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민족과 종교 ; 남북관계의 전망과 한국교회
발표: 박종화(경동교회 담임목사)(한국종교연합주최 2007 평화포럼에서 발표)
출처 : 한국종교연합 http://www.urikorea.org
민족과 종교
-남북관계의 전망과 한국교회-
박 종 화 (경동교회 담임목사)
1. 21세기 한반도의 상황과 종교(교회)의 역할
가. 21세기에 등장하는 세계의 구조조정
1) 지난 1989년은 세계의 구체제 종말과 신체제 등장의 분수령이었다. 그것은 구 소련을 비롯한 동구 사회주의 체제가 일거에 붕괴됨으로써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공산 세계와 자유 세계로 양분되어 적대적 갈등과 대립을 벌여 오던 냉전체제가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2) 정치이념과 군사적 대결이라는 동서 냉전체제는 무너졌지만, 부유한 북반부와 빈곤한 남반부 상호간의 남북 빈부 갈등과 격차는 오히려 심각해지고 있다. 온 세계가 처절한 경제적 경쟁체제로 치닫고 있다. 이것은 신 냉전 또는 열전체제라 할 수 있다.
3) 빈곤한 남반부 국가들이 미소를 축으로 하는 냉전체제에서 양쪽을 오가며 줄타기 전략을 구사하던 생존방법도 종말을 고한 셈이고, 부유한 북반부 세계는 서구 연합권(EU), 북미주 연합권(NAFTA)과 아태권(APEC)의 3각 경쟁체제로 재편되고 있다.
나. 새로운 중심 축인 동아시아권의 성격과 한국의 미래
1) 아시아의 중심은 동아시아이다. 특히 일본을 중심으로 하고 작은 네 마리 용(한국, 홍콩, 대만, 싱가포르)을 주변 무대로 축을 이루어 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일본의 위력이 이미 절정에 이르러 앞으로 하강국면에 접어들 것임을 알려 주는 징후가 보인다. 교육제도며 종신고용제와 엄격한 규제를 바탕으로 하는 수출주도형 기업경영이라는 부러움을 사던 모델이 더 이상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1995년 들어 세계 최고의 경쟁력 보유국의 자리를 미국(1위)에 물려 주고 싱가포르(2위)와 홍콩(3위)에 이어 일본이 4위를 마크하고 있다는 보도이다.
2) 아직은 워싱턴-도쿄-베를린 삼각구도의 일원으로 일본이 상당 기간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겠지만,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보다 큰 위력을 중국이 발휘 할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중국의 경제규모가 지난 6년 만에 2배로 늘어났고, 수입은 매년 25%씩 증가하고 있으며 수출액은 세계 4위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 문제와 관련하여 두 가지 사항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홍콩과 마카오의 중국 반환이다. 이로써 서구 식민지적 개입이 종식된다는 정치적 의미와 함께 경제적 함수를 고려해 보아야 한다. 세계적으로는 물론 동아시아의 구조 및 판도의 개편을 몰고 올 것이다.
둘째는 화교 세력의 역할이다. 현재 화교 인구는 5천 7백만으로, 이 중에서 5천 3백만 가량이 아시아에 흩어져 산다. 화교를 하나의 집단으로 볼 때 경제력 규모(자산이 약 2-3조 달러로 추정)는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 3위를 차지한다. 화교 인구가 주축인 싱가포르의 경우 화교가 부의 81%, 인도네시아의 경우 전체인구의 4%인 화교가 부의 70%, 태국은 총인구의 3%에 부의 60%, 필리핀은 인구 4%에 부의 60%, 말레이시아는 35% 인구에 61%의 부를 차지하고 있다는 통계이다.
3) 동아시아의 중심권에 위치한 한국의 위상은 일본과 화교를 포함한 중국의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및 문화적 경쟁과 대결의 와중에서 어떻게 협력적 경쟁을 해나가며, 또 그 나름대로의 자주성을 고양시켜 가느냐에 달려 있다. 일본과는 달리 아직도 적대적 분단의 갈등 때문에 엄청난 고통과 추가부담을 안아야 하고, 힘있는 화교와 달리 재일 교포나 만주 조선족 등 오히려 도움을 베풀어야 하는 교포를 가진 우리 한국으로서는 단순히 중국이나 일본과의 힘겨운 경쟁만이 아니라 아시아의 후발 산업국가들과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여가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다. 21세기의 특성인 시장경제 시대와 종교 및 교회의 역할
1) 생산구조는 소품종 다량생산에서 다품종 소량생산의 전문화 경쟁체제로 이행한다. 최강의 경쟁력과 7조 달러의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미국의 경우 500개의 대기업은 총 경제력의 10% 남짓만을 차지하고, 총 수출품의 50%이상은 종업원 19명 이하의 중소기업이 차지하고, 500명 이상의 대기업은 수출고의 7%를 차지할 뿐이다. 한국의 경우도 문어발식 대기업 중심에서 전문화된 중소기업의 경쟁력 강화가 새롭게 변모하는 전문 분권화의 세계경쟁 구도에서 살아남는 관건이 될 것이다.
한국교회의 구조조정도 비슷하다. 대기업 집중의 거품경제 현상만큼 한국 개신교의 경우도 물량화된 대교회주의가 성장둔화 현상과 함께 위기에 처해 있다. 오히려 신앙 생활의 다양한 욕구와 영적 양식을 알차게 채워 줄 중소교회의 질적 향상이 우선으로 고려되는 구조개혁이 있어야 한다. 점진적 양적 규모의 성장을 꾀하되 내실 있고 경쟁력 있는 신앙의 알찬 공동체로 발전하는 일이다. 성장하는 알찬 교회를 우리는 '성숙한 교회'라 할 수 있다. 성숙한 교회는 전문성과 함께 다양성을 포용하는 체질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기준은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찾아 스스로를 항상 개혁하고 동시에 사회와 세계를 복음의 빛에서 새롭게 변화시키는 일에 헌신하는 데 있다.
2) 시장경제 체제는 다국적 내지 무국적 기업들의 활동공간이다. 예컨대 크레디트 카드 회사인 비자 인터내셔널은 본사가 미국에 있을 뿐 187개 국가 및 지역에 21,000개의 금융기관을 소유하고 있다. 다만 이사회나 지역 집행기관은 어느 한 나라가 표결권의 51%를 갖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신원이 다국적 내지 초국적인 만큼 이를 조정하고 관리할 수 있는 초국적 국제기구의 역할이 증대될 수밖에 없다. UN, OECD, WTO 등과 같은 국제기구의 등장이 그것이다. 이 같이 국제단위의 구조와 지역단위의 전문화 업체가 상호균형을 이루는 체제가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최근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된 노동관계법의 내용 중 복수노조 허용 유예라든가 사회보장 차원에서 해고 기간 동안 보장되는 실업수당이 담보되지 않는 정리해고제 등이 OECD의 노동 관련 원칙과 맞지 않는다는 항의가 노동법 재개정의 또 다른 필요성을 제공한다. 세계화 시대에서 이러한 국제기구는 노동법의 경우처럼 규제의 역할도 하지만, 동시에 보호막 내지 안전핀 역할을 하기도 한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우리가 경험한 UN군의 역할도 그 실질적 예에 속한다.
한국 종교는 물론 기독교는 분명히 한국 상황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출발부터 세계적 종교로서의 성격을 띤 기독교 교회는 세계의 주이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국경, 인종, 문화의 테두리를 넘나든다. 이것을 가리켜 '에큐메니칼 교회'라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국제기구와 한국교회와의 관련이다. 예를 들어 WCC는 본부가 스위스 제네바에 있을 뿐 350여 개에 달하는 회원교단이 140여 개국에 흩어져 있다. 모든 위원회를 비롯하여 최고 결정기구인 중앙위원회 역시 어느 특정국가나 교단 또는 교파가 독점하지 못하도록 선출규정을 민주적 원칙 하에 두고 있다. 150명의 위원을 교파별(예 : 정교회, 장로교, 감리교 등등), 대륙별로 안배하고, 남녀를 50%씩, 성직자와 평신도를 50%씩, 그리고 청년대표를 30% 배정하는 복잡한 방식을 취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회원교회인 우리 한국교회가 한국 땅에서 WCC 그 자체의 역할을 하도록 권한과 의무가 동시에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화와 지역화의 결합적 실체인 것이다. 문화적 차이 때문에 똑같은 구조를 가질 수도 없고 또 꼭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령 우리 한국교회의 총대를 과연 위와 같은 비율로 구성할 수가 있을까? 지금까지 이런 구조적인 문제는 회원 교회마다 차이가 크지만, 선교와 봉사사업 그리고 예배와 성만찬의 경우는 거의 다를 바 없는 초국적 동일체로서 살아가고 있다.
한국교회의 경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제기구나 선진 해외 교회로부터 인적, 물적, 신학적으로 '받는 교회'에 속했다. 하지만 세계에 유례 없는 성장을 기록한 한국교회는 실질적으로 '베푸는 교회'로 탈바꿈하고 있고, 세계 교회들이 실제로 그런 요구를 하고 있다. 그 한 예로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활성화를 위한 모금 기구가 미국, 서유럽에 이어 세 번째로 동북아시아에 세워지고 그 센터가 서울이 된다. 350여 회원 교단 가운데 220여 교단은 지난 몇 해 동안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연간 최소 의무회비인 100달러마저도 납부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의 모금과 기타 헌금은 실제로는 이들 빈국 교회를 위한 것이다.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조건 없이 베푸는 것이 진정한 나눔의 모습이요 에큐메니칼 정신인 것이다.
3) 정부 주도에서 시장 주도로의 변화가 시장경제체제의 또 다른 특징이다. 관영화에서 민영화로, 관 주도에서 노사의 자율협력체제로의 전환이다. 폐쇄적인 관료주의와 획일적인 권위주의가 아니라, 창의력과 자발적 참여가 보장되는 다양성 있는 시민 운동과 시민사회의 등장이다. 시장을 형성하는 생산자 못지 않게 시장의 흐름과 운명을 결정하는 소비자의 구매력과 취향이 결정적인 요인이다. 정치의 경우에도 정부 지도층의 '관심'이 아니라 투표자의 '민심'이 결정권을 갖는 민주사회가 등장할 수밖에 없다.
종교는 하나의 시민사회이며, 기독교의 경우도 시민도덕을 앞서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바탕으로 하여 그 나라의 실현을 목적으로 삼는 특수한 시민사회이다. 따라서 종교 및 교회는 일반 시민사회보다 더 민주적이어야 하며, 더 진실해야 하며, 더 민심에 충실해야 한다. 예를 들어 총회나 노회나 각 단체의 각종 선거는 철저하게 선거공영제로 이루어져야 하며, 필요한 경우 지방화 시대에 걸맞게 후보의 지역단위별 윤번제 실시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사제의 권위가 '지배하는 권위'가 아니라 신자들의 '민심'을 진실로 섬기는 '섬김의 권위'로 탈바꿈해야 한다.
라. 21세기 정보화시대의 도래와 종교 및 교회의 역할
1) 오늘을 가리켜 정보혁명의 시대라 한다. 미래학자 토플러(A. Toffler)는 오늘날 힘 내지 권력의 원천을 더 이상 무력(군사력)이나 금력(경제력)이 아니라 지식 곧 정보력이라고 한다. 정보에 바탕을 두는 세대를 '제3의 물결'이라 칭한다. 이것을 미디어와 연관해 말하면, 제1의 물결에 속하는 농경사회는 역사적으로 중세까지 지속된 시기로서, 이 때의 의사전달 미디어는 군중을 모아 메시지를 구전으로 직접 전달하는 방식이었으며 교회 집회가 그 전형적인 예에 속한다. 모인 '군중'이 바로 미디어인 셈이다. 제2의 물결에 속하는 산업혁명 이후의 대량생산 시대는 우선으로 장거리 통신체제가 필요했으며 그에 따라 우체국, 전신, 전화가 생겨났고, 뒤이어 기술 및 메시지를 수백만에게 전달할 수 있는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가 등장했다. 제3의 물결에 속하는 현재와 21세기는 앞서 말한 대로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의 시장경쟁 구도에 덧붙여, 미디어도 인공위성, 팩스, 휴대용 텔레비전 카메라, 컴퓨터, 복사기 등이다. 이들 미디어는 제2 물결의 독자적 미디어와는 달리 통합적 기능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문자와 전화의 통합으로 팩스가 등장했다. 문자와 컴퓨터가 결합하여 워드프로세서가 나왔다. 문자와 컴퓨터와 전화의 통합으로 비디오텍스트가 나왔고, 전화와 비디오의 통합으로 비디오폰이 등장하여 가정에서 많이 쓰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미디어 통합이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이와 함께 부수적으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산업계의 기업합병 현상이며 대규모 구조조정이다.
미디어의 차원에서 볼 때 종교 및 교회는 아직도 제1 물결 시대의 집회미디어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예배가 그렇고 각종 집회가 그러하다. 오늘날 복음 전달의 매체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것이 소위 제2 물결에 속한 CATV이다. 그런데 텔레비전 예배가 앞으로 전통 예배에서 많은 사람을 빼앗아 가리라는 우려가 높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전통적인 예배를 보다 매력적으로 만들어 보다 많은 사람을 모을 수 있는가를 연구하고 예배의 갱신에 힘써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마주 대하며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가슴으로부터의 예배이며, 이는 텔레비전 화면으로는 도저히 대체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에 유념하면서 심령 깊은 데로의 예배갱신과 활성화가 있어야 한다. 동시에 텔레비전 매체를 어떻게 활용하여 교회로부터 계속 멀어져 가려는 신세대에게, 또 교회와는 상관없는 불특정 시청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가를 연구하고 함께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나아가서 제3의 물결의 미디어 파고가 미래가 아니라 이미 현재 우리 주변에 휘몰아치고 있는 현실에서 첨단 미디어 시대의 선교방안에 대한 모색은 필연적 과제가 되고 있다. 앞으로 몇 년 안에 한국에도 전화, 텔레비전, 컴퓨터 통신망을 하나로 묶어 모든 전파를 한꺼번에 송출할 수 있는 케이블이 깔린다. 엄청난 용량에다 송출 속도도 빛의 속도라 하여 소위 '광케이블'이 이 역할을 할 것이다. 바야흐로 멀티미디어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를 향한 우리의 선교정책과 실천방안이 조속히 나와야 하리라고 본다.
2) 멀티미디어의 등장과 생산의 증가만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광케이블의 등장으로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등 종래 일방적으로 시청과 수신만 하던 데서 수신자나 시청자가 송출자와 대화도 하고 수정 내지 교류를 할 수 있는 쌍방교류의 가능성이 새로 열린다. 그리고 수신자나 시청자 상호간의 수평적 연대와 협력체제의 구축도 가능해진다. 소위 인터넷이라는 시스템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런 정보홍수사회는 엄청난 정보의 판단과 수용에 있어서 혼란을 초래할 수 있고 동시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격차를 훨씬 더 크게 만든다. 그렇지 않아도 경제적 빈부 격차로 고난받는 제3세계는 이와 더불어 정보화 고속도로 속에 참여가 불가능해지면서 삶의 공간 역시 소외된 게토로 남을 수밖에 없게 된다. 빈부격차는 곧바로 '무식자'와 '식자'의 구조적 격차를 심화시킬 위험성이 다분히 있다.
교회는 말씀과 친교의 공동체로서, 멀티미디어의 정보 홍수 속에서 먼저 그 속에 담을 메시지를 정보화 시대에 맞게 개발해야 한다. 특히 정보화 시대로 도덕이나 가치규범이 상대화되고 물류화됨으로써 상대적으로 가치하락 내지는 찬밥신세를 면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종교와 신앙과 같은 규범 역시 위태롭게 된다. 여기서 교회의 책무는 신앙의 가치를 1, 2, 3 물결 모두의 심장을 꿰뚫고 들어가 움직이는 제4 물결로 승화시켜 가야 할 책임이다. 특히 공산주의의 몰락 이후 냉전은 사라졌지만 그 부산물로 물량주의와 정보주의 등이 하나님과 신앙의 역할을 대신하는 대리종교의 역할을 수행하는 신 세속주의가 팽창하고 있는 현실에서, 교회는 다시금 복음의 메시지가 영원불변한 삶의 길임을 밝혀야만 한다. 동시에 인간이 온갖 정보체계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임을 선포하고 그 실천방안을 강구하는 새로운 의미의 인권회복 운동이 강력하게 일어나야 한다. 인간의 문명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기저 위에서만 신뢰할 수 있다는 원초적 신앙과 신학의 강조가 교회의 사명일 것이다.
3) 정보화 시대의 출현과 함께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날 현상은 노동집약 산업에서 첨단기술 산업으로의 변화이고 이것은 곧장 엄청난 노동력의 투입 감소로 이어진다.
실업률의 증가는 생산노동보다는 소비문화의 창출과 여가문화를 발흥 시킬 것이다. 더구나 1945년 대비 1990년의 세계인구는 두 배로 불어난 50억이고 이대로 간다면 2030년경에는 두 배로 불어 100억 인구가 예상된다. 그렇게 되면 정보화 이전에 식량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될 것이다. 더구나 식수 문제가 엄청나게 심각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도 중동지역 17개 국가 중에서 14개국이 식수의 절대부족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
교회는 지금까지 생산노동과 관련된 평일의 기독교윤리와 신학은 많이 개발해 왔으나, 앞으로는 진정한 의미의 안식일 신학을 새롭게 개발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단순히 쉼의 의미가 아니라 문명의 이기에 속박 당한 '바빌론의 포로'에서 새로운 인간해방의 과제가 그것이다. 동시에 환경과 관련된 창조의 신학과 신앙이 새롭게 일어나야 한다. 경제생활과 환경생활의 조화 있는 협력을 생활화하는 운동이 펼쳐져야 할 것이다.
세대차가 심화된 상황에서 교회는 신세대를 위한 새로운 선교적 접근과 기독교교육 방안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이와 함께 연령구조가 급격히 변화하는 현상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현재 한국을 포함한 OECD 가입국들의 인구노령화 현상은 심각한 수준이다.
의학의 발달로 인해 현재 60세 이상의 노령인구가 전체 인구의 20%를 차지하고 있으며, 2020년에는 30% 이상을 차지하리란 전망이다. 따라서 노령인구를 개인이나 가족단위 또는 사회보장 제도로 부양하고 뒷받침할 생산노동 인구의 감소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다. 교회는 이런 상황에서 중장기적으로 복지선교에 대한 대책을 시급히 서둘러야 한다. 기독교장로회 총회가 복지선교 법인으로 인정받아 이 일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