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신앙과 직제”(교회론) 및 “교회와 사회”(윤리)의 합류
나이로비(1975)의 JPSS는 밴쿠버(1983)의 JPIC로 이어지고, 이것은 곧 바로 서울 JPIC 세계대회(1990)로 연결되었다. 그리하여 1975년에서 1990년에 이르면 "IC"의 문제가 사회정의 및 경제정의 문제와 맞물려 논의되어야 하는 것이 정론으로 확립되기에 이른다. 밴쿠버로부터 서울 JPIC대회 사이에 나온 “신앙과 직제”의 공식문서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문서는 BEM문서(1983)와 하나의 신앙을 고백하며…(1991)인데, 이 두 문서 역시 교회의 사회참여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서울 JPIC를 계기로 “신앙과 직제”와 “삶과 봉사”는 매우 접근하였고, 서울 JPIC로부터 캔버라(1991)로 오면서 “생태신학”이 “경제정의”와 “세계적인 사회정의”와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그리고 산티아고 “신앙과 직제” 세계대회의 공식문서에서는 “증거”(Witness) 부분에 “값비싼 일치”(Costly Unity)문서가 전적으로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신앙과 직제” 역사상 이 두 운동의 합류가 가장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1992년부터 1996년 사이에 “신앙과 직제”(Unit Ⅰ)와 JPIC(Unit Ⅲ)는 연합연구를 통하여 세 가지 문서를 발표했다. 1993년 덴마크 뢴데(Ronde)에서 나온 “값비싼 일치”, 1994년 예루살렘 근교 탄투르에서 확정된 “값비싼 참여”(Costly Commitment), 그리고 남아공의 요한네스버그에서 빛을 본 “값비싼 순종”(Costly Obedience)은 이 두 운동을 가교(架橋)시키는 과정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길목들이다.
끝으로 하라레(1998)의 “WCC에 대한 공동의 이해와 비전”(Common Understanding and Vision of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 C.U.V.)은 WCC 헌장 제3항의 개정판에서 “신앙과 직제”와 "JPIC"(Unit Ⅲ)의 합류는 물론, 에큐메니칼 운동의 세 흐름 혹은 네 흐름의 유기적 통일성을 역설하고 있다. 모든 것이 세분화되고 상호 유기적 관계가 없이 고립되고 개별화되며 공동체의 해체를 경험하는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 "C.U.V."가 이와 같이 에큐메니칼 운동의 다양성 속에서의 통일성 그리고 유기체적 통전성을 지향하고 있는 것은 매우 적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교회론과 윤리학”, 이 둘은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있다. 향후 WCC의 과제인 JPIC는 말씀설교, 세례, 성만찬, 코이노니아, 사도적 전통과 성경, 신앙과 제자의 도 등 교회론적 주장들 없이는 바르게 실현될 수 없을 것이다. 선교와 기독교 교육 역시 “신앙과 직제” 운동 없이는 매우 부족할 것이다. 교회의 본질(what it is to be the Church)과 교회의 과제(what it is for the Church to do)는 불가 분리한 관계에 있다. 교회의 가시적 일치추구(요17: 21)와 JPIC와 세계선교와 전도(엡 1:10)는 서로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기독교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8. 1998년 하라레 WCC와 2006년 포르트 알레그로 WCC 이후
방금 위에서 이 글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신앙과 직제”운동이 “삶과 봉사”운동과 합류하는 경향이고, 하라레에서는 세 에큐메니칼 운동 혹은 네 에큐메니칼 운동(기독교 교육과 에큐메니칼 신학교육 까지 합하여)이 하나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향할 것에 합의하였다고 지적하였으니, 오늘날 우리는 WCC의 모든 에큐메니칼 운동의 흐름들이 하나의 강(江)을 이루어 흘러가야 한다고 하는 사실을 확실히 하여야 한다. 1993년 산티에고 데 콤포스텔라 제5차 신안과 직제 세계대회에서 출범하여 1998년에 나온 중간 결과물인 교회의 본성과 선교는 1983년의 BEM Text이래로 ‘신앙과 직제’가 작업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건으로서, 그 전반부는 교회의 본성(본질)론을 논하였고, 그 후반부는 교회의 선교(목적)로서 사도적 기능들과 “복음전도”와 “하나님의 선교”를 다루었다. 즉, “목적” 부분에서 “삶과 봉사”의 영역과 “세계선교와 복음전도” 영역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고 있는 것이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연구가 진행 중인 “하나님의 선교와 화해사역에의 참여: 교회들을 초대하기”와 “평화를 키워나가기: 폭력극복에 대한 신학적인 숙고” 등과 같은 신앙과 직제 문서 역시 “신앙과 직제” 운동과 “삶과 봉사” 운동의 합류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끝으로 덧붙여야 할 것은, 하라레 이후로 기독교 “포럼”이 교회일치를 위한 전(前)단계로 등장하고 있다. 그것은 WCC를 해체하지 않으면서도 그리고 WCC를 여러 대화 파트너들 가운데 하나로 여기면서, 로마가톨릭교회, 복음주의 교회들, 오순절 교회들, 그리스도교 세계 연맹체(Christian World Communions), 각 나라의 교회협의회들과 기타 기독교 단체들과의 “포럼”을 시도하자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웁살라 WCC가 바라보았던 “진정으로 보편적인 에큐메니칼 협의회”(a genuinely universal ecumenical council)의 이상을 구현하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이제 필자는 ‘신앙과 직제’ 운동을 전제한 ‘삶과 봉사’ 운동 및 ‘세계선교와 복음전도’ 운동을 주장하면서 하라레로부터 포르트 알레그로를 거쳐 2013년 부산 WCC의 아젠다를 추측해 본다(물론, 앞으로 3년이 넘는 기간 동안에 모일 ‘WCC 중앙위원회’의 결의에 달렸지만). 1998년 12월 짐바브웨의 하라레에서 모인 WCC 제8차 총회는 “도시에 평화를” 캠페인과 관련된 노력들에 감동을 받고 교회가 힘을 합해서 세계적, 지역적 차원에서 폭력이 증가하고 있는 것에 함께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리하여 총회 대표들은 “폭력극복 10년: 화해와 평화를 일구어 가는 교회, 2001-2010”을 제안하게 되었다. 1998년 하라레 WCC에서 2001-2010부터 시작하기로 결의한 “폭력극복 10년”은 ‘경제적, 생태학적, 정치적 폭력’을 문제 삼고 있다. 이 운동은 JPIC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2001-2010까지 이어지는 UN의 “평화의 문화” 운동(the International Decade for a Culture of Peace and Non-Violence for the Children of the World)에 발맞춘 것이었다.
바로 이와 같은 운동이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통합 측)가 2002-2012년 까지 펼치는 “생명 살리기 운동 10년”의 배경이다. 그리고 2006년 포르트 알레그로는 이에 더하여 빈익빈 부익부를 가져오고 환경파괴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시장경제의 지구화(globalization of neoliberal market-economics)에 대한 문제에 더욱 부심하고 있으며, 아울러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 문제 등 생태학적 위기를 더욱 의식하고 있다. 따라서 부산 총회에서는 그 동안에 진행되어 온 신앙과 직제의 교회의 본성과 선교와 세계선교와 복음전도의 오늘날에 있어서 세계선교와 복음전도를 마무리할 것이고, 폭력극복 운동(생명의 신학 혹은 생태학적인 신학)과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에 제동을 거는 “AGAPE”(Alternative Globalization Addressing Peoples and Earth = 사람들과 지구를 위한 대안 글로벌화)운동을 계속 발전시켜 나갈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미 하라레 이래의 ‘포럼’ 성격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하여 지적하였거니와, 앞으로 열릴 부산 WCC 총회야 말로 외연에 있어서 종전의 그 어느 WCC 총회보다도 더 포괄적인 축제의 대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맺는 말: 에큐메니칼 교회의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공적인 책임수행
이상에서 필자는 ‘신앙과 직제’ 운동의 공식 보고서들에 나타난 ‘교회의 본질’에 대하여 그리고 ‘삶과 봉사’ 운동의 결과물들에서 발견되는 에큐메니칼 교회의 공적책임 수행에 대하여 논하였다. 그러면 오늘날 글로벌화 과정 속에서 주변화되고 소외되고 있는 인민들(빈익빈 부익부)과 창조 세계, 그리고 사사(私事)화되고 있는 교회들과 기독교 신학들을 오늘의 ‘하나님의 세계’(God's World) 한 복판에서 진행되고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케 하기 위하여 오늘의 세계교회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 우리는 ‘신앙과 직제’가 제시하는 교회의 본질에서 교회의 공적인 본성과 존재이유를 확인하였고, ‘삶과 봉사’에서는 에큐메니칼 교회의 공적책임 수행들에 대하여 논구하였다. 따라서 필자의 생각엔 우리가 이상에서 논한 ‘신앙과 직제’ 전통과 ‘삶과 봉사’ 전통이야 말로 오늘의 세계교회가 오늘의 글로벌 이슈들을 풀어나가는 데에 꼭 필요한 공동의 자산으로 판단된다. 우선 우리는 교회와 신학의 사사화를 극복하기 위하여 1. ‘신앙과 직제’가 추구해 온 교회의 일치추구에 유의해야 하고, 2. 오늘날의 공적인 글로벌 이슈들을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하겠다.
1. ‘신앙과 직제’ 운동이 추구하는 교회일치 모델
이제 우리는 경험적인 역사 속의 교회들과 불가 분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교회의 본질을 염두에 두면서, 그 동안 ‘신앙과 직제’ 운동이 교회일치 운동을 어떻게 전개하여 왔는가에 대하여 알아보자. ‘신앙과 직제’ 운동은 1927년 로잔에서 열린 제1차 세계대회로부터 1993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제5차 세계대회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때문에, BEM 문서와 더불어 교회의 본질과 선교(2005)는 장구한 전(前)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글은 잠시 교회일치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려고 한다. 아래의 교회일치추구의 약사는 WCC 총회 별로 제시될 것이지만, 실제로는 “신앙과 직제”의 연구 결과물들이 여러 복잡한 절차를 거쳐서 총회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것이다.
1948년 암스텔담 WCC 총회는 아직 비교 교회론적 차원에 머물면서, 교회들의 “주어진 일치”(a God-given unity)를 말했다. 이는 신약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교회요, 사도 신경이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고백하는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교회이다. 이와 같은 계시에 의하여 은혜로 주어진 교회(the Church)와 역사 속에 있는 경험적 교회들은, 구별은 되지만 분리는 될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관계처럼 결코 이분화 될 수 없다. 1952년 룬드 신앙과 직제 제2차 세계대회가 기독론 중심의 일치를 언급하였고, 1954년 에반스턴 WCC가 가시적 일치추구를 시발시킨 이래, 정식으로 가시적 일치추구가 방향 잡힌 것은 1961년 뉴델리 WCC 총회 때였다. 이 시기 동안에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일치추구의 중심이 기독론으로부터 삼위일체로 이동한 사실이다.
뉴델리는 “각 장소에 있는 모든 기독교인들”(all in each place)이 사도적 신앙과 복음, 세례와 성만찬, 코이노니아와 증거에 있어서 교파적인 정체성을 뒤로 하고 하나의 유기체적 공동체(organic union)를 지향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와 같은 일치추구는 우리가 추구하는(we seek) 가장 기본적이고 이상적인 일치추구의 모형으로서 1961년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요, 향후 이와 같은 일치모델은 계속하여 에큐메니칼 운동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일치의 모델로 남아 있게 된다. 하지만 1961년 WCC 총회 때에 동방정교회와 오순절 교회들이 정식 회원으로 가입하였고, 1962-1965년 사이에 제2 바티칸 공의회가 열렸으며, 성서연구의 결과로 신약성서 안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교회의 모습이 강조되면서, “화해된 다양성 속의 일치” 혹은 “교파 별 기독교 공동체들의 코이노니아”가 강조되었으니, 궁극적으로 교파들의 정체성을 해체시키는 뉴델리의 “유기체적 일치”의 이상을 바라보면서도, 그 도상에서 양자 간 대화를 통한 일치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미 지적한 대로 1961년 뉴델리와 제2 바티칸 이후 1960년대부터 시작된 양자 간 대화는 1970년대 이후 매우 활발하였다. 바야흐로 1991년 캔버라 WCC 총회를 계기로 뉴델리적인 “유기체적 일치”는 더 이상 추진되지 않은 경향이었고, 다양성 속의 코이노니아가 부각되었다. “코이노니아로서 교회의 일치: 은혜와 소명”이라고 하는 캔버라 진술은 교파들과 ‘교파별 세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의 정체성을 폐기시키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들 상호 간의 코이노니아 속의 일치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1968년 웁살라 WCC 총회는 교회들의 정체성과 연속성과 다양성을 허용하는 교회의 보편성을 부각시켰고, 1975년 나이로비는 교회들의 일치추구에 있어서 교회의 협의회성을 강조하였으며, 1983년 밴쿠버 WCC 총회는 가시적 일치추구의 요건으로 “사도적 신앙”과 “세례․성만찬․직제”, 그리고 “공동의 결의방법과 공동의 권위 있는 가르침”을 제시하였으니, 이 모든 교회일치 추구를 위한 이정표들은 모두 “주어진 일치”를 가시화시키는 바, “유기체적 일치”를 궁극적인 목표로 하는 것이다. 오늘에 이르기 까지 그리고 향후 “신앙과 직제” 운동은 이와 같은 “유기체적 일치”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비록, 그것이 약회되었고, 여러 다양한 일치 모델들 가운데 하나로 굳어졌지만 말이다.
특히, 우리는 “신앙과 직제” 운동의 금자탑과도 같은 BEM Text(1982)에 대하여 언급해야 한다. BEM Text는 1982년에 에큐메니칼 회원교회들의 다자간 수렴문서로서 에큐메니칼 교회론에 관한 것이다. 이미 여러 해 동안 회원 교회들로부터 논찬을 수렴하여 6권의 책이 출판된바, BEM 문서는 에큐메니칼 교회론으로서 반세기 동안의 신앙과 직제 운동의 결실이었다. 또한 그 동안 10년의 연구결과물인 하나의 신앙을 고백하며: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381)로 고백된 사도적 신앙에 대한 하나의 에큐메니칼 해석(1991)이 출간되어, 로마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를 아우를 수 있는 삼위일체 신앙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그리고 1993년 “신앙과 직제 제5차 세계대회”는 신앙과 삶과 증거에 있어서 코이노니아(Towards Koinonia in Faith, Life, and Witness)를 출판하여 사도적 신앙에 있어서 코이노니아, 세례․성만찬․직제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적 삶에 있어서 코이노니아, 그리고 복음전도와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서의 코이노니아를 그 대회의 전체 주제로 삼았으니, ‘신앙과 직제’ 운동과 ‘삶과 봉사’ 운동이 별거의 관계로부터 재연합의 관계로 돌입하였다. 이와 같은 재 연합은 JPIC를 향후 일세기 동안 세계교회의 공통의 과제임을 선포한 1990년 WCC 서울 JPIC 대회를 계기로 강화되었다.
그런즉, 1990년대로 접어들어, “신앙과 직제”와 “삶과 봉사” 운동이 합류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이 두 운동을 합류시키는 책자들이 나와, 오늘날 신앙과 직제 운동이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를 정향시켜 주었다. 1990년에 출판된 교회와 세상: 교회의 일치와 인류 공동체의 갱신, 1993년의 값비싼 일치, 1994년의 값비싼 헌신, 그리고 1995년의 값비싼 순종은 모두 이 두 운동의 합류를 지향하고 있다. 적어도 WCC는 ‘삶과 봉사’ 운동과 동떨어진 ‘신앙과 직제’ 운동이란 ‘값싼 일치’라고 하는 가치판단에 도달한 것이다. 이와 같은 합류의 경향은 이미 1993년 산티아고 신앙과 직제 대회 문서에서 확고하게 정향되었다.
끝으로 BEM Text를 뒤 잇는 BEM Text만큼 중요한 교회의 본질과 선교 역시 ‘신앙과 직제’ 전통과 ‘삶과 봉사’ 전통을 결합시켰다. 실제로 본 연구문서는 교회의 ‘본질’ 부분과 교회의 ‘사명’ 부분을 이분화하지 않고 긴밀하게 연결시키고 있으며, 말씀설교와 세례․성만찬 이외에 복음전도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와 같은 것이 교회의 본질 자체를 구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하겠다.
2. 오늘의 글로벌 이슈들의 도전에 대한 에큐메니칼 교회의 응전
1) 아가폐(AGAPE = Alternative Globalization Addressing Peoples and Earth) 운동
WARC(World Alliance of Reformed Churches = 세계개혁교회연맹)는 “아크라 신앙고백”에서 오늘의 글로벌 이슈를 ‘신자유주의와 환경파괴’로 보았다. 그리고 WCC의 삶과 봉사 전통을 잇는 JPIC는 2006년 11월 4일 알레그로 WCC 총회에서 ‘아가폐’ 문서를 선포하였는데, 이 문서 역시 WARC의 “아크라 신앙고백”과 대동소이한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는 앞에서 제시한 ‘신앙과 직제’ 운동을 통하여 밝혀진 ‘교회일치 모델’을 토대로 “아가폐” 운동이 추구하는 세계교회의 공적책임 수행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아가폐” 문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간단히 집고 넘어가려고 한다. 본 문서의 “서문” 첫 문장은 경제 부정의와 환경파괴를 오늘의 글로벌 이슈로 보았다.
1998년 하라레에서 열린 WCC 총회 이후 수년간 불의와 불평등은 새롭고 보다 공격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다. 오늘날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가난으로 죽어가고 있다. 국가 간에, 그리고 한 국가 안에서 극소수의 부자와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자가 공존한다. 어머니 지구는 우리가 가하는 끊임없는 착취로 인하여 신음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시대의 징조를 읽고 만민에게 정의를 선포하라는 복음의 명령에 응답하도록 요청을 받는다. 30억이 넘는 하나님의 백성이 가난과 죽음의 사슬에 매여 있는 상황에서 편안하게 침묵하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본 문서는 “신자유주의” 극복에 있어서 그것의 대안이 그것과 갈등 속에 있음을 인정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방신학적 모티프에 의존하고 있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교회와 에큐메니칼 가족들은 신자유주의의 글로벌화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서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그와 같은 패러다임을 변혁시킬 수 있는지를 밝히는 소명을 부여 받았다.”(10)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요, “아가폐”라고 하는 개념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사랑”(11)과 같은 신학적이고 영적인 토대를 바탕으로 하는 “정의와 평화와 창조세계보전”(11)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에 응답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비전은 모든 차원에서의 민주적 참여와 함께 경제적이고 생태학적인 정의문제를 통전적으로 다룰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13)고 하였다. 그리하여 본 문서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하나님의 생명 집 살림살이”(God's Household of Life)는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 하나님의 은혜의 경제는 넉넉함의 경제로 만민에게 퐁요를 선사하고 그것을 보전한다.
• 하나님의 은혜의 경제는 그 풍성한 생명을 정의롭고 참여적이며 지속가능한 방법으로 관리 할 것을 요구한다.
• 하나님의 은혜의 경제는 나눔, 지구적 연대, 인간의 존엄성, 창조세계의 보전을 중요시하는 생명의 경제이다.
• 하나님의 경제는 전체 오이쿠메네, 즉 온 지구 공동체를 위한 경제이다.
• 하나님의 정의와 가난한 자에 대한 우대적 선택(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은 하나님 경제의 징표이다.(17)
본 문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온 세계에 사랑과 정의와 희년의 기쁜 소식(레 25; 눅 4)을 전파하는 신실한 성도들의 공동체”(20)인 교회는 위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의 경제”에 따라서(‘신앙의 유비’요, ‘관계의 유비’요, ‘연속성’ = continuum: 역자 주) 다음과 같은 생명의 경제를 추구할 것을 말한다. 즉, 생명의 경제는 “사회적 차별을 극복한다./사회구성원 개개인과 공동체의 이익을 위하여 인간과 자원을 결합시킨다./다른 사람들 및 모든 피조물과의 상호의존성을 바탕으로 연대성과 책임성을 추구한다./갈라진 것을 다리 놓고 분리되어 있는 것을 연합시킨다./스스로 책임 의식을 가지고 자기 자신과 공동체의 살림살이를 일구어가려는 사람들과, 자기 자신의 역사를 주체적으로 결정하며 자신들의 가능성을 개발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어진다./자본 대신에 인민의 노동, 지식, 창조성을 경제활동의 동력으로 삼는다./개발을 계획하고 실행함에 있어서 개인과 사회의 권리를 준거 틀로 삼는다./개인과 공동체와 민족으로 하여금 연대성에 근거한 글로벌화를 구현하도록 협력하게 한다.(21)
끝으로 본 문서는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 정신에 입각하여 “정의는, 사회 안에서 그리고 땅과 더불어 관계의 근본적인 변혁(deep transformation of relationship)을 요청한다.”(32)며, 우리가 사는 공동체와 사회가 다음과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즉, “진정 포용적이고 참여적이 되어야 한다(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정의)./권력의 편중을 시정하고 국가 안에서와 국가 간에 존재하는 부유하고 힘 있는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간격을 극복해야 한다(경제적 정의)./땅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을 인정하고 지속가능한 방법으로 인류 자신을 조직하고 개발하며 지속가능한 방법으로 자연자원을 함께 나누어야 할 것이다(생태학적 정의).”(33) 그리고 이어서 “정의로운 무역”(37-48)과 “정의로운 금융”(49-66)에 대하여 논하였다.
2). 몰트만에 있어서 오늘날 세계화의 4가지 역기능
2009년 5월 14일 프란시스코 교육회관에서 한국의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의 ‘그리스도인 일치 협의회’ 주관으로 열린 세미나에서 몰트만 교수는 지구화 시대에 있어서 오이쿠메네: 회칙 ‘하나 되게 하소서’를 발표하였다. 그는 이 강연의 결론 부분에서 그 동안의 글로벌화 과정은 ‘신자유주의’와 ‘정보통신’과 ‘인권’과 ‘민주주의’의 세계화로 일류 공동체가 하나 되어 잘 살아 갈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실제로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글로벌화(특히, ‘신자유주의’)가 4가지 역기능을 초래하였다며, 세계교회들이 연합하여 그와 같은 역기능들을 극복해 나가야 할 것을 촉구하였다. 우선 4가지 역기능에 대하여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첫째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세계적으로 주변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들은 직업이 없고 소비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아무도 이들을 필요로 하지 않고, 아무도 이들을 원하지 않는다. 둘째로 환경파괴는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고 글로벌화 된 경제는 세계 정상들의 기구변화 대응 세계대회들을 방해하고 있다. 셋째로 글로벌화 된 세계는 인류사회를 부유한 사회와 빈곤한 사회로 분열시키고(20 대 80), 사회적 국가들(Sozialstaaten)과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한다. 넷째로 나라들이 짊어지고 있는 산더미 같이 큰 부채는 세대들 간의 계약을 깨뜨리고, 오고 오는 세대들의 생명과 삶을 짓누르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몰트만은 아래의 주장에서 교회들이 연합하여 이 지구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교회들의 기독교적 코이노니아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인 오이쿠메네를 살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하여 수행해야 할 일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을 위한 것이다. 지구 자체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글로벌화 과정 속에 있는 세계는 위에서 제시한 모순들로 파국에 이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세계는 또한 그와 같은 내적인 모순들을 극복함으로써 하나의 좀 더 인간적이고 좀 더 자연스러우며 보다 더 의로운 세계가 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몰트만의 제안은 필자가 제시한바, 세계교회들이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 혹은 코이노니아 속에서 다양성을 추구하면서(1. ‘신앙과 직제’ 운동이 추구하는 교회일치 모델) ‘삶과 봉사’ 차원의 이슈들(예컨대, 몰트만이 지적한 4가지 역기능)을 함께 풀어나가야 한다고 하는 에큐메니즘과 에큐메니칼 운동의 논지와 다르지 아니하다.
3. 에큐메니즘과 에큐메니칼 운동을 넘어서 ‘타자들’과의 대화와 파트너쉽과 연대성으로
“아가폐”와 “아크라 신앙고백”이 선언하고 고백하는 오늘의 글로벌 이슈들, 그리고 몰트만이 지적한 글로벌화의 4가지 역기능들과 같은 글로벌 이슈들에 대하여, 기독교의 해법은 이상과 같이 ‘신앙과 직제’ 전통을 따라서 ‘교파들의 정체성과 본질, 고유성과 특수성, 다름과 차이와 타자의 타자성을 인정하고 코이노니아로서 통일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의 그것에 ‘유비’하여)을 추구하면서 오늘의 글로벌 이슈들을 접근하고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성서적 내러티브들에 근거한 기독교적인 신학적 확신들이기 때문에, 타 종교들과 타 학문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기독교적 정체성과 본질, 고유성과 특수성, 다름과 차이, 그리고 타자의 타자성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면 타 종교들, 타 학문들(예컨대, 정치학, 경제학, 도덕철학과 윤리학, 심리학과 철학의 행복과 웰빙 이론들), 그리고 사회의 각계각층은 위와 같은 글로벌 이슈들을 어떻게 접근하고 해결하려고 하는가? 그리고 우리 에큐메니칼 교회는 이들 다른 분야들과 어떤 관계 속에서 예컨대 몰트만의 4가지 역기능을 비롯한 오늘의 글로벌 이슈들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 이상과 같은 글로벌 이슈는 모든 인류 공동체에게 주어진 도전들이다. 기독교는 ‘타자들’과 더불어 그와 같은 이슈들을 접근하고 해결해 나가야 한다. 따라서 기독교는 ‘타자들’과 더불어 그와 같은 역기능을 풀어갈 때, 기독교가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기독교 제국주의)고 교만해 할 것이 아니라 여러 다른 파트너들과 대화하고 화해하며 연대성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가 그와 같은 글로벌 이슈들을 극복해 감에 있어서 그와 같이 ‘타자들’과의 상호성, 대화, 화해, 파트너쉽, 그리고 연대성을 추구해야 하는 신학적인 근거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미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화해의 복음”, “기독론적이고 삼위일체론적인 복음”,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교회”, 그리고 양자 간 대화와 다자 간 대화를 통한 다양성 속에서 추구해야 하는 협의회성과 코이노니아(교회일치 모델)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우리는 이와 같은 ‘신앙과 직제’ 전통으로부터 ‘관계의 유비’(analogia relationis)를 발굴하여 사용할 수 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사역을 통하여 성령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화해된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타자들’과의 화해를 추구해야 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사역을 통하여 성령으로 인류 및 창조세계를 자신에게 화해시키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화해운동인바, 화해된 공동체로서 교회는 이와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화해운동에서 ‘관계의 유비’를 발견하여 이 세상과의 ‘관계망’ 속으로 진입 하여야 할 것이다. 둘째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는 상호성과 상호 존중과 대화와 파트너쉽과 연대성 속에서 영원한 사랑의 페리코레시스적 코이노니아를 누리고 계신다. 그런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 속으로 편입된 교회는 ‘타자들’과의 상호성과 상호 존중과 대화와 파트너쉽과 연대성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우리가 논한 “교회일치 모델” 역시 ‘관계의 유비’를 허락한다. 즉, 교회와 ‘타자들’의 궁극적인 관계는 교회와 ‘타자들’이 다양성 속에서 코이노니아를 추구하면서 하나의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우주적인 기독론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에 근거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그리고 ‘성령의 전’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인바, 교회는 ‘타자들’과의 관계맺음을 위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성과 상호 존중과 대화와 파트너쉽과 연대성’에 대한 ‘관계의 유비’를 행동으로 옮겨야 할 것이다.
칼 바르트는 일찍이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와 시민들의 공동체(1946)에서 ‘신앙의 유비’를 주장하였다. 그는 교회와 국가(세상)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동심원으로 하는 두 개의 원으로 보았고, 그 둘을 하나님 나라를 미리 보여주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말씀들과 행동들에 ‘유비’하여 설명하였다. 물론, 바르트에게 있어서 첫 번째 원에 해당하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에 좀 더 가깝고 국가(세상)는 덜 가까울 것이지만 말이다. 바르트가 제시하는 11가지 ‘유비들’ 가운데 한 가지만 예로 든다. 교회는 인자가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오신 사실에 대한 증인이다. 이것에 유비하여, 교회는 모든 거짓된 편파성을 버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사회 가운데 더 낮은 자들과 더 낮은 층의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야 할 것이다. “가난하고 사회경제적으로 약하고 위협을 받는 사람들이 항상 교회의 우선적이고 특별한 관심사이고, 교회는 사회의 이와 같은 약한 지체들을 돌봐야 할 국가의 특별한 책임을 주장할 것이다.”(173) 바르트는 국가가 이와 같은 사람들에 대한 긍휼을 제도화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긍휼”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는 교회와 국가 모두에 의하여 구현되어야 한다고 하는 말이다. 우리는 “긍휼”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로부터 교회로 그리고 국가로의 “연속성”(continuum)을 발견한다. 그리고 교회는 항상 정치적 영역에서 사회정의를 위해서 헌신하고 투쟁(in Einsatz und Kampf fuer die soziale Gerechtigkeit)에 몰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173),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고 교회는 여러 가지 사회주의적 가능성들(사회적 자유주의, 협력주의, 노동조합주의, 자유무역, 온건한 혹은 과격한 마르크스주의) 가운데서 항상 사회정의를 최대한도로 기대할 수 있게 하는 운동을 선택할 것이다(다른 모든 고려들은 접어두고). (173)
그리고 몰트만은 ‘희망의 유비’를 주장하였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자연법과 실정법과 기독교 공동체가 행해야 할 정의(칭의로 말미암는 정의실천)야 말로 장차 칭의와 화해와 샬롬의 하나님 나라에서 완성될 하나님의 높은 뜻(희년법과 예수님이 말씀과 행동으로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표준들, 특히 원수 사랑의 산상수훈)의 표지판이요 징표요 미리 맛봄이요, 도구인 것이다. 몰트만은 이것을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의 유비”(analogia spei) 혹은 “장차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인 비유” 혹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상응”으로 보기 때문에, 결국 “희년 법”과 “산상수훈”과 같은 하나님 나라 실현의 표준은 역사 속에서 실현되어야 할 하나님의 뜻으로 본 셈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류를 위한 사회정의” 및 “땅의 생태학적 정의”를 위한 종말론적인 윤리이다. 따라서 우리는 칼 바르트의 ‘신앙의 유비’와 몰트만의 ‘희망의 유비’에서 일종의 불가능한 가능성으로서 위로부터 아래로의 혹은 미래로부터 현재로의 “연속성”(continuum)을 발견한다. 이것은 결코 자연신학이 주장하는 것과 같지 아니하다.
그러면 교회가 ‘타자들’과의 상호성과 상호 존중과 대화와 파트너쉽과 연대성에 진입할 때, 무엇이 ‘중간 매개자’일까? 이상과 같은 3가지 차원에서의 ‘관계의 유비’에 의하여 교회 공동체가 ‘타자들’과의 관계망 속으로 들어 갈 때, 무엇이 ‘중간 매개자’일 까? 성서적 내러티브에 근거한 신앙과 신학적인 확신을 우선시하는 바르트의 ‘신앙의 유비’와 미래 지향적이면서 현재적이고 초월적이면서 내재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우선시 하는 몰트만의 ‘희망의 유비’에서 무엇이 ‘중간 매개자’가 될 수 있을까? 황금률(마 7:12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과 ‘이웃사랑’(십계명의 두 번째 돌비)이 그것일 것이다. 아마도 ‘황금률’이 ‘자연법’과의 접촉점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출애굽을 전제하면서 부채탕감과 노예해방과 자연의 안식을 규정하는 희년 법과, 하나님 나라를 전제하고 미리 보여주는 예수님의 말씀들과 행동들, 특히 산상수훈과 사도들의 훈령들을 ‘타자들’에게 연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법’, ‘인간다운 것’(the human), 행복론’과 ‘웰빙론’, 보편적인 윤리(예컨대, UN 인권헌장과 미국헌법의 권리장전)등도 그와 같은 “매개자”로서 성경의 높으신 하나님의 뜻에 연결될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바르트의 위로부터 아래로의 ‘신앙의 유비’와 몰트만의 미래로부터 현재로의 ‘희망의 유비’에 따른 “연속성”(continuum)인바, 교회는 앞에서 지적한 ‘관계의 유비’에 따라서 ‘매개자’를 통하여 ‘타자들’과의 관계망 속에 돌입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필자가 주장하는 ‘중간 매개자’는 결코 자연신학적 출발점이 아니다.
잠시 포스트모더니즘을 떠올리면서 위에서 제시한 ‘관계의 유비’와 ‘중간 매개자’에 대하여 좀 더 생각해보자. 첫째로 리요타르는 각 담론의 차이(disparity)와 배리(背理)(paralogy)를 말한다. 때문에 리요타르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다원주의(pluralism), 다양성(diversity), 다름(difference), 그리고 타자의 타자성(otherness of others)이다. 둘째로 푸코는 담론들의 다원성, 다양성, 그리고 상대성을 주장하면서, 담론 배제의 요인들을 배제하면서 미시 담론을 힘주어 주장하였다. 셋째로 데리다는 의미와 가치의 보편화와 절대화와 통일성, 그리고 전체화를 거부하고, 그것의 다양화와 상대화와 분산을 주장하였다. 데리다는 의미와 가치의 통일성이나 유기체적인 전체성이나 변증법적인 발전이 아니라 그것의 해체와 흐트러짐과 분절과 산포를 주장하였다. 데리다에게는 “텍스트 밖에는 아무 것도 없고”, 각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와의 차연(差延)의 놀이 속에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 과학 내의 여러 담론들과 인문학 내의 여러 담론들 상호 간에,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 개인과 공동체 사이에, 인종과 인종 사이에, 종족과 종족 사이에, 여성과 남성 사이에, 인간사회와 자연 사이에 차연의 놀이 밖에 없다.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를 잇는 다리는 없다는 말이다.
이들 모두는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양한 이야기들과 미시담론들, 보편(universals)이 아니라 특수(particulars)와 다름과 차이들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네트워크와 피트너쉽과 연대성과 “차이 속에서의 연대성”이 아니라 알알이 흩어짐만을 역설하였다. 하지만 앞에서 제시한 본 필자의 교회와 ‘타자들’과의 관계맺음의 방법론은 모더니즘의 ‘거대담론’을 해체하려는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의 좋은 점들(다양한 이야기, 특수와 다름 등)을 받아들이면서 그들의 딜레마를 해결하였다고 본다. 필자는 삼위일체론과 우주적 기독론과 에쿠메니칼 교회론으로 푸코, 데리다, 리요타르의 해체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한 셈이다. 베스트와 켈르너는 “미시 정치”(micropolitics)를 강조하는 “사회 민주주의”로 포스트모던 해체주의를 극복하려하였고, 비스는 전통적인 미국의 자유민주의로 1960년대 이후 미국의 해체주의에 가까운 다원주의와 다양성의 해악을 극복하려 하였다.
아더톤은 변화하는 시대에 따른 공적인 신학(2003)에서 다름과 타자의 타자성과 다양성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을 수용하여, 모든 글로벌 이슈들을 풀어나감에 있어서 거대담론적인 접근과 해석의 한계를 지적하였고, 다양하고 다원주의적인 접근과 해석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그는 모든 사안에 대한 접근과 해석이 알알이 흩어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와 같은 다름과 타자의 타자성과 다양성을 대화와 화해와 파트너쉽으로 인도하였다. 즉, 그의 저서는 기독교 메시지와 타종교들의 메시지들 및 학문적인 이론들을 용광로에 넣고, 제3의 혼합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색깔이 살아 있으면서 석여 짜인 직물이 되게 하였다. 다양한 개별의 이야기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는 말이다. 이는 아더톤에게 있어서 글로벌 이슈들을 푸는 방법론에 해당하고, 주변화(2006)에서는 주변으로 밀려나고 사사(私事)된 기독교를 글로벌 이슈들에 “다시 연결하기 과제”란 다름 아닌 “여러 모양으로 된 여려 색깔의 천 조작으로 만든 누비이불”(quilt) 혹은 “그 모든 다양하고 다채로운 통찰들과 경험들로 짜여 진 형형색색의 전체로서 하나의 풍요로운 양탄자”와 같다고 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 개념을 사용하였다.
결국, 교회와 ‘타자들’과의 관계맺음과 관계망을 ‘관계의 유비’, ‘연속성’(continuum), ‘신앙의 유비’, ‘중간 매개자’, ‘여러 색깔로 짜인 직물’, ‘양탄자’, ‘페리코리시스’ 등의 개념들로 설명하고 그와 같은 개념들을 사용하는 목적은 생명의 공동체인 하나님 나라 실현에 있다 하겠다. 생명은 관계와 소통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이스라엘과 교회는 하나님과 이웃들과 자연과 관계하고 소통하는 생명의 공동체들서 생명의 공동체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미리 맛봄이요 징표요 도구인 것이다. 그리고 ‘타자들’이 지향하는 세계(죄와 죽음과 흑암의 권세하의 세상의 세상성을 제외하고)에도 하나님 나라의 파편들과 징표들과 미리 맛 봄들과 도구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교회 공동체’도 그리고 ‘타자들’도 모두 사랑과 공의와 정의로 다스리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의가 거하는 하나님 나라의 ‘매개자들’이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전자가 그것을 좀 더 근접하게 매개할 수 있고, 후자는 그것을 좀 더 덜 근접하게 매개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교회 공동체이든 ‘타자들’이든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나라를 매개하지 않고, 매개자가 자기를 절대화하거나 매개자이기를 그만두거나 매개자로서의 기능이 마비되거나 왜곡되거나 무엇을 매개하는지를 망각할 때에 역사와 창조세계 속에는 비극과 파국이 초래될 것이다. 백종국 교수는 “매개의 변증법”을 한국 자본주의의 선택(2009)의 주된 논지로 삼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