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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재 (이화여대 기독교학부 교수)
“목사님, 클라리넷은 언제 또 그렇게 배우셨어요?” 새로 연주하게 된 악기로 찬송을 연주하는 동안 상증은 젊음을 느꼈다. 마흔 줄을 훌쩍 넘긴 희수와 형수는 상증을 보면서 젊음이 나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곤 한다. 새로워지려는 열정에서 온다고 보았다.
며칠 전 배달된 강주화 지음『박상증과 에큐메니컬 운동』을 단숨에 읽어나가다 이 부분에서 한동안 멈췄다. “새로워지려는 열정”... 여기에 밑줄을 치고 또 쳤다. 그렇다. 박상증 목사님이 그리고 한국의 에큐메니컬 지도자들이 반세기를 넘게 길도 없는 길을 걸어 앞으로 나아가게 한 힘은 바로 이 “새로워지려는 열정”이었을 것이다. “만물을 새롭게”(계 21:5) 하시는 이에 대한 믿음 안에서 키워 온 이 열정이 오늘 에큐메니컬 운동의 또 다른 미래를 논하는 이 자리를 만들었을 것이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한마디로 시대를 읽고 함께 신앙으로 응답하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필자에게 주어진 과제는 오늘의 세계 변화, 교회의 지형변화 속에서 에큐메니컬 운동의 미래를 모색해보라는 것이다. 그 방법은 우늘 우리 시대의 가장 고통스러운 문제와 대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에큐메니컬 운동과 신학을 다시금 변화된 상황 속으로 밀어 넣는 것("recontextualize")이라고 생각한다.
신학자들은 종종 당위로부터 출발하는 도그마적 접근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추상적인 도덕률의 나열이 되기 쉽고, 그런 접근은 언제나 살아 움직이는 세계의 질서(혹은 무질서)를 설명하기에 부족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필자는 이 글에서 먼저 이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제안하고 이에 기초한 신학적 과제와 에큐메니컬 운동의 의제를 찾아보려 한다.
오늘의 상황은 중층적이고 혼종적이다.
지구적(global)인 것과 권역적(regional)인 것, 그리고 지역적(local)인 것이 서로 접촉하고 교차하며 하나의 중층적이고 혼종적인 상황을 형성한다. 먼저 지구적 상황을 살펴보려고 한다.
I. 생명의 위기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는 원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뚜렷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한반도의 기후가 아열대성 기후로 바뀌고 있다. 삼한사온 현상이 사라진지는 이미 오래고, 겨울은 짧아지고 여름이 길어지고 있으며, 수온의 상승으로 어종이 변하고 있다. 한반도의 온난화 속도가 전 세계 평균의 그것보다 두 배 이상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하니 더욱 충격적이다. 정확한 통계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이는 같은 동북아시아 권역에 있는 중국과 일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저녁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내일은 날씨가 맑겠구나’ 하고,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궃겠구나’ 한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마태 16:2-3). 만약 예수께서 오늘 세상에 다시 오신다면 그는 분명 ‘기후 변화’가 바로 ‘시대의 징조’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기후(climate)란 지구 에너지가 평형을 이루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사실 지구는 인간이 개입하기 오래전부터 커다란 기후 변화를 겪어왔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기후변화 혹은 ‘기후붕괴’를 경험하고 있다. 18세기 중엽 산업혁명 이후 인류는 지구의 평균 기온을 약 0.8도 상승시켰다. 산업혁명 이래 더 많은 물질적 풍요와 편리를 지고의 가치로 추구해온 경제성장 전략은 에너지 소비, 특히 화석연료의 소비와 긴밀히 연동되어 주요 온실기체인 이산화탄소를 대량 방출했고, 이것이 바로 지금 기후변화의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지구의 ‘생명권(biosphere)’은 아주 얇은 막에 불과하고, 지구의 대기권은 매우 ‘상처 입기 쉬운(vulnerable)’ 존재다. 이렇게 연약한 지구의 대기권과 생명권이 지금 인간의 개입으로 무너지고 있다. 해수면 상승으로 이미 국토포기를 선언한 남태평양의 아름다운 산호초 섬 투발루(Tuvalu)는 앞으로 나머지 세계가 어떻게 될지 우리에게 미리 보여주는, 하나의 ‘불편한 진실’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그리 시간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세계 환경위기 시계’는 2008년에 이미 9시 3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과학자들은 앞으로 2015년까지 인류가 삶의 방식에 있어서 어떤 의미 있는 변화를 일으키지 않으면 앞으로 기후변화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고 경고한다. 2015년까지는 이제 겨우 5년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영적-도덕적 각성은 더디기만 하다. 우리의 행동과 실천은 느리기만 하다. 작년 12월 코펜하겐에서 열린 기후협상은 미국, 유럽연합, 중국 세 ‘큰 손’의 파워게임 속에 예고된 실패의 길을 걷고야 말았다. 오는 12월 멕시코 칸쿤에서 열릴 기후협상의 전망도 암담하긴 마찬가지다. 상황은 절망적이다. 영국의 환경 저널리스트 마크 라이너스(Mark Lynas)는『6도의 악몽(Six Degrees Could Change the World)』에서 지구의 평균 기온이 1도씩 올라갈 때마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충격적인 가상 시나리오를 제시한 바 있는데 이제 그것이 하나씩 현실로 나타날 것 같다.
지금 인류는 기후변화로 인한 총체적 생명의 위기 앞에 서 있다. 기나 긴 지구의 생명의 역사 안에서 지금 우리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여섯 번째 대멸종의 시기를 막 시작했는지 모른다. 이제 인류는 동과 서, 북과 남을 떠나 ‘정말 우리가 더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공동의 질문 앞에 서 있다. 2013년의 WCC 부산총회도, 에큐메니컬 운동도 이 ‘절박한 생명의 위기’라는 시대적 상황을 피해갈 길은 없다. 신학적으로 이 위기는 ‘하나님의 집(oikos)’의 위기이다. 생태(ecology)라는 말은 ‘한 집안’ 혹은 ‘생명 공간’을 뜻하는 그리스어 ‘오이코스(oikos)’에서 유래했다. 에큐메니컬(ecumenical)이라는 말도 이 오이코스에서 파생된 ‘오이코메네(oikoumene)’에서 유래했다. 지금 하나님이 지으신 집, 즉 우리와 다른 모든 생명체의 삶의 공간이 인간의 탐욕으로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이 위기는 결국 이 세계 안에서 암적 존재가 된 인간의 위기이기도 하다. 일찍이 고든 카우프만(Gordon Kaufman)은『핵 시대의 신학(Theology for a Nuclear Age)』에서 우리와 같은 핵 시대에 살고 있는 신학자들이 천착해야 할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의 문제라고 말했다. 약 2만 메가톤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의 약 160만 배) 가량의 핵 폭발물을 지니고 사는 인간은 이제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는 힘’을 가진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카우프만의 이런 통찰을 핵무기뿐만 아니라 오늘날 인간의 자연개조로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로 20세기 들어서 인간은 자연을 개조할 충분한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맥닐(J.R. McNeill)이 말하는 대로, 지난 20세기의 역사는 “인류가 자신의 편리를 위해 지구 민물의 자연적인 유로와 리듬을 강제로 변경한 역사”였다. 과거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수리분야 보좌관 맥지(W.J. McGee)가 “물의 통제는 인간이 자연의 통제자가 되기 위해 넘어야 할 마지막 단계이다”라고 이야기했듯이, 어쩌면 우리 인간은 자연에 대한 최후의 통제자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오체투지(五體投地) 순례길을 떠나면 문규현 신부는 자신이 사제서품을 받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려 한다고 말했다. “바닥에 온 몸을 엎드리곤 가장 겸손한 태도로, 모든 세속적 욕심을 버리고 오직 예수님처럼 이웃과 세상을 섬기겠노라 다짐했던 그 때”로 돌아가려 한다고 했다. 수경 스님 역시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이 땅의 품에 안기고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한다고 했다. 특별히 그에게 고체투지는 다름 아닌 인간다움의 표상인 직립에 반대하는 일이었다.
사람이 서서 걷기 시작하면서 문명이 시작되었다. 눈으로는 더 넓게 더 멀리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손으로는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과 반대로 무릎을 굽히고, 팔꿈치를 꺾고, 머리를 숙여 온 몸을 땅에 붙이고 기어서 가고자 한다.
직립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 짓게 했고, 인간들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르게 했다. 하지만 수경은 바로 그 인간이 생명의 질서를 거스르는 ‘만물의 폭군’이 되었음을 고발했다. 21세기 에큐메니컬 신학과 운동의 한 중심 주제는 이렇게 만물의 폭군이 된 ‘전능한 ’인간‘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오재식 회장은 박상증 목사님을 가리켜 “지속가능한 발전을 무시하는 개발 이념에 정면으로 도전한 논객”이라고 회고했다. 실제로 박상증 목사님은 프린스턴신학교 유학 시절 마카이 학장의 강의를 통해 에큐메니즘이란 가시적인 교회의 일치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속에 전 우주가 하나 돼 서로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배웠다. 마카이 학장은 “전 우주가 하느님의 창조 세계다. 창조 세계 안에서의 조화와 협력이 에큐메니즘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박상증 목사님은 회고한다. 이렇게 에큐메니즘 안에는 이미 평화 · 공존 · 생태 · 협력 · 사랑이 있다. 지금 우리는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롬 8:22)을 안다. 세계 교회는 2013년 부산에서 오늘의 전 지구적 생명의 위기 앞에 어떤 참회와 희망의 메시지, 그리고 실천적 대안을 내놓을 것인가?
II. 영성의 위기
1929년 대공황 이후 최악의 금융위기라는 2008년 월가의 금융위기로 시장에 대한 신흥종교인 신자유주의에 대한 믿음에는 금이 갔다. 월가의 위기는 지금 그리스와 남부 유럽으로 옮겨가 현재진행 중이다. 이런 금융참사들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규율 받지 않는 시장’은 언제든지 거대한 탐욕과 투기의 전쟁터로 변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문제는 지금의 금융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 있다. 1980년대 초 ‘레이거노믹스’로부터 본격화된 미국식 금융자본주의는 전업 투자은행(Investment Bank, IB)을 다시금 시스템의 주인공으로 불러들이며 엄청난 규모의 파생금융상품을 만들었다. 그 규모를 50조 달러까지 키우며 첨단 금융기법을 개발했다면서 ‘리스크 제로’의 환상에 취했다. 자기자본의 100배에 달하는 돈을 빌려 이리저리 굴리는 위험천만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미국의 금융자본은 아무런 규제 없이 국경을 넘나들었고, 여기에 ‘카지노 자본주의’라는 비난이 거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지만 방종과 오만의 대가는 너무 컸다. 월가 금융사태의 뇌관 구실을 한 파생금융상품 CDS(Credit Default Swap)에서 극명하게 엿볼 수 있듯이, 대형 투자은행들이 벌이는 머니게임 속에서 리스크는 죽지 않았다. 다만 시한폭탄처럼 이리저리 떠넘겨졌을 뿐이다.
현대 금융 자본주의는 맘모니즘(Mammonism)이라는 신학적 문제를 제기한다. 금융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물신성(物神性)은 더 이상 교회가 피해갈 수 없는 핵심적 신앙의 문제가 되었다. 오늘의 금융 자본주의 아래서 부(富)가 어떻게 창출되는지 보자. 현재의 금융 시스템은 ‘부채’를 창출해 (가치가 아니라) 돈을 창출한다. 사실 급속하게 축적되어 온 국제 금융자산의 대부분은 부채다. 현재의 금융시스템은 실질 가치를 창조하지 않고도 부채의 창출을 통해 부를 창출할 수 있으며, 자산 가치의 증식을 통해서도 부를 창출할 수 있다. 한마디로 현대 금융 자본주의 아래서 돈은 거의 순수한 추상물이 되어버렸으며 화폐의 창조는 가치의 창조에서 분리되어 버렸다. 그런데 이처럼 생산에 필요한 단 하나의 실질적 가치도 없이 돈을 창조할 수 있는, 그러니까 돈을 ‘무로부터 창조(creatio ex nihilo?)’할 수 있는 현대 금융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 과연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음의 글을 읽으며 마음에 찔림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될까?
잘나간다는 차이나 펀드나 남들 다 한다는 펀드 몇 개에 소액 자산을 쪼개 넣었다... 복잡한 파생상품 설명에 질리나, 호기롭게 그냥 질렀다. 잠깐은 재미도 봤다. 수익률 예상 조회를 해 보면, 하루만에도 몇 달치 은행 이자만큼이 붙어 있었다. 어디서 그런 돈이 오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중국 경제가 자동차를 팔아 돈을 버는지, 가짜 시멘트나 멜라민을 가득 탄 우유로 수익을 내는지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물론 나는 개중 어설픈 개미 투자자였겠지만, 상당수 보통 사람들도 펀드 수익이 발생하는 근원을 따져보는 대신 펀드사 이름값에 휘둘렸을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는 미국발 금융 대공황이다.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는 상품 생산과 거래를 제쳐두고 돈만으로 돈을 벌어들인다는 파생상품의 수익 잔치는 거대한 사기극이었음이 들통 났다.
과연 이 ‘거대한 사기극’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될까? 시장이 미친 듯 돌아가면서 이른바 ‘재테크’라는 이름으로 온통 불로소득을 쫓아다닐 때, 그리고 세계 외환시장의 변동에 따라 ‘돈 놓고 돈 먹기’ 식으로 한몫 잡겠다고 온 세상이 미쳐 날 뛰 때,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런 식으로 ‘나의 풍족함을 위해 다른 이들에게 고통을 떠넘기는 일’이 다름 아닌 죄라고 설교했는가? 성실하게 땀 흘려 노동하지 않고 누리는 부가 사실은 가난한 이웃과 자연에 대한 약탈의 결과라고 가르쳤는가? 아니 오히려 한국교회는 청빈(淸貧)이 아니라 청부(淸富)가 ‘성경적 원리’라고 가르치지는 않았던가? 아니 유럽의 일부 교회들은 교인들이 하나님께 바친 헌금을 월가에 투자했다가 하루아침에 다 날리지는 않았던가?
과거 독재자들은 ‘강압’으로 국민을 지배했다. 금융자본이라는 오늘날의 맘몬(Mammon, 재물 신)은 돈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무기로 우리를 지배한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마태 6:34)고 단언했다. 그런데도 교회는 이런 저런 방식으로 ‘번영의 복음(gospel of prosperity)’이 마치 예수의 복음인 것처럼 가르친다. 오늘의 금융 자본주의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맨 먼저 요구되는 것은 빈곤의 신 맘몬으로부터 생명의 신 하나님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회심’하는 것이다. ‘돈 신’에 대한 우리의 은밀한 사랑과 비겁한 굴종으로부터 영적 · 정신적 자유를 얻는 것이다. 이것은 금융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특히 지구 북반구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기독교적 영성(spirituality)의 문제이다. 아시아의 대표적 신학자의 한 사람인 알로이스 피에리스(Aloysius Pieris)는 ‘가난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poverty)’가 ‘가난으로부터 오는 자유(freedom that comes from poverty)’와 결합되지 않으면 우리는 맘몬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고 단언했다. 아시아의 종교와 문화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발적 가난’의 영성에 우리는 다시 주목해야 한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탐욕 위에 기생하는 맘모니즘과 싸울 수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WCC는 이제 지금까지 집중적으로 다루어져온 ‘빈곤선(poverty line)’의 문제뿐만 아니라 ‘탐욕선(greed line)’이라는 새로운 신학적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인간의 탐욕추구를 허용할 수 있는 한계선인지 교회가 그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탐욕선의 문제는 매우 신학적이고 윤리적이며 또한 심리적이고 경제적인 문제다. 결국 영성의 문제다. 이 문제는 이 땅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될 것인지 아니면 물신의 교회가 될 것인지를 가늠하는 교회론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는 기후변화로 인한 생태적 위기와 신자유주의 몰락으로 인한 경제적 위기라는 이중의 위기 속을 살고 있다. 이 두 위기는 두 다른 위기가 아니라 하나의 위기다. 생태(ecology)라는 말뿐만 아니라 경제(ecology)도 ‘한 집안’ 혹은 ‘생명 공간’을 뜻하는 ‘오이코스(oikos)’에서 파생됐다. 생태가 하나님의 집의 환경에 관한 것이라면 경제는 그 집의 운영에 관한 것이다. 각 교파는 자기 교파라는 작은 방에서 나와 하나님 지으신 이 커다란 ‘한 집안’에서 어떻게 모두가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지를 논하는 통 큰 에큐메니컬 신학으로 발전되어 나가야 한다.
III. 평화의 위기
기후변화를 중심으로 한 생태적 위기가 전 지구적(global) 생명의 위기이고, 현대 금융 자본주의 시스템의 물신성으로 인한 경제적 위기가 지구 북반구 권역의(regional) 영성의 위기라면, 평화의 위기는 이 세계의 많은 지역들(local), 특히 팔레스타인과 한반도에서 겪고 있는 전쟁의 위기다.
최근의 천안함 사태와 그로 인한 한반도 긴장의 고조는 다시금 우리에게 우리가 잠시 전쟁을 쉬고 있는 상태에 살고 있었음을 환기시켜주었다. 연평도 앞을 거쳐 백령도 앞까지 그어진 ‘북방한계선(NLL)’과 북이 선포한 ‘해상경계선’ 사이에 이미 세 차례의 교전이 있었고 (1999년 6월의 제1차 서해교전, 2002년 6월의 제2차 서해교전, 그리고 2009년 11월의 제3차 서해교전), 천안함 사태 이후 지금의 이곳은 남북 사이에 또 다시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가장 위험한 지역이 되었다. 2007년 4월의 남북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서해 평화협력지대를 제안했고 남북의 군함이 대치하는 이 지역을 양쪽 어선들이 평화롭게 고기를 잡을 수 있는 공동 어로구역으로 만들자고 제안했지만, 지금 이 지역은 한반도 전체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갈 수도 있는 가장 민감한 지역이 된 것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남과 북의 젊은이들은 서로 번갈아 가며 죽고 또 죽어야 하는가?
『박상증과 에큐메니컬 운동』에는 선민주 후통일을 주장해 오던 한국의 민주화운동 세력이 어떻게 분단 상황의 완화 없이는 진정한 민주화가 어렵다는 전략적 판단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험난했던 시절 놀라운 기지와 용기를 발휘하며 남북의 평화와 화해의 물꼬를 텄는지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반도 이슈의 주제를 ‘동북아의 평화’로 잡아 친북 혐의를 털어버리기로 한 점, WCC를 끌어들여서 판을 키움으로써 파급력을 높이기로 한 전략적 결정이 내려지는 과정을 읽으면서 탄성이 절로 나왔다. 바늘구멍 하나 들어갈 수 없이 완고해 보이던 분단의 철벽은 이렇게 도잔소를 기점으로 글리온의 남북 교회 대표자 만남을 거쳐 88년 통일선언에 이르러 커다란 구멍이 나고야 만 것이다. 결국 평화와 화해와 통일을 갈망하는 커다란 강줄기의 물꼬가 터지고야 만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강줄기가 막히고 물이 고이더니 급기야 역류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필자는 최근의 한국 에큐메니컬 운동의 두 주요 문서에서 이에 관한 힌트를 얻고자 한다.
먼저 <한반도 평화통일을 향한 한국교회의 비전> 문서(이하 <비전 문서>)이다. 이 문서는 88년 이후 변화된 상황에 발맞추어 나온 제2의 통일선언이기에 우리의 주목을 끈다. 이 문서에서 한반도의 통일세상은 이 땅에서 누릴 하나님의 나라로 신학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샬롬의 평화 곧 하나님의 정의의 평화가 이 땅에 실현되는 곳이다. 이 평화는 로마의 억압적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화이다. 통일된 한반도의 비전도 바로 이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 그 내용이 일치해야 한다. 그러면서 <비전 문서>는 <88 선언>이 제시한 5대 원칙 위에 ‘과정으로서의 평화통일’을 새롭게 제안한다. 그리고 이를 위한 10대 과제를 제안한다. 이중에서 보다 국제적인 함의가 있는 것은 두 번째, ‘동북아 및 세계의 비핵화와 긴밀히 연관된 한반도 비핵화의 실현’과 세 번째, ‘한반도 냉전구조의 해체와 평화체제의 수립’ 그리고 열 번째, ‘주변 강대국들의 지지와 협력 그리고 식민지 배상’이다. <비전 문서>는 이러한 10대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한국교회가 해야 할 실천으로 6대 방안을 제안한다. 이중에서 동북아 및 세계의 교회들과 관련이 있는 것은 다섯 번째, ‘평화의 세계화 노력’, 구체적으로는 남과 북의 교회가 일본교회 및 재일 한인교회 등과 연합하여 식민유산의 극복을 위해 노력하는 것, 나아가 남과 북의 교회가 한반도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선교협의회를 구성하여 세계교회와 공동사업을 추진하는 것, 그리고 여섯 번째 ‘WCC의 2013년 부산총회를 한반도 평화통일의 전환점이 되는 기회로 만들어 나가는 것’ 등이다.
하지만 이 문서는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이 작성한 <카이로스 문서>와 비교해 보더라도 정책적 비전이 강한 반면 신학적 비전은 상대적으로 약하다. 하지만 다행히 올해 발표된 <생명과 평화를 여는 2010년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 (이하 <생명과 평화의 선언>) 안에 이를 보완할만한 구체적 신학적 작업이 시도되었다.
<생명과 평화의 선언>은 <1973년 한국 그리스도인 신앙선언>과 1988년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 등, 민족의 고난과 희망에 참여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악의 세력에 저항하고 투쟁해 온 전통을 이어가려는 노력으로 스스로를 이해한다. 이 선언은 먼저 우리가 사는 시대를 “엄혹한 절망과 위기의 시대”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 위기에 가담해 온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죄책을 겸허히 고백한다. 이어서, 에큐메니컬 선언에서 드문 일이지만, 삼위일체적 신앙고백에 따라 구체적 과제와 실천방안을 제시한다.
먼저 신론에서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으로 이해된다. 그 분은 해와 달과 별, 우주와 자연 그 안에 있는 모든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다. 그리고 모든 생명은 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기에 각각 충만하게 살 권리를 가진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는 생명을 살려나갈 책임이 부여되어 있다. 만물의 상호의존과 상호결합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참된 문명의 번성과 성장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보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창조 질서가 지켜질 때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여기서 창조의 신학이 평화의 신학으로 이어진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생명의 존귀함과 아름다움을 나누고 가꾸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전쟁에 반대한다. 그래서 지구의 멸망을 담보로 만들어진 모든 핵무기는 폐기되어야 한다. 한반도에는 전쟁의 위협이 없는 평화가 이루어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대체되고 남북 간 군비축소와 전쟁연습의 중지가 이루어져야 하며 외국군을 철수시켜 민족의 자결과 자주가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창조의 신학은 땅과의 평화 신학으로도 이어진다.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신앙고백은 땅과의 올바른 관계회복에서 비롯되기에 농업의 복권과 그 문화의 창조적 계승이 제안된다.
다음으로 기독론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으로 이해된다. 성육신 사건은 인간과 세상과 육체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이다. 하나님 스스로가 낮고 천한 자리에 오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의 평화를 선포하셨다. 그 평화는 만물이 서로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생명의 충만함을 누리는 평화다. 때문에 권위주의적 정치가 아니라 민주주의 정치가 옹호된다. 다원적인 정치가 선호된다. 정치적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경제적 민주주의도 옹호된다. 소유의 권리는 공동체의 복지를 위한 사회적 책임을 면제받은 신성불가침의 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육신의 신학이 정치와 경제에서의 평화의 신학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정의와 평화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힘으로 이해된다. 이 영은 생명이 충만하고 정의로우며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도록 우리를 보내시는 영이다. 그리고 이 영은 다양성의 세계 안에서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이기심과 차이를 넘어 하나 되게 하시는 분이다. 이 거룩한 영에 이끌려 우리는 새로운 공동체의 비전을 갖게 된다. 이념적 차이를 넘어 북한의 동포를 지원하고, 인종과 문화의 차이를 넘어 이주 노동자들과 함께 하며, 인간과 자연의 경계를 넘어 생명의 유기체적 고리를 지켜가는 활동을 벌여나가게 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생명의 영이신 성령 안에서 사랑으로 연결된 공동체가 된다. 교회는 이 성령의 능력 가운데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날 수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대형화의 강박에서 벗어나 작은 자를 섬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성차별을 없애고, 다문화 가정을 환영하며, 한국의 전통 종교와 대화 및 연대하고, 국내외적으로도 정복적이고 일방적인 전도행위를 지양해야 한다. 이렇게 인간이 만든 경계를 넘어 소통의 평화를 이루어가시는 성령의 신학에 근거해 포용적인 공동체의 신학이 탄생한다.
<생명과 평화의 선언>은 이렇듯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삼위일체론적 신학의 토대 위에서 정의와 생명과 평화 그리고 화해와 소통과 같은, 우리 시대 에큐메니컬 운동이 추구해야 할 핵심 가치들을 설명해 나갔다는 점에서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귀중한 신학적 이정표가 되는 선언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언급하겠지만 필자는 이러한 삼위일체론적 구조로 한국교회가 오는 2013년의 WCC 부산총회의 주제를 제안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반도의 지역적 상황으로서 평화의 문제를 제기할 때 우리가 유념해야 할 흐름은 WCC가 ‘폭력극복 10년(The Decade to Overcome Violence 2001-2010, 이하 DOV)’을 마무리하면서 이를 종합하는 ‘추수 축제(harvest festival)’로 내년 5월 17~25일 자메이카의 킹스턴에서 1천 명 규모로 개최할 ‘국제 에큐메니컬 평화회의(International Ecumenical Peace Convocation, IEPC)’이다. 이것은 2013년 부산총회 이전에 WCC가 전개하는 가장 크고 중요한 프로젝트의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평화회의와 관련하여 WCC는 현재 <에큐메니컬 평화선언>을 준비하고 있는데, 현재 2차 초안이 도착한 상태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이 선언문 초안에는 우리의 세계에 대한 깊은 예언자적 통찰도, 교회의 죄책 고백도, 평화에 대한 분명한 신학적 해석도 없다. 이 선언문 초안에 붙여진 제목은 "A peace that surpasses all understanding..."이다. 이는 빌립보서 4:7의 첫 부분, 즉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개역개정), 혹은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공동번역), 혹은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표준새번역)에 해당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선언문을 ‘하나님의 평화’라는 표현을 굳이 삼간다. 왜 일까? 킹스턴 <에큐메니컬 평화회의> 준비를 위한 한 문서를 보면, 이 회의의 임무는 ‘하나님의 평화(Peace of God)’가 교회와 세계에 주어진 선물이자 그들의 책임임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WCC는 ‘하나님의 평화’를 뒷받침하는 신학을 ‘에큐메니컬 공정한 평화 신학(Ecumenical Just Peace Theology)’이라고 이름 짓고 있다. 하지만 이 신학의 실체가 불분명하다. 한마디로 WCC는 평화문제를 놓고 신학적으로 표류하는 느낌이다. 한국의 에큐메니컬 운동이 다시금 크게 할 일이 생겼다.
이런 모호성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번 평화선언 초안은 평화에 대한 네 방면의 입체적인 접근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끈다. 에큐메니컬 평화선언이 추구하는 평화는 첫째로 ‘공동체 안에서의 평화(Peace in the Community)’이다. 여기서는 인간 사회가 계급과 인종과 종교와 성으로 분열되어 있음을 지적하면서 우리가 포용적인 공동체들(inclusive communities)을 세우기 위해 일해야 한다고 말한다. 둘째로는 ‘지구와의 평화(Peace with the Earth)’이다. 여기서는 무한한 경제 성장 모델 및 화석 연료의 남용에 기초한 인간의 삶의 양식 때문에 기후 변화와 같은 전 지구적 생태적 위기가 도래했음을 지적하면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 핵심적 원칙으로 ‘생태적 정의’가 추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는 ‘생태 교회’ 혹은 ‘녹색 교회’가 되어 이산화탄소 배출 저감을 위한 노력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셋째로 ‘장터에서의 평화(Peace in the Marketplace)’이다. 여기서는 현재 전 지구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극심한 빈부 격차와 양극화를 문제로 지목하면서 시장 지향적인 경제 자유화 정책의 실효성에 의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생명의 경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실 이 주제는 WCC가 AGAPE 문서 채택 이후 그 후속작업으로 벌이고 있는 ‘가난, 부, 그리고 생태(Poverty, Wealth and Ecology, PWE)’ 프로그램과 결합할 가능성이 크다. 마지막 넷째로 ‘민족들 사이의 평화(Peace among the Peoples)’이다. 여기서는 외국인 혐오증, 공동체 간의 폭력, 증오 범죄, 노예제, 대량 학살 등의 문제가 평화를 위협해왔음을 상기시키면서 오늘날 생명과 생명의 기초를 송두리째 파괴할 수 있는 핵무기, 즉 ‘대량살상무기의 확산’과 기후변화, 즉 ‘대량멸종의 라이프스타일의 확산’, 이 두 가지가 평화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입체적(“4D"적) 구도는 ‘평화’라는 주제어로 세계 에큐메니컬 운동과 신학의 주제가 수렴 혹은 합류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 안에는 한국 에큐메니컬 운동이 전통적으로 추구해 온 인권과 민주화("Peace in the Community"),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Peace among Peoples")뿐만 아니라 필자가 앞서 제기한 생태적 위기("Peace with the Earth") 및 경제적 위기("Peace in the Marketplace")를 종합할 공간이 있다. 전 지구적 생명 위기의 무게를 감안한다면 ‘생명’과 ‘평화’를 차기 WCC 부산총회의 주제어로 제기해 앞으로 10년간은 세계 에큐메니컬 운동의 핵심 의제로 추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신학적으로 공식화(formulate) 할 것인가이다. 이에 관해 논의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교회의 지형 변화를 살펴보도록 하자. 세계의 정세 변화도 중요하지만 교회의 지형 변화도 에큐메니컬 운동의 미래를 상상하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