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명: 한국종교학회 '종교간 소통과 화합을 위한 심포지엄'
발제 : 윤이흠 서울대 명예교수
일시: 2010년 12월 21일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
1. 한국 다종교사회 오늘의 상황과 그 극복의 비전
현재 우리사회에서 종교 간의 갈등과 마찰이 점점 심해가고 있다는 견해가 커가도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사회에 종교갈등이 크게 사회적 문제로 확산되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론이 여전히 주류를 이룬다. 말하자면, 다종교상황의 문제들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문제들을 외면하거나 그럴 수밖에 없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컨대 한국의 언론은 우리사회에 종교적 갈등과 마찰이 점점 더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외면하는 길 외에 달리 대안이 없다는 태도를 지난 이삼 십년간 지켜왔다. 학계와 지성계는 종교적 갈등과 마찰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실효 없는 논리적 담론을 넘지 못하고 있다. 역대 정부는 종교문제를 사회문제의 일환으로 여기고, 정치적 대증요법으로 풀어보려고 힘썼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사회의 어떤 집단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거대 구성원을 가진 종교와 종교단체에는 심각한 정치 사회 경제적 관심을 집중하면서도, 종교와 종교사이의 갈등과 마찰의 문제는 사회적 관심의 밖으로 밀어버림으로써 사회 저변으로 잠재되게 하였다.
종교의 교단과 단체가 사회표면에 영향력을 확산하고 있는 동안, 사회저변에서는 종교적 갈등과 마찰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 갈등과 마찰은 종교가 자체의 속성과 논리적 주장을, 건강한 자제력과 사회질서에 대한 배려 없이, 각각 경쟁적으로 밀어붙인 결과이다. 햇빛을 보지 못하고 사회저변에서 경쟁적으로 커온 종교적 갈등과 마찰은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우리 사회의 표면으로 터져 나오게 되었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종교들이 자신의 속성과 논리대로 경쟁하는 한 종교간 갈등과 마찰이 점점 확산되는 길 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오늘의 종교적 갈등과 마찰은 종교계 스스로가 자신의 속성과 논리를 주장한 결과이기 때문에, 결자해지의 책임을 져야한다. 종교적 갈등과 마찰이 지속되는 것은, 조금 있다 다시 언급하겠지만, 현대종교의 미래에 어두움이 깃들기 시작할 것이란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계는 지금까지 스스로 야기한 종교 간의 갈등과 마찰을 지속하느냐, 아니면 갈등과 마찰을 극복하는 공동의 노력을 하느냐 하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할 단계에 왔다.
그러나 그 선택은 종교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문제를 만나게 된다. 첫째는, 종교계가 그 둘 중에 하나를 선택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문제이다. 둘째는, 그 갈등과 마찰이 얼마나 심각한 사회적 혼돈으로 이어질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두 문제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 한다면, 오늘의 다종교사회 문제는 무관심이라는 베일을 스스로 베끼고 나와, 역사적 재앙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종교는 자신의 절대신념체계를 지키고 또 전파하려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본성이 먼저, 다종교상황에서 종교적 갈등과 마찰로 나타나게 한다. 다음으로, 다음 장에서 곧 언급하겠지만, 종교와 사회관계의 형태가 종교적 갈등과 마찰을 다른 모양으로 나타난다. 끝으로 현대사회에서 종교가 종교적 갈등과 마찰을 극복해야 할 필요와 일차적 책임이 있다. 이러한 세 가지 문제를 우리는 지금까지 살펴보았다.
이러한 세 가지 문제의 맥락에서, 먼저 한국의 다종교상황의 실상과 구조적 원인을 파악하고, 그로부터 구조적을 개선을 위한 대안을 찾는 방향을 모색해 보기로 한다.
2. 한국 다종교사회의 현실과 그 역사적 배경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다종교사회를 이루고 있다. 우리사회에는 중국 세계관을 대표하는 유교, 인도의 세계관의 불교, 중동과 서양이 공유하는 유일신관의 기독교, 그리고 그리스-로마의 인본주의(종교는 아니지만)와 같은 세계 4대 (제5대는 없다) 고전문화 세계관들이 모두 공존하고 있으며, 이에 더하여 구석기 시대로부터 이어오는 샤머니즘과 한국민족종교 등을 포함한 다양한 신종교들이 모두 공존하는 상황에서 그 어느 것도 현재 우리사회를 주도하지 못하는 다종교사회를 이루고 있다. 한국사회는 현재 시공을 초월하여 인류역사에 나타난 모든 유형의 종교들이 바글거리는 상태의 다종교사회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다종교상황은 세계종교사에 일찍이 없었다.
종교는 절대신념체계(absolute belief-system)이며 절대세계관이다. 절대는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어야 하며, 자신 이외의 타자는 “상대적”이라는 절대확신을 갖는다. 따라서 종교는 타종교는 물론이고 철학, 예술, 문화, 정치와 사회 그리고 우주론과 과학지식 등 모든 현상이 자신의 절대세계관 안에서 해석되고 또 그 질서 안에 자리 잡아 준타. 그래서 종교는 인간 역사에 나타난 가장 복합적인 문화 현상이다. 이처럼 복합적 현상인 다양한 종교들이 공존하는 다종교사회는 다양한 절대세계관의 경합장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경합장에서 가장 복합적인 절대세계관들 사이에 갈등과 마찰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오직 하나의 종교만 존재하는 사회가 있다면, 그 사회에는 종교적 갈등과 마찰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하나의 종교만 존재하던 국가사회가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인류사회는 언제 어디서나 여러 종교가 공존하는 다종교 사회였다. 그러나 여러 중교가 공존하는 상황에서도, 종교와 사회의 관계 곧 “종교사회의 유형”에 따라 “종교간 갈등”이 사회에 나타나는 형태가 달라진다. 본 논의와 관계되는 유형만 가려 살펴보기로 한다.
(1)종교평행(平行)사회: 이는 다양한 종교들이 공존하지만, 서로 개의치 않고 공존하는 형태의 사회이다. 예컨대, 알렉산더와 씨저, 그리고 징기스컨 같은 황제가 대제국을 건설하면서 나타났다. 황제는 그의 방대한 영토 안에 있는 다양한 민족의 다양한 종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오직 황제에 대한 충성만 지키는 조건 아래서, 종교의 자유가 허용된 것이다. 제국의 질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자유가 허용되었기 때문에, 종교들은 각자 자신의 절대신념체계를 지키면서 공존하는 이른바 평행관계를 이루고 존재할 수 있었다. 황제의 조건아래서 공존하는 평행관계 안에서 종교적 갈등은 일어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2)단일종교주도사회: 이는 한마디로 국교체제 국가를 말한다. 국교를 체제화 하는것 자체가 그 사회에 국교외의 타종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국교체제사회는 국교의 세계관만을 공인하기 때문에, 그 외의 타종교는 둘 가운데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 순교냐 아니면 굴종이냐 이다. 따라서 국교체제국가에서는 사실상 다종교상황에서 야기되는 종교적 갈등과 대립의 문제가 부각되지 않는다. 다만 국교국가의 국력이 약화될 때 종교간 갈등이 사회표면으로 들어나기 사작한다.
(3)현대적 다종교사회: 이는 진정한 다종교사회를 의미한다. 다종교사회의 전형적 모습은 현대사회에 들어오면서 비로소 나타났다. 종교평행사회와 국교사회에서는 종교 간의 갈등과 마찰을 사전에 막을 수 있는 사회적 장치가 있었지만, 현대사회에 오면 그러한 사회체제가 와해되어 각 종교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에 이른다.
19세기에 오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개인과 사회집단이 그들의 자유와 권리를 사회에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주체라는 정체감을 확인하고 나아가 자유를 부르짖게 되었다. 자기각성과 정체성의 확립이라는 역동성이 근대사회의 일대변화를 이끌어 가는 동력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동력이 종교계도 변화시켰다.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는 시대적 변화는 한국종교사에는 조선시대 말기에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는 18~19세기 조선조의 유교사회가 천주교박해를 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유교는 국교의 정체감을 근거로 박해를 했고, 천주교는 자신의 종교적세계관의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순교하고 선교하였지만, 그 뒤에는 서력동점이라는 시대적 변화를 분명히 의식하고 나아가 정치군사적 대응을 병행하였다. 현대사회로 들어오면서 국교가 거부되고, 그와 동시에 모든 종교가 국가사회의 구성단위라는 각성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각각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였다.
사회구성체로소의 자기정체성과 종교의 자유는 역으로 다종교사회 안에서 종교의 상대화를 스스로 수용하는 결과에 이른다. 현대 다종교사회에서 종교는 그 구성원의 하나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현대사회가 국교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나아가 어떤 종교도 국교의 지위를 쟁취하겠다는 시도를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또한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는 현대종교가 대제국의 황제의 규제 안에서 서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이른바 병열종교의 상황으로 돌라갈 수는 없다. 결과적으로 오늘의 종교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하다. 세계종교사는 현대종교가 지향하는 종착역이 다종교상황이라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한국사회 안에서 모든 종교는 다종교사회를 구성하는 한 구성요인이라는 현실을 수용하고 있는 상황에 처해있다. 이는 절대신념체계인 종교가 현대 다종교사회 안에서는 자신도 사회의 구성요인들 가운데 하나라는 상대성을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절대세계관으로서의 종교가 처한 딜레마 아닐 수 없다.
3. 현대종교의 역사적 선택
종교는 현대 다종교상황에서, 국교사회와 종교평행사회와는 달리, 종교의 상대성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 강한 압력을 양면으로 받는다. 첫째는 모든 종교가 다종교사회에서 다양한 종교들 가운데 하나라는 “개별종교의 상대화”이다. 둘째는 종교자체가 현대사회의 다양한 구성 요소들 가운데 하나라는 “종교자체의 상대화”이다.
첫째, 개별종교의 상대화현상은 종교 간의 경쟁적 갈등과 마찰로 나타난다, 그 경쟁적 마찰은 본질적으로 세속적 세상에 영성적 나라를 실현하기를 소망하는 종교의 본성에서 비롯된다. 예컨대, 불국토와 하느님의 나라를 구현하려는 종교적 꿈과 이상이 이를 말한다. 다종교사회라는 세속 질서 안에서 볼 때, 영성적 꿈이 다양하기 때문에 상호간의 갈등과 마찰이 불가피해진다. 다종교 상항에서 개별종교가 기존의 전통적 태도를 지니고 있을 때 자신이 상대화 되는 딜레마를 벗어나기 어렵게 된다.
둘째, 종교자체가 상대화는 현대화의 역사적 관정에서 나타난다. 현대사회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종교가 현대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인 가운데 극히 일부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종교를 포함한 형이상학적 이상과 이념 전반이 시대적 흐름에 뒤처지는 과정에서 특히 종교가 현대의 발전에 저해요인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팽창주의 사조에 상업주의가 가세를 하면서 현대사회체제가 실로 놀라는 속도로 무분별하게 팽창하고 있다. 현대 사회체제의 무분별한 팽창주의가 종교를 강하게 공격하고, 이로써 현대사회에서 종교의 영성적 그리고 도덕적 권위가 크게 위축하게 되었다. 급속히 팽창하고 있는 현대사회의 변화과정에서 종교가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회의를 갖게 된다. 이점은 종교계와 사회의 지성인들이 모두 동감한다고 여겨진다.
현대종교는, 이처럼, 개별종교의 상대화와, 종교자체의 상대화로 인하여, 종교가 과거에 지녔던 사회적 권위를 잃어가게 되었다. 권위의 상실은 종교에게는 위기의식을 갖게 하는 원인이 된다. 이처럼 사회로부터 종교가 양면의 공격을 당하는 현실에서, 종교가 당면한 사회적 위험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먼저 이 두 위협이 종교가 자청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개별종교의 상대화는, 평행종행사회와 국교사회와 비교 할 때, 예컨대 불국토와 하느님의 나라를 구현하려는 영성적 열망을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켜오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는 사회적 상황의 변화가 개별종교의 상대화를 가져다 준 것을 말해준다. 종교가 역사 사회적 상황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상황을 종교가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종교는 이미 상당한 정도로 현대사회적 상황을 수용하고 있다. 예컨대 현대 다종교상황에서 개별 종교가 타종교의 존재를 인정하고, 포교나 선교라는 이름으로 타종교와 대사회적 팽창을 경합하고 있다. 이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국교사회에서 국교는 타종교와 타협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종교는 현대적 사회상황에 크게 적응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특정 종교 교단 안에서 일어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경우에, 그 문제를 세속사회의 법정에 가서 해결을 요청한다. 종교 사이의 마찰 역시 종국에는 사회의 법질서에 의존하는 것이 현실이다. 여기서 우리나라의 종교계가 솔직하게 고백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 종교는 이미 세속 질서를 깊이 수용하고 있으며, 또한 그 안에서 벗어나지 못 한다는 사실이다. 그 고백은 절대세계관으로서의 종교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어려운 과정을 거치니 않고, 현대종교가 당면한 사회역사적 위협을 극복할 수 없다. 그 고백은 현대종교가 당면하는 위협을 극복할 수 있는 두 가지 길을 열어준다. 먼저 그것은 현대 다종교사회에 공존하는 모든 종교들이 동일한 위협을 느낀다는 사실을 공유하게 한다. 따라서 그 고백은 모든 종교가 협력하여 공동의 과제를 극복하려는 협력의식을 갖게 한다. 말하자면, 그 고백은 현대팽창주의 사회 안에서 종교들이 힘을 합하여 공동으로 대응해야할 공동과제, 좀 더 구체적으로는 주적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기술산업과 상업주의가 결합하여 형성한 거대한 현대사회체가 급속도로 팽창하면서, 인간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사회체제의 한 부품으로 전락되어가고 만다. 그 거대한 체제 가운데 한 부품이 되어버린 인간은 더 이상 몸과 마음 그리고 꿈이 어울린 전인적 인간이 아니라 생명력이 말라버린 박제된 미라이며, 정체성을 상실한 이름만의 존재이다. 오늘날 한 전자 회사가 만들어 보급한 컴퓨터 프로그람의 논리를 전 세계의 수많은 인간이 그들의 생계를 위하여 쫒아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화에 이르렀다. 현대인은 이제 찰리 차플린의 고발과 같이 산업기술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모습, 영성적 꿈을 지니고 살아가는 전인적 인간의 모습을 복원하는 것이 현대사회가 열망하는 꿈이며 울부짖음이다. 전인적 인간을 복원하는 기적의 사업은 종교만이 담당할 과제이다.
종교가 현대사회에서 당면하게 되는 양면의 위협은, 다름 아니라, 인간을 산업기술의 꼭두각시로 만들어버린 현대사회의 무분별한 팽창주의의 횡포가 종교에게 짊어지운 결과이다. 따라서 현대종교가 당면한 양면의 딜레마와 위협과, 현대인을 산업기술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두 현상의 주범은 바로 현대사회의 “무분별한” 팽창주의이다. 현대종교는 이 사실에 대한 분명한 인식에 근거하여, 모든 종교와 사회가 공동으로 주적을 물리치도록 하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거듭 강조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잃어버린 전인적 인간의 모습을 환원하는 일은 종교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현대종교는 이제 앞장서서 현대사회가 담당한 주도적 문제, 곧 정신복원운동을 주도하는 사명을 지니게 되었다.
4. 종교의 독자성과 공통점을 어우르는 현대 다종교사회에 담긴 지혜
지금까지 우리는 현대종교가 이미 세속사회 질서에 한발을 깊게 딛고, 또 한발은 전통적 절대신념체계에 올려놓고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현대종교는 두 발로 우뚝 서서 아름다운 정신문화를 현대사회에 복원하는 시대적 사명을 갖게 되었다. 절대신념체계에 무게를 싣는 순간 종교는 자신의 절대적 독자성을 강조하게 되고, 종교가 사회적 기능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에 현대사회의 주변으로 몰리게 된다. 반대로 사회질서에 힘을 싣는 순간, 모든 종교의 동일성이 부각된다. 하지만, 동일성이 강조된 종교는 사실상 사회적 현상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러면 두 발로 당당하게 우뚝 선 종교는 어떤 것인가?
종교가 자신의 절대신념계를 내면적 확신으로 보존하는 동안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그 절대확신이 사회적 행동으로 표출되는 순간 사회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예컨대 불국토와 하느님의 나라 같은 영성적 이상이 확신의 세계 안에서 전개될 때는 세속사회의 하늘에 아름다운 꿈을 각각 찬란하게 드리운다. 그러나 그 꿈이 지상질서에 드리울 때는 불가피하게 종교적 갈등과 마찰을 지상에 야기 시킨다. 영성적 이상세계의 질서를 세속적 지상세계에 전파하는 것은, 타종교에 상처를 주고 다종교상황에 혼돈을 야기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 지성은 거대한 현대사회체제의 팽창주의가 인간을 기술 산업의 꼭두각시로 만드는 주범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비판이 현대사회 체자나 기술 산업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기술 산업이 인간의 삶의 조건과 환경 그리고 사회적 메커니즘 자체에 주는 악영향을 고려하지 않고 팽창만 추구하는 현상, 곧 “무분별한” 팽창주의를 반대하고 비판하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가 자신의 절대신념을 전파할 때. 타종교에 상처를 주거나 다종교상황에 혼돈을 야기하지 않는가를 헤아리고 자제하지 않는 다면, 이 역시 “무분별한” 팽창주의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영성적 세계관의 전파 곧 전교나 선교라 해도 그것이 “무분별한” 선을 넘는 순간, 그것이 세속적 팽창주의와 다를 바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결론적으로, 종교적 사회활동은 건강한 현대사회 규범의 범위 안에서 전개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발고 굳건히 선 현대 종교는, 한 편에서는 자신의 절대신념을 확고하게 보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종교사회에서 타종교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배려와 자제를 겸비한 종교적 태도를 말한다. 종교적 사회참여가 “무분별한” 팽창주의를 벗어날 때, 종교적 신념의 보존과 사회적 규범의 수용, 내면적 신앙의 보전과 외면적 사회적 규범의 수용의 조화를 이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원론적 이야기 보다는, 실례를 드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나의 어머니”가 내 생애에서의 가장 위대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 사람이 내 어머니는 사회적 지위와 학식을 구비하고 있기 때문에, 네 어머니보다 더 위대한 분이라고 말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에게서 보편적인 어머니는 살아지고 만다. 이처럼 누구나 자신의 어머니를 각각 가슴 안에 지니고 살아가지만, 타인 역시 나와 같이 그의 마음에 자신의 어머니를 지니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보다는, 각자의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기 오히려 서로 기쁜 마음으로 나눌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독자적 정신가치를 타인과 교감감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자신과 타인의 공통점을 발견해야 한다. 정신적 교감과 소통은 먼저 타인에게서 나의 모습을 발견할 때, 비로소 성공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어느 종교인이나 종교에 헌신하는 동안 세속에서 잃어버린 것도 많고 험한 시련도 많이 겪게 마련이다. 종교적 신행은 심신수련을 동반하고, 그 수련은 언제나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시련을 스스로 선택하고 이겨가는 것이 종교적 삶이다. 시련은 모든 종교인에게 예외가 없다. 따라서 진정한 종교인이라면 진정한 타종교인을 만날 때, 타인의 교리는 받아들일 수 없으면서도, 그가 종교적 시련을 참아가는 모습은 “나의 삶”과 같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네 안에서 나의 모습을 볼 때” 비로소 종교인과 종교인, 종교문화와 종교문화 사이의 공존의 지혜와 슬기를 갖게 된다. 그 공존의 슬기가 바로 두 다리로 우뚝 선 현대종교인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렇게 우뚝 선 건강한 현대 종교인은 현대사회에서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고, 또 존대한다.
모든 종교는, 쉬운 말고 하자면, 영원한 행복과 평화를 추구하고 있다. 타종교인 안에서 “영원한 행복과 평화를 추구하는” 태도를 보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내가 나의 종교적 삶의 모습을 보기만 하면. 내가 나를 바라보듯이 타인을 바라볼 때, 나의 살의 태도와 그의 태도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 친구가 될 수 있다. 마치 각자의 가슴에 자신의 어머니를 품고 친구가 되듯이.
이처럼 자신의 신앙을 지니고 종교적 정체성을 확보하면서, 사회에서 만난 타종교인 안에서 나의 모습을 보는 것은, 지성적 노력과 훈련을 통해서 가능하다. 이는 나와 타자라는 두 주제적 존재 사이에 공통점을 발견하고, 그에 근거하여 새로운 관계를 창조하는 과정이다. 정체성을 지닌 주체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질서를 창조하는 것, 그것을 다원주의라 한다.
다원주의 질서는 형이상학적 이념이 아니다. 그래서 그 질서 안에 모든 종교적 신념과 세계관이 공존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종교가 공존하는 개방된 관계질서를 창조하는 공동작업장이다. 그 관계질서 안에서 모두가 영원히 행복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개방된 원리가 다원주의이다.
다원주의라는 새로운 관계질서는 개방적이어서 무분별한 팽창주의를 거부한다. 앞에선 누누이 살펴보았듯이 어떤 형태의 것이라도 무분별한 팽창주의는 공동의 행복과 평화의 파괴자이며, 공동의 적이다.
현대종교가 양면의 사회적 압력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과 평화를 창조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길은 다원주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다원주의 수호자는 개방적 태도이며, 그 적은 무분별한 팽창주의이다. 개방주의 원칙을 지켜 사회에 새로운 관계질서를 창조한데 주도하는 길을 확보하는 것이 종교가 현대다종교사회에서 감당할 과제이다.
5. 결론: 다종교문제를 극복하는 구체적 대안
우리는 지금까지 다종교사회의 문제가 야기되는 원인과 그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찾기 위하여 다양한 측면으로 논의 하였다. 그 논의는 다종교사회가 나타나는 역사적 원인과, 절대신념체계로서의 종교의 본성, 그리고 현대사회의 상황의 현실, 이렇게 삼 측면의 상호관계를 구조적으로 통찰하고, 그 구조적 맥락에서 다종교문에의 해답을 찾는 준비 작업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현재 한국사회의 다종교상황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일차적으로 종교계가 새로운 시대적 각성을 해야 한다. 이 각성은 두 가지 점으로 요약된다. 먼저 종교계가 포교와 선교 등 대사회적 활동에 있어서 “무분별한” 팽창주의를 자제해야 한다. 다음으로 모든 종교가 공동으로 추구하는 영원한 행복과 평화를 구현하기 위하여, 현대 종교는 과거와 달리 개방적 태도로 타종교를 수용할 수 있는 사상과 태도를 계발해야 한다. 그 계발의 원칙은 다원주이가 되어야 한다.
이런 두 가지 원칙을 무시할 때, 종교는 현대사회의 역사적 흐름에서 밀려나 사회의 주변세력으로 남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위협을 극복하기 위하여, 각 종교는 전통적인 절대신념체계를 확보하면서 적극적으로 사회규범을 지키는 건강한 현대종교로 탈바꿈 하여야 한다.
이러한 탈바꿈은 종교가 스스로 기존의 전통과 체제 안에서 갖던 도덕적 갱신노력 만으로는 불가능하다. 현대종교로 탈바꿈하는 것은, 현대사회체제의 무분별한 팽창주의에 의하여 파괴된 전통적 가치관은 새롭게 부활시키는 이른바 현대의 시대적 사명을 수행하는 데 능동적으로 동참할 때, 비로서 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적 갈등과 마찰의 문제를 극복하는 길은 구체적인 문제들을 사안 별로 대증요법을 쓰는 것은, 일시적으로는 필요하지만,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대안은 찾을 수 없다. 이에 첨가하여, 현대종교는 사회적 압력으로 일종의 위기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증요법에 의한 사안별 대책은 오리려 위기의식으로 인한 종교의 주체적 사회 참여의 의지를 마비시키는 경향 있다. 이러한 점을 피하기 위하여 종교의 정치 및 사회적 대책은 오히려 종교운동의 밝고 희망찬 비전을 갖도록 긍정적 경려를 할 필요가 있다.
종교문제를 종교계가 능동적 극복하게 하기 위하여 특히 언론의 역할이 기대된다. 종교는 수많은 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다. 지금까지 언론은 개별 문제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여론을 일으키는 경향이 농후했다. 이러한 고발도 종교가 현대사회의 흐름 안에서 건강한 역할을 되찾을 수 있도록 조명하는 거시적 맥락에서 전략적으로 기획되어야, 종교 스스로가 경쟁적으로 자정의 길에 더 빨리 들어서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자정의 길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종교는 지금 과거에 누렸던 자신의 사회적 권위가 급속하게 위축되는 과정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 간의 갈등은 장기적인 안목에서는 볼 때, 종교의 동반 자살을 의미한다. 따라서 종교가 다원주의 원칙을 수용할 때, 종교간 경쟁적 팽창주의를 벗어나고, 영원한 행복과 평화의 꿈을 자유롭게 펴고 또 서로 나눌 수 있는 현대질서를 창조하는 주역이 될 것이다. 종교의 동반자살과 현대사회의 새로운 질서창조의 주역이 되는 둘 사이에 종교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분명해진다. 종교정책은 종교로 하여금 능동적으로 바람직한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여야 한다.
종교가 개방적 태도로 타종교와 공동으로 현대사회에 영성적 활력을 주는 사명을 선택하는 것은, 두 가지 밝은 약속을 담고 있다. 하나는 현대사회의 역사적 흐름에서 위협을 느끼는 종교가 현대사회의 개선을 주도하게 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가 현대사회에 행복과 평화를 주게 되는 것이다. 종교 능동적 선택은 종교와 사회가 모두가 윈윈하는 기쁨을 준다. 윈윈 전술은 우리사회 전체의 평화를 약속한다.
이러한 윈윈 전술의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대안을 제시된다.
가. 개별 종교차원에서 종교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
* 각 종교는 건강한 현대종교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자정운동을 한다.
- 자정운동은 먼저 종교교단 차원에서 준비한 프로그람을 주도적으로 실현한다.
* 개별종교가 과거의 도덕적 권위를 회복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 이 운동은 다종교상황 안에서 종교적 갈등과 마찰을 극복하는 자정노력과 비례하여 종교의 사회적 권위를 확보하게 한다.
* 각 종교는 그 안에 속한 다양한 단체가 능동적으로 사회개선의 참여하는 경쟁을 유도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 특히 자정운동을 포함하여 사회참여운동을 하는 경우, 사회로부터 무분별한 팽창주의라는 평가를 받지 않도록 자제하도록 한다.
나. 사회 규범의 차원에서 종교적 갈등과 마찰을 극복하는 대안
* 종교가 현대사회의 중요한 구성요인이라는 원칙하에, 종교가 사회규범을 존중하고 지키도록 격려하여야 한다.
- 종교자체가 현대사회의 법적 규범을 지키는데, 사회규범의 차원에서 종교에 예외를 허용하면, 사회로부터 종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게 되어, 거시적으로 보면 종교의 사회적 권위의 상실을 부추기게 된다.
- 예외의 인정은 종교가 현대 사회의 개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노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현대종교로 하여금 윈윈 전략을 성공하는데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 종교문제에 대한 대증요법은 종교로 하여금 적극적인 자정운동을 통하여 사회적 권위를 확보하는 데 저해요인이 된다.(앞의 논의 참조)
다. 종합적 평가
* 종교문제의 대안은 아무리 체계적으로 수립하고 실행해도 종교자체의 능동적으로 자정운동을 통하여 계발되지 않는 한, 비현실적인 결과로 끝날 경향이 높다.
* 따라서 모든 계획안이 대증요법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의 희망을 잃지 않고, 대증요법일 망적 모든 계획을 장기적인 전망의 맥락에서 수립해야 한다.
라. 유일한 구조적 대안
* 종교적 갈등과 마찰을 극복하는 대안은, 모든 문제가 그렇듯, 왕도가 없다.
- 근본적 대안 오직 희망을 잃지 않고, 체계적인 대안을 모색하면서, 오래 참으면서 끝가지 기다리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대안이다.
- 이러한 대안이 구체적인 프로그램으로 제시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종교평화교육이 될 것이다.
- 종교가 다원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자신의 영성적 꿈을 펼쳐나가면서, 타종교와 개방적 관계질서를 창조할 때, 윈윈의 기쁨을 현대사회에 고루 안겨줄 것이다.
- 윈윈 전술의 기쁨은 오늘의 상황에서는 오직 교육을 통해서만 실현이 가능하다.
- 종교평화교육은 체계적으로 기획한 내용을 교육하고 훈련하면서, 그 결과를 오래 기다리는 프로그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