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 종교환경회의 주최 '2010 종교인 대화마당'
일시 : 2010년 9월 2일
발표 : 이정배 교수(감신대)
기후붕괴가 가상 시나리오가 아닌 目下의 현실임을 뒤늦게 실감한 국가들이 앞 다투어 자연 생태계 유지, 보전에 초점을 맞춘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있다. 지속 가능한 발전, 녹색성장이란 그럴싸한 말이 이념의 차이를 넘어 모든 국가들의 기본 관심사가 된 것이다. 늦게나마 자연을 이용물질만이 아닌 존재근거이자 생존토대로서 인식한 듯 보여 일정부분 안심된다. 하지만 지속 가능한 발전이 언제까지 계속되고, 녹색과 성장이란 말이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굴러갈 수 있는 개념인지에 대한 물음이 남아있다. 향후 미국과 중국간 녹색기술에 바탕한 녹색산업의 한판 승부가 예견되는 상황에서 과연 녹색이 경쟁, 산업이란 말과 어우러질 수 있는 사안인지 깊게 성찰할 일이다. 어느덧 소비자로 전락한 우리들의 삶 속에 깊이 들어온 ‘친환경’이란 말의 허구, 환상도 같은 맥락에서 숙고할 주제가 되었다.
우선 성장이란 개념은 인간 중심적이다. 자연에는 조화와 풍요가 핵심이나 성장은 그와 낯설다. 성장은 획일적 가치를 내포하고 조화는 다양성과 차이를 적시하는 까닭이다. 발전과 성장은 언제든 경제 가치에 입각해 있다. 그렇다고 모두가 더불어 향상되는 공적토대가 쉽게 마련될 수도 엇다. 자연을 유기체, 인간 삶의 동반자로 여긴다면 경쟁, 발전, 성장 등의 개념보다는 공생, 조화, 共貧을 말해야 옳다. 사실적 종말에 이른 자연에게 미래를 허락하려면 인간, 그것도 소수 인간의 경제적 발전은 상당기간 포기해야 한다. 우리가 지닌 장롱을 열고 그 속을 들여다보면 풍요문명에 익숙해진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다. 쓰고 버리는 크리넥스적 소비문화에 길들여진 삶의 흔적들이 그곳에 남겨져 있지 아니한가? 이제껏 살아온 삶의 방식, 풍요문명은 지속되기 어렵고 그리 될 수도 없는 법이다. 국가적으로 인구 수가 줄어든다고 아우성이다. 하지만 다시 인구 수를 늘리는 정책을 입안하는 것이 능사는 아닐 듯하다.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니라도 피부색이 다르다 하더라도 내 가족의 일원이자 민족 구성원의 하나로 여겨지는 사회적 여건 마련이 더욱 시급한 일이다. 지속가능한 성장은 국가의 인구 늘리기 정책과 함께 갈 수 없다. 인간중심주의를 脫해야 하듯 민족주의를 벗어나는 일 역시 자연과 공존할 수 있는 첩경일 것이다. 하지만 지속 가능한 발전, 녹색 성장의 개념 속엔 이런 시각이 안중에도 없다.
인간이 인간과 공존하고 자연과 공생하려면 당분간 함께 가난해지는(共貧) 삶의 가치관을 택하는 수밖에 없다. 생태학의 으뜸공리가 ‘모든 것은 모든 것과 관계한다’는 것과 ‘나눔’의 에토스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관계, 유기체성이 보존되려면 높은 것이 낮아져 낮은 것을 두드러지게 해야 한다. 인간에게 단순성(Simplicity)이 요구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인간이 가난해져야 자연이 진정코 삶의 동반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자연은 너무도 가난해져 있다. 인간에게 아낌없이 모든 것을 주었던 결과이다. 이제 인간이 자연에게 받은 은혜를 되갚을 때가 되었고 필자는 이를 자연(환경)선교라 명명한 바 있다. 지금 자연은 ‘새로운 가난한 자’로 비유되며 ‘갓 태어나 벌거숭이 상태로 방치된 어린아이’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때론 흐르는 피를 멈출 수 없는 혈우병 걸린 여인에 비교되기도 한다. 영원히 존재하리라 믿었던 자연의 붕괴, 어머니 사랑처럼 샘솟았던 자연의 은총이 고갈되어 가이아의 복수를 염려해야 될 시점에 이른 것이다.
이쯤에서 친환경이란 이름의 허상을 말할 때가 되었다. 온통 슈퍼마다, TV 고아고를 통해 환경 앞에 親자 붙인 제품이 소개되고 있다. 그것으로 녹색성장의 실상을 들어 낼 목적에서다. 그러나 우로보로스의 형상을 하고 있는 상품의 순환주기를 직시할 경우 親이란 단어가 무색해지는 경우가 수없이 있다. 겉으로는 녹색을 표방하나 실제론 환경친화적이지 않는 그린워싱(Greenwashing)을 일컫는다. 예컨대 유기농 셔츠에 ‘그린’이란 글자가 진한 파란색으로 염색되어 있는 상품이 있다고 치자. 면사를 표백하고 크롬, 염소 등 화학물로 공정을 마치는 과정에서 면사에 흡수되지 아니한 염료가 공장폐수에 섞이고 시용된 염료에서 발암물질이 나오는 경우이다. 던킨 도너츠가 트랜스 지방 함유량을 제로로 하겠다는 소위 녹색선언을 했으나 거기에도 해로운 당분, 흰색 밀가루 등이 섞여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친환경 제품은 요람에서 요람에 이르는 과정 속에서 이뤄질 뿐 한두 가지 측면을 해결해서 얻을 수 있는 결과가 아니란 사실이다. 이런 그린 워싱은 결국 녹색성장을 목적하나 그것은 기업의 성장일 뿐 지속가능한 자연과의 공존과 조화는 애초부터 가능치 않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에코지능의 개발이다. 풍요로운 경제성장 하에서 인간의 에코지능은 점차 둔감해졌고 퇴보해 왔다. 본래 생명호성(生命好性)은 인간에게 내재된 특별한 능력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위험을 만들며 그 속에 노출된 삶을 살아온 결과 인간의 생명호성은 위기에 둔감해져 버렸다. 심지어 스스로 깨어나지 못할 정도까지 되었다고 말한다. 인간 두뇌에 내재된 시스템으로는 현실 위기를 포착치 못할 위험에 처해 있다한다. 오늘의 생태위기를 의식의 영역으로 이끌어내는 노력이 바로 종교의 몫이다. 아직 보이지 않는 위험을 보이게 만드는 의식화 작업이 종교의 할일이란 사실이다. 녹색성장이란 이름 하에 뭇 숨겨진 비용을 깨달아 아는 일 역시 생명을 가치로 삼는 종교의 과제란 말이다. 소위 윤리적 소비가 이에 해당된다. 오늘날 농업과 축산업 그리고 수산업이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전락해 가는 현실을 직시하라는 명령이다. 처녀림의 나무를 밀어낸 자리에 그 두 배가 되는 나무를 심는다 해도 이미 사라진 풍부한 생물학적 다양성은 복원 불가능하다. 종의 멸종이 종의 생성보다 100배 이상 빠르게 진행되는 생태적 위기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말하는 것은 거짓의 자행일 뿐이다.
윤리적 소비는 손의 창조력과 직결되는 사안이다. 인간의 지능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직립보행 덕이었다. 아니 직립덕분에 자유롭게 된 두 손의 사용 덕분이라 하는 것이 정확하다. 그런데 생태적 위기를 초래한 인간은 손을 사용하기보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코자 한다. 돈으로 남의 시간, 재능, 생명까지도 살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손의 창조력의 상실이 바로 에코지능의 결핍을 초래했다고 해도 과언일 수 없다. 스스로 할 줄 아는 자급의 능력의 결여될 때 필요한 것은 돈 뿐이며 그럴수록 삶은 종속되고 위기를 느낄 수 있는 두뇌 능력은 감소한다. 세상을 조망할 여유도 힘도 상실한 까닭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문화의 특성이 바로 이를 반영하고 있지 않은가? 익명성으로 효율성만을 좇아 살다보니 숨겨진 비용이 보이지 않고 일상 곳곳에 숨겨진 악마가 보일 수 없다. 이점에서 도시의 소비문화에 젖어 살고 있는 우리를 카인의 후예로 칭한 자크 엘룰의 통찰은 대단히 정확했다. 도시에 살지만 그로부터 자유케 되는 길은 오로지 손의 창조력을 회복시키는 데 있다. 이것이 있어야 녹색성장이란 말이 진실로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경우 성장은 나눔의 에토스를 통한 조화나 균형의 모습일 것이다.
녹색 성장, 그것은 손의 창조력이 돈보다 중요한 가치가 되는 상황에서 비롯한다. 이런 일은 자연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한계 자체를 인정하는 삶의 태도이다. 자연이 인내의 한계를 보이는 상황에서 인간이 그 한계를 돌파코자 이념적 씨름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는 노인이 경제성장의 적이 아니라 더욱 존중받아야 할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자연 따라 사는 그 속에 지혜가 있고 인류의 미래가 있다. 자연은 다품종, 다년생, 고유한 토종들로 구성되어 있으나 성장을 위한 욕심으로, 경제적 시각에서 단품종, 일년생, 외래종으로 자연을 바꾸어 놓은 것이 우리 인간들이다. 자연의 한계를 인정치 않은 인간의 교만한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자연을 지배할 목적이 아니라 그와의 조화를 위해 자연을 배워야 한다는 진리를 망각한 탓이다. 잡종과 변종이 생겨날수록 더 많은 비료, 살충제, 석유화학물질 등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산업형 농업, 거대 축사를 짓고 소를 키우는 것을 녹색성장이라 말할 수 없다.
인간의 깊은 무의식 속에는 존재와 소유라는 두 본능이 자리하고 있다. 상호 다른 살므이 양식이 갈등하며 마치 쌍둥이처럼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앞의 것이 높아야 인간은 자신의 고상함을 지킬 수 있고 자연과 공생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오늘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 욕망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가 되어 버렸다. 영국 BBC 방송의 전언에 의하면 한국은 포르노가 가장 성한 나라, 성형수술의 빈도수가 가장 높은 나라, 자연을 파헤치는 토건산업이 흥한 나라 등등의 이유를 들어 욕망지수 1위라는 불명예를 안겨 준 것이다. 종교와 욕망, 이는 상호 반비례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이들이 한국에서 정비례하고 있다는 사실은 종교무용론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소유를 누르고 존재를 들어나게 하는 것이 종교의 본래적 소명이라면 말이다. 이점에서 한국 고유한 사상가인 多夕 유영모는 견물불가생(見物不可生), 물질을 보고 마음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랬다. 쌀 한 알 심어 천 알, 만 알 수확하는 것도 이득이지만 자신을 하느님께 바쳐 하느님 아들로 변하는 이득이 훨씬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고 가르친 것이다. 물질을 소유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물질의 본성을 잘 알아 자연과 하나되는 삶, 자연 따라 사는 삶을 살 것을 종용했다. 예컨대 닭고기를 먹되 그것을 고기로만 알지 말고 자신 역시 닭처럼 부지런히 살 목적으로 먹으라는 것이다. ‘물에 맘이 살면 맘의 자격을 잃는다’고 경고했고 ‘맛을 좇지 말고 뜻을 좇아 살라’는 말씀도 남겼다. 사람들은 들판의 꽃만을 보고 그 꽃을 꺾으려 들지만 다석은 그 꽃을 있게 한 배경, 곧 없음을 보라고 했다. 없음이 있음의 근거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석은 하느님을 ‘없이 계신 이’라 불렀고 인간 역시도 없이 살아야 할 존재라 했다. 소유가 아니라 존재적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그래야 盡物性할 수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인간은 아직 ‘없이 계신 이’처럼 없이 있지 못하고 ‘덜’ 없어 더러운 인간(죄인)으로 머물고 있는 것이다.
생태위기 시대, 기후붕괴의 진조를 보이는 현 시점에서 녹색성장이란 말은 위험스럽다. 전혀 다른 삶의 양식, 다르게 보고 달리 사는 길이 오히려 요청된다. 이점에서 필자는 성서의 인물 노아를 에코지능의 소유자로 보고 그를 오늘의 시각에서 이렇게 의미화 하고 싶다. 우선 노아는 시대의 징조를 분별한 사람이다. 예민한 감수성을 갖고 시대의 변화, 우주의 대 격변을 예감한 사람이다. 신앙은 이런 감수성을 동반해야 제격이다.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린다는 것이 신앙의 본질 아니던가? 오늘 우리 시대는 백만 명의 노아가 필요하다. 남녀노소 흑백인을 막론하고 저마다 이런 대격변을 예감하는 생태감수성, 에코지능을 종교가 가르치고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 노아가 준비한 것은 새로운 세상을 위한 방주였다. 흔히들 교회를 구원의 방주라 한다. 하지만 어찌 교회가 방주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방주 속에는 필요/불필요, 유/불리의 인간적 가치척도를 넘어선 하느님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인간은 잡초라 배격했으나 방주 속에는 새 세상을 위한 씨앗으로 그의 자리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함께 있을 때, 다양성, 유기체성이 존재할 경우에만 새 세상은 가능한 법이다. 해서 오늘 우리는 자신의 공간을 백만 척의 방주로 만들 책임이 있다. 그것이 교회이든 사찰이든 가정이든 말이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하느님께 예배하며 포도나무를 심었다는 사건도 대단히 유의미하다. 주지하듯 대홍수는 가인이 만든 도시문화에 대한 심판이었다. 하느님도 없고 동생 아벨도 사라진 공간에서 스스로의 안정을 지키려 했던 가인과 그가 세운 도시문명, 급기야 라멕이 지은 죄가 하늘을 찌르던 상황에서 하느님이 세상의 멸망을 작정한 것이다. 자신의 창조를 후회하신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한 그루의 포도나무는 전혀 다른 세상을 환기시킨다. 하여 노아를 통한 하느님의 새 계약이 만방에 선포되지 않았던가? 사람들 눈에서 억울한 눈물을 흘리지 말 것과 동물을 피째로 먹지 말라는 하느님의 명령은 새 세상의 기초이자 초대였다. 정의와 생명의 감각, 이것 없이는 하느님의 세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오늘 우리가 지속가능한 발전, 녹색성장을 말할 때에 이 두 가지 전제를 놓쳐 버린다면, 이 둘을 실현시킬 수 없다면 그것은 녹색도 성장도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능치 못할 것 없는 믿음을 강조하기 전에 처음부터 이런 두 한계와 더불어 시작하는 삶이어야 한다. 기독교가 이런 문제의식에 철두철미해질 때 비로소 둔감해진 에코지능을 일깨울 수 있는 생명의 종교, 세상을 구원하는 종교로 역할을 다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