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명 : 제9회 에큐메니칼 아카데미 심포지엄 '최근 중국의 종교정책 이해와 기독교'
일시 : 2010년 8월 26일
주최 : NCCK 선교훈련원
자료출처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kncc.or.kr
연변지역에서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과 이해
전신자 교수(연변대학 인문사회과학학원 사회학부)
머리말
延邊 지역은 주지하다시피 中國朝鮮族의 제일 큰 집거구이고 유일한 朝鮮族自治州이다. 19세기중엽부터 우리 조상들은 생계를 위하여 조국을 등지고 이국타향 중국 동북에 이주하여 연변 지역을 개척하고 건설하여 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이 되었다. 백여 년 동안 조선족은 이주민으로서 자기의 전통문화를 고수하면서 중국 기타소수민족의 문화를 수용하고 발전하여 전형적인 跨境民族文化를 창출하였다.
연변조선족은 중국에서 두 가지 기여를 하였다. 즉 하나는 東北大地에서 벼농사를 처음 耕作하고 보급하여 水田農事를 개척하였다. 다른 하나는 항일투쟁에서의 공헌이다. 중국의 著名한 詩人 賀敬之선생님은 “산마다 진달래이고, 마을마다 기념비이다”라는 詩 구절로 연변의 아름다운 山川과 조선족의 역사적인 貢獻을 묘사하였다. 연변지역에서는 革命烈士紀念碑 611개가 있고 조선족 女抗日烈士의 人員數는 吉林省 總女烈士 인원수의 95%이상을 점한다.
이러한 연변지역은 중국의 改革開放以後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특히 基督敎의 盛行은 새로운 사회현상으로 부상되여 마을마다 교회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본문은 연변지역 기독교의 현주소, 그리고 교회가 확장되고 있는 원인에 착안점을 두고 이에 대한 未熟한 認識과 理解를 간략하게 정리하려고 한다.
1. 연변지역 기독교의 현주소
20세기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의 개혁개방과 더불어 중국공산당의 宗敎信仰自由의 정책도 점차적으로 貫徹하게 되므로 연변지역의 종교도 안정하게 발전되고 있는 추세였다. 2004년의 통계에 의하면 연변지역에서 종교의 신앙자는 57,681인데 全州 總人口의 2.6%을 점하고 그 중에서 천주교 2,281명, 기독교 38,694명, 이슬람교 6,146명, 불교 10,047명, 도교 137명이다. 그 중의 敎職者(종교지도자)들은 140명이 된다.
연변지역의 종교 발전 상황을 보면 현재는 기독교 신도들이 급증하고 있는 추세이지만 종교신앙은 다원적이다.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세계적인 종교가 동시에 竝存하고 있고 그 중에서 기독교가 第一位를 점하고 있다. 1985년에 연변지역의 종교신앙자는 11,500명인데 기독교 신도들이 3,500명에 달하였고, 1990년에는 기독교 신도들이 11,990명으로 발전되여 5년간 3배로 늘어 났다. 1995년에 기독교 신도들은 32,500으로 발전하여 1990년보다 거의 3배로 늘어났다. 2000년에는 기독교 신도들이 36,758명이고 2004년에는 38,694명이다. 연변지역에서 등록된 종교활동장소는 257개이고, 기독교 활동장소는 222개로 전체의 86.3%을 점하였다. 여기에서 나타난 것처럼 기독교는 연변지역의 종교 중에서 가장 성행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 신도들의 身分 構成은 복잡하고 다원적이다. 多階層 多民族의 인원들로 주로 아래와 같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1. 친척방문, 유학, 노무수출로 외국에 갔다 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언어와 同族이란 우세로 한국에서 기독교를 접수하고 귀국한 후 교회에서 첫째로 활약하고 있는 신도들이다.
2, 도시나 시골의 약자들이다. 市場經濟體制의 도입으로 중국의 기존한 계획경제체제의 전이되자 실업자와 경제난을 받는 농민들이 많이 나타나므로 그들은 생활보장을 받지 못한 약자들로서 자신의 샐황보장을 교회에서 찾는다.
3. 역사적으로 믿어 온 노인들이다. 이들은 보편적으로 일정한 문화 수준이 있고 어려서부터 기독교를 믿어 온 분들이다.
4. 일부 지식인들이다. 그들은 국외에서 유학하였거나 방문학자로서 기독교를 믿게 된 사람들이다.
5. 외자기업이나 외자학교의 공직원들이다. 연변지역에서 투자한 외국인 기업가들 중의 절대다수는 기독교의 신자들이다.
2. 연변지역 기독교의 성행한 원인
2.1 중국의 개혁개방과 이데올로기의 다원화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로서 이데올로기도 역시 단일적인 모델로 발전하여 왔다.종교에 대한 인식도 물론 1949년 新中國이 성립된 후 중국공산당은 일련의 종교정책을 발표하고 종교신앙을 존중하였지만 주류적인 이데올로기는 無神論적인 유물주의 교육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 거의 무지한 상태이거나 혹은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특히 10여년 文化大革命은 사회주의란 기치하에 종교와 민간문화를 모두 봉건주의, 자본주의, 수정주의라고 인정하면서 비판하고 沒殺하였다. 소위의 문화대혁명은 인간의 정상적인 심리를 왜곡하고 모든 것을 정치로 표준을 삼고, 특히 海外關係는 그야말로 가족의 禍根으로 되여 수많은 조선족들이 피해를 보았다. 이러한 사회는 모든 것은 국가에서 통제하고 分配하며 貧富差別은 선명하지 않았으며 국가의 강력한 위력은 사람들의 이데올로기를 오직 무산계급정치에 引導하였다. 특히 新中國이 성립된 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사회주의교육하에서 종교에 대한 인식은 너무 편견적이고 부정적이었으며 오로지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마비시키고 매장하는 鴉片이라고 하면서 금지하였다. 그러므로 일반 백성들도 종교에 대하여 부정적인 인식이 더 많았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서구의 문화들이 날로 전파됨으로써 특히 등소평의 “黑白고양이론”이 제기되자 중국의 계획경제체제는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게 되었다. 시장경제의 본질을 놓고 보면 시장의 역량은 그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는다. 단지 이익만 있다면 은물방울처럼 쏟아 들어온다. 이것은 국가적 지역적 종교적 문화적 민족적 장벽을 넘었다. 시장경제의 적극적인 의미에서 볼 때 그의 위대한 작용은 개인의 주동성과 창조성을 해방하였지만 그의 소극적인 영향은 인간의 원시적인 利己心을 이용하여 물질에 대한 탐욕이 끊임 없었다. 이렇기 때문에 개인의 自由度는 높아지고 이미 형성된 생활방식도 타파되었다. 국가의 이데올로기의 역량도 轉移하고 사회적인 이데올로기도 역시 단일적인 것에서 다원화로 발전하게 되였다. 사람들은 公적인 영역에서부터 私적인 영역으로 나아가 “집체”와의 관계는 점점 멀어지고 致富 외에 다른 사회활동과 행정사무에 무관심하였으며 더구나 수많은 농민들이 출국하거나 도시에 진출하여 농촌은 노약자들만 남기여 거의빈 둥지였다. 그런데다 농촌의 문화시설도 낙후하여 문화활동를 할 공간과 시설이 없었다. 이러한 구조적 변화와 利益關係의 변화는 기독교 전파에 기회와 공간을 제공하여 주었다. 이러한 외부적인 조건이 마련되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전파도 성행될 수 있었다고 본다.
2.2 중한수교와 인적교류의 흥기는 기독교 전파에서 유대적 역할을 하였다.
중국 조선족은 跨境民族으로서 국외에는 韓民族을 주체로 한 조선과 한국이란 모국이 있다. 여러 원인으로 1990년부터 연변조선족은 조선과의 연계는 날로 萎縮되고 있었지만 근 반세기 동안 단절되었던 한국과의 연계는 중국의 개혁개방과 함께 날로 발전하고 특히 中韓修交 이후 문화적 경제적 교류는 날로 빈번해 지고 특히 아시아의 4개小龍이 된 한국의 경제발전은 우리 조선족사회에게 큰 흡인력이 되었다. 조선족들은 친척방문, 노무수출, 국제결혼, 유학 등 여러 가지 도경으로 한국에 이주하였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조선족사회의 발전은 한국사회의 영향 속에 발전하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은 조선족의 모국으로서 많은 배려와 同胞愛를 나누고 조선족사회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모국이지만 체제가 다르고 이데올로기가 다른 한국은 조선족에게는 때로는 익숙하고 때로는 생소하며 배려와 함께 同胞愛를 느끼는 동시에 相異한 체제의 이념으로 거리감도 많이 느끼고 있다. 그렇지만 중국 개혁개방후의 조선족사회의 변화는 한국과 갈라 놓을 수 없다. 특히 한국에진출한 勞務經濟는 이미 연변지역의 하나의 大産業으로서 연변의 경제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점하는 동시에 연변의 기독교의 전파에 교량과 유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국에서 무시당하고 인권조차 상실하였던 조선족들은 교회의 도움으로 일자리와 숙소를 해결하고 정신적인 위안을 많이 받았다. 이러므로 그들은 당연히 귀국하여도 기독교에 대한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2.3 연변 경제의 낙후성은 기독교 전파의 주요한 원인이다.
개혁개방 이후 연변지역의 사회경제 모습도 역시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지만 역사적, 지리적, 자연환경적 요인으로 역시 발달이 지연적이었다. 吉林省에는 국가에서 부축한 중점 빈곤 현 8개가 있는데 연변에만 4개를 점하고 있다. 그 중에서 조선족이 제일 집중된 용정시의 경제실력은 이미 全省의 최하위였다. 그리고 연변의 99개 조선족 邊境村 중에서 55개촌이 債務가 있고 빈곤호의 인구는 변경농촌 총인구의 17.9%를 점하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당지의 정신문화생활의 중요한 陣地와 약자들의 정선적인 寄託이 되었다. 설문 조사에 의하면 대다수 信者들은 삶이 어려웠기 때문에 기독교를 믿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생활에 대하여 망설이거나 앞날에 대하여 전도가 보이지 않아 기독교를 믿음으로써 마음의 위안을 받는다고 한다.
3. 연변에서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과 이해
3.1 역사적인 인식.
연변지역의 기독교는 100여년이란 역사를 가지고 비교적 광범한 군중기초가 있다. 연변의 기독교 전파는 鴨綠江北岸의 동변도지역의 조선족사회보다 늦지만 우리 민족이 스스로 전파한 것이고 동변도지역의 기독교전파는 中國關內의 서구전도사들이 전파한 것이다. 연변의 기독교 전파의 시작은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기독교가 연변에서 빨리 보급되는 것은 그 당시의 정세와 밀접히 상관된다. 그것은 조선이 전면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들어설 때 근대사회의 문명을 접수하고 진보적인 희망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시기에 많은 반일민족지사들이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기독교에 가입하였다. 그들은 자유, 평등, 민권 등 기독교의 이념으로 봉건제도를 비판하는 동시에 자유와 평등의 이념으로 외래의 침략을 반대하여 국가독립자주와 자유발전을 주장하였다.
예컨대 저명한 조선근현대 반일민족혁명가인 이동휘 선생은 조선이 멸망한 후 기독교의 신앙으로 민중을 불러일으키고 근대교육을 보급하며 애국독립 각오를 향상시키고 국가와 민족위기를 구원하는 有效적인 사상무기와 방식으로 여겼다. 그는 연변에서 반일교육과 선교를 병행하면서 마을마다 교회가 있는 날이면 우리 민족의 해방의 날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기독교의 자유평등 주장은 신분과 성별을 불문하지 않는 자세와 전 사회로 향한 公益사업은 하층 대중들의 환영을 받았다. 특히 오랜 역사 속에서 유교사상의 “三綱五常”, “三從四德”의 윤리도덕에 속박되었던 여성들은 예배로 시작하여 처음으로 남성과 함께 사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깊이 뿌리 박힌 봉건사상을 타파하고 근대적인 신식교육을 받음으로써 자기의 下賤한 지위를 향상시키고 자기의 출로를 찾게 되였다. 특히 1911년 명동학교 여성학부의 설립은 조선족여성들의 반일계몽교육의 서막을 열었다. 많은 여성들은 교육을 받고 반일운동에 적극적으로 가입하였다. 연변지역의 반일운동가들은 대부분 기독교의 신자였다.
그들은 이주민으로서 기독교에 가입한 것은 첫째, 순수한 개인동기였다. 이주민으로서 새로운 사회환경과 악렬한 자연환경속에서 중국군벌의 압제와 봉건지주계급의 착취, 그리고 일본 침략세력의 압제 등 여러 가지 억압을 받으면서 개인의 생명과 재산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통과 굶주림 속에서 정신적인 위안을 기독교에 寄託하였다. 이런 시기에 기독교는 교회와 학교의 형태로 나타나 그들의 피난처로 되었다. 마을마다 학교이고 마을마다 교회라는 추세는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접수하면서 민족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많은 역할을 하였다.
둘째, 사회문화적 동기이다. 조선이민은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기 위하여 기독교에 가입한 자가 많다. 그들은 鄕愁의식이 강하기에 생활안정을 추구하는 동시에 나라와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희망하였다. 이런 특정된 의미에서 조선이민들은 처음부터 생활안정과 반일운동이란 二重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마음속으로 정치생활이 평등하고 경제생활의 부유한 사회를 건립할 것을 바라는 동시에 일본식민지를 뒤엎고 조선국가 독립과 민족해방을 쟁취하려고 하였다. 기독교에서 표방한 자유 평등구호는 사람들의 두 가지 소원에 모두 부합되였다.
이것은 특정한 역사배경과 사회기초상의 특수한 현상이다. 그들은 기독교에 가입하면 일본침략세력과 중국군벌들의 통제와 간섭을 면할 수 있고 합법적인 형식과 조직으로서 반일운동을 전개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기독교에 많이 가입하였다.
셋째, 기독교는 연변지역의 반일계몽운동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1910년 한일 병탄 후,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수많은 반일지사들은 중국동북에 이주하여 반일기지를 건립하고 반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반일인재 양성을 위하여 사립학교를 꾸리고 근대적인 지식을 보급하였다. 1916년의 통계에 의하면 연변지역에 사립학교가 156개인데 기독교학교가 71개나 된다. 기독교학교에서는 근대적 교육을 진행하고 특히 여성인권 권장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1911년 처음으로 명동학교에 여성학부를 건립하고 이 학교의 여성선생을 중심으로 한 삼국부녀전도회를 조직하여 여성권리향상을 권장하였다. 이와 동시에 반일사상을 고취하고 반일교육을 진행하며 학생들을 반일투사로 양성시키기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기독교의 전파는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최초의 사상기초와 조직기초를 마련하였다.
3.2 현실에서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과 이해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연변지역의 기독교는 역사상에서 많은 기여를 하였다. 현재의 연변기독교도 역시 발전하고 있다.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한 인식은 각기 상이하지만 개혁개방 이후 뚜렷한 사회현상으로 나타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인식도 과거에서의 편견으로부터 많이 바뀌고 있다. 그렇지만 중국에서의 종교문제는 민감하기에 잘못하면 사회의 안정과 민족단결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대부분 회피하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특히 “아편”이란 종교에 대한 고정적인 인식은 부정적으로 종교의 소극적인 영향만 過多하게 강조하여 정상적인 종교활동을 간섭하고 신자들의 합법적인 權益을 침범하여 종교인사들 마음속에 憂慮도 존재하고 있다. 예컨대 필자는 연길시교회에서 설문조사를 하려고 종교국을 찾아 유관인원들의 소개로 교회에 갔는데 거절만 당하고 돌아왔다. 이러한 현상은 아직도 정부에 대한 警戒心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우리들은 10여년 문화대혁명의 後患이 얼마나 깊게 潛在하고 있는가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백성들에게는 기독교 신앙이 이미 점점 확대되고 있다. 그들은 신앙의 志向을 본인과 가족들의 행복을 위주로 하고 특히 젊은 계층은 기독교에 가입하면 人脈關係도 넓어지므로 就職과 사업성취에 많이 도움이 된다는 동기도 역시 많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시골에서는 비록 마을마다 교회가 있지만 제대로 예배드리고 전도하는 것보다 여기에서 덕을 보려는 사람이 더 많다.
종교신앙에 대하여 중국공산당은 예로부터 존중하고 자유라는 정책을 택하였다. 독립자주의 원칙 하에서 종교단체의 자신 건설을 강화하였다. 즉 사상건설, 조직건설, 제도건설을 강화하며 신도들에게 애국주의 교육을 끊임없이 진행함으로써 종교의 인사들과 신도들이 법을 알고 법을 遵守하며 자각적으로 국가이익을 守護하며 외국 종교세력의 침투를 반대하여 왔다.
현 단계에서 중국공산당은 종교문화의 긍정적인 영향을 이용하여 종교를 사회주의의 조화로운 사회발전에로 인도한다. 즉 종교의 문화자원을 적극적으로 개발하여 당지의 경제발전을 촉진한다. 종교는 하나의 의식형태이고 문화현상이다. 여기에는 풍부한 문화자원이 포함되고 있다. 연변지역의 수많은 역사유적 문화전통은 모두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3.13반일운동”, 반일단체, 명동학교, 대성중학, 은진중학 등 진보적인 사립학교는 모두 종교조직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종교적인 요인이 내포되고 있다. 연변지역 역사 중에서의 애국적인 종교전통를 발굴하고 종교자신의 건설과 당지의 관광자원 개발과 결부하여 상관된 산업발전을 가져올 수 있고 경제발전에 복무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종교는 사회실체의 거대한 조정능력으로서 역대로부터 사회를 위하여 복무하는 우수한 전통이 있다. 종교계에서 전개한 사회자산사업은 지방사회발전에 보충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종교계와 해외 한민족 종교조직의 연계를 이용하여 국외의 우호적인 종교조직과 인사들을 통해 지역 경제발전건설에 자금과 기술을 도입하고 기업과 유대적 역할을 통해 지방의 경제발전을 도모하였다. 종교의 교리에서 제창한 도덕규범을 정신문명과 결합하여 종교로 하여금 사회질서를 조절하고 사회안정을 유지하며 사회발전을 추진하는 추동력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인식과 이해는 종교에 대하여 부정적인 것에서 다원적으로 발전하며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적지 않은 것을 알려주고 있다.
4. 결속어
위에서 살펴본 결과 기독교는 우리 민족의 역사상에서 특히 반일민족운동에서큰 기여를 하였다. 우리들은 기독교의 이러한 우수한 역사전통을 계승하고 사회발전의 거울로 삼는 것이 필요하디. 현재 우리의 현실 생활 속에서 종교란 사회현상은 이미 동반되고 있다. 종교신앙의 여하는 매개인의 자유의 선택이다. 글로벌시대는 국가와 민족의 장벽도 무너지는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오직 자기의 이데올로기만 지키려고 하지 말고 상대방의 이데올로기도 존중하며 다원적인 문제 의식을 가져야 한다. 종교신앙이 있든 없든 여하를 따지는 시대는 이미 끝났다고 본다. 전 인류의 영원한 주제는 발전과 평화이다. 우리들은 이 총적인 목표를 위하여 자기와 다른 문화를 인식하고 이해하며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도 많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말한 인원수는 등록된 것만으로 통계됨, 실제 종교신앙자는 더 많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종교사무국 통계자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