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 : 이정배(감신교신학대학교 조직신학)
*일시 : 2010년 3월 11일∼12일
*행사명 : 2010년 NCCK 에큐메니컬 선교정책토론회
*자료출처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kncc.or.kr
어떻게 우리는 ‘기후붕괴 원년’을 살게 되었는가?
- 그 극복의 단초를 고민하며 -
들어가는 글
새로운 천년을 맞이했다는 환호소리가 아직 귀에 쟁쟁한데 그로부터 벌써 강산이 변할 만큼 시간이 흘러갔다. 시간이 흐르면 달라지는 것이 생기기 마련이다. 흔히들 좋게 달라지는 것을 변화라 하고 나쁘게 되는 것을 변질이라 한다. 그렇다면 지난 10년간 지구 생태계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학자들의 입에서 기후변화란 말보다 ‘기후붕괴’ 란 말이 나오고 있으니 후자의 경우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지구 온난화로 사실적 종말위기에 노출되어 있다는 묵시가 울려 퍼진지 20년이 흘러갔건만 상황이 오히려 악화되었다는 반증이다. ‘시간이 촉박하다’(Die Zeit is draengt)는 한 예언자의 소리가 정치, 경제 논리에 파묻혔고 종교마저 그 소리를 경청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이 글이 읽혀질 즈음이면 덴마크 코펜하겐에서는 교토 의정서를 대체할 만한 기후협약체계가 조인되어 있을 것이다. ‘하나 밖에 없는 지구’의 생존을 위한 획기적 전환점이 마련되기를 우리 모두는 간절히 소망한다. 이런 ‘포스트 교토체제’ 성사 이면에는 실상 IPCC(유엔정부간 기후변화위원회)의 4차 보고서(2007년)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금세기 중 지구 온도 상승을 2도 이내로 막지 못하면 지구적 차원의 재앙이 불가피하며 이를 위해 즉각적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기후문제가 빈곤한 국가들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사실, 즉 남북갈등의 근본원인이 될 것이란 긴박한 분석도 중요했다. 20년 전의 경고가 눈앞의 현실로 다가온 것을 과학적으로 실감한 것이다. 이에 교토 의정서에 불참했던 미국은 물론 현재 이산화탄소 배출량 1위 국가인 중국 역시도 그간의 형평성 논거를 뒤로 하고 감축량을 제시한 상태이다. 이제 막 통합의 문턱을 넘어선 유럽연합 역시 환경과 인권을 자신들 헌법의 으뜸가치로 내세울 만큼 성숙해 있다. 인류는 지금 ‘리스크 감수’의 시대로부터 ‘리스크 예방’의 시대로의 대 전환을 꿈꾸며 ‘두 번째 계몽주의’, 제 2의 차축시대‘ 또는 ’영성의 시대‘를 경험하길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모든 촉각이 기후붕괴로 모아 질 2010년을 기후붕괴 원년이라 칭하며 새 시대를 예감하는 것은 이렇듯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녹색성장이란 이름하에 시대에 역행하는 개발 사업이 봇물 터지듯 강행되고 있다. 4대강 복원 사업이 반(反)생태적이라는 전문가들의 우려에도 이를 강행하는 정부 행태는 소탐대실의 결과를 반드시 낳을 것이다. 정부 차원의 근시안적 득을 위해 국가차원의 장래를 망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먼저 기후붕괴의 현실을 가능한대로 쉽게 소개하고 그렇게 된 원인을 분석할 것이며 셋째로 원론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해 보고 마지막으로 지면이 허락하는 한 기독교적 책임을 환기시키고자 한다.
1. ‘기후붕괴 원년’의 시대의 실상-불편한 진실
지금껏 알려진 바로 지구는 생명이 살 수 있는 유일한 행성임이 틀림없다. 생명이 거주할 수 있는 적절한 조건이 무구한 세월에 걸쳐 구비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4억만년 이래로 대기 중 산소 21%와 이산화탄소 0.03%가 항상성을 유지한 것이 생명이 존재할 수 있었던 으뜸조건이라 하겠다. 적당량의 이산화탄소가 없었다면 지구는 생명이 살 수 있을 만큼 따뜻하지 못했을 것이며 충분한 산소가 우주공간에 흐르는 방사능물질을 제어했고 생명체의 본질인 대사와 자기복제를 가능토록 한 것이다. 그러나 물질문명의 과부하가 걸린 시점에서부터 이산화탄소량은 급격히 늘어났고 산소비율은 반대로 감소되어졌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 비율이 2배로 증가하면 지구는 온난화로 또한 오존층 파괴로 생명이 살 수 없는 죽음의 공간이 된다는 것이 기본 상식이다. 최근 아마존 지역 森林의 기현상은 이런 현실의 도래를 예감케 하고 있다. 이산화탄소를 품고 산소를 뱉어야 할 나무들이 지나친 더위로 인해 산소대신 이산화탄소를 방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너무 많은 탓에 자신의 존재 유지를 위해 산소를 저장하고 오히려 이산화탄소를 방출하는 역순환으로 금세기 안에 지구온도는 6도까지 상승할 것이며 오존층 파괴는 가속화 될 것이다. 이런 현상은 바다 속에서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이산화탄소의 과유입이 산호초 막을 부식시켜 거지반 멸종에 이르게 했으며 그 결과 먹이사슬구조 자체가 붕괴되는 있다는 분석이다. 방사능 물질로 바다 전체가 오염된 것도 대단히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삼림이 죽고 바다가 생명부재의 공간이 되면 인간의 생명도 그 끝을 보일 수밖에 없음은 자명한 이치다. 그래서 생태학자들은 서서히 뜨거워지는 냄비위의 개구리로 현금의 인류를 비유한다. 서서히 다가오기에 자신의 종말을 감지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자는 취지에서이다.
이상의 내용을 우리는『6도의 악몽』이란 책을 통해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책은 인류가 자명하다고 생각했던 기후체계가 붕괴될 수 있다는 현실을 자각토록 돕는다. 지금의 상태로 인류가 지구를 방치한다면 금세기 안에 지구 온도가 6도 상승하여 생명부재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 IPCC 보고서 내용이다. 凍土에 묻힌 메탄의 폭발로 땅 생명체의 죽음은 물론 폭발로 생겨난 산성비로 지상 생물의 멸종 그리고 바다의 산소 부족, 영양결핍으로 해양 식물 역시 대멸종에 이른다는 것이다. 빠르면 2030년경에 인류가 마지막 데드라인으로 잡고 있는 2도 상승의 지경에 이를 수 있다는 것도 이들 판단이다. 지난 세월 동안의 에너지 사용결과만으로도 2030년 이면 과학이 밝혀낸 삶과 죽음의 경계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시간이 촉박하다 했고 즉각적 행동이 필요하다는 요청을 할 수밖에 없었다. JPIC 모임이 열렸던 1990년대를 기점으로 이산화탄소 발생량을 줄여가야 한다는 생태적 정언명령이 있었음에도 그 시점보다 오히려 배가 늘어난 것도 당혹감을 부가시켰다. 코펜하겐 기후협약의 필연성을 촉구하고 성사시켰던 2007년 IPCC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객관(결정)적 사실을 알려주었다. 산업혁명 전, 대략 1750년 경 280 ppm 이었던 이산화탄소량이 오늘날은 384 ppm에 이르렀고 향후 50년 안에 100ppm 이 늘어 날 것이며 만약 550 ppm에 달하면 21세기 중반 3도 상승은 불가피해 진다는 것이다. 2도 상승을 뜻하는 450 ppm을 유지하려면 이산화탄소 발생량을 더 이상 늘릴 수 없다는 것이 IPCC의 결론이자 충고였다. 3도의 온도상승이 인류로선 감당키 어려운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이들의 분석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해충들이 죽지 않아 농업에 치명적 영향을 미칠 것이며 바다가 산성화 될 것이고 북반구 빙하가 빠르게 녹아내려 동토에 묻힌 메탄의 위력을 서서히 경험토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지난 삶의 결과로 상승되는 기후는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더 이상의 이산화탄소 발생량을 허용치 않는 IPCC와 행보를 같이해야만 한다. 기후붕괴 원년을 살고 있다는 자각이야말로 현재를 사는 인류가 감당해야 할 전대미문의 책무일 것이다. 현재와 같은 증가추세로 가면 2070년 경 550 ppm에 이를 수 있는데 그 경우 한반도의 중북부 이상 지역은 심각한 가뭄을 겪을 것이며 심지어 아마존 강 유역까지 가뭄현상이 발생할 것이라 경고하고 있다. 한국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OECD 국가 중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는 상황은 우리의 앞날을 불안케 한다. 한반도 주변 기후변동이 전 지구적 상승폭에 비해 3배 정도 크다는 사실이 이런 우려를 증폭시키고 있다.인류가 6도 상승이란 최악의 상태를 운 좋게 면한다 하더라도 3도 상승은 물론 세계 해안선 지형을 획기적으로 바꿀 4도 상승의 개연성 또한 결코 작지 않다. 목표로 설정된 2도 상승에 머무르는 것 보다 어쩌면 그리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다. ‘불편한 진실’에 눈감고 욕망덩어리로 사는 한, 550ppm(3도), 700ppm(4도)수치는 금방 현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2도 이상의 온도 상승은 분명 기후 붕괴의 실상을 고지한다. 엄청난 화폐단위에 익숙해진 우리지만 2도와 3도의 차이를 결코 미미하게 생각해서는 큰 낭패가 될 것이다. 자연의 내재적 가치를 존중하고 자연과 인간의 인과적 관계에 깊이 관심하며 모두가 공감하는 삶의 방식을 채택하는 과정에서 임계점은 지켜질 것이고 창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불상사는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한국 정부는 이런 길에 道伴이 되지 못하는 듯하다. 금번 코펜하겐 기후 협약이 한국 정부의 知天命 못하는 반자연적 행태를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지구적 차원에서는 공멸의 길에서 공존의 길로의 비약이 이뤄지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과거의 날씨는 대자연의 행위였으나 지금 그것은 우리의 잘못된 행위의 결과임을 명심할 일이다. 오늘의 과학이 후 붕괴 시대에 하느님을 대신하여 인간의 갈 길을 예언하고 있음에 깊이 감사해야 할 것이다.
2, 기후붕괴 시대를 살게 된 이유-아메리칸 드림의 허상
인류가 전대미문의 기후붕괴 시대, 곧 사실적 종말의 위기를 경험하게 된 배경은 다각적으로 설명 가능하다. 자연을 이익 창출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기계론적 자연관의 출현, 그것에 정당성을 부여한 종교적 세계관 그리고 중세 공동체주의를 대신한 근대 철학자들의 개인주의 성향 등이 큰 틀에서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을 신(神)의 자기표현 공간으로 이해한 유기체적 관점이 사라진 것을 직접적 원인으로 이해한 심층생태학적 분석이 있는가 하면 세상에서의 부(이익)창출을 신적 은총으로 인식한 종교 개혁 신학의 반생태성을 지적한 흐름도 있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낭비로 보고 자연 지배를 신적구원을 이루는 길이라 여겼으며 시장을 하느님 섭리사상과 일치시켰던 근대사상의 근원적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18세기 중반에 있었던 과학혁명은 사실 이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엮어낸 사건이었고 이를 매개로 식민주의 담론의 생성 및 확산이 구체화되었으며 그로인한 생태계 파괴가 가속화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군대와 기업 그리고 국가가 삼위일체가 되어 아시아 및 아프리카 지역을 수탈했으며 자본주의를 전 세계로 이식, 확장시킬 수 있었다. 인간의 사적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를 이길만한 종교도, 철학도 부재했다. 그토록 완벽한 자기 부정의 종교체계를 갖고 있던 동양종교들 역시 자본주의 체제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오래된 미래’를 지닌 라다크 마을도 최근 자본주의 유입으로 망가지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들린다. 동양의 근대화는 바로 이런 식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기독교 선교 역시 이런 식의 근대화와 결코 무관치 않았다. 오늘날 생물 종의 다양성이 파괴되는 것은 서구적 획일화로 문화의 다양성이 지켜질 수 없었던 데서 연유한다. 세계 곳곳 토착지역에서 앗아간 녹색황금, 생물의 유전인자로 인해 세계 내 남북 간 갈등의 폭이 극도로 넓혀져 있다. 기후붕괴로 인한 최대 피해자들도 서구 근대화의 희생제물이 된 이들 지역 나라들이다. 환경과 가난은 그렇기에 언제든 새의 두 날개처럼 함께 얽혀져 있음을 명심할 일이다.
이런 자본주의는 미국에서 소위 ‘아메리칸 드림’이란 이름으로 만개되었다. 아는 대로 ‘아메리칸 드림’은 개인에게 주어진 ‘무한 기회’란 말과 애시 당초 같은 뜻이다. 해서 미국식 자유는 언제든‘자율’(Autonomy)이었다. 기독교 국가였으나 그들에겐 애당초 히브리적인 ‘어려운 자유’(Difficult freedom)개념이 부족했다.타인에게 의존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자유였고 그러자니 사적 재산이 있어야만 했다. 기독교의 축복 개념과 결탁된 현실적 실용주의는 ‘아메리칸 드림’의 골수였고 그것으로 개인의 자유를 꽃피울 수 있었다. 하지만 세습제도와 사회계급제도로 부터의 해방을 이뤘으나 그것은 자아도치 문화로 변질되고 말았다. 소비가 자신의 정체성(신분)을 반영하며 쾌락을 포기할 수 없는 가치로 여기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가난을 정부가 아닌 개인 탓으로만 돌리는 사회가 된 것 역시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구나 가난을 딛고 성공할 수 있다는 성공신화는 9.11 사태,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신기루 같은 허상으로 판명되고 있고 미국의 소비에 의존했던 세계 경제의 실상도 적나라하게 그 속살을 들어내는 중이다. 이런 사회이고 보니 미국은 기후변화 문제에 책임을 다할 수 없었고 사회복지 및 인권문제에 관한한 낙후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계는 아직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을 좆고 있다. 여전히 미국만을 바라보며 그들처럼 살고 먹고 입는 것을 발전이고 개발이라 믿고 있는 실정이다. 효율성이 여전히 최고의 가치인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최근 신조어로 ‘아메리쿰’(Americum)이란 단어가 회자된다. 이것은 미국적 생활방식을 하나의 에너지 단위로 생각하는 계산법으로서 한 ‘아메리쿰’은 국민소득 5000불 이상으로 소비성향이 급증한 인구 3억 5천 만 명 정도의 집단이 사용하는 에너지 총량을 뜻한다. 현재 북미, 유럽, 중국, 러시아 그리고 일본, 한국이 합쳐 하나의 ‘아메리쿰’으로 셈하여 지고 있다. 지금의 추세라면 2030년 까지 8-9개의 ‘아메리쿰’이 생길 수 있다는 추산이다. 그러나 6도의 악몽을 거듭 숙고해야 할 상황에서 ‘아메리쿰’의 욕망은 최대의 걸림돌이자 변수일 수밖에 없다. 30억 인구가 미국처럼 살려면 지구와 같은 행성 3개는 더 있어야한다는 말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렇기에 환경학자들은 미국처럼 되려는 ‘부자병’(Affuenza)을 인류미래를 위협하는 전염병으로 간주한다. 과도한 성장 중독의 폐해를 우리는 지금 두바이의 몰락에서 배워야만 한다. 사막 한가운데 엄청난 에너지로 대규모 스키장을 만든 두바이에서 ‘창조경영’이란 화두를 생각했다는 한국 대기업 회장도 있었다니 한국 미래가 염려된다. 그럼에도 3세계 국가들에게 미국과 같은 중산층 생활방식을 원천적으로 불허하는 것도 난제일 것이다. ‘아메리쿰’으로의 진입을 꿈꾸는 차 상위, 차차 상위 그룹(국가)들이 항존 하는 상황에서 말이다. 세계의 부유계층 7%가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절반을 내품고 빈곤한 계층 50%가 7%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현실에서 ‘욕망’의 문제는 실로 넘어야 할 산이다. 더더욱 기후붕괴가 선진국에서는 ‘아직’ 삶의 질의 문제이지만 후발 개도국의 경우는 절실한 ‘생존’문제인 것도 사안의 중요성을 각인시킨다. 중남미와 아프리카의 사막화, 남아시아 지역의 홍수 및 범람 등 기후붕괴는 거듭 말하지만 가난과도 직결되는 사안인 것이다. 이를 위해 환경폐해를 초래한 선진국들의 자발적 기금출현, 예컨대 국내총생산의 1% 정도를 빈국 생존(환경재앙)을 위해 지출하자는 안이 금번 코펜하겐 모임에서 토론된다니 맘껏 기대해 보자.
인류는 지금껏 욕망을 부추기는 아메리칸 드림(아메리쿰)을 추구해왔다. 철학과 종교가 자본주의적 욕망을 뒷받침하는 후견인 역할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프리드먼의 말대로 모두가 미국적 생활방식을 동경해왔다. 조만간 8-9개의 ‘아메리쿰’이 생길정도로 세계는 더욱 ‘평평해’ 지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세계 저편에선 더 많은 희생자들이 생겨날 것이고 6도의 악몽은 거듭 인류를 괴롭히며 현실이 될 것이다. 선진국에 비해 개도국 국가들의 인구 증가가 높은 것, 소위 ‘붐비는’ 세계가 된 것도 환경폐해를 가중시켰다. 2050년 경 지구상 인구가 90억에 달할 것이란 보도는 끔찍스럽기까지 하다. 이렇듯 ‘붐비는’사람들 모두가 ‘평평해’지려했기에 지구는 지속적으로 뜨거워졌고 앞으로도 뜨거워 질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구를 망가트리고 생태난민을 양산하는 기후붕괴시대를 살게 된 이유이다.
3. 기후붕괴 이후시대를 위한 노력-EU의 실험을 주목하며
환경 재앙을 예견한 선각자들은 일찍부터 인류문명의 방향을 근본에서 달리할 것을 주문해왔다. 인간중심의 신생대를 마감하고 생태대로의 새로운 출애굽을 선포한 신학자도 있었고 기후붕괴를 인류가 맞서 싸워야 할 또 다른 ‘세계대전’이라 명명한 학자도 존재했다. 지금 유럽은 통합헌법까지 만들며 환경과 인권을 기본가치로 하는 연합 체제를 만들고자 엄청난 실험 중이다. 자연의 유기체적 본성에 근거한 새로운 인간사회 이해를 EU국가들은 앞서 보았듯 두 번째 계몽주의로 명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생물권(생명권)에 대한 의식을 인류가 지녀야 할 첫 번째 의무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여 EU는 지금 ‘지구가 살아있는 공동체란 비전을 제시한 인류역사 최초의 정치기구’란 평가를 받고 있다. 아메리칸 드림이 ‘자율성’과 ‘무한이익’을 추구했다면 이제 막 면모를 드러낸 EU연합은 공동체성 그리고 자연과 인간간의 연대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재산권이 자율성을 확보하는 필수조건이었다면 생물권은 상호 소속감을 근본가치로 삼는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이들에겐 공감(Sympathy)이었다. 자연을 포함한 여타 타인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나 역시 어느 경우든 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일컫는다. 이런 공감은 선천적이면서도 후천적 인간 성향이기도하다. 하지만 이는 기독교 신앙이 가르치듯 일방적 이타성과는 같지 않다. 공감이란 인간 삶에 대한 연약성 내지 취약성에 대한 공동인식의 산물인 까닭이다. 이런 방식으로 이웃 및 자연의 복지를 극대화 시키는 것이 결국 자신에게도 득이 된다는 사실은 동서양을 막론한 보편적 지혜가 틀림없다. 인간 뿐 아니라 자연의 복지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될 시점에서 말이다. EU가 지금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란 자본주의적 에토스대신 칸트적 영구 평화의 비전을 앞세우기 시작했다는 것은 ‘새로운 출애굽’의 징표가 아닐 수 없다. 석유와 군사력만으로 초강국이 되려는 미국적 사고를 갖고서는 기후붕괴 이후시대를 바랄 수 없다. 금번 코펜하겐 기후협약에서 이들 EU의 역할과 비전이 인류의 보편적 꿈으로 확산되기를 재차 소망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좀 더 논리적이고 신학적인 대응은 다음 장의 주제이다. 여기서는 기후붕괴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실질적 방안을 생각해 볼 것이다. 먼저 ‘불편한 진실’의 진실을 언급하고자 한다. 엘 고어의 책 제목이기도 한 이 말은 기후붕괴 시대에 마음에 깊이 담아 두어야 할 개념이다. 눈앞의 기후붕괴는 객관적 사실로서 진리인 바, 그것을 숙지하며 사는 과정은 불편해 질 수밖에 없다. 사는 방식 자체를 달리하고 욕망하는 주체의 강도를 약하게 하며 소유가 아닌 존재에로의 가치 지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시회에서 욕망의 흐름을 거슬러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렇기에 ‘불편한 진실’의 진실이란 모두가 기후붕괴를 말하지만 누구도 그에 적합한 삶의 방식을 채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환경문제를 논하는 식자들의 우환과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에겐 공감이 필요하고 더불어 사는 노력이 있어야만 한다. 더 이상 우유부단, 임시변통, 미봉책 그리고 미루기가 통하던 시대가 끝났음을 선언해야만 하는 것이다. 홀로 갈 수 없는 길을 여럿이서 함께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전제하에 필자는 세 가지 방향에서 기후붕괴 이후시대를 희망하는 삶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우선적으로 세계적이며, 보편적인 포괄적 도덕성을 갖고 자/타간, 인간/자연간의 사이를 잇는 교랑적 삶을 살아야 한다. 이 경우 보편적 포괄적 도덕성이란 ‘간접적 나쁜 행위’(Cold evil)에 대한 인식이다. 대부분 선량한 시민은 환경파괴에 직접적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다. ‘직접적 나쁜 행위’(Hot evil)에 가담하는 경우는 개인은 극히 예외적이다. 그러나 일상에서 SUV 차량의 증가, 제 3세계를 착취하는 나이키 등 유명 브랜드 선호 그리고 삼림 훼손과 원주민 축출을 부추기는 육류소비 등은 간접적 나쁜 행위로서 인식되어야만 한다. 어는 학자는 비행기 여행까지 자제해야 할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일상 삶에서 탄소배출량을 셈하며 사는 생태시민들도 생겨나는 중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인과관계가 직접적이지 않고 멀기에 ‘Cold evil'에 대해 죄책감이 거의 없다. 하지만 불편한 진실을 감수하려는 사람들의 도덕성은 여기까지 이르러야 마땅하다. 소비(Consumption)를 통해 자율성을 확인하려는 시도는 사실 죽음의 본능(타나토스)을 사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간접적 나쁜 행위‘란 범주를 통해 ’이메리쿰‘ 단위에 속한 5%의 인류가 세계 에너지 1/3을 사용하는 현실을 통렬하게 성찰할 일이다.
다음으로 기후붕괴가 지금 당장 생존의 문제로 이어지는 경우를 생각해야만 한다. 생태와 가난의 문제를 함께 생각하자는 말이다. 앞서도 말했듯 목하의 기후변동은 지금껏 풍요를 누렸던 1세계 국가들의 탓이었다. 부유한 서구의 잘못으로 가난한 이웃들이 지금 집단살해의 위협 앞에 노출된 것이다. 미국인 한사람의 소비량이 케냐인 32명의 그것과 같다는 것이 오늘의 진실이다. 개발도상국들이 이런 소비량을 따라 잡고자 한다면 에너지 소비량은 지금보다 11배 정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후협약은 개도국의 이런 욕구를 잠재울 수밖에 없다. 그리 되려면 서구국가들의 자발적 희생이 선결되어야 마땅하다. 기후변동으로 심각한 생존의 문제에 노출된 국가들에 대한 기금과 기술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EU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기후협약이 체결된다면 서구는 생물권을 지킬 수 있을 것이며 개도국은 빈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리우환경회담 이후 첨예화 되었던 환경파시즘/환경테러리즘이라는 상호간의 무익한 논쟁은 종식되어야 마땅하다. 기후 온난화는 남쪽에 위치한 개도국에게는 재앙이지만 북반구의 서구 국가들에게는 호기라는 분석도 있다.그럴수록 빈국에 대한 배려는 당위일 수밖에 없다. 3세계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기후붕괴를 막을 수 있는 대승적 차원임을 인식하고 GDP 1%의 환원을 어찌하든 성사시켜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서구 국가들로부터 전 세계에 걸쳐 녹색기술의 실용화가 이뤄지는 시대를 기대해 본다. 주지하듯 코펜하겐 기후협약을 앞두고 주요국가들이 이산화탄소 감축량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EU는 1990년 대비 2020년까지 20% 감축을,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던 일본과 러시아는 25% 그리고 미국은 2005년도 대비 2020년 까지 17% 또한 중국 역시도 애매한 기준이지만 목표치를 정해 두었다. 이런 감축량의 실현은 현실적으로 녹색 기술의 덕으로 가능하다. 실제로 미국과 중국은 오래전부터 청정에너지 개발을 위한 경쟁체제에 들어갔다. 이들 두 나라는 이산화탄소 배출량만 많은 것이 아니라 청정에너지 기술도 독보적으로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여타 국가들의 상황도 이와 크게 다들 수 없다. 쓰레기를 버릴 녹지도, 물고기를 잡을 바다도 그리고 벨 수 있는 숲도 없어진 상황에서녹색(Green)기술은 불가피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는 대안인 것이다. 흔히들 자전거와 빨래줄을 세상을 살리는 좋은 물건으로 꼽는다. 청정에너지 개발이란 이런 차원에서 일어나는 친환경산업의 일환이다. 더러운 연료 시스템 대신 태양력, 풍력, 지열에 근거한 청정에너지 시장이 2050년 까지 10%정도만 형성되면 기후붕괴시대를 피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 가시적 한계도 있다. 녹색기술이 또다시 남북 간 빈부격차를 심화시킬 수 있고 그것이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만 가능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대안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자가용 없이 살 수 있는 삶의 환경을 만드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동시에 하이브리드 카를 만들 수 있다면 그것 역시 좋은 일이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최소한 시속 80-90 킬로미터로 주행하는 운전태도를 갖는 것이 시급하다. 사무실을 비운 채 몇 시간씩 불 켜두는 습관도 버릴 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항차 에너지 제로 상태인 주거환경에서 살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한국의 경우 흙집과 같은 전통 가옥 양식이 그에 해당될 듯하다. 자연과 감응하는 녹색기술이란 필자에겐 전통의 재발견 내지 재구축과 크게 다르지 않게 보인다. 단지 이런 녹색기술이 몇몇 서구 국가들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구하는 일에 사용될 수 있는 지에 대한 염려가 기우가 되었으면 좋겠다.
4. 기후붕괴는 신학적 주제이다
진화 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은 얼마 전 종교인들에게 ‘생명의 편지’를 보내왔다. 대자연을 향한 사랑을 인류 보편적 가치로 여기자는 제안을 기독교 목사들에게 하고 있는 것이다. 생물학자의 눈에 기독교가 창조신앙을 갖고 있음에도 자연가치에 대해 눈뜨지 못하고 있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영혼구원에만 매달리는 현실 교회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기독교란 성립 초기부터 창조론과 성육신이 결코 둘이 아니었다. 반(反)생태론자로 알려진 어거스틴 조차도 창조론과 성육신 사상을 별개로 보지 않았다.하느님이 나사렛 예수의 인격만이 아니라 우주 자연 속에 육화되었다는 것이 성서전통이었다.그래서 자연을 하느님 몸의 비유로 보자는 견해(멕페이그)도 생겼고 생태대로의 비약을 위해 이제는 성서보다는 자연에 집중하자는 급진적 입장(토마스 베리)도 등장했다. 성서와 자연이 하느님 계시의 장소로서 상호 대립되지 않았다는 것이 기독교의 본래성임을 재삼 숙지하자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를 세상 저편으로 보는 구속의 종교로서가 아니라 자연을 초월의 빛이 현존하는 공간으로 보는 창조 중심의 기독교로 확장되기 위함이다. 이런 맥락에서 생태여성학자 멕페이그는 기후붕괴를 초래한 지구 온난화를 신학적 과제로 인식할 것을 촉구했다.기후 붕괴는 하느님 몸의 붕괴이자 성령의 탄식이며 결국 그리스도의 구속활동을 무력화 시킬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하늘을 향하던 교회에게 그 시선을 땅으로 끌어 내릴 것을 주문했다.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기후 붕괴 현실을 직시하며 굶주린 이웃을 돌보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만나는 기독교적 방식임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해서 교회를 ‘보편적’ 교회라 고백할 때 그것은 오늘의 의미로 생태적이란 말과 다를 수 없다. 왜냐하면 생태적이란 일체적((Ecumenical)이며 동시에 경제적(Economic)인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편적 교회를 생태적 교회라 할 때 교회의 본질적 의미가 더욱 분명해 질 수 있다. 생태적 교회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경제, 곧 먹고사는 현실 문제, 다시 말해 지구 살림살이와의 유관(有關)하기 때문이다. 교회를 땅으로 끌어내려야 할 부인할 수 없는 근거인 셈이다. 그렇기에 생태적 교회는 더한층 지구적 법칙(Oikonomia)에 깊이 관심해야 마땅하다. 지구기후협약의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그런 교회가 단 몇 개라도 생겨나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보편적 교회는 오로지 이런 노력과 태도 그리고 관심을 통해 성립하는 것이라 믿고 싶다.
주지하듯 시편 114편에는 하느님이 배고픈 짐승들에게 먹이를 나눠주는 사려 깊은 ‘생태학적 경영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느님은 뭇 배고픔의 소리에 응하지만 항시 전체를 고려해야만 했던 것이다. 생태학적 교회 역시 오늘날 세계를 향해 이런 역할이 필요하다. 청지기 모델이 인간중심주의와 결별치 못한 한계를 지니지만 그래도 일용할 양식에만 뜻을 두고 세상을 호텔처럼 살지 않으며 미래 거주들을 위한 여지를 남기는 삶이라면 비판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물론 우주가 바로 ‘자신’이라는 인간관의 근본 전환이 생긴다면 이는 더더욱 쉽게 이뤄 질 수 있다. 하지만 향락문화의 구조 최하층에서 값싼 은총을 상품처럼 팔고 있는 현실 교회에서 이런 인간상이 세워지고 양육될 수 있을지 걱정스럽기만 하다. 그래도 걱정이 능사가 아니고 때가 되면 숨겨진 하느님 사람들이 들어 남을 믿고 옳은 소리로 양심에 호소하면 생태적 교회로의 전환이 이뤄질 것이다. 필자는 생태적 교회가 감당해야 할 핵심 과제를 생명문화 창출을 위한 생태적 경제모델을 준비, 확산시키는 일이라고 믿는다. 이는 공감(Sympathy)을 토대로 인권은 물론 생물권과의 공동체성을 성사시키려는 EU의 꿈과 상응하는 일이다. 생태학적 으뜸 공리는 ‘모든 것은 모든 것과 관계되어 있다’는 것이고 이 관계성은 ‘나눔’의 에토스가 근간이 될 때만 유지, 지탱될 수 있다. 기후협약이 거듭 난항에 부닥쳤던 것도 결국 나눔이 실현되지 못했던 까닭이다. 이점에서 기독교 경제학은 하느님 몸의 담론을 기존의 개방적 밥상 공동체 이미지와 중첩시켜 자신의 골격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몸의 기본적 욕구는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기에 이에 근거한 밥상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평등할 것이다. 하지만 몸의 욕구는 자본주의적 욕망과 다르며 공산주의적 평등성과도 같지 않다. 하느님 몸과 등가적인 절실한 몸의 욕구에 따른 경제행위는 어느 경우든 ‘몸’자체의 파괴를 허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공산주의는 그 이념적 실험을 역사상에서 실패했고 자본주의도 아메리칸 드림의 몰락과 함께 그 끝을 보이는 중이다. 우리 교회가 그들 이념적 끝자락에 다시 매달려 있을 이유가 없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참으로 중요한 것은 창조론과 성육신이 하나라는 종교적 시각에 기초한 ‘몸의 진실한 욕구’란 개념이다. 불행하게도 서구 중산층 인간의 욕망은 이런 ‘몸’의 욕구와 너무도 한참 멀어져 버렸다. 이들로 인해 인류 저편 가난한 이웃들의 기본적 욕구도 더 이상 현실이 되지 않고 있다. 타자의 얼굴, 신의 흔적들을 무시하고 짓밟아 버린 결과이다. 이는 또한 앞서 말한 ‘Cold evil' 곧 ’간접적 나쁜 행위‘에 대한 감각이 아직 부재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필자는 주기도문의 간구인 ’일용할 양식‘이 지구를 살리는 은총이라 부르길 주저치 않는다. 지속 가능한 정의, 곧 2도 이상으로 지구 온도가 상승치 않도록 일상을 의식하며 사는 성찰적 삶의 길은 이로부터 비롯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최소한의 물질로 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녹색은총의 덕택이다. 자본주의 욕망을 거스를 수 있는 힘은 우리 자신의 노력의 결과일 수만은 없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죄란 우리의 욕망을 애써 정당화하고 녹색의 수사학을 무책임하게 남발하면서 은총의 실상을 거부하는 일이 될 것이다. 녹색성장이란 미명하에 그린벨트를 마구 훼손하고 4대강 사업에 올인 하는 한국 정부가 바로 그 실상을 보이고 있다. 금번 코펜하겐 기후협약의 결과가 한국 정부의 기본 정책을 재고하는 기회로 작용하기를 재차 바란다. 한국도 상당한 양의 이산화탄소 감축국가로 선정될 공산이 너무도 큰 모임이 아니던가? 아프리카 국가들조차 발생량을 줄이겠다는 약속을 공공연히 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