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이재천(기장신학연구소 소장)
출처 / 기장신학연구소
고재식 박사가 마지막으로 집필한 논문은 생전에 그가 가장 존경했던 고 이국선 목사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글이다. 여기서 그는 글 쓰는 이로서 자신의 고충을 이렇게 말한다. “한 사람의 사상을 논하는 데는 항상 두 가지 위험이 뒤따르게 된다. 하나는 그 분의 인격에 손상을 끼치거나 사상을 왜곡시켜 버리는 우를 범할 수가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위적으로 부풀려서 그 분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인물을 탄생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위험성을 피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은 그 분이 살아오신 삶과 남기신 사상을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기술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글에서 그의 우려는 극복되지 못하고 현실로 드러난다고 하겠다. 불과 한 달이라는 시차를 갖고서 그의 신학 사상을 충분히 분석하고 평가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삶과 사상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기 위한 적합한 근거 자료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본격적인 연구를 위한 선행 작업에 불과하다.
기본적으로 이 글은 전기적 성격을 갖는데, 제시된 제목을 중심으로 세 가지 내용을 담아보려고 한다. 첫째로, 신학적인 관점에서 그려볼 수 있는 고박사의 생애이다. 둘째로, 그의 신학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학문적인 요소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윤리학자로서의 학문적인 공헌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러한 세 가지 내용은 실제로는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고 겹쳐져 기술될 것이다.
I.고재식 박사는 남도의 한 섬마을 구산(鷗山)리 출신이다. 중학교 시절, 그는 섬을 떠나 목포에서 공부하면서 처음으로 기독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는데, 마치 첫 사랑에 빠진 연인처럼 너무나 열심히 고지식하게 신앙생활에 전념했다고 한다. 그는 새벽기도 시간을 사랑했고, 교회봉사에 타에 추종을 불허할 만큼 열성적이었던 소년이었다. 말년에 그는 순수하기만 했던 초기 신앙생활 시절을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신앙의 에덴동산’이라고 부르며,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잃고 ‘직업신앙인, 신학 장사’가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표하곤 했다.
대학에 진학하기 어려운 가난한 가정환경 때문에 갈등하던 그는 등록금이 가장 싸다는 이유 때문에 한국신학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신학교 시절에 그는 ‘도서관학파’로 분류되는 학구적인 생활을 했는데, 특히 영어와 독어, 성서언어 등에 뛰어난 학생이었다. 그는 한신에서 “학문하는 일은 참으로 고결한 것”임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바로 학문의 길로 나선 것은 아니었다.
정치적인 사태로 인해서 대학원 공부가 중단된 시기(1964년 여름)에 그는 이국선 목사의 부름을 받고 산업선교에 참여하여 공장 노동자가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7년 동안 산업선교 현장에서 활동한다. 12시간 기본노동에, 두 주에 한번 쉬기 위해서 24시간을 연속으로 일해야 하는 고된 노동자 생활은 그에게 ‘신학교 4년 동안의 교육보다도 훨씬 더 값있는 교육’의 장이 되었다. 그러다가 1971년, 산업선교 활동이 거센 정치적 저항에 부닥치게 되는 시기에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산업현장에서 정치적 탄압을 받고 있는 동료들을 뒤로하고 유학의 길을 떠나야 했던 그는, 그로 인해서 평생토록 ‘빚 진 자’가 되었다는 일종의 죄의식을 마음에 지니고 살았다.
고박사가 미국에서 처음 공부하게 된 곳은 펜실바니아주에 있는 랭캐스터 신학교 (Lancaster Theological Seminary)였다. 랭캐스터는 필라델피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지역인데, 이 지역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유럽에서 이주해 온 각종 소 종파 신도들이 더불어 살고 있는 일종의 살아있는 종교박물관 같은 지역으로, 종교적으로는 성경근본주의적인 성향이 주도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 사회에서는 이 지역을 ‘성경 골짜기 (Bible Valley)’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박사는 랭캐스터 신학교에서 한 해 동안 공부하며 미국 사회에 적응기간을 갖는다. 다양한 선교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관찰하고 평가하는 현장학습 프로그램을 통해서 미국의 실용적인 학문 방법을 경험한다. 그러나 랭캐스터 지역의 신학적 경향에 동화하지 않고 시카고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매코믹 신학교(MaCormick Theological Seminary)에서 M.Div. 과정을 이수하고 학위를 얻었다.
미국의 신학교들은 저마다 고유한 역사와 학문적 전통을 발전시키면서, 그 흐름에 동참하려는 학생들을 받아 교육하고 있는데, 그런 학풍을 체계적으로 담아 낸 신학교육 과정이 M.Div. 학위이다. M.Div. 프로그램은 목회전문인을 양성해내는 과정으로써 그 신학교의 정신이자 얼굴이며, 신학교육의 방법론이 총체적으로 결집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 신학교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M.Div. 학위를 크게 자랑스럽게 여긴다. 고박사 자신도 매코믹 신학교에서 훈련받고 획득한 M.Div. 학위를 늘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매코믹 신학교는 미국장로교(PCUSA) 소속 11개 신학교 중에 하나로써, 신학적 성향이나 방법론에 있어서 미국 내에서 신흥 산업 중심지역으로 떠오른 시카고 지역사회의 분위기를 잘 반영하고 있다. 시카고는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현대 산업도시의 전형적인 사회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산업문제뿐만 아니라 대규모 이농민들의 유입으로 인한 도시빈민 문제, 특히 남부 농업지대로부터 밀려들어오는 흑인(Afro-American) 공동체의 생존문제 등은 시급한 대응책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매코믹 신학교는 이러한 지역사회의 문제를 선교현장의 문제로 인식하고, 그 분야에 대한 신학적 대응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래서 신학의 전통적인 영역(ex. 조직신학, 성서신학, 윤리학 등)을 고수하려는 신학교육의 틀에서 벗어나 선교과제별 영역을 선정하고 새로운 신학적 방법론을 도입하려는 다양한 신학교육 프로그램(ex. 도시산업선교 Urban Industrial Mission)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있었다. 이러한 매코믹의 신학적 분위기는 고박사의 개인적, 신학적 성향과 잘 어우러질 수 있었다.
시카고 지역의 대학들은 동부지역의 전통적 학문 방법론에 맞서서 새로운 방법론을 시도함으로써 학문의 발전에 기여했다. 예를 들어, 시카고 대학과 노스웨스턴 대학 등은 단일 전공 영역에 집중하는 전통적인 연구 방법론을 지양하고 학문 영역간의 교류를 장려하는 교호양식(interdisciplinary method)을 채택하여 발전시켰다. 학제에 있어서는 동부의 학기제와 달리 쿼터제를 도입했다. 한 해에 세 학기를 이어 공부하고, 여름 한 학기를 쉬는 제도이다. 쿼터제는 일정한 기간 내에 다양한 학문 분야를 경험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학생의 관점에서 보면 상대적으로 짧은 학기 기간에 쫓겨야 하는 고충도 겪게 된다. 고박사는 노스웨스턴 대학의 박사과정에서 소위 시카고식 학문 방법론의 절정기를 경험한다. 신학의 영역을 넘어 사회학, 경제학, 인류학, 그리고 철학 등의 영역을 폭넓게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처음 경험하는 학문 영역의 도전 앞에서 극복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절망감과 싸우며 자신의 신학 세계를 본격적으로 형성하게 된다.
학위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고박사는 한국신학대학의 기독교윤리학 교수로 강단에 서게 된다. 그러나 그가 학문적으로 우선 하고자 했던 것은 ‘자기 연구’였다. 그는 박사 학위를 ‘병아리의 탄생’에 비유했다. 학위논문은 창조적인 연구를 시작하기 위한 방법론을 터득하는 훈련의 과정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학위논문을 학자의 학문성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겠다는 사고방식은 학문의 영역에서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지극히 유아적인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학위는 연구의 끝이 아니며 ‘자기 연구’의 시작일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는 글을 쓰라는 주변의 권고를 뒤로하고 자기만의 연구에 전념한다. 혹자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귀국한지 오 년이 지나서야 첫 저서를 출간할 만큼 그는 글쓰기를 절제했다. 그는 가까운 후학들에게 그래야만 했던 자신의 생각을 간단히 언급하곤 했는데, 한마디로 학자로서 양심의 문제라는 것이었다.
그의 ‘자기 연구’는 변화된 한국사회 상황에 대한 학문적 적응의 시도이기도 했다. 그는 한국적 상황을 전제로 과거에 이미 읽었던 기초적인 신학 서적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세계 교회사의 맥락에서 한국 교회사의 제대로 이해를 위해서 워커의 『교회사』(Williston Walker, 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같은 책을 그 방대한 양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세 번 이상 정독했다. 그래서 지금도 그의 책장에 꽂혀 있는 워커의 『교회사』를 펼쳐보면 매 장마다 그만의 특유한 밑줄과 메모로 빼곡하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한국 신학계의 문제점과 필요로 하는 기본적인 요소를 파악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런 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의 저술 계획을 세웠다. 그의 ‘자기 연구’는 실은 자신만의 학문 추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한신의 신학 전통을 위한, 아니 한국 기독교윤리학계를 위한 주춧돌을 마련하기 위한 예비 작업이었다.
“이 책만은 꼭 써 놓고 가야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쓴 마지막 저서 『기독교윤리의 유형론적 연구』서론에서, 그는 그동안 “한국 기독교윤리학계에는 ‘기독교윤리’는 있어도 ‘기독교윤리학’은 없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고 쓰고 있다. 윤리학자로서 그는 마치 소설을 쓰듯 윤리적 관심을 마구 쏟아내는 신학계의 관행에 가려진 허약한 기본기의 부분을 채우는 것으로 자신의 본분을 삼고자 했다. 이 사실을 보게 될 때, 비로소 그와 관련된 윤리학 저작들이 대부분 개론서의 성격을 갖고 있음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그에게 윤리학의 세계를 보게 해 주었으며, 그가 학위 논문에서 분석하고 있는 월터 뮬더가 ‘책임 사회’를 위한 중간 공리로써 제시하는 ‘책임’의 관점에서 보면, 윤리학자로서 고박사는 한국 신학계라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책임적 존재로서의 소임을 다하려는 의식으로 일관했던 학자였다.
II. 신학자 고재식의 삶은 한 운명적인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중학시절 목포중앙교회에서 이국선 목사를 만난 것이다. 그때로부터 고박사의 삶은 이국선 목사와의 관계를 기본 좌표로 설정한 삶이었다. 어쩌면 이국선 목사는 예수 이외에 그가 진정으로 존경하고 따랐던 유일한 존재였다. 그는 이국선 목사에게서 예수 정신으로 일관된 신앙인의 참 모습을 발견했다. 그랬기에 자신을 가리켜 “35년이 넘는 세월동안 목사님의 그림자도 밟지 않고 먼발치에서 살아온 사람”이라고 칭하면서, 지극한 존경심으로 목사님을 대했다. 심지어는 “그 분의 몸에서 예수의 얼굴을 보곤 한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국선 목사의 삶에서 그는 ‘경건’의 의미를 배웠고, 완벽한 목회자 상을 보았으며, ‘정통 신학자’의 신학하는 방법론을 발견했다. 그래서 이국선 목사를 회상하며, 해방적 성격을 지닌 신앙 체험을 토대로 신학을 정립한 분, “보잘 것 없는 자를 자유케 하기 위하여 전생을 쏟아 바치신 신앙 체험 속에서 보화 같은 신학을 창출해 내신 신학하는 방법론의 선각자”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정리하자면, 이국선 목사와의 만남은 고박사에게 신학함의 모판이 되었다. 이 만남의 내용과 성격을 이해할 때 비로소 고박사의 신학과 윤리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게 된다.
고박사의 윤리적 사고는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의 ‘기독교 현실주의’에 한 축을 두고 있다. 그는 매코믹 신학교 시절에 사회윤리학 교수였던 잭 스탓(Jack Stotts)으로부터 니버의 윤리사상을 체계적으로 배우게 되었다. 고박사는 니버로부터 먼저, 윤리적 문제를 교의학의 마지막장에서 다루어 왔던 전통적인 신학윤리로부터 구별된, 그리고 사회사상적 관점으로부터 윤리적인 문제를 언급하려는 사회윤리로부터 구별된, ‘기독교윤리학’의 고유한 영역과 방법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역사적인 차원과 초월적인 차원 사이의 긴장관계를 인간 본성의 이해에 기초해서 설명해 내려는 니버의 사고에 공감하게 되었다.
고박사는 노스웨스턴에서 월터 뮬더(Walter Muelder, 1907-2004)로부터 사회윤리학의 체계를 배우게 되었는데, 에른스트 트뢸치(Ernst Troeltsch, 1865-1923)의 사상이 그 골격을 이룬다. 뮬더는 1945년에서 1972년까지 보스톤 대학교의 신학대학 학장으로 있으면서,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Martin Luther King Jr.) 목사의 선생으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지만,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초기 사회선언을 기초하는 등, 세계적으로 에큐메니칼 영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기독교 사회윤리 학자였다. 사회윤리학자로서 뮬더는 트뢸치 전문가였는데, 그의 학위 논문은 『에른트스 트뢸치의 역사철학에 나타난 개별적인 전체성』(Individual Totalities in Ernst Troeltsch's Philosophy of History)이다. 고박사는 뮬더를 통해 트뢸치의 『기독교 사회윤리』(The Social Teaching of the Christian Churches)를 접하면서 비로소 윤리학의 학문 세계를 맛보게 되었다고 한다. 리츨(Albrecht Ritschl)의 마지막 제자로 일컬어지는 트뢸치는 역사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신학에 끼친 영향에 관심을 기울였다. 막스 베버(Max Weber)의 친구이기도 한 트뢸치는 『기독교 사회윤리』에서,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Die Protestantische Ethic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에서 16세기 종교개혁시기에 적용했던 분석의 틀을 성서와 기독교의 전 역사 영역으로 확대하여 적용하면서, 종교 집단에 대한 유형론적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트뢸치는 윤리학 방법론의 관점에서 고박사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고박사가 자신의 마지막 연구과제로 기독교윤리의 유형론적 해석을 시도한 것은 트뢸치의 영향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러나 고박사의 윤리학적 지평을 결정적으로 열어놓은 사건은 해방신학과의 접촉에서 일어났다. 그가 원래 학위 논문의 주제로 생각했던 것은 라인홀드 니버의 윤리와 해방신학의 윤리에 대한 비교연구였다. 나중에 니버에서 뮬더로 바뀌었지만, 고박사가 비교연구의 대상으로 선택한 해방신학자는 아르헨티나 출신 개신교 신학자 보니노(Jose Miguez Bonino)였다. 보니노는 해방신학의 초기 형성기부터 활약한 신학자인데, 그의 주저 『혁명적 상황에서 신학함』(Doing Theology in a Revolutionary Situation)이 영어로 번역된 것은 1975년이었다. 그러니까 고박사는 보니노의 신학이 미국에 소개된 초기에 그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뮬더와 보니노의 윤리 방법론을 비교한 고박사의 학위 논문은 미국 신학교에서도 상당히 앞선 연구로 받아들여졌고, 이후에 여러 신학교에서 참고 문헌으로 활용되었다. 고박사는 해방신학이 윤리적 판단의 틀을 전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학과 윤리의 방법론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해방신학의 방법론적 전환을 밝히고 있다. 다른 한편, 고박사는 해방신학의 성서해석학을 통해서 해방신학의 진면목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된다. 그는 안식년을 맞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에 머물면서 성서해석학자인 끄로아또(Jose Severino Croatto)와 함께 해석학 세미나를 했는데, 이 경험을 통해서 신학적 입장의 완전한 전환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을 그는 ‘성령의 불을 받은 것’이었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생의 환희를 느끼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국선 목사의 뜻을 받아 산업선교의 현장에서 부닥치며 경험했던 그리스도의 정신이 해방신학의 방법론과 어우러지면서 비로소 신학적으로 화육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고박사가 마지막으로 구상했던 신학연구 과제는 한국 특유의 윤리학적 방법론을 모색해 보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위해서 문화사적, 종교학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접근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 보다는 철저히 ‘현실주의’적이다. 그는 지역적이면서 그러나 보편적인 윤리학 방법론을 형성하기 위해서 무수한 시행착오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필요한 자세는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부르짖음을 듣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 부르짖음을 듣는 자리를 찾고, 늘 거기에 있고자 했다. 만일 우리가 그 자리에 함께 서 본다면, 그의 수줍어하는 따스한 마음을 느껴볼 수 있으리라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