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자대학교 장윤재 신학대학원장이 얼마 전 '위기의 시대, 희망의 선교'라는 대주제로 열린 세계기독교선교포럼 2025년 목회자 포럼에서 '희년, 하나님이 제정하신 정의와 평등의 제도'(Jubilee as God's Institution of Justice and Equality)란 주제로 발표했다.
장 교수는 해당 영역의 주제 발표에서 지난 50년간 세상을 지배해 온 '시장 근본주의' 이데올로기의 문제점을 진단하며 "신자유주의 50년의 결과는 극단적인 양극화와 그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 그리고 불의의 만연이라는 사실이 세계 곳곳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총평했다.
또 "오늘의 정의롭지 않은 체제 속에서 우리 모두는 '죄인'"이라며 "이 체제 안에서는 우리가 행하는 악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지 않는 선이 우리의 죄를 고발한다. 죄는 하지 말라고 금한 것을 한 것만이 아니라, 하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않는 것도 죄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극단적인 양극화와 불평등 그리고 불의의 극복을 우선적인 선교 아젠다로 제시했다. 본지는 발제문 전문을 입수해 이를 나누어 게재한다.- 편집자주
▲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7. '빚 권하는 사회'
성서의 희년은 또 오늘의 '빚 권하는' 약탈적 금융사회 속에서 빚을 탕감하여 자유와 해방을 주는 복음으로 선포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빚은 빚을 진 당사자의 책임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채무자의 무분별한 소비와 방만한 재무관리도 문제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먼저 빚을 권하고 빚을 통해 부를 창출하는 오늘의 금융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 문제는 없는지 물어야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는 두 단계의 과정을 밟아왔습니다. 하나는 1970년대 초반까지의 소위 '산업 자본주의' 단계입니다. 다른 하나는 고정환율제와 자본의 국제적 이동에 제약을 가하고 있던 이 체제가 붕괴한 이후 지금까지의 '금융 자본주의' 단계입니다. 신자유주의와 연계된 이 금융 자본주의 아래서 지난 50년간 세계 경제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중 가장 크고 위험한 변화는 금융자본의 전면 부상입니다.
사적으로 통제되는 금융자본에는 두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공공의 책임성'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금융자본은 이문을 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갑니다. 하지만 자신의 기대가 거품으로 판명되었을 때는 금융자본은 즉각 그 비용과 손실을 '사회화'합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그 비용과 손실을 전가한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로, 사적으로 통제되는 금융자본은 투자가 아니라 투기를 본업으로 합니다. 국제외환시장에서 거래되는 천문학적인 자본의 대부분은 단기성 투기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돈을 벌지만, 일자리가 창출되지도, 공장이 새로 지어지지도 않습니다.
이런 금융 자본주의 아래서 금융시스템은, 놀랍게도, 부채를 창출함으로써 돈을 창출합니다. 누군가 열심히 일해서 돈이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 은행에 빚을 지기 때문에 돈이 만들어집니다. 모든 돈은 신용입니다. (All money is credit) 모든 돈은 부채라는 말입니다. 오늘날 지구상에 존재하는 돈의 95% 이상은 누군가가 은행에 부채를 짐으로써 만들어진 돈입니다. 은행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부채를 발행함으로써 돈을 '만들어' 냅니다. 부채는 잠정적으로 무한정한 것이기 때문에, 돈의 공급도 무한정 가능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손쉽게 '무한정' 만들어지는 돈이 '무한정' 생산과 거래를 구조적으로 강제한다는 사실입니다. 화폐공급이 증가하는데 실제 세계에서의 생산과 거래량이 같은 규모로 성장하지 않으면 돈의 가치는 갈수록 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경제는 계속 성장해야만 하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자원과 에너지를 계속 사용해야만 합니다. 자전거가 쓰러지지 않으려면 계속 달려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시스템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라도 갈수록 더 많은 자연이 쓰레기로 변해야 하고, 갈수록 더 많은 사람이 날마다 채무자로 탄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빚은 이렇게 개인의 문제이기 이전에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빚 권하는' 약탈적 금융사회 속에 살고 있습니다.
실로 우리가 생활하기 위해 사용하는 물건과 서비스에 은행 돈이 가하는 압력이 점차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 압력 때문에 경제는 계속 성장을 강요당합니다. 한정된 경제 규모 안에서는 사회적 약자를 착취함으로써 은행 빚을 갚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정한 한도를 넘으면 다음 세대의 몫까지 미리 끌어당겨 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환경오염과 파괴를 수반하는 경제개발입니다. 이러한 경제개발은 다른 말로 - 쉬운 말로 - 미래 세대에 대한 착취입니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나 자연을 착취하는 것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이도 저도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으면 마침내 전쟁입니다. 한국의 생태학자 고 김종철 선생은 근대 이후 거의 모든 전쟁은 근본적으로 바로 이 현대 자본주의 금융시스템의 구조적 결함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오늘날 기후 위기가 가속화하고, 전쟁이 확산하며, 민주주의가 퇴행하는 전 세계적인 현상은 바로 이런 국제금융 시스템의 근본적 결함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아, 금융 자본주의 아래 사는 우리는 모두 돈의 노예이고 빚의 노예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24)라는 바울의 탄식이 사실은 우리의 탄식입니다. 이 공멸의 시스템에서 우리는 어떻게 생명과 구원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까?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과 같은 금융 자본주의 체제 아래 살면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21세기 새로운 생명 사회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물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성장하지 않으면 기능할 수 없는 현재의 화폐 시스템 대신에 어떤 지속 가능한 대안을 상상하고 실천할 수 있는가? 이것이 문제의 요체입니다.
희년은 기쁜 소식입니다. 자유와 해방의 좋은 소식입니다. 희년은 "모든 빚이 탕감되며 노예들이 자유를 얻는"(레위기 25:10) 해입니다. 이런 희년을 위해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희년 은행'이라는 매우 특별한 대안 은행을 세웠습니다. 고금리 부채로 허덕이는 청년들의 신음에 대응하고, 금융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낙오한 이들의 고통에 응답하기 위해 이 은행은 세워졌습니다. 현재 600여 명의 조합원이 십시일반 무이자 저축에 동참해 약 8억 원의 기금을 조성했고, 이 기금으로 고금리 전환 무이자 대출, 청년 주거보증금 재원 대출, 그리고 청년들을 위한 공동체 주택 건립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실 빚 탕감의 원조는 하나님입니다. 성서에서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는 방법은 개인의 자발성에 기초한 나눔도 있지만, 인간의 한계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단지 인간의 자발성에만 맡기지 않으시고 그것을 안식년이나 희년과 같은 '제도'(institution)로 만드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희년은 제도입니다. 희년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정의와 평등의 제도'(Institution of Justice and Equality)입니다. 정의와 평등의 제도로서의 희년은 강자와 시장의 자유만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자유의 제도'(institution of liberty)에 대한 저항이고 대안입니다.
예수께서는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진(혹은 빚진) 자를 사하여(혹은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혹은 빚을) 사하여(탕감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라 가르치셨습니다. 이 기도는 곧 '희년의 기도'입니다. '죄'는 곧 '빚'이고 '빚'이 곧 '죄'입니다. 빚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이 곧 희년입니다.
극심한 경제적 양극화 속에서 생계 때문에 빚을 지고, 학업 때문에 빚을 지고, 결국 그 빚을 갚지 못해 쫓기고, 장기를 적출당하고, 죽음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에게 희년은 긴급 빈민 구호 대책입니다. 우리는 '희년 기금'을 조성하거나, '희년 은행'을 세우거나, '희년 주일'을 선포하면서 대대적인 빚 탕감 운동을 벌일 수 있을 것입니다.
실로 성서의 희년은 종교적 안전장치입니다. 사회의 최하위계층으로 떨어져 있거나 고리대금의 수탈적 압박에 짓눌려 근근이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호하는 종교적 안전장치가 희년입니다. 이 희년은 자비로운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온 제도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빚 권하는' 약탈적 금융사회 속에 살면서 빚의 노예가 된 사람들에게 주의 은혜의 해, 곧 희년의 은총과 기쁨을 선포해야 합니다. 더욱 구체적이고 다양하며 창조적인 방안이 논의되고 도출되기를 바랍니다.
8. '기차를 멈추는 힘'
고대 이스라엘에서 땅은 7년마다 쉬었습니다. 출애굽기에 있는 안식년 법 때문입니다. "너희는 여섯 해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 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라."(출애굽기 23:10-11) 더욱 놀라운 것은 희년법입니다. 레위기에는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레위기 25:8-11)라고 했습니다. 7년마다 땅을 쉬게 하는 것도 모자라, 이스라엘은 50년마다 2년간 땅을 쉬게 했습니다. 7 x 7 = 49년째가 되는 안식년에 쉬고 뒤잇는 50년째 희년에도 땅을 쉬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48년째 해에 수확한 식량을 가지고 3년이나 버텨야 했습니다. (49년째 안식년 + 50년째 희년 + 51년째에 수확하기까지의 희년 다음 해 = 3년) 하지만 과연 그러고도 살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만일 일곱째 해에 심지도 못하고 소출을 거두지도 못하면 우리가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 내가 명령하여 여섯째 해에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그 소출이 삼 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레위기 25:20-21) 과연 고대 이스라엘은 이 약속을 진실로 믿고 실천했을까요?
<성서의 생태학>이란 책을 쓴 자연과학자 A.P. & A. H. 휘터만 부자(父子)는 그랬다고 이야기합니다. 희년이 단지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적 이상향이 아니라 실제로 이루어진 현실이었다고 확언합니다. 그들에 의하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중해 연안에서 유일하게 오늘날 의미의 퇴비를 사용했습니다. 이 퇴비에는 요르단 계곡에서 얻은 질산나트륨이 첨가되어 있었습니다. 휘터만 부자는 안식년과 희년법을 제정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질산나트륨, 곧 퇴비를 사용하는 지혜를 주셔서 그 척박한 땅에서도 풍요로운 생명의 역사를 이어가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고대 이스라엘의 수확고가 당시 세계 최고였다고 말합니다.
한국의 시인 백무산은 이렇게 <정지의 힘>을 노래했습니다.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 / 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 /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 /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 / 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달리는 이유를 안다 /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희년, 그것은 '세상을 멈추는 힘'입니다. 무한 경쟁과 탐욕의 미친 이 세상을 멈추게 하는 힘입니다. 희년, 그것은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입니다. 또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입니다. 그 멈춤과 자유의 힘으로 우리는 달릴 수 있습니다. 회복될 수 있습니다. 치유될 수 있습니다.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만약 고대 이스라엘이 안식년과 희년법과 같은 땅의 계율을 지키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몰락했을 겁니다.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애굽기 20:4-5)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맥락 없이 들으면 반발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왜 자식들이 아비들의 죄로 인해 벌을 받아야 합니까? 개인의 독자성을 중시하는 현대인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 같습니다.
하지만 '환경에 대한 범죄'의 경우엔 사정이 완전히 다릅니다. 환경 파괴는 자식과 그 자식의 자식, 또 그 자식의 자식이 반드시 대가를 치릅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욕심을 부려 땅을 과도하게 사용하면 4대까지 내려가야 땅이 회복된다는 걸 깨닫습니다. 그래서 '살기 위해' 땅의 희년을 실천했습니다. 이것은 도시를 사는 사람들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한국의 어느 경제학자가 말한 것처럼, "곧 쓰레기가 될 물건을 무한 생산하는 현 문명은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긍정하는 유일한 문명입니다."(홍기빈)
성서에 나타난 안식년과 희년법은 고대 이스라엘이 3천 년 전,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자연을 생태적으로 이해했음을 보여줍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주변 국가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흙을 사랑하고 땅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는 지속 가능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성서 안에 오늘 우리의 병든 지구와 문명을 치유하고 살릴 생명의 지혜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교리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부족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믿고 우직하게 그대로 실천하려는 의지입니다.
9. 무한한 성장에서 지속 가능한 발전으로
지구가 '온난화'(warming) 시대를 넘어 '열대화'(boiling)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기후 위기(climate crisis)가 아니라 기후 붕괴(climate collapse) 시대입니다. 재앙은 이미 시작됐습니다. 깊은 얼음 땅속에 잠자고 있던 바이러스들이 기후변화로 깨어나고 있습니다. 한타바이러스, 탄저균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수만 년간 얼어 있던 시베리아 땅의 평균 기온이 섭씨 35도를 넘나들며 땅이 녹아내린 탓입니다. 탄저균 사상자가 나오고 순록이 떼죽음을 당하고 있습니다. 3만 년 전 바이러스까지 깨어났습니다.
이미 현실이 된 기후 위기의 가장 큰 문제는 '지금 멈추지 않으면 영원히 못 멈춘다'라는 사실입니다. '내일부터 잘하면 되겠지' 하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냥 어떻게 되겠지'라고 안이하게 생각하며 하루하루 세상이 나빠지는 걸 그저 바라만 볼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기후변화는 우리의 생존이 걸린 즉각적이고 시급한 문제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 크리족의 예언 <마지막 나무가 베어 넘어진 후에야>입니다. "마지막 나무가 베어 넘어진 후에야, / 마지막 강이 더럽혀진 후에야, / 마지막 물고기가 잡힌 뒤에야, / 사람들은 알게 될 것이다. / 돈을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을."
유럽의 한 기후변화 연구소에 의하면, 작년에 이미 지구 온난화는 섭씨 1.6도까지 상승했습니다. 1.5도가 한계선이라도 2018년 송도에서의 합의가 무너진 것입니다. 이 추세가 계속된다면 금세기 말까지 지구 평균 기온은 섭씨 3.5도까지 상승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시간이 부족합니다. 이제는 멈추어야 합니다. 이제는 돌이켜야 합니다. 쉽지 않지만 지금 단행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미래가 없습니다. 2030년까지 지구온난화 가스 배출량을 2010년 수준에서 45%로 줄여야 합니다. 2050년에는 '탄소 제로' 사회로 진입해야 합니다. 2050년까지는 이제 한 세대도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구의 경제 및 사회 시스템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성서의 희년이 그 변화의 비전이고 방향이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한편으로 극단적인 불평등에 직면하고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성장을 통해서 더 이상 번영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생태계 위기에도 직면해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치명적인 이유는 불평등을 창출해서만이 아니라 지속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본에 대한 진보적인 과세가 시행되든 안 되든, 지구라는 행성은 연간 1%의 성장율마저도 영구적으로 지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류와 다른 생물 종이 지구라는 이 하나뿐인 행성 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성장의 한계'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성장이라 부른 것은 지구 위 모든 인간과 모든 자연을 산업 경제 시스템 속으로 쑤셔 넣으려는 시도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더 이상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지구가 견디어 내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성장 강박증'에 시달립니다. 여전히 '성장에의 강요'에 압박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유한한 에너지와 지구 자원의 한계에 조응하도록 경제 전체의 패러다임을 근원적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것은 "발전하지만 성장하지 않는" 지구의 에코 시스템에 인간의 경제가 순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장'(growth)과 '발전'(development)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장은 물질의 증가 혹은 양적 크기의 증가를 말합니다. 발전은 이전보다 완전하고 또 다른 상태로의 질적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무한한 성장'에 대한 대안은 '지속 가능한 성장'이나 '녹색 성장'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입니다. 이 지속 가능한 발전이 곧 희년의 경제입니다. (세계교회협의회가 제11차 칼스루헤 총회에서 새로 조직한 위원회도 '기후정의와지속가능한발전위원회'입니다.)
10. 한국교회 부흥의 비결
많은 사람이 한국교회의 부흥을 부러워합니다. 하지만 한국교회 부흥의 비밀 아닌 비밀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140년 전 선교사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한국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세워진 초대 한국교회는 희년을 실천했습니다. 한국 초대교회의 특징은 성경의 말씀 그대로를 실천하는 우직한 믿음이었습니다.
종순일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는 본래 강화도의 양반이고 부자여서 마을 사람들에게 많은 빚을 꿔 주었습니다. 이분이 목사가 되기 전 어느 날의 일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마태복음 18장에서 숨이 멈추는 것 같았습니다. 1만 달란트 빚을 지었으나 탕감 받은 사람의 비유를 읽고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며칠을 고민하던 종순일은 갑자기 마을 사람들을 자기 집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모든 빚문서를 불에 태워버렸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은 것이 지극히 큰데, 여러분의 빚을 탕감하지 않으면 나는 마태복음의 비유에 나오는 악한 사람입니다'라고 하면서 마을 사람들의 눈앞에서 그들의 모든 빚 문서를 불태웠습니다. 그러자 충격을 받은 마을 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 부흥의 비결입니다.
나가는 말
탁월했던 구약성서 신학자 고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은 "안식일은 저항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시장 이데올로기는 우리로 하여금 끝없이 욕망하게 하고, 끝까지 만족을 모르게 하고, 절대 쉬지 못하게 하지만 안식일을 기억하고 지키는 것은 그에 대한 저항이요 대안적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안식일은 생산과 소비가 우리 삶을 좌지우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일한 자에게 반드시 휴식이 주어져야 하며 소모된 노동력을 회복할 수 있는 적절한 휴가와 안식이 주어져야 합니다."(레위기 25:3-7) 이런 희년은 곧 시장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이요 대안입니다. 우리는 이 대안을 살아야 합니다.
미래는 우리가 선택하는 정책과 제도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우리가 선택하는 제도와 정책의 역사이기에 우리의 선택에 따라 우리의 미래는 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의 이 불완전한 질서가 반드시 절대적인 필요는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희년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 '희년을 향한 행진'의 가사처럼 "일곱 번씩 일곱 번 넘어져도 약속을 굳게 믿으며" 희년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평화가 들불처럼, 사랑이 햇빛처럼" 넘실대는 희년 세상을 향해 함께 손잡고 나아가야 합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며, 지나온 수난의 세월, 보아라 우리 눈앞에 새 하늘[과 새 땅]이 활짝 열린다"라고 이 곡은 노래합니다.
우리는 '재앙의 시대'(aga of disaster)를 삽니다. 재앙의 시간표는 더 앞당겨졌습니다. 기후 위기의 가속화, 전쟁의 확산, 그리고 한국의 12.3 비상계엄 사태 등 세계 곳곳에서의 민주주의 후퇴가 바로 재앙의 시간표가 더 앞당겨지는 징후입니다. 실로 한 치 앞도 예측하기 어려운 어둠의 시대입니다. 불안과 염려로 우리는 긴장하고 떱니다. 하지만 이런 시대에 우리는 성서 안에서 세상을 자유와 해방과 정의와 회복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팔려 갔던 노예들이 그리운 가족 곁으로 돌아오고, 어깨를 짓누르던 그 모든 무거운 부채가 탕감되고, 사람을 먹여 살리기 위해 혹사당하던 땅들이 안식을 누리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드러운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 눈앞에 그 하늘과 그 땅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리로 향해 서로 손잡고 함께 나아갑시다.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희년의 기쁨을 살고 이 땅 위에 이룹시다. 감사합니다.(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