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와 묵상]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이인기 목사(반포소망교회)

-청년 화가 L을 위하여-

                                                                                                                                                함형수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거운

비(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시인(1914-1946)은 시적 화자를 부제(副題)의 청년 화가 L이거나 그를 대신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인물로 암시한다. "나"는 죽은 자이거나 그를 "위하여" 비문을 짓는 자이다. 그러나 "나"는 죽음을 부정한다. 단순히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극복 혹은 부활을 천명한다. 시제가 <해바라기의 비명>인 대로 해바라기의 생명력이 비문에 담겨 있다. 그래서 시적 상황은 역설적이다. 그 역설은 죽음 같은 현실을 승화하고자 한다. 실제로 시인은 일제강점기를 살면서 죽음의 현실 너머로 생명과 사랑과 꿈을 그렸었다. 그러나 그의 염원은 시대적 배경에 한정되지 않는다. 죽음 같은 현실에 눌리지 않으려는 의지는 비록 시적이거나 낭만적일 수 있어도 언제 어디서든 현실 너머를 지향하는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 힘에 대한 믿음 때문에 "나"는 자신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거운 비(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비석을 세우면 죽음은 기정사실이 된다. 그것에 대한 부정은 명령어만큼 단호하다. 그는 오히려 죽음과는 정반대의 상황을 설정함으로써 그 부정을 강화하기까지 한다.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비석을 세우는 대신에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고 한 이유는 해바라기의 심상 때문이다. "노오란" 해바라기는 강렬한 태양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그" 해바라기는 아마도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해바라기일 듯하다. 이는 이 시의 부제에서 추정할 수 있다. "청년 화가 L"은 실제 인물일 수 있으나 시인이 젊어서 죽은 화가로서 자신을 투영한 인물로도 볼 수 있다. 그가 시인과 고흐를 불우한 삶의 경험으로 연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흐는 그 해바라기를 친구인 폴 고갱(Paul Gauguin)과 함께 지낼 행복한 삶을 기대하며 그렸었다. 따라서 그 해바라기는 "노오란" 색깔만큼이나 강렬한 삶의 의욕을 상징한다. 화자는 죽음 같은 현실에 체념하기보다 그 너머 강렬한 생명의 세계를 꿈꾸고 있다. 그의 열정은 비생명을 단호히 거부한다.

화자의 열정은 고흐에게만 기대어 있지 않고 자신의 삶의 현장에로 연장되어 확산한다.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고흐의 해바라기는 정물화로서 그 심상을 캔버스에 담은 것이라면, 화자는 해바라기를 자연의 해방된 공간에 위치시키고 그 사이에 보리밭이 보이는 전경을 그린다. 생명력의 확장이다. 그 힘이 캔버스에 갇혀있지 않고 그 틀을 일순간에 넘쳐흐른 형국이다. 고흐가 주로 밀밭을 그렸는데 화자는 그처럼 삼나무의 전경에 막힌 밀밭에다 상상력을 제한하지 않고 조국의 들판에 펼쳐진 "끝없는 보리밭"에로 잇닿게 한다.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이 펼쳐져 보이는 보리밭의 푸르른 생명력이 일렁이는 듯하다. 이제 비생명은 흔적조차 없다. 생명으로 충일한 해방의 공간이 펼쳐진다.

이제껏 "세우지 말라," "심어 달라," "보여 달라"며 명령하더니 이어서 그는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다름 아니라, 그가 비석 대신 심어 달라고 요구했던 해바라기의 의미를 생각하라고 말한다. "생각하라"도 명령조이긴 하지만, 그 의미를 알려준 뒤라 그 의미를 되새겨보라는 충고의 성격이 강하다.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사실상 그는 태양같이 뜨겁게 사랑하라고 권하고 있다. "태양같이"를 반복한 데는 죽음같이 "차거운" 비석을 대체하는 사랑의 강렬한 힘을 강조하고자 한 뜻이 실려 있다. 그는 자기의 사랑을 해바라기처럼 화려하다고 말한다. 생명은 차갑지 않고 뜨거우며 화려하다. 그래서 사랑과 통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꿈을 꾼다. 그래서 생명에도 꿈이 있다. 꿈꾸지 않는 것에는 생명이 없다. 그 꿈은 봄날 하늘을 쏘는 듯이 날아오르는 노고지리와 같다.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그는 죽었더라도 꿈을 꾸므로 사실상 죽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 같은 상황에서도 꿈을 꾸라고 권한다. 죽은 청년 화가 L을 위하여 쓴 비문이지만 그가 죽지 않은 듯하다. 아마도 비생명에 대한 단호한 부정이 죽음에도 생명을 부여했기 때문이리라. 그러고 보니까 이 시는 청년 화가 L에게 주는 인생의 충언이다. 고흐 같은 열정으로 삶을 살아가길, 아니, 거기서 더 나아가 비생명 너머를 꿈꾸며 죽음 같은 현실을 이겨내길 격려하고 있다. 꿈꾸는 자는 부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시 세계는 생명에의 열정을 표명하고 있다. 그는 서정주, 김달진, 김동리, 오장환, 김광균 등과 함께 『시인부락』 동인으로서 생명에 대한 그들의 절실한 태도로 인하여 '생명파'로 불린다. 그는 생명에의 열정으로 죽음 자체를 부정한다. 그 단호한 부정은 현실도피가 아니라 생명의 힘을 회복하려는 꿈을 반영한다. "노오란 해바라기"를 태양과 연결하면서 생명의 불멸성을 암시하는 한편으로 "푸른 보리밭"에서 솟아오르는 노고지리를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 칭하며 생명에 죽음을 넘어서는 힘이 있음을 선포하고 있다. 이 불멸성은 부활로도 증명되므로, 그는 비생명적 현실에서 부활을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부활을 지향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을 때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 천사들이 이렇게 말했다.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누가복음 24:5). 천사의 말이므로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 더 이상 죽음의 언저리에 머물지 말고 부활을 "찾[으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베드로전서는 보다 자세한 설명을 덧붙인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베드로전서 1:3-4). 하나님은 우리가 죽음을 초래하는 죄의 습관을 끊고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생명의 세계를 소망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유업이다. 부활을 지향할 때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산 소망을 품고 거듭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태양같이 사랑하며 "아직도 날아오르는" 꿈을 따라 비생명적 현실을 이겨내는 것이 부활 아닌가?

※성경을 읽을 때 "자세히 보아야/ 예[쁜]" 성품을 찾을 수 있다. "오래 보아야/ [자신이]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말씀의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이처럼 성경 읽기의 과정을 형상화한 듯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시의 형상화 기능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과정에 적용하면 그 말씀의 의미를 형상으로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소박한 논리를 따라 의미의 형상화 작업에 시와 하나님의 말씀을 결부해보았다. 글쓴이는 반포소망교회에 시무하는 이인기 목사다. 매주 한편의 시를 다룰 예정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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