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이재천]칼빈의 생애와 신앙개혁<2>

제목 : 칼빈의 생애와 신앙개혁
발표 : 이재천(한국기독교장로회신학연구소 소장)(2009년 5월 28일 기장신학연구소 목회와신학연구 세미나에서 발표)
출처 : 한국기독교장로회 신학연구소




2. 수많은 대적자들에게 둘러싸임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두 개의 전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소종파 집단들이었다. 칼빈도 항상 이 두 집단을 대상으로 한 갈등에 시달렸다. 칼빈은 1539년, ‘사돌렛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로 다른 두 집단, 즉 교황과 재세례파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고 했다. 그 외에도 칼빈은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진행하면서 수많은 비난과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1) 로마 가톨릭 세력

칼빈의 종교개혁에 있어서 가장 큰 대적 세력은 로마 가톨릭교회였다. 칼빈은 한편으로는 로마 교회의 신학적인 오류(의인론적인 문제, 미사와 성찬의 문제, 성상숭배 문제, 면죄부 문제 등)를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개혁교회의 체제를 갖추어야 했다. 그러나 신학적 문제보다 더 큰 현실적인 문제는 기회만 된다면 개혁 세력을 몰아내고 원래의 자리를 되찾으려는 가톨릭 세력의 정치적 도전이었다.

2) 급진적인 개혁 세력

칼빈 당시에 교회와 사회의 개혁 운동에 참여한 다양한 소종파 집단이 있었다. 대개 급진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소종파들은 종교개혁의 존립을 위협하는 세력이었다. 이들은 종교개혁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상황에서 자기들의 주장을 내세우며 분리주의 운동을 주도했다.

3) 자유파

종교개혁은 곧 사회개혁이었다. 제네바에서 자유파는 중세 사회의 규제를 벗어버리는 사회 개혁에 앞장선 집단이다. 이들은 칼빈의 개혁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도덕적인 규범을 내세워 개인 생활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유파와의 갈등에서 칼빈이 어느 정도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은 그의 말년에 이르러서였다. 종교개혁 정신을 이어받은 새로운 세대들이 성장하면서 제네바의 상황에 조금씩 변화가 이루어졌다.

4) 니고데모파

칼빈은 비판한 세력 중에 니고데모파라고 불리는 집단이 있었다. 칼빈은 1544년에, 그들의 비판에 답하기 위해서 ‘니고데모파의 불평에 대한 변론’을 썼다.

요한복음 3장에, ‘바리새인 니고데모’가 아무도 모르게 밤중에 예수를 만나러 왔다. 제네바에도 니고데모처럼 개혁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을 취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로마 교회에 참석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개혁교회에 참여하는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톨릭 교회로부터의 분리에 대해서 반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칼빈을 가리켜 ‘복음의 파당을 짓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칼빈은 니고데모파가 박해받고 있는 교회의 상황을 모르는 체 외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니고데모파는 자신의 명예나 재산을 유지하기 위해서 부당한 심판과 박해에 대해서 침묵으로 관용하고 있었다. 만일 불필요한 혐의를 받게 되면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와 기득권이 흔들릴까봐 염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3. 가까웠던 지인들로부터 배신당함

칼빈의 인생을 보면, 가룟 유다의 배신을 연상하게 한다.

1) 피에를 카롤리(Pierre Caroli)의 비난

칼빈이 제네바에 처음 머물던 시기에 최초로 부딪친 신학적인 문제가 ‘삼위일체론’이다. ‘삼위일체’를 거부한 것은 세르베투스였다. [1531년,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의 오류에 관하여』(De Trinitalis erroribus)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카롤리가 칼빈을 세르베투스의 제자로써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인물이라고 공격했던 것이다.

카롤리는 칼빈과 같이 프랑스 북부지방 출신이다. 그도 개혁에 대한 박해를 피해서 제네바로 피신해 왔다. 그는 1536년, 베른 사람들에 의해서 로잔의 목사로 임명되었다. 거기서 그는 신도들에게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를 드리도록 하는 등, 가톨릭 교회의 행태를 되풀이 했다. 칼빈은 카롤리가 가톨릭 교회로 돌아가고 있다고 비난했고, 카롤리는 칼빈을 반삼위일체주의자라고 반격했던 것이다.

논쟁이 발생하자, 1537년 5월 14일, 로잔에서 양측을 모두 부른 회의가 소집되었다. 칼빈 측은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을 변호했고, 카롤리는 자신의 비난소송을 취하했다. 그렇지만 카롤리는 프랑스로 돌아가서 가톨릭으로 복귀했다.

가까웠던 지인과의 관계에서 생겨난 모략이 칼빈에게는 큰 상처를 주었다. 많은 종교개혁자들이 일시나마 칼빈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루터의 후계자인 멜란히톤조차도 거기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나중에 칼빈이 반삼위일체주의자인 세르베투스의 처형에 엄격하게 대응한 것도, 카롤리의 비난이 근거 없는 것이었음을 밝혀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2) 칼빈과 카스텔리오 (Sebastian Castellio)

카스텔리오도 칼빈처럼 프랑스 태생이다. 칼빈보다 6년 늦게(1515년) 태어났다. 카스텔리오는 인문주의자로서 리용에서 종교개혁에 가담했다. 그리고 1540년, 프랑스의 개신교 박해를 피해서 스트라스부르로 도피했다. 거기에서 칼빈과 같은 집에 거하게 되었다.

카스텔리오는 1541년, 칼빈보다 석 달 앞서 제네바의 대학 강사로 부름을 받았다. 1543년에, 카스텔리오는 칼빈에게 자신을 제네바 교외의 방되브르의 목사로 임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목사 임명을 위한 예비 고시에서 카스텔리오는 구약 아가서의 경전적 위치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사도신조에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죽음 이후에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구절에 대한 칼빈의 해석을 비판하는 등, 자신의 의견을 내세웠다. 결과적으로 칼빈은 카스텔리오가 목회적 사역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은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카스텔리오는 칼빈에게 더욱 적대적이 되었다. 1544년 5월, 자신에 대한 비평을 참지 못한 카스텔리오는 제네바의 목사들에 대해서 맹렬한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다. 칼빈은 카스텔리오에게 자제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일 년 후, 칼빈은 카스텔리오에게 제네바를 떠날 것을 명했다. 카스텔리오가 떠난 제네바 대학은 급속하게 쇠퇴했다.

카스텔리오는 처음에는 칼빈의 성경 해석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554년에 세르베투스가 처형당하자, 이 사건을 계기로 ‘관용’을 수호하게 되었다. 카스텔리오는 세르베투의 죽음에 대한 모든 책임이 칼빈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칼빈의 인권유린을 고발하는 목적으로 공개적인 고발장인 “칼빈에 대한 고발” (Contra libellum Calvini)을 썼다.

[쯔바익은 칼빈이 카스텔리오를 억압하기 위해서 교묘한 정치적 수단을 동원했다고 한다. 쯔바익에 의하면, 바젤은 강력한 동맹 도시 제네바와 외교적 분쟁에 빠지기를 원치 않았다. 바젤 시의회 의원들은 특정한 개인을 희생시키는 것이 차라리 나았기 때문에, 정통성을 갖지 못한 저술의 출판을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그래서 카스텔리오의 “칼빈에 대한 고발”은 출판을 못하게 되었고, 거의 한 세기가 지나서야 출판되었다는 것이다. 쯔바익은 카스텔리오가 ‘관용에 대한 선언’(Manifest der Toleranz)을 주장하며, 사상의 자유는 인간의 영원한 권리라고 표명함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건 유일한 인문주의자였다고 높이 평한다.]

쯔바익처럼, 칼빈에 대한 적대적인 견해는 대부분 카스텔리오의 칼빈 비판에 근거하고 있다.


4. 가족을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던 칼빈

1) 아내

칼빈은 제네바에서 쫓겨나 스트라스부르에서 목회를 하는 시기(1540년 8월)에 두 자녀가 있는 미망인 이들레트 드 뷔르(Idelette de Bure)와 결혼했다. 칼빈은 초혼, 이들레트는 재혼이었다. 이들레트의 전 남편 장스트뢰르는 재세례파였는데, 칼빈이 그를 개혁교회로 이끌었었다.

1949년, 어려운 시절을 함께 하던 아내가 9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칼빈은 아내를 잃은 슬픔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파렐에게 쓴 편지에서 칼빈은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밝힌다. “아내의 죽음은 나에게 너무나 큰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나로서는 할 수 있는 만큼 슬픔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슬픔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나는 내 인생의 가장 훌륭한 반려자를 잃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나의 목회에 가장 신실한 조력자였습니다. 그녀는 병으로 고생하면서도 나에게 어떤 불편도 주려하지 않았으며, 자신보다 자식들을 더 소중하게 돌보았습니다.”

2) 아들

칼빈은 이들레트와의 사이에서 세 아이를 얻었지만 모두 어려서 세상을 떠났다. 갓 태어난 아들을 잃은 칼빈은 (1542년, 동료 Pierre Viret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린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아픈 심정을 이렇게 토로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무나 아픈 상처를 남겨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아니십니까.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5. 인간적인 수모를 감내한 칼빈

1)종교 개혁자 중에 칼빈처럼 인간적인 수모를 많이 겪은 인물이 없다. 칼빈은 1558년에 쓴 편지(Nicholas Zerkinden에게 보냄)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참을성이 없는 성미 급한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이 사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나는 내가 바라는 만큼 자신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당하게 나를 공격하고, 온갖 술수를 사용해서 잔인하게 나를 괴롭혀 왔습니다. 나는 그러한 행위에 대처할 만한 수단과 방법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내가 당한 방식대로 갚아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2)칼빈의 비난자들은 심지어 자식 문제까지 거론하면서 칼빈을 괴롭혔다. 칼빈은 (1561년) 세상 떠나기 삼 년 전에, 오래도록 가슴에 담아 두었던 아픈 사연을 토로한다. 자식이 없다는 문제를 가지고 칼빈을 조롱하고 비난했던 법학자 보드앵(Baudouin)에 대한 언급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아들을 주셨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어린 아이를 도로 데려가셨습니다. 보드앵은 내가 자식이 없다는 것이 나의 잘못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며 나를 비난합니다. 그러나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기독교 세상에 무수히 많은 자식을 갖고 있습니다.”

3) 1564년 4월 28일, 칼빈은 죽음을 예상하고 제네바의 목사들에게 고별사를 했다. 자신이 제네바에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간단히 설명한다.

처음 제네바에 도착했을 때부터, “나는 지독한 싸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밤이면 문 밖에서 수십 발씩 총을 쏘아대며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소심한 내가 얼마나 놀랬는지 여러분은 아시겠지요? 쫓겨났다가 다시 불려온 이후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지나가면 개를 풀어 내 다리를 물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싸우고 모함을 했습니다. 나는 의회에 가서 ‘나쁜 사람들이여, 차라리 나를 죽이시오. 그러면 내 피가 당신들에게 항의할 것이오.’라고 항변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나는 싸움 속에 있었는데, 아마 여러분은 나보다 더 많은 일을 겪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악하고 불행한 나라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네바에서 일어난 삼천 개의 소란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용기를 가지고 담대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사용하시고 지켜주신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확신시켜 주실 것입니다.”


6. 목회적인 필요까지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불신과 견제

1) 제네바에서 칼빈은 이방인이었다.

그는 평생을 프랑스 사람으로 살다가, 말년에 시민권을 획득했다. 제네바 교회의 실세는 시 의회였다. 의회가 모든 것을 주관했다.

2) 칼빈은 자신의 뜻대로 성찬식을 드릴 수 없었다.

칼빈은 성찬을 예배를 일부로 생각했다. 성찬은 자주 거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은 주님의 식탁에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의회는 칼빈과 입장이 달랐다. 가톨릭 교회의 유산이 깊게 남아있는 상황에서 성찬을 자주한다는 것이 개혁교회의 정체성에 문제가 된다고 생각했다.

칼빈은 신학적으로 의회를 설득했지만, 결국 의회의 상황 논리에 밀렸다. 그래서 제네바 교회에서는 성찬식을 한 달에 한 번도 아닌, 1년에 네 차례 갖게 되었다. 베른의 방식을 따르기로 의회가 결정했기 때문이다.

3) 칼빈은 최소한의 목회권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했다.

목회적으로 필요한 권징의 권한(교회의 고유한 권한)을 행사하는 것도 시간이 걸렸다. 1541년, 칼빈이 제네바 교회를 다시 목회를 하게 되었지만, 칼빈이 목회적으로 필요한 조치를 할 수 있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15년이 지난 1555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부분적으로나마 교인의 신앙 훈련과 권징의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죽는 1564년까지 교회와 시 의회 사이에 ‘권징’으로 인한 갈등이 계속되었다.

분명한 것은, 칼빈은 교회가 해야 할 고유한 일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논쟁이 되는 권징 문제의 핵심이 ‘출교’이다. 교회가 조처할 수 있는 출교의 내용은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훈계하는 것’이다. 범죄 사실을 심판하여 실제로 감옥에 보내거나 추방시키는 것은 정부가 하는 일이었다.

요즘 교회는 교인의 귄징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 칼빈의 ‘강요’에 보면, ‘가벼운 잘못과 중대한 잘못,’ 그리고 ‘위반과 범죄’를 구분하고 있다. 권징의 목적은 잘못을 엄격하게 다스리려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말씀으로 책망함으로써 자신을 돌아보게 하려는데 있다.

4) 필리베르 베르틀리에(Philibert Berthelier) 사건

베르틀리에는 애국지사의 아들로써, 제네바에서 가장 대중적인 인물 중 하나였다. 그의 방탕한 생활은 널리 알려지 사실이었다. 그는 명백한 이유로 출교를 당했는데, 1554년, 세르베투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칼빈의 적대자들이 의회의 다수를 점한 시기에, 의회를 움직여서 자신이 성찬을 다시 받을 수 있도록 하는 허락을 받고자 했다. 의회는 만일 베르틀리에가 ‘자신의 양심이 깨끗하며, 성찬을 받을 수 있다고 느끼면, 그는 성찬을 받을 수 있다. 성찬을 받는 것은 개인의 일로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칼빈은 의회의 결정에 맞섰다. 그는 ‘주님의 성찬을 그렇게 부끄럽게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기를 결정한다. 백 번 죽는 한이 있어도 그리스도를 그렇게 부끄러운 일에 연관시키지 못한다.’고 선언했다. 다음 날 성찬이 거행되었다. 칼빈은 강단에서 성찬에 앞서 설교하면서 ‘교회에 속한 결정에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이 의회에 없음’을 밝히고, ‘내 손으로 정죄 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것을 건네주느니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외쳤다.

칼빈의 단호한 입장을 알게 된 의회는 베르틀리에로 하여금 성찬에 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칼빈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목회권의 최소한의 독자성을 지켜내었다.




C. 칼빈의 신앙 개혁



I. 인문학적 배경

칼빈에 한 세대 앞서, 헬라 고전과 기독교적 고전을 모두 수용하여 영감의 원천으로 삼은 기독교적 휴머니즘의 초석을 놓은 인물들이 있으니 프랑스 휴머니스트 르페브르 데타플(Lefevre d'Etaples)과 네덜란드의 휴머니스트 에라스무스(Erasmus)이다.


1. 르페브르는 이그나티우스(St. Ignatius)와 폴리캅(St. Polycarp) 등의 초기 교부 시대를 순수한 교회의 원형으로 생각했고, 기독교 변혁의 정신적인 원천으로 삼았다. 르페브르는 칼빈이 태어난 해인 1509년, 『다섯 권의 시편연구』(Fivefold Psalter)를 발간했다. 이 책은 성서적 휴머니즘의 첫 저작으로 일컬어지며, 루터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이후 르페브르는 신약성서에 대한 주석서들을 출간하기 시작했다.

르페브르는 성경 저자의 의도를 고려하지 않는 스콜라적(현학적) 해석을 배격하고, 성경 본문을 원문적,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하려고 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르페브르가 이단적 교설을 퍼뜨린다고 비난했다. 르페브르는 결국 은퇴하여 칩거하게 되는데, 그의 지지자들은 대부분 프랑스 신교도들이 된다. 그 중에는 장차 칼빈으로 하여금 제네바의 개혁자가 되게 한 기욤 파렐(Guillaume Farel)도 있다.

르페브르가 교회의 탄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도피처를 마련해 준 인물이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Francis I)와 그의 누이 마그리트(Marguerite d'Angouleme)였다. 칼빈은 1536년, 스위스 바젤에서 『기독교강요』 초판본을 써서 프랑수와 1세에게 헌정했다. 칼빈은 프랑수와 1세를 ‘Most Christian King of the French'라고 부른다.


2. 한편 기독교적 휴머니즘의 중심 인물은 Erasmus of Rotterdam이었다. 에라스무스는 1515년,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책을 출간했다. 그리고 1516년에는 최초의 헬라어판 성경을 포함하는 『신약성서』를 출판했다. 이로써 에라스무스는 교회의 철저한 개혁을 주장하는 인문주의자들 사이의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Erasmus가 오를레앙(Orleans)에서 공부한 것은 1500년이었다. 약 30년 뒤, 칼빈은 오를레앙에서 공부하게 된다. 법학을 공부하고 1531년 졸업한다. 오를레앙에서 졸업한 칼빈은 인문학자로서 인정받고자 했다. 그래서 자신의 첫 연구 작품으로 Seneca의 『관용론』De clementia에 대한 해석서를 저술했다. 칼빈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에라스무스가 1529년에 재판을 출간한 Seneca 저작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에라스무스는 세네카의 재판 서문에서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보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든지 그렇게 해보라고 제시했다. 물론 그의 적대자들을 향한 제안이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손대지 않을 과제였는데, 패기 있는 젊은 칼빈은 에라스무스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에라스무스와 칼빈이 개인적으로 만났다는 기록은 없다.


3.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에라스무스와 쯔빙글리의 방식을 채택한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체계를 밝히기 위해서 현학적 신학(scholastic theology)을 전개하려고 하지 않았다.

칼빈은 철학적 변증을 채택하기보다 인문주의자들처럼 ‘원천으로 돌아가고자’했다. 그가 돌아가려한 원천은 성경이었다. 그는 성경에 대한 교부철학적 해석에 주력하지 않았다. 쯔빙글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성경 말씀 자체를 증거로 삼아 성경을 해석하고자 했다.



II. 『기독교강요』

1.20세기 세계문학계에 단 한 권의 책으로 유명해진 작가가 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를 쓴 Margaret Mitchell(1900-1949)이다.

미첼은 1900년, 미국 Georgia주의 수도인 Atlanta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병을 앓게 되었는데, 회복하려고 요양하는 동안에 소설을 섰다. 그것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이다. 1936년에 출판되었다. 이 소설로 미첼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으며, Pulitzer Prize를 수상했다. 미첼은 단 한 권의 소설을 남기고, 1949년, 집 앞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죽었다. 지금 Atlanta에 가면 도시 중앙에 그녀의 기념관이 있다.

미첼은 어려서부터 ‘남북전쟁’ 이야기에 심취했다. 그녀는 비극적인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녀는 소설을 쓰게 된 동기를 말하면서 “나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말하는 ‘불굴의 정신(gumption)’이 무엇인지 압니다. 그래서 ‘불굴의 정신을 지닌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자 했습니다.”고 했다.

마가렛 미첼의 표현으로 하자면, 칼빈은 ‘불굴의 정신을 지닌 사람들’에 속한다고 하겠다.


2.신학계에서 칼빈은 ‘한 권의 사람’ 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가 쓴 『기독교강요』가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사실은 많이 다르다. 칼빈은 많은 글을 남겼다. 일반적으로 칼빈의 저작은 여섯 종류로 분류한다: 『기독교강요』, 주석서, 설교문, 소책자와 논문들 (Tracts and Treatise), 편지, 그리고 예배의식서와 요리문답서 등이다.


3.『기독교강요』의 신학적 내용도 그렇지만, 이 책의 집필 과정을 통해서 칼빈의 신앙 정신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칼빈이 활동한 시기는 종교개혁의 2라운드라고 하겠다. 루터와 쯔빙글리가 1라운드를 시작해 놓았고, 이제 다음 단계로 접어들었다. 개혁교회는 한편으로는 기존의 가톨릭 교회와 맞서서 교회를 지켜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급진 세력들의 분열주의에 맞서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교회를 조직하고 훈련하여 체계를 세우는 일, 개혁의 정당성과 사상을 정리하여 널리 알리는 일이 필요했다.


4. 『기독교강요』를 써야만 했던 이유: 박해받는 형제들을 위한 변론

학자들은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처음 구상한 곳이, 그가 24세 때(1533), 박해 때문에 도피한 앙굴렘이라고 생각한다. 칼빈이 앙굴렘에 도피하고 있을 때, 파리에서 심각한 사건이 일어났다. 1534년 10월 17일 밤, 미사의 타락을 지적하는 게시문 형태의 벽보가 파리의 여러 장소에 나붙었다. 그 저자는 리용 태생의 목사 앙트완느 마르쿠르(Antoine Marcourt)였다. 그 내용에 분노한 프랑수아 1세는 대역죄로 간주하여 강력하게 탄압했다.

칼빈도 프랑스에 있는 것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바젤로 피했다. 칼빈이 숨어 지내는 동안에 여러 사람이 체포되었고, 화형에 처해졌다. 희생자들 중에는 칼빈의 친지들도 있었다.

이러한 사태를 보고 칼빈은 침묵할 수 없었다. 동료들의 박해 현실이 『기독교강요』를 출판하도록 재촉했던 실제 이유였다. 칼빈은 통치세력이 유포했던 악랄한 허위사실에 맞서 진실을 밝히고, 복음을 위해 고귀한 목숨을 잃은 형제들의 억울함을 벗겨주기 위해서 ‘강요’를 썼다. 그래서 ‘강요’의 내용은, 한편으로는 그토록 부당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의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밝히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을 미혹하는 자라고 부당하게 비난받고 죽임을 당해야했던 복음 전파자들의 참된 교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5.칼빈은 일단 시작한 일에는 자기 목숨을 걸었다.

칼빈은 개혁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다. 그가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만든 무기가 『기독교강요』이다. 그는 『기독교강요』를 위해서 개혁자로서 생애를 바쳤다. ‘강요’의 첫판은 1536년 4월, 바젤에서 출판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판이 출판된 것은 1559년이었다. 칼빈은 24년 동안, 끊임없이 ‘강요’를 수정하고 보완했다.

1559년에 마지막 판이 출판된 것도 자신의 죽음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 칼빈은 심한 병에 걸려있었다. 자신이 곧 죽게 될 것 같다고 예감한 칼빈은 마지막으로 꼭 해야 할 일을 시작했다. ‘강요’의 결정판을 내는 것이었다. 주변인들의 도움을 얻어서 개정 결정판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후계자 베자의 말에 의하면, 칼빈은 병으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면서 ‘강요’의 마지막 판을 썼고, 그것의 전부를 직접 자기의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프랑스어 판은 다음 해인 1560년에 나왔다. 칼빈은 그로부터 삼 년 뒤, 1564년(5월 27일)에 세상을 떠났다.


6.『기독교강요』가 아니었다면 개혁교회는 사분오열되었을지도 모른다.

중세 가톨릭 신학을 집대성한 신학자는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이다. 아퀴나스는 가톨릭 교회의 사상 체계를 집대성하기 위해서 『신학대전』을 썼다. 개혁 초기에 개혁 세력은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 필적할만한 신학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루터도 많은 글을 썼지만, 일관된 신학 작품을 쓸 만한 여유가 없었다. 쯔빙글리는 더욱 그랬다. 그런 상태에서 개혁자들 사이의 신학적 견해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1529년, 독일 마르부륵에서 열린 종교개혁자들의 회의에서 루터와 쯔빙글리는 의견의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종교개혁에 동참한 지역마다 각기 다른 주장을 내세우고 있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종교개혁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낸 인물이 칼빈이다. 칼빈의 『기독교강요』가 있었기에 개신교는, 가톨릭 교회의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을 넘어서, 고유한 신학 체계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7. 『기독교강요』는 칼빈의 신학이 치열한 전투 현장에서 형성된 신학임을 보여준다. 1536년 초판 이래로 판본을 더해가면서 수정되고 덧붙여진 내용들은 칼빈이 어떤 도전에 직면해야 했던가를 반영하고 있다.



III. 칼빈의 사고 구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칼빈을 교리적 신학자라고 생각한다. 기독교 교리를 만든 신학자라는 전제에 집착하면 칼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칼빈의 신학에서 교리적 체계를 발견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칼빈이 교리적으로 사고한 것은 아니다.


1. 믿음의 패러독스 (모순 덩어리 인생의 이율배반)

실존철학자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의 두 번째 책 제목이 『두려움과 떨림』(Fear and Trembling)이다. 빌립보서 2:12,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에서 제목을 택했다. 1843년에 출판된 이 책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창세기 22장의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서 ‘종교적인 삶’이 갖고 있는 ‘모순’을 표현한다.

키에르케고르에게 ‘믿음은 패러독스(Faith is paradox)’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모습에서 단순하게 어느 한 면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모순됨을 발견한다. ‘아브라함은 영광스런 믿음의 조상인가? 아니면 살인을 기도했던 인물인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판단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상반된 현실이 공존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두려움과 떨림’ 속에 사는 존재이다.

교리가 필요하지만, 그러나 교리로는 우리 삶의 모순적인 현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2. 이율배반의 공존

니버는 『비극을 넘어서』(1937)에서 우리의 삶에 상반된 이율배반이 공존함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삶은 실존적 한계를 지닌 비극적인 삶이다. 인간의 죄가 심각하지만, 동시에 그 죄를 극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와 능력이 분명하시기에, 인간의 삶은 ‘비극을 넘어서’ 있는 희망으로 나아간다.

니버는 “십자가는 인간이 도덕적이고 영적인 성취의 최고조에 이르러 (로마법과 유대 종교에서) 하나님의 뜻을 위배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이 가장 격하게 드러난 바로 그 순간에 그 죄악을 스스로 흡수해 들이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기독교의 역사관은 인간의 가장 높은 정신적 노력에도 악이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것으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역사관은 악이 실존 그 자체에 내재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궁극적으로 선하신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는 것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비극을 넘어서 있다.”고 말한다.


3. 칼빈의 사고 구조의 특성

키에르케고르나 니버의 사고 구조는 칼빈의 사고 구조와 유사하다. 칼빈은 복잡하고 다양한 삶의 문제들을 일면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스 신화에 ‘프로메테우스의 침대’ 이야기가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사람을 침대에 눕혀 놓고, 침대 밖으로 발이 나오면 발을 자르고, 머리가 나오면 머리를 잘라서, 침대 크기에 맞추었다.

칼빈은 프로메테우스 식으로, 교리를 정해 놓고, 그 교리에 맞추어 사람들의 생각과 행위를 판단하지 않았다. 에밀 두메르그의 지적처럼, 칼빈의 사고 구조는 대립되는 것들 사이의 이율배반, 상반대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사고 구조는 복잡하고 다양한 현실의 문제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현실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된다.

단순한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어떤 문제를 대하게 되면 자기에게 맞는 측면만을 선택하거나, 어떤 전제를 가지고 단면적으로 해석하려는 속성을 갖는다. 일면적인 관점에서 칼빈을 이해하려고 하면, 칼빈을 진면목을 알 수 없다.



IV. 칼빈 신학의 특성


1. 신학적 겸손과 정직함

1) 칼빈은 신학적으로 겸손했다.

칼빈은 자신의 신학적 목표가 교리적 체계를 세우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신학 연구를 ‘더러움을 닦아내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나는 교황의 진창과 오물로써 너무나 더럽혀져 있고, 거기서 완전히 부패했으므로, 만일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은혜로 나를 복음으로 인도함으로써 거기로부터 끌어내지 않았더라면, 그 어떤 것으로도 나를 건져내지 못했을 것이다.”

참된 신앙은 교리로 무장한 신앙이 아니다. 교리로 오염된 마음을 닦아내기만 하면 참된 모습이 드러난다. 신앙의 문제는 닦아내지 않고 교리도 덧바르는데 있다.

칼빈의 신학적 겸손은 『기독교강요』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강요’를 결코 절대적인 가르침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성경을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안내자’가 되기를 바랄 뿐이라고 했다.

2) 칼빈은 늘 말씀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솔직하게 시인했다.

그는 성경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자기가 모른다고 인정했다. 사도행전 주석에서 1:11절,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해석에서 “내가 해석할 수 없는 것은 해석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한다.


2.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인간의 양심

1) 우리는 종종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그가 죽던 해인 1543년에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em)를 출간했다. 여기서 그는 지구가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주장했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사실을 밝힘으로, 중세의 우주관을 붕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2) 신학적으로 칼빈의 인생의 의미를 밝히는데 크게 공헌했다고 하겠다. 칼빈은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1542년, 제네바 요리문답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영광을 받으시려고 우리를 창조하셨고, 살게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 생명의 주인이요 원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아끼는 일 없이 그분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칼빈은 중세 시대에 잊혀져온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원리를 우선의 자리에 놓았다.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사상은 16세기의 대립과 박해라는 상황을 반영한다. ‘영광을 받으실 대상이 교회와 교황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믿음 때문에 옥에 갇히고, 고문당하고, 처형당하는 증인들을 옹호하기 위한 교리이다.

3) 칼빈의 신학에서 양심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양심을 강조했다. “양심은 성경이 아닌 창조된 질서 자체 안에서 주어진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주관적 계시의 한 요소이며, 모두에게 주어진 것으로써 인간의 일부를 이루며, 또한 하나님의 형상의 한 요소이다.”

양심은 자연법의 영역에 속하고, 성경의 은혜의 질서에 속하는 차이가 있다. 즉 양심으로는 하나님과 인간에 관한 완전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다. 참된 지식은 성경을 통해서 얻어진다.

칼빈에게 양심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이중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부분이다. ‘강요’(I.14.4)에서, “신학자의 임무는 말을 많이 함으로써 귀를 즐겁게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되고 확실하며 유익한 것을 가르침으로써 양심을 강화하는데 있다.”


3. 지성에 근거한 철저한 논리성과 성령의 역사에 의존하는 신비주의의 조화

일반적으로 칼빈을 이성적으로 철저한 논리체계를 세운 신학자로 이해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칼빈의 신학은 성령의 활동하심에 기반을 둔 신학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비밀을 이성으로 알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신앙적으로 참된 스승은 성령이다. ‘하나님의 비밀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주는 분이 성령이다.’ 성령의 도움이 없으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칼빈에게 하나님 중심은 곧 그리스도 중심이다. ‘강요’ 3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하는 방법을 말하는데, ‘우리와 그가 하나가 될 때까지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어떤 것도 우리에게 속한 것은 아니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으려면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칼빈에게는 성령의 역사를 다르게 표현한 것이 ‘신앙’이다. 칼빈은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입 맞춘다.”(III.2.8)고 정의한다. 신비적 표현이다. 성령의 관점에서 신앙생활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거룩하고 신비한 교제’이다.

칼빈은 성경과 성령을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로 이해했다. 성경과 성령은 결코 대립적이지 않다. 성령만이 성서적 영감의 확실성과, 그것의 신적인 권위를 가져다준다. 성경 말씀은 ‘성령의 은밀한 내적 증거’가 없이 이해하지 못하지만, 성령은 성경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진정한 하나님의 영은 성경 안에 새겨진 자기 형상에 의해서 인정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증거는 ‘성경에 의해서 검토되어야 하고, 성경에 속해야 한다.’(I.9.2). 즉, 우리가 받은 성령의 증거로 성경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에게 있는 성령의 증거를 판단하는 것이다.


4. 교리와 경험의 이중적 지식

칼빈은 ‘강요’의 시작에서 소위 ‘이중지식’에 관해 언급한다. 인간의 지혜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다.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이중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부분이 양심이다.

칼빈은 신앙에는 ‘이중의 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신앙을 잘못된 생각에서 구별해내기 위해서 반드시 신앙과 지식이 결합해야 하는 것이다. 복음은 ‘이성’으로 이해될 수 없다. 그러나 신앙은 ‘이중의 지식’을 가져야 한다. ‘성경에서 얻는 지식’과 ‘사건의 경험에서 얻는 지식’이다.

칼빈은 단지 성경을 통해서 ‘머리로 아는 것’으로는 하나님을 충분히 알 수 없다고 보았다. ‘경험을 통해 느껴야 한다.’ 하나님을 알려면 ‘경험을 통한 지식’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중적 지식의 관점에서, 칼빈은 ‘경험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한다.

칼빈은 ‘가장 좋은 신앙의 훈련은 일상적인 우리의 경험이라’고 확신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느낌이 우리에게 경건을 가르쳐 주는 유일하고 적절한 교사이며, 거기에서 신앙(종교)이 생겨난다.’ 그는 ‘실천과 경험 속에서 얻어지는 지식은 교만한 사변보다 훨씬 더 확실하다. 신실한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를 확실하게 알고, 손으로 만진다. 거기에서 자신이 살아나고, 깨닫고, 구원받고, 강해지고, 성화되는 것을 느낀다.’고 한다.


5. 교회의 일치를 위한 헌신

칼빈의 신학은 종교개혁의 에큐메니칼 신학이라고 하겠다. 칼빈에 대해 부정적인 쯔바익 마저도 “영감을 가진 루터는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역할을 하였고, 조직가인 칼빈은 개신교가 수천 개의 종파(Sekten)로 조각나는 것을 멈추게 한 것이다.”고 했다.

칼빈은 종교개혁의 2세대로써,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종교개혁자로써 그의 꿈은 종교개혁 교회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었다. 교회의 분열은 그에게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교회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감수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한 분이신 그리스도가 분열될 수 없는 것처럼 교회는 거룩한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에베소서 4:5 주석)고 주장했다.

칼빈이 에큐메니칼적 일치를 이루게 된 것은 ‘상대의 의견을 듣고, 상대의 견해에 대해서 열심히 연구하는 자세’를 가졌기 때문이다. 루터와 쯔빙글리는 마르부르크(Marburg) 종교회의에 참여해 대화를 나누었지만 성찬에 대한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칼빈은 이 결과에 대해서 “양쪽 모두 상대의 의견을 들으려는 인내가 없어서 실패했다.”고 평했다.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AI의 가장 큰 위험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죄"

옥스퍼드대 수학자이자 기독교 사상가인 존 레녹스(John Lennox) 박사가 최근 기독교 변증가 션 맥도웰(Sean McDowell)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신간「God, AI, and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한국교회 여성들, 막달라 마리아 제자도 계승해야"

이병학 전 한신대 교수가 「한국여성신학」 2025 여름호(제101호)에 발표한 연구논문에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 서방교회와는 다르게 동방교회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극단적 수구 진영에 대한 엄격한 심판 있어야"

창간 68년을 맞은 「기독교사상」(이하 기상)이 지난달 지령 800호를 맞은 가운데 다양한 특집글이 실렸습니다. 특히 이번 호에는 1945년 해방 후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김경재 교수는 '사이-너머'의 신학자였다"

장공기념사업회가 최근 고 숨밭 김경재 선생을 기리며 '장공과 숨밭'이란 제목으로 2025 콜로키움을 갖고 유튜브를 통해 녹화된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경직된 반공 담론, 이분법적 인식 통해 기득권 유지 기여"

2017년부터 2024년까지의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기독교 연합단체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의 반공 관련 담론을 여성신학적으로 비판한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인간 이성 중심 신학에서 영성신학으로

신학의 형성 과정에서 영성적 차원이 있음을 탐구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인수 교수(감신대, 교부신학/조직신학)는 「신학과 실천」 최신호에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안병무 신학, 세계 신학의 미래 여는 잠재력 지녀"

안병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하엘 벨커 박사(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명예교수, 조직신학)의 특집논문 '안병무 신학의 미래와 예수 그리스도의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자라난다"

한국신학아카데미(원장 김균진)가 발행하는 「신학포럼」(2025년) 최신호에 생전 고 몰트만 박사가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전한 강연문을 정리한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교회 위기는 전통의 사수와 반복에만 매진한 결과"

교회의 위기는 시대성의 변화가 아니라 옛 신조와 전통을 사수하고 반복하는 일에만 매진해 세상과 분리하려는, 이른바 '분리주의' 경향 때문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