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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묵상] 걸레

이인기 목사(반포소망교회)

걸레

                                                                                                                                                  구광렬

지금은 부도가 난 모 중소기업 창립기념품으로 받은 수건. 얼핏 툇마루에 뭉쳐져 있는 그 모양새,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뒤 곤해 하는 예수 같다 터진 실밥뭉치는 움푹 들어간 눈, 희미해진 '축 창립 10주년... ...'은 더부룩 턱수염

빨려고 집어 드니 안쓰럽다 잡범들과 나란히 십자가에 못 박혔던 神. 제 손으로 못 하나 제대로 못 빼던 神. 부활해야 하나 한 오백 년 푹 쉬고 싶은, 발등에 고비의 황사가 쌓이어도 다시는 제자들 발을 씻겨주지 않을

하지만 천생 예수, 두드릴 문도 없이 사시는 칠곡 황토 초가의 외당숙 같은, 궂은일 도맡아 젖은 손 마를 길 없는 머슴 출신의

시인(1956- )은 걸레를 통해 헌신의 속성을 알린다. 속성이 핵심적 특질과 영구성의 요소를 포괄한다고 보면, 걸레는 헌신의 객관적 상관물이다. 걸레가 헌신의 핵심적 특질을 형상화하는 것은 짐작할 수 있는데 영구성의 요소는 시인의 시적 상상력에 실려 있다. 그는 걸레에서 예수의 모습과 그로부터 2천여 년이 지난 뒤 "칠곡 황토 초가의 외당숙"의 모습을 이어서 보았고, 시가 마침표 없이 열린 결말로 마무리된 데서도 암시되듯이 그 모습에 실린 헌신의 특질이 영구히 지속할 것이라 상상하고 있다. 따라서, 헌신은 자신의 정체성조차 사라지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경지와 상관있으며, 그때 헌신은 영구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 걸레는 원래 "모 중소기업 창립기념품으로 받은 수건"이었다. 원래 모습이 그러했다. 그 모습에 기대와 소망이 실려 있듯이 정체성도 그 존재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전제한다. 그러나 지금은 "부도가 난 모 중소기업"처럼 그 정체성이 훼손된 상태이다. 밝고 환한 빛깔의 옷을 입은 듯했던 모양새가 지금은 "툇마루에 뭉쳐져" 있는 채 기대와 소망은커녕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말 그대로 걸레가 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얼핏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뒤 곤해 하는 예수 같다." 노역을 마친 뒤의 피곤함이 우러난다. 그러나 그 피곤함이 신성(神性)을 띠고 있다. 걸레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행위만으로도 헌신의 속성을 구현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에 비겨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비유하는 데는 근거가 있다. "터진 실밥뭉치는 움푹 들어간 눈, 희미해진 '축 창립 10주년... ...'은 더부룩 턱수염." 수건의 정체성이 해체된 상태의 걸레는 하나님이 원래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인간의 몸을 입은 데다 스승의 위신을 포기하고 제자들의 발을 씻는 상황을 대변한다. "움푹 들어간 눈"과 "더부룩 턱수염"은 정체성의 포기를 가리킨다. 자신의 존재가 인정받는 것에 관심이 없다. 그것은 시문의 구성에서도 발견된다. 어구 뒤에는 마침표가 찍히는 것이 원래의 문법인데, 문장 뒤에 마침표가 없으므로 그 문법이 해체되어 시구가 마치 "툇마루에 뭉쳐져 있는" 상태가 되어 있다. 중간중간 구두점으로 구분된 어구들은 마치 몇 개의 뼈마디를 연결하여 그 형체를 추정해야 하는 신체의 상태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래서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려는 노력이 무색할 정도이다. "빨려고 집어 드니 안쓰럽다." 원래의 모습이 흔적만 남은 상태로 훼손되었다. 걸레의 처지로 떨어진 예수는 더 이상 신의 아들로서의 거룩한 외양을 추정할 수 없는 형상이다. "잡범들과 나란히 십자가에 못 박혔던 神. 제 손으로 못 하나 제대로 못 빼던 神." 기대와 소망의 대상이었던 신의 아들이 한글들의 배경에 끼어든 한 개의 한자(漢字)처럼 무력하다. 십자가에 못 박혔으되 그 못을 빼고 십자가에서 내려오기를 기대하며 강력한 신으로서의 역할을 소망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그저 숨 끊어진 시체에 불과하게 되었다. 부활에 대한 기대나 소망은 아예 생각조차 없었던 듯 보인다. "부활해야 하나 한 오백 년 푹 쉬고 싶은, 발등에 고비의 황사가 쌓이어도 다시는 제자들 발을 씻겨주지 않을" 것처럼 형해화되었다. 이처럼 걸레는 퇴락의 상징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천생 예수," 비록 걸레처럼 "툇마루에 뭉쳐져" 버려졌으나 예수는 버려지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 걸레의 처지는 헌신의 자리로 승화된다. 소명에 헌신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겼으되 죄의 용서에 대한 확신을 주고, 툇마루에 던져진 걸레처럼 십자가에 달려 무력하게 죽었으되 영생의 길을 열었다. 그 헌신은 "천생" 그분의 새로운 정체성이 되었다. 마치 시인의 기억에 남아 있는 "두드릴 문도 없이 사시는 칠곡 황토 초가의 외당숙 같은" 모습이다. 그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도 이격된 존재를 서로 연결함으로써 걸레의 속성에 영구성을 부여한다. 그 속성은 "궂은일 도맡아 젖은 손 마를 길 없는 머슴 출신의" 행적에 실려 있다. 마지막 연이 결말을 열어놓고 있는 것도 영구성을 암시한다.

일상적인 관점에 따르면, 걸레는 무기력과 굴욕의 대명사이다. 그러나 예수와 연결되면 그 걸레는 스스로 무기력과 굴욕의 자리로 내려서는 일을 가리킨다. "두드릴 문도 없[으니]" 자신의 존재나 옳음을 인정받고자 하지 않는다. "궂은일 도맡아" 하니까 자발적인 헌신이며, "젖은 손 마를 길 없는 머슴"처럼 일하니까 주어진 일 자체에 몰입하는 모습이다. 따라서, 시인은 스스로 걸레가 되는 일의 속성을 형상화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자세는 거룩하다. 비록 무기력하고 굴욕적으로 보이더라도 스스로 그 자리에 서면 그 자체가 무기력과 굴욕에 저항하는 일이 된다. 그리고 그 일은 은밀히 일하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일이 된다. 하나님의 은밀함이란 신으로서의 자리를 포기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신의 관념에 어울리는 광휘와 거침없는 주권을 포기하고 말없이 관찰하고 말없이 조처하는 데다 대가 없이 희생하는 데서는 신을 찾을 수 없다. 그 신은 숨어 있다. 그러나 그 행적을 따를 때 하나님의 보상이 따른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3-4).

구제 혹은 봉사를 할 때 그 행위를 인정받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그 본능을 포기하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은 스스로 걸레의 처지에 서는 일이다. 인정받음으로써 자기의 정체성, 혹은, 의로움을 확인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헌신하는 것이다. 수건이 걸레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죄인의 자리에 서고 스승이 제자들의 발을 씻는 것처럼 원래의 모습을 포기하는 결정을 전제한다. 그리고 "궂은일 도맡아 젖은 손 마를 길 없는" 부지런함으로 봉사의 행위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그 행위의 영속성을 보장한다. 온전히 헌신하여 남을 이롭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시지만, 봉사가 자기의 의로움을 인정받는 경로라면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태복음 6:2).

※ 성경을 읽을 때 "자세히 보아야/ 예[쁜]" 성품을 찾을 수 있다. "오래 보아야/ [자신이]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말씀의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이처럼 성경 읽기의 과정을 형상화한 듯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시의 형상화 기능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과정에 적용하면 그 말씀의 의미를 형상으로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소박한 논리를 따라 의미의 형상화 작업에 시와 하나님의 말씀을 결부해보았다. 글쓴이는 반포소망교회에 시무하는 이인기 목사다. 매주 한편의 시를 다룰 예정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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