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재 교수(이화여자대학교 신학대학원장)가 얼마 전 '위기의 시대, 희망의 선교'라는 대주제로 열린 세계기독교선교포럼 2025년 목회자 포럼에서 '희년, 하나님이 제정하신 정의와 평등의 제도'(Jubilee as God's Institution of Justice and Equality)란 주제로 발표했다.
장 교수는 해당 영역의 주제 발표에서 지난 50년간 세상을 지배해 온 '시장 근본주의' 이데올로기의 문제점을 진단하며 "신자유주의 50년의 결과는 극단적인 양극화와 그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 그리고 불의의 만연이라는 사실이 세계 곳곳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총평했다.
또 "오늘의 정의롭지 않은 체제 속에서 우리 모두는 '죄인'"이라며 "이 체제 안에서는 우리가 행하는 악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지 않는 선이 우리의 죄를 고발한다. 죄는 하지 말라고 금한 것을 한 것만이 아니라, 하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않는 것도 죄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극단적인 양극화와 불평등 그리고 불의의 극복을 우선적인 선교 아젠다로 제시했다. 본지는 발제문 전문을 입수해 이를 나누어 게재한다.- 편집자주
▲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신학대학원장,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들어가는 말
우리는 '재앙의 시대'(aga of disaster)를 삽니다. 세계선교협의회(CWM) 금주섭 총무는 근래 한 한국 일간지(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재앙의 시간표가 더 앞당겨졌다"고 말했습니다. "기후 위기의 가속화, 전쟁의 확산, 그리고 한국의 12.3 비상계엄 사태 등 세계 곳곳에서의 민주주의 후퇴"가 바로 재앙의 시간표가 더 앞당겨지는 징후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재앙의 시대'를 삽니다. 한 치 앞도 예측하기 어려운 어둠의 시대입니다. 불안과 염려로 우리는 긴장하고 떱니다. 하지만 이런 시대에 우리는 성서 안에서 세상을 자유와 해방과 정의와 회복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팔려 갔던 노예들이 그리운 가족 곁으로 돌아오고, 어깨를 짓누르던 그 모든 무거운 부채가 탕감되고, 사람을 먹여 살리기 위해 혹사당하던 땅들이 안식을 누리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드러운 음성을 듣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성서 안에 있는 이 희년의 비전을 나누고 함께 우리의 선교적 미래를 담대하게 상상해 보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우리가 사는 한국의 현실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일회용 청년"
최근에 한국의 한 화력발전소에서 50대 노동자가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기계에 몸이 끼여 사망한 끔찍한 사고였습니다. 그는 하청 노동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발전소에서는 2018년에도 똑같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한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가 역시 기계에 온몸이 끼여 사망했습니다.
2015년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한복판 가장 부유한 지역의 지하철역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한 20대의 청년이 그 스크린도어에 몸이 끼여 사망했습니다. 그도 비정규직, 용역업체 직원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해에는 20살이 채 안 된 청년 하나가 서울의 또 다른 지하철역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역시 몸이 끼여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도 서울 메트로 회사의 정직원이 되는 꿈을 가지고 열심히 일했지만, 19살 생일 바로 전날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숨진 후 그의 가방을 열어보니 뜯지 않은 컵라면이 나왔습니다. 제대로 식사할 시간이 없어 잠시 틈이 날 때 먹으려고 넣어두었던 것이었습니다. 최근 '케데헌'(K-pop Demon Hunters)과 같은 K-드라마에서 컵라면은 외국인들에게 한 번쯤 먹어보고 싶은 호기심의 음식인지 모르지만,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컵라면은 한 끼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없을 때의 대용품입니다. 그것은 가난의 상징입니다.
지금 한국에서 많은 청년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청년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들이 '열정 페이'라는 가면을 쓴 기업들의 손쉬운 먹이감이 되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저에게 이 문제는 너무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실 5천 년의 긴 한국 역사에서 지금의 20대만큼 능력 있는 세대도 없습니다. 컴퓨터 등 디지털 활용도는 세계 최고입니다. 영어 실력도 이제는 저희 세대를 능가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역사에서 지금의 20대만큼 불행한 세대도 없습니다. 이 세대는 어려서부터 오로지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방과 후 밤 10~11시까지 과외 학원을 전전하며 끊임없는 문제 풀기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른바 명문대학에 들어가려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최소한 100만 개의 문제는 풀어야 합니다.
하지만 막상 대학에 들어와서는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등록금 빚이 쌓여갑니다. 대학을 졸업해도 청년실업의 두꺼운 벽에 가로막힙니다. 아직 취직도 안 했는데 벌써 신용불량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도 열심히 이른바 '스펙'을 쌓고 발이 부르트게 뛰어다녀 어렵게, 정말 어렵게 취직했는데, 취업자의 절반이 비정규직입니다.
알리 지루(Henry A. Giroux)는 이런 청년들을 가리켜 '일회용 청년'(disposable youth)이라 불렀습니다. 지금 우리는 청년들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으며, 그 결과 "가난하고 소외된 청춘들이 일회용으로 전락하거나 잉여물처럼 취급당하고 있다"고 그는 고발합니다.
한국만이 아닐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청년들이 골치 아픈 존재처럼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저를 포함한 기성세대는 우리 젊은이들을 출구도 없는 무한경쟁의 캄캄한 동굴 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하지만 그 동굴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요?
2. "혼자 살다, 혼자 죽는 사회"
결국 한국에서는 고령화, 저출생, 그리고 1인 가구의 문제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한국은 2025년 올해 '초고령사회'에 진입했습니다. 초고령사회란 전체 인구의 20% 이상이 65세 이상인 사회를 말합니다. 2년 뒤면 저도 여기에 공헌하는 사람이 되어, 세계에서 제일 안전하고 좋다는 서울의 지하철을 공짜로 탈 수 있는 소위 '지공거사'가 됩니다. 한국은 노인을 공경하는 나라입니다.
한국이 이렇게 초고령사회가 된 이유는 청년들이 아이를 낳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10년 넘게 한국은 초저출산 국가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지난 2023년에는 출생률이 겨우 0.78명이었습니다. 출생률이 1.0 이하이면 인구가 줄고 있다는 뜻입니다. 직업이 없으니 결혼을 못 하고, 결혼을 못 하니 아기를 못 낳고, 아기를 못 나으니 당연히 인구가 감소합니다. 현재 약 5,000만 명인 한국의 인구는 2050년에 4,400만 명으로, 2100년에 3,500만 명으로 감소하다가, 급기야 2300년이 되면 완전히 소멸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한 교수는 "한국이 지구상에서 인구 소멸 국가 1호가 될 것이다"고 스산한 예언을 했습니다.
한국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생률을 기록하는 나라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을 기록하는 나라입니다. 지금도 40분마다 한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혼자 사는 1인 가구가 증가하면서 한국에서는 독거노인의 고독사가 이미 큰 사회적 문제가 됐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2030 젊은 세대의 고독사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사실 2030 젊은이만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고독사 비율이 가장 높은 세대는 50대입니다. 5060 남성의 고독사는 전체 고독사의 절반을 차지합니다. 도대체 한국의 장년 남성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언젠가 "혼자 살다 혼자 죽는 사회, 일본"이라는 신문 특집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사망 후 4일 이상이 지나 발견되는 고독사가 한 해 수만 명에 달합니다. 죽어도 시신을 인수할 가족이 없는 무연고 사망자도 한 해 수만 명에 달합니다. 현재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사망하는 사람 10명 가운데 3명은 장례식 없이 곧장 화장터로 갑니다. 울어줄 사람이 없는데 왜 장례식이 필요하겠습니까! 울어줄 사람이 없는 이유는 그가 가족을 꾸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일본도 지난 30여 년 동안 인구가 감소하면서 기업 매출이 떨어지고, 일자리가 줄고, 그것이 다시 소비를 위축시키는 악순환을 겪었습니다. 어린아이가 줄어 제과점의 파산이 속출했습니다. 청년실업이 늘면서 신차 판매가 급감했습니다. 금융자산의 75%를 가진 노인들은 여생이 불안하니까 아예 지갑을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니 일자리를 갖지 못한 젊은이들은 정말 쓰고 죽고 싶어도 쓸 돈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렇게 일본은 '혼자 살다 혼자 죽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 보도가 저에게 끔찍했던 이유는 한국의 인구 구성 비율이 정확히 일본의 뒤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도 일본처럼 '혼자 살다 혼자 죽는 사회', '장례식이 없는 사회', 무연고 사망자와 고독사 사망자가 넘치는 사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이 땅에서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사라지고, 젊은이들의 얼굴에서 해맑은 웃음이 사라지는 순간, 이 나라는 소멸할 것입니다.
소멸(extinction), 그것이 현 상황입니다. 소멸은 단지 창조 세계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지금도 20분마다 한 생물 종이 멸종하고 있지만, 소멸은 다른 생물 종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느 학자는 지난 20세기가 '소멸과 증가 시대'였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소멸시킨 건 인간의 생명에 꼭 필요한 것들, 곧 푸른 숲과 깨끗한 물과 맑은 공기 등이었습니다. 인간이 증가시킨 건 CO2, 유해물질, 쓰레기 등 인간과 다른 생명에 유해한 것들이었습니다. 이제 그 소멸의 주체가 소멸의 위기 앞에 서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제가 희년에 대해 말하는 문명의 시대적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에스겔 18:32)
3. 신자유주의 50년!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어쩌다가 세상이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우리는 좀 더 문제의 뿌리에 깊이 다가가야 합니다.
청년실업, 저출생, 고령화, 인구 소멸, 그리고 생태계 파괴의 밑바닥에는 경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경제를 이야기하지 않고 희년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희년은 무엇보다도 먼저 부와 가난, 탐욕선과 빈곤선, 이자와 부채 등 경제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가 사랑,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경제를 이야기하지 않는 사랑은 공허한 미사여구에 불과하다."(Sallie McFague)
문제의 핵심은 지난 50년 동안이나 세계를 다스린 경제 신자유주의입니다. 그 신자유주의의 결과로 인한 극단적인 '양극화'와 거기에서 비롯된 '불평등' 그리고 '불의'입니다. 경제 신자유주의란, 간략히 말해, 케인스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반발로 19세기 고전적 자유주의를 소생시키고 부흥시키려는, 1970년대 이후의 현대 경제사상 운동을 가리킵니다. 케인스주의가 지배하던 시절에 '얼간이'로 취급을 받던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 F.A. 하이에크(Hayek)가 모든 사람의 예상을 뒤엎고 197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가 되면서 신자유주의는 화려하게 무대에 올랐습니다.
하이에크라는 사람이 평생을 꿈꾸었던 세상은 '자유주의적 유토피아' 세상이었습니다. 그가 꿈꾼 이 자유주의적 유토피아 세상의 가장 큰 특징 두 가지는 '사회정의'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기독교의 '이웃사랑' 윤리에 대한 노골적인 거부였습니다. 하이에크에게 사회정의는 아예 성립조차 할 수 없는 개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 의하면 세상의 질서는 '비인격적인' 시장이 만드는 질서요, 그런 질서 안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불평등은 아무의 책임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 성서의 '이웃사랑' 윤리를 현대 자본주의가 절대 수용할 수 없는 '원시적' 윤리라고 맹공을 퍼부었습니다. 2천 년 전 예수가 살았던 팔레스타인 나사렛 동네의 씨족사회 윤리를 현대사회에 적용하는 건 시대착오적이라고 공격했습니다.
한마디로 '신자유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던 하이에크는, 시장은 자연 세계의 물과 바람과 같아서 인간이 통제할 수도 없고 또 통제하려고 해서도 안되는, 어떤 신비하고 성스러운 존재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제한된 이성과 지식의 힘으로 사회를 변혁하느냐 마느냐 하는 헛소리를 하지 말고, 시장이 창조하는 소위 '자생적 질서'에 전적으로 인류의 운명을 맡기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면 지구 위에 풍요로운 '자유주의적 유토피아' 세상이 올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이런 '시장 근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난 50년간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시장 근본주의는 이슬람 근본주의나 기독교 근본주의와 같이 위험합니다. 신자유주의는 단순한 자유시장 경제 이론이 아닙니다. 신자유주의란, 시장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는, 시장에 대한 하나의 '종교적 신앙'입니다. 사람이 시장을 위해 지어졌지, 시장이 사람을 위해 지어지지 않았다는 하나의 '종교적 교리'입니다. M.P. Joseph이 지적하듯이, 이런 신자유주의 지배 아래서 시장은 인류 '구원의 원칙'이 되었습니다.(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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