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민족과 종교 ; 남북관계의 전망과 한국교회
발표: 박종화(경동교회 담임목사)(한국종교연합주최 2007 평화포럼에서 발표)
출처 : 한국종교연합 http://www.urikorea.org
2.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종교(교회)의 역할
가. 21세기 통일과 평화정착을 위한 교회의 역할
1) 한반도 통일이 21세기가 시작하면서 성취되리라는 희망은 그저 환상만은 아니다. 아무리 닫혀진 사회라 해도 북한은 위에 열거한 시장 경제화의 물결과 정보화 혁명의 물결에 휩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북 간에 아직도 여전한 낡은 적대적 냉전의 대결구도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위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먼저 이 물결에 동승한 남한은 소위 '연착륙' 전략을 구사하여 무리한 충격 없이 북한을 통일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통일에 대한 사명은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는 자명한 일이다. 문제는 여전히 찬바람의 강풍이 몰아치는 남북의 대결구도를 '연착륙 통일'을 지향하는 따뜻한 '햇볕의 나눔'이 되도록 솔선수범 하는 일이다. 예컨대 정치적으로 악 이용 당해 온 경험을 지닌 우리들로서는 불고지죄나 고무찬양죄 같은 낡은 유물이 안기부법의 개악으로 부활되려는 움직임에 앞장서서 저항해야만 한다. 더군다나 1991년 말에 남북 쌍방 간의 합의 하에 어렵게 마련된 남북기본합의서를 휴지화 시키지 말고 실천에 옮기도록 전 교회적 운동을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 앞으로 군사정치 면에서 점증하는 중국과 일본의 군사대국화와 가능한 갈등을 해소하고 동시에 남북의 군사대결 구도를 종식시킬 수 있는 가칭 '동아시아 안보협력기구'가 발족될 수 있으리라 본다. 교회는 이 점에서 진정한 국가안보는 남북을 아우르는 민족안보요, 세계화 속의 진정한 민족안보는 동북아를 포함하는 공동지역 안보의 보장이고, 그것이 곧 세계 안보의 핵심임을 신앙의 입장에서 선포하고 실천되도록 도와야 한다. 이러한 뜻의 안보는 필연적으로 자유와 정의가 내실 있게 포함되는 것이어야 함도 강조해야 할 것이다.
2) 한반도 통일을 앞당기는 데 있어서 북한이 경제적인 빈곤의 구조에서 탈출하도록 돕는 일이 중요하다. 예컨대 독일의 경우, 20여 년이 넘게 동서독간의 상호교류와 협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흡수통일이 된 후의 '충격'은 엄청난 통일비용의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단순히 경제비용만이 아니다. 정신적 충격비용이고, 정치 심리적 소외의 비용이고, 상대적 박탈감의 비용이다. 경제적으로야 발빠른 기술훈련과 투자 효율의 극대화로 상대적으로 쉽게 극복할 수 있겠지만 정신적, 심리적 '인간비용'은 산술적으로 계산할 수도 없으려니와 그 상처의 치유는 최소한 한 세대가 지나야 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한반도의 경우 솔직히 말해서 남북의 관계는 동서독과 같이 비교적 유연한 관계도 아니고, 우리의 성품이 적대적 냉전 갈등의 모범적(?) 추종자로 길들여져 왔던 사실을 감안한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연착륙'은 유일한 대안이면서 동시에 가장 힘든 필연적 대안일 수밖에 없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여기에 우리 교회의 중요한 역할이 있다. 연착륙 시 통일을 모색하고 통일 이후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는 사전 실험이 필요하다. 사회주의 사회, 특히 북한과 같은 지극히 수구적이면서도 폐쇄적인 사회주의 체제가 충격적 돌변의 과정을 피하면서 시장경제 사회 및 정보화 사회로 이행하되 민주적 자유와 평화라는 기본 가치 위에 새롭게 세워질 수 있는 방안을 구체적 실험을 통해 준비하자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서 기독교장로회 총회가 시행하고 있는 것이 바로 헝가리 선교 프로그램이다. 수도인 부다페스트에 선교문화 센터를 건립하고 헝가리 개혁교회와 협력하여 우리는 그들의 장대한 전통에서 유익한 것을 배우고 그들이 지난 40여 년 간의 사회주의로부터 새로운 미래의 열린 광장으로 나오는 데 필요한 도움과 협력을 강구하자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아시아·아프리카처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긴급 지원 식 선교가 아니라 미래의 열린 공동체를 지향하는 정책적 배려의 협력이다. 특히 통일지향의 길목에서 정치 심리적, 경제적, 문화적 이질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광장으로 공동 진출할 수 있는 신앙을 바탕으로 한 에토스와 과제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3) 통일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통일시대를 열어갈 인적 지도력의 개발과제이다. 아무리 과학과 기술문명이 발전한다 해도, 그것을 움직이고 조정하며 사용하는 것은 인간 자신이며 더욱이 훈련받은 지도적 세대일 수밖에 없다.
시장경제화 및 정보화 혁명 물결 속에서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인력자원이 크게 장래의 지도력을 인정받고 있는 것도 고무적인 현상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한 여론조사 기관이 1993년 4천 명의 미국회사 경영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어떤 조건을 갖춘 중역이나 관리자를 찾는지 자격 구비 조건을 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공동의 답이 나왔다고 한다. 아시아 - 태평양 출신에 2개 국어 이상의 언어 구사력, 최소한 한 가지 학위, 가능하면 미국 일류 대학의 경영학 석사학위(MBA), 두 나라의 학위 소지 등을 조건으로 꼽았다는 것이다. 상당히 희망적인 조사 결과인데, 앞으로 통일된 한반도의 미래를 이끌 새로운 지도력 양성이 한반도의 장래를 가름할 핵심이다. 정보화 사회에 적응하면서 동시에 다문화 - 다변화되어 가는 사회를 소화하면서 생산적 공헌을 해 갈 수 있는 일꾼이 양성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교회가 통일을 말하는 본 뜻은 통일선교에 있다. 전혀 다른 사고와 생활에 젖어 있는 북한에 대한 선교는 남한에서의 선교와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다양화의 정도를 넘어서는 관용과 포괄성을 지니되 확신 있는 신앙으로 무장된 인적 지도력 양성이 가장 중요한 과제인 셈이다. 신학대학, 신학대학원, 교육원 등 교육기관의 역할이 새 시대에 맞게 갱신되어 능동적인 미래의 인물 양성에 매진하고, 남신도를 비롯한 평신도 인력의 지도력 개발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는 제도적 틀과 커리큘럼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라 본다. 세계화를 수용하되 한국식의 독특성이 발휘되는 선교적 리더쉽 개발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본다.
나. 평화와 통일성취를 위한 당면 과제 몇 가지
1) 민족과 민중의 문제
우리가 통일을 민족통일이라 규정할 때 통일신학은 필연적으로 민족 문제를 신학적 과제로 취급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통일을 담지하는 주체가 곧 민족이요 통일의 삶이 곧 민족 공동체적 삶이기 때문이고 신학적으로 말해서 이 삶을 어떻게 구원에 이르는 삶으로 만들어야 하는가의 과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신학은 일종의 '민족신학'이며 통일신학을 말하고 실천하는 교회는 '민족교회'라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민족은 분명히 공동체적 인간 집단의 한 단위이다. 민족은 신학의 주제일 수 있다. 신학을 몸으로 살아갈 주체일 수 있다는 점에서이다. 다만 필자는 민족과 민족주의는 구별한다. 예컨대 민족주의는 그 동안의 역사에서 크게 두 가지 현실체로 등장했다고 본다. 하나는 강대국 민족이 자신의 지배체제를 공고화하기 위해서 만든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이다. 세계 제2차 대전 직전까지 세계를 긴장과 불안과 고뇌에 싸이게 했던 독일 나치의 게르만 민족주의와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워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 각 민족을 식민지로 짓밟은 일본의 속칭 신도 민족주의가 그 실례에 속할 것이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결코 신학의 대상일 수 없다. 오히려 신학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주제이다.
또 다른 민족주의가 있다. 그것은 곧 제1세계의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의 패권 때문에 구조적으로 식민주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된 이른바 제3세계의 민족주의가 구조적 해방운동으로 결실된 '해방민족주의'이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필연적으로 신학의 과제로 등장한다. 예컨대 남미의 상황에서 이러한 민족주의적 해방운동이 해방신학과 연결되어 등장한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반도 상황에서 볼 때 분단국가의 과제는 민족해방의 과제와 직결된다. 필자의 견해로는 민족해방이 반드시 민족주의적 해방과 동일시 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것은 민족주의가 경우에 따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화석화될 위험성이 따르기 마련이며, 신앙의 입장에서 보면 어느 특정 이데올로기와 신앙이 동일시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민족해방의 과제가 폐쇄된 이데올로기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이 반드시 에큐메니칼 차원으로 승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말하자면 모든 민족들의 자주성과 독립성이 철저히 보장되고 인정되는 민족다원성을 전제로 하되 다양한 민족들이 그들 나름의 특징과 독자적 주체성을 갖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는 공동의 광장에 모이도록 하는 신학적 연결고리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점이다. 민족적 다양성 속의 신학적, 신앙적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예컨대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존'(JPIC)이 이러한 다양성 속의 일치를 가능케 하는 중요한 알맹이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오늘날 동구라파가 당면한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그 동안 동구라파는 민족자주나 민족주의를 철저히 봉쇄한 채 무산계급 내지 '근로인민대중'(북한은 이렇게 부른다)의 세계적 연대를 주장하고 이데올로기화 해 왔으나 동구권체제의 붕괴는 곧 억압된 소수민족들의 국가적 독립으로 귀결되었다. 민족독립, 민족해방의 과제를 신학적 과제로 취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동구권의 경우 현재 주류를 이루고 있는 정교회를 동일하게 유지하면서도 독립된 소수민족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재구성하려는 노력이 경주되고 있는데, 이 점은 동구권 민족 교회들의 시급한 과제가 되고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의 상황에서 통일을 전제로 하는 일종의 통일신학적 민족신학 내지 민족교회는 한반도 통일이 가져다 줄 평화의 성취를 한반도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세계평화의 한 구성요인이요 지렛대로 승화시킬 수 있고 또 승화시켜야 한다는 전제를 목표로 출발하고 결실 맺는 구체적 신학작업을 이루어야 한다.
이와 함께 중요한 관건은 민중의 문제이다. 한국의 민중신학과 남미의 해방신학이 모두 민중을 역사주체로 강조하고 있다. 민족이 중요하다 해도 민족을 대표하고 구성하는 자들을 민중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복음을 만민에게 공평하게 전하면서 우선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주신 근거 위에서 민중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신학적 틀로 삼게 되는 것이다.
한국적 상황에서 그 간 민중신학이 냉전 체제 하에 거부감과 비판의 대상이 되어 온 것도 사실이지만 이제 그러한 외적 상황이 크게 변모한 시점에서 민중신학이 추구하려는 민중 문제는 냉전 이념의 굴레를 벗긴 마당 위에서 통일과 더불어 신학적 과제가 된다. 특히 남북 통일이 성사될 경우 북한의 절대 다수 민중이 바로 우리가 일차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선교의 주 대상이요 구원받을 주체이므로 이러한 평화통일 지향의 민중신학이 진지하고 견실하게 발전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반민중적인 북한 체제의 기득권 세력을 심판 없는 통일-평화의 일방적 주체로 용납해 버리는 소제국주의적 민족주의에 빠지는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민중공동체가 정의로운 평화공동체로 탈바꿈해야 할 경우 분단의 희생 제물로 가장 큰 고통을 당한 남북한 민족이 통일의 과정이나 통일 국가에 공동주체로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이 진지하게 검토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2) 공동안보와 환경평화의 문제
한반도의 남북 쌍방은 그 동안 국가안보 문제를 최대의 관심사로 삼아왔으며, 그 안보를 남북 쌍방이 군사안보로 틀을 잡아 각기 정권 안보의 수단으로 역이용해 온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또 엄청난 인적, 물적 자원을 군사안보를 위해 투입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세계적으로 또 동북아시아 상황에서도 냉전의 틀이 와해되면서 화해와 공존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민족과 국가가 존재하는 한 안보의 문제는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남한은 북한을 적으로 상정한 군사적 국가안보를 펼쳐 왔고 북한은 남한을 적으로 상정한 국가안보를 펼쳐 왔다. 통일이란 바로 이러한 적대적 국가안보체제의 근본적 변혁을 뜻한다. 말하자면 어차피 남북통일이 이루어질 것이고, 통일 이후의 안보는 남과 북을 합친 범민족적 안보체제일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민족단위의 '공동안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안보는 필연적으로 남북 간의 긴장완화와 함께 군비축소를 의미한다. 축소된 군비를 사회복지와 평화사업으로 전용하여 민족의 공동복지와 공존공영을 세우는 일에 써야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힘의 우위에 의한 약육강식의 '팍스 로마나'가 아니라 남북 모두의 평화를 말하는 화해된 민족을 위한 '그리스도의 평화'가 깃든 샬롬인 것이다. 나아가 남북을 합친 공동안보는 동시에 주변 강대국들과의 공동노력을 통해 상호간의 군비축소와 지역적 평화구조 정착을 위한 전체조건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평화통일신학이 다뤄야 할 안보와 연관된 평화는 남북한의 민족공동체 형성만이 아니라 동북아의 '평화적 대화' 형성을 위한 신학적, 현실 윤리적 방안을 모색하는 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
또 하나 중요한 과제가 있다. 그것은 곧 환경평화의 문제이다. 평화는 단순히 인간공동체 간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환경 공동체와의 관계를 포함한다. 예컨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환경오염으로 말미암은 삶의 질의 저하에 얼마나 고통을 겪고 있는가는 말할 필요도 없는 비극적 상황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 구원만이 아닌 피조세계 전체의 구원이다. 환경오염과 환경파괴로 말미암은 인간의 고통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통전적 구원 계획을 새삼 일깨워 줄 계기가 되었다. 이런 뜻에서 우리는 주로 인간 구원에 초점을 맞춰 온 '구원신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창조신학'에 대한 신학적 노력과 실천에 매진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인간집단, 민족집단 간의 평화만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환경과의 평화가 하나님의 샬롬에 담긴 내용이기 때문이다.
3) 민족 구원과 교회 일치의 문제
통일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선교의 문제일 것이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전체적으로든, 개별적으로든 '북한선교'에 대한 엄청난 열의를 보이고 그에 따른 준비를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중요하게 고려할 사항이 있다.
먼저 북한 선교는 남한 교회의 북한에 대한 일방적 선교라는 점이다. 정치적 용어로 말하자면 선교적 흡수통일 방식이다. 그러나 정치 현실에서는 실제적 이유를 들어 흡수 통일은 포기한 상태이며 또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이 정치적 공감대로 되어 있다. 북한측이 그러한 흡수 통일을 허용하지 않을 것임은 물론이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제기되는 것이 쌍방의 체제를 현실적으로 인정한 바탕 위에서 교류와 협력을 할 수 있는 방안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통일 중간 단계의 구상이 교회의 선교에 있어서도 필요한 것이라고 본다. 북한 선교는 '한반도 선교'이어야 하고 북한교회 나름의 상황에 따른 선교를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길을 마련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북한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중간 단계의 선교 접근 방법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사실은 교회의 문제이다. 남북한이 통일을 하는 마당에 남한교회에 엄청난 시련을 안겨준 교회분열은 극복되어야 할 과제이다. 더구나 북한교회는 비록 초년기의 열악한 교회이지만 남한처럼 교파주의적 분열의 희생물은 아니다. 결국 북한에 세워지고 확대 될 교회는 출발부터 '하나의 교회' 모습을 지켜가야 하며 그런 방향으로 남북교회들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곧 한반도 선교를 위해 남한 교회들이 교파단위별 또는 개교회단위별 선교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인식 하에 통일 준비를 계기로 하여 '통합 선교'의 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이러한 통합 선교는 그 동안 한국교회의 고질적 분열병을 치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셈이다. 이러한 통합 선교를 통해 갈라진 교회들의 일치를 새롭게 변화된 현실에서 진지하게 추구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교회 일치의 문제는 단순한 이론적 대상이 아니라 한반도 상황에서는 바야흐로 실천적 과제로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곧 선교공동체라 자부하는 교회들 상호간의 '평화와 화해'를 이루는 중요한 작업이다. 다만 이러한 교회들의 평화와 화해는 교회 자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민족 구원을 위한 선교적 실존의 틀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관건이다. 지금이 바로 교회 일치를 위한 선교 일치와 평화통일신학을 추구하고 실천에 옮겨야 할 때이다.
4) 동북아 집단 안보·평화를 위한 노력
한반도 문제는 적어도 안보와 평화 영역에 관한 한 남북이 홀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민족주체가 중요한 만큼 주변국가들과의 개방적 자세 또한 중요하다. 세계에 대한 열린 태도 없는 민족주체는 편협한 민족주의 내지 국수주의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더구나 이론의 차원을 떠나 지정학적 현실로도 한반도 중심의 권역집단 안보는 분단 현실의 극복말고도 통일 이후의 평화로운 생존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예컨대 남과 북이 몇 차례 강조하고 공동선언을 한 대로 남북상호간의 불가침 선언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하지만 남북 간의 상호신뢰도가 완벽하지 않은 상황에서 상호간의 불가침 선언은 국제적인 담보가 필요하다. 예컨대 현재의 휴전협정을 평화조약으로 탈바꿈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것은 단지 법적 효력을 지니는 조약의 합의만이 아니라 그 조약을 지키겠다는 남북한과 주변 당사국간의 국제적 담보를 담는 협약이고 조약이어야 안심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휴전협정의 서명 당사국들인 중국과 미국의 동의와 참여가 필수적이다. 그래서 남·북·미·중의 4자 회담이 중요한 구도인 것이다. 4자 회담의 성공과 함께 미래 지향적 평화조약이 이루어지려면 주변 당사국들인 일본과 러시아의 동의와 참여 역시 중요할 것이다. 동북아판 '2+4' 구도를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독일 통일을 앞당길 수 있었던 국제정치상의 평화구도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구라파 안보와 협력회의(Conference on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 / 약칭 CSCE)이다. 1975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출범한 CSCE는 당시 냉전의 와중에서 나토 중심의 서구라파와 바르샤바 조약기구 중심의 동구라파가 공동으로 결성했고, 서독과 동독이 여기에 핵심적 위치를 점하게 된 것이다. 통일 이후에도 이 기구의 존속이 필요하여 지금은 '협력회의'가 '상설기구화'(Organization) 되었다. CSCE가 OSCE로 탈바꿈한 셈이다.
독일의 분단이 독일 패전의 결과이고 미·영·불·소 4대 강국의 분할점령에 따른 자업자득의 분단인 이상 통독문제는 동서독의 민족자주 측면보다는 구라파 전체의 평화와 안보 합의라는 국제적 여건이 훨씬 더 중요한 요소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한반도의 분단은 일본의 식민지가 온상이고 미국과 소련이 해방군의 입장에서 진군해 들어와 식민지로부터의 해방과 동시에 분할점령이 고착화되어 이루어진 희생물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억울한 분단임에 틀림없으나, 통일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미래지향적인 동북아 평화구도를 확인하는 바탕 위에 한반도 통일의 길을 찾아야 한다.
한반도 평화조약과 함께 이루어질 수 있는 동북아 안보의 틀은 한반도 통일의 목적인 평화구도 정착의 목적과도 합일되며, 통일 이후의 안보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그런 전제로 남북 간의 경협이 의미를 갖는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 북한과 미국, 북한과 일본과의 수교 역시 우선적으로 실천에 옮겨져야 한다.
CSCE가 단순히 구라파 국가들의 정부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교회를 중심으로 한 민간 차원의 강력한 호소와 뒷받침으로 이루어진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한반도의 종교단체는 물론 여러 시민단체들이 중의를 모으고 주변 당사국들의 대응단체들과도 공동이익을 위한 평화연대를 모색해야 한다. 평화와 통일의 법적, 제도적 장치는 정부 당국의 일이지만, 그것을 몸으로 살고 실천하는 주체는 역시 국민이요 시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이 글은 2000년 6월 가톨릭종교문화연구원이 주최한 제3회 국제학술 세미나에서 발표했던 것으로, 약간의 보완과 편집과정을 거친 것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