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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재]에큐메니컬 운동의 미래에 대한 한 제언(2)


출처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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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에큐메니즘의 지형변화

  WCC의 전총무 사무엘 코비아(Samuel Kobia)는 2005년 뉴욕에서 열린 한 강연에서 기독교 교회 자체의 지형변화에 대해 깊이 언급한 바 있다. AD 33년에 기독교 공동체의 ‘중심(center of gravity)’은 예루살렘이었고, 1세기까지 기독교는 오늘날 중동이라 불리는 아시아 가장 서쪽에 남아 있었다. AD 1000년에 기독교의 인구학적 중심은 동서양을 이어준다는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 남동부 유럽으로 옮겨갔다. 이후 약 900년 동안 유럽에서의 인구 증가와 유럽 식민주의의 팽창 그리고 유럽과 미국 교회들에 의한 전 세계적 선교의 노력으로 기독교의 중심은 유럽의 루마니아, 헝가리, 이탈리아, 그리고 남부 프랑스를 원호(圓弧, arc)처럼 돌아 1900년이 되면 정확히 스페인의 마드리드 북쪽에 다다르게 된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지구 남반구 교회가 점차 독립하면서 기독교 확장의 역사에 새로운 양상이 나타났다. 20세기 초에 기독교의 인구학적 중심지는 점차 남진하더니 1960년대에 서아프리카 연안으로 옮겨갔고 이어 1970년대부터 2000년까지 아프리카를 가로질러 남동진했다. 결국 AD 2100년이 되면 기독교 교회의 인구학적 중심지는 북부 나이지리아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같은 기독교의 인구학적 중심지의 변화를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면, 1990년에 세계에는 약 20억 명의 기독교인이 있었는데 이 중 40% 이상이 유럽과 북미에 살고 있었고 15% 조금 넘는 수자가 아프리카가 살고 있었다. 2025년이 되면 이 세계 약 26억 명의 기독교인 가운데 33%가 유럽과 북미에 그리고 25%가 아프리카에 살게 될 것이다. 이런 추세가 계속 된다면 2050년에 이르러 (지금으로부터 40년 후에는) 전 세계 30억 명의 기독교인 가운데 50% 이상이 아프리카에, 그 다음 두 번째로 남미와 카리브 해에, 세 번째로 아시아에, 네 번째로 유럽에,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로 북미에 살고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앞으로 이 세계의 ‘대표적’ 혹은 ‘전형적’ 기독교인은 뉴욕의 교외 지역이나 제네바의 국제 사회에 거주하는 백인이 아니라 탄자니아의 마을, 브라질의 슬럼가, 혹은 자메이카의 슬럼가에 사는 사람이 될 거라는 이야기이다.

  물론 코비아 전총무도 언급하듯이 인구학적 변화만으로는 21세기 기독교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세계교회의 지형변화가 앞으로의 에큐메니컬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은 분명하다. 이미 국제적으로 폭넓게 에큐메니즘에 참여해 온 기성 교회들, 즉 정교회, 가톨릭, 성공회, 루터교회, 개혁교회, 감리교회, 제자교회 등은 지금 낯선 새 교회들, 즉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것을 포함한 오순절(Pentecostal) 및 성령파(charismatic) 교회 그리고 서구의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evangelical) 선교사들에게 영향을 받은 소위 거대 교회들(mega-churches)과 마주치고 있다. 사실 세계교회의 지형변화는 바로 이러한 교회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교회의 지형 변화 앞에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이러한 신앙 공동체들의 지형변화가 그들 사이의 관계와 하나 됨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틀 그리고 접근방법을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코비아 전총무는 뉴욕 강연에서 ‘WCC’와 ‘에큐메니컬 운동’은 동의어가 아니며, 에큐메니컬 운동에 의해 만들어진 기구는 영원한 것이 아니고, 따라서 지금까지 WCC 안에서 누려온 친교를 로마 가톨릭과 오순절 교회 그리고 복음주의 교회로 넓혀, 세계 에큐메니컬 운동은 “하나의 새롭고 보다 넓은 지구적 포럼(a new and broader global forum)”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는 또한 기존의 ‘교회 협의회(council of churches)’가 지나치게 회원교회에 의해 안수 받은 지도자들에 의해 끌려감으로써 학생 ․ 청년 ․ 여성 ․ 평신도들의 참여가 제한된 것을 반성하면서 에큐메니컬 틀의 확대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부문 운동의 강화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바로 이러한 방향성을 갖고 WCC는 남미 최초의 총회 장소인 포르토 알레그레(Porto Alegre)로 달려갔고 거기서 남미의 가톨릭, 오순절, 그리고 복음주의 교회들과의 새로운 “오이코메네 지도 그리기(mapping the Oikoumene)”를 시도했던 것이다. 2013년 부산총회에서 이 에큐메니컬 새 판 짜기를 계속 된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지난 2월 제네바를 방문해 WCC의 주요 실무자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 때 ‘교회와 에큐메니컬 관계(Church and Ecumenical Relations)’를 맡고 있으면서 지난 9차 포르토 알레그레 총회의 준비 책임자인 더글라스 키알(Douglas L. Chial)로부터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키알은 10차 총회의 한국 유치가 결정될 때 WCC에게 무엇이 가장 인상적이었던가를 환기시켜주었다. 그에 의하면 그것은 한마디로 한국교회의 초대장 안에서 느낄 수 있었던 “강한 하나됨의 느낌(strong sense of togetherness)”이었다. 지난번 9차 총회 유치를 위해 한국교회가 보냈던 초청장과 이번 10차 총회를 위해 보낸 초청장을 비교해보면 큰 차이가 난다고 그는 말한다. 이번에는 회원교회를 넘어 많은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서명이 들어갔다. 초대의 이유도 전과 달리 훨씬 신학적으로 매력적이었다고 말한다. 중국교회와 일본교회의 지지도 크게 작용했다고 털어놓는다. 가만히 듣다보니 WCC는 한국이 매우 독특한 상황을 대변하고 있음에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시아의 국가이면서 인구의 4분의 1이 기독교인이고, 가장 높은 개신교 비율을 자랑하면서, 종교간 평화를 이루고 있고, 가톨릭과 복음주의자들과 오순절교회와 정교회 그리고 에큐메니컬이 협력하는, 그래서 “하나의 새롭고 더 넓은 지구적 포럼”을 향한, 즉 21세기 에큐메니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향한 잠재력으로 가진 나라라고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 세계 에큐메니컬 운동의 미래와 가능성은 멀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있다. 21세기 한국 에큐메니컬 운동의 준거점은 서유럽이나 북미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다. 어떻게 한국의 에큐메니컬(ecumenicals)과 에반젤리컬(evangelicals)과 오순절(pentecostals)과 정교회(orthodox)와 가능하다면 가톨릭(catholics)이 함께 이 세계 앞에 복음을 증거하고 기독교적 봉사의 삶을 살 것인가가 바로 21세기 세계 에큐메니컬 운동의 미래 그 자체인 것이다. 한국이 세계 교회 지형변화의 축소판(microcosm)이기에 이제 우리가 하는 일이 세계의 모형(role model)이고 우리가 가는 길이 세계가 갈 새 길이라는 것이다.

V. 10차 총회의 주제

  이제 2013년 WCC의 부산총회를 앞두고 한국교회가 시급히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는 총회주제 선정에 있어서 한국교회의 목소리를 분명하고 강하게 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안방 내주고 들러리가 될 수도 있다. 불행히도 지금 세계적으로는 JPIC 이후 에큐메니컬 운동에 큰 영향을 끼칠 새로운 신학운동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오늘의 위기의 세계 속에서 분명한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정립하고 이를 아시아 교회와 대화하는 가운데 세계교회 앞에 고백하고 제안할 때가 되었다. 2013 부산총회는 이를 위해 더없이 좋은 기회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른 기회를 찾기 힘들지도 모른다. 한국교회는 10차 총회주제 선정에 있어서 주도력을 발휘했으면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시간은 많지 않다.
  앞으로의 에큐메니컬 운동은 "global initiative → local response"가 아니라 "local initiative → global response"로 추진된다. 우리는 우리의 "local context"에서 전 지구적인 시대의 징조를 읽어내면서 이에 신앙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신학적 종합을 만들어 제안해야 한다.

  돌이켜 보면, 첫 아시아 총회인 뉴델리 총회(1961)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빛”을 주제로 ‘타종교’ 문제를 세계 에큐메니컬 운동의 공식 의제로 등록시켰다. 이 때 인도 교회는 힌두교의 빛 축제에서 착안하여 모든 빛 가운데 빛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선언한 것이다. 당시 미얀마 침례교 지도자 우 바 미엔 박사는 개회설교에서 “아시아인들은 서구 신학을 맹종할 것이 아니라, 아시아의 역사적 상황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하고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두 번째의 아시아 총회인 캔버라 총회(1991)에서는 “성령이여 오소서,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를 주제로 원주민, 환경, 영성의 문제를 에큐메니컬 운동의 의제로 공식 등록했다. 아시아에서 세 번째로 열리는 이번 부산 총회에서는 우리는 세계 에큐메니컬 운동의 역사에 어떤 한국적 의제를 어떻게 새로 등록할 것인가? 1968년 웁살라총회는 교회의 사회참여를 구원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도정이었다. 2013년 부산 총회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역사에서 어떤 기여를 한 총회로 기록될 것인가? 우리는 계속해서 부산총회가 어떤 신학적 특징을 가진 대회로 기록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구 신학의 한계를 넘어 한국의 사상과 문화, 한국의 분단과 상황이 반영된 제안이 나와야 할 것이다. 또한 아시아의 상황과 문화로부터도 21세기 새로운 에큐메니컬 신학의 틀이 제안되어야 할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21세기의 상황은 ‘평화’의 위기, ‘생명’의 위기로 집약된다. ‘평화’라는 주제는 한반도를 넘어 동아시아 한중일의 공동관심사라는 점에서 호소력 있다. 더욱이 이번 총회 개최지 경합에서 탈락한 중동 지역 교회들을 포용할 수 있는 주제라는 점에서도 호소력이 있다. 또한 오늘날 심각한 생태 위기와 관련하여 지금까지의 산업문명의 틀을 넘어선 새로운 생명 문명의 창출을 위한 신학적 제안이 세계 에큐메니컬 운동과 신학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다행히 한국교회 안에서는 ‘평화’와 ‘생명’이 핵심주제어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 일정한 합의가 모아지는 모습니다. 다만 이를 신학적으로 어떻게 공식화(formulate) 할 것인가가 문제로 남아 있다. 확실히 지금은 어느 때보다 창의적인 신학적 상상력이 필요한 때이다. 지금까지의 WCC 총회 주제들을 잠시 살펴보자.

1차 인간의 무질서와 하나님의 섭리 (표어형식)
 Man's Disorder and God's Design

2차  그리스도 - 세상의 소망 (신앙고백)
 Christ - the Hope of the World

3차 예수 그리스도 - 세상의 빛 (신앙고백)
 Jesus Christ - the Light of the World

4차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리라 (성서인용)
 Behold, I make all things new

5차 예수 그리스도는 자유하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신다 (선언형식)
 Jesus Christ Frees and Unites

6차 예수 그리스도 - 세상의 생명 (신앙고백)
 Jesus Christ - the Life of the World

7차 오소서 성령이여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 (기도형식)
 Come, Holy Spirit - Renew the Whole Creation

8차 하나님께 돌아오자 소망 중에 기뻐하자 (초대형식)
 Turn to God - Rejoice in Hope

9차 하나님 당신의 은혜로 세상을 변화시키소서 (기도형식)
 God, in your grace, transform the world

  정병준 교수의 지적대로 하나님(신론)과 연관된 주제는 1, 4, 8, 9차 네 번이고, 그리스도(기독론)와 연관된 주제는 2, 3, 5, 6차 네 번이여, 성령(성령론)과 관계된 주제는 7차 한 번이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WCC는 한 번도 삼위일체론적으로 주제를 설정한 적이 없다. 하나님의 삼위를 돌아가면서 따로 다루었을 뿐 삼위일체론적으로 주제를 공식화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필자는 우리가 평화와 생명이라는 핵심적 의제를 통전적으로 다루기 위해, 그리고 이것을 오늘날 교회의 지형 변화 속에서 에큐메니컬 새 판 짜기와 맞물리게 하기 위해 삼위일체론적으로 총회 주제를 설정할 것을 제안한다. 그래서 모두가 소통할 수 있는 큰 신학적 틀을 열자고 제안한다.

  사실 기독교의 신이해 삼위일체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기독교 신학은 신론과 기독론과 성령론을 각각 따로 다룸으로써 하나님 이해에 심각한 왜곡과 기형을 낳았다. 어떻게 보면 에큐메니컬 운동의 반대인 교회 분열의 역사도 바로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을 별개처럼 다룬 신학적 분절성 때문은 아니었던가? 실제로 기독교 역사상 정치적 · 종교적 단일신론은 ‘한 하나님 - 한 황제 - 한 국가’ 논리로 연결되어 군주적 억압 통치의 근원이 되었다. 이것은 또한 교회도 계층적 지배구조로 만들어버렸다. 한 때 평화와 생명을 WCC 총회의 주제어로 하더라도 이를 기독론으로 혹은 성령론으로 공식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하지만 기독론과 성령론은 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모두가 "win-win" 하는 길도 아니다. 삼위일체론적 공식은 정교회와 오순절 교회를 전폭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넓은 틀이기도 하다. 삼위일체론적 공식은 또한 평화와 생명을 통전적으로 다룰 수 있는 신학적 틀이자 최근의 생태적 영성과도 잘 어울리는 첨예한 신학적 공식이기도 하다. 아직까지 한번도 WCC 주제가 이렇게 선정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마침 한국 에큐메니컬 운동의 최일선에 있는 활동가, 목회자, 신학자들이 <생명과 평화를 여는 2010년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을 통해 이와 같은 방식을 시도했다.

  그런데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삶과 무관한 사변적 교리로서의 삼위일체론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과 결합된 실천적 교리로서의 삼위일체론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서방교회의 사변적이고 심리적인 삼위일체론이 아니라 동방교회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이다. 곽미숙 박사의 지적대로, 서방교회에서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삶과 무관한 사변적 교리로 발전된 것에 반해, 동방교회는 이를 사변적 교리가 아닌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신학적 성찰, 특히 그리스도인의 삶과 결합된 실천적 교리로 전개하였다. 서방교회가 하나님을 하나의 신적 ‘실체(substance)’ 혹은 신적 ‘주체(subject)’로 인식하면서 하나님의 일체성과 삼위성을 인간의 심리적 유비(analogy)를 통해 설명한 것과 달리, 동방교회는 하나님을 성부 · 성자 · 성령 세 위격의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적’ 즉 상호 내주하는 관계성 안에 존재하는 분으로, 나아가 인간 및 이 세계와 관계를 맺으시는 분으로 인식해 왔다. 그래서 이러한 동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은 ‘사회적 삼위일체론’으로,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은 ‘심리적 삼위일체론’으로 불리기도 하는 것이다.
 
  사회적 삼위일체론의 근간을 이루는 ‘페리코레시스’는 요한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세 위격의 사귐과 일체를 가장 잘 표현한 개념이다.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성부)과 예수 그리스도(성자)와 성령은 영원한 사랑의 사귐 속에서 서로 안에 내주하신다. (10:30; 14:9, 11, 20; 17:21) 즉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 내주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성령 안에 내주하시며, 성령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내주하신다. 하나님이 세 위격은 이렇게 서로 함께, 서로를 위해, 그리고 서로 안에서 극히 친밀히 내주하시기 때문에 완전한 하나됨(일치)을 이루신다. 즉 사랑의 사귐과 연원한 자유, 평등한 관계 속에서 삶을 영위하시는 하나님의 세 위격은 서로 안에 내주하시고 서로의 삶에 온전히 참여하시며 서로 하나됨을 이루심으로써,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 함께 거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는 하나님과 성령이 함께 거하시며, 성령이 계신 곳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거하신다. 또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 함께 참여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에 하나님과 성령이 함께 참여하시며, 성령이 하시는 일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참여하신다. 이렇게 하나님의 세 위격이 상호 간에 사랑의 사귐과 영원한 자유 및 평등한 관계 속에서 일체를 이루고 계심을 가르치는 삼위일체론은 그 어느 깨보다 소통과 상생이 중요한 21세기의 다문화, 다원화, 다종교, 다가치의 시대에 에큐메니컬 운동의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데 큰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삼위일체론 안에서 자유롭고 평등하며 정의로운 공동체를 향한 신학적 원리를 발견한 사람은 19세기 러시아 정교회의 사회개혁자였던 니콜라스 페도로프(N. Fedorov)이다. 그는 당시 러시아의 무능한 전제군주와 그에 반대하는 무정부주의 사이에서 제3의 길로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처음 언급했었다. 현대 신학계에서 사회적 삼위일체론의 중요성을 다시 논의하는 토론의 중심에는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이 서 있다. 그는 페도로프의 인식에 적극 공감하면서 “거룩한 삼위일체는 우리의 사회적 프로그램이다”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을 ‘절대 주체’로 이해하는 단일신론으로 인해 하나님은 더욱 비세계화되었고 세계는 더욱 세속화됨으로써, 세계 없는 하나님, 하나님 없는 세계가 초래되었다. 그 결과 땅 위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재하는 인간이 땅의 주인이요 소유자가 되었으며 이 세계는 이 인간에 의해 마음대로 처분될 수 있는 ‘대상’으로 전락한 것이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하늘 위의 ‘단일자’가 아니라 사랑과 자유와 평등으로 특징지어지는 하나님 · 예수 그리스도 · 성령의 사귐 속에 존재한다면,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는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과 상호 존중의 관계로 바뀔 수 있으며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사고’가 생태계 회복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몰트만은 강조한다. 해방신학자들 역시 ‘사회적 프로그램으로서의 삼위일체론’에 적극 동의하면서 거기서 불의한 사회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사회의 모형과 원리를 발견했다. 특히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에게 삼위일체론은 단순한 교리적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귐의 신비를 실존적으로 현실화하는 일, 곧 이 땅에 진정한 정의와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공동체적 삶에 헌신하는 것을 의미했다. 여성신학자들도 삼위일체론에서 여성 해방과 성의 평등의 신학적 원리를 발견했다. 미국의 여성신학자 캐서린 라쿠냐(C. M. LaCugna)는 삼위일체론이 종전 서방 기독교의 전통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내적 신비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구원사건에 대한 교회의 신학적 성찰이라고 인식한다. 구원사 안에서 이해된 하나님께서는 세 위격 사이의 사랑과 자유 그리고 평등으로 특징지어지는 공동체를 이루시며 또한 모든 인간관계, 특히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진정으로 사랑과 자유에 기반을 둔 평등한 관계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라쿠냐에 의하면 우리가 삼위일체론을 말한다는 것은 곧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를 거부하는 것이며, 억압과 성차별이 없는 세계를 향해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생태신학자들 역시 삼위일체론에서 생태계 위기의 극복과 인간과 자연의 평화로운 공존 및 상생의 원리를 발견한다. M. 더글라스 믹스는『하느님의 경제학(God the Economist)』에서 동방교회의 ‘페리코레시스’ 개념을 통해 기존의 주류 경제학을 비판하고 상생과 호혜의 새로운 경제 원리를 제안한 바 있다. 이렇게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실로 오늘의 세계적 상황 속에서 새로운 사회의 원리와 에큐메니컬 운동의 방향을 제시해준다.

나아가며

  2013년 WCC 부산총회가 어느덧 3년 앞으로 다가왔다. 총회를 유치하고 지난 1년 허송세월을 한 것은 아닌지 무척 안타깝다. 주제 선정에 적극 참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배와 성서연구를 통해 그리고 하라레 총회의 ‘파다레(Padare)’나 포르토 알레그레의 ‘무치라오(Muchirao)’와 같은 대중적 행사(event)를 어떻게 조직해 한국 에큐메니컬 운동의 장을 넓히고 내실을 다져나갈지 지혜를 모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총회의 사전 행사 혹은 현장방문 프로그램을 어떻게 기획할 것인가도 한국 에큐메니컬 운동에게 중요하다고 본다. 이와 관련해 에큐메니컬 원로들에 의해 가칭 ‘에큐메니컬 평화 열차’ 아이디어가 제안된 바 있다. 유럽 청년들이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거쳐 또 베이징을 거쳐 평양에 온다. 가능하면 기차를 타고 서울을 거쳐 부산까지 온다. 이 대륙간 평화열차가 정차하는 역마다 평화 행사를 조직한다. 평화를 중심어로 총회 주제가 만들어진다면 이런 행사가 충분히 기획되고 추진될 수 있지 않을까? 나아가 서해 평화협력지대 형성을 위한 선상 예배도 가능할지 제기해보고 싶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군사적으로 위험한 지역이 된 서해를 평화의 바다로 만들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서광선 교수께서는 이번 총회 준비와 관련하여 한국교회 분열의 역사를 치유하는 신학적 대화로서 고신파와의 화해 (일제 청산문제, 신사참배의 회개 문제), 합동파와의 화해(냉전 청산문제, 용공시비 문제), 기장과 통합의 화해(김재준 목사 이단 문제 청산), 종교다원주의 논쟁의 화해(감리교 변선환 박사의 명예회복)를 제기한 바 있다. 한국 에큐메니컬 운동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거쳐 가야 할 길이라 생각된다. 

 『박상증과 에큐메니컬 운동』을 읽으면서 내내 마음이 아팠던 것은 박목사님이 소속의 문제로 여러 차례 배척을 당하신 일들, 심지어 교회 연합기관에서까지 배척당하신 현실이었다. “교회는 나뉘는 곳이 아니라 서로 합해지는 곳”이라는 필립 포터의 말이 더욱 가슴에 와 닿았다. 혹 오늘 우리 에큐메니컬 운동도 여전히 교파의 테두리 안에 놓여 있지는 않은가? 에큐메니컬 운동을 하는데 소속이 문제가 되는 역설적인 상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는 않는가? 박상증 목사님은 어느 한 곳에 소속되지 않았기에 자유로웠고 그래서 그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에큐메니스트가 될 수 있었다고 본다.

‘사람이 사는 모든 곳을 하나 된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 에큐메니컬 운동’이라고 이해하셨기에 시민운동도 평생 몸바친 에큐메니컬 운동의 연장으로 넉넉히 품을 수 있었다고 본다. 이런 자유로운 영혼, ‘새로워지려는 열정’에 안주하지 못하고 언제나 새 길을 떠나는 자유로운 영혼 때문에 우리 모두가 행복했고, 앞으로도 더 많이 행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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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부터 2024년까지의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기독교 연합단체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의 반공 관련 담론을 여성신학적으로 비판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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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이성 중심 신학에서 영성신학으로

신학의 형성 과정에서 영성적 차원이 있음을 탐구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인수 교수(감신대, 교부신학/조직신학)는 「신학과 실천」 최신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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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신학, 세계 신학의 미래 여는 잠재력 지녀"

안병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하엘 벨커 박사(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명예교수, 조직신학)의 특집논문 '안병무 신학의 미래와 예수 그리스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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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자라난다"

한국신학아카데미(원장 김균진)가 발행하는 「신학포럼」(2025년) 최신호에 생전 고 몰트만 박사가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전한 강연문을 정리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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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위기는 전통의 사수와 반복에만 매진한 결과"

교회의 위기는 시대성의 변화가 아니라 옛 신조와 전통을 사수하고 반복하는 일에만 매진해 세상과 분리하려는, 이른바 '분리주의' 경향 때문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