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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언어학자이며 투사인 노엄 촘스키는 지난 5월 27일부터 6월 1일까지 파리에 머물며 강연장을 가득 메운 청중과 간담회를 연이어 가졌다. 그중에서 특히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초청으로 이뤄진 뮈튀알리테(Mutualité) 극장과 콜레주 드 프랑스(Collége de France)의 강연회에선 청중과의 토론을 통해 시사 현안들에 대한 심도 깊은 의견이 교류됐다. 몇 가지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원문 보기>> 한 참석자가 현재의 유럽 경제정책에서 사회 안전망이 부재한 점을 지적하고, 이에 대한 촘스키의 견해를 물었다. 촘스키는 현 상황에 대해 색다른 분석을 내렸다.
경제에 대해 잘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는 케인스의 교훈은 알고 있다. 수요가 아주 적고 민간 분야에서 투자가 이뤄지지 않을 때 성장을 진작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공공 지출이다. 경제를 다시 활성화해야 하고 한시적으로 적자 지출을 수용해 사람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에게도 좋고 경제에도 좋다. 또 결국 초기의 적자를 만회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인플레이션 우려는 있다. 그러나 은행은 최대한 인플레이션을 낮추기를 원한다. 인플레이션 우려가 현저히 낮은 오늘날, 경제를 둔화시키고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데도 그렇다. 이 모든 것이 사회 프로그램이다. 그리스의 경우 또 다른 해결 방안은 채무이행을 거부하는 것이다. ‘추악한 빚’이라는 말이 있다. 그 부채가 어떤 정당성도 없고 국민과 체결된 것도 아니며, 세금도 내지 않는 최고 부자들의 이익을 위해 일부 패거리들이 빌려온 돈이라는 의미에서다. 논리적으로 이 부채를 갚아야 하는 건 바로 이들이다. 정치 투쟁에서 폭력 사용에 관한 질문을 받고 촘스키는 이같은 행위의 동기에 대해 분석하며 답변했다. 잠시 원칙은 잊고 전략에 집중해보자. 여러분은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전략을 선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행하는 모든 것이 시늉에 그칠 뿐이다. 만일 어떤 목적을 이루게 할 전략을 찾는다면 적이 선호하는 전세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국가 권력은 폭력을 아주 좋아한다. 폭력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위자의 폭력 수위는 문제도 아닐 정도로 국가는 그보다 더한 폭력을 동원한다. 그래서 1960년대부터 투쟁하는 학생들에게 말할 때 시위 현장에서 ‘투구’를 착용하지 않도록 조언했다. 분명 경찰은 폭력적이다. 여러분이 투구를 쓰면 경찰은 한술 더 뜰 것이다. 여러분이 소총을 가져온다면 그들은 탱크를 끌고 올 것이고, 여러분이 탱크를 끌고 오면 그들은 B52를 출격시킬 것이다. 필연적으로 여러분이 지는 싸움인 것이다. 전략적 선택을 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는 누구를 도우려는 것인가?’ 여러분은 자신에게 줄 명분을 찾고 있는가? 아니면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려는가? 답에 따라 전략의 선택은 달라질 것이다. 이스라엘 하이파대학의 보이콧 문제를 생각해보자. 이런 행위는 극우주의자에게 선물을 안겨주는 것이다. 그들은 즉각 여러분에게 ‘완전히 위선주의자’라고 말할 것이다. ‘왜 소르본이나 하버드, 옥스퍼드대학은 보이콧하지 않는가? 이 나라들은 더 심한 범죄행위에 가담하고 있는데 말이지! 하이파대학은 그럼 왜 보이콧을 하는 것인가?’ 결국 극우주의자에게 보이콧의 사상적 내용을 깎아내릴 수 있는 선물을 준 셈이 된다. 이 일을 실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명분을 줄 수 있지만, 결국 팔레스타인에게 피해를 준다. 베트남전쟁 동안, 나는 베트남인이 ‘웨더맨’(3)의 행동에 대해 고마워하지 않는 것이 놀라웠다. 웨더맨은 베트남에 동정적인 젊은이들이었고 나도 그들을 존경하고 그들과 같은 마음이었다. 이들의 저항운동 방식은 거리로 나서 창문을 깨기도 했다. 베트남인은 단연코 이런 방식에 반대했다. 베트남인이 원한 것은 생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일종의 유희로 즐기는 미국 학생들을 비웃었다. 베트남인은 시위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나서 창문을 깨는 것이 전쟁을 원하는 자들에게 명분을 강화해준다는 걸 일찍이 이해한 것이다. 정말로 그랬다. 집권자에게 명분을 주는 전략은 희생을 부를 수 있다. 반대로 베트남인은 무덤 앞에서 조용히 묵념하는 여성들의 시위를 존중했다. 베트남을 위해 우리가 해야 했던 것이 바로 이런 행동이다. 여러분이 팔레스타인을 돕기 원한다면 여러분이 택하는 전략의 결과를 심사숙고하기 바란다. 좌파 진영 프로그램의 대중 결집력이 약한 문제에 대해 촘스키는 미국의 우파 급진 운동 ‘티파티’(TEA Party)(4)의 예를 들었다. 사람들은 ‘티파티’ 운동을 조롱하는 경향이 있다. 이 운동이 분명 터무니없이 웃긴 점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진짜 문제를 이야기한다. 이들의 말을 비웃기만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어쩌면 이 운동의 지도자들, 예를 들어 세라 페일린을 조롱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운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지난 30여 년간 고통받은 이들이다. 이 사람들은 고통받은 이유를 모른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이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대개 이런 내용이다. “저는 해야 할 일은 모두 했습니다. 백인 노동자이고 신실한 기독교인입니다. 조국이 원하는 대로 조국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그런데 왜 내 인생이 이렇게 된 것이지요? 왜 우리 조국을 바꾸려고 합니까? 왜 제가 소중히 생각한 가치들이 짓밟히게 내버려둡니까? 은행에는 달러가 넘쳐난다는데 왜 내게는 일자리가 없습니까?” 이것이야말로 현실적인 우려다. 표현은 서툴지 모르지만, 그 우려는 정당하다. 그들을 조롱거리로 삼는 것은 소용없다. 이 사람들은 좌파가 보듬어야 했다. 그런데 좌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한 참석자는 촘스키가 흔히 정치 분석과 관련해 합리적 방식을 중시하는 건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동예루살렘을 포함해 식민지를 확대하는 이스라엘의 행동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고, 또 미국 정부가 구두로는 규탄하면서 이스라엘 점령을 실제 지지하는 것은 아랍 세계와의 관계를 저해할 뿐이라고 비난했다. 미국의 이스라엘 지지는 매우 합리적이다. 이는 미국이 프랑스의 뒤를 이은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아랍 세계에서는 두 세력 간에 갈등이 존재했다. 그중 하나는 미국이 지지하던 무슬림 근본주의이고, 다른 한 세력은 서구 열강에 주적으로 여겨지던 세속화된 국가주의였다. 뭉뚱그려 사우디아라비아와 나세르 간의 대적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세속화된 국가주의를 파괴하고 미국과 연합한 무슬림 근본주의를 지원하고 강화했다. 워싱턴은 이스라엘을 군사적으로 지원했다. 전례 없이 이스라엘은 성역화됐다. 1970년 또 다른 중요한 기회가 생겼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원하는 대로 요르단이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을 짓밟았다. 이때 발생한 사건을 ‘검은 9월’이라고 한다. 시리아는 그 전에 팔레스타인을 수호하기 위해 이에 개입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미국은 동남아시아에서 곤경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편을 들며 개입하려는 시리아를 막기 위해 군사력 동원을 요청하며 이스라엘을 호출했다. 시리아는 뒤로 물러섰다. 미국의 동맹인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입지는 공고해졌다.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 지원은 당시 4배로 증가했고, 그런 식으로 지속됐다. ‘주변부 연합’이라 부르는 미국의 전략 틀은 아랍 지도자와 독재자를 기반으로 해 이 국가들과 석유를 통제한다. 따라서 이들 지도자는 자국 국민으로부터 보호돼야만 한다. 이를 위해 미국은 주변부 헌병 시스템을 이용했다. 아랍인을 죽이는 데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에 외곽 헌병은 비아랍계를 선호했다. 우선 이 주변부는 샤(왕 또는 지배자를 의미하는 페르시아어)가 통치하는 이란과 터키, 파키스탄으로 구성됐다. 1970년대 초기 이스라엘이 이 그룹에 합류하면서 헌병대의 일원이 되었다. 닉슨은 이들을 ‘정찰 경찰’(Cops on the Beat)이라고 불렀다. 지역 경찰이 있고 워싱턴에 경찰 본부가 있는 셈이다. 바로 이것이 이 지역을 통제했던 구조다. 1979년 샤 지배체제가 전복됐다. 미국이 이란을 ‘놓치게’ 되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할이 다시금 부상했다. 이 시기 이스라엘은 전세계에 걸쳐 미국을 위해 온갖 일에 수족 노릇을 했다. 미 정부가 과테말라 정권과 남아프리카 및 다른 여러 지역에 대한 국가 테러를 직접 지원하지 않게 미국 의회가 견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은 대만, 이스라엘, 영국(아마 프랑스도 포함해)과 같은 우방국의 네트워크를 이용해 온갖 추잡한 범죄를 저질렀다. 이런 면에서 이스라엘은 효율적이었다. 첨단 기술과 우수한 인력을 보유한 부강한 산업화 사회인 이스라엘은 미국의 하이테크 기업들의 투자를 끌어들였다. 이스라엘의 일부 군수산업은 미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일부 시설을 미국에 이전하기도 했다. 양국의 정보기관은 1950년대 이래로 사이좋게 일하고 있다. 미국 군수산업에 이스라엘과의 만남은 곧 돈이다. 미국이 이스라엘 정부를 돕기 위해 매년 수십억 달러를 쓰면 록히드마틴은 그 일부를 챙긴다. 록히드마틴이 이스라엘에 최신 폭격기를 팔면 사우디아라비아도 와서 말한다. “우리도, 우리도 필요합니다.” 록히드마틴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최소 기능의 군 설비를 판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늘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모르면서 수없이 사들인다. 결과적으로 이중의 이득을 본다. 그렇다면 팔레스타인은 미국에 무엇을 줄 수 있을까? 그들은 약하고 흩어져 있고 아무 자원도 없는데다 아랍 세계에 기댈 데가 거의 없다. 그들의 권리는 힘에 비례한다. 이스라엘은 강한 나라고, 덕분에 이스라엘은 유리하다. 즉, 이스라엘은 권리를 가졌다. 팔레스타인은 약하고 동맹 세력도 없다. 그래서 그들은 권리가 없다. 강한 자를 지지하고 강한 자만의 이익을 지원하는 것은 완전하게 합리적인 정치다.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으로 반미 세력이 생기고 아랍 국가에서 시위가 일어난다고 반박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문제될 게 없다. 민중을 억압할 독재 권력을 거느리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독재 권력에 무기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이것이 좋은 결정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런 정치가 비합리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는 그동안 남미와 동남아시아, 그 외 여러 국가에서 실행됐던 정치와 일관된다. 가끔 잘못되기도 한다. 제국주의적 계획 정치가 완벽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상황은 약간 달라졌다. 오바마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지나치게 우경화됐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편집증과 신경증, 극단적 국가주의의 바람이 불고 있다. 이로 인해 파괴적이고 비합리적인 행위가 예사로운 일이 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스라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지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다. 이스라엘의 무분별함이 미국 군부대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미 장군인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는 얼마 전 이스라엘의 강경한 태도가 미 군부대에 미치는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 미국 정책의 급변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미국은 국수주의적인 나라다. 그래서 다른 누군가가 미국의 용맹한 군인에게 위해를 가하려 할 때는 바로 저지한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매우 위험한 도박을 하는 셈이다. 촘스키의 공식 사이트(Chomsky.fr)와 번역•박지현 sophile@gmail.com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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