 기독교는 그것을 받아들일 용기가 아직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전히 그 신관이 절대지배적인, 만물초월적인, 군주론적인 이미지를 가지니까 그것이 정치 사회적으로 반영이 되면 기독교가 보수 우익 정권을 지지하는 세력이 되는 거예요. 틸리히는 보수적인 절대 초월적 신관이 발전하면 할수록 그것이 지배하는 기독교 국가 공동체의 정치는 군주지배적일 수 밖에 없다는 지적을 합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신관은 확실히 루비콘 강을 건넜어요. 단순한 범신론에 가까운 내재신도 안되고 초월신도 안되고 초월하면서 내재하고, 내재하면서 초월하는, 또 단순히 내재 초월의 위 아래의 도식만이 아니라 미래를 지향해 가는 창조적인 전진과 새로움과 아름다움을 같이 이뤄가자고 산고의 고통이라는 표현을 썼죠. 산고의 고통을 같이 경험하시는 하나님의 신관이 내가 나를 비롯한 깨어있는 평신도들이 갖는 신에 대한 이해거든요.

신정론이 생기는 문제 발단은 고통과 죄의 원인을 인과론적으로 추적하면서 동시에 수직 관계에 있어서 절대 초월적 유신론이 모든 세상을 통치하는 이상 모든 세상의 불의에 대해서도 궁극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전제 때문에 생기는 신학적 질문이야. 절대 초월자가 만물을 지배하시고 통치하신다면 당신이 통치하는 창조질서 속에 왜 이런 납득할 수 없는 불의와 고난이 있습니까? 대답좀 해주시오. 이것이 신정론이거든요. 그것에 대해 별별 설명을 해도 이것이 불완전 했어요. 지금까지의 설명은 신의 교육적인 과정밖에 없어요. 우리가 모르겠는데 그것을 두신 것은 우리를 교육하고 연단하기 위해 두셨다. 그러니까 참고 견디며 이겨내라고 하는 것이죠. 그것보다 좀 더 나아간 것이에요. 범재신론은 말이죠. 그러려면 초월 신관의 모든 만유 위에 계신 하나님이 만유 가운데 만유를 통하여 존재하시는 신의 존재 양식이 있다고 하는 성서적 증언을 되살려 내면 신정론에 대한 날카로운 송곳 질문이 없어지게 돼요. 왜 그 고난을 신이 같이 당하고 있으니까요.

마지막 하고픈 말은 사생관에 있어서 기독교는 사상사적으로 네 가지의 중요한 요소가 서로 뒤섞여 있다는 것이에요. 종교 철학적 뿌리로 말하면 이 네 가지 요소가 물과 수소와 만나 물이 된 것이기 때문에 간단한 종교가 아니란 말입니다. 정말 오늘날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신학 공부를 철저하게 잘해야 해요. 그것이 지닌 중요한 통찰의 핵심이 원시 그리스도교의 케리그마 속에 융해되어 어떻게 표출되었는가를 신학교육 과정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그 지점에 서보면 성서의 어떤 구절을 선택했을 때 이쪽 혹은 저쪽에 뿌리를 두는 구절이 나올 것인데 그럴 때 한쪽으로 치우쳐져 단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면도 조명하면서 이것이 갖고 있는 특징이 이렇다느니 설명을 해야하야 하는 것이죠. 현재는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형국이 되어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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