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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돈구]종교간 화합과 공존을 위한 어느 종교학자의 제언

행사명: 한국종교학회 '종교간 소통과 화합을 위한 심포지엄'
발표자 : 강돈구(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일시: 2010년 12월 21일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




Ⅰ. 머리말


본 글은 2010년 말에 한국종교학회가 종교간의 화합과 공존, 그리고 갈등 해소를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서 주최한 학술대회에서 발표하기 위해 작성한 글이다. 한국종교학회는 2004년도 전반기 학술대회에서도 ‘종교간 대화’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한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종교학자들만이 모인 학술대회 자리였다면, 이번 학술대회는 종교학자와 개별 종단을 대표하는 학자들이 함께 견해를 피력하고, 생산적이면서도 현실 적합성이 있는, 그러면서도 가능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라고 생각한다.

글의 앞부분에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문제의식에 종교학자가 기여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한국종교학회 2004년도 전반기 학술대회에서도 필자는 같은 견해를 피력하는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2010년 11월초에 북경대학에서 개최하는 ‘베이징포럼’의 종교 관련 분과에서 같은 주제로 발표할 것을 요청받은 일이 있으나 거절한 경험도 있다. 역시 같은 주제로 한국종교학회가 이번에 주최하는 학술대회에서 발표할 것을 요청받았을 때 개인적으로 꽤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종교학자가 이 주제에 기여할 몫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견해를 지니고 있는 사람으로 이번 학술대회에 발표자로 참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주제는 중국의 ‘베이징포럼’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세계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일반 사회나 학계에서 종교학자들이 관심을 가져야만 할 문제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따라서 비록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이 주제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련 주제에 대해 몇 편의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본 학술대회의 성공적인 목표 달성을 위해 관련 주제에 대해 발표한 기존의 글을 바탕으로 이 주제에 대해 필자가 평소 느껴왔던 견해를 두서없이, 나름대로 제시해보고자 한다.

먼저 2장에서는 이 주제에 대한 종교학 관련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할 것이다. 그리고 3장에서는 ‘잠재적인 갈등 상황’으로 진단할 수 있는 우리나라 종교계의 현실을 ‘종교와 정치’, 그리고 ‘종교와 국가’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4장에서는 실현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고양이 목에 방울을 누가 달 것이냐의 문제가 있겠지만, 종교학자의 한 사람으로써 평소 생각해왔던 내용을 중심으로 제도적인 측면에서 나름대로 해결 방안 몇 가지를 제안해 보고자 한다.


Ⅱ. 종교학자들의 견해, 이모저모


우리나라의 종교 상황을 종교의 혼재 상황으로 정리해 보면, 종교의 혼재 상황을 공존 상황으로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종교현상을 연구하는 종교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남들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종교학자들은 대부분 이 문제와 관련된 글들을 써 왔다. 여기에서는 종교의 상호 공존을 위해 종교학 관련 학자들이 발표한 기존 논의들을 정리해 보도록 하자.

기독교 신학 쪽에서 종교간 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으로는 역시 변선환을 꼽아야 한다. 그는 일찍이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와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라는 글을 발표하여, 기독교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이미 1970년대 후반부터 동서 종교의 대화, 그리고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의 이러한 관심에 동조하는 동료와 제자들이 그의 화갑과 은퇴를 기념하는 논문집으로, 󰡔종교 다원주의와 신학의 미래󰡕(종로서적, 1989)와 󰡔종교 다원주의와 한국적 신학󰡕(한국신학연구소, 1992)이라는 책을 각각 발간하였다.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변선환을 중심으로 하는 일군의 학자들은 종교 다원주의를 수용하고 종교간 대화에 참여하여, 기독교 신학을 아시아 신학, 또는 한국적 신학으로 변모시켜야 한다는 데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이들은 종교 다원주의에 동조하는 서구 학자들의 책들을 번역, 소개하는 한편, 나름의 연구 업적도 내놓고 있다.

김경재 또한 기독교 신학 쪽에서 종교간 대화, 종교 다원주의에 관심을 가진 학자로 손꼽을 수 있다. 김경재는 해석학 이론에 의해 정당성이 부여되는, 다원주의적 종교신학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는 한편, 종교간 대화는 正敎의 관점을 넘어 正行이라는 공동 광장에서 행해질 때 비로소 생산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등잔 모양은 다양하지만 비쳐 나오는 불빛은 동일하다”, “궁극적 실재로서 하느님은 많은 이름을 가진다”, “일곱 가지 다양한 색깔이 모여 무지개를 이룬다”, “산의 등정로는 다양하지만 호연지기는 서로 통한다”, “농부는 접목을 통해서 더 좋은 과일을 생산한다”, “종파적 유일신 신앙에서 우주적 생명의 광장으로”라는 표현에서 종교 다원주의에 대한 김경재의 입장을 살필 수 있다.

김경재와 유사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이정배를 열거할 수 있다. 이정배는 존 힉, 폴 니터, 라이몬드 파니카, 존 캅 등을 중심으로 서구의 ‘종교 다원주의 신학’을 정리, 소개하고, 소위 東道東器的 자기 발견적 해석학(heuristic hermeneutics)이 서구의 ‘종교 다원주의 신학’을 보다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고 하면서, 김지하의 율려신학을 그 예로 들고 있다. 그는 개방성을 지니면서 정체성을 지키고, 보편성을 추구하면서 특수성을 잃지 않는, 다시 말해서 전통을 지키면서 외부로부터 신선한 문화적 수혈을 받는 일을 모순 없이 진행시킬 수 있는 소위 ‘열려진 배타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상이 기독교 신학 쪽에서 종교의 상호 공존에 관심을 표명해 온 주요 학자들이라면, 보다 직접적으로 종교학과 관련된 학자들로서는 황필호가 이 문제에 가장 먼저 관심을 표명한 사람이다. 그는 1980년대 초에 종교간의 대화가 필요한 이유와 태도를 지적하고, 대화의 전제 조건을 제시하면서, 종교철학 쪽에 가까운 학자답게, 아래와 같이 언급하였다.

종교간 대화는 지배가 아니라 발전이어야 하며, 외부로부터 부과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동화작용이어야 하며, 삶에 대한 관점을 좁히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동화작용이어야 하며, 삶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확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입장을 보완해 나가면서, 종교의 상호 공존과 관련된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였다. 그는 ‘다원’이라는 표현이 이미 하나의 실체가 각기 다른 측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함유하기 때문에, 종교 복수주의가 종교 다원주의보다 더 가치 중립적이라고 말하고, 따라서 종교 다원주의라는 표현보다 종교 복수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종교간 상호 인식의 태도를 극단적 배타주의, 극단적 포괄주의, 일반적 병행주의, 활동적 복수주의(dynamic pluralism)의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고, 활동적 복수주의가 가장 바람직한 태도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다원주의자들의 상대주의적 입장의 네 가지 유형, 다시 말해서 종교 복수주의의 네 가지 형태를 아래와 같이 보다 구체적으로 정리, 소개하고 있다.


①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다(E. Troeltsch)

②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A. Toynbee, R. Otto, F. Heiler, W. C. Smith)

③ 모든 종교는 공통의 심리적 근원을 가지고 있다(W. James, C. Jung, R. Assagioli)

④ 모든 종교는 중심을 향한 서로 다른 길이다(P. Knitter, J. Hick, R. Panikkar, S. Samartha)


물론 그는 종교철학 쪽에 보다 가까운 학자답게, “지상의 모든 종교인 - 특히 한국의 모든 종교인 - 이 ‘모든 종교는 중심을 향한 길’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황필호의 이러한 입장과 주장은 오강남, 길희성, 윤이흠의 입장, 또는 주장과 유사한 측면이 많이 있다. 오강남은 종교 다원주의 시대에 종교들의 상호 인식의 바람직한 상황을 설명하면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있다.

종교적 다원주의 시대에서는 종교들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기본 패러다임이 옛날처럼 누가 옳고 그르냐, 누가 낫고 못하냐, 누가 좋고 나쁘냐 하는 등 진위, 우열, 선악 따위를 가지고 시비하는 것에서 벗어나, 우리 모두 서로 도와가며, 어떻게 ‘함께 생각하고’, ‘함께 일하고’, ‘어울려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것으로 넘어가야 한다.

아울러 오강남은 ‘함께’, ‘어울려’, 그리고 ‘길벗’이라는 단어와 함께, 허상과 실상을 구별해 내고 마음을 열고 끊임없는 탐구의 자세를 갖추고, 이미 형성된 틀을 통해 불완전하게 감지되는 형상 대신, 궁극적인 실재를 향해 의식의 폭을 넓혀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황필호와 오강남이 종교간 대화의 문제에 보다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면, 길희성은 종교간 대화의 문제보다는 오히려 종교 다원주의 문제에 보다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는 현대의 종교 다원사회에서 각 종교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면서, 타인의 신앙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특수와 보편, 상대성과 절대성, 그리고 열정적 헌신과 관용적 겸손을 동시에 균형 있게 취하여야 한다고 지적하고, 각 종교는 그 자체를 넘어서는 초월적 세계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초월적 실재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한국의 신학은 배타주의에서 다원주의로 가야하며, 다원주의를 받아들이는 그리스도교 신학은 하느님 중심 혹은 실재 중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사랑 중심의 신학이어야 하며, 그런 신학은 한국적 신학, 아시아적 신학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길희성은 또한 한국의 종교들이 한국이라는 종교 다원사회를 뒷받침해 주고 있는 두 축인 유교,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적 질서와 가치를 공동으로 수호하고 증진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다원주의자들에게는 종교적 진리보다는 사랑이 우선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윤이흠은 종교 다원주의보다는 종교간 대화에 보다 많은 관심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는 아래와 같이 종교 다원주의와 종교간 대화가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종교인들이 현실적인 행동 양식을 취한 것이 종교대화운동이라면, 그 지성적 해석체계가 종교 다원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교 대화운동과 종교 다원주의는 다종교 상황에 대한 대응이라는 한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그는 종교 다원주의가 서구 신학의 외형적 변형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한국의 종교들이 종교 다원주의를 수용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국의 종교간 대화는 주로 선험적 종교 다원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어, 오늘의 한국 종교상황을 개선하는 데 별로 기여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앞으로 종교간 대화는 이념적 대화보다는 실천적 대화로 무게 중심을 옮겨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이념적 대화는 선교 목적의 대화이고, 실천적 대화는 공동 목표와 공존 질서를 추구하는 대화이다. 그는 또한 현대 사회의 ‘건전한 상식’과 ‘지성적 양심’이 종교간 대화의 논리이어야 하며, 새로운 사회질서와 가치관을 공동으로 창조하는 것이 종교간 대화의 목표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김종서 또한 종교간 대화와 종교 다원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기독교의 대화운동이 선교에서 시작하여 선교 우선주의를 넘어서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그간의 기독교의 대화운동을 아래와 같이 평가하고 있다.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종교간 대화는 늘 성공적이지 못해 왔다....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식의 기독교의 타종교에 대한 대화 시도는 끝내 희망이 없다고 단언하고 싶다. 이유는 간단하다. 기독교는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대화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오만한 주인의식은 대화의 장에서 타종교를 오직 손님으로 불러다 놓고 들러리로 전락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종교간 대화가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세속적으로 분명한 목적을 가져야 하며, 국가가 종교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직접 종교간 대화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이제 종교학에서도 종교간 대화의 문제에는 ‘직접적 참여’보다는 ‘학문적 논의’ 쪽으로 기울었다고 말하면서, 종교학자들이 종교간 대화에 임하는 자세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종교학자들의 종교간 대화의 연구는 과연 실제로 대화가 어떻게 이루어져 오고 있는가 하는 것을 구체적 자료에 근거하여 논의해야 하고, 이 종교간 대화를 통하여 사람에게 어떤 영적 변화(spiritual change)가 있는가를 관찰하고, 가능하면 대화들 속에서 드러나는 모든 종교들의 근저에 자리잡고 있을지 모르는 ‘우주적 종교성(cosmic religiosity)'의 발견을 목표로 해야 한다.

류성민은, 김종서가 기독교 중심의 종교간 대화를 냉소적으로 평가한 것과 마찬가지로, 소위 종교신학이 교회로부터 유리된 신학이며, 단지 타종교를 보는 기독교적 입장 혹은 기독교적 시각에서의 타종교 이해의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고 하고, 종교신학자들의 종교 다원주의도 우리나라에서는 현실적이지 못하며, 종교간 대화는 종교 내적 혹은 교리적, 신념체계적인 시각을 지양하고, 종교 외적 혹은 세속적 목적을 위한 대화에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제기된 종교 상호 공존의 논의들을 몇몇 학자별로 일별해 보았다. 이들의 주장들을 유형화하면,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서구에서 제기된 종교 다원주의 이론들을 소개하는 것에 일차적인 목적이 있는 논의들이다. 대체로 존 힉, 라이몬드 파니카, 폴 니터, 존 캅 등이 주로 언급되는 학자들인데, 이 가운데에서도 존 힉에 대한 소개가 가장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한국의 종교, 특히 한국의 기독교가 종교 다원주의를 받아들여야 하며, 종교간 대화에도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주장과 함께, 그렇게 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들을 제시하는 경우가 있다.

셋째, 일부에서는 종교신학이나 종교 다원주의의 현실성을 비판하고, 나아가 종교간 대화도 교리나 사상보다는 현실 문제에서 출발하여야 한다는 주장도 보인다.

전체적으로 우리나라에는 배타적인 개신교가 있고, 또 다른 편에는 침묵하는 또 다른 종교인들이 있다. 지금까지 종교학은 우리나라에 종교의 갈등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종교의 상호 공존을 위해 종교간 대화를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그러나 종교학의 이러한 발언에 배타적인 개신교, 그리고 다른 편에서 침묵하는 또 다른 종교인 모두는 그다지 귀 기울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종교간의 대화, 그리고 종교의 상호 공존을 주장하는 것이 자신들의 포교나 선교, 전교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종교만이 종교학의 이러한 발언에 동조해 왔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종교간의 대화나 종교 다원주의라는 개념과 이론을 통해 종교의 상호 공존을 도모하는 일은 개별 교학이나 신학에 돌려주고, 종교학은 또 다른 측면에서 또 다른 내용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Ⅲ. 현재의 상황: 잠재적 갈등


앞에서는 이번 학술대회 주제와 관련해서 종교학이 과연 이 주제와 문제의식에 얼마나,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입장을 피력하였다. 장을 달리해서 여기에서는 우리나라의 종교 현실에 과연 어떤 문제가 있는지에 대해 ‘종교와 정치’, 그리고 ‘종교와 국가’라는 측면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리나라 헌법 제20조에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그리고 “國敎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라고 되어 있다. 종교의 자유는 대체로 해당 종교가 국가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주장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종교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특정종교의 귄리 주장은 법을 기준으로 해서 허용과 비허용의 구분이 가능하다. 최근에 바뀔 가능성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근래까지 재림교회와 여호와의 증인의 양심적 병역거부가 법의 혹독한 제재를 받아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개신교는 1948년의 총선 일자가 5월 9일 일요일로 정해졌을 때 이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개신교는 최근에 이와 같은 맥락에서 공무원 채용시험을 일요일이 아니라 평일에 치룰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법조계는 공무원 채용시험을 평일에 치루면 국가의 다른 구성원들이 오히려 피해를 입는다는 쪽으로 해석을 내리고 있다.

원불교는 그간 여러 해 동안의 노력 끝에 드디어 최근에 군종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원불교의 이러한 요구에 힘입어 천태종까지 군종에 참여하게 되었다. 원불교 등이 새롭게 군종에 참여하게 된 것은 종교간의 형평성을 고려해서 국방부에서 단독으로 결정한 것으로 보이기는 하나,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원불교의 정치적인 영향력이 큰 힘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종단 차원에서의 개별적인 요구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는 법의 테두리 내에서,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치적인 고려에 의해 허용 여부가 판단될 것이다. 법의 판단은 무엇보다 공정성이 중요하다. 그리고 공정성은 판결을 내리는 사법부의 능력이 중요한데, 적어도 종교 관련 판결은 판결을 내리는 판사 개인의 종교관이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판사 개인의 주관을 그래도 좀 더 배제시키기 위해서는 판례가 중요한데, 우리나라의 경우 종교 관련 판례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앞으로 이제는 시민단체 등이 중심이 되어 종교도 이제는 성역이 될 수 없다는 인식 아래 종교를 공적 영역에서 바라보고, 문제가 있을 때 적극적으로 소송을 제기하여 종교 관련 판례를 많이 생산해 낼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강원도 횡성군은 도 유형문화재인 풍수원성당 일대를 유현문화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주변 토지를 강제 수용하면서까지 2007년까지 국·도·군비 61억여 원과 천주교 원주교구의 33억원 등 94억9천 여 만원을 투입해 조성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사업이 정교분리 원칙에 위배된다는 판결이 나 사업 추진에 제동이 걸렸다.

같은 맥락에서 종교와 관련된 문제에 정치인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서는 정치인의 양식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게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민 전체에서 종교인이 차지하는 비율보다 정치인 가운데 종교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월등히 높다. 대선이든 총선이든 선거 때면 정치인들은 종교단체를 찾아다닌다. 종교의 동원력을 염두에 두면 당연한 행동으로 보인다. 2007년 대선 때 주요 후보자들 3인 가운데 1인은 개신교인, 그리고 2인은 천주교인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종교 일반, 또는 다른 종교들은 차치하고 소위 佛心을 잡기 위해서 불교 관련 공약을 내놓았다.

선거공약인 만큼 실현성이 얼마나 있느냐, 그리고 선거기간에 불교계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만들어진 공약이라는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문제는 이러한 공약을 제시한 정치계의 종교현실 인식이다. 특정 시를 聖市로 봉헌한다든지, 청와대에 찬송가가 울려 퍼지게 하겠다는 등의 개신교인 정치인들의 이전의 행태를 기억하고 있는 불교계의 표를 얻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파격적인 공약을 제시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정치인들의 불교 관련 공약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불교가 國敎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 정도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종무실이 종교 관련 사업에 지원한 경비의 내역을 살펴보면, 정치인들의 종교현실 인식이 완전히 뜬금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국정감사 자료에 의하면, 문화체육관광부가 최근 5년간 종교계에 지원한 총예산은 984억원으로, 종교별 지출 내역은 불교에 147억 2,200만원, 개신교와 천주교를 합쳐 30억 5,100만원, 범종교계에 15억 3,500만원, 유교에 41억 6,000만원, 민족종교에 5억 200만원이다. 이 가운데 지출 내역이 큰 몇몇 사례를 보면, 전통사찰보존에 90억 5,200만원, 진각종 문화전승원 건립에 20억원, 개신교 한국선교역사기념관 건립비용에 25억원, 성균관유도연수원(유림회관) 건립비용에 35억원이다.

문광부 종무실의 주요 업무는 우리나라 종교정책 업무를 총괄하며 종교인들간의 화합과 갈등 해소를 통해 종교가 우리 사회에 건전한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부 업무는 다음과 같다.

종무정책에 관한 종합계획의 수립 및 추진, 종교단체 관련업무의 지원, 종교관련 법인의 설립허가 및 활동 지원, 종교간 협력 및 연합활동 지원, 남북 및 국제 종교교류의 지원, 종교활동 실태에 관한 조사·연구, 외래종교 업무의 처리 및 지원, 전통사찰 및 향교재산의 보존·관리에 관한 사항, 종교시설의 문화공간화 지원에 관한 사항

문광부가 종교계를 지원한 세부 내역과 문광부 홈페이지에 제시된 종무실의 업무 분야 사이에는 일정한 괴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종교계 지원에 특정한 원칙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정부는 종무실의 예산 지원을 통해 종교계를 장악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이게 되고, 종교계는 예산 지원을 받기 위해 정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종교계는 정부로부터 예산을 지원받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리고 의욕적으로 많은 행사를 기획하고 개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고 개최되는 행사와 사업의 상당 부분은 정부가 지원할 것이 아니라 해당 종교들이 자체적으로 경비를 들여서 해야 할 것들로 보인다. 문광부의 종교계 지원이 소위 ‘종교와 정치’ 유착의 제도적인 고리가 될 위험성이 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교분리의 원칙이 비록 국가별로 적용되는 내용이 다르고 정교분리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합의된 내용이 없다고는 하나, 대체로 정교분리의 원칙은 ① 國敎의 부인, ② 국가에 의한 특정종교의 우대 또는 차별의 금지, ③ 국가에 의한 종교활동의 금지 등을 그 내용으로 한다. 대선 때 후보자들이 내세운 불교 관련 공약을 보면 불교가 국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고, 문광부의 종교 관련 지원 현황을 보면 국가가 특정종교를 우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다른 종교들을 차별화시킨 것이 되며, 특정종교의 우대 지원은 국가가 간접적으로 종교활동을 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당분간 우리나라에서 종교와 정치의 이러한 관계와 상호 인식은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종교는 특히 경제적 지원의 측면에서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정치는 정권의 유지와 재생산, 그리고 권력의 자의적인 행사를 위해 종교의 지원을 계속해서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 종교와 정치의 바람직한 관계를 재설성하기 위해서는 현행의 법과 행정의 제도적인 측면을 면밀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모든 국가는 어느 종교를 지원하고, 어느 종교를 통제할 것인가, 다시 말해서 어느 종교를 어떻게, 어디까지 지원하고, 어느 종교를 왜, 어디까지 통제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각 종교의 정치와 국가에 대한 견해는 서로 다르며, 또한 각 국가의 종교현실도 매우 상이하기 때문에 종교와 정치, 그리고 종교와 국가의 상관관계에 대한 정답은 있을 수 없다. 예를 들어서 다른 나라에서 그렇게 한다고 해서 우리나라에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거나, 또는 다른 나라에서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나라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다른 나라의 경우는 단지 말 그대로 참조사항일 뿐이다.

성직자의 과세 여부가 미디어를 통해 여론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성직자도 세금을 내야 한다는 주장과 내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서로 팽팽하다. 내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 가운데에는 국내법에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조항이 없다거나, 또는 성직자가 세금을 내면, 성직자의 신성성이 저하되기 때문에 성직자는 세금을 내서는 안 된다거나, 또는 성직자가 세금을 내는 것은 신학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거나, 또는 대부분의 성직자는 면세점 이하의 급여를 받기 때문에 세금을 낼 수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그렇다고 해서 국내법에 성직자가 세금을 내지 않아도 좋다는 조항이 없다거나, 또는 성직자는 모든 국민에 대한 성직자가 아니라거나, 또는 신학적인 이유에 의한 양심적 병역거부가 국민의 4대 의무를 지키지 않는 것이라면, 역시 신학적인 이유에 의한 성직자의 납세 거부도 국민의 4대 의무를 지키지 않는 것이라거나, 또는 예를 들어서 박사학위를 받은 시간강사도 면세점 이하의 급여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사료에서 세금을 내고 있다는 또 다른 주장을 구태여 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하나의 작은 사례에 불과하다. 좀 더 근본적인 문제들 몇 가지만 더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나라에는 기독교와 불교 교조들의 출생일이 대통령령에 의해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주지하다시피 예수 출생일이 공휴일이 된 것은 미군정 때부터이고, 석가모니의 출생일이 공휴일이 된 것은 제3공화국 때부터이다. 법 전문가들 사이에도 이 두 날이 공휴일로 지정된 것의 위헌 여부에 대해 의견이 나뉜다. 그러나 필자는 이 두 날이 공휴일로 지정된 것은 정교분리나 국교 금지라는 헌법 정신에 위배된다고 생각한다. 비록 다른 나라의 예가 반드시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종교와 관련된 특정일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나라들은 모두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분명한 것은 유독 기독교와 불교와 관련된 특정일이 공휴일로 지정됨으로써 적어도 기독교와 불교는 우리나라에서 비록 國敎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公認된 종교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國葬이 개신교와 천주교, 그리고 불교 성직자에 의해 진행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런 일이다.

미국에서 예수의 출생일 등 기독교와 관련된 공휴일이 있는 것은, 그리고 워싱톤에 있는 국립가톨릭성당에서, 예를 들어서 레이건과 같은 전직 대통령의 장례미사를 국가적으로 치루는 것은 이들 종교가 소위 시민종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종교의 개념을 어떻게 정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기독교와 불교가 시민종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는 결코 할 수 없다.

우리나라 애국가 가사에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구절이 있다. 애국가 가사에 나오는 ‘하느님’이 우리 민족에게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도 논의해 보아야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 ‘하느님’은 적어도 불교와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현실적으로는 기독교와 매우 친화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태극기는 분명히 주역에 근거한 것으로 유교적인 상징임에 틀림없다. 좀 안된 상황 묘사이지만, 유교적인 태극기를 바라보면서, 친기독교적인 애국가를 부르고 있는 불교 승려의 모습을 상상해 보자. 이런 엄청난 상황이 일반 국민은 물론이고, 불교 승려 본인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벌어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종교현실이다.

불교와 유교가 유독 전통사찰보존법과 향교재산법이라는 종교 관련 법령에 의해 재산권 침해 등 각종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것으로 주장되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서 필자가 이 법령의 존재와 그 내용이 적절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 두 법령에 의해 불교와 유교는 재산권의 침해라기보다는 오히려 여러 면에서 직, 간접적인 혜택을 누리고 있는 측면도 있다.

지금까지 여러 학자들이 누차 지적하였듯이 기득권 종교는 과도하리만큼 많은 혜택을 누려왔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미군정 이후 우리나라의 종교정책이 파행적으로 운영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정치권력이 아니라 국가가 나서서 지금까지 제기된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국가가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시민사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감시와 협조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Ⅳ. 맺음말 - 어느 종교학자의 제언


지금까지 우리는 종교 상호 공존을 위한 종교학 관련 학자들의 논의를 정리하고, ‘종교와 정치’, ‘종교와 국가’라는 측면에서 우리나라 종교계의 현실이 지니고 있는 몇몇 문제점들을 살펴보았다. 여기에서는 보다 제도적인 측면에서 이 주제와 관련이 있는 개인적인 의견 몇 가지를 제시하면서 맺음말에 대신하고자 한다. 종교간의 화합과 공존은 종교학자나 종교단체, 또는 종교인들보다는 우선 제도적인 장치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 필자의 기본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첫째, 헌법의 종교 관련 조항을 정비할 필요가 있다. 현행 헌법의 종교 관련 조항은 구색을 맞추기 위해 들어간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종교간의 화합과 공존이 정말로 우리나라의 중요한 문제라고 한다면, 이를 반영하는 조항을 헌법에 새롭게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둘째, 종교 관련법을 정비하고, 가능하면 가칭 ‘종교법인법’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 현재 불교, 개신교, 천주교 등 거대 종단의 경우 대체로 종교법인법의 제정을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종교법인법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할 위험이 있다는 명분이다. 물론 종교 관련 법이 세계 모든 나라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무엇보다도 현실적으로 종교와 정치가 야합할 위험이 상존해 있기 때문에 종교법인법의 제정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이웃나라인 일본과 중국에 종교 관련 법이 제정되어 시행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종교의 자유 못지않게 종교의 평등도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셋째, 가정법원이나 행정법원을 염두에 두고 가칭 ‘종교법원’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 종교 관련 분쟁의 판결은 담당 판, 검사의 종교관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종교에 대한 폭넓고 객관적인 지식을 겸비한 법조인들이 참여하는 가칭 ‘종교법원’을 설치하여 이런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넷째, 행정고시의 채용분야 가운데 ‘종무행정’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 현재 행정고시의 채용분야는 일반 행정, 법무행정, 재경, 국제통상, 교육행정, 사회복지, 교정직(교정), 보호관찰직, 검찰사무직, 출입국관리직으로 구분되어 있다. 종무행정도 가능하면 전문직이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에 종무행정을 담당할 국가 공무원을 별도로 채용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다섯째, 지방 자치단체에 종무행정을 전담하는 부서를 설치할 필요가 있다. 현재 경기도와 경상북도, 그리고 제주도에만 종무행정을 담당하는 부서가 설치되어 있다. 문화관광체육부에 설치되어 있는 종무실이 지방 자치단체의 종무행정 부서의 협조를 얻어 보다 실질적이고 생산적인 종무행정을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지방 자치단체의 종무행정을 담당하는 공무원도 물론 별도로 채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여섯째, 문화관광체육부의 종무실이 연구 기능과 조사 기능을 갖추고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종교현실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갈 필요가 있다. 아니면 나아가서 가칭 ‘국립종교연구원’의 설립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개신교에서 파견한 해외 선교사의 수가 적지 않으며,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해외 선교사의 역할이 여러 면에서 지대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현황 파악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중국과 일본의 관련 국가기관은 물론 이러한 기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일곱째, 종교학계가 종교간 화합과 공존에 관심을 보이는 종교단체나 종교계 인사들에 적극적인 관심을 지니고, 학계와 일반 사회에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그리고 종교간 화합과 공존에 저해가 되는 종교단체나 종교계 인사에도 같은 목적을 위해 적극적인 관심을 보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종교학이 종교계의 그나마 바람직한 관련 사례들을 발굴하여 연구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여덟째, 종교학 교육이 초, 중등, 대학 과정에서 이루어질 수 있게 국가의 관련 기관들이 적극적인 관심을 보일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종교에 대한 지식은 개별 종교단체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나라의 종교 인구를 전체 인구의 50%라고 했을 때 이들은 많게는 1주일에 한번 씩 정기적으로 종교교육을 받고 있다. 현재 국가가 공무원을 대상으로 종교편향 방지를 위한 교육을 실시하여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는 하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종교간의 화합과 공존이 그야말로 중요하다면 현재 상황에서는 그래도 종교학 교육의 장의 확보를 통해 소정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아홉째, 가칭 ‘종교헌장’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 유네스코는 2001년 제31차 총회에서 ‘문화다양성선언문(UNESCO Universal Declaration on Cultural Diversity)’을 채택하였다. 선언문 제2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점차 다양화되는 우리 사회에서는, 공존에 대한 의지와 더불어 다원적이고, 다양하며, 역동적인 문화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과 집단의 조화로운 상호작용을 보장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모든 시민을 포용하고 그들의 참가를 보장하는 정책은 사회적 단결과 시민사회의 역동성 및 평화를 위한 선행조건이므로, 문화 다원주의는 문화 다양성의 실현을 위한 기반인 것이다. 그 성격상 민주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문화 다원주의는 문화교류와 공공의 삶을 유지하는 창조적인 역량을 풍성하게 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다.

위 선언문에서 눈에 띠는 것은 ‘문화 다양성에서 문화 다원주의로’이다. 유네스코는 다시 2005년 제33차 총회에서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와 증진 협약(Convention on the Protection and Promotion of the Diversity of Cultural Expression)’을 발표하였다. 협약 가운데 눈에 띠는 것은 제2조의 3항 ‘모든 문화에 대한 동등한 존엄성 인정과 존중 원칙’, 그리고 7항 ‘형평한 접근의 원칙’이다.

유네스코의 이러한 움직임에 힘입어 우리나라에서는 2006년 5월에 ‘문화헌장’을 공표하였다. 이 문화헌장은 우리나라 헌장 제정 사상 최초로 민이 만들고, 정부가 수용하는 형태의 형식과 절차를 밟아 제정, 공표되었다. 문화헌장 가운데 우리의 관심을 끄는 내용은 “모든 시민은…·종교 등에 의한 어떠한 차별도 없이 문화를 창조하고 문화활동에 참여하며 문화를 향유할 평등한 권리를 지닌다”, “사회공동체는 더불어 사는 삶의 토대가 될 기본적인 문화적 가치들을 늘 확인하고 존중해야 한다”, “문화다양성은 개인적, 집단적 정체성과 자주성의 토대이고 사회를 풍요롭게 하는 다원성의 원리이며 평화와 공존의 기틀이다…·시민은 나라 안팎의 다양한 문화들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하여 세계의 문화 다양성과 평화를 증진하는 데 기여한다”, “성적 소수자를 포함한 문화적, 종교적 소수자와 소수집단은 자기 의사에 반하는 문화 정체성을 강요받지 않는다” 등이다. 이 문화헌장은 유네스코가 제정한 선언문과 협약의 내용을 우리나라 현실에 보다 맞게 적용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

유네스코의 선언문과 협약, 그리고 우리나라의 문화헌장 가운데 ‘문화’를 ‘종교’로 바꾸어 그 내용을 이해하면 세계의 종교 현실이 어떻게 변화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지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종교 현실도 세계의 종교 현실과 동떨어져서 별개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앞으로 우리나라의 종교 현실도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를 조감해 볼 수 있다.

종교학계가 주축이 되고, 관련 기관이나 유관 단체, 그리고 종교계의 의견을 수렴해서 가칭 ‘종교헌장’을 제정, 공포하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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