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에서 계속
IV. 종교 갈등의 개신교측 구조와 원인
“봉은사 땅 밟기 사태” 등으로 표출되는 종교 갈등의 근본 원인은 한국 기독교 내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근본주의적 신앙태도와 개교회주의가 결합한 결과라고 판단한다. 배타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근본주의적 속성은, 한국 개신교를 “예배당 기독교”로 형상화되었으며, 건물로서 예배당 중심의 개신교는 “개교회주의”로 꽃을 피우고 그 정점에 “대형교회”가 자리 잡고 있다. 근본주의 신앙과 신학 담론이 지배하는 예배당 중심의 개교회주의 기독교가 한국의 종교 갈등을 일으키는 구조적 원인이며, 신뢰로 상실을 가져오는 제일 요인이라고 본다. 근본주의적 담론은 신학교와 교회에서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산되었으며, 전체 기독교와 무관하게 개별 교회나 특정 집단의 성장만을 위한 전도나 선교가 현재의 갈등 구조를 생산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차례로 살펴보자.
1. 보수주의 신학 담론
한국교회의 신앙양태가 보수주의 또는 근본주의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초기 한국교회의 종교 지형도를 형성하는데 주로 역할을 한 미국선교사들의 신앙 양태가 근본주의에 가까운 보수주의였다. 일제 강점기 동안 근본주의신학의 영향을 받은 박형룡을 중심으로 한 보수근본주의가 한국교회의 주류가 되었으며, 해방 이후 몇 번에 걸친 개신교의 분열 후 보수 교단이 더욱 성장해 왔다. 예를 들어, 예장(합동), 예장(고신), 하나님의 성회, 기성, 예성, 기침 등이 크게 성장한 반면, 진보 교단에 속하는 기장과 성공회는 상대적으로 덜 성장했다. 예장(통합)이나 기감도 많이 성장했지만, 이 두 교단은 신앙 노선이 현재 미국 장로교나 감리교의 진보적인 노선과 달리 매우 보수적인 성향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한국 개신교 교파의 절대 다수가 복음주의적이며 보수적이고, 한국 개신교인의 대다수가 신앙적으로 근본주의 내지는 보수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
이런 보수주의 신앙과 신학은 신학대학과 교회의 설교, 개신교 계통의 잡지를 통해서 확산되었다. 종교 갈등에 관련해 보수주의 신앙의 문제는 유일신 신앙을 배타주의적 입장에서 전개한다는 것이다. 종교가 확산되려면 무엇보다도 전파의 역동성이 요구되는데, 유일신 종교는 확산에 강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 유일신 종교인 기독교의 경우 “유일한 하나의 참된 신(The Only One True God)”에 대한 믿음은 전도할 의무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런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 종교적 확산에 절대적으로 효과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믿음이 반사회적 태도와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배타주의적 확신은 무엇보다도 어떤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진리, 지식, 선함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보는 태도다. 이것은 진리와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자신의 집단(내집단)과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는 타인의 집단(외집단) 사이에 경계선을 만들어 낸다. 이 경계는 내집단에 대해서는 연대감과 충성심을 만들어내지만, 외집단에 대해서는 배타성과 적대감을 조장하기 때문에 문제이다.
문제는 신앙담론 자체가 고백적 성격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신앙고백의 전거는 순환논리나 동어반복에 근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수근본주의 신앙은 자신의 믿음을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라고 확신하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한국 교회 안에서 선포되거나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담론의 내용은 다종교상황이라는 문제의식 아래서 형성된 담론이 아니다. 현재 교회 안에서 선포되는 담론은 기독교가 유일한 시대에 형성된, 즉 기독교가 공인되고 국교가 되어 지배 종교가 된 4세기 이후에 형성된 담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원래 로마의 종교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신학 담론을 형성한 기독교는 로마 제국을 향해 종교적 관용을 호소하면서, 이것이 인간이 공유하는 이성적 원리에 합치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런 종교적 관용은 기독교가 합법적 종교로 공인되고 종교적 관용을 누리게 되면서, 이전에 요구했던 종교에 대한 관용과는 달리 다른 종교에 대해 불관용을 드러냈다. 기독교가 지배종교가 되고 유일한 종교가 되면서, 타종교에 대한 의식은 다른 종교를 경쟁의 대상인 하나의 '다른 종교'로 간주하지 않고, ‘거짓된 종교’로 간주했다. 중세를 통해서 종교는 기독교와 동일시되었으며, 기독교 유일의 종교 의식에서 ‘기독교 중심주의’라는 배타적인 태도는 더욱도 강화되고 확장되었다. 이것이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급격한 변동을 겪는 미국 문화에 대한 반동적인 근본주의적 태도로 인해 더욱 강화되었다. 한국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담론은 여전히 이런 근본주의적 신앙담론이다.
이런 근본주의 신앙담론은 타종교에 관용성을 드러내는 한국 종교문화의 포용성과는 대척점에 서 있다. 게다가 한국 경우 같은 기독교라도 가톨릭은 타종교에 대해 상당히 포용적인 데 비하여, 개신교만이 배타적인 성격이 현저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런 근본주의적 신앙 담론은 여전히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종교다원주의 상황이라는 주제도 한국 교회의 담론에서는 관심 대상도 아니다. 현재 한국 교회 개신교의 목회자의 대부분을 양성하는 주류 교단의 신학대학이나 신학대학원 과정에서 종교다원주의를 고려한 신학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곳은 매우 드물다. 감신대와 한신대, 예장(통합)에 속하는 신학대학 일부가 ‘종교신학’이나 ‘토착화신학’ ‘타종교와의 대화’등을 선택과목으로 개설하고 있지만, 실제로 개설되는지 얼마나 자주 개설되는 지 확신할 수 없다.
또한 신학교의 신학교육에 대한 교단이나 교단 지도자들의 통제와 감시는 199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강화되어 왔다. 개교회주의의 산물로 대형교회로 성장한 교회의 목회자가 교단의 조직과 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신학교육의 방향까지 통제하는 상황에 오게 된다. 1990년대 초 감리교에서 변선환교수와 홍정수교수를 종교다원주의자라고 출교시킨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비교적 개방적인 신학교육이 이루어지는 몇몇 학교에서도 자유롭게 한국 사회의 다종교 상황을 고려한 신학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보수적인 교단의 대학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실제로 한국 개신교 목회자 절대 다수는 종교다원주의 상황을 고려하면서 목회를 위한 교육이나 훈련을 받은 적이 없으며, 이런 상황은 앞으로도 별로 바뀌지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 한국 개신교가 쇠퇴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원인을 종교다원주의적인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규정하는 근본주의적인 목소리가 더 높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미 종교 다원적인 한국 사회에 대비하지 못하는 한국 신학교육의 현장 모습은 한국 개신교의 장래를 그렇게 낙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 어쩌면 한국 개신교는 종교 다원적 상황이라는 종교 시장에 역행하는 이미 이길 수 없는 게임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2. "예배당” 기독교와 "대형교회”를 지향하는 "개교회주의”
한국 개신교의 이런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신앙 담론은, 기독교를 예배당으로 상징하는 예배당 기독교로 형상화되면서 더욱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한국 사회의 종교 갈등의 대부분은 교회와 교회 밖이라는 이분법적 구별 도식에 의해 전개되고 있다. 그런 한국 교회에서 기독교를 십자가 달린 예배당, 즉 “건물로서의 예배당”과 동일시하는 상황이다. 왜 이런 인식이 생겼는가? 기독교 역사에서 기독교가 건물로서 교회나 성당과 동일시 된 적은 없다. 서구 역사에 기독교는 지배종교로서 늘 “기독교 왕국”과 동일시된 까닭에, 기독교를 사회나 국가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다. 기독교인은 항상 충실한 하나님의 자녀이자 동시에 건전한 시민이어야 했다. 기독교가 지향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특정 건물에 제한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기독교 이해가 한국에서는 “예배당”과 동일하게 인식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서구의 역사적 경험과 달리, 한국 기독교는 선교 초기에 강력한 경쟁 종교를 가진 한국 사회에서 종교적 소수였다. 불교와 유교, 무교가 짧게는 500년 길게는 수천 년을 한국 땅에 존속해 온 다 종교 문화 상황에서, 한국 기독교는 자신의 정체성을 “십자가 달린 예배당”으로 형상화 했다. 그것이 선교사들의 의도적인 선택이든지, 한국인들의 무의식적인 인상이든지 기독교는 “예배당”과 동일시 된 것이다. 강력한 경쟁 종교가 이미 존재하는 상황에서 “예배당”이 기독교의 상징으로 성공적으로 자리매김했다는 데서 그 홍보 전략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건물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이해는 교회 밖의 세계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교회와 세상을 구별하는 이분법적 도식으로, 교회 밖은 구원의 대상일 뿐이다. 십자가 달린 예배당으로서 교회는 자연스럽게 한국 사회를 구원해야 하는 “방주”가 된다. 이런 예배당과 교회 중심의 기독교 이해는, 개별 교회가 전체 기독교보다 우선하게 되는 “개교회주의”와 만나면서 배타주의적 태도를 더욱 확고하게 형성한다.
한국교회의 "개교회주의"는 일정 부분 교파주의와 관련된다. 한국교회 교파주의는 19세기 개신교 선교가 남긴 유산의 하나인데, 한국교회에서는 이런 교파주의가 “교파 이기주의”의 형태로 고착된다. “교파 이기주의”는 자기 교파의 성장과 확장을 지상의 가치로 설정한다. 한국교회에서 이런 교파주의의 아류로 나타난 것이 “개교회주의”이다. “개교회주의”는 한국교회 전체나 교파의 이익보다는 자기 교회의 이익을 더 앞세운다. 오늘날 이런 개교회주의는 오늘날 한국의 대형교회에서 가장 잘 구현된다.
한국의 대형교회는 198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대형교회 대부분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 건립과 더불어 아파트촌 교회로 성장했다. 오순절 교단의 순복음교회, 감리교회의 금란교회, 광림교회, 장로교 통합의 소망교회, 명성교회, 장로교 합동의 충현교회, 사랑의 교회 등이 대표적인 교회들이며, 교단에 소속되지 않은 독립교회인 할렐루야교회나 갈보리교회도 여기에 해당한다. 오늘날 이들 대형교회들은 교단이나 지역노회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때로는 교단의 정치와 신학대학교의 신학노선까지 좌우한다. 이들이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장 큰 요인은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개신교 연합 사업에 필요한 경비를 자유롭게 조달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다.
1994년 이후 한국 개신교 교세의 성장이 정체된 상황 속에서 대형교회들이 계속 성장하고 있다는 것은, 비신자의 증가라기보다는 이웃 교회의 신자들이 유입되는 수평이동으로 인한 성장세 때문이다. 그런데 교인의 수평 이동은 교회의 빈익빈 부익부라는 부작용 현상을 초래한다. 브랜드화 된, ‘잘 나가는 교회’에는 쏠림 현상이 더욱 강하게 일어난다. 이 교회들은 인적, 물적, 시설 자원이 풍부하고 프로그램도 다채로워 많은 교인들의 다양한 요구와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에 경쟁에서 더욱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된다. 자원이 부족한 작은 교회들은 교인들의 이탈을 대책 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로 인해 매년 500여 작은 교회들이 문을 닫지만, 대형 교회들은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 한국교회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대형교회와 소형교회의 양극화”를 한국 교회의 제일 심각한 문제로 꼽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대부분의 한국교회나 목회자들은 대형교회의 물량주의와 교인 흡입 행태를 비판한다. 그렇지만 상당수의 목회자는 사실 대형교회로 자신의 교회를 성장시키기를 지향하며, 교단의 입장에서는 교단 소속의 특정 교회가 대형교회로 성장하는 것을 반긴다. 교파주의 전통에서 모든 교단은 교세에서 다른 교단이나 교파보다 더 성장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있는 데, 이런 상황에서 대형교회는 교단의 효자인 것이다.
더불어 이렇게 교파주의와 개교회주의의 지향은 제대로 교육받지 않는 무자격 목회자의 양산하게 된다. 교단의 입장에서는 가장 쉬운 교세 확장 방법이 교회 수를 늘리는 것이며, 교회를 쉽게 늘리는 방법이 목회자를 양산하는 것이며, 목회자를 양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무자격자라도 안수를 주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주요 비판 대상인 무자격 목회자는 이런 메커니즘 속에서 양산된다.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 사회에서 신분 상승을 이룰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 중의 하나가 교회 성장을 통한 목회자의 신분 상승이다. 70-90년대를 거쳐, 지연, 학연, 학벌에 관계없이 늘어난 교인의 수로 목회자의 능력이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 교인의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하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목회자는 개교회주의 입장에서 교회 성장에만 매달리게 된다. 사실 한국교회의 성장은 한국 개신교의 성장이라기보다는 한국 개신교 개별 교회들의 성장이라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지 모른다.
종교 갈등과 관련해서 개교회주의가 갖는 의미는 상당히 크다. 현재 한국교회에서 커다란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대형교회들은 전도나 선교 현장에서 이런 “개교회주의”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신자 확보가 어려워지면서 기성 교회들 사이에는 다른 교회 교인을 끌어오려는 시도를 하게 되고, 때에 따라 바람직하지 않는 수단과 방법이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 성장을 위하여 무차별적으로, 인위적으로 신도를 끌어 모으려는 경쟁이 더욱 확대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들은 전도나 선교는 자기 교회의 확장과 팽창을 위한 교두보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공격적 전도로 인해 생기는 종교 갈등의 문제는 이런 측면이 부분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종교 갈등 상황이 초래할 것이 예측된다 할지라도 이런 행태가 계속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공격적 전도나 선교로 인해 누군가가 혜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특정 교인이나 단체가 종교 갈등 상황을 유발함으로써 기독교 전체에 대한 평판이 나빠지더라고, 이로 인해 그 개인이 속한 교회나 단체는 혜택을 볼 수 있을 경우, 그런 일은 계속해서 발생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종교 갈등을 빚고 있는 대부분의 교회나 교파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내부와 외부의 명확한 구분을 강조하면서, 각각 선과 악의 절대적 가치를 부여한다는 점이다. 사회적인 지탄을 받으면 받을수록 집단의 내부의 단결은 강화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여기에 이런 “개교회주의”를 지향하는 교회나 단체가 임박한 종말론이나 배타적 구원론으로 무장하게 되면, 아무도 말릴 수 없는 강력한 행동집단으로 탈바꿈한다. 한국사회의 사적 영역에서 종교 갈등의 상당 부분은 성장을 꿈꾸는 이런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 촉발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 개신교의 “세속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한국 개신교의 세속화는 교회가 자본주의 논리를 받아들여서 세속화되었다. 통계 조사가 보여준 한국교회의 문제는 종교인들의 자질과 더불어 교회의 세속화였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사회가 너무 세속화가 문제”가 아니라, 물량적 성장주의에 빠진 “교회가 너무 세속화”된 문제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한 해법은 무엇인가?
V. 종교 다원주의 사회와 한국 개신교
지금까지 살펴본, 한국교회의 종교 갈등의 구조는 배타주의적인 근본주의 신앙담론과 “개교회주의”를 기반으로 한 대형교회를 지향하는 것이 서로 관련되면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종교 갈등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신학과 신앙 담론의 변화와, 교회 구조의 변화라는 두 가지를 고려하면서, 종교 갈등을 야기하는 다양한 요소를 동시에 개선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작업이 그리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다.
앞서의 논의를 고려할 때, 우선 사람과 조직의 변화를 위해서는 교육, 삶의 현장이 바뀌어야 할 것이다. 교육적인 측면에서, 한국교회의 담론에 종교다원주의 상황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대응하는 것을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대학이나 신학대학원에서 신학교육의 변화를 이끌어야 할 것이다. 종교다원상황이나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적극적인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삶의 현장에서 “예배당” 기독교를 넘어서 교파나 교단 중심보다는 성숙한 기독교 시민으로서 살아가야 할 것을 적극적으로 강조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머리가 아닌 삶의 자리에서 나와야 하며, 선포와 행함이 동일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믿음의 종교”에서 “삶의 종교”로, “교리 중심의 종교”에서 “실천 중심의 종교”로 전환하는 것이다. 교리를 외우는 신앙이 아니라, 예수의 삶을 따르는 신앙으로 전환을 의미한다.
이와 더불어 목회자와 교인들의 영성을 회복을 위한 인식 전환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요구하는 “복음의 순수성 회복”은 신앙인과 교회가 중심에 자리 잡는 것이 아니라 “주변인”으로 머물러야 하는 것을 함축한다. 기독교의 정체성은 원래부터 비주류라는 사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정치 경제 사회적 주변인들의 종교였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는 기독교의 원래 자리가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했던 주변부 사람이라는 그 위치를 잊어버리고, 주류로 중앙에서 머무르면서 채우고 소유하는 데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 “개교회주의”는 이런 자기 확장을 강화시키는 도구이며, “대형교회”는 물량주의적인 세속화가 낳은 결과이다. 공격적이고 혐오감을 주는 전도와 선교과정은 이런 이기적 공동체를 성취하기 위한 과정에서 종교 갈등은 피하기 힘든 결과다.
한국 사회와 한국교회는 종교 갈등 현상에서 개신교와 관련된 원인을 잘 파악하고 있다. 원인을 이해한 상태에서 해법을 제시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다. 한국 사회에서 종교 갈등 현상을 접하는 개신교의 가장 큰 문제는, 지금 언급한 해법을 인식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해법을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현재 보수근본주의적인 한국 교회 정서에서 종교다원주의 상황을 고려하고 대처해야 한다는 주장은, 교회의 순수성을 훼손하고 교회의 성장과 존속을 해치는 행위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종교다원주의 자체를 교회 성장의 장애물로 이해하는 현 한국 개신교 상황에서는 종교다원주의 상황에 대한 언급마저 금기이다. 타종교에 대한 배타주의적 태도 자체가, 종교다원주의 상황에 대한 의식적 무관심이 사실은 교회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쇠퇴를 촉진하는 요인이라는 인식이 한국교회 안에 널리 확산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인식이 개선되지 않는 한, 한국 개신교 안에서 종교 갈등의 원인과 해법을 알고 있다하더라도 적절한 실천으로 나갈 가능성을 전망하기란 쉽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