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 : 장윤재(NCCK 신앙과 직제위원, 이화여대 기독교학부 교수)
행사명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앙과직제위원회 주최 '에큐메니칼 신학 토론회 - WCC에 대한 오해와 이해'
일시 : 2010년 3월 25일
자료출처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kncc.or.kr
행사명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앙과직제위원회 주최 '에큐메니칼 신학 토론회 - WCC에 대한 오해와 이해'
일시 : 2010년 3월 25일
자료출처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kncc.or.kr
WCC 에큐메니칼 운동의 사회 · 윤리적 조명
- 한국교회가 해야 할 과제를 중심으로 -
들어가며
WCC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교회들의 친교다. 이 WCC가 전개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은 (1) 가시적 일치(visible unity), (2) 공동의 증언(common witness), 그리고 (3) 기독교적 봉사(Christian service)를 추구한다. 줄여서, 일치-증언-봉사를 추구한다. 필자에게 주어진 ‘WCC 에큐메니칼 운동의 사회 · 윤리적 조명’이라는 주제는 이 중에서 세 번째 ‘봉사’를 중심으로 WCC를 보아달라는 것이고, 이에 기초해 한국교회가 제10차 부산총회를 앞두고 준비해야 할 과제를 제안해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WCC가 제9차 포르토 알레그레 총회 이후 2007년 1월 중앙위원회의 결의를 거쳐 현재 개편 · 운영하고 있는 7개 프로그램의 구조를 가만히 살펴보면, ‘봉사’가 어떻게 ‘일치’ 및 ‘증언’과 긴밀히 연결되어 결국 ‘교회란 무엇인가’에 관한 깊은 신학적 성찰로 수렴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사실 봉사-증언-일치는 해석학적 순환구조 안에 있다. 우선 현재 WCC의 프로그램 구조를 살펴보도록 하자.
(1) WCC and the Ecumenical Movement in the 21st Century
(WCC와 21세기 에큐메니칼 운동)
- Ecumenical vision of the WCC
- Global platform for theology and analysis
- Relationships with member churches
- Partnership with ecumenical organizations
- Youth in the ecumenical movement
- Women in church and society
(2) Unity, Mission, Evangelism and Spirituality
(일치, 선교, 전도, 그리고 영성)
- Called to the one church
- Spirituality and worship
- Mission and unity
- Just and inclusive communities
(3) Public Witness: Addressing Power, Affirming Peace
(공공의 증거 : 권력에 집중하며 평화를 증언하기)
- Overcoming violence
- Justice and accountability
- Human rights
- Churches in the Middle East
- Palestine and Israel: EAPPI
- Poverty, wealth and ecology
(4) Justice, Diakonia and Responsibility for Creation
(정의, 섬김, 그리고 창조세계에 대한 책임)
- Ecumenical solidarity and regional relations
- Migration and social justice
- Faith, science and technology
- Climate change and water
- Health and healing
- HIV/AIDS Initiative in Africa (EHAIA)
(5) Education and Ecumenical Formation
(교육과 에큐메니칼 편제)
- The Ecumenical Institute at Bossey
- Ecumenical lay formation and faith nurture
- Ecumenical theological education
- Scholarships
- Library and Archives
(6) Inter-Religious Dialogue and Cooperation
(종교간 대화와 협력)
- Strengthening inter-religious trust and respect
- Christian self-understanding
- Accompanying churches in situations of conflict
(7) Communication
(커뮤니케이션)
프로그램 (1)은 세계의 상황과 교회의 지형 변화 속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포괄적으로 제시하자는 것이고, (2),(3),(4)가 1910년 에딘버러에 기원을 둔 ‘세계선교’(World Mission), ‘신앙과 직제’(Faith & Order), 그리고 ‘삶과 일’(Life & Work)이라는 전통적인 세 강줄기를 표현한 것이며, 여기에 1907년 로마에 뿌리를 둔 (5) 신학교육이, 그리고 최근 많은 중요성을 인정받는 (6) 종교간 대화가 가세한 모습이다.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이 구조개편 이후 과거 ‘정의, 평화, 창조’(JPC) 안에 있던 이른바 최첨단(cutting-egde) 이슈들이 여러 곳으로 분산되어 흩어졌다는 점이다. 즉 ‘경제정의’, ‘생태보존’, ‘인종차별주의와의 싸움’, ‘원주민’, ‘달릿’, ‘장애인’, ‘청년’, ‘여성’ 등 과거 JPC의 중심을 이루던 이슈들이 자기네끼리 뭉쳐있지 않고 (1)~(4)에 골고루 분산되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개편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사회참여(봉사)가 결코 교회의 하나됨(일치) 및 복음의 증언(선교)과 별개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더 나아가서는 ‘봉사’가 ‘일치’와 ‘선교’를 자극하여 더욱 심오한 일치와 선교의 신학을 이끌어내기 위함이다.
예를 들어보자. 디나반두 만찰라(Deenabandhu Manchala)에 의하면, 세계화의 영향으로 이주(migration)가 보편적 현상이 되었다. 그 결과 오늘의 유럽 교회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유럽인들의 교회보다 더 큰 아프리카 이주자들의 교회가 유럽 안에서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주 노동자 공동체가 유럽 교회의 성격을 바꾸고 있다. 유럽 교회가 다문화 교회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은 유럽의 교회로 하여금 교회의 본질과 목적에 관해 다시 묻게 하였다. “일치, 일치”를 이야기했는데 변화된 상황에서 진정한 일치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나아가 변화된 상황은 선교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끝도 없는 이주자들의 행렬은 단순히 나그네들을 환대하는 차원(자선)을 넘어 그들을 고향에서 내모는 세계화의 문제(‘정의’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선교가 단순한 응급처방(ambulance service)이 아니라 성서에 기초한 정의로운 경제체제를 옹호(advocacy)하는 차원으로 격상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렇게 ‘봉사’의 영역이 ‘일치’와 ‘증언’에 도전하고 새로운 교회론과 선교론을 내놓도록 자극한다. 이주자에 대한 봉사는 결국 어떻게 진정으로 공의롭고 포용적인 교회 공동체를 이룰 것인가의 문제로 귀착된다. 그래서 "Just and Inclusive Communities"라는 프로그램이 프로그램 (2) Unity, Mission, Evangelism and Spirituality(일치, 선교, 전도, 그리고 영성) 안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WCC의 변화는 기계적으로 일치, 증언, 봉사를 나누어 생각하는 우리들의 습속에 도전한다. 각각의 것에 집중하느라 전체적 유기성을 소홀히 하는 소위 ‘전문가’들의 게으름에 일침을 놓는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사회 · 윤리적 측면은 신앙과 직제(faith & order) 그리고 선교와 전도(mission & evangelism)에 새 영감을 공급하는 전위대다. 참여와 봉사는 교회가 말해온 일치, 화해, 사랑, 환대, 포용 등의 개념을 오늘의 상황 안에서 재정립하도록(recontextualize) 요청한다.
그렇다면 현재 WCC는 어떤 사회 · 윤리적 프로그램에 집중하고 있는가? 그것들은 우리에게 어떤 신학적 · 교회론적 · 선교론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중동 평화
우선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문제부터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전통적인 에큐메니칼 사회참여 프로그램이 집중되어 있는 (3) Public Witness: Addressing Power, Affirming Peace(공공의 증거 : 권력에 집중하며 평화를 증언하기)를 자세히 보면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중동 관련 프로그램이 "Churches in the Middle East"와 "Palestine and Israel: EAPPI" 등 두 가지나 된다는 점이다.
란잔 솔로몬(Ranjan Solomon)과 마누엘 킨테로-페레즈(Manuel Quintero-Perez)에 의하면, WCC는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문제를 더 이상 유럽 혹은 북미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의 문제로 보고 있다. 특히 남반구(Global South)가 이를 자기의 문제로 인식하고 참여하지 않는 한 해결책이 없다고 보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지금 거룩한 땅은 불의의 땅이 되었다.”(Holy land has now become land of injustice) 그러면서 한국교회를 포함한 세계교회가 ‘약속의 땅’의 문제, ‘반유대주의’(anti-Semitism)의 기원과 현황,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의 외국 피신으로 인한 기독교인의 공동화(空洞化) 문제, 매년 5월 29일~6월 4일로 선포된 팔레스타인 평화주일 지키기, 이념적 선전 수단으로 전락한 성지순례 관광의 문제, 구호적인 화해가 아니라 역사적인 정의의 실현 가능성, 그리고 ‘카이로스 문서’(Kairos document)에 대한 연구와 지지를 진지하게 검토해 줄 것을 당부했다. 사실 한국교회는 중동 교회에 빚지고 있다. 만약 이번 10차 총회가 한국의 유력한 경합지였던 시리아로 유치되었더라면 세계교회는 앞으로 훨씬 더 중동의 평화 문제에 집중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아쉬움을 안고 이 문제의 담당자들이 얼마 전 한국교회를 방문했었다. 분단된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일해 온 한국교회가 이 문제에 대해 다른 어느 문제보다 깊은 관심과 연대를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총회 준비는 이렇게 시작된다고 본다.
에큐메니칼 평화회의
그런데 ‘평화와 화해’ 문제는 10차 부산총회의 유력한 총회주제 후보이기도 하다. WCC는 한국교회도 열심히 참가한 ‘폭력극복 10년’(DOV, The Decade to Overcome Violence 2001-2010) 운동이 올해로 끝남에 따라, 이것을 마무리하는 ‘추수 축제’(harvest festival)로서 ‘국제 에큐메니칼 평화회의’(International Ecumenical Peace Convocation, 이하 IEPC)를 내년 5월 17-25일 자마이카 킹스턴에서 준비하고 있고, 여기서 발표할 에큐메니칼 평화선언을 기초하고 있다. 킹스턴 평화회의는 평화에 대한 입체적이고 포괄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어 우리의 주목을 끈다. 그것이 강조하는 평화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측면의 평화다. (1) 공동체 안의 평화(Peace in the Community): 인간 공동체 안에서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기타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파괴하는 폭력의 문화 근절하기; (2) 땅과의 평화(Peace with the Earth): 생태적 위기 앞에서 창조세계의 청지기 되기; (3) 장터에서의 평화(Peace in the Marketplace): 부와 가난, 성장과 지속가능성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전제들을 극복하기; 그리고 (4) 민족들 사이의 평화(Peace among the Peoples): 민족 간, 인종 간, 그리고 지역 간 갈등을 해결하여 평화 이루기. 말하자면 평화에 대한 ‘4D’적 접근이다.
그런데 문제는 킹스턴 평화선언 초안의 내용이 대단히 실망스러운 것이었다는 점이다. “하나님께 영광, 땅 위에 평화”(Glory to God and Peace on Earth)라는 부제가 붙은 이 초안의 정식명칭은 “정당한 평화에 대한 에큐메니칼 선언”(Ecumenical Declaration on Just Peace)이다. 여기서 "Just Peace"를 필자가 ‘정의로운 평화’라고 번역하지 않고 ‘정당한 평화’라고 번역한 것은, 실제로 이 초안의 내용이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정의에 기초한 평화’(peace based on just)라는 의미의 ‘정의로운 평화’(just-peace 혹은 justpeace)가 아니라, 평화교회로 알려진 메노파교회(Mennonite Church)가 ‘정당한 전쟁’(just war) 이론에 대한 반대로 전개하는 ‘정당한 평화’(just peace) 이론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10년 동안 세계교회가 전개한 ‘폭력극복 10년 운동’의 성과를 한 줄도 언급하지 않고 있고, 또한 한국과 중동의 교회가 큰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전개한 평화와 화해운동의 열매에 대해서도 한 마디 언급도 없는, 이 ‘국적불명’의 에큐메니칼 문서에 대해 필자를 포함하여 통합 측 13명의 신학자가 강력한 비판과 포괄적 대안을 담은 문서를 작성하여 WCC에 보낸 상태다. 열심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곳이 세계무대다. 지난 2009년 12월 4-6일에는 강원도 화천 비무장지대에서 킹스턴 평화대회의 담당자인 조나단 프레릭스(Jonathan Frerichs)도 참석한 가운데 핵무기 없는 세계를 위한 국제협의회가 열렸고, 여기서도 앞으로 DOV 이후 WCC의 평화운동의 방향에 한국교회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기 위해 “핵무기 없는 세계평화를 위한 화천 에큐메니칼 요청”(Hwacheon Ecumenical Call for World Peace Without Nuclear Weapons)을 채택해 보내기도 했다. 부산총회 준비는 이렇게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고 본다.
사실 부산총회를 앞두고 한국교회가 시급히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는 총회주제 선정에 있어서 한국교회의 목소리를 잘 내는 것이다. 불행히도 지금 세계적으로는 JPIC 이후 에큐메니칼 운동에 큰 영향을 끼칠 새로운 신학운동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날 에큐메니칼 운동의 패러다임은 더 이상 "global initiative → local response"가 아니라 "local initiative → global response"로 변화했다. 한국교회는 오늘의 위기의 세계 속에서 분명한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정립하고 이를 아시아 교회와 대화하는 가운데 세계교회 앞에 고백하고 제안할 때가 되었다. 2013 부산총회는 이를 위해 더없이 좋은 기회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른 기회를 찾기 힘들지도 모른다. 한국교회는 10차 총회주제 선정에 있어서 주도력을 발휘했으면 한다. 이를 위해 먼저 WCC 회원교회의 에큐메니칼 신학자들이 모이고 이를 점차 교파를 초월해 확대해 나가면 좋을 것이다.
가난-부-생태
다음으로 살펴볼 WCC의 중요한 사회 · 윤리적 프로그램의 하나는 경제정의이다. 사실 WCC는 제9차 총회에서 경제의 문제가 신앙의 문제이며, 경제적 불의에 대한 관심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정당한 신앙적 관심사임을 명시했다. WCC 안에서 오랫동안 경제정의의 문제를 대변하며 지난 9차 총회에서 AGAPE 문서를 이끌어낸 주역이기도 한 로가테 무샤나(Mshana)는, 현재 그 문서의 후속작업으로 “가난, 부 그리고 생태”(Poverty, Wealth and Ecology, PWE) 프로그램을 전개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아프리카(2007년)-남미(2008년)-아시아(2009년)-유럽(2010년)-북미(2011년)를 거쳐 (이 과정에는 특히 청년과 여성의 참여가 강조되어 있다) 2011년 킹스턴 평화회의에 합류한 후 2013년 부산총회로 그동안의 성과와 새로운 전망을 가지고 올 전망이다. 탄자니아 출신의 경제학자인 뮤샤나는 지난 월가의 금융위기 때 아무 목소리도 내지 못한 교회에 대한 실망을 넘어 아예 금융시장의 투기판에서 큰돈을 날린 몇몇 유럽 교회들을 보면서 이제 교회가 세상의 소금이 아니라 체제의 한 부분이 되었음을 개탄한다. 그리고 이제 빈곤선(poverty line)의 문제만이 아니라 탐욕선(greed line)의 설정이 중요한 신학적 문제가 되었다고 제안한다. 즉 어디까지가 인간의 탐욕추구를 허용할 수 있는 한계선인지 교회는 그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제기하는 이 탐욕선의 문제는 사실 매우 신학적이고 윤리적이며 심리적이고 경제적인 문제이다. 결국 이 문제는 영성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될 것인지 아니면 물신의 교회가 될 것인지를 가늠하는 중차대한 교회론적 문제이기도 하다.
PWE 과정에서 특히 강조되는 것은 ‘정의’(justice)이다. 삭개오의 이야기에서처럼 ‘자선’이 아니라 ‘정의’가 중요함을 강조한다. 삭개오는 자신이 빼앗은 것의 4배를 배상하겠다고 예수께 약속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회개가 낳은 열매이며, 이런 점에서 삭개오의 이야기는 ‘값싼 은혜’의 이야기가 아니라 ‘값비싼 은혜’의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이른바 ‘번영의 복음’(gospel of prosperity)에 심취한 한국교회는 WCC가 추진하고 있는 이 PWE 과정에 대해 깊이 돌아보아야 할 때다. 8차 하라레 총회에서 AGAPE 과정이 시작되어 9차 포르토 알레그레 총회에서 그 문서가 채택될 때 굉장한 소란과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북반구 교회의 반발이 컸다. 한국교회는 AGAPE의 후속작업으로 진행되는 PWE 결과에 대해 2013년 부산에서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교회마저 부익부, 빈인빅으로 양극화된 모습으로 우리는 어떻게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을 맞이할 것인가?
부산 총회 주제와 관련해 무샤나 국장은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바울서신 로마서 12:1-2절의 내용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지나가는 이 시대를 본받지 말라고 했다. 그것에 순응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교회는 체제의 한 부분이 되었다. 아니 이 체제 안의 삶을 누리고 있다. 그는 묻는다. 과연 교회가 ‘그리스도의 대안’(alternative of Christ)을 살 수 있겠느냐고. 9차 총회에서 “하나님, 당신의 은혜 안에서, 세상을 변혁시키소서”(God, in your grace, transform the world)라고 했다면 10차 총회에서는 그 변혁의 방향, 그 변혁의 대안이 무엇인지 묻는 것도 좋겠다고 제안한다. 가장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혹은 물질적인) 문제를 다루는 책임자의 입에서 가장 신학적이고 교회론적인 (혹은 영적인) 제안을 들으리라곤 기대하지 않았었다.
기후정의
이제 마지막으로 현재 WCC가 전개하고 있는 사회 · 윤리적 프로그램 가운데 중요한 것 한 가지만 더 언급하겠다. 앞선 언급한 IEPC와 PWE 프로세스와 긴밀히 연관된 것이지만 그것은 기후변화 및 물(climate change and water)과 관련된 프로그램이다.
WCC의 기후변화 관련 프로그램은 1988년에 시작되었고, 1990년 서울에서 열린 IPIC 대회에서 기본방향이 설정되어 오늘까지 이어졌다. 구일레모 커버(Guillermo Kerber)는 이 프로그램의 핵심어가 ‘기후정의’(climate justice)라고 강조한다. WCC는 처음에 기후변화(climate change)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나 2006년부터 기후정의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이렇게 WCC가 기후변화를 정의의 문제의 하나로 간주하는 이유는 기후변화에 가장 적게 기여한 남반구의 가난하고 힘없는 공동체들이 지금 가장 큰 피해를 당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들에게는 이런 급속한 변화에 적응할만한 아무런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기후변화에 대한 대처는 단순한 행동 프로그램이 아니라 우리의 자연과의 관계, 경제 정책, 소비, 그리고 생산 및 발전에 생각에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회개(metanoia)의 문제라고 WCC는 인식한다. 그러니까 기후정의의 문제 역시 우리 시대 가장 중요한 영성의 문제인 것이다.
기후변화와 관련된 WCC의 프로그램은 2003년 이후 물 문제와 결합하기 시작하여 2005년에는 ‘에큐메니칼 물 네크워크’(Ecumenical Water Network, EWN)가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2009년에 접어들어서부터는 현재 물에 잠기고 있는 투발루(Tuvalu)를 포함해 태평양 지역교회 지도자들의 활발한 참여 속에 UN을 상대로 한 행동 프로그램을 펼치고 있다. 사실 졸지에 기후난민(climate refugee)이 된 투발루의 사람들은 이번 코펜하겐 기후협의회에서 강력한 예언자적 목소리로 눈앞의 이익에 먼 각국의 정치인들과 무기력한 교회를 질타했다. 한 투발루 지도자는 만약 교회가 당시 진행 중이던 협상안을 지지한다면 이는 예수를 은 30냥에 판 가룟 유다의 행위와 같은 행위가 될 것이라고 강력히 경고하기도 했다. WCC의 기후변화 작업반(working group)은 오는 5월 25-30일 투발루를 방문한다. 그리고 오는 12월, 코펜하겐에서 순연된 멕시코 회의에서 어떻게 기후변화에 대한 교회의 목소리를 낼 것인지를 협의한다. 한국교회의 진정한 총회준비는 이렇게 에큐메니칼 운동의 삶과 일에 함께 참여할 수 있을 때 참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사력을 다해서
이상에서 필자는 현재 WCC가 추진하고 있는 4가지 중요한 ‘봉사’ 프로그램을, 최근 필자가 스위스 제네바를 방문하여 가진 각 프로그램의 책임자들과의 인터뷰를 참고하여 소개하였다. 필자에게 주어진 주제가 ‘사회 · 윤리적’ 분야였기에 여기서는 프로그램 (1) WCC and the Ecumenical Movement in the 21st Century(WCC와 21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의 책임자 마틴 로브라(Martin Robra) 국장과 나눈 이야기는 생략한다. 신앙과 직제(Faith & Order)의 존 기버트(John Gibaut) 국장과의 인터뷰 역시 지면상 생략하며, 선교와 전도를 중심으로 하는 프로그램 (2)도 다른 발제자의 영역이므로 생략한다. 프로그램 (5) Education and Ecumenical Formation(교육과 에큐메니칼 편제)에서 에큐메니칼 신학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디트리히 베너(Dietrich Werner)는 연내 한국에서 에큐메니칼 신학교육 협의회 개최 가능성을 타진했다. 프로그램 (6) Inter-Religious Dialogue and Cooperation(종교간 대화와 협력)의 책임자인 샨타 프레마와다나(Shanta Premawardhana)와의 인터뷰 내용 역시 생략한다. 다만 교회와 에큐메니칼 관계(Church and Ecumenical Relations)를 맡고 있으면서 지난 9차 총회를 실질적으로 준비한 책임자 더글라스 키알(Douglas L. Chial)의 이야기 가운데 한 가지만 더 언급하려 한다.
키알은 10차 총회의 한국 유치가 결정될 때 WCC로서는 무엇이 가장 인상적이었던가를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그에 의하면 그것은 한마디로 한국교회의 초대장 안에서 느낄 수 있었던 “강한 하나됨의 느낌”(strong sense of togetherness)이었다. 9차 총회 유치를 위해 한국교회가 보낸 초청장과 이번 10차 총회 때의 초청장을 비교해보면 큰 차이가 난다고 그는 말했다. 이번에는 회원교회를 넘어 많은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서명이 들어갔다. 초대의 이유도 전과 달리 훨씬 신학적으로 매력적이었다고 한다. 중국교회와 일본교회의 지지도 크게 작용했다고 털어놓는다. WCC는 한국이 매우 독특한 상황을 대변하고 있음에 주목하고 있었다. 아시아의 국가이면서 인구의 4분의 1이 기독교인이고, 가장 높은 개신교 비율을 자랑하면서, 종교간 평화를 이루고 있고, 가톨릭과 복음주의자들과 오순절교회와 에큐메니칼과 정교회가 협력하는, 그래서 21세기 에큐메니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잠재력으로 가진 나라라고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계속해서 한국교회가 부산총회를 앞두고 해야 진정한 준비는 세계교회가 전개해온 다양한 ‘봉사’의 일들과 보조를 맞추면서 교회의 ‘일치’와 ‘선교’의 의미를 깊이 성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봉사’의 일들을 어떻게 하면 “ecumenicals, evangelicals, pentecostals, and orthodox”가 함께 협력해서 하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 안에서 앞으로 2013년까지 어떻게 에큐메니칼과 에반젤리칼과 순복음과 정교회가 함께 ‘기독교적 봉사’의 새 모습을 보여주느냐가 곧 21세기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의 미래 그 자체다.
한국교회는 이제 부산총회를 준비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 한다. 제네바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우리는 멍석만 깔아주면 생각은 너무도 안이하고 소극적 발상이다. 한국교회는 먼저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한국의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자원과 힘을 최대한 결집해야 한다. 하지만 성실하게 ‘노력’해야 한다. 세계교회의 흐름을 열심히 따라 열심히 배우고 겸손히 부족한 것을 채우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매력’을 발휘해야 한다. 한국이 가진 5천년의 문화전통과 짧지만 식민과 분단과 독재에 저항해 쌓아온 교회사적 전통의 매력으로 세계교회를 사로잡아야 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일을 ‘협력’해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혼자 달려서는 안 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오는 부산총회는 ‘혼자 몰래 먹기에는 너무 큰 떡’이라고 말하고 싶다. 모두가 나누어먹고도 12광주리 이상 남을 하나님 나라의 큰 잔치가 바로 부산총회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ecumenicals, evangelicals, pentecostals, and orthodox”가 협력하는 가운데 이 일을 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세계복음주의연맹(WEA)도 2014년에 한국에 온다고 하지 않던가. 한국교회는 능력-노력-매력-협력의 ‘사력(四力)’을 다해야 한다.
이제 우리 앞에는 죽을 힘[死力]을 다해 달려갈 일만 남았는데, 필자 생각에 달리기 전 먼저 해야 할 시급한 과제가 있다. 그것은 2011년 2월에 WCC 중앙위원회가 공식 준비위원회를 발족하기 이전에, 그리고 한국에서 공식 준비위원회가 발족하기 이전에라도, 이번 총회의 주제가 무엇이 되어야 할지 한국교회의 경험과 신학적 역량을 결집하는 것이다. 자기 집에서 들러리가 되지 않으려면, 지난 9차 총회 때 브라질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 총회의 주제와 내용에 대해 한국과 아시아의 목소리를 적극 반영하는 제안이 부지런히 준비되어야 한다. 이번에 제네바에서 만난 WCC의 프로그램 책임자들은 하나 같이 한국 교회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했다.
나아가며
WCC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지만 그 핵심은 ‘대화(dialogue)’이다. WCC는 서로 다른 배경과 역사와 교리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만나 그동안의 다툼과 분열과 상쟁의 역사를 회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가려는 ‘대화의 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주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는 교회만의 주가 아니라 세상의 주가 되신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신다(에베소 4:6). 따라서 WCC의 대화는 교회 안의 대화로 국한되지 않고, 타종교로, 인류 공동체 전체로, 그리고 모든 창조의 세계로 확장되어 나갔다. WCC는 분명 빈곤과 인권과 정의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사회참여’의 신학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정치적 해방으로 축소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구원을 결코 개인의 사후 영혼구원으로만 축소될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요한 3:16)고 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은 인간의 영혼만이 아니라 이 ‘세상’(cosmos), 즉 온 우주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주적 사랑이고 그의 사랑은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 이처럼 그리스도가 교회만의 머리가 아니라 온 세상의 주권자가 되시기에, 그가 다스리는 이 세상이 불의와 폭력과 생명파괴로 얼룩지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는 것이다. WCC가 해 온 교회의 ‘봉사’ 혹은 ‘공적 증거(public witness)’는 이와 같은 신앙의 표현이었다.
에큐메니칼의 반대는 에반젤리칼이 아니라 ‘섹테리안(secrtarian)’이다. ‘분파주의’ 혹은 ‘당파주의’는 자신의 특정한 신앙체험과 진리에 대한 이해가 마치 유일하고 보편적이며 최고의 것인 양 주장하는 태도이다. 그래서 에큐메니칼적인 시각을 결여한 교회는 복음을 협소하게 해석하여 스스로 끊임없이 분열하는 교회가 될 수 있다. 분파주의는 특정 교리를 절대화하고 보음을 ‘사유화’ 한다. 이에 반해 에큐메니칼 정신은 교파적 신앙고백의 부분성을 겸허히 수용하고 세계적인 지평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연합을 이루어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고전 12:25) 하려 노력한다. 이러한 에큐메니칼 운동을 자기 초월, 자기 비움의 행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에큐메니칼 운동은 해도 좋고 안 해도 그만인 운동이 아니다. 분열된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하나 되지 않은 교회는 세상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라는 것을 믿게 할 수 없다(요한 17:21). 교회의 하나됨은 교회의 교회됨을 위한 관건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경쟁적이고 개교회적인 양적 팽창의 시대를 끝내고 질적인 성숙과 내실화를 도모할 때다. 바로 이 질적인 성국과 내실화의 관건이 에큐메니칼 정신이고 운동이다. 그것이 21세기 한국교회를 살리고 재도약하게 만드는 발판이 된다고 믿는다. 2013년 WCC 총회의 한국 유치는 바로 그런 패러다임 전환을 향한 하나님의 새로운 초대이다. 이제 분파주의로부터 에큐메니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한국교회의 새 화두가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이런 복된 초대 앞에 과거의 오해와 편견과 상처와 아집을 다 털어버리고 인간의 지혜보다 높으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아직 한국교회가 가보지 못한 새 길을 믿음으로 달려갈 때다. 그리고 우리가 가는 길이 세계교회가 갈 새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