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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1-18 15:40
[베리타스 인터뷰] 통일운동 (상)
글쓴이 : 최고관리자
2012-01-10 00:32 ㅣ베리타스 인터뷰 ㅣ  김진한 기자
“보수 교회, 북한 붕괴론이라는 호전적 생각 전환해야”
신년특집- 서광선 박사에게 통일운동의 미래를 묻다(상)
서광선(徐洸善, 80) 박사가 자신의 서재에서 오래된 파일 하나를 꺼내들고는 펼쳐 보였다. 한국 기독교통일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되고 있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1988년) 원문은 그렇게 그의 손에 들려 그 모습을 드러냈다. 원문은 깔끔하게 정돈된 상태로 남아있지 않았다. 군데군데 수정을 거듭한 부분도 있었으며 문단 전체가 통째로 삭제된 부분도 있었다. 이러한 흔적들은 당시 원문을 둘러싼 논쟁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암시해주고 있는 듯 했다.
 
순수 민간 차원의 아래로부터의 통일 운동의 기초석이 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이하 ‘88 선언’)은 남북 7.4 공동성명에서 결의된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 등의 3대 원칙에 더해 ‘인도주의 원칙’과 ‘통일 논의에의 민중의 참여’를 포함시켰다는 측면에서 당시 학계나 시민단체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주요 대북 전문가들은 지난해 말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후 한반도를 둘러싼 급변하는 정세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정부의 계속적인 5.24 조치는 남북관계를 교착상태에 빠뜨리고 있다는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데 있어 민(民) 차원의 통일 운동의 중요성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본지는 지난 6일 ‘88 선언’의 주필로 참여한 직접적 당사자 서광선 박사를 만나 한국교회 통일 운동의 미래를 모색하는 것으로 신년특집을 꾸며봤다.
 
▲신년특집으로 이화여대 명예교수이자 본지 논설주간인 서광선(徐洸善, 80) 박사를 서대문에 소재한 그의 연구실에서 만나 한국교회 통일 운동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내다봤다. ⓒ베리타스
- 한국 기독교통일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되고 있는 1988년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에 직접 참여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때 그 시절을 회고해 보신다면요.
“교회의 통일백서 기초위원들로 9명을 정했습니다. 오재식 박사(당시 NCCK 선교훈련원 원장)가 실무를 맡고, 제가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세 개 분과를 나눠서 신학분과에서는 평화신학, 통일신학을 연구했고, 정책분과에서는 통일 정책을 남북 정부에 제안하는 정책안들을 모색했으며 세 번째 분과에서는 한국교회가 남북 통일 운동을 위해 할 일들이 무엇이 있는가를 놓고 고민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제 1분과인 신학 분과에서는 한국교회에게 에큐메니칼 선교라고 하는 것은 3.1 운동 때부터 자유와 독립, 평화를 뜻하고 있는 것임을 재확인했습니다. 이 3.1운동 정신 밑바탕에는 대한의 독립이 바로 한반도의 평화와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성취하는 것임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 선교적 사명이라는 것은 자유와 독립과 평화라는 말입니다. 그런 인식이 바로 한국전쟁을 경험한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선교적 사명으로 부여됐습니다. 60년대, 70년대 한국교회 사명이 정치적 민주화라고 말할 것 같으면 80년대는 평화 통일이 한국교회의 선교적 사명으로 인식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중심으로 해서 한국 기독교의 선교적 사명을 천명을 한 것이 (‘88 선언’의)특징이고, 특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력한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그런 선교적 사명을 다짐하면서 남북 분단의 책임 그리고 한국 전쟁의 책임 그리고 분열과 증오의 죄책고백을 한 것이 제 1분과의 신학적인 정립에서 분명하게 나왔습니다. 서로 증오한 죄, 전쟁을 일으킨 죄, 반공이데올로기에 붙잡힌 노예가 되어서 민족의 화해와 평화의 사명을 망각한 죄를 고백, 회개하는 것에서부터 통일 운동을 시작해야 하겠다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두 번째 분야 정책에 있어서는 제일 먼저 핵심이 되었던 것은 남북 정상급이 합의한 7.4 공동성명의 세 가지 원칙이었습니다. 민족 중심, 민족 대단결, 이념과 체제를 초월한 평화적인 방법의 통일. 그게 그 당시 김일성과 이후락 정보부장이 서명한 남북 정상의 합의 사항이었습니다. 세 가지 대원칙을 ‘88 선언’에 수용을 하고, 글자 그대로 두 가지를 더 붙였습니다. 먼저 ‘인도주의 원칙’에는 이산가족상봉, 인도주의적인 지원, 체제를 초월한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의 상호 원조를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민중 참여의 원칙’을 세웠습니다. 통일 논의를 정부만 독점해서는 안된다는 인식에서였습니다. 이것은 민족의 문제이기에 정부에게만 맡길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민중의 참여를 말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민중이 통일 논의에만 참여할 것이 아니라, 민중 차원에서의 민간 교류, 즉 교육, 예술, 경제, 문화, 학술 여러 방면에서의 민중 참여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부연했습니다.
 
다시 말해 통일이 위로부터의 통일, 정부만의 얘기가 아니라, 민족과 민족, 사람과 사람, 민중과 민중 등 아래로부터의 마음과 마음의 화합, 마음과 마음의 교류, 마음과 마음의 소통이라는, 그런 정신으로 두 가지 원칙을 보탰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민간 교류, 이산 가족 문제, 그리고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시키는 일, 남한의 미군 철수, 남북의 비핵화, 군축 등을 남북 정부에 제안했습니다.
 
세 번째 분야에서 한국교회의 책임, 한국교회의 역할 등을 다뤘는데 이것은 희년을 선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분단 50년 해인 1995년을 통일을 희년으로 삼아서 희년을 향해서 이것을 실천에 옮기려 했던 것이었는데 이제는 종말론적 희년이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부활의 희년. 앞으로 성취될 미래의 희년으로, 우리는 계속해서 희년을 향해서 통일 운동을 해 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 ‘88 선언’을 하기까지의 과정이 순탄치만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었나요.
“‘88 선언’이 채택되기까지 치열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참여한 위원들이 보수에서 진보까지 스펙트럼이 넓어서 였는지 몰라도 특히 죄책 고백에 있어서 6.25 전쟁은 북한이 먼저 침략한 것인데 왜 우리가 죄책 고백을 해야하느냐 하고 논쟁이 불붙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한 반대가 참 심했어요. 작년에 정부가 5.24 조치를 발표했는데, 골자인 즉 천안함, 연평도에 대한 사과 없이 결코 남북 대화 할 수 없다는 것인데 이것도 그 연장선 상에 볼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건부 화해를 말하는 것인데 우리가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것은 참 수용되기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 말씀하신 것처럼 이 선언이 남북 7.4 공동성명에서 결의한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 3대 원칙에 ‘인도주의 원칙’과 ‘통일 논의에의 민중의 참여’를 추가한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선언문 채택 이후 우리나라 정부에 이 원칙들이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했다고 보시나요.
“김대중 대통령의 6.15 남북정상회담에서 이룩한 6.15 라든지 그 이전에 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1992년 남북 기본합의서 등은 ‘88 선언’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남한의 민의 소리와 관련해 ‘88 선언’이 제시한 것을 노태우 정권이 집권 당시인 88년 통일정책에 많이 반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정말 기쁘고 다행스럽게 생각을 합니다.”
 
이 대목에서 서 박사는 노태우 전 대통령 당시 국토통일원 장관을 지낸 이홍구 전 총리와의 일화를 하나 소개했다. 서 박사는 50, 60년대 이 전 총리와 같은 유학파로 가깝게 지냈다는 점을 강조하며 말을 이었다.
 
“‘88 선언’ 직후 이홍구 박사에게서 연락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 박사가 그러더군요. "서 박사, 거 재미있는 성명을 냈더군. 와서 설명좀 해주소."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삼청동 남북회담 사무소를 찾아가 국장들 열댓명을 앉혀 놓고, 고위 관리들을 상대로 오후 내내 설명한 뒤 질문받고 대답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해 올림픽 직전에 노태우 대통령이 북을 원수로 생각하지 말고, 형제와 친구로 생각하고 대화를 하자고 공표했고, 연이어 총리 회담 등이 진행되어 기본 합의서가 만들어지게 되었죠. (‘88 선언’을)민간 지성인들도 참 좋아했습니다. 북한의 그리스도교도연맹에서도 정식으로 환영을 했습니다.
 
민(民)의 참여가 이뤄지니까 민간 차원의 교류와 함께 경제 협력도 가능해진 것입니다. 개성공단이 들어선 것도 민간 교류, 민의 참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며 금강산 관광도 그렇고 햇볕정책 역시 말 뿐이 아니라,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이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모두 통일 논의에의 민의 참여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산가족 만남은 민의 참여이자 또한 인도주의 원칙의 결과물이었죠.”
 
-불행하게도 보수 교회는 진보 교회의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는 호평을 하는 반면, 통일 운동에 있어서는 견해를 달리하는 것을 넘어 심지어 혹평을 하기까지 하는게 현실입니다. 민주화 운동에서 통일 운동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의 전이해가 부족했던 결과가 아닌가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통일 운동은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볼 수 있어요. 70년대 민주화 운동을 시대적 소명으로 여기고 이에 참여한 진보 교회는 80년대 들어서 민주화 운동을 둘러싸고 크게 두 가지 의견으로 충돌아닌 충돌을 겪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민주 후통일이냐 선통일 후민주냐 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국내 정치와 경제의 민주화에 전념하자는 의견이었으며 후자는 남북 분단이라는 체제 하에서 민주화라는 것이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다는 현실 인식에서 참다운 민주화는 통일과 더불어 가능하다는 의견이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선민주 후통일 세력 역시 통일 운동의 중요성에 공감하면서 민주화와 더불어 민주화와 한데 얽혀 있는 통일 운동 역시 진보 교회에 부여된 사명임에 뜻을 모으게 된 것이었습니다. 통일 운동은 민주화라는 과제를 온전히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붙잡아야 할 에큐메니칼 교회의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반공이데올로기를 종교적 신념으로 간주하여 우상화함으로써 북한 정권을 저주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북한동포들의 희생을 정당화하기까지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나 이들이 한 목소리로 읊어대고 있는 북한 붕괴론이 매우 호전적이라는 평이 심심치 않게 들려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교회의 통일 운동에 있어 한국교회는 보수, 진보 진영 할 것 없이 대체적으로 반공이데올로기를 청산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또 기독교 신앙을 개인 구원에만 집중을 하고 사회적인 문제, 특히 민주화, 통일 운동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오로지 교회의 대형화를 추구하며 개교회주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점입니다. 보수, 진보 교회가 남북 문제를 둘러싸고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 더 갈라지고 분열되는 안타까운 상황이 계속 벌어지고 있으며 아직도 보수 교회에서는 북한의 붕괴를 위해 기도하고, 그래야 통일이 된다고 하는 호전적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게 우리가 처한 현실이라 생각됩니다.
 
한국교회의 대형화 문제를 잠시 언급해 본다면, 교세면에서 한국교회의 오늘날 구성 비율은 아마도 1%의 대형교회와 99%의 민중교회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양극화가 심화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실업자들이 모이는 가난한 교회는 계속 가난해 지고, 1%밖에 안되는 대형교회에는 계속 부자가 늘어 더욱 부자가 되고 말이지요. 문제는 이들 대형교회 사람들이 사회 문제와는 외면하려고 하면서 한국 정치에 깊숙이 영향력을 미치려 하는 것입니다. 80년대 당시 진보 교회가 민주화 운동을 하고 있을 적에는 정교 분리 원칙을 강조하던 그 사람들이 오늘에 이르러선 정치에 더 영향력을 미치려 하고, 급기야 기독당을 만들겠다고 하고 있으니까요. 기독당이란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하면 민주화 평화 통일을 정책으로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반북, 대형교회 권력행사를 위한 그런 권력 이익집단으로서의 정치 개입을 얘기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교회의 선지자적인 역할을 포기하고, 그 보다는 오히려 자본과 권력을 추종하고, 그것을 축복하는 그런 길로 나가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선 ‘88 선언’이 아직도 문제가 되는 문서로 여겨지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북한 붕괴론에 집착하고 있는데 생각이 전환이 절실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얼마 전 외교통상부 당국자가 브리핑에서 북한의 김정은 정권의 안정을 전제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습니다. 북한 김정은이 달라지려면 남한이 먼저 달라져야 합니다. 7.4 공동성명과 남북 기본합의서의 재검토, 재확인 그리고 실천 등이 필요합니다. 거기에 더해 ‘88 선언’에 나와있는 인도주의 원칙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김정은이 당면한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보다 배고픈 북한의 인민들을 먹여 살리는 일입니다. 제일 시급한 일이고, 그것을 제대로 해내야 김정은 정권이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것이거든요. 그래야만 남북 간 평화의 햇빛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달라지는게 중요합니다.
 
흡수통일론이라든지 붕괴론이라는게 얼마나 위험한 생각입니까? 그것이 불가능한게 90년대 초 80년대 말 독일이 통일이 되었을 적에는 동독을 지탱할 만한 소련의 힘이 이미 약해져 있었고, 그렇기에 소련이 동독의 후견이 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흡수통일이 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남북한의 지금의 경우에는 중국이 든든하게 뒷받침하고 개입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정치, 경제 모든 면에서 북한이 중국에 깊이 예속되어 있는 상태에서 동독 같은 흡수통일이라든지 경제적인 붕괴라는 것은 기대하기 참 어려운 것입니다. 독일 통일이 될 때 경제적인 차이가 4대 1 정도 였습니다. 우리는 거의 100대 1에 가깝거든요. 하지만 아무리 북한의 경제 상황이 약해도 정치적인 것으로 중국이 뒷받침하고 있는 한 동독이 붕괴된 것처럼 북한이 붕괴된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또 동독이 흡수되기가 쉬웠던 것은 분단 이후 계속적으로 민간교류가 있었고, 이산가족이 상호방문 할 수 있었고, 편지교류 통신이 가능했고, 물적 교류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 밖에도 통일비용을 생각해 볼 때 남북 격차가 적어도 10대 1이 되도록 우리가 도와주지 않으면 통일은 어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정치 경험이 없는 북한의 독재자가 안정을 찾고, 북한 주민들도 안정을 찾고서 인간다운 삶을 살기 시작할 때라야 비로소 통일 얘기도 나오고, 자신 있게 평화협정 얘기도 할 수 있는게 아닙니까. 그렇지 않으면 북한이 중국에 예속되거나, 우리 정부 역시 미국의 영향력에서 계속 벗어나기 어렵게 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일본은 어떻습니까. 같은 민족끼리 남한이 나서서 도와주지 않으면 우리 민족의 앞날이 참 암담합니다.”
 
- 한국교회 통일 운동에 있어 진보, 보수 교회가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여전히 요원한 과제라고 여겨지는데 서로간 합의점을 찾는 것은 불가하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무의미하다고 보십니까?(계속)

김진한 기자

jhkim@verita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