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학교육의 전문화와 다원화
글 / 김이곤 교수(한신대 명예)
출처 / 김이곤 교수 아카이브 http://www.eekon.org/
들어가는 말
한신 개교 70주년을 바로 지척에 두고 우리는 교단역사상 처음으로 총회 산하 교회의 100분의 1 헌금의 지원을 받는 기적 같은 은총에 힙 입어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된 약 2,350평 규모의 “새 본관”을, 지상 3층, 약 550평 규모의 “새 예배당”과 함께, 수유리 캠퍼스 땅에 당당하게 준공(2009. 8. 25)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즈음하여, 우리가 한신 신학교육의 미래도약(未來跳躍)을 논의해 본다는 것은 매우 마땅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앞으로 30년이면, 우리는, 감격스럽게도, 100년 전통을 가진 한신을 맞는다.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는 우선적으로 <눈치레 않는 자기반성>이 필요하다고 하겠으며 이에 뒤따른 <새로운 미래교육의 밑그림>을 그려보는 일이 불가피하게 필요하다고 하겠다.
1. 70년 역사를 돌아보며: 신학교육의 전문화를 위하여
물론, 우리의 출발은 혁신적이면서도 자랑스러웠다. 분명, 우리는 근본주의 교리로 교육받은 서양 선교사들의 편향적 선교정책에 의한 주입식-수동식 신학교육이 가져 올 어두운 미래를 감히 예지(豫知)하고, 감히 “한국인에 의한 한국교회의 자율적인 신학교육”을 표방하는 “예언자적 지혜”를 갖고 출발하였었다. 이 예언자적 지혜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①예언자적 용기와 ②선견자적 지혜가 동시에(!) 필요하였다. 우리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고 또 잘 처신도 하였었다. 그러나 예상한대로, 근본주의 신앙의 마력(魔力)에 빠져든 한국교회의 왜곡된 신앙열정은 서양교회사가 걸었었던 그 불행스러운 전력(前歷)을 피해가지는 못하였다. 급기야 우리는 1950년대 초의 비생산적 이단논죄(heresy trial)의 희생물(victim)이 되는 아픔을 겪게 되었고, 설상가상 6.25전란이라는 분단국의 이념적 상처도 받았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모든 난관을 잘도 극복하여 왔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예언자적 용기와 선견자적 지혜의 평형(平衡; balance)을 유지하는 데에는, 그렇게 뜻같이,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사명은, 분명, 그의 고달픈 형극(荊棘)의 “예언자적 삶”을 통하여, 그러나 마침내는(finally!), 영원한 사제(司祭)로서의(시 110:4, kohen leolam; 히 5:6) 대속적(代贖的)인 고난(苦難)의 결행(決行)을 통하여서야(!) 비로소 성취되었었다는 것이 공관복음의 매우 일치된 증언이었다(마 16:21; 막 8:31; 눅 9:22). 바로 이 위대한 역사적 사실(마 27:54; 막 15:39; 눅 23:47)을 충분히 인식하는 데에는, 비록 선각자들의 위대한 족적들은 우리 안에 크게 남아 있다고는 하여도, 우리는 분명 만족할만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었다.
(1) 이념 편향적 비판전통이 지닌 문제점: 우리는 이런 난국 속에서 예언자적 용기와 선견자적 지혜의 평형보다는 이념편향적인 비판정신을 전통화하고 사수하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당시 (1970년대 초) 우리의 신학대학원 세미나실에서는 “메시아의 대속적인 고난”이란 이 시대에 있어서는 “어용논리”에 불과할 뿐이라는 비판을 조금의 제제도 없이 외치기까지 하였었다(마 16:22; 막 8:32; 그러나 눅?!). 그리하여 “텍스트 신학”은 거침없이 “콘텍스트 신학”에로, 그러므로 하여, 신학교 강의실로부터 뛰쳐나와 거리와 광장으로 강한 물결을 타고 옮겨 갔고, 한신의 신학은 “민중 신학”과 “제3세계 신학”(해방 신학) 편향적인 강풍을 타고 달렸다. 그 강풍이 지나간 그 시간적 퇴적물(堆積物)은, 결코 우리가 원하지 않았었던, “고전경시(古典輕視)”라는 현실뿐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고전경시”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2세기 이래의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 저술을 지칭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고대 성서언어로서 히브리어. 아람어, 희랍어(LXX와 코이네) 등등의 성서언어 연구나 성서본문에 대한 석의적(釋義的) 제(諸)연구나 또는 종교개혁 이래 20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나타난 대표적 학문서적들, 예컨대, 바르트 교의학이나 칼빈의 기독교강요나 19세기와 20세기의 새 학파의 학풍을 대변하는 주석서들이나 또는 사전식 방대 저술들 등등에 접근하거나 또는 그것을 참조하는 일, 이른 바, 자기 분야에 전문적으로 매달리는 “전문화” 작업은 기피하고 저널리스트 형식의(journalistic) 책이나 조금씩 들춰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경향, 일종의 포퓰리즘(populism)을 비꼬는 일종의 시니컬한 표현이다. 그리하여 수유리 본관 옛 건물 옥상에서 펄럭이던 교기 깃발에 새겨진 히브리어 글자 “임마누엘”(לאונמע)과 장공 도서관 현관 상인방의 희랍어 글자“카이 호 로고스 살크스 에게네토…”(Καὶ ὁ λόγος σὰρξ ἐγένετο …)는 그 철자가 누락되거나 훼손되어도, 아는지 모르는지, 마구 방치되는 아이러니를 연출하였고 그것은 이젠 일종 하나의 “사라진 증거물”이 되었다.
이러한 <고전경시/전문화 기피>는 그리하여 큰 제방(堤防) 한가운데 그려진 매우 희미한 눈금균열을 타고 흐르던, 그 보일 듯 말듯 하던, 그 낙루(落淚)로 하여금 어느새 그 큰 제방을 다 헐어버리는 “대 홍수”(catastrophic deluge)가 되게 했다. 이제는 언제 그런 든든한 제방(堤防)이 거기 있었었던가할 정도로 무풍 평지가 되어버렸는데, 바로 그 무풍 평지 위에 옛 건물을 허물고 지금 “새 본관”이 세워졌다. 이것은, 우리가 그 의미를 잘 알든 모르든 간에,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그것은 과연 무엇을 상징하며 또 그 상징이 오늘의 우리에게는 또한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고전회복(古典回復)의/전문화의 새 기치(旗幟)>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성서언어>(히브리어, 아람어, 희랍어)에 대한 연구의 회피 또는 비하의 경향에는 “콘텍스트 신학”에 대한 우월의식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여파는 <성서주석 학>에 대한 관심의 기피 및 외국어로 된 책을 읽고 토의하는 세미나를 기피하는 현상으로 발전하여 마침내는 대학원 졸업논문들을 전반적으로 부실하게 만들고,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출판하지 않는 논문>을 써 대학원 과정을 통과하게 하는 관습(다른 <출의 석사논문들과 비교될까 두렵다!)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이러한 현상들과 비교될시작석사논문”을 심화 발전시키는 학문발전으로 나타난 것도 아니다. 현실은 이러하여도 우리가 전혀 부끄러Ì아니다.고 교육을 해왔다는 그것이다. 이러한 현상들, 전혀 예상도 못하게!, 목회(특히 지작하목회)지렇다고 소명의식(召命意識)의 극심한 약화(弱化)를 가져오식(웬인으로 나타났다. “학문은 모자라도 은혜식(충만하여 교회식(발전한다.”가 아니다.고 기대되었던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의외의 소득조차도 나타나니다. .고 급기야는 목회 소명감이 격감하는 최악의 현상까니다나타나기소득조차렀다. 그렇다고 하여 이념교될조의 민족애가 Œ하여 목적을 달성해가는 것도 아니다.고 오히려, 남는 것들과 이념적 양극화”와 “지방색 조장”이라는 민족갈등, 즉 남북갈등과 남남갈등 만을 낳았고 신학교육의 <조화로운 발전>을 방해하는 장애물들까지(예컨대, 때늦은 대교회주의에 대한 부러움과 그래서 설익은 모방행위 같은 것들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이런 현상은, 분명, 불(不) 회귀선(回歸線)에 다다르기 전에 반드시 해소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이를 위하여서는 그 무엇보다 비록 느린 걸음으로라도 성실한 고전연구의 분위기(전문화)를 회복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으로 보인다. 그것이 본래부터 정도(正道)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성서 비평 개론학은 하지 않고 성서해석학으로 넘어가려는 경향(trend)은 분명코 변별력 없는 알레고리만 양산(量産)하게 되고 신학 없는 설교강단만 양산(量産)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대로 그냥 굴러가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그 무엇보다 “성서 비평학과 해석학”을 집중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다시”(!) 교육하는 일(once again!)이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이 요구는 천 번, 만 번 요구하여도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위기신학을 외치며 “새로운 정통신학”을 내세웠든 지도급 신학자들이 “한 손에는 성서,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이라는 말을 노래처럼 요구하였던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동반되어야 할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분명, 소명의식 훈련(召命意識 訓練; 신대원생 전원[목사는 제외함]이 적어도 첫 1년[혹은 첫 한 학기만]은 기숙사에 의무 입사하는 제도와 이에 따르는 소명훈련을 담당할 전문가를 한 학기 정도 임시 고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봄)을 위한 인프라(INFRA) 구축(構築)이다. 이를 위하여서는(!), 필자의 생각으로는, ⓐ성서 비평학과 해석학을 집중 교육(intensive)하는 일과 ⓑ소명의식(召命意識)을 집중훈련(intensive)하는 일을 하나로 엮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것은 신학교육의 혁신을 위하여 가장 먼저 해결하여야할 선결문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성서비평의 과정을 거친 후임에도 그럼에도 여전히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분명한 학문적/신앙적 확신을 가지게 되면, 그 때, 이 확신위에 소명(召命)을 정립시켜 선교의 “아방가르드”(avant-garde)에로 나아가게 해야 할 것이다.(이것을 비현실적 이상론으로는 보지 말아야 한다.)
(2) 성서개론 비평학과 성서 해석학 커리큘럼(curriculum) 강화 재정비: 이 항목설정은 각 전공영역에 대한 사명감을 갖고 있는 다른 장르 담당 교수님들로서는 이의(異議)를 제기할 사안일 수도 있을 것이다. “차라리 성경학교(聖經學校)로 바꾸자고 말하지!”라는 오해의 냉소(冷笑; cynicism)적 반응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현실적으로도 그런 문제가 거기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오늘 교회가 그 본질적인 사명수행에 있어서는 그 모든 상황이 너무 황폐해 있기 때문에, “신학교 무용론”까지 고개를 들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는 주요 이유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깊이 반성해보면, “성서신학적인 무장(武裝)”이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이 점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필자는 늘 절감해왔기 때문이다. 즉 1968년에 시작하였던 신학교 교수 생활 약 40여년을 돌아보면서, 몇 번이고 뒤집으며 심각한 참회의 반성을 한 그 결과도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성서개론 비평학을 이수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한 성서해석학에로 연결하는 전문적 훈련이 없이 (대체로 성서 주석학을 기피한 후 요행히 졸업을 한 경우가 다반사였던 옛 교육을 생각할 때) 신학교를 졸업하고 현장으로 나가신 분들이 과연 ⓐ하나님의 실재하심에 대한 확신과 ⓑ그 하나님의 뜻(救援意志: 케리그마)이 오늘의 이 성서말씀 속에 계시(啓示)되어 있다는 데 대한 “학문적 확신의 노하우”(=專門化)와 ⓒ “선교의 소명감”(고전 9:16b; 행 4:20; cf. 롬 1:14; 마 28:16-20; 사 49:6)을 어느 정도나 분명하게 갖고서 일하시는지는 솔직히 매우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연목구어(緣木求魚)의 어리석음일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감히 나는, 우리의 신학교육은 적어도 예수님의 부활사건 이후에 교회를 세운 그 첫 사도들(특히 바울이나 기타 성서기자들)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도록 까지 훈련시킨다는 목표를 가지고 교육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바울, 베드로, 사도 요한, 마태, 마가, 누가 같은 분들이 우리들보다 신학적 지식 훈련을 더 많이 받았다고는 결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들의 신 들메를 맬 만큼도 못되는 것인가?
6년 내지는 7년, 어떤 경우는 10년이 넘도록 신학교육을 직업적으로 받으며 우리가 소비한 시간과 지불한 학자금이 얼마인가를 한 번 계산해보자. 더욱이 30년-40년 목회(70세 정년을 감안)를 전담하였었는데 우리말 주석서를 옆에 놓고서도 복음서 한 페이지나 사도의 서신 한 장도 “바르게”(!) “양심적으로” “전문적으로”(!!) 해석해내지(케리그마화 해내지) 못한다면 우리야말로(신학교육 담당자들인 우리야말로) 중죄인이 아니고 무엇인가? “전문화”라는 말을 나는 그러므로 이러한 맥락에서도 또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전문화”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상식적인 선에서 다른 직업분야와 한 번 맞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쉬운 예로, 6년(4+2년) 교육을 받으며 약 3000만 원 정도의 교육비를 들여 교육을 받고 현장으로 나가 또 힘든 “준목” 과정을 거쳐 목사가 되었는데도, 만일 신구약성서를 한 번도 제대로(!) 정독(精讀)을 못하였다고 가정해 보자, 그 경우 다른 어느 전문 직장인이 우리를 가리켜 기독교 선교의 전문가라고 인정해 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정말 전문가(professional)인가? 만일 우리가 신앙상의 심각한 질문이 생겨 그 질문을 가지고 목사님을 찾아간다고 해보자. 또 성서를 읽다가 심각한 의문이 나서 그 의문을 가지고 목사님을 찾아간다고 해보자. (지금까지의 대부분의 신자들이 그런 질문을 가지고 오지를 않았기에 망정이지 …) 그 경우, 우리 중 그 어느 누구도 만족할만한 대답을 얻어서 돌아오지는 못하였을(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도 또한 그러할 것인가?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일차적으로 우선 우리 선교의 주 텍스트인 <성서>에 대한 전문가가 먼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물론 과거 우리는 대학원 교육과정에서 <성서통독>교육을 강조해본 적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스스로 돌이켜볼 때 그것은 그야말로 “코미디”(!)였다. 신학 전문 기관에서 그런 “쉐마 교육”을 흉내 내는 <성서통독 프로그램>을 정규 전문훈련으로 사용한다는 것 그 자체가 부끄러운 일일 뿐이다. 전면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6년 과정에 있는 학생들에게는 학부 2학년으로 진급할 때, 7년 과정에 있는 학생(일반 대학 출신자)들에게는 입학통지를 받은 후부터 입학일 까지 사이나 아니면 둘째 학기에 들어가기 전에는 반드시(!) 성서시험에 통과(80점 이상의 실력)되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그 경우, 성서시험은 엄격하여야 하고 통과되지 못하면 졸업이 불가능해야한다! 이것이 바로 <전문화의 첫걸음>이라고 본다.)
그러나 첫 걸음만 뗀다고 하여 곧 걷거나 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이에 뒤따라 (두 번째로) 비평학적 주석과 해석학의 훈련을 전문적으로 받아야 한다. 창세기나, 마태복음, 즉 구약과 신약 각 한권만이라도 제대로 주석과 해석의 경험을 한 다음(준비된 무기를 가지고!), 전선에 나가야 되는 것 아닌가? 다들 잘하고 있는데 왜 그러느냐? 라고 할지도 모른다. 잘하고 있다면 오늘의 세상은 결코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이 두 번째까지만 제대로 해내면, 우리가 옛날에 해왔던 성서통독 교육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각자가 스스로 다 해결할 것이다. 전문가가 되었거나 되어야 하니까! 즉 성서주석과 성서해석에 대한 분명한 동기를 가지고 성서를 읽어야 성서를 제대로 읽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성서 읽기 공부(성서통독)가 -그것이 어떤 종류의 방법이었든(베델 성서연구 등등, 그러나 평신도 훈련용으로는 필요할 수도 있다)- 의미 없다고 보는 것은 그것이 전문화되어 있지 않아서 케리그마를 도출해내는 공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보다 더 오래된 종교인데도! 유대교의 미드라쉬 성서교육(세마 교육법)이 아직도 성공 못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성서에 대한 해석학적 이해가 아니라 기계적 이해에 치중하였기 때문이다. “율법주의”가 가진 문제점이 바로 이것이다. 이 사실은 유대교 지도자들의 성서이해(성서해석)와 예수의 성서이해(성서해석)의 명백한 차이를 통해서도 충분히 감지된다. 말씀을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며 문설주와 대문에 붙이고 출입할 때마다 보고 읽는다고 하여(신 6:8-9)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문화”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전문화”는 <주석과 해석을 위한 성서독법>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다.(이전의 비효율적 성서통독 교육이 지양되어야할 그 근본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3) 교단신학교에는 교단신학 강좌가 있어야 한다. 한신은 장로교 교단신학교이다. 물론 “장로교 신학”에 갇혀 있자는 뜻은 결코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의 교육과정에서는, 칼빈과 루터에 대한 강좌개설이 필수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하나의 상식이라고 하겠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신학대학원 감사에서 몇 차례 지적이 되었지만 감사에 대한 형식적 응답은 이루어졌으나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필자가 대학원 학생이었던 때였다. 공부를 썩 잘한다고 소문난 조직신학 전공의 한 선배가 당시 널리 존경받던 조직신학 교수인 S교수님(지금은 고인)에게 졸업논문으로 “칼빈 신학”을 정하였다고 말씀 드렸더니, 그 교수님께서는 (민중 신학에 몰입해 계신 교수님이셨는데) 세 번이나 고개를 갸웃하며 “칼빈을? …칼빈을? … 칼빈을?…” 하시고는 더 이상 말씀을 안 하셔서(강력한 반대의 표현) 그 선배는 많은 고민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 후 그 선배는 한 번 정한 칼빈에 관한 논문을 포기할 수 없어서 다른 교수님을 지도교수로 하여 그 논문을 마쳤는데 그런 지난날의 일을 지금 생각해보니 스스로도 대견스럽게 생각되더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한신의 학문적 풍토가 이젠 바뀌어야 한다는 점도 바로 이러한 정황과 관련된다. 비록 매우 어려운 일이겠지만, 과거에 있었던 신학부의 이러한 “몰고 가는 듯한” 이념편향적인 경향이 이제는 100년 전통의 한신을 바라보면서는 우리 안에서 건전하게 승화되어 한 단계 성숙해져야 한다는 점을 여기서 꼭(!) 지적하고 싶다. 아무리 존경 받는 교수님이고 당대를 압도하는 학자(미국의 경우, distinguished professor의 chair를 갖고 있는 교수와 같은 경우)의 영향 아래에 있다 하더라도 특수 장르로 획일화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전문성”과 “다양성”은 공존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아카데미즘의 장점이 아닌가. 조국이 특수한 상황에 처하였을 그런 특수 경우에는 비록 양해될 수 있다고는 하더라도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본관건축을 계기로 한신의 신학교육은 새 지평을 열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 때, 한신 신학이 <민중 신학>의 기세로 몰고 나아갔던 그런 분위기는(즉 전문화 교육을 편협하고 낡은 것으로 보아왔던 그런 분위기는) 이제 거두어야 할 때이다. 우리는 조속히 신학의 전문성과 다양성을 “모두”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오늘의 시대적 상황은 이렇게 달라졌음에도, “전문성”에 대한 열정으로부터는 멀어지고 “신학의 포퓰리즘(populism)”에는 더 가까워지는 그런 풍조(風潮)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있기 때문에, “빨리”(ταχύ) 이러한 포퓰리즘(반[反] 전문화 풍조)은 극복하여야 한다. “전문화” 교육이란, 그러나, 신학분야에서만은 결코 “좁은 개념”으로 고정될 수는 없다. 위에서 성서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성서학이 전문성을 띠어야 한다고 역설하였을 때는 성서학만 전문화 되어야한다는 말이 아니었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신학의 텍스트가 “성서”인 이상, 이 텍스트가 콘텍스트보다는 일차적일뿐만 아니라(다른 분야에서와는 달리) 텍스트가 이차적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가 성육(incarnate)되어야 육(肉)도 그리스도를 이룰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이신 <말씀>이 그 본체를 지키면서도 “육”(肉)과 제휴하는 일은 절대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다른 분야와 제휴하는 교육(interdisciplinary education) 즉 “다원화 교육”이 비로소 요청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