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신앙과 직제’ 운동의 신학에 나타난 교회론과 교회의 일치추구의 역사
1) ‘화해의 복음’
1927년 로잔에서 열린 ‘신앙과 직제세계 대회’는 복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세상을 위한 교회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요, 항상 복음이어야 한다. 복음은 현재와 미래를 향한 구속의 기쁜 메시지인 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성령은 온 인류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어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셨고, 무엇보다 구약 안에 주어진 그의 계시를 통해서 그의 오심을 준비하셨는데, 때가 차서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 성육하사 인간이 되신 것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로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시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삶과 가르침, 그의 회개에로의 부름, 그의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심판에 대한 선포, 그의 고난과 죽음, 그의 부활과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로의 승귀, 및 그의 성령의 파송을 통하여 우리에게 죄의 용서를 베풀어 주셨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충만함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계시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보이신 완전한 사랑에 호소하시어 우리들을 신앙에로 부르시고, 하나님과 인간을 섬기기 위한 자기희생과 헌신에로 부르신다(Ⅱ. 9-11).
결국 이상과 같은 ‘기독론적이고 삼위일체론적인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교회인바, 본 문서는 ‘교회의 본성’과 ‘교회의 표지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세계를 구원하시기 위한 복음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가 삶과 말씀으로써 복음의 구속하는 능력을 증거 할 것을 명하셨다. … 예수 그리스도는 이 교회의 머리이시고 성령은 교회를 지속시키는 생명이다(Ⅲ. 16).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신약에 따르면 하나님의 새 언약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의 전이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모퉁이 돌이시다(Ⅲ. 17).
교회는 하나님의 택하신 도구이다.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이 도구로써 인간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화해시키고, 그들의 의지들을 주님께 복종케 하여, 그들을 은혜의 방편들로 성화시키며, 그들을 사랑과 섬김 안에서 연합시킴으로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되게 하시고, 그의 나라가 영광중에 도래할 때 까지 지상에서 그의 통치를 확장시키는 일에 함께 동참하는 일꾼들이 되게 하신다(Ⅲ. 18).
오직 하나의 그리스도, 그 안에 있는 하나의 생명, 그리고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하나의 성령이 있듯이, 오직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가 있을 뿐이다(Ⅲ. 19).
그리고 본 문서는 교회란 사도들의 시대 이래로 적어도 다음과 같은 표지(標識)들을 갖고 있다고 하였다.
1) 성경 안에 주어져 있고 성령에 의하여 교회와 개인에게 해석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 안에 있다.
2) 교회는 성육신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다.
3) 교회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수용하고 있다.
4) 교회는 성례전을 준수하고 있다.
5) 교회는 목회적 직무를 위한 교역(직제), 말씀의 설교, 그리고 성례전을 시행한다.
6) 기도와 예배와 모든 은혜의 방편들과 거룩함에 대한 추구와 사람을 섬김에 있어서 교제를 추구한다.(Ⅳ. 31-34)
위의 인용 중, ‘교회의 표지’에 있어서 루터가 1539년 On the Councils and Churches에서 제시한 7가지 교회의 표지들과 대동소이하고, 다른 점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중요시여긴 것과, ‘교회의 본성’ 중에서 “그의 나라가 영광중에 도래할 때 까지 지상에서 그의 통치를 확장시키는 일에 함께 동참하는 일꾼들이 되게 한다”(Ⅲ. 18)가 눈에 띤다.
2) “칭의(의화)와 성화”
그리고 1937년 에든버러에서 열린 신앙과 직제의 결과물은 위에서 언급한 ‘복음’의 수용(受容)에 해당하는 칭의(의화)와 성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값없이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칭의하시고 성화시키신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데, 이 믿음 자체는 선물이다.
칭의와 성화는 죄인과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행동의 불가 분리한 두 측면이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그 자신과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죄를 정죄하시고, 당신의 사랑을 죄인들에게 나타내시며,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신다.
성화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와 전 교회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해내시고, 우리를 그의 거룩함 안에서 자라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삶에 동참함을 통해 우리로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만드신다. 우리를 지속적인 영적 행위와 악과의 투쟁으로 고무시키는 이러한 갱신은 하나님의 선물에 의해 유지된다. 거룩함에서의 우리의 성장이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하나님과의 교제는 항상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 위에 근거하고 있다.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계시의 지적인 수용(受容)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약속에 대한 전적인 신뢰이며, 우리의 구세주이며 주님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 자신을 위탁하는 것이다(Ⅱ. ⅱ).
이미 1927년과 1937년에 세계교회는 이상과 같은 ‘기독교의 기독론적이고 삼위일체론적인 복음’과 ‘교회의 본성과 표지’에 대한 기본교리들에 동의하였다. 그리고 1952년 룬드에서 열린 제3차 ‘신앙과 직제 세계대회’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위한 그 동안의 비교회론적 접근을 접고, 그리스도 중심의 일치운동을 추구하였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가려고 할수록 우리는 서로 더 가까워진다. 우리의 분열의 배후를 뚫고 들어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사이에 있는 하나님께서 주신 연합의 신비를 보다 깊고 풍요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Ⅰ. 2).
3) 기독론적이고 삼위일체론적인 복음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바, 어느 정도로 기독론적이고 삼위일체론적인 ‘복음’을 주장하는 ‘신앙과 직제’는 1952년 빌링겐의 IMC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를 주장한 후, 이미 지적한 대로 1961년 뉴델리 WCC에 와서는 WCC 헌장에 삼위일체론을 첨가하였다. 이 헌장내용은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과 구속, 그리고 칼세돈 그리스도론과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적어도 “복음”과 “삼위일체 하나님”이 WCC회원 교파들의 다양한 신학전통들을 한데 묶는 통일성으로서 가장 근본적인 사도적 신앙전승이라는 사실을 주장할 수 있다.
1963년 제3차 몬트리올 신앙과 직제 역시 성경(Scriptures)과 전통들(traditions:小文學t)로부터 구별되는 “복음전승”(the Tradition 혹은 the Gospel Tradition:大文學 T)을 가장 중요한 사도적 신앙으로 확정 지웠고, 이와 더불어 어느 정도 삼위일체를 부각시켰다. 하지만 삼위일체론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제네바에서 열린 1981년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 제1600주년 기념예배 이래로 사도적 신앙의 공동표현으로서(filiogue 없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대한 에큐메니칼 해석이 시작됨에 따른 것이다. 그런즉, 사도들을 지도자들로 하는 공동체 전체에게 위탁되었으며(S.Ⅱ.6), 성서에 규범적으로 증거 된 이 근원적 사도적 신앙(복음)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의해서 요약되었고, 교회사를 통해서 다양한 신앙 고백서들로 표현되었다(S.Ⅱ.7). 따라서 교회들의 신학의 통일성과 다양성은 성서의 통일성(복음과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과 다양성(여러 다양한 상황에 대응하여 기록된 성서의 다양한 메시지들과 가르침들)에 근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1989년 바젤에서 열린 ‘유럽교회들의 에큐메니칼 총회’ 최종문서는 이상과 같은 화해의 복음이 하나님과 인류의 관계 정상화뿐만 아니라 창조세계에 대한 구원도 약속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하나님님의 언약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수립되었다. 이 분을 통하여 창조주와 인류 사이의 화해가 성취되었다.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9-20).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타락한 인류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사람들과 화평(요 14:27)을 누리며 궁극적으로 모든 창조의 세계와 더불어 충만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1975년의 JPSS와 1983년의 JPIC를 물려받았고, 서울 JPIC 및 1991년 켄버라 WCC를 바라보았던 1989년 산 안토니오의 CWME 역시 ‘창조세계 보전’ 역시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 포함시키면서, 창조세계를 포함하는 우주적(보편적), 종말론적 ”화해” 개념(이밀리오 카스트로)을 제시하였다. 산 안토니오의 공식문건은 새 창조에 대하여 주장하였다.
‘사랑과 평화와 정의가 지배할 새 하늘 새 땅에 대한 성서적인 약속은 ... 역사 속에서 기독교인들로서 우리의 행동을 촉구한다(ME 서론).’ 우리의 선교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한 사역이기 때문에, 그것은 마땅히 미래를 현재 속으로 가져오는 데에 관심한다. 즉, 새 창조인 하나님의 나라의 대의를 위한 사역에 관심한다.(Ⅰ. 4)
그리하여 1990년 3월 서울 JPIC가 열린지 10일 후에, WCC 중앙 위원회는 JPIC를 차기 켄버라 WCC총회에서 우선 과제로 추천하였고, Unit Ⅱ의 WCC중앙 위원회에게 주는 보고서는 JPIC가 “다음 21세기 동안 에큐메니칼 비전의 심장”이 될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상에서 인류뿐만 아니라 창조세계 전체 까지 포함하는 ‘기독론적이고 삼위일체론적인 화해의 복음’이야 말로 성경의 다양성 속의 통일성이요, 교회들과 신학들의 다양성 속의 통일성이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인류, 하나님과 창조세계,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창조세계의 화해를 이룩하셨고, 하나님 나라에서 그것을 완성하실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인류와 창조세계를 하나님 아버지께 화해케 한 ‘복음’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며 종말론적이다.
4)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교회
이상과 같은 기독론적이고 삼위일체론적인 화해의 복음을 성령의 역사로 믿는 사람들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의 전’, 곧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로 일체되시는 하나님의 형상(imago trinitatis)이다. 이와 같은 삼중형태 혹은 다양성 속의 코이노니아의 교회는 교역자들이든 일반 성도들이든 모든 믿는 사람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교회에 대한 이와 같은 세 가지 유형은 상호 보완하여 교회의 의미를 충만하게 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BEM Text」를 잇는, BEM Text이상으로 중요한 교회의 본질과 선교(The Nature and Mission of the Church, Faith and Order No. 198)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포함하여,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출신 믿는 자들로 구성된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한다. 본 문서는 이렇게 주장한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 안에서 땅의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의 성취를 향해 여행하는 순례의 백성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약속은 십자가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벽이 허물어졌을 때 성취되었다(cf. 엡 2:14). 따라서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여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벧전 2:9-10)이요 예언자의 공동체이다. 그리스도의 단번의 희생제사로 새 언약이 제정된 바(cf. 히 9:15),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무이한 제사장 되심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들이 ‘왕 같은 제사장’과 ‘거룩한 나라’로 불리는 사실을 삶으로 표현하도록 부름 받았다. … (Ⅰ. A. 19).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하나님의 백성’은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개념보다 신약성서의 교회론인 것으로 보인다. 위 문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대 관계를 극복하시고, 십자가를 통해 둘을 하나님과 화해시키시어 한 몸을 이루게 하셨다(cf. 엡 2:16). 이 몸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이다(cf. 엡 1:23). 그리스도는 이 몸의 지속적인 머리이고, 동시에 성령의 현존으로 교회에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몸을 깨끗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그리스도는(cf. 엡 5:26) 또한 그분 안에서 ‘우리 많은 사람이 … 그분 안에서 한 몸이 되는’(롬 12:5; cf. 고전 12:12) 분이시다.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이미지는 두 가지 차원 즉 고린도전서와 로마서에 표현된 차원과 에베소서에서 발전된 차원을 포함하고 있다.
인간은 신앙과 세례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다(cf. 고전 12:3-13). 그들이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고 교제하는 것은 거듭 새롭게 갱신된다(cf. 고전 10:16). 모든 그리스도의 지체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은사를 부여받았다(cf. 롬 12:4-8, 고전 12:4-30). 이런 은사의 다양성과 특별한 본성은 교회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주님의 종이 되고 또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는 효과적 표적이 되라는 소명에 더 잘 반응할 수 있게 해 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의 이미지는 비록 명시적으로는 우선 교회의 기독론적 차원을 가리키지만, 동시에 깊은 성령론적 의미를 갖고 있다(Ⅰ. A. 19. b. ).
성령의 전으로서의 교회: ‘성령의 전’으로서의 교회 역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보다 좀 더 신약 성서적이다. 본 문서는 신약성서가 교회와 성령의 관계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것은 ‘성전’ 혹은 ‘집’과 성령의 관계라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왜냐 하면, 성령과 교회의 관계는 거주하는 관계, 즉 안으로부터 생명을 주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공동체를 생기 있게 하시고, 공동체로 하여금 우주 만물의 전체적 변혁 즉 새 하늘과 새 땅(cf 계 21:1)의 전령과 도구가 되게 하신다. 모든 피조물은 바로 이것을 탄식하며 기다리고 있다(cf. 롬 8:22-23).
사도와 예언자의 기초 위에 세워진,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요 성령이 살고 활동하는 거룩한 성전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신자들은 ‘주 안에서 성전’(엡 2:21-22)으로, ‘신령한 집’(벧전 2:5)으로 성장해 간다. 성령에 충만하여, 신자들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증거하고(cf. 행 1:8) 기도하고 사랑하고 일하고 섬기고, 그들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기 위해 힘쓴다(cf. 엡 4:1-3). (Ⅰ. A. 22-23).
코이노니아(Koinonia/Communion)로서의 교회: ‘코이노니아’개념은 신약성서와 교부들과 종교개혁의 글들에서 발견되는 것으로서, “연합(communion), 참여, 사귐, 나눔, 연대성”을 뜻한다(1993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제5차 신앙과 직제 세계대회). 교회사의 어떤 시기에는 이 개념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나, 오늘날 교회의 ‘본성과 선교’를 이해하기 위하여 매우 중요하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내재적인 삼위의 ‘코이노니아’는 경제 차원에서 인류와 창조세계와의 코이노니아로 전개된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지으시어, 인간에게 창조세계의 청지기로서 하나님과 창조세계와의 연합을 갈망하는 능력을 부여하셨다. 그리하여 창조세계 전체는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를 누릴 때에만 그것은 온전성을 지닌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그의 택하신 백성 사이의 특별한 관계인 언약을 맺으신 것이다.(Ⅰ. A. 25). 이 맥락에서 ‘코이노니아로서 교회’의 의미는 매우 심오하다. 본 문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연합 안으로 들어가고,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연합 안으로 들어간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Ⅰ. A. 29)
이어서 본 문서는 복음 설교를 통한 연합 그리고 ‘세례’와 ‘성만찬’을 통한 ‘연합’에 관련된 ‘코이노니아로서의 교회’에 대하여 언급한 다음에 이와 같은 ‘코이노니아로서의 교회’의 존재이유와 존재목적에 대하여 지적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과 찬양을 위해 존재하고, 이로써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인류의 화해를 위해서 봉사한다. 교회 안에서 실현된 그리스도 안의 교제가 피조물 전체를 포함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cf. 엡 1:10). 교제로서의 교회는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을 이루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cf. 롬 8:19-21; 골 1:18-20).(Ⅰ. A. 33)
5) 교회의 선교
교회의 본질과 선교(2005)는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할 것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을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모으고(cf. 엡 1:10), 인류와 모든 피조물을 교제로 인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의 교제의 반영으로서, 교회는 이런 목적을 성취하는 하나님의 도구이기 때문이다.”(Ⅰ. B. 34) 교회는 이 목적을 섬김으로써 모든 사람들을 믿게 해야 한다(요 17:21). 즉, “교회는” 이 목적을 이룩하기 위하여 “복음을 아직도 듣지 못한 사람들과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좋은 소식인 복음을 따라서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 말과 행동으로써 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 교회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의 가치들을 삶으로 옮기고 그것의 미리 맛봄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Ⅰ. B. 35). 본 문서에 따르면, 교회는 “자신의 삶으로 구원의 신비와 인류의 변형을 체현함으로써 만유를 하나님께 화해케 하고(고후 5:18-21; 롬 8:18-25), 인간 상호간의 화해를 구현하시는 그리스도의 선교에 동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모든 본질적 기능과 역할들이 이것에 참여한다.
… 교회는 예배(leitourgia)와 피조물에 대한 청지기직을 포함하는 봉사(diakonia)와 선포(kerygma)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실재에 참여하고 그것을 가리킨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교회는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셨다는 하나님의 파송(선교)을 증거 한다(Ⅰ. B. 36).
그런즉, 교회의 하나님의 선교에의 참여는 모든 인류와 만유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온전히 회복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여 정향되어 있다.
하나님은 인류와 교제를 회복하고 풍성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존재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구원받은 인류를 통해, 온 세계는 회복과 구원의 목적에 이르도록 의도되었다. 이런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 안에 있는 새 하늘과 새 땅(cf. 계 21:1)에서 성취된다(Ⅰ. B. 42).
6)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의 징표와 도구로서 교회
십자가와 부활과 40일 현현에서 절정에 달하는 복음서 내러티브의 ‘하나의 하나님 나라 복음 이야기’의 텔로스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인류와 모든 창조세계의 궁극적인 목적인 하나님 나라를 앞당겨 보여주시고 그것의 완성을 약속하심에 관한 것이다. 그런즉, 이와 같은 보편적인 종말론적인 비전하에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주님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탄생한 교회는 이 하나님 나라의 예언자적 징표요 도구이다. 그래서 교회의 본질과 선교는 이렇게 주장하였다.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는 온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을 나타내는 징표요, 그것을 일구는 도구이다. 교회는 이미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에 동참하면서 자기를 넘어서서 모든 창조세계의 목적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가리키는 예언자적 징표이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땅의 소금’, ‘세상의 빛’, 그리고 ‘산 위에 있는 동네’라 일컫고 있는 것이다(‘신앙과 직제’, 198. 43).(Ⅰ. c. 43)
즉, 예배를 드리고, 세례와 성만찬을 베풀며, 기독교의 진리들을 가르치고, 친교를 나누며, 봉사와 제자의 도를 행하는 교회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다가 올 하나님 나라를 희망하는 가운데 교회 밖의 영역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님 나라 실현운동에 동참해야 하는 것이다. 본 문서가 교회를 “신비”(엡 1:9-10; 5:32)라고 부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진 초월적인 실재(이미 주어졌고, 그것의 완성이 약속된 하나님 나라: 필자 주)를 가리키기 때문이다.”(Ⅰ. c. 45) 그리하여 교회 밖을 향한 종말론적인 목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복음 선교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선교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서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이 세상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믿도록(눅 24:46-49)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파송을 받는다. 이런 식으로 교회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눅 1:78)을 온 역사를 통하여 현존하게 만든다(Ⅰ. c. 46).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파송 받아,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화해와 치유와 변혁을 증거하고, 이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해야 한다. 하나님의 도구로서 교회의 온전성(integrity)은 선포를 통한 증거와 JPIC를 위하여 선한 뜻을 가진 모든 사람들과 연합하여 구체적으로 수행하는 행동에 달렸다(Ⅰ. c. 46).
결국, 이상에서 제시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교회”, “교회의 선교”,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의 징표와 도구로서 교회”는 모든 교파들의 모든 신학이 공유해야 할 교회의 본질 혹은 본성이다. 그래서 교회의 본질과 선교는 위의 3가지 항목을 하나로 묶어 논한 다음에 “Ⅱ. 역사 속의 교회”에서는 “도상에 있는 교회”, “그리스도 안에 있으나, 아직 충만한 코이노니아가 아닌 교회”, “코이노니아와 다양성”, 그리고 “지역 교회들의 코이노니아로서 교회”를 논하였다. 그리고 “Ⅲ. 세상 안에서 그리고 세상을 위한 코이노니아의 삶”에서는 “세례, 성만찬, 모든 사람들의 교역과 안수례 받은 사람들의 교역”을 논한 후, 끝으로 “Ⅳ. 이 세상 안에서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하여”에서는 “역사 속에 있는 교회”(Ⅱ-Ⅲ)와 불가 분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교회”(Ⅰ)가 하나님 나라를 희망하면서 복음전도와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면 역사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좀 더 상론하자. “예수님의 선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에(요 3:16) 있었고, 예수님의 선교의 목표는 하나님 나라였으니, “예수님께서 비유들로 설교하셨고, 그의 권능의 행동들, 특히 그의 죽으심의 유월절 신비와 부활에 의하여 등장시키신 하나님의 나라는 우주 전체의 궁극적인 목표이다.”(Ⅳ. 109) 그래서 “교회란 그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변혁을 위한, 하나님의 두 손 안에 있는 하나님의 도구로 의도되었다. 그래서 디아코니아란 교회의 존재 그 자체에 속한다.”(Ⅳ. 109) 그리고 이어서 ‘복음 선포’(막 16:15)와 ‘복음 전도’(마 28:18-20)를 언급하고(Ⅳ. 110), 나사렛 예수님의 삶에 기초한 “제자의 도”(discipleship)를 말하며(Ⅳ. 111), “하나님께서 이처럼 사랑하신 세상”에서 가난한 자, 병든 자, 버림받은 자, 소외된 자를 위하여 살아야 하고 보다 더 정의롭고 평화스러운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하는 ‘하나님의 선교’를 주장하였다(Ⅳ. 112).
그리고 사죄와 은총의 영역 안에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사는 교회 공동체는 구성원들의 개인 윤리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공적인 영역인 정의와 평화와 창조세계 보전이라고 하는 공적인 사회적 선을 위하여 인류 전체 및 타 종교 사람들의 도덕적인 애씀과 연대해야 한다(Ⅳ. 114)고 하였다. 그런즉, 본 문서는 “그리스도인들은 타 종교의 사람들과 심지어 종교적 신앙을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들과도 협력하여 하나님 나라의 가치들을 증진시키지 않으면 안 될 뿐만 아니라 정치와 경제 영역에서도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증거 할 의무를 짊어지고 있다.”(Ⅳ. 115)고 역설하였다.
이상에서 논한 “1. 화해의 복음”, “2. 칭의와 성화”, “3. 기독론적이고 삼위일체론적인 복음”, “4.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교회”, “5. 교회의 선교”, “6.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의 징표와 도구로서 교회”는 “Ⅱ. 역사 속의 교회”, “Ⅲ. 세상 안에서 그리고 세상을 위한 코이노니아의 삶”, 그리고 “Ⅳ. 이 세상 안에서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하여”와 불가 분리한 관계 속에 있는, ‘신앙과 직제’가 말하는 교회의 본질이다. 이것이 다름 아닌 신약성경이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전”이라고 증언하였고,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381)가 “하나의 거룩하며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라고 고백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the Church of Jesus Christ)요,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교회이다.
이제 우리는 경험적인 역사 속의 교회들과 불가 분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교회의 본질을 염두에 두면서, 그 동안 ‘신앙과 직제’ 운동이 교회일치 운동을 어떻게 전개하여 왔는가에 대하여 알아보자.
‘신앙과 직제’ 운동은 1927년 로잔에서 열린 제1차 세계대회로부터 1993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제5차 세계대회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때문에, BEM 문서와 더불어 교회의 본질과 선교(2005)는 장구한 전(前)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글은 잠시 교회일치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려고 한다. 아래의 교회일치추구의 약사는 WCC 총회 별로 제시될 것이지만, 실제로는 “신앙과 직제”의 연구 결과물들이 여러 복잡한 절차를 거쳐서 총회에 의해서 받아들여 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