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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생명살림과 종교간의 대화

 

*발표 : 김경재 교수(한신대 명예교수)(2010.2.25 제3회 심원콜로키움에서 발표)
*자료 출처 : 심원 안병무 아키브




 

 

[1] 오늘의 공동토의 주제의 의미와 방향

 

제3회 심원콜로키움의 모두(冒頭) 발언자로 초청해주신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콜로키움(colloquium)은 강연과 다른 담론형태 곧 ‘공동토의’ 이다. 그러므로 모두발언(冒頭發言)은 ‘공동토의’를 생산적이고 활발한 것이 되도록 하기위해 ‘공동토의’ 소재(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임무라고 이해하고 있다.

모두발언은 크게 세단락 으로 이야기 해보려한다. (i) 20세기 후반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인류문명사에서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의 필요성이 대두된 지구문명사적 의미를 ‘생명살림’이라는 실천적 프락시스 맥락에서 파악해보는 것이다. (ii) 심원 안병무의 민중신학 속에서 그는 ‘종교간의 대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그가 남긴 몇가지 자료들을 참고하면서 살펴보는 것이다. (iii) 21세기 지구문명의 위기와 한국사회의 소통부재로 인한 사회분렬의 위기상황에서 한국개신교가 어떻게 변해야 할 것인가를 오늘의 주제와 관련하여 몇가지 방향제시를 하려는 것이다.

 

[2] 포스트모던사회에서 종교유형의 다양성 인식과 대화협력의 당위성

 

20세기는 100년 기간의 물리적 시간의 폭을 말하지만, 그 질적 내용을 본다면 20세기 전반기와 후반기는 전혀다른 문명사적 시대라고 할만한 질적변화를 체험하였다. 다음의 몇가지를 1950년대 이후 지구면명사회의 질적변화를 초래하는 근본사건들로서 되새김 할 필요가 있겠다.

첫째, 과학문명의 발전이 이룩한 인간의식의 변화인데 특히 전자정보기술혁명의 발전이 가져다 준 의식의 변화이다. 우주비행(1957)과 달착륙(1969), 텔레비전과 컴퓨터와 이동전화(mobile phone) 보급으로 인한 유비쿼터스(ubiquitous) 삶체험이다. 그 결과 ‘동시성과 하나의식’이 점증해갔다.

둘째, 분자생물학 분야의 발달로 말미암아 유전자의 생화학적 암호구조가 풀려짐(1953)으로 인하여 ‘생명이란 무엇인가?’ 라는 근본질문에 대하여 기계론적이고 물질환원주의적인 세계관과 생명관이 다시 강력하게 대두하고 있다는 삶체험이다. 뇌과학, 분자생물학, 유전공학등이 단순히 과학적 기술이론을 넘어 전통적 종교와 형이상학과 도덕론을 완전히 부정하는 물질적 환원주의 생명론을 주장한다는 점이다.

셋째, 냉전시대의 종언과 함께 지구촌이 ‘지구화, 세계화’라는 명분을 가지고 자본주의적 세계시장구조를 확산해감으로 인해, 빈부양극화 현상 ․ 주기적 국제금융위기 발생 ․ 군산산업유착과 테러리즘의 활성화, 그리고 결정적 지구문명의 시한폭탄이랄 수 있는 지구환경위기와 생태계파괴라는 대 재앙을 인지하는 삶체험을 겪게되었다는 사건이다.

넷째, 종교문명의 다양성에 눈뜨고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을 증진시켜야 ‘문명의 충돌’을 방지하고 관용정신에 입각하여 인류의 평화적 발전에 종교가 공헌해야한다는 신념은 깨어있는 인류 구성원들의 공동신념이다. 그 상징적 사건이 가장 뒤늦게 그리스도교 문명권에서 일어난 ‘제2차바티칸공의회 ’(1962-1965)이다. 인류의 문명사적 관점에서 긴 눈으로 보면, 20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비로소 인류사 과정에서 출현했던 위대한 종교들이 심층차원에서 대화하고 협력하는 시대에로 진입했다는 역사적 사건이 정치사회적-기술공학적 사건들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고 A.토인비는 그 중요성과 의미를 강조했다.

위 4가지 문명사적 전환적 사건들은 지금도 진행중이며, 그 4가지 사건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영향을 주고받는다. 오늘 우리의 공동토의 주제와 관련하여 특히 4번째 사건과 그이후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에 관계된 신학적 담론들(종교신학)의 현황및 강조점 차이를 간략하게 개관하여야 하겠다.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의 필요성이나 당위성에 관하여는 세계의 깨어있는 지성인들과 종교학자 및 신학자들은 모두 동의하지만, 그 과제에 접근하는 태도 혹은 지향성에서는 세가지 그룹으로 대별 할 수 있겠다. 편의상 그 세가지 그룹에 대하여 각각 (i) 존재론적-형이상학적 접근태도 (ii) 인식론적-해석학적 접근태도 (iii) 구원론적-실천적 접근태도 라고 이름붙이고 중요 관심사항을 부각시켜보려고 한다.

 

(1)종교간 대화협력 담론에서 존재론적-형이상학적 접근태도: 라이몽 파니카, 죤캅, 변선환

 

왜 종교다원 현상이 발생하느냐에 대하여, 종교의 대상인 ‘궁극적 실재’(진리, 존재, 신, 다르마, 도, 천) 그 자체의 무궁성과 역동적 생명성에 있다고 강조하는 입장이다. ‘궁극적 실재’는 그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다 알수 없을 만큼 무궁성을 지니며, 인간편에서 다 헤아릴 수 없는 그 무궁성이 고정되어 있거나 완결되어 있지 않고, 그 자체가 창조적 변화를 근본속성으로 갖는 때문이라고 본다.

라이몽 파니카의 종교신학 담론에서 ‘무지개 색상은유’와 ‘기하학적 위상은유’는 그 것을 나타낸다. 무지개가 7가지 색상을 나타내는 것은 ‘빛’이 물방울 통과시에 굴절각을 따라 파장이 다르게 반사되어 우리 눈의 시각구조 신경메카니즘에 의해 그렇게 그런 색갈로서 인지되기 때문이다. 빛은 일곱가지 색상을 펼쳐내는 다양한 색상의 종합 ‘백색광’ 이다. 빨간 장미꽃은 빨강색상을 감지하는 파장을 반사했고 우리 눈은 그것만을 인지했지만, 나머지 다른 파장들은 빨강 장미꽃잎 속에 빨려들어가 있다. 파니카의 말을 들어보자:

 

인류가 갖고잇는 여러 가지의 서로다른 종교적 전통은 ‘신적실재’라는 순백의 광선이 인간경험

이라는 프리즘에 투과되어 나타나는 무수한 색깔과 같다. 그 광선은 셀 수 없이 많은 전통과

교리, 종교를 통해 굴절된다. 녹색이 황색이 아니듯 힌두교는 불교가 아니다. [파니카,

『종교간의 대화』, 26-27쪽)

 

위의 파니카의 무지개은유는 종교다원론 담론에서 몇가지 중요한 통찰을 말한다. 첫째, 우선 종교간 대화에서 각종교가 가진 구체적 특성, 색깔, 고유소를 중요하게 생각해야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흔히 종교다원론 담론을 비난하는 피상적 비판자들은 ‘종교간의 대화 협력’은 차이성이나 독특성을 가급적 무시하고 동질성 및 유사성을 강조하는 ‘종교혼합주의’라고 크게 오해하는데, 그것은 무지에 근거한 잘못이거나 오해다. 둘째, 역사적 종교들이 나타내는 현상적 특징들이 종교의 본질 전부라고 독단하는 독선주의를 경계한다. 구체적 물체는 특정 파장을 반사하지만, 나머지 파장은 흡수하듯이, 기독교나 불교는 각각 겉으로 나타나는 주도적 종교특성만이 아니라, 자기종교의 깊이 속에는 바로 이웃종교의 특성이라고 생각해왔던 존재론적 요소들이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종교간 대화를 넘어서 창조적 변화의 모험’을 강조하는 과정신학자 죤캅도 ‘궁극적 실재’의 무궁성과 창조적 과정성 때문에 종교간 대화는 필요하고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고 강조한다. 한인철은 죤캅의 종교다원론 입장을 아래와 같이 재치있게 잘 정리해주었다:

 

죤 캅이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 사람들은 (...) 자기들이 이미 알고있는 것과는 다른,

그래서 기존의 견해나 인식과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어떤 것이 들려오고 있다고 생각하기

전에는 (...) 다른 사람이 말하는 내용에 귀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차이가

철저해지면 철저해 질수록, 대화는 그만큼 더 생산적일 것이다. 요컨대, 대화의 내적 힘은

배움에 있으며, 배움은 차이로부터 오는 것이다.[한인철,『종교다원주의의 유형』,202쪽]

 

변선환도 그의 종교다원론의 입장을 굳이 말한다면 ‘존재론적-형이상학적 접근’이라고 말 할 수 있다. 특히 변선환은 한국 기독교의 독단적이고도 독선적인 종교우월론이나 타종교 폄하론을 비판하기 위하여 ‘궁극적 실재’를 무(無), 묘공(妙空), 충만공(充滿空)으로 표상하는 불교적 진리담론에 대하여 주목할 것을 신학계에 요청하였던 것이다. 변선환의 종교신학이 ‘그리스도중심적 신학’보다는 ‘신중심적 신학’에 경도되어있음이 또한 그 이유 때문이다.

 

(2) 종교간 대화협력담론에서 인식론적-해석학적 접근태도: 죤 힉, F. 피오렌자, 유동식

 

종교다원론의 담론에서 인간의 정신적 삶의 인식론적 제약성과 해석학적 응답성을 강조하는 측면을 두드러지게 강조한다. 『신은 많은 이름을 가진다』를 저술하여 영미신학계에서 종교다원론의 불을 당긴 죤힉, 종교체험과 표현에 있어서 언어와 문화와 전통이 갖는 해석학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여성신학자 피오렌자, 그리고 한국 기독교의 토착화론에서 복음에 의한 문화변혁설을 넘어 풍류도심에 의해 해석학적으로 수용되는 과정을 부각시킨 유동식의 풍류신학이 둘째번 입장의 대표적 사례로서 열거 할 수 있다.

죤 힉은 종교간의 대화태도에서 ‘코페르니쿠스적 패러다임전환’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천동설이 지구중심의 천문학 시대의 독단이듯이, 특정한 역사적 종교와 그 역사적 종교를 출현시킨 위대한 인물을 모든 다른 종교들의 ‘중심’이라고 강조 할 때, 종교간에는 우월성 논쟁이 발생하고,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와 맞물릴 때 타종교나 타문화를 부정하거나 공격하는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어왔음을 지적하였다. 죤 힉은 역사적 종교들은 ‘궁극적 실재’(진리)에 대한 인간의 인식론적 표현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인간이 알고 말하는 신은 ‘신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체험되고 사유된 신’이라고 강조하였다. ‘궁극적 실재’ 탐구에 대한 인간의 인식론적 제약성은 종교의 다양성을 발생시키고, 종교들의 다양성을 인정하게하여 종교간의 관용과 겸손, 그리고 대화와 협력을 요청한다고 보았다.

피오렌자는 ‘복음의 멧시지와 상황의 상관관계’를 이해하려 할 때, 폴 틸리히를 비롯한 20세기 전반기 변증법적 신학자들의 생각 곧 ‘상황’은 질문하고 ‘복음’은 대답한다는 일방통행적 수직구조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할 것을 강조하였다. ‘영원한 멧시지’라고 규정하는 텍스트 자체가 ‘계시적 사건’을 경험하고 담는 언어와 문화의 역사성을 탈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체험과 해석학적 과정에서 하이데거-가다머로 이어지는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의 존재양태가 ‘전통’이라는 단어로서 총괄하는 인간의 언어성, 역사적 체험, 정치경제적 구조, 삶과 죽음에 대한 ‘전이해’에 의해 색깔을 다르게 띈다는 깨달음이다. 피오렌자처럼 종교란 ‘언어적 문화적 특수성에 의해 이해되고 해석된 구원의 길’이라고 본 죠지 린드벡도 같은 입장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종교다원론의 담론중 특히 토착화론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긴 분이 유동식이다. 유동식의 문화신학적 해석학은 김재준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라챠드니버의 ‘복음에 의한 피선교국 문화변혁설’이 빠지기 쉬운 일반통행론을 극복하려는 노력이다. 과일나무의 ‘접목은유’에서 새로운 우생학적 좋은 열매와 꽃을 피우는 ‘접순’(接筍)은 그 유전자의 장점이 발현되기 위하여 본래 토종나무의 ‘대목’(臺木)의 기능과 적극적 역활이 절대로 필요하다. 복음을 ‘접순’이라고 할 때, 대목은 한국의 종교문화의 한민족의 바탈 곧 ‘풍류심’이다. ‘한 ․ 멋 ․ 삶’을 지향하는 한민족의 집단적 영성바탈 속에 복음의 씨앗 이 떨어져 발아하고 자라고 열매맺는다고 보았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복음과 문화’는 해석학적으로 상호영향을 받는다. 그 영향은 상호 창조적 변화와 풍요로움을 발생시킬 수 있다.

 

(3) 종교간 대화협력담론에서 구원론적-실천적 접근태도 : 폴 니터, A. 피에리스, 안병무

 

종교간 대화협력의 불가피성과 그 의미를 생명의 해방과 구원에 두는 실천적 입장이 있다. 이 세 번째 입장은 종교간 대화나 협력이 여유있는 강단철학과 강단신학의 지적토론이 아니라 삶의 문제요 민중들의 해방을 통한 인간화문제요, 생명죽임의 세력에 맞서는 생명살림의 문제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첨엔 죤 힉과 함께 ‘신적 실재중심의 종교다원론’을 주장했던 폴 니터는 말년에 갈수록 종교간 대화협력담론에서 구원론적-실천적 접근태도가 강조되어야 함을 역설하게 되었다. 지구상엔 다양한 종교들의 숨쉬고 있지만, 종교들의 다양성을 기초놓는 공통적 본질을 규명한다든지, 왜 종교다원성이 출현하는 것인가에 대한 인식론적 해석학적 규명은 유익하지만 전제되어야 할 사항은 아니다. 도리혀 지구촌 삶의 절박한 삶의 정황이 종교들로 하여금 자신을 반성하게 하고 ‘구원론적-실천적 대화 협력의 현장’으로 다가서게 한다고 본다.

종교들의 궁극적 목적을 ‘구원’이라는 말로 압축 할 때, 서구 그리스도교의 교리적 전이해가 그 단어에 붙여지기 쉽지만, 본래의미는 ‘건강한 생명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건강하지 않는 생명의 왜곡과 억압상태를 극복하기 위하여 종교간 대화와 협력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 된다. 이 세번째 입장에서는 구원에 대한 정론(正論, Orthodoxy)이 문제가 아니라 정행(正行, Orthopraxis)이 관심의 촛점이 된다.

인간사회와 생명세계를 건강하지 못하게 만드는 현대문명의 큰 문제들은 빈곤의 악순환, 정치문화적 억압과 수탈, 전쟁과 폭력의 만성화, 물신숭배적 우상종교의 횡포,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태계의 파괴와 지구 자연환경의 위기이다. 이상의 시급한 문제들은 전지구적으로 구조화되어 있고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특정종교 단독 힘으로써 극복은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변선환교수가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라는 종교다원주의 담론을 주장함으로써 한국 감리교 교단으로부터 파문을 당하는 비극적 사건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 비극적 사건은 한국 개신교의 경직된 교리주의와 교권주의에 근본원인이 있겠으나 ‘구원’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의 소통부재와 오해’에 기인하는 바가 적지 않다할 것이다. 그를 파문시킨 교권주의자는‘구원’이라 할 땐 의례히 기독교의 구원교리에 입각한 교리와 상징체계를 절대적 표준으로 삼는다. 그러나, 변선환은 ‘구원받은자’의 표징으로서 세가지를 관심갖는다. (i) 이기적 자기중심의 삶에서 이타적 혹은 진리중심의 삶에로 변화되었는가? (ii) 생사의 두려움에서 해방받은 자유인이 되었는가? (iii) 그 자유 안에서 자발적인 사랑과 자비행의 봉사적 선한 삶을 살고 있는가? 구원이론은 종교마다 특생이있게 마련이고 다양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 ‘사랑’, 불교에서 ‘자비’, 유교에서의 ‘어짐’(仁)등의 예에서 보듯이 종교의 생명은 이론이 아닌 실천이며 삶의 길이다. 그것은 동시에 참종교와 거짓종교, 인간을 살리는 종교와 권력과 야합하여 인간을 억압하는 종교를 판단하는 실질적 판단척도가 될 수도 있다. A. 피에리스는 말하기를 아시아의 신학에서 ‘민중의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 신학은 참 신학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 민중신학자 안병무를 ‘종교간의 대화협력의 접근방법’에서 ‘구원론적-실천적 접근’을 강조한 신학자라고 보는 발제자의 견해에 대하여 낯설게 생각하는 분이 많겠지만, 장을 달리하여 그의 종교다원론의 지지입장은 ‘생명살림’이라는 구원론적-실천적 접근에 입각해 있음을 살펴볼 차례이다.

 

[3] 안병무의 생명살림의 실천과정에서 종교간 대화와 협력

 

1970-80년대 창조적 활동을 한 한국민중신학자들 중에서, 동양적 사고의 특징을 가장 깊이 몸으로 이해하고, 성장기에 동양적 사상세계에 비교적 많이 접한 신학자는 안병무였다. 더욱이 장년기에 유영모와 함석헌등을 만나 그의 사상적 스팩트럼은 동양종교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폭에 있어서 같은 민중신학 동지들보다 더 진지했다.

 

(1) 서구신학의 이분법 도식, 동양종교의 특징, 그리고 성서적 하나님 체험의 특징

 

그의 글중에서 서구신학의 신관과 동양종교의 신관을 비교하여 언급할 때, 그는 양자의 특성을 명료하게 드러내 주었다.(안병무전집 제2권, 『민중을 말한다』, 158-177쪽』) 먼저 기억해두어야 할 점은, 안병무는 서구신학의 신관과 성서적 신관을 구별하여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서구신학이 2,000년 동안 강조해왔던 신관은 동양종교의 그것과 날카롭게 대립되지만, 성서적 신관과동양종교의 신관은 삶의 한 복판에서 비이원론적으로 ‘궁극적 실재’를 체험하고 말하려한다는 점에서 공명(共鳴)과 대화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우선 안병무는 서구신학의 신관에서 가장 문제되는 점은 ‘주객도식’에서 하나님을 말하려하고 한다는 점이라고 본다. ‘주객도식’은 어느한 쪽이 다른 한쪽을 ‘대상화’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신학의 경우엔 신을 관조(觀照)의 대상으로 삼고 대상을 신학적 논리로서 ‘설명’ 하려든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아무리 계시론적 신관을 강조하더라도, 그 계시를 받아 응답하는 인간의 인식론적-해석학적 역활없이는 ‘계시’ 그 자체가 외국어처럼 이해되지 않는 것이 된다.

이성이나 종교성을 매개로하여 신을 말하고 설명하려는 인본주의적 자유주의 신학경향성에 대하여 키케고올이나 바르트가 ‘하나님의 전적 타자성’을 강조하고 나왔지만, 서구신학의 ‘이분법적 도식’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도리혀 심화시키는 본의아닌 경향성을 노정시켰다고 본다. 안병무의 서구신학 훈련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던 불트만의 ‘실존론적 신학체계’도 엄밀하게 말해서 서구신학의 이분법적도식의 뿌리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하였다.

안병무는 동양적 사고(철학과 종교에서는 “신을 말하지 않거나, 말해도 신을 절대타자 또는 절대초월자로 말하지 않음으로써, 신과 인간이 영원한 평행선이 되는 이분법에 빠지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주객도식의 특징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 쪽을 대상화하고 인식대상이 인식주체와 거리를 유지하게 되는데, 동양종교의 일반적 특징이 초월을 말하더라도 ‘내재적 초월’을 말하기 때문에 유신론이냐 무신론이냐의 논의 자체가 적절하지 못하다고 강조한다. 동양종교에서 궁극적 실재를 언표하는 표상으로서 진리, 불성, 도(道), 태극, 천명(天命)등을 말 할 때, 그 표상들을 서구신학이 곧잘 시도하는것처럼 인격적 품성론(persona론)으로써 단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안병무는 도리혀 성서에서 말하는 ‘믿음’(pistis)은 동양종교의 주객도식을 초월하려는 종교체험의 패러다임과 많은 공통점이 있다고 본다.

 

성서의 ‘피스티스’(pistis,믿음)는 결코 그리스도론적인 협의(狹義)의 것만이 아니라, 자기를 어떤

절대의 품에 맡기는 신뢰 같은 것입니다. 그런점에서 볼 때 가령 불교의(에서) 무의식 세계로까지 탈아(脫我) 하려는 것은 자신을 아주 내 맡기는 행위이며, 노장(老莊)의 무(無)나 무위(無爲)의 강조 도 인간의 어떤 기능이나 기교에 의존하려는 온갖 자기방어 장치를 해체해버리자는 것으로, 그것은 보다 큰 믿음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나는 동양적 ‘신앙’자세에서 주객도식이 없는 것을 더 높 이 평가해야 한다고 봐요.[『안병무전집』, 제2권, 163쪽)

 

성서적 ‘믿음’의 본래적 의미에 대한 추적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믿음의 조상’이라고 존경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이란 그리스도론적 속죄론의 교리적 수용과는 상관없는 일, 곧 자손의 축복을 약속하시는 생명의 주(主)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그 분의 신실성에 내맡기는 전인적 태도를 의미한다.

안병무는 동양적 종교가 지니는 ‘주객도식’의 구조에 붙잡히지 않는 성격면에서 성서적 ‘믿음’의 상통함을 읽지만, 그는 성서적 종교의 특징은 성서를 기록하고 남긴 신앙집단(이스라엘민족과 초대그리스도공동체)의 ‘삶의자리’(sitz im leben)와 ‘언어’에 의해 그 종교적 패러다임이 특수하게 규정된 것으로 본다. 성서의 하나님은 인생문제를 풀어내는 합리적 ‘작업가설로서의 신’이 아니라, 삶의 모순과 절규속에서 ‘구원사건’을 일으키면서 현존하는 신체험을 강조한다는 특징을 읽는다.

그런의미에서 성서적 종교의 신체험은 역사 초월적이라기보다 역사 내재적인데, 기존가치관이나 제도의 틀을 흔들어 허물고 새롭게 형성한다는 점에서 볼 때는 ‘역사초월적’이다. 그런관점에서 ‘오직 야훼만’(Mono-Yawhism)의 신앙은 “다른 종교와의 대결이라는 시각에서 볼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배에 대한 절대부정의 선언이라고 봐야함니다”고 일깨운다. 다윗왕조시대의 궁중어용신학이 법궤를 예루살렘에 안치하고, 그의 후계자 솔로몬이 성전을 세워 예루살렘을 ‘성역화’ 함으로써, 창조주와 역사주로서 임마누엘 하나님은 다윗왕조의 수호신이 되고, 예루살렘 땅의 수호신이 되고, 성전에 감금된 성전종교의 신으로 변질해 버렸다. 예수의 성전 정화사건과 성전파괴 예언은 본래의 성서적 하나님 신앙의 회복을 의미한다.

 

(2) ‘생명의 주시는자’로서 성령(聖靈)과 동양사상에서 ‘기’(氣)

 

안병무는 성서적 하나님체험과 증언은 언제나 ‘사건속의 하나님’임을 강조했다. 그런데, 사건은 생명이 억압과 질고 속에 있을 때 생명을 해방시키는 ‘역사적 사건’을 일으키는 힘임과 동시에, 일상생활 속에서 생명이 생기를 띄고 삶을 영위하는 근원적 힘으로서 ‘생기’로서의 힘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생명살림’이란 개념이 두가지이다. 첫째는 억압된 생명의 질곡을 풀어내어 살려낸다는 정치사회적 해방으로서 살림이다. 둘째는 유물론적 세계관에 근거한 ‘물질적 환원론자’들이 ‘생명현상’을 물리화학적인 메카니즘으로 다 설명하려는 태도에 동의하지 않고 ‘생명현상’을 생명체의 ‘자기조직화’운동을 가능케 하면서 그 운동을 타면서 활동하는 ‘생명의 기운’을 하나님의 현존으로 체험하는 고백을 말한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한다”(행17:28). 안병무의 종교간의 대화에서 둘째주제는 성령론과 기론을 중심으로 이야기 하였다. 좀 길게나마 안병무의 기론 해석을 들어보기로 한다.

 

고대 히브리어나 희랍어에는 우리가 쓰는 ‘기’(氣)라는 말뜻과 꼭같은 것이 있습니다. ‘기’에는 ‘숨’, ‘바람’, ‘힘’등의 뜻이 있는데, 구약에서 “하느님이 사람의 모양을 흙으로 빚고 숨을 불어넣으니 살아 서 움직이는 사람이 됐다”는 ‘숨’이 ‘기’와 똑같은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에제키엘서에서는 환상으로 나타난 해골들에게 하느님의 ‘숨’을 불어넣으니까 핏줄이 재생되고, 살이 생기고, 마침내 산 인간 이 되어 군인같은 대열을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거기에서 ‘숨’이 바로 이 ‘기’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 예수의 민중들에게 바람과 같은 것이 일고, 불길같은 성령(pneuma)이 임했다고 했는데 , 그 성령이라는 희랍말이 구약의 ‘숨’이나 우리가 말하는 ‘기’와 똑같은 뜻을 담은 단어입니다. [『안병무전집』제4권, 226-227쪽]

 

안병무의 동양적 ‘기철학’과 관련시킨 성서해석은 사람들의 눈과 귀를 집중시키는 거대한 변혁적 정치해방사건에서만 아니라, 여인의 ‘가루서말속 반죽의 효모기능’처럼 일상적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나라의 조용한 혁명’을 강조하려는 맥락에서 언급되었다. 위의 인용문에서 주목되는 점은 구약성경의 ‘루아흐’(ruach)와 신약성경의 ‘프뉴마’(pneuma)와 우리 종교사상에서 ‘기’(氣) 사이에 상응성이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똑같은 뜻을 가진 단어”라고 세 번이나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기독교의 ‘성령론’이 교의학적 삼위일체론과 연계되고 서구신학의 계시론적 신론체계와 맞물리면서 ‘성령’의 현존적 활동은 마치 선교사들의 기독교 전파를 따라 다닌다든지, 성경말씀에 유폐되어있는 그런 특수한 신적실재가 아니라는 선언이기도 하다. 기독교가 전래되어 부흥성회가 개최되기 전에도 ‘성령’은 우리조상들의 ‘생명살림’ 운동의 존재론적 힘으로서 현존하였고, 생명을 주시는자, 위로자, 새롭게 하시는 정결의 영으로서 일해오셨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민중신학이 진행되면서 서남동은 동학운동의 ‘전봉준 압송사진’을 그의 서재 책상 앞에 늘 세워 놓았고, 안병무는 그의 건강이 말년에 악화되면서 동학의 주문 ‘至氣今至願爲大降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에서 말하는 ‘至氣論’에 관심이 깊었다. 서남동은 동학혁명 속에서 ‘정치혁명적 민중의 에너지’를 읽었지만, 안병무는 민중의 정치변혁 에너지로서만 아니라, 뭇 생명속에서 생명을 살려내는 천주(天主)의 현존적 존재양태로서의 ‘지기’(至氣)의 현실성을 읽었다. 이점에서 앞으로 종교간대화에서 특히 기독교와 천도교관계는 생태학적 생명론을 중심화두로서 더욱 활발해질 전망이다.

 

(3) ‘생명살림’운동과정에서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

 

서두에서 안병무의 ‘종교간대화담론’을 ‘구원론적-실천적 접근태도’ 그룹으로 구분하였다. 앞서 언급한 성서적 종교와 동양종교 사이의 특성과 차이랄지, 성서의 성령론과 동양사상의 기론과 비교언급은 ‘종교신학담론’에서 첫째와 둘째 그룹 곧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접근태도’ 및 ‘인식론적 해석학적 접근태도’와 일부 연관된다. 그러나, 안병무가 종교간의 대화나 협력을 말한다면 그의 입장은 ‘삶의 현장’에서 ‘생명살림’이라는 공동전선에서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본다. 1987년 김세진군 사후 1주기 기념식에서 행한 강연에서 우리는 안병무의 입장을 읽을 수 있다.

군사정권의 고문으로 숨진 박종철군의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아들의 죽음이후 그 아픔을 달래기 위해 늘상 절을 찾았다고 한다.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서,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설법을 듣고, 삶과 죽음이라는 실체론적 허상에 ‘집착’을 극복하라는 위로의 법문도 들었을 것이다. 아니면 윤회설과 극락왕생설을 믿으면서 비극적 삶을 살고간 아들이 좋은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 살기를 염원했을 것이다. 그러한 박종철군 어머니의 대응은 엄마로서 의미가 있다. 그런데 생각하지 않는 사건으로 그 모친의 삶이 바뀌게 되었음을 강연속에서 실감나게 전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에 젖은 세진이 엄마가 종철이 엄마를 찾아 만난 것입니다. 두 어머니는 서로 부둥 켜안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종교사이의 이론적 논쟁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만남이니다. (...) 여기서 불 교와 그리스도교의 담은 사라지고, 예수와 석가가 만남니다. 생과 사에 대한 인위적 담은 어디엔가로 사라지고, 삶 자체만이 현실로 남았습니다. (...) 이 두 어머니의 만남은 이미 과거가 된 한을 품거나 회포를 나누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음의투쟁을 위한 다짐의 만남, 그러므로 죽은세진이와 종철이가 다시 자라 역사를 무대로 싸우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때 세진 엄마는 “.......... 이제 우리가 우리 아 이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해야지요”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죽임의 연대성과 동시에 역사 속에서 삶의 연대성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안병무전집』제6권, 220-221쪽]

 

위의 인용문에서 우리는 종교간의 대화가 ‘생명살림’이라는 현장에서 어떻게 이뤄지고 활성화되는 것인가 또렷하게 듣는다. 종교간 대화협력 담론에서 ‘구원론적-실천적 접근대토’란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게 말해졌다. 그것은 종교란 것이 죽음넘어 타계일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아니라, 삶 이후 소망을 말하는것도 종교의 중요한 한 기능이겠지만, 그 본질은 삶 속에서 ‘생명살림’이라는 과제를 제1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종교가 말하는 종교적 수행이나 영성훈련이 깊어진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인가? 다름 아니라 위인용문의 마지막 말에서 잘 드러나 있다: “죽임의 연대성과 동시에 역사 속에서 삶의 연대성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고 인식한대로 행동적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함석헌의 표현대로라면 “삶은 하나이다”라는 철저한 자각과 그에 걸맞는 실천이 종교의 핵심본질이다. “삶은 하나이다”라는 대명제적 진실 때문에, ‘죽임의 연대성과 삶의 연대성’을 회피할 수 없다.

‘죽임의 연대성’이란 오늘 현실 속에서 죽임세력의 득세와 회포를 막지못하고 소극적으로 침묵하거나 무관심한 도덕적-정치적 책임을 스스로 통감하고 회개한다는 뜻이다. ‘삶의 연대성’이란 건강한 삶이 회복되고 지속되려면 ‘삶 현실의 유기적 관계성’을 자각하고 정의 ․ 평등 ․ 자유 ․ 평화 ․ 생명존중 ․ 공공윤리의식 확장에 뜻을 모으고 행동에 연대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현실에서 민주주의의 역행, 생태계의 위기, 물신숭배적 가치관의 범람, 인간성 황폐화의 무한경쟁 교육현실에 직면하여 우리의 공동책임각성과 극복노력에 종교간의 대화협력은 너무도 당연하고 필요한 것이라는 말이다.

안병무가 종교간의 대화협력을 강조한다면 바로 그러한 ‘생명살림’의 현장에서 종교의 구경목적인 ‘건강한 삶의 회복’(구원)을 지향하는 실천적 과정이라야 한다고 말 할 것이다.

 

[4] 나가는 말: 종교간 대화와 협력에 관한 한국교회의 과제

1. 한국사회는 1919년 3.1운동에서 경험한 대로, ‘생명살림’이라는 범사회적 과제앞에서 다양한 종교들이 서로 협력하고 관용과 대화의 정신을 발휘해 왔다. 그러한 정신은 오늘에도 면면히 이어져서 우리사회의 공동과제 예들면 민주화운동, 인도적 측면에서 북한동포 돕기운동, 언론 통폐합을 지향하는 미디어법 개정 반대운동, 용산철거민 사건에서 보여준 종교계 공동대응, 특히 4대강 반대운동에서 보듯이 생태환경 보존운동 등에서 종교간 대화협력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그런대도 불구하고, 아직도 한국 개신교지도자들의 상당수는 시대착오적인 종교우월주의 및 타종교 비판발언을 서슴치 않고 계속하고 있는 현실이다. 다원사회를 특징으로 하는 세계문명의 흐름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요, 기독교신앙을 왜곡하여 장기적으로 볼 땐 ‘복음선교’의 길을 막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맹성을 촉구하지 않을 없다.

2. ‘생명살림’이라는 정행(正行)의 차원에서 종교간의 대화 및 협력은 가장 현실적이고 효과가 높은 것이다. ‘죽임의 연대성과 생명의 연대성’을 깊이 자각하면 할수록 , 우리사회의 소통부재의 질병증후는 치유되고 갈등과 무한경쟁의 자기중심적 이기심은 줄어들 것이다. 생명의 기운이 죽임의 기운을 압도해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생명관에서 현대 기계론적 생명관은 ‘생명현상’을 분자생물학적 차원에서 ‘전기적-생화학적 메카니즘’으로 환원시키고, 안병무의 기론(氣論)이나 그리스도교의 ‘생명을 주시는 자’로서의 성령을 비과학적 생기설의 아류라고 비판한다. 쟈크 모노가 대표적으로 갈파한대로 ‘우연과 필연’이 냉혹한 진화과정에 작동하는 법칙이라고 본다. 종교계 특히 그리스도교 신학계는 이 도전에 창조적으로 응답해야 할 공동과제를 지닌다.

3. 그동안 민중신학의 흐름은 ‘정치사회적 해방신학’으로서 관점이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구체적 인간공동체의 삶은 정치사회적 측면과 문화종교적 측면이 따로 분리되어있지 않고 통전된 삶이 있을 뿐이다. 그동안 한국적 신학의 두 흐름으로서 민중신학과 토착화신학이 개별적으로 전게되어온 감이 없지 않다. ‘생명살림’의 과제 앞에서 그 두 흐름은 보다더 유기적으로 회통될 필요가 있다. 분리되어 각자 발전되어갈 경우, 토착화를 기본과제로 하는 한국의 문화-종교신학은 삶의 현실성과 멀어지는 상아탑적 학문활동이 될 것이고, 민중의 해방과 인간화를 기본과제로 하는 사회-정치신학은 인간생명의 영성과 멀어지는 당위론적인 정치사회학이 될 것이다. 심원 안변무의 신학을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 그는 이 두 차원을 성서에 뿌리내리고서 동시에 붙잡고 회통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2010.2.25)

 

[참고한 책]

1. 『안병무 전집』, 제2권, 제4권, 제6권, (한길사, 1992)

2. 폴 니터(변선환역),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한국신학연구소, 1986)

3. 변선환, 『현대문명과 그리스도교신앙』, 변선환전집, 제7권(한국신학연구소, 1999)

4. 유동식,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연세대출판부, 1997)

5. 한인철, 『종교다원주의의 유형』,(한국기독교연구소, 2000)

6. 김경재, 『해석학과 종교신학』,(한국신학연구소, 1994)

7. 성공회대학교 신학연구소 엮음, 『대화를 넘어 서로 배움으로』,(맑은 소리, 2003)

8. 자크 모노(김진욱역), 『우연과 필연』,(범우사, 1996)

9. 장회익, 『삶과 온생명』,(솔, 1998)

10.하워드 L.케이, 『현대생물학의 사회적 의미』,(뿌리와 이파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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