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차정식의 신약성서여행 <바로가기 클릭>
단풍나무 그늘 아래 우두커니 서 있었네
저녁식사 마치고 서늘한 바람이
서툰 빗줄기를 부르는 어스름,
물끄러미 허공에 꽂힌 시선으로
하루간 쌓인 상념이 풀어지고
작은 기억의 파편들은 흩어졌다 모이고
또 자꾸만 흩어지는 시간,
아무일도 하지 않는 몽롱한 침묵이
낯설게 흐르고 있었네
아무것도 묻지 않는 허공의 고요만이
내 슬픔의 주인이었네
모든 실패의 사연이었네
소양천변 달구어진 콘크리트 바닥 위로
아기를 엎고 두리번거리던 방아깨비 엄마
그 위태롭던 한 쌍의 날개죽지
강원도 익명의 계곡 수면 아래로 훔쳐봤던
어름치 한 마리 홍수에도 잘 붙어 있는지
하나 둘 집집이 불이 켜지고 하루의 근황
사이로 안부를 묻는 무의식의 수런거림
가만히 앉아서도 땀을 뻘뻘 흘리는
허기진 습도가 아열대의 비를 몰고오는
저녁, 악마도 숨을 죽이고
천사의 얼굴도 미소를 거둘 무렵
이 여름의 끈질긴 습격은 이제 퇴각신호를
기다리는 표정이었네
내 신경을 잡아끌었던 모든 충동들
번번이 민망하게 들끓는 그대 향한 열망들
저기 또 출구가 보이고, 새로운 방을
맞이하는가 보네
세상의 모든 잠을 지키는 파수꾼의 노역도
조금씩 긴장을 풀 수 있겠네
내 몸이 잠들어 그대 맘이 평안해질수 있다면,
무연한 사람들, 곳곳에 무감한 생명들
달콤한 포도즙이 모든 경계의 틈새로
잠시 무르익은 신기를 선사할 수 있다면
단풍나무 그늘 아래 수상한 저녁이
쓸쓸하게 젖은 목석처럼 서 있었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