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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길]무기력하신 하나님을 오히려 더 신뢰할 줄 아는 믿음 신앙

제목 : 무기력하신 하나님을 오히려 더 신뢰할 줄 아는 믿음 신앙       
글쓴이 : 정강길(세계와기독교변혁연구소 연구실장)
자료출처 : 세계와기독교변혁연구소 http://freeview.org/

 

  
어느 한인교회 목사님의 고뇌, "하나님은 병을 치유하지 못했고 어린 소녀는 죽고 마는 현실"
 
미국 아틀란타에서 뵙던 목사님들 중에서 마침 장소 제공과 식사로 우리를 맞이해주신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얘기다. 이분은 그날 짧은 시간에 강연했던 본인의 "기존 기독교의 붕괴와 새로운 기독교의 도래"에 대해 도전과 자극을 받았다고 하시면서 나와 헤어지는 마지막 시간까지도 내게 자신의 옆자리로 오라고 하시면서 무척이나 이것저것 많은 것을 궁금해하시고 묻곤 하셨다. 그런데 얘기를 나누고보니까 목사님께서 그렇게 하셨던 그 어떤 배경이 하나 있었다. 이분께서 털어놓으신 얘긴 다음과 같다.

자신의 교회에 16-7세 정도의 어린 나이의 착하고 이쁜 소녀가 있었는데 어느날 그만 암에 걸리고 말았다고 한다. 그런데 너무나 이쁘고 착한 소녀여서 하나님께서 나이 어린 그 소녀를 그렇게 일찍 데려가실 리가 없고, 틀림없이 착한 소녀의 병을 낫게 해줄 것이라고 믿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목사님께선 전교인들과 함께 그 소녀의 병을 확고하게 낫게 해주실 것으로 믿고 거의 매일마다 눈물로서 통성기도를 올리면서 하나님께 간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목사님은 물론이고 전교인들 모두가 그 소녀의 병이 틀림없이 나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하나님께서 그 소녀의 병을 확실히 치유해주실 것을 당연스럽게 믿고 있었다고 한다.

아, 그러나 하지만 아랑곳없이 그 소녀는 결국 죽고 말았다.
그토록 기도를 열심히 하며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도
그 착한 소녀는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하고 만 것이다.

이 사건 이후로 그 목사님께선 도무지 교인들에게 설교를 하기가 힘들다고 솔직하게 토로하셨다. 전교인들도 허탈해 할 정도였고, 목사님 자신도 말할 나위 없을 정도로 허탈한 심정에 빠져 어쩔 줄 모를 정도였다고 하였다. 이른바 도저히 이해되지 않은 사건을 체험하게 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어떻게 해야 좋으냐고 마지막 헤어지기 전쯤에 내게 물어오셨다.

일단 그 자리에선 약간의 위로와 나름대로의 내 생각을 조금 말씀을 드리고서
시간이 없어서 결국은 서로의 연락처를 나누며 그렇게 헤어졌었다.

세계 안의 이해되지 않은 악과 고통에 대한 체험들은 오히려 더 깊은 신앙 성장의 기회

내 생각에는 목사님과 교인들은 그러한 착한 소녀의 죽음을 통해 아마도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 이른바 악과 고통에 대해 무기력한 하나님을 만난 것이라 생각된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신정론에 대한 고민에 해당될 것이다.

흔히 이런 경험에 대해 보수 기독교인들의 답변들은 대체로 말하길, "그런 사건들은 우리 같은 미천한 인간은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서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하나님의 뜻일 따름이지. 우리 인간들은 단지 그 분의 뜻에 따를 수 밖에 없어"라고 곧잘 얘기하곤 한다. 물론 인간이 하나님의 크신 뜻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탐구와 이해 자체를 그만둬야 한다는 식으로 봉쇄할 수는 없다. 혹자는 "그딴 것 알아봐야 어차피 정답도 아니니까 그런 시도들은 부질없고 소용없어"라는 식의 답변들을 하는데 내가 볼 때 그러한 반응이야말로 하나님의 크신 뜻을 아는 기회를 가로막는 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내가 볼 땐 그러한 사건들은 오히려 신앙 성장의 커다란 기회라고 본다.

혹자는 말하길 기독교인들 가운데 기도해서 병이 나은 경우도 있지 않느냐 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신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볼 때, 기도로서 병이 낫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거의 있을 수 없을 정도의 매우 희박한 경우일 따름이며, 거의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이 정직한 현실이라고 여겨진다. 즉, 확률 및 통계로 놓고 보면 사실상 병이 낫는 경우보다 병으로 죽는 무신론적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신이 있다는 증거가 결코 못된다. 그런데도 성급한 유신론자들은 그 1%의 차원이라도 그것만을 부각시켜서 이를 신이 있다는 증거로 내세우는데, 그런 식으로 엄밀하게 따질 경우 오히려 99%의 무신론적 차원이야말로 정직한 현실로서 손을 들어주는 게 보다 공정한 시각일 것이다.

또한 종교의 힘으로 병이 낫는다고 해도 그 같은 경우는 기독교안에만 해당되는 현상도 아니다. 그것은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하는 우리 조상들의 무속 신앙에도 있었고 세계 안의 많은 다양한 종교 생활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엄격하게 따지면 여전히 무신론적 차원이 보다 더 거부할 수 없는 현실적인 상황인 것이다.
 
잘못된 신관에 사로잡히면 이해할 수 없는 모호한 껄끄러움으로 남게 되며,
오히려 그러한 신관을 솔직하게 바꿀 때 더 나은 이해와 설명으로 인도되어진다.

앞에서 말한 그 목사님의 고뇌나 이해하지 못하는 반응을 보이는 이유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이해부터가 잘못된 신 이해 및 신관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그 같은 현실의 사건에 대해선 잘 들어맞지 않은 것이다. 이른바 기존 기독교가 채택하고 있는 주류 신관은 <초월적 유신론>으로서 신을 전능자, 절대자, 완전자로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세계 안의 악과 고통의 현실과는 당연히 맞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신관에서는 악과 고통의 대한 책임성까지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자비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과정신학자들은 말하길, 악과 고통의 문제에 있어서 신은 전능하지 않거나 자비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논리적으로 악과 고통의 현실 문제와 자비하신 전능한 하나님은 결코 양립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애초부터 양립가능하지 않은 것들을 두고서 계속 씨름하려니까 당연히 이해되지 않는 쪽으로만 기울어지게 되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귀결인 셈이다. 사실상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실제로는 매우 취약한 하나님상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신관에 빠져 있는 것이 오늘날 주류 기독교의 현실이다. 어쩌면 비슷한 뿌리를 두고 있는 유대교와 이슬교의 신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된다.

성경에는 두 가지 상반되는 하나님 이해가 있다. 하나는 어린아이와 여자들까지도 남김없이 쳐죽이라는 정복적이고 야만적인 하나님 이해가 곳곳에 있는가 하면, 다른 하나는 반대로 약자의 아픔에 함께 하고 있는 해방과 구원의 하나님 이해가 함께 깃들어 있다. 혹은 자신의 딸이 처녀가 아님을 증명하지 못하면 돌로 쳐죽여야 한다는 구절이 하나님 말씀으로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신22:13~21). 하지만 반대로 남자는 총각임을 증명해야 한다거나 하는 구절은 성경 그 어디에도 없다.

흥미롭게도 오늘날 많은 목사님들은 그와 같은 매우 껄끄러운 성서 본문들은 설교 본문으로 취하지 않는다. 그저 매우 이해하기 힘들기에 보통은 피할 따름이다. 자 그렇다면 그와 같은 부조리한 현실 상황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모든 현실 사건들의 1차적 책임은 현실 존재에 있을 뿐

만일 순박한 농부가 비를 피하다가 벼락을 맞는 경우가 있다고 하자. 그것은 정말로 하나님의 뜻인가? 그것은 또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역시 설명불가라서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불가지론으로만 돌릴 것인가? 요즘은 백퍼센트 자연재해란 것은 없고 생태환경의 재난 역시도 인간의 영향과 책임성을 강조하는 인재로서 얘기하기도 한다.

이제부터 나 자신이 설명하고자 하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기존의 하나님 이해에 대해 보다 많은 고정관념들을 뒤바꿔야 하는 인식의 새로운 전환을 요구한다. 좀더 자세하게 풀려면 많은 썰을 풀어야 하기에 여기서는 그냥 간략하게만 설명해두고자 한다.

일단 인간을 포함해 자연과 우주 세계 전체 모두를 떠올려보자. 그리고 이러한 우주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의 원자 수준을 떠올려보자. 이 원자적 존재를 현실 존재(actual entity)라고 부르자. 이 원자적인 현실 존재는 매순간 생성 소멸할뿐더러 상호 관계적 영향에 놓여 있는 관계적 존재다. 하나의 원자적 현실 존재의 생성에는 그때까지의 전체 우주가 관여해서 빚어낸다.

이러한 원자적인 현실 존재의 조합들로 인해 이 우주는 무기물-유기물-식물-동물-인간 등등 자연세계가 구성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이며 모든 현실 존재는 기본적으로 자율적 결정을 지니고 있다. 즉, 아원자 수준의 생성 소멸하는 현실 존재의 차원부터 기본적으로 이미 자율적 결정을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자율적 결정 자체는 신(God)조차도 침해할 수 없는 영역인 것이다.

모든 현실 존재들이 지니고 있는 자율적 결정들이 보여주고 있는 그러한 자유의 폭은 무기물-유기물-식물-동물-인간으로 올라갈수록 존재의 자유의지 현상이 보다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을 따름이다. 현대 양자물리학에서도 말하길, 사물의 원리에 대한 절대적인 법칙이란 없다고 말한다. 단지 확률적 근사치로서만 얘기할 따름이다.

따라서 우주 세계의 온갖 사건들은 환경이라는 타자원인성과 자기결정이라는 자기원인성이라는 두 가지 기본 요인에 의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사건의 책임은 근원적으로 환경을 구성하는 전체 우주 및 자기결정을 내리는 현실 존재 그 자신에 기인한다.
 
그렇기에 세계 안의 온갖 재난과 불행의 사건에 대해 1차적으로 신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없다. 실제적으로 그러한 사건들의 원인은 신이 아닌 그때까지의 현실 세계 전체 및 해당되는 그 원자적 존재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생각과 자아를 가지는 차원도 어디까지나 그러한 원자적 존재들의 구성에 기인한다. 사건의 1차적 책임은 자율적 결정을 가지고 있는 모든 현실 존재들에게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은 도대체 어떤 역할을 하는 존재인가? 라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존재인가?

현실 존재와 관계하는 연약하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

신은 모든 현실 존재들에게 더 나은 비전으로 향하도록 끊임없이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해주고 있는 또 다른 존재다. 즉, 생성 소멸하는 모든 원자적 현실 존재의 첫 국면에 가장 최선의 선택지라는 가능성을 부여해주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현실 존재들은 자율적 결정의 자유가 있기에 이를 거부할 수 있는 자유 역시 지니고 있다.

인간의 차원은 경험의 다양성이 갖는 폭이 넓은 만큼이나 신이 끊임없이 제공해주고 있는 구원으로 가는 희망의 가능성을 여간해서 곧잘 인지하지 못한다. 깨달은 자는 그러한 신의 손길에 눈을 뜨겠지만 실제적인 현실은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무명에 갇혀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신은 현실 세계에 대한 구원의 길을 비춰주고 있는 영원한 동반자이자 안내자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사랑과 설득으로서 우리를 유혹하시는 분이시다. 마음의 눈을 열고 눈을 뜨면 그것은 어디에나 가득 차 있음을 느낄 수 있으며 볼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맨처음 목사님의 고민으로 돌아가보자.

솔직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은 백혈병에 걸린 딸 앞에서는 무기력하다. 저 아우슈비치 수용소에서 죽어갔던 대학살의 현장 또한 역시 마찬가지로 무기력하다. 세계 안의 온갖 악과 고통에 대해서 참으로 무기력하신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그러한 부조리한 고통의 현장에선 하나님 역시 같이 병을 앓고 죽어가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가? 나는 분명히 말한다.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은 사실상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마저도 버린 십자가의 현장에서 처형당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내가 볼 땐 보다 더 깊은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차원이라고 여겨진다.

언뜻 십자가 현장에서만 보면 하나님은 무기력하게만 보인다. 그저 죽어갈 뿐이니까. 그런데 여기에 놀라운 역설이 깃들어 있다. 그렇게 무기력하게 죽어갔던 하나님이 또다시 부활되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무기력하신 하나님이란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하나님을 뜻한다. 세계 안의 온갖 부조리한 상황의 비극적 사건들은 신 없는 현장이며, 신이 처형당하고 있는 삶의 현장들이다. 


그런데 이제 그러한 비극의 현장들이 놀랍게도 부활하여 역사를 새롭게 밝혀주기도 한다. 아우슈비치 수용소에 일어났던 유대인 학살의 죽음이 이제는 어둠을 뚫고 나와 인류 역사를 새롭게 일깨워주고 있는 빛이 되었다. 인류는 더 이상 그 같은 비극을 되풀이해선 안된다는 엄중한 경고를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무신론 이후의 새로운 유신론에 대한 이해가 미흡한 실정

다시 말씀드린다면, 나는 세계 안의 온갖 악과 고통에 대한 경험들은 신이 새롭게 일깨워주고 있는 희망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인해 인류의 건강한 삶을 위한 창조적 전진으로서 새롭게 부활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전에 없던 새로움의 차원은 무신론적 지평에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오직 유신론적 지평에서만 설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 이해는 기존의 낡은 유신론이 아니다. 보다 새로운 신 이해로서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신의 차원을 온전히 이해할 때만이 나올 수 있는 그러한 신 이해인 것이다. 신은 결코 전능하지 않다. 오히려 연약하다. 하지만 그 연약함으로서 새롭게 부활한다. 그것이 이 세계의 악과 고통에 대해 늘 함께 하고 있는 신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심지어 자신은 보수 기독교인이 아니라 생각이 열려 있는 진보적이라는 기독교인들도 현재로선 무신론 이후의 새로운 유신론에 대해서는 그 고찰이 매우 미흡한 실정이다. 대체로 이들조차도 그저 신 존재 이해를 신에 관한 담론으로 치부하거나 신 존재를 그 어떤 원리나 법칙으로 환원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혹은 자신에겐 약간 어렵다는 이유로 별로 잘 알아보지도 않은 채로 자신의 지적 태만을 정당화하거나..

새로운 유신론에 대한 무지 현상은 나 자신이 지금도 존경하고 있는 존 쉘비 스퐁이나 돈 큐빗 같은 매우 솔직하고 리버럴한 세계적인 진보 신학자들에게서도 발견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안타까운 점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이들에게 있어 신 존재는 자율적으로 활동하는 존재라고 할 수 없는 다른 원리나 법칙 혹은 무신론적인 것으로서 환원되어 있다. 내가 보기에 무신론 이후의 새로운 유신론을 존재론적으로도 설파하는 유일한 신학 진영은 <과정신학> 진영이다.

이러한 과정신학의 원류는 알다시피 화이트헤드의 유신론 철학으로서 이것은 니체 이후로 죽어버린 신 존재를 어떻게든지 살리고 싶어서 그러한 소명감에서 개발된 갓잖은 나이브한 신 이해가 아니다. 즉, 신이라는 존재를 먼저 전제하고서 전개해간 사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실의 모든 다양한 경험들과 현대 자연과학의 성과를 모두 받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논리적 정합성(coherence)을 유지하고 그것에 대한 정직함에서 비롯된 유신론 사상이다. 부디 개인적인 바램이지만, 진보적이라는 신앙인들에게도 새로운 유신론에 대한 공부를 좀더 권하고 싶은 심정이 있다.

생명이 죽어서 더 큰 생명을 살리는 길로

착한 그 아이의 영혼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겠지만, 적어도 그러한 아이의 죽음을 통해 현실에선 목사님과 교인들에게 새로운 차원의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또한 흥미롭게도 인간은 병으로 인해 그토록 죽어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병을 이기기 위해 또한 처절하게 싸우고 있다. 내 생각엔 암 정복과 수명 연장의 꿈이 수백 년을 지난들 결코 포기될 것 같진 않다.

어떤 기독교인은 병이 났을 경우 기도로써 치유할 수 있다고 하여 병원에 가질 않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일반 병원에 가서 병을 치료하는 것이 오히려 더욱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계 안의 건강한 합리적 일반성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창조적 역사를 일궈내고 있으시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병으로 인한 죽음의 비극들이 그러한 병을 이길 수 있는 새로운 희망으로 안내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보면 생명 연장의 꿈 자체는 인간의 욕심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이미 모든 현실 존재 안에 내함된 본질적 충동이며, 그것에 대한 보다 온전한 치유의 비전들은 전적으로 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이를 마다하지 않을 생명이 없다. 다만 기독교는 생명을 희생시킬 줄도 알고 버릴 줄도 아는 종교다. 무엇을 위해서? 바로 더 큰 생명들을 살리기 위해서 말이다. 그게 곧 십자가 정신이요 예수의 기독교인 것이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보다 연약하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신앙이 보다 더 성숙한 신앙이라고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이때 내가 말하는 연약하신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에 대한 고정관념을 비우고 나와야 비로소 체험할 수 있는 신앙이라고 본다. 혹자는 전능한 하나님 상(象)을 버리면 하나님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끝까지 고집스럽게 지니려하지만, 결국 우리가 계단을 올라갈 때 밑의 발을 떼어내야 비로소 위로 새롭게 발을 디딜 수 있듯이 전능한 하나님으로부터 발을 떼어낼 때 우리는 새로운 차원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눈을 뜰 수 있다고 본다.
 
늘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신앙에 완결이란 없다. 그것은 언제나 과정이며, 과정이 곧 실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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