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칼빈의 생애와 신앙개혁
발표 : 이재천(한국기독교장로회신학연구소 소장)(2009년 5월 28일 기장신학연구소 목회와신학연구 세미나에서 발표)
출처 : 한국기독교장로회 신학연구소
칼빈의 생애와 신앙개혁
이 재 천 (한국기독교장로회 신학연구소 소장)
내 용 목 차
A. 시대적 배경
I. 변화의 시대
II. 변화에 대한 대응 방식
B. 칼빈의 생애
I. 칼빈에 대한 오해와 진실
II. 칼빈의 인생
III. 목회자 칼빈
C. 칼빈의 신앙 개혁
I. 인문학적 배경
II. 『기독교강요』
III. 칼빈의 사고방식
IV. 칼빈 신학의 특성
A. 시대적 배경
I. 변화의 시대
칼빈이 살았던 16세기 유럽사회는 천년의 중세 역사를 마감하는 변화를 겪고 있었다.
1. 새로운 세계의 발견
두 세기에 걸쳐 전 유럽을 뒤 흔든 십자군 전쟁의 열기는 사람들에게 미지의 세상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해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험적인 방랑에 뛰어 들어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다. 새로운 발견을 위해서 먼 바다로 떠났던 사람들 중에 콜럼버스란 인물도 있었다. 그가 아메리카 대륙은 발견한 때가 1492년이다.
2. 사상적 변화
칼빈이 세상을 떠난 해가 1564년이다. 그와 같은 해에 르네상스의 마지막 천재로 일컬어지는 미켈란젤로도 세상을 떠났다.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르네상스 시대의 특징을 ‘세계와 인간의 발견’이라고 정의했다.
인간의 발견은 곧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발견이요, 인간의 능력과 가능성에 대한 발견이었다. 이러한 발견은 예술의 영역에서 앞서 표현되기 시작했다. 예술가들은 살아있는 인간의 생동감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사상가들은 생각하고 판단하여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인간 존재의 자유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교회가 규정한 교리적 가르침에 순응함에서 벗어나 스스로 진리를 추구하고, 그 깨달음을 표현하고자 했다.
3. 교회적 변화의 움직임
중세기 동안 사회적 지배세력으로 군림해온 로마 가톨릭 교회는 권력의 독배에 취해 있었다. 수도회 운동 등, 여러 차례의 교회 내적 갱신 운동이 일어났지만, 번번이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지 못한 채 시들고 말았다.
그렇지만 개혁의 물고를 튼 선각자들이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John Wycliffe가 제도화된 교회의 변화를 외쳤다. 위클리프는 인간의 이성이 계시와 모순되지 않음을 주장했으며, 교회가 보속을 위해 제공하는 어떤 공덕도 구원을 보증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384년에 죽었는데, 사후에 교회의 정죄를 받아 1428년, 유해가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존속해서 영국 종교개혁에 합류하게 되었다.
보헤미아 지역에서는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은 John Hus가 개혁을 외쳤지만, 종교 재판을 받고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후스의 주장은 소멸되지 않았다. 그의 추종자들은 바덴시안과 합류하거나 보헤미안 형제단을 형성했다.
이탈리아에서는 Girolamo Savonarola가 (Cistercian 수도승이었던) 피오레의 요아킴(Joachim of Fiore, - 1202)의 종말론에 기초하여 교회 개혁을 주장했다.
변화의 물결은 점차 거세져 가로막는 박해의 장벽을 넘어서게 되었다.
II. 변화에 대한 대응방식
역사적 변화에 대응하는 삶의 유형을 세 가지로 구분해 보려고 한다.
1. 기존 질서를 고수하려는 유형 (Counter-Reformation group)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영역에서 교회의 회복과 재확립을 기대했던 인문주의자들의 바램은 거부되었다. 교회는 근본적인 변화를 거부했다. 오히려 반종교개혁 운동을 일으켜 교회 내적 결속을 강화하고자 했다. 칼빈의 제네바 종교개혁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시기에 로마 교회는 Trent 공의회(1545-1563)를 열어, ‘성직자의 권위와 교회의 전통’을 고수하는 지배적이고 독단적인 교회임을 강조했다.
스페인을 중심 세력으로 한 로마 가톨릭 교회는 강력한 종교재판소(Inquisition)를 통해 권력의 안정을 도모하고, Ignatius of Loyola(1491-1554)가 주도한 Jesuits 수도회(1540 창설) 등의 새로운 세력을 추동하여 신학의 발전과 함께 지리적 영역을 확장하는데 주력했다.
2. 기존 질서의 해체를 주장하는 유형 (Radical Reformation group)
급진적 개혁 세력은 기존 질서의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의로운 자들만의 세상을 수립하려고 했다.
1524년 독일 지역에서는 농민전쟁이 일어났다. 주도자는 한 때 루터의 동료였던 Thomas Müntzer였다. 취리히에서 쯔빙글리와 함께 개혁운동을 일으켰으나, 곧 분리되었던 재세례파들은 뮌쩌와 연대를 시도하기도 했다.
3. 대안적 질서를 수립하려는 유형 (Reformation group)
종교개혁의 주도 세력은 세속 권력의 권위를 인정하고, 세속 권력과의 관계를 토대로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고 했다.
B. 칼빈의 생애
I. 칼빈에 대한 오해와 진실
칼빈처럼 평생을 오해와 비난에 시달려야 했던 사람도 드물다. 아니 세상을 떠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그에 대한 엇갈린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
1. Castellio의 비판
카스텔리오는 프랑스 리용에서 종교개혁에 가담한 인문주의자이다. 박해를 피해서 스트라스부르로 도피한 카스텔리오는 같은 시기에 그곳으로 도피해 있는 칼빈과 같은 집에 머물기도 했다. 이후 카스텔리오는 제네바에서 칼빈과 반목하게 되는데, 그가 칼빈을 본격적으로 비난하게 된 사건의 발단은 미셀 세르베투스(Michel Servetus)라는 인물과 관련된다.
1) 스페인의 젊은 의사였던 세르베투스는 1531년, 아그노(Haguenau)에서 『삼위일체의 오류에 관하여』(Sur les Erreurs de la Trinité)라는 작은 책을 발간했는데,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공격했다. 1534년 말, 파리에서 칼빈은 자신이 체포될 수 있는 위태로운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세르베투스에게 여러 지인들과 토론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세르베투스는 칼빈의 제안에 동의하여 토론을 약속했으나, 토론에 나타나지 않았다.
2) 1553년 4월 5일, 가톨릭 종교재판관은 세르베투스를 체포했다. 그러자 세르베투스는 자신이 비난했던 모든 것을 취소했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감옥을 탈출했다. 궐석재판에서 그는 화형에 언도되었고, 그의 책과 그의 모조인형이 불 속에 던져졌다.
세르베투스는 1553년, 『기독교 재강요』(Christianismi Restitutio)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삼위일체론를 부정한다. 뿐만 아니라 세르베투스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반박하기 위해 쓴 32개의 편지를 책으로 묶어내기도 했다.
가톨릭 종교재판소의 감옥을 탈출하고 넉 달 동안 돌아다니던 세르베투스는 제네바로 갔는데, 8월 13일 주일, 칼빈의 설교를 들으러 마들렌느 교회에 참석했다. 거기에서 그의 신분이 들어나 체포되었고, 재판에 처해졌다.
재판에서 세르베투스는 자기의 주장을 방어하면서, 칼빈의 적대자들 중에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만들어 내었다. 세르베투스로 인해서 제네바가 소란스러워졌다. 9월 1일, 칼빈과 세르베투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제네바 의회는 종교개혁에 참여한 이웃 도시들의 견해를 묻기로 했다. 10월 18일, 스위스 교회들의 답신들이 도착했다. 모두 유죄 결론을 내렸다. 제네바 의회는 10월 26일, 세르베투스가 샹펠의 형장에서 화형에 처해질 것이며, 그의 책들도 불태워지리라고 선고했다. 칼빈은 사형 방법을 바꾸려고 요청했지만, 그의 요청은 무시되었다.
1553년 10월 27일, 미셸 세르베투스는 제네바 의회의 선고에 따라서 화형에 처해졌다. 칼빈은 사형선고가 삼위일체와 유아세례라는 근본적 교리에 대해서 맹렬하게 비판하는 자에 대한 유일한 형벌방식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화형이 아니라 검으로 대치되기를 원했다. 불의 고통이 면제되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세르베투스의 화형을 시점으로 칼빈에게는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게 되었다.
3) 칼빈은 세르베투스의 오류를 비판하기 위해서 1554년에 라틴어로 『거룩한 삼위일체에 관한 정통신앙의 수호』를 썼다. 세르베투스의 처형에 충격을 받은 카스텔리오는 “이단자들에 관하여, 만일 그들이 기소되어야만 한다며”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관용을 외치는 선구자가 되었다.
카스텔리오가 이단자를 화형에 처하는 잔인한 형벌을 비난한 것은 타당하다고 하겠다. 다른 한편, 삼위일체, 성경의 권위와 같은 기본적인 교리의 부정이 갓 태어난 종교개혁을 무너뜨릴 위험성을 갖고 있다고 본 칼빈의 판단도 옳았다고 하겠다.
4) 카스텔리오는 칼빈이 짊어져야 했던, 교회와 함께 사회적 질서를 세워야 하는 책임이 없었다. 그는 교회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치열한 갈등의 현장에 없었던 사람이었다.
세르베투스 사건이 일어난 시기는 칼빈이 제네바에 다시 정착한지 12년이 지났지만 칼빈에게는 아직도 힘든 시기였다. 칼빈의 적대자들이 의회의 대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1903년에 제네바와 프랑스의 종교개혁 교회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350년 전인 1553년 10월 27일, 미셀 세르베투스를 화형에 처하는 장작더미가 쌓였던 샹펠(Champel)의 자리에 속죄비를 세웠다.
“우리는 위대한 종교개혁자 칼빈을 깊이 존경하고 감사하는 후예로서 종교개혁의 참된 원리와 복음에 따르는 양심의 자유에 확고히 서서, 그 시대의 실수이기도 한 그의 잘못을 인정하며 이 속죄비를 세운다. 1903년 10월 27일.”]
2. Voltaire의 관용론의 관점
1)볼테르(1694-1778)는 프랑스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파리 태생인 그는 84세까지 장수했는데, 평생토록 낡은 제도와 정치적 불의에 맞서 비판의 칼날을 멈추지 않았던 자유인이었다. 그가 왕정지배 세력들과의 갈등으로 인해서 프랑스에서 추방당해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60세에 처음으로 정착한 곳이 제네바였다.
당시 Calvinist 도시인 제네바에서 가톨릭 교도는 부동산을 소유할 수 없었지만, 볼테르에게는 예외적인 특혜를 주어 저택을 소유하게 했다. 제네바에 머물면서 쓴 비극이 성공을 거두자, 볼테르는 “칼빈은 가톨릭 교도가 제네바에서 위그노(프랑스 개신교도)를 눈물 흘리게 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고 평했다.
그러나 칼빈주의 도시 제네바가 극장의 문을 닫게 하자, 1758년, 예순네 살에 제네바에 근접한 프랑스 국경 지역 ‘페르네’(Ferney)에 저택을 마련하고 1777년까지, 마지막 20년의 여생을 지냈다. [페르네는 볼테르로 인해서 마을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마을의 이름은 공식적으로 'Ferney-Voltaire'로 명명되었다.]
2) 볼테르는 권력과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가톨릭 교회의 행태를 비판했다. 대표적으로 1763년, 예순아홉에 쓴 『관용론』(Traité sur la tolérance)은 종교적 편견 때문에 무고한 노인을 능지처참한 장 칼라스 사건(1761)에 대한 항거의 결과이다. [칼라스 사건이란 무지비한 종교 재판의 실상은, 칼라스란 상인 가족이 아들이 개신교도이기에 변호사가 되지 못한 것을 비관해서 아들을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에 처해진 것이었다. 이 재판은 볼테르의 이의 제기로 재심판결이 진행되어 3년 만에 무죄와 복권이 선고되었다.]
3) 볼테르의 종교비판은 가톨릭 교회의 영역에 제한되지 않았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신뢰했고, 순수한 윤리와 이성에 기초한 사회개혁을 주장한 볼테르의 관점에서 보면, 당대의 칼빈주의자들은 보편성을 상실한 종교적 편견, 즉 교조적인 신앙에 사로잡혀 있었다. 볼테르는 그가 경험한 칼빈주의자들에게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종교적 맹신과 광신의 모습을 발견했고, 그 연장선에서 230년 전의 인물인 칼빈을 이해했다. 장 칼라스 사건의 경우에 빗대어, 세르베투스를 화형에 처한 제네바의 칼빈을 관용을 모르는 교조적인 종교권력의 화신으로 보게 되었던 것이다.
볼테르는 세르베투스의 처형의 ‘종교개혁 내에서 일어난 첫 번째 종교살인’이라고 규정하고, 나아가 종교개혁의 근본이념을 거부한 최초의 행위였다고 비난했다. 누구나 자유로운 성서해석의 권리를 갖고 있음을 인정하는 복음주의(개혁정신) 정신이 거부되었다는 것이다.
4) 볼테르는 칼빈을 자신의 주관적 경험에 기초하여 판단함으로써, 자신이 그토록 비판하던 편견에 빠지게 되었다. 볼테르 당시 프랑스는 절대왕정이 지배하고 있었고, 지배집단에 속한 가톨릭 교회는 절대적인 세속 권력과 밀착되어 있었다. 절대왕권이 지배하는 프랑스에서, 절대 권력에 의해 자행되는 무수한 불관용의 행태에 대한 비판은 타당성의 가지며, 새로운 사회를 향한 이정표가 되었다.
그러나 칼빈 당시의 제네바는 상반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제네바 시민정부는 정치적인 주도 세력이 형성되지 않은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었고, 이전의 상태(가톨릭 지배)로 돌이키려는 정치 세력의 위협을 안팎에서 받고 있었다. 세속 권력을 대표하는 시 의회는 칼빈이 주도하는 개혁을 사회질서 수립의 구심으로 삼으려 했지만, 칼빈에게 사회 권력을 결단코 양도하지 않았다. 칼빈은 불안정한 교회의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 교조적인 신학을 발전시키지 않았다. 더구나 관용을 모르는 권력을 행사할 만큼 정치적인 지배 세력에 포함되어 있지도 않았다.
볼테르는 “칼빈과 세르베투스는 서신으로 논쟁을 벌였다. 칼빈은 논쟁으로부터 모독으로 넘어갔고, 모독으로부터 신학적 증오로 넘어갔는데, 신학적 증오야말로 가장 앙심이 깊은 것이다.”고 했다. 그러나 볼테르가 지적한 것은 사실과 다르다. 1) 칼빈은 세르베투스와 은밀하게 통해서 『기독교 재강요』를 손에 넣지 않았다. 2) 칼빈이 밀정을 시켜서 세르베투스를 가톨릭 종교재판소에 고발하지 않았다. 칼빈은 세르베투스를 설득하기를 원했지, 처벌하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어떻든, 볼테르의 주장은 이후에 칼빈에 대한 비난을 강화하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3. Stefan Zweig의 비판
1)20세기에, 카스텔리오의 칼빈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극적으로 증폭시킨 인물이 Stefan Zweig이다. 쯔바익은 1936년에 카스텔리오의 주장을 옹호하는 책 Castellio gegen Calvin oder Ein Gewissen gegen die Gewalt (The Right to Heresy: Castellio against Calvin; 우리말 번역은 『폭력에 대항하는 양심』)를 출판했다.
이 책의 서론에서 쯔바익은 자신이 스위스 바젤에 보존되어 있는 카스텔리오의 칼빈에 대항하는 투쟁서에 따라서 칼빈의 이미지를 규정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카스텔리오는 자신을 “코끼리에 대적하는 한 마리 파리”(Die Mücke gegen den Elefanten)와 같은 존재라고 묘사한다.
2) 쯔바익의 책의 첫 장의 제목은 ‘권력을 장악한 칼빈’이다. 쯔바익은 칼빈이 ‘광신적인 독선가였으며, 무고한 사람을 죽게 하였고, 나아가 종교개혁 정신에 있는 양심의 자유(루터가 생각해낸 “기독교인의 자유 Freiheit des Christenmenschen”)를 말살한 인물’이라고 평한다. 그리고 칼빈을 제네바 시민들에게 단 하나의 진리만을 허용한 ‘영적 독재자’라고 부른다. 쯔바익에 의하면 칼빈은 자기와 다른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증오심을 품은 폭군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더 나아가 쯔바익은 칼빈이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가장 즐겨 사용한 방법이 테러였다고 한다.
3)[Zweig은 1881년, 오스트리아 빈의 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9년부터 1935년까지 오스트리아 짤즈부르크에서 살았다. 번역가요 전기 작가로 활약했는데, 마리 스튜어트 여왕(Marie Stuart),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에라스무스(Erasmus of Rotterdam), 발작(Balzac) 등의 전기가 유명하다. 쯔바익은 독일에서 나치즘이 세력을 확장하는 시기에 영국으로 이주했다. 영국에서 1940년에 다시 브라질로 이민을 갔다. 그리고 1942년 2월, 브라질에서 자살했다.]
4)쯔바익은 유대인으로서 히틀러의 나치즘에 대해서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가 칼빈에 대한 책을 출간한 시기는 히틀러의 제삼제국이 세력을 더해가는 시기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자신이 비판하는 히틀러의 이미지에 칼빈의 이미지를 겹쳐 놓았다.
5)한편 쯔바익의 부정적인 칼빈관은 칼빈에 대한 독일어권 일부의 견해를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일 루터 교회와 스위스 개혁교회 사이의 역사적 관계를 살펴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6)쯔바익은 자신이 미리 정해놓은 극단적인 이미지에 맞추어 칼빈을 재구성하려고 하였다. 그의 시도는 칼빈이 ‘제네바의 권력 전체를 자신의 권한 아래 두었던 절대 권력자였다’는 전제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칼빈은 절대 권력자의 자리에 앉아 본 적이 없었다. 칼빈에게 주어진 것이라고는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로써의 영적 권위뿐이었다. 그래서 장 카디에는 칼빈의 제네바를 ‘신정’(theocracy)이 아니라 ‘성서정'(bibliocracy)이었을 뿐이라고 한다.
[쯔바익은 칼빈 주변의 인물들을 모두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칼빈을 제네바로 이끈 파렐(Farel)은 광신적이며, 머리가 비상하고, 가차 없는 난폭한 기질을 가진 인물이다. 그리고 길거리에 널린 불만을 규합해서 결정적인 순간에 기습과 공격을 하도록 민중을 충동질하는 전략을 알았던 종교혁명가이다. 뿐만 아니라 칼빈의 후계자 베자를 가리켜 여러 해 동안 칼빈에게 충실하게 순종한 대가로 후계자가 되었으며, 자유를 말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미칠 듯이 증오한 광신주의적인 인물이라고 한다.]
II. 칼빈의 인생
1. 기득권의 포기
칼빈이 종교개혁에 참여하기로 결정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 중에 하나가 기득권의 포기였다.
칼빈의 아버지는 노용 성당에서 중요한 직분을 맡은 평신도였다. 아버지는 아들이 성당의 한 제단(제진느 제단)의 수입의 일부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칼빈은 12살 무렵부터 성직록을 받게 되었다. 당시 성직록은 일반적으로 교육비용으로 사용되었다. 칼빈은 그가 오를레앙 대학에서 법학박사(1533)을 받을 때까지 성직록을 받았다. 그러나 1534년, 25세 때, 칼빈은 갑자기 교회의 성직록을 받지 않기로 결정했다.
칼빈의 성직록 포기는 그의 갑작스런 회심 체험과 관계가 있다. 그는 회심 체험을 통해서 복음에로 돌아섰으며, 그것은 가톨릭 교회와의 단절을 의미했다. 그는 노용으로 가서 성직록의 포기를 통보함으로써 교회와의 단절을 선언했다. 당시 사회에서 평생토록 보장된 성직록의 포기는 일상적인 일이 결코 아니었다.
2. 망명객의 빈곤
1) 칼빈은 1536년, 제네바에 처음 도착하기 전에 노용에 있던 모든 소유를 처분하고 스트라스부르를 향해 떠났다. 그로부터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지 못하고 망명자의 일생을 살았다.
2) 제네바에서 처음 3년간, 칼빈은 정식 목사가 아니라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로 되어있었다. 성경 교사로서 간신히 생활을 할 정도의 수입 밖에 얻지 못했다.
3) 1541년에 제네바에 다시 돌아온 이후에도 그저 먹고 살 만큼의 사례를 받았다.
3. 육체적인 연약함
칼빈은 스스로를 “내가 본래 약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표현한다. 원래 몸이 약한데다, 대학에서 지나치게 공부에 몰두하다가 평생 고질병이 된 위장병을 얻었다.
그는 마치 종합병동과도 같이 여러 질병에 시달려야 했는데, 위장병 외에도 ‘만성 편두통, 폐 질환과 폐결핵, 악성 감기, 늑막염, 열병, 신경통, 신장결석, 그리고 통풍’ 등으로 고생했다.
마지막 해가 되는 1564년 초, 칼빈은 의사 몽펠리에(Montpellier)에게 쓴 편지에서 “신경통, 결석, 경련, 치질, 혈담 등의 증상들이 마치 군대처럼 나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학질로 인한 고열이 시달리고, 다리에는 찌르는 듯 하는 통증을 느끼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병상에서 통증에 시달리면서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당신은 나를 부숴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의 손이라는 것으로 나는 족합니다.”
4. 자기 부정의 삶 (self-denial)
칼빈은 종교개혁자가 되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다. 그는 원래 (문학과 사상적인) 저술가가 되려고 했었다. 법학을 전공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첫 작품으로 첫 연구 작품으로 Seneca의 『관용론』De clementia에 대한 해석서를 저술했다.
바젤에서 잠시 머물렀던 칼빈은 조용히 은거하며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 스트라스부르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제네바에서 파렐에게 붙잡혔다. 결국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고 제네바에 머물게 된다. 자기가 생각하던 삶을 포기하고, 종교개혁의 과제를 맡기로 한 것이다.
1541년, 제네바의 요청을 받고 다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칼빈은 “나는 내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에게 속해 있습니다.”라는 자기 부정의 고백을 한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3권 7-8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내용을 ‘자기 부정’으로 정리한다.
5. 하나님의 사람
칼빈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확고한 인생관을 지닌 사람이었다.
1)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양심
1536년, 파렐은 칼빈을 제네바에 붙들어 놓으려고 설득하다가 화를 낸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당신이 지금 주님의 사업에 우리와 함께 동참하기를 거부한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저주할 것이오.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의 생각만 따르고 있소.” 칼빈은 ‘파렐의 말에 놀라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는 계획된 여행을 포기했다.’고 한다.
칼빈은 임종을 앞두고 친지들에게 남긴 고별사에서 “그동안 내가 했던 모든 일은 아무런 가치도 없으며, 나는 비참한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나는 선을 행하기를 원하였는데, 나의 잘못이 언제나 나를 괴롭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대한 두려움이 나의 마음 가운데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라고 한다.
2) 하나님께 영광을
1909년, 칼빈 400주년을 기념하는 강연이 칼빈이 목회하던 제네바 St. Peter's Church에서 열렸다. 당대를 대표하는 칼빈 학자 에밀 두메르그(Emile Doumergue)가 기념 강연을 맡았다. 두메르그는 그의 강연을 이렇게 시작했다. “To the glory of God! (Soli Deo Gloria!) 저는 이 말이 이번 기념행사를 시작하는 첫 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칼빈이 종교개혁에 헌신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그의 회심 체험이다. 그렇지만 칼빈은 자신의 회심에 대해 분명하게 말해주지 않았다. 다만 그의 글 두 곳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1539년에 쓴 「사돌렛에게 보내는 편지」와, 1558년에 쓴 「시편 주석」 서문이다. 장 카디에는 칼빈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관계된 것은 알리지 않은 채 내버려 두도록 했다고 해석한다.
칼빈은 1542년의 교리문답을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자 우리를 창조하셨고, 세상에서 살게 하셨다. 그분이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자 원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자신의 전체 신학을 개괄할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없지만, 학자들은 루터의 신학을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의 신학’이란 두 축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루터 신학의 틀을 빌어 표현하자면, 칼빈은 ‘십자가의 고난’의 삶을 삶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말 대신 몸으로 증언한 인물이다.
3)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Calvin's Confidence in God)
칼빈이 끊임없이 밀려드는 고통스런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던 근거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때문이었다. 그는 항상 ‘나는 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다.’고 노래했다. 「욥기 설교」에서, “‘하나님의 군사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라는 말씀을 잘 기억합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의 수고가 헛될 것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군사를 모두 모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결코 더 강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승리하십니다.”(욥기 25:1-6)고 한다.
그는 시험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의 연단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다니엘 주석』의 서론에서는, “우리는 지금 생생한 모습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사악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심지어 관대하게 대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의 종들을 마치 금이나 은 같이 시험하고 계신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도구로서의 확신
칼빈은 ‘하나님의 도구로써, 하나님의 일을 할 뿐이다.’는 확고한 self-esteem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온 세상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우리의 굳건함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 그로 인해서 흔들리지 조차 않을 것이다.”(「데살로니가후서 2:14 주석」)고 하며, 언제나 당당하게 맡겨진 일을 감당했다.
칼빈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일한 ‘충성된 종’이었다. 그는 너무 많은 일을 했다. 아니 사람들이 그를 잠시도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래서 칼빈의 근본적인 사망 원인을 지속된 과로로 인한 쇠약이라고 한다.
6. 여성적 감수성을 내재한 새로운 리더십
1) 칼빈은 어린 소녀의 심성과도 같은 섬세한 감수성을 지녔다. 그의 섬세한 심성을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그의 편지이다. 약 이천 통에 달하는 칼빈의 편지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 편지들에서 우리는 인간 칼빈의 모습을 느끼게 된다.
2) 칼빈의 섬세한 심성은 인간관계에서 잘 표현된다. 그의 아내가 병들어 임종을 앞에 두고 있을 때, 그는 병상의 아내를 지극한 정성으로 돌보았다. 아내가 먼저 결혼에서 얻은 딸이 있는데, 그 딸을 자신을 딸로 생각하고, 자신이 죽기까지 그 딸을 정성껏 돌볼 터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위로한다.
1949년, 9년 동안 함께 했던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 칼빈은 뜨거운 눈물을 흘립니다. 나중에 동료 파렐에게 쓴 편지에서 칼빈은 그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한다. “아내의 죽음은 나에게 너무나 큰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나로서는 할 수 있는 만큼 슬픔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슬픔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나는 내 인생의 가장 훌륭한 반려자를 잃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나의 목회에 가장 신실한 조력자였습니다. 그녀는 병으로 고생하면서도 나에게 어떤 불편도 주려하지 않았으며, 자신보다 자식들을 더 소중하게 돌보았습니다.”
3) 칼빈의 여성적 감성은 그의 신학 작품에도 깊이 반영되어 있다. 대표적인 예가 교회론이다. 루터의 교회론에서는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공동체”란 개념이 일관되게 강조되고 있다. 교회의 성격이 ‘선포와 들음이라는 관계,’ 즉 masculine한 관계로 규정된다. 반면에 칼빈에게서는 교회가 ‘품에 안아, 젖을 먹여 키우는 관계,’ 즉 feminine한 관계로 규정된다.
칼빈에 의하면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은밀한 선택과 내적인 부르심’에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아시고, 은밀하게 부르셔서, 품에 안아 주신다. 이 때,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안아 주시는 품이다.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눈에 보이는 교회(the visible church)의 본성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용어가 ‘어머니’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요, 그리스도는 머리요, 교회는 어머니이다. 그래서 “어머니(교회)가 우리를 잉태하고, 낳고, 가슴에 안아 적을 먹여 기르고, 육신을 벗을 때까지 안내해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명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회관과 상통한다. 다른 한편, 칼빈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부르기도 한다.
4) 여성적 이미지의 교회론은 칼빈의 목회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26년 동안 목회하면서 수많은 갈등에 휩쓸렸지만, 자기의 힘을 내세워 남을 해하기보다 차라리 ‘나를 죽이라’는 희생의 자세로 일관했다.
5) 종교개혁 교회는 칼빈의 여성적 감수성에 기초한 리더십 덕분에 더 큰 분열을 방지할 수 있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참여자들은 나름대로 대단한 개성의 소유자들이다. 그런 인물들 사이에서 견해의 차이를 조정하여 일치를 이루어내기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칼빈은 한편으로는 개혁자들 사이의 신학적 차이를 치밀하게 연구하고 분석하여 갈등의 원인을 규명해 내면서, 다른 한편, 개별적인 차이를 넘어 본질적 일치를 확인함으로써 서로 화합하게 하는 노력을 계속했다.
6) 칼빈에게서 21세기 교회가 필요로 하는 여성적 감수성이 전제된 리더십의 전형을 발견하게 된다.
7. ‘화살을 만드는 일’로 마무리한 인생
칼빈은 인생 여정을 사람 만드는 일로 마무리했다. 인생의 말년에 찾아온 상대적 안정기에 칼빈은 개혁이 뿌리내리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에 전념했다. 대학교를 설립하여 개혁교회의 목회자를 세우는 일이었다. 1559년, 제네바 대학교를 설립하고, 자신은 베자와 함께 신학을 가르쳤다. [제네바 대학의 교육 과정은 언어를 기본으로, 철학, 문학, 그리고 신학이 중심이었다.]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에서 개혁교회는 1555년에 처음 세워졌는데, 급격하게 성장해서 1561년에는 2,150여개의 교회가 있었다. 프랑스 개혁교회를 목회할 목사들은 칼빈이 있는 제네바에서 배출되었다.]
칼빈은 프랑스 교회를 향해서 말했다. “우리에게 재목을 가져다주십시오. 그러면 화살을 만들어 돌려 드리겠습니다.” 프랑스에서 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그 중에 스코틀랜드의 개혁자인 John Knox도 있었다. Knox는 칼빈에게서 직접 강의를 들었으며, 그가 배운 신앙의 원리와 교육을 스코틀랜드에 적용하여 오늘날 장로교회의 직접적인 기원이 되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세웠다.
III. 목회자 칼빈
1. 교회로부터 쫓겨남
칼빈은 1536년, 파렐의 요청에 순종하여 제네바 교회를 위해서 일하게 되었다. 그런데 불과 2년 만에, 1538년 8월, 칼빈은 제네바 교회에서 강제로 추방을 당했다.
그런데 쫓아낸 지 3년 만에 제네바 교회는 칼빈을 다시 불렀다. 칼빈을 좇아낸 세력이 몰락하고, 도시가 혼돈에 빠졌기 때문이다. 제네바는 칼빈에게 다시 와서 질서를 세워 줄 것을 요청했다.
제네바의 재청빙을 받은 칼빈은 정말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같은 사람들이 이렇게 상반된 일을 버젓이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는 그 때의 심정을 너무 ‘놀라서 반 쯤 정신이 나갈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아무 일도 못하고 이틀 동안 떨기만 했다. 그는 정신적인 고문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끔직한 멍에를 다시 메고 싶지 않았다. 그는 ‘제네바에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백번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제네바만큼 싫은 데가 하늘 아래 또 없었다.’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결국 칼빈은 제네바로 돌아가게 된다. 언제나 그렇듯, 자신을 ‘하나님의 도구’라고 생각했기에,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로 한다. 파렐에게 보낸 편지에서, 칼빈은 ‘나는 나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심장(마음)을 죽여서 주님께 희생 제물로 바칩니다. 내 영을 묶어서 하나님께 복종합니다.’고 한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맡길 뿐이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사지라도 가겠다는 심정으로 제네바로 돌아갔다.
“나의 심장을 죽여서 주님께 드립니다.” 이 말은 칼빈의 좌우명이 되었다. 그로부터 칼빈은 ‘심장을 들고 있는 손’에, “두 생각 없이 솔직하게”라는 라틴어 경구를 넣은 그림을 자신의 신앙적 결단의 상징으로 삼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