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내게 영생이란 이웃장작과 만나 한줌 재로 전소하는 것”

[특집대담] 철학자 엄정식 한양대 석좌교수편(하)

삶/고통, 죽음 등은 종교의 출발이요 종말이라 할만큼 종교적 담론 안에서 자주 회자되는 주제들이다. 이러한 주제들과 관련해 종교들은 앞선 성인들의 문답에 근거해 각기 나름의 답을 제시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답들 중에는 삶의 다차원성을 무시한 채 보편성 혹은 전체성이란 이름으로 신앙하는 개개인의 ‘다양성’을 억눌러 왔던 것들도 분명 있었다. 종교가 때때로 인간 해방, 즉 인간 구원이 아닌 인간 억압의 기제로 작용해 왔다는 비판을 받아온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본지는 계사년 신년특집으로 그간 신앙인들이 비판적 성찰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의심없이 수용했던 삶/고통, 죽음 등에 관한 종교의 가르침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종교의 종교로서의 제 자리 찾기와 더불어 인간 해방의 길에 작은 등불을 비추고자 하는 시도다. 형식은 대담으로 진행되며, 내용은 파트별로 신학/철학/종교학 편으로 구성된다. -편집자주

▲특집대담 ‘삶/고통, 죽음에 대해 묻다’의 두번째 대담에서는 철학자 엄정식 한양대 석좌교수를 만났다. 대담은 그가 활동 중인 한양대 기계공학관의 한 건물 연구실에서 진행됐다.

- 다음으로 고통의 극점이라고 불리는 죽음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고자 합니다. 철학에서는 죽음을 숙명(Fate)으로 보는 경향이 강합니까? 아니면 낭만으로 보는 경향이 강합니까? 또 ‘죽음’에 대한 이해가 전자나 후자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다면 그에 따른 문제들이 파생되리라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를 들면 전자는 인간의 유한성을 강조하다보니 인간의 자기 초월성을 망각케 합니다. 반면 후자는 인간의 초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니 인간의 유한성을 망각케 하여 삶과는 엄연히 다른 ‘죽음’을 똑바로 직시하지 못하게 합니다.)

“철학적으로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가 중요한데 사실 ‘죽음’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런데 이 불가피한 ‘죽음’을 어떻게 대면하느냐에 따라 태도가 좀 달라질 것 같아요. 숙명론은 사실 인과론하고는 다릅니다. 숙명론은 결과에 대한 비관적 태도란 말합니다. 결과를 예측하고 그것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있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비관도 아니지만 낙관도 아닌 것이 있습니다. 당당하게 ‘죽음’을 대면하는 것 말이죠. 그것을 저는 철학적인 ‘죽음’이라고 봐요. 소크라테스를 최초의 순교자라고 우리가 얘기하는 게 ‘죽음’ 앞에서 담담했던 모습 때문이거든요. 물론 소크라테스의 입장이 정확히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많아요. 그런데 세 대화록 [변명], [크리톤], [파이돈]이라는 대화록이 있어요. [변명]은 재판 받기 전에 재판정에 가서 자기 입장을 변호하는 기록이고, [크리톤]은 사형언도를 받았을 때 마지막 날 어릴 때부터 친구인 동갑네기가 ‘너 이렇게 죽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그를 탈옥시키려고 하는 얘기를 담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파이돈]은 제자들을 모아놓고 ‘죽음’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담은 것이거든요. 그런데 ‘파이돈’은 플라톤이 10년 후에 쓴 것이에요. 거기에 ‘영혼불멸’이라는 얘기도 나오지만 그것은 소크라테스의 견해는 솔직히 아닌 것 같아요. 왜냐하면 플라톤이 남 이테리 지방을 여행하고, 그 지역의 죽음관의 영향을 받아서 그것을 드라마타이즈 한 것이거든요. 따라서 가장 정확한 것은 소크라테스의 죽음관이나 그 입장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으로, 앞서 언급된 그런 가감이 아직 들어가지 않은 [크리톤]과 [변명] 이 두 가지에요.

그러나 놀랍게도 거기에선 적극적으로 죽음에 대해 얘기한 게 없어요. 다만 죽을 뿐입니다. 그 대신 무엇을 추적할 수 있느냐 하면 자기가 이 사람이 평생 추구한 게 로고스라는 것 있잖아요. 로고스가 성경 창세기에는 말씀으로 번역이 되어 있지만 언어(Language)하고, 논리(Logic)하고, 이성(Rationality)하고 로고스(Logos)는 사실 어원이 같아요. 로고스를 위해서 로고스에 의해서 로고스의 삶을 살라고 소크라테스가 그것을 추적할 수 있어요. 그래서 그것을 조금 더 패러프레이즈(paraphrase) 한다면 다만 로고스의 입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고스대로 생각하고, 생각한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대로 살라는 것이며 또 사는 대로 죽어가라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그것을 ‘철학적 죽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니체나 하이데거나 나름 다른 방식으로 보완을 하고자 노력을 한 것 같은데 죽음을 삶의 완성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삶이 미완성(incomplete) 프로그램이라면 죽음이 슬픔이거나 기쁨일 수 있죠. 왜냐하면 무엇인가 못다 한 얘기를 해야 하니까 슬픔이고, 또 이제 보상을 받을 수 있으니까 기쁨일 수 있겠죠. 그러나 완성된 삶을 산 사람에게는 기쁨이 아닌 것처럼 슬픔도 아니란 말입니다. 에픽테토스는 바람직한 죽음은 소크라테스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죠. 그래서 저는 그게 상당히 철학적이라고 봐요. 로고스라는 것 자체가 철학의 신조니까 말이죠. 그것을 무엇으로 해석하느냐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지만, 가장 전형적으로 그것을 보여주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재미난 게 로고스라는 말이 가장 드라마틱하게 나오는 대목이 ‘크리톤’ 대화의 마지막 부분이에요. 크리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크라테스를 설득합니다. 나중에 급하니까 ‘임마 너 칠십이 되어서 어린 자식 하나 남겨두고 죽을 수 있어’라는 등의 감정적인 얘기마저 나오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자기가 섬을 사놓은 게 있어요. 소크라테스가 감옥에서 나오면 거기서 여생을 즐기게 하겠노라고 했어요. 크리톤이 워낙 부자였거든요. 별별 장치를 다 해놓은 것이죠. 간수도 매수하고요. 이렇듯 진짜 많은 초이스들이 있었고, 거기에 따른 여러 아규먼트(Argument)가 있었죠. 왜 자신이 도망가지 않는지 말이죠. 그런데 거두절미하고 마지막 마디가 나폴리에 있는 박물관에 소크라테스 흉상이 있는데 거기에 새겨져 있어요.

그게 크리톤에게 한 소리인데 ‘나는 로고스만을 생각하고 로고스에 의해서 살아왔거든. 그런데 네가 한 말이 더 좋은 로고스가 아니야. 난 항상 최고의 로고스에 따라 행동하거든. 원컨대 네가 나를 설득시키기 바랐어. 그런데 설득시키지 못했어. 내 로고스를 꺽지 못했어. 그래서 나는 이것을 선택한다. 내가 왜 지금 안 죽어야 되는지 더 좋은 이유를 대지 못했어. 근데 거기서 로고스는 말도 되고 이유도 되고, 입법도 되고 사실 같은 단어거든요. 그래서 그것을 철학적이라고 해요. 어떤 초월적 신에게 그런 게 아니라, 내면에 있는 신과 의논을 하는 것이죠.

최근에 비트겐슈타인의 삶과 죽음에 대해 발표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놀랍게도 소크라테스와 비슷한 점이 많아요. 삶을 실감하기 위해, 삶을 극대화하기 위해 죽음 근처로 자신을 자꾸 이끌어 냅니다. 긴장감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래서 이 사람은 군대 갈 필요가 없었는데 1차 대전 때 군대 가서 최전방에서 근무합니다. 그리고 캠브리지 교수였는데 별안간에 노르웨이 산골 비탈 언덕에 오두막을 짓고 혼자 사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결국 암에 걸려 죽었죠. 이 사람이 또 오스트리아 최고의 부자 중의 하나의 막내아들이에요. 다 사회에 기부하지 않았나요? 그게 나는 철학적 죽음이라고 보거든요. 바람직한 죽음 말이죠. 일관된 삶을 살고, 산 채로 자족에 이르는 것 있잖아요. 그래서 이 사람에게 다가온 죽음이 애처롭지도 않거니와 환희도 아닌, 당당하게 말이죠. 마치 감옥에 가두어도 이 사람이 부자유를 못 느끼는 것 있잖아요. 죽음이 다가 오는데도 씩 웃고 여행 떠나듯 가는 것 말이죠. 그런 게 근사한 죽음이 아닐까. 그런 죽음을 죽었을 때 그 사람에게는 죽음과 삶이 동전의 양면인 게 되는 것 있잖아요.

▲엄정식 한양대 석좌교수는 소크라테스에 이어 그의 죽음 이해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보완, 발전시킨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의 이야기를 꺼내며 철학적 죽음이란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입장을 확인했다.

저는 현대 철학자 중에 죽음을 소크라테스적으로, 말하는 이들이 있다고 봅니다. 물론 다른 식의 반영이나 하이데거 같은 사람 있잖아요. 그 사람은 죽음에의 선구라는 표현을 쓰는데 죽음을 산다고 생각하라는 것이거든요. 그런 표현을 쓰진 않았지만, 우리가 죽음의 시점에서 보면 살아가는 것이 죽어가는 것이잖아요. 우리가 죽을 존재라는 것을 늘 의식하라는 것이에요. 그러면 속된, 속물적 삶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거든요. 실존적 삶의 자세에 있어 긴장감을 늘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죽음을 초극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죽음이 최고의 고통이라면 그 고통을 피하거나 수동적 자세로 받아들이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고통을 굉장히 능동적인 자세로 말이죠. 자기가 오히려 (죽음을 향해)다가가는 것 있잖아요. 죽음을 산다. ‘존재와 시간’에 그런 표현들이 있거든요.

비트겐슈타인이 자기 메모지에 무엇을 적고, 내가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조급해 했대요. 그 시의 한 구절에 이런 얘기가 나와요. ‘옛날 목수’라는 시가 있어요. 앞 구절을 외어보면 이렇습니다. ‘옛날에 옛날에 목수들이 살았네. 그런데 이 목수들이 집을 지을 때에는 사람들이 보는데 뿐만 아니라 잘 안 보는 데도 정성을 다해 일을 했네. 아니 전혀 볼 수가 없는 데도 그렇게 신경을 썼다네. 신들이 보시니까.’ 그런 시가 있어요. 논어에도 ‘신독’이라는 표현이 있거든요. 신중하다 할 때 ‘신’에 홀로 있다고 할 때 ‘독’이란 말이죠. 선비가 모름지기 혼자 있을 때에도 예의범절을 갖추는 것 있죠.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것이란 말이죠. 누가 안 보더라도 개판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있잖아요. 그런 자세로 세상을 살던 사람이 죽음을 맞이할 때 어떻겠는가. 그것은 환희도 아니고 고통도 아닐 것입니다. 이상적으로 거기까지는 안 가더라도 그 근처에 근접했다면 대단한 것이라고 보고 싶은 것입니다.”

- 정리를 해보자면 철학에서는 죽음을 숙명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는 얘기이고, 그런 관점에서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철학적 죽음에서의 하나의 모델이라는 말씀으로 정리해 볼 수 있겠습니다.                        

“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다시 확인하는 얘기이지만 철학에서는 죽음을 숙명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고 봅니다. 철학은 객관적인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해서 당위의 법칙을 도출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죽음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도리는 없는 것이니까요.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죽음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임하는 주관적 태도를 정하는 것일 것입니다. 결국 죽음 앞에서 겸허한 자세를 갖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겠지요. 그러한 태도는 자신의 삶을 완성함으로써만, 적어도 그렇게 하려고 최선을 다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자살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입니다. 그것은 낭만적인 죽음관의 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자기 자신의 목숨을 자의로 끊을 권리가 있다는 오만이 전제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내세에 대한 지나치게 낙관적인 확신, 그리고 현재의 고통스런 상황에 대한 도피주의적 태도 같은 것이 엿보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유한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초월성이 약화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점입니다. 자기가 처한 상황을 직시하고 극기의 고행을 통해서 그것을 극복하는 것도 초월성의 한 표현이라고 저는 봅니다. 문제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망상이나 환상이 아니라 좀 더 설득력 있는 인간상이나 인간관, 혹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 앞서 말씀하신 [파이돈]에 의하면, 소크라테스가 영혼불멸설에 근거해 ‘죽음 너머의 희망’을 바라고는 주저없이 독배를 들었다며 소크라테스의 죽음관을 영혼불멸설에서 찾는 학자들도 있던데 어떻게 보시나요?

▲엄정식 교수는 바람직한 죽음이란 "바람직한 삶의 완성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그러한 식으로 해석하는 철학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플라톤의 죽음관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로 [파이돈]에 나타난 것을 반영한 것인데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죽은 지 10년 후에 플라톤이 남부 이탈리아 지역을 여행한 후에 집필한 책입니다. 그는 그 지역의 영혼관에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자신의 죽음관이 가장 잘 반영되어 있다는 [변명]이나 [크리톤]에는 그런 적극적인 입장을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아는 척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에 소크라테스가 죽는 이유는 ‘저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그에게 삶이 소중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의연하고 대담하게 포기할 만큼, 다시 말해서 죽음을 받아들일 만큼 더 귀중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습니다. 가령 국법의 준수, 정의의 구현, 선의 실현, 영혼의 정화 같은 것 말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죽은 너머의 희망’ 때문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에 비해서 예수의 죽음은, 저는 이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상당히 ‘저 세상적’인 데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만약 그가 처절한 고통을 겪으며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 사실이라면 분명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적어도 그 당시에는 그에게 ‘억울하다’는 매우 인간적인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그의 이해가 어떤 것인지 저로서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합리적으로 다룰 수 있는 철학적 담론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한편 저에게 죽음은 적어도 세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 그것은 ‘이별’을 의미합니다. 그것도 현재의 상태로는 결코 다시 만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이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것은 그런 종류의 이별이기 때문에 ‘고통’을 의미합니다. 슬픔과 외로움과 절망을 느끼는 고통이며 죽는 과정의 통증과 죽은 후의 무지에 대한 공포를 예상하는 고통을 말합니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초월’을 의미합니다. 바람직한 삶을 살아낸 사람에게 그것은 단순히 종말이 아니라 삶의 완성이라는 의미에서 초월이라는 뜻입니다. 종교적으로는 ‘구원’이나 ‘해탈’의 뜻이 될 수 있지만 정의와 사랑과 우정과 같은 가치의 실현을 위한 죽음도 초월의 의미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로 바람직한 죽음은 바람직한 삶의 완성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 좋은 예를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삶과 죽음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철학자의 죽음을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라고 모델화 한다면, 종교적 차원에서의 죽음을 얘기할 때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는 ‘죽음’을 고통스럽게 맞이했다는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죽음’에 대한 이해와 자세가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철학자이신 엄정식 교수님에게는 전자, 즉 소크라테스적, 철학적 죽음 이해가 자신의 ‘죽음’ 이해에 가깝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럼요. 닮아 보려고 애를 쓰는 것이죠. 저는 그런 생각을 해요. 늘 죽어간다고 생각하니까 그날그날을 하루의 죽음답게 정리된 자세로 나름대로의 통일성(Unity)이 있잖아요. 그런 삶들의 시간들의 연속이 결국 삶 전체가 되니까요.

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실 인간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말을 하지 않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수배당할 때 피땀을 흘리는 장면에서 잘 드러나고 있지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가장 인간적인,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였다는 그것이 오히려 제겐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결국 십자가에서는 자기가 ‘다 이루었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완성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거든요. 그 양반이 철학자는 아니어서 쿨 하지는 못할 수 있어도 그러나 자기 프로그램의 완성이라는 게 있었단 말이잖아요. 제가 볼 때 그 양반한테는 (십자가 이후의 지상에서의 삶을)더 살래도 살 이유가 없었다고 봐요. 석가도 미소를 지으면서 자족을 이루었잖아요. 그런데 보통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더 어필이 된다고 봅니다. 보통 사람들의 못난 모습도 다 보였으니까요. 공감대가 넓어지잖아요. 나도 동참할 수 있다고 하면서 말이죠. 하여튼 그런 모습이 죽음이 더 이상 죽음이지 않게 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자 엄정식 교수에게 죽음 그리고 그 이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엄 교수에게 영생이란 "이웃 장작과 만나 한 줌의 재로 전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하고픈 이야기는 제 에피소드인데 죽음이나 삶에 임하는 자세가 어떻고 싶은가 하는 것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은 것입니다. 하나의 장작개비를 닮고 싶은 것 있죠. 그 이야기가 왜 나오냐 하면 저는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위였는데 철이 들고 교수가 되면서 뿌리를 찾고 싶은 욕구가 생기더군요. 선친의 고향을 알아보니까 당진이더랍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정확하게 26년 전에 그곳을 더듬어서 찾아갔어요, 그런데 (선친이)100년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흔적조차 못 찾았어요. 그래서 그 근처 농가를 사가지고,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어요. 언제 시간되면 놀러 오셔도 돼요. 교수 친구들도 많이 오고 해서 조금 손도 보긴 했어요. 그런데 내가 거기 250년 된 농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다 쓰러져 가는데 흙을 더 바르고 해서요. 근데 반드시 거기서 잘 때는 군불을 떼고 자게 되는데, 그 군불을 떼는 순간 저의 생활 방식(Way of Life)은 3000년 전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군불을 뗄 때 그 이론은 참 간단하거든요. 잔가지, 굵은 가지, 장작을 순서대로 올려놓으면 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추운 날에는 잘 타지 않아요. 신문지도 안타요. 열을 받으면 얼었던 아궁이 녹아서 수증기가 꽉 차서 불이 붙지 않는 것이죠. 석유를 부어도 석유만 태우고 꺼지고 말아요. 그럴 때 바짝 마른 소나무를 넣으면 타는데 그게 참 상징적 의미가 있더라고요. 흥미로운 것은 그 소나무 장작개비가 자기를 태울 뿐만 아니라 남도 태운다는 거랍니다. 열을 나눠준다는 얘기죠. 그리고 또 아궁이 구조가 기가 막히게 배치가 되어 있어야 하거든요. 잔챙이들이 잘났다고 떨어져 있으면 각자 피식 타고 말아요. 또 굵은 것들이 곁에 너무 붙어 있으면 서로 못 탑니다. 자기가 어떤 사이즈의 장작이냐에 따라 자기 위치를 확보를 해야 한다는 말이거든요.

그게 완벽하게 구조가 짜였을 때 불길이 오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늘 해보니까 철학자답게 질문을 한 번 해보는 것이에요. 질문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의 장작개비가 장장개비로서 영생할 수 있을까’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 그 방식이 무엇일까? 그런데 나 혼자 답을 찾았어요. 한 줌의 재가 될 때까지 타는 것이다. 그게 장작개비의 영생이라고 저는 봅니다. 완전히 전소하는 것 있죠. 그런데 어떤 경우에도 혼자는 탈수가 없어요. 자기 정체성대로 자기 위치를 확보하고 좋은 이웃 장작개비를 만나 서로 불길을 나눠주면서 완전히 전소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나는 장작개비로서 영생하는 것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어서 ‘나’라는 장작개비가 전소하는 방식은 무엇일까? 내가 갖고 있는 가능성을 전부 현실화 했을 때, 자아실현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나는 삶을 그렇게 규정하는데 아까 욕구와 당위와 능력을 확인하고 그것을 극대화 해 나가는 것 있잖아요. 그랬을 때 저는 그것을 영생이라고 보거든요. 그 뒷이야기는 나는 신학자가 아니라서 모르겠지만, 거기까지 철학자로서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여간 좋은 이웃 장작개비를 만나는 게 중요한 것이죠. 기독교에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게 이웃하고 사실은 하나가 되라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이웃을 자기 자신으로 여겨 자신의 외연을 넓히라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기독교적 가르침도 일관 되어 있다고 봐요. 저는 이 군불로 마무리 하고 싶어요. 상징적인 얘기로 말이죠. 그만큼 자아실현을 위해서는 논리적으로 자아인식이 선제 되어 있어야 하는 것 있잖아요. 자아인식은 삶과 죽음의 키워드입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거든요. 그 나머지는 더 높은 차원에서 평가를 해야 할 문제고, 그게 철학적 담론의 완결된 모습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 ‘부활의 종교’ 기독교는 ‘영생’ ‘복락’ ‘기쁨’을 누리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말합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죽음’ 이후의 세계, 즉 내세는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요즘 철학에서 연구되는 죽음학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갖고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말해서 죽음 이후의 세계의 존재에 관해 적극적인 철학적 논증을 제시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그것은 그러한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혹시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세계라고 명시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라고 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10년 후 어떻게 될지 예측하는 것도 결코 수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철학자들 중에도 어떤 형태로든 사후의 세계가 존재하리라는 것 혹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예가 적지 않습니다. 중세의 교부나 스콜라철학자 등 기독교 계통의 철학자들은 물론 고대의 플라톤이나 근대의 칸트가 그 좋은 예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것을 철학적으로 논증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믿고 있는지의 여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삶에 임하는 자세는 분명히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지금으로부터 100년 혹은 200년 후에 어떤 형태로든지 지금의 내 삶을 회고할 수 있다면 내가 어떤 자세로 삶아야 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철학계에서 이 주제에 관한 논의는 종교계나 상담심리학계, 혹은 의학계에서 만큼 활발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혹시 논의가 있더라도 이런 분야와의 연계 속에서 이 주제가 다루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가령 대뇌 생리학이나 생의학의 발달로 안락사나 존엄사와 관련하여 죽음을 다시 정의하거나 여기서 제기되는 윤리적인 문제들이 다루어집니다. 그러나 엄청난 속도로 과학기술이 발달하기 때문에 문제의 구성 자체가 어렵고, 따라서 철학적으로 접근하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철학사적으로는 비교적 활발한 편입니다. 가령 동서양의 유수한 철학자들의 죽음관을 소개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시도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지나간 시대의 일정한 문화권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사상사적 의미를 넘어 현대적 관점에서 음미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저는 현대철학자 중에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의 죽음관에 흥미가 있습니다. 그들은 현대의 과학기술시대를 매우 부정적으로 조명하였으며 서로 양상은 다르지만 삶과 죽음에 대해서 깊은 성찰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엄정식 교수에게 ‘고통’과 ‘죽음’이란 요소가 씨줄과 날줄로 엮인 삶이란 무엇일까? 그는 "삶을 자아의 실현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하이데거(M. Heidegger)는 잘 아려져 있는 바와 같이 [존재와 시간]에서 “그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의 죽음을 떠맡을 수는 없다...인간은 각기 항상 자기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떠맡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자신의 정신력과 인격 전체를 걸고 결단해야 하며, 이른바 ‘죽음에의 선구’, 다시 말해서 죽음을 늘 의식하면서 사는 실존적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불안이라는 기분에 사로잡히게 마련인데, 그것을 피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불안을 통해서 ‘보통 사람들’의 세계를 초월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실제로 그러한 자세로 삶과 죽음에 임했는지는 의문입니다만 말입니다.
   
이에 비해 재차 강조하지만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은 삶과 죽음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것을 한 동전의 양면으로 이해하고 늘 죽음을 의식하며 매우 수도자적인 삶았다고 볼 수 있지요. 그는 이미 젊은 시절에 [논고]에서 “우리가 영생한들 삶의 수수께끼가 풀릴까?”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영생을 바라기 보다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상에서 극기와 고난의 삶을 이어갔습니다. 죽음에 다가갈 때 영혼이 정화되고 삶이 가장 고양되는 반면 편안과 안락을 추구할 때 영혼이 혼탁해지고 삶이 수렁에 빠진다고 믿었으니까요. 그는 마치 롱펠로우의 “옛날 목수”가 아무도 보지 않는 구석구석까지 집을 정성들여 짓듯이 삶을 소중하게 여기며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신들이 지켜보고 계시니까요.”

- 마지막으로 ‘고통’과 ‘죽음’이란 씨줄과 날줄로 엮여 지는 삶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철학자 엄정식에게 삶이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한다면 저는 삶을 ‘자아의 실현’이라고 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그 나로서 나답게 사는 것이 저에게는 삶의 의미임과 동시에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자아가 욕구와 능력과 당위라는 세 변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삼각형이라고 이해하는데, 이것을 인식하고 자신이 어떤 종류의 삼각형인지 실감하며 그것을 극대화하는 삶을 가장 바람직한 삶이며 동시에 가장 아름답게 죽음을 맞이하는, 혹은 ‘영생하는’ 자세라고 봅니다. 우리는 그 전형을 소크라테스와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로고스(Logos)’에 다라 생각했고, 생각한대로 말했으며, 말한 대로 행동했는데, 그러한 방식으로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태도로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것은 하나의 장작개비에도 해당될 것입니다. 그것이 영생하는 길은 좋은 이웃 장작을 만나 한 줌의 재가 될 때까지 전소하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 과정에서 ‘타오르는 고통’도 모두 아름답게 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끝)

철학자 엄정식 교수는

1942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철학과와 서울대학교 신문대학원을 졸업했으며, 국제 로타리장학생으로 도미해 웨인 주립대학교 인문학 석사학위와 미시간 주립대학교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아메리카학회 회장, 분석철학회 회장, 철학연구회 회장, 서강대학교 대학원장, 하버드대학교 철학과 풀브라이트 교환 교수, 철학문화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문진포럼 기획위원장,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및 한양대학교 석좌교수로 활동 중에 있다. 저서로는 『지혜의 윤리학』 『비트겐슈타인과 분석철학』 『확실성의 추구』 『분석과 신비』 『철학으로 가는 길』 『자아와 자유』 『비트겐슈타인의 사상』 『철학기행: 우리는 누구인가』 『당진일기』 『길을 묻는 철학자』 『나루터 가는 길』 『소크라테스, 인생에 답하다』 등이 있다.

[대담= 김진한 편집국장, 사진편집 및 정리= 이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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