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정강길]그런 신은 없다! 하지만 신은 있다! (1)

글쓴이 : 정강길(세계와기독교변혁연구소 연구실장)
자료출처 : 세계와기독교변혁연구소 http://freeview.org/


 
- 힘센 하나님에 대한 숭배, 구원하는 폭력의 신화로서의 기독교는 이제 사라져야!


"기독교의 신 관념은 나에게는 악마의 관념입니다.... 천사나 인간을 창조하여 밤낮으로 영구히 찬양할 수 있도록 하는
신이란 대체 어떤 유형의 신일까요? 그것은 제정신이 아닌 그리고 야만적인 허영심을 가진 전제 군주자의 모습이지요” -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고 완전무결할 것이라는 뿌리 깊은 고정관념

새로운 기독교 운동에 대해 설명할 때 나는 기존의 신 이해에서 새로운 신 이해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이때 새로운 신 개념에 대해 가장 큰 알레르기 반응은 절대적 초월자, 전지전능한 하나님, 초자연적인 신이라는 고정관념을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나오는 반응인 것이다. 예컨대, 악과 고통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지 않아서 그걸 해결 못하시는 게 아니라 그러한 해결능력이 있으심에도 단지 미천한 우리에게 당신의 더 크신 뜻을 알게 해주고 싶어서 그러할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신은 자비하지 않은 존재다. 적어도 세계 안에는 의로운 사람들도 그냥 죽고 마는 현실이 있잖은가. 태어난 것 자체가 죄가 되어야만 했던 어린아이와 여자들도 무수히 죽어갔던 현실은 부지기수다. 인류사의 비극에 속하는 전쟁 및 인종대학살이나 최근의 아이티 참사 같은 고통과 비극의 사건들은 지구 역사 이래로 살펴보면 그렇게 드물었던 사건도 아니다. 전쟁과 폭력과 재해로 인한 삶의 고통과 비극들은 이미 우리 일상에서부터 국가사회와 전세계 지구 역사 도처에 널려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존재이라면 세계 안에 있는 악과 고통의 문제를 꼭 그런 식으로 해결했어야만 했는가? 결국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의 대답은 ‘미천한 인간이 어찌 하나님의 뜻을 죄다 알 수 있겠는가’라는 불가지론(不可知論)으로 돌려버리기가 일쑤다. 즉, 마침내 설명 못하는 지경에 이르면 ‘무조건 믿어야만 한다’라는 압박이 요구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그렇지만 불가지(不可知)라고 해도 끊임없이 모색해보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탐구 자체마저 봉쇄시켜선 안될 것이다. 어차피 보수 근본주의자들이든, 온건 복음주의자들이든, 진보 기독교인들이든 간에 모두다 저마다의 한계 인식들 가운데서 제각기 모색해나가는 현실인 것이다. 흔히 말하길, 하나님한테 사람의 잣대를 적용시켜선 안된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주장하는 교인들 역시 그 같은 명제의 적용에서 결코 예외일 순 없다는 보여진다(나중에 기회가 되면 “오직 하나님만 홀로 영광 받으소서”의 실체가 결국 무엇인지를 말씀드리겠지만, 현실에서 정작 영광 받고 있는 분들은 알고보면 교회계급 종사자들일 따름이다).

찰스 하츠온 및 그의 종교철학사상을 이어받고 있는 과정신학자들은 말하길, 현실 세계 안의 악과 고통의 문제와 신은 전지전능하고 자비하다는 관념은 애초부터가 서로 양립가능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이에 대해선 http://freeview.org/bbs/tb.php/b001/20 참조, 혹은 데이빗 그리핀의 <과정신정론>(이문출판사) 참조). 이미 근본적인 차원에서부터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논제를 놓고서 이에 대해 억지스럽게 집착해왔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히 말하길, 신앙은 논리로 설명될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결국은 신자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더라도 무조건 믿어야 한다”식의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를 전수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기독교 신앙의 체계로는 합리적 이성으로서의 소통과 기능을 아예 무시하는 점들이 매우 많을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 쓰인 하나님은 전지전능하다고 표현하는 성서 구절도 실은 그 시대적 상황의 한계가 반영된 것과 더불어 사실의 차원보다는 고백의 의미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도 간과되어선 안될 것이다. 물론 그 옛날에는 고백의 차원도 그 자신한테는 사실로서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오늘날의 현대인들이 그 옛날의 고대인들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 너무나 자명한 이치인지라 이제 우리는 신에 대해서도 또다시 새롭게 말해야 될 시점에 이르렀다고 하겠다.

기존의 낡은 유신론보다 훨씬 설득력 있는 무신론자의 주장들

얼마 전 리처드 도킨슨의 <만들어진 신>의 세간의 베스트셀러가 된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아마도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은 무신론적 상황에 공감하고 있어 보인다. 무엇보다 현대 과학의 세례를 입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기존의 유신론이 너무나 낡아 있어 보이는 것이다. 그럴 만도 한 게 기존 유신론자들의 신 관념은 전적으로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완전자로서의 신 이해에 사로잡혀 있는 실정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에 대해 <만들어진 신>에서 하나하나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도킨슨 뿐만 아니라 오늘날 많은 지식인들은 무신론을 주저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형편이다. 자신들을 거리낌없이 무신론자로서 소개한다. 그리고 이들은 종교가 저지르고 있는 살육과 폐단과 미신적 행위들에 대해 날카로운 공격들을 해대고 있다. 인류사의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라 부정할 수도 빠져나갈 수도 없다.

이에 대해 온건한 보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라스가 반론이랍시고 <도킨스의 망상>이라는 짧은 반론서를 펴냈지만 내가 볼 땐 제대로 반박했다고 보기엔 너무 많이 불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맥그라스는 자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유신론적 신관이 어떤 유형의 것인지, 그리고 도킨스가 공격한 기존 유신론이 어떤 유형의 유신론이었는지를 제대로 분석해내지도 못하고 있다. 오히려 따지고 보면 무신론자인 도킨스의 글이야말로 훨씬 더 훌륭했을뿐더러 솔직한 만큼이나 매우 힘 있는 명문들로 즐비했었다고 본다.

나는 새로운 기독교의 입장에서 미리 말한다면, <전(前)이성>의 차원에 있는 기존의 낡은 유신론보다는 좀 더 이성적인 무신론 진영이야말로 훨씬 더 낫다고 본다. 적어도 비교적으로만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기존 기독교인들 대부분은 ‘신은 있다’와 ‘신은 없다’라는 점에 대해 논증적으로 직면할 수 있고 이를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심지어 신학자든, 목사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처드 도킨스 같은 전투적 무신론자들의 공격을 비껴가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그것이 뭔가? 바로 기존의 기독교 유신론을 폐기처분하면 그만인 것이다. 아, 이 얼마나 간단하면서도 어려운가!

이천 년 동안 전통화된 습관은 무섭도록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가족들과 교회 환경 및 사회문화까지 지배함으로써 여전히 기존 기독교의 유신론 사상에 미련을 두도록 만들고 있다. 하지만 제발 원컨대 미련 없이 폐기 처분해 버려라!

기존의 유신론, 신에 대한 고정관념을 폐기처분하라!

기존 유신론의 신 관념에는 원시적이고 야만적이며 정복적이고도 조잡스런 신 관념 사상이 함께 깃들어 있다. 이는 성서 안에도 있다. 예를 들어, 여호와의 말씀과 명령에 의해 여자와 아이와 유아들까지 호흡이 있는 모든 생명들을 싸그리 말살하라는 성경구절들(신2:31-35/수6:16-21/10:39-40/11:11-15/삼상15:1-3 등등)에 대해 이를 온전히 설명할 수 있고 제대로 솔직하게 설교할 수 있는 목사는 거의 없다. 성경에 그토록 나오는데도 그 같은 구절들은 차마 피하고 싶은 껄끄러운 구절들일 따름이다. 어차피 성경구절들도 자기 입맛에 맞게 취사선택 하잖은가.

악과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저 할 수 있는 구차한 얘기라곤 결과적으로는 천국의 보상을 위한 시련과 연단의 의미일 뿐이라는 식의 별로 현실성 떨어지는 자조적 위안으로서만 얘기해줄 따름이다(물론 그런 식의 자위도 어떨땐 필요하다곤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런 식의 해석들은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의 입에서나 정당화될 수 있을 뿐, 지구 역사 이래로 이 땅에 무수히 그리고 무참히 죽어갔던 수많은 여자와 아이들의 생명들 앞에선 한낱 기만적이고 사치스런 망언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다시 한 번 더 분명히 말한다. 신이 전능하다고 보는 건 분명한 망상(delusion)이다. 혹은 신은 자비하다는 쪽이 망상이거나..

고대로부터 형성된 신 관념에는 다신론, 유일신론 등등 이러한 유형으로도 나뉠 수 있긴 하지만 이른바 <신>God이라는 개념 자체를 그 어떤 절대자, 완전자, 초월자로 이해하는 관념 역시 서구 기독교 사상사 안에 깃들어 왔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고대 히브리 역사의 이해에서 출발하였으나 그리스 로마 시대를 거치면서 점차적으로 그 보편적 해석의 체계를 쌓아감에 있어 그리스 철학의 이론을 통한 해석학적 토대와 그 기준들을 마련해갔었다.

이러한 신론 확립의 과정에서 신플라톤주의자였던 플로티노스의 <일자>the One 개념을 나름대로 받아들였던 어거스틴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를 기독교의 신 관념에 적용시킨 토마스 아퀴나스의 조직신학적 신론은 기독교의 하나님 이해를 체계화하는데 있어 매우 결정적인 신학적 작업에 속했었다. 신이라는 존재는 모든 시간적인 현실 존재들의 창조자이자 가장 궁극적인 원인자이면서 그 자신만큼은 완전무결하여 현실 세계의 인과적 영향들에 대해선 초월적이고 독립적인 자존자로서 정식화된 것이다. 무례하게도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잖은가(출3:14에 대한 다른 히브리어 해석을 참조하려면 김이곤,『출애굽기의 신학』(한국신학연구소), pp.52~56을 보라).

이미 오래전부터 기독교 변증가들이나 교부들 및 중세 철학자들은 그러한 해석학적 관점에서 성서의 내용들을 해석하였었고 서구교회의 신앙을 확립하는데 이바지 하였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같은 조직신학적 신 관념들은 루터와 칼뱅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서구 교회와 한국교회 현장에까지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신에 대한 지배적인 고정관념으로서 자리 매김되어 있다. 적어도 기독교 메인 스트림은 이 같은 조직신학적 신론의 하나님 이해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실정이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 현장에서 성경공부 교재를 통해 배우고 있는 하나님 이해는 바로 이러한 신 관념들에 맞춰져 있다.

종교철학자 찰스 하츠온은 전지전능으로서의 신, 절대적 군주자로서의 신, 완전불변의 신 개념들은 오류가 있는 개념이라 폐기되어야 할 신 관념으로 꼽고 있다. 마찬가지로 과정신학 진영의 경우 천국행이냐 지옥행이냐를 결정하는 유일무이한 심판의 주제자이자 우주적 도덕가로서의 신 개념 및 가부장적 유형으로서의 남성적 신 개념을 거부한다. 이러한 하나님 이해들은 하나같이 신에 대한 구멍 뚫린 개념들이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특히 종교의 경우에 있어선 이론적 오류라는 사태가 결국은 폭력의 자행이라는 실천적 사태로 손쉽게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종교라는 것이 우리네 삶의 모든 전반들을 가장 강력하고 뿌리 깊게 지배하고 있는 기제이기 때문에 그러할 지도 모르겠다. 즉, 종교의 경우 신앙을 지배하는 이론적 신념들이 그저 이론상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결국은 나의 생활 전반에 깊게 영향을 미치는 핵심에 속한다. 게다가 종교라는 분야는 초창기 성립된 이론이나 정식화된 교리에 대해선 웬만해선 이론적 수정을 하지 못하는 점들이 있다. 그리하여 이론적 반성과 수정이 안될 경우 그로인한 비극적인 폭력사건들은 반복적으로 되풀이 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 사상사는 기독교 폭력사와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왔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러한지 어디 한 번 살펴보자.

힘의 하나님 : 전제 군주왕 모델로서의 제국주의적 하나님

기존 기독교의 하나님 신앙에는 <힘의 과잉>에 대한 숭배와 찬미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힘의 과잉>이라는 용어를 좀더 쉽게 이해하고자한다면 <폭력>이라고 봐도 좋다. 오늘날 폭력이란 개념에는 물리적 폭력만을 일컫지 않는다. 사회구조 혹은 국가폭력 같은 체제 시스템의 과잉한 힘으로부터 받는 폭력도 분명한 폭력에 해당한다. <폭력>이란 개념에는 힘의 과잉 집중 혹은 힘의 넘침 및 힘의 불균형성을 전제하고 있는 개념인데, 관계적 사태에서 볼 경우 그러한 힘의 과잉(넘침)은 또 다른 한 편에서 볼 경우 힘의 결핍이라는 약자를 낳게 한다. 내가 기존 기독교를 유달리 비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이 믿는 하나님 이면에는 구원하는 폭력에 대한 신화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이에 대해선 월터 윙크,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한국기독교연구소) 참조). 그것은 곧 힘에 대한 숭배인 것이다.

나 자신의 이런 주장에 대해 혹자는 순진하게도 “기독교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데, 우리가 언제 폭력의 신을 섬겼다는 얘기냐? 기독교인들도 알고 보면 사회봉사도 많이 하고 착한 일도 많이 하지 않느냐?”라고 따져 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본인의 기독교 짠밥 정도도 설마 그런 점까지도 모르고서 얘길 꺼냈겠냐만, 나로선 좀더 시야를 세계사적으로 봤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역사적으로 서구 기독교가 자행해왔던 폭력의 역사는 너무나도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그것은 예수사건 이후 교리가 확립되어 가는 과정에서도 종교 논쟁과 폭력의 싸움들은 자행되었으며(리처드 루벤슈타인의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을까> 참조),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폭력적이었고, 중세 기독교가 지배하던 시절에도 여지없이 폭력적이었다. 물론 십자군 전쟁과 마녀사냥은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그리고 천주교와 개신교가 갈라진 종교분파 사건(세간에선 ‘종교개혁’이라 불리지만 개혁이 못되었다고 봄, 본인의 "그것은 과연 종교개혁이었나?" 참조) 사건 이후에도 기독교가 자행했었던 폭력의 역사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어 왔었다. 원주민들과 인디언들을 무참히 학살했던 기독교인들은 부지기수였다. 기독교인들은 흑인 노예에 대한 폭력을 성경적이라고 보기도 했었다. 서구 제국주의 땅따먹기 경쟁에는 언제나 기독교의 복음전파도 함께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심지어 최근까지도 우리는 신실한 기독교인 부시 행정부 시절의 이라크 침공을 기억하고 있다. 부시가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고 따르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힘센 분이니까! 알고 보면 그 하나님의 실체가 바로 강력하고 전능한 힘 곧 폭력이라는 종교였던 것이다.

아, 그것은 신을 잘못 믿는 인간들의 잘못이지 기독교의 신 개념 자체가 폭력적이라서 그런 건 아니라고 항변할 지도 모르겠다. 물론 어리석은 인간의 잘못임은 너무나 분명하다. 하지만 기독교가 자행해왔던 폭력사는 거의 대부분이 신의 이름으로 살인과 전쟁이 저질러졌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조찬선, <기독교죄악사>(평단문화사) 참조, KBS다큐 <신의 나라 인간의 나라> 3부작 참조). 신실한 크리스찬 신앙을 표방하는 많은 사람들이 마치 자신이 하나님의 대리자인양 심판을 빌미로 해서 다른 생명들에게 폭력을 자행해왔던 것이다.

혹자는 그러한 사건들은 세계사적인 매우 큰 사건들이 그러했을 뿐이고, 우리네 기독교의 일상과는 거리가 먼 얘기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결코 그렇지 않다. 기존 기독교가 자행하는 폭력은 이미 우리 삶의 일상에서도 여지없이 발견되고 있다. 확성기로 고래고래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고 떠들어대는 열혈 교인들, 동네 장승과 불상을 우상숭배라며 베어버리는 열혈 신자들, 이해되지 않더라도 무조건 믿어야만 한다고 억지 부리는 기독교인들 등등 이런 자들은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접하는 기독교 폭력의 일상들이다. 사실 알고보면 기독교 구원독점주의를 표방하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교리 자체가 기독교 아닌 것들에 대해선 인정하지 않는 태도라서 심각한 폭력을 낳고 있는 점이 있다.

무엇보다 기독교인들은 이해되지 않더라도 억지로라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으라고 강권함으로써 사실상 제 스스로 하나님을 파시스트적인 군주로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존재의 자율적 결정 자체는 기본적으로 그 누구도 심지어 신조차도 침해할 수 없음에도 말이다. 물론 이러한 행태들이 비단 신관 하나만의 문제는 아닐테지만, 어쨌든 여기에는 기존 기독교의 뿌리 깊은 신 관념 역시 부지불식 간에 관여되어 있다는 얘기다. 물론 전능한 신 개념 자체가 폭력적이라는 얘기는 아니다(물론 이론적으로는 정확히 반합리적이다). 그러한 반합리적 신앙의 신념이 삶의 행태로 드러날 경우 폭력적 행태를 띨 여지가 많다는 것이다.

전제 군주왕으로서의 하나님 이해는 그 자신이 마치 신의 대리자인 양 현실에 드러날 때에는 세계 안에 왕노릇 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그러한 자신의 왕노릇이 또다시 군주 모델로서의 하나님 신앙을 지속하게끔 함으로써 끊지 못하는 끔찍한 악순환이 되어 있는 실정이다. 교회의 대형화와 황제식 권력 구조를 지향하고 있는 오늘날의 교계 현실은 전능왕 신앙의 충실한 반영일 뿐이다. 하나님이 힘이 세면 셀수록 힘센 하나님을 믿는 나의 힘도 계속 커지고 확장될 수 있는 기복신앙으로도 이끌고 있다. 믿고 구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복주시고 이뤄주시리라! 자본주의적 성공 신화 및 맘몬주의 신앙도 역시 알고 보면 힘의 과잉에 대한 숭배에 다름 아니다.

과정신학자 그리핀은 말하길, 미국의 패권 외교를 사례로 하여 그 밑변에는 힘의 하나님이라는 제국주의적 신관이 깔려 있음을 갈파한 바 있다. 모든 사물을 통제하는 힘으로 이해되는 전능성은 신을 규정하는 특성이 되어 버렸고, 이것은 서구 사회가 근대 이후에도 글로벌 제국주의를 지향하게 만든 하나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이제 우리는 “전능왕 오소서~”가 아니라 “전능왕 저리 가소서~”를 외쳐야만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한 하나님은 이제 제발 좀 찌그러졌으면 좋겠다.

위계적 이원론, '힘의 과잉'이라는 폭력을 정당화해주고 있는 진리 담론

힘의 하나님을 표방하는 신앙은 당연히 힘의 복음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힘의 복음이 보다 세계만방으로 뻗어나가기 위해선 결국은 진리 담론에도 기대려는 보편화의 작업이 필요했다. 따라서 이들은 결국 ‘힘의 과잉’을 정당화하는 철학 사상을 끌여들였고 이를 기독교 조직신학의 바탕으로서 깔았는데 그것이 뭔고 하니 바로 <위계적 이원론>hierarchical dualism 이었던 것이다(<위계적 이원론>에 대해선 http://freeview.org/bbs/tb.php/e001/58 참조). <위계적>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존재를 성찰할 때 어느 한 쪽이 본질적 핵심적이라면, 다른 한 쪽은 종속적 파생적이라고 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위계적이라고 간파했던 자들은 특히 여성신학자들이었는데 이들은 서구인들의 무의식을 지배해왔던 진리 담론으로서의 이 철학적 이원론의 몹쓸 행태를 무던히도 고발했었다. 왜냐하면 특히 여성의 경우는 약자들 중의 약자로서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도 가장 심각한 피해자들이었고 고통 받는 경험을 한 우선적 민중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오늘날 기독교계의 윗대가리들은 거의가 하나같이 남정네들의 독점 구조로 이뤄져 있는 실정이다. 구성원으로 따지면 여성들이 훨씬 많음에도 말이다. 심지어 이러한 남정네들의 강단 독점 구조가 지극히 성경적이라고 보기도 한다. 선악과를 따먹은 첫 장본인이자 피를 흘리는 여성은 불경스럽고 불결한 존재로서 기본적으로 성스러운 강단에 설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만이 유일무이한 구원의 종교라고 보는 것 역시 이미 다른 종교들에 대해 폭력적인 작태일 뿐이다. 알고 보면 <배타성>이라는 것은 폭력성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자기만 인정하겠다는 의미니까 말이다. 배타적 구원론 입장이 아니면서도 얼마든지 기독교적 정체성 및 선교가 가능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능성을 모색하거나 염두에 두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거의 드물다. 많은 교인들은 배타적 구원론에 세뇌되어 있으며, 그럼으로써 사유의 폭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그 같은 폭력적 사유는 다른 이웃종교인들이 보기에도 매우 혐오스러울 정도다.

기독교는 또한 합리성을 추구하는 자연과학 진영에 대해서도 매우 폭력적이었다. 수많은 종교재판은 수많은 과학자들을 심판하고 처벌했었다. 종교와 과학의 대결 양상은 현대라는 20세기와 21세기 오늘날에 들어서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이른바 창조론(with지적설계) 대 진화론의 대결 양상이 그것이다. 사실상 생물학의 진화론 자체가 유신론이냐 무신론이냐를 말해주고 있진 않지만, 기존의 성서 창조이야기를 협공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기독교인들에게는 마치 진화론 자체가 무신론을 지지하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자연과학자들 중에는 유신론자도 여지없이 많다.

오늘날의 진화론이라는 학설은 생물학이라는 한 분야에서 인정받고 있는 그런 협애한 성격의 이론이 아니다. 이것은 천문학, 지질학, 화학 등등 우주 형성과 지구 탄생을 연구하는 다양한 자연과학 분야들의 성과들과도 맞물려 있다. 따라서 오늘날 진화론을 반대한다는 것은 생물학 진영 하나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현대 과학 진영 전반에 대한 공격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오늘에까지 기독교인들의 폭력성은 과학 교과서에 어떻든지 창조론 혹은 지적설계론을 집어넣고자 혈안이 되어 있다. 혹자는 이렇게 얘기할 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진화론을 밀어내려는 게 아니라 동등하게 교과서에 실리고 싶을 뿐이기에 폭력적인 게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볼 때 동등하려고 보는 그 발상부터가 현대과학 진영의 기본적 룰을 어기는 폭력성이라는 사실이다.

과학은 종교 분야와 다르게 과학 진영의 룰을 따라야 한다. 과학은 학문적 성격부터가 분명한 근거와 추론을 핵심으로서 지향하고 있다. 많은 자연과학자들이 진화론을 아무 검토없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종교 색깔을 띠고 있는 창조론이나 환원불가능한 복잡성 어쩌구하면서 택도 없는 지적설계론을 과학계에 디민다는 것은 정말이지 쪽팔리는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그 옛날 기독교가 천동설을 지지한 것만큼이나 쪽팔리는 역사로 남게 될 것이다. 그 옛날 천동설이 권력을 확보하고 있을 때 초라한 지동설의 등장은 너무나 허약해보였다. 하지만 우습게도 오늘날 근본주의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그 옛날의 천동설을 지지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현대의 진화론을 폄하하는 작태는 지금도 웃음거리지만 사실상 날이 갈수록 더욱 확실한 쪽팔리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며, 결국은 우리 모두가 쪽팔리는 일이라는 점을 알아차렸을 때 머잖아 진화론은 그 옛날 지동설만큼이나 지극히 당연한 과학상식으로서 자리매김 되어 있을 것으로 본다. 찰스 다윈의 한(恨)은 그때쯤이나 풀리려나.. 내가 볼 때 근본주의 기독교는 이론상의 반합리성이 실천상의 폭력성으로 드러날 수 있음을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는 인류사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이제 과학자들도 예전에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을 받을 때보다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지만, 놀랍게도 사탄의 실체는 기독교 밖에 있지 않다. 사탄이 곧 힘의 하나님이며, 적그리스도는 이미 기독교 신앙으로 신앙화 되어 있는 작금의 현실임을 제발 똑똑히 인지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힘의 기독교, 폭력의 기독교여,  반합리적 기독교여, 이제는 가라! 언젠가 너네들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멸망할 때가 올 것이다. 구약시대 예언자들은 하나같이 말했었다. 너 이스라엘이여,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고!! 그런데 놀랍게도 그 외침은 지금도 마찬가지의 패턴을 지니고 있다. 너 기독교여, 뒤바뀌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고~!!!
 
물론 이런 나의 의견에 반대하는 보수 기독교인들은 나에 대해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다. 당신도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지옥 불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비난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기꺼이 냉소를 보내드리는 바이다. 그런 하나님은 없으니까 말이다! 신화가 과거에 있어선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을 진 모르나 지금도 여전히 이를 문자적 사실로만 본다면 그건 현대인의 커다란 오해요 망상일 뿐이다. 그런 "신은 없다. 그러니 마음 놓고 인생을 즐겨라!" 요기까지는 도킨스의 무신론 이론에도 일정 부분 지지하는 어느 새로운 유신론자의 고백이다.
 
다음부터는 현대의 무신론과 새로운 유신론과의 차이에 대해서 언급될 것이다.

(계속 이어집니다)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AI의 가장 큰 위험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죄"

옥스퍼드대 수학자이자 기독교 사상가인 존 레녹스(John Lennox) 박사가 최근 기독교 변증가 션 맥도웰(Sean McDowell)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신간「God, AI, and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한국교회 여성들, 막달라 마리아 제자도 계승해야"

이병학 전 한신대 교수가 「한국여성신학」 2025 여름호(제101호)에 발표한 연구논문에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 서방교회와는 다르게 동방교회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극단적 수구 진영에 대한 엄격한 심판 있어야"

창간 68년을 맞은 「기독교사상」(이하 기상)이 지난달 지령 800호를 맞은 가운데 다양한 특집글이 실렸습니다. 특히 이번 호에는 1945년 해방 후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김경재 교수는 '사이-너머'의 신학자였다"

장공기념사업회가 최근 고 숨밭 김경재 선생을 기리며 '장공과 숨밭'이란 제목으로 2025 콜로키움을 갖고 유튜브를 통해 녹화된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경직된 반공 담론, 이분법적 인식 통해 기득권 유지 기여"

2017년부터 2024년까지의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기독교 연합단체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의 반공 관련 담론을 여성신학적으로 비판한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인간 이성 중심 신학에서 영성신학으로

신학의 형성 과정에서 영성적 차원이 있음을 탐구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인수 교수(감신대, 교부신학/조직신학)는 「신학과 실천」 최신호에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안병무 신학, 세계 신학의 미래 여는 잠재력 지녀"

안병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하엘 벨커 박사(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명예교수, 조직신학)의 특집논문 '안병무 신학의 미래와 예수 그리스도의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자라난다"

한국신학아카데미(원장 김균진)가 발행하는 「신학포럼」(2025년) 최신호에 생전 고 몰트만 박사가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전한 강연문을 정리한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교회 위기는 전통의 사수와 반복에만 매진한 결과"

교회의 위기는 시대성의 변화가 아니라 옛 신조와 전통을 사수하고 반복하는 일에만 매진해 세상과 분리하려는, 이른바 '분리주의' 경향 때문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