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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철]종교간 화합과 공존의 역사에서 얻는 지혜

행사명: 한국종교학회 '종교간 소통과 화합을 위한 심포지엄'
발표자 : 신광철(한신대 중국문화콘텐츠학부 교수)
일시: 2010년 12월 21일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



종교간 화합과 공존의 역사에서 얻는 지혜
-한국종교사의 맥락에서-

 



Ⅰ. 머리말


최근 한국사회의 종교간 갈등의 양상이 심각한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헤쳐 나갈 지혜를 찾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러한 지혜 찾기의 길은 여러 갈래가 있을 것이다. 현재의 문제에 대한 해법을 과거의 역사와 전통으로부터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금번 발표를 통해 오늘날 종교간 갈등의 문제를 풀 실마리를 우리 종교문화사 속에서 찾고자 한다. 한국 종교문화사를 돌이켜보면 각 종교들이 병존(竝存)을 통해 우리 사회와 문화 발전에 기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삼국시대 유교, 불교, 도교 3교의 정족적(鼎足的) 세계관, 고려시대의 유불 병립(儒彿竝立), 조선시대의 3교 회통사상(會通思想), 그리고 근대 시기 종교담론(이능화의 백교회통사상, 최병헌의 만종일련사상) 등을 통해 종교간 공존의 역사적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종교계는 우리 종교문화사 속에서 종교간 화합과 소통을 위한 지혜를 배워야 할 것이다. 금번 발표에 있어서는 제한된 시간과 지면으로 인해 삼국시대 유교, 불교, 도교 3교의 ‘정족(鼎足)’과 고려시대의 유불 병립(儒彿竝立)을 집중적으로 거론하고자 한다.


Ⅱ. 종교접변의 맥락에서 본 한국종교문화사의 의미


종교문화의 고유한 요소와 외래적인 요소의 접변은 특정 사회의 종교지형의 얼개를 바꾸는 중요한 계기를 이룬다. 종교문화의 고유소(固有素)와 외래소(外來素)의 만남이라는 맥락에서 한국종교문화사의 흐름을 개관할 때, 특별히 두 차례의 역사적 계기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커다란 문화적인 충격(cultural shock)을 수반한 것이었다. 첫번째의 계기는 고대국가 체제가 정비되던 삼국시대에 이루어진 유교․불교․도교 등 ‘동양고전종교’의 수용이었다. 우리 민족은 고대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불교와 유교의 고전적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으며, 연개소문의 상소문이나 최치원의 담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이른바 삼교정족적(三敎鼎足的) 세계관을 구축하여 동양고전종교의 사상적 장점을 적극적으로 섭취하였다. 이른바 ‘이차돈(異次頓)의 순교(殉敎)’라는 단편적인 사건을 제외하고는, 동양고전종교(외래소)와 고유종교(고유소) 사이에 심각한 수준의 충돌이 빚어지지는 않았다. 동양고전종교는 우리 사회의 변동기, 즉 고대국가 체제 정비기에 제기된 현실적 요구와 맞물려 적극적으로 수용되었으며,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우리 문화의 한 축을 자연스럽게 형성하게 된 것이다. 유교문화와 불교문화는 기왕의 신교(神敎) 및 무속(巫俗) 전통과 함께 우리 사회 전통문화의 기축을 이루어 온 것이다.

동양고전종교의 수용이 제1의 문화적 충격이었다면, 제2의 문화적인 충격은 서양종교(기독교) 및 근대화의 충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첫번째의 충격이 우리 민족의 역사적 필요와 맞물리면서 자발적인 ‘수용’으로 가닥 잡힌 것과는 달리, 두 번째의 충격은 문자 그대로 ‘충격’으로 묘사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른바 ‘서구의 충격’(Western Impact)이란 말을 통해서도 확인되는 것이다. 서양종교와 서양문명의 유입은 문화의 고유소와 외래소 사이에 대대적인 충돌을 빚었던 것이다.

동양고전종교의 수용과 서양종교의 유입으로 요약되는 두 차례의 역사적 계기는 한국종교의 지형에 일대 혁신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혁신은 이미 동시대(同時代) 지성들의 주요한 관심사를 이루기도 하였다. 당대(當代)의 지성들은 당대의 문화적 충격과 종교지형의 변동에 대한 주체적인 해석을 시도한 바 있었다. 예컨대 최치원(崔致遠)은 동양고전종교의 수용과 그것으로 인한 한국종교의 구조 변동에 대한 나름의 관점을 제시한 바 있다. 최치원의 소론은 한국종교문화의 고유소와 외래소의 관계에 대한 종교담론(宗敎談論)의 효시(嚆矢)를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의 종교변동에 대해서도, 이능화의 백교회통론(百敎會通論)과 최병헌의 만종일련론(萬宗一臠論)과 같은 종교담론이 제기되었다.

한국종교사에 끼친 두 차례의 문화적 충격은 종교지형의 윤곽을 혁신하였다는 점뿐만 아니라, 당대에 이미 그러한 변동에 대한 담론이 구축되었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Ⅲ. 삼국사회와 유불도 삼교의 ‘정족(鼎足)’


제1의 문화적 충격의 주축을 이룬 동양고전종교의 전통은, 유교․불교․도교의 세 전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세 전통은 고대의 기복사상(祈福思想)이 지니는 주술적 현세주의(呪術的 現世主義)와 숙명론(宿命論)의 한계를 넘어서 고전적 사회 질서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동양고전종교의 각 전통들은 삼국사회(고구려․백제․신라)에 고전적 세계관을 부여하여 고대 부족사회로부터 중앙집권적 왕국으로 이전할 수 있는 이념적 동력을 제공했던 것이다. 동양고전종교의 영향은 사회․정치제도의 차원뿐만 아니라 세계관의 차원에도 미치었다.

한국사회는 부족국가 단계로부터 고대국가 형성․정립기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동양고전종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부족국가 단계의 세계관은 혈연과 지연을 배경으로 한 기복양재(祈福禳災) 사상을 중심적인 모티브로 삼은 것이었다. 동양고전종교의 수용은 이러한 기왕의 세계관에 상당한 변화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무엇보다도 현실조건을 초월한 眞理의 세계에 대한 관심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동양고전종교의 구도형 신념체계의 세례에 힘입은 바 큰 것이었다.

동양고전종교의 수용은 한국사회가 부족국가 단계로부터 고대국가 단계로 변전(變轉)하는 데 구체적인 동력을 제공하였다. 고구려․백제․신라 등 삼국은 각각 고대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유교․불교․도교 등 동양고전종교의 사상과 그것에 기반한 사회․정치 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한국고대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전통은 불교와 유교였다. 불교와 유교는 삼국이 고대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왕권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통합을 위한 사상적 지주로 기능하였다. 불교는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근간으로 해서 왕권 강화를 위한 사상적 뒷받침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 예술의 창발의 주요 기반을 이루었다. 유교는 충효사상을 근간으로 해서 고대인의 윤리관을 확립하는 데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양자는 사회적 필요성에서 상보적 관계를 이루면서 고대사상계를 지배하였다.

동양고전종교의 각 전통들이 부여한 고전적 세계관은 한국인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고전적 세계관의 세례는 단순히 정치․사회 제도의 확립에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인의 영성에도 중대한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동양고전종교의 유입 이전과 대비하여 볼 때, 이러한 변화의 양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구도적(求道的)’ 세계관의 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구도적 세계관의 형성을 종교사상의 배경을 중심으로 살펴볼 때, 특별히 주목하여야 할 것이 불교의 불성론(佛性論)과 유교의 천관(天觀)이다. 불교의 보편적 불성론과 유교의 천관은 보편적 우주 질서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확대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동양고전종교 전통들이 우리 민족의 삶의 질에 끼친 영향에 대해 특기할 만한 사항 가운데 하나가 세 종교 전통의 鼎立 사상이다. 고대국가 형성 및 체제 정비기 동안에 동양고전종교 전통들 가운데 어느 한 전통도 절대적 우위를 나타내지는 못하였다. 동양고전종교 전통들은 이른바 삼교정족적(三敎鼎足的) 세계관을 형성하여 한국인의 영성(spirituality)에 스며들었다. 이러한 삼교정족적 세계관은 기왕에 한국종교의 구조를 이루어 온 원융적(圓融的) 세계관을 더욱 분명하게 만들어 주었으며, 한국인의 삶의 질의 얼개를 형성하여 왔다.

삼교정족적 세계관은 동시대의 종교지형 내지는 사상지형에 대한 담론 구축에도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연개소문과 최치원의 논의를 통해서 당대의 종교담론을 확인할 수 있으며, 김인문의 수학과정에 대한 기록을 통해서도 당대 지성들이 유불도 3교에 두루 정통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보장왕은 연개소문이 도교의 적극적인 수용을 건의한 상소를 받아들여 도교를 활성화시킨 바 있다. 연개소문의 상소문은 유교․불교․도교를 솥의 세 발에 비유하여 셋이 어그러짐 없이 정립(鼎立)해야 나라에 도움이 된다는 삼교정족 세계관의 이념적 전형을 나타내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조에 인용된 최치원의 ‘난랑비서(鸞郞碑序)’의 구절은 당대 종교지형 내지는 사상지형에 대한 지성적 성찰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자료이다. 최치원은 우리 고유의 영성을 ‘풍류(風流)’로 규정하면서, 그것이 동양 고전종교의 세 전통을 아우르는 것으로 보았다. 최치원은 우리 민족 고유의 종교적 전통을 ‘풍류도(風流道)’로 규정하는 한편, 풍류도가 동양 고전종교의 전통과 합류하여 우리 민족의 영성을 형성하였다고 주장한 것이다. 최치원은 또한 두 전통의 합류가 가능했던 까닭을 풍류도의 구조 자체에서 찾고자 하였다.


Ⅳ. 고려사회와 유불의 병존


고려시대의 종교지형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불교사회라는 상식이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종교지형의 얼개를 볼 때, 고려시대는 도참신앙(圖讖信仰)을 위시한 민간신앙이 저변을 이루는 위에서 불교와 유교가 각각 나름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병립한 양상을 보여주었다. 흔히 고려시대를 ‘불교국가’로 규정하고 있지만, 고려시대의 종교지형은 어느 한 종교전통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지 않는 역동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오히려 전형적인 다종교사회로서의 성격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예컨대 유교는 고려시대의 사회정치적 틀을 규정하는 중요한 힘을 지니고 있었으며, 도참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풍수지리적 사고는 정치․사회․종교사상을 포용하는 체계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시대의 종교지형은 도참신앙을 위시한 민간신앙이 저변을 형성한 위에서 유교와 불교가 2대 주류를 이루어 공존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고려사회를 견인해 나갔다. 그러한 의미에서 유불관계(儒佛關係)는 고려시대 종교사 서술에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이룬다. 고려시대의 유불관계는 고려시대 종교지형의 성격에 의해 규정되는 동시에, 고려시대 종교지형의 중핵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고려사회의 종교문화가 지니는 특징은 어느 한 종교전통이 전체적인 종교지형에서 전적으로 주도적인 세력 판도를 구축하고서 고려인의 신앙생활과 의례문화를 독점하였다기보다는 여러 종교전통이 나름의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고려사회의 통합에 기여하였다는 데에 있다. 고려사회는 유교․불교․도교․토착신앙 및 풍수도참신앙 등 여러 가지 종교전통이 나름의 자율성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전통 가운데 유교가 상대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담지하고 있었기는 하였지만, 여러 측면에서 각 전통들 사이에 조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의 종교문화가 지니는 이와 같은 조화의 정신은 고려사회의 종교의례가 지니는 복합성과 다양성을 통해서도 확인되는 것이기도 하다.

고려시대의 전체 종교지형을 형성한 전통들은 각각 나름의 역할을 담당하여 고려 사회의 통합과 발전에 기여하였다. 전래의 토착신앙은 고려인의 영성의 저류(低流)를 형성하였으며, 여기에 풍수․도참신앙과 도교가 가세하여 그 영성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풍수․도참신앙은 특히 고려 건국 초기부터 고려 사회의 존재 근거를 설정하는 데에 원동력을 제공하였다. 하지만 고려인의 영성 및 정신문화 발전에 있어서 보다 현실적․실천적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역시 불교였다. 중요한 것은 불교가 고려사회에 백지 위에 그림을 그리듯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불교는 토착신앙 및 풍수․도참신앙에 의해 만들어진 물줄기와 합류하면서, 고려의 정신문화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토착신앙․풍수도참신앙․불교 등이 고려인의 신앙생활 내지는 정신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면, 유교는 고려의 사회제도의 정비와 교육제도 발전에 기여하였다. 이 밖에도 유교는 국가 사전체계(祀典體系)의 이념적 토대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고려사회의 종교 영역을 구성하는 각 전통들은 나름의 위상을 확보하면서 고려사회의 발전에 기여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각 전통들은 동일한 목표 아래 병행(竝行)의 미덕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우리는 기우제(祈雨祭)를 통해서 고려사회에서의 각 종교전통의 병행 사례를 살펴 볼 수 있다. 고려사회의 기우제에 나타나는 종교전통의 병행 현상은 기우제의 다양한 양상 및 기우의 대상신의 성격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상에서 간략하게 정리한 바와 같이, 고려사회의 종교문화는 다양한 전통의 조화 내지는 병행으로 특징 지워진다. 따라서 고려사회의 종교문화의 역사와 구조를 파악함에 있어서는 각 종교전통의 관계구조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유교와 불교의 관계이다.

고려시대의 종교지형은 전체적으로 보아서 유교․불교․도교 등 동양고전종교가 정립(鼎立)하는 가운데, 풍수도참신앙과 토착신앙(민간신앙)이 저변을 형성했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종교지형의 세부적인 내용적 측면에 있어서는 시대적으로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고려전기와 후기의 종교지형은 적지 않은 차이를 지녔으며, 종교들의 관계 역시 역동적으로 변화하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고려사회는 신앙적으로는 불교를 따르고 통치원리는 유교를 따르는 이중구조를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불은 각각 나름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병존하는 관계구조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물론 유불의 관계구조는 시대의 추이에 따라 미묘한 차이를 나타냈음 또한 사실이다. 고려 건국 초기의 경우 유불관계는 위에서 제시한 전체적인 관계구조(신앙으로서의 불교와 통치 원리로서의 유교)를 전제하면서 출발하였다. 그리고 고려 건국 초기 유불의 관계는 유교가 불교를 보완하면서 병존하는 구조로 짜여져 있었다.

한편, 고려사회가 제도적으로 체계화되는 시기인 성종대에 이르면, 󰡔고려사󰡕에 나타난 성종의 통치 이념과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유불의 관계구조에 변화의 조짐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통해서 유불관계에 대한 당대의 담론을 엿볼 수 있다.

최승로의 담론은 불교를 내세에 대한 것, 즉 ‘세외교(世外敎)’로 규정하는 한편, 유교를 ‘치국지도(治國之道)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최승로의 담론은 한국유교 역사상 최초의 자각적(自覺的) 유교인으로 알려지고 있는 강수(强首)의 유불 담론(儒佛談論)과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성종대의 이러한 종교정책에 대해서 반발이 없지 않았다. 성종 12년 이지백이 성종의 불교정책에 대해 반발하여 연등․팔관․선랑 등의 일을 다시 시행할 것을 주장한 바 있었다. 결국 성종대 유불의 관계구조는 유교에 의한 불교계 공격 및 대안 제시라는 원심력과 고려 건국 초기의 불교의 정신을 회복하려는 구심력이 팽팽한 긴장을 이룬 모습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사회가 제도적 체계화를 이루면서 유교의 종교사적 위상이 강화되면서 유불관계에 변화의 조짐이 일기는 하였지만, 그러한 변화의 조짐이 기왕의 유불관계의 구조를 혁신적으로 바꿀 만큼 파괴력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여말선초 신흥사대부들에 의해 성리학이 지배이념으로 받아들여지기 전까지는 유교사상이 불교와 괴리되지 않은 채 큰 논란 없이 병존해 왔던 것이다. 실제로 유학자들과 승려들은 상호 교유(交遊)하는 가운데, 서로의 전통에 대하여 익숙함을 지니고 있었다.


Ⅴ. 맺음말


이상에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중심으로 종교전통들의 병립과 공존의 역사적 계기와 맥락을 살펴보았다. 삼국시대의 경우 유불도 3교는 기왕의 토착신앙의 토대 위에서 각기 특성과 개성을 살려 삼국이 고대국가의 꼴을 갖추는 데 나름의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공존의 현상은 그에 맞물리는 종교담론으로 구조화되기도 하였다. 연개소문과 최치원의 담론은 종교공존의 현상과 종교담론 사이의 구조적 연대의 모델을 제시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김인문의 예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당대의 지성들은 자신의 전통에만 함몰되지 않고 3교에 대하여 두루 통달하였으며, 상호 교유를 통해 인식의 폭을 확장시켜 나갔다. 불교 중심의 사회였던 고려사회의 경우에도, 불교 우위의 일방적인 종교지형이 아닌 유불 병존의 체계를 통한 사회 발전과 통합을 실현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한국종교문화사에 대한 통찰을 통해 종교간 화합과 공존을 위한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삼국사회의 ‘정족(鼎足)’과 고려사회의 ‘병존(竝存)’의 역사를 통해 종교가 종교 자체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사회를 위해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종교 공존의 현상과 당대의 지성들의 종교 담론이 구조적으로 연계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당대의 지성들이 자신의 전통에만 함몰되지 않고 당대의 종교지형을 구성하는 모든 전통들에 대해 정통했기에 가능한 것이었으며, 오늘날 한국 종교계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지성들, 특히 종교적 지성들은 스스로의 전통에 대한 이해에 갇히지 말고 한국 종교지형을 구성하는 모든 전통들에 대한 ‘열린 이해’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한 열린 이해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한국 종교문화사 읽기’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현실에 대한 해법의 실마리를 우리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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