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설교자를 위한 성서 연구
발표 : 김창주 박사(2009년 9월 17일, 기장신학연구소 목회와신학연구 세미나에서 발표)
출처 : 한국기독교장로회 신학연구소
6. ‘아멘’(אמן)과 ‘오래 버티기’(אמונה)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 한지라’(에무나)(출 17:12)
해가 질 때까지 그의 팔은 처지지 않게 되었다(공동).
해가 질 때까지 그가 팔을 내리지 않았다(새번역).
→ (모세의) 손의 ‘버티는’ 힘이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더라(직역)
우리가 일상적으로 ‘아멘’할 때 이 말은 히브리어 ‘확신하다, 지지하다’ 등의 뜻으로 이해한다. 아멘의 본래 뜻은 ‘오래 버티다, 꾸준히 지속하다, 끈질기게 밀고가다’이다. 여기에서 ‘믿음, 꾸준함, 견고함, 신뢰’ 등의 명사형이 파생한 것이다. 온 구약성서에 40 여 차례 나오는 이 표현은 대부분 ‘신실, 진리, 성실’ 등으로 옮겼다(신 32:4, 시 37:3, 119:86, 잠 12:17, 사 25:1, 렘 5:1). 그러나 중세 교회개혁 때문에 잘려진 하박국 2장 4절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에서 ‘에무나’는 유독 ‘믿음’으로 번역되었다. 이 구절은 아마도 교회개혁의 기치를 내세울 때의 루터의 슬로건이었기 때문에 그의 독일어 번역 영향으로 오랫동안 ‘믿음’으로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에게 믿음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는 바울의 가르침 때문인지 보통 ‘믿음’이라면 머리로 깨닫고, 가슴으로 이해하며, 입으로 소리 내어 고백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심지어 믿음을 구원의 날짜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믿음이 있다’고 간주하는 극성스러운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믿음, 혹은 신실함이라는 극성스럽게 신앙생활 하다가 제 풀에 넘어지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란 순간적인 확신이나 소신, 또는 영감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끝까지 버티며 마지막 순간까지 견디는 힘과 의지를 가리킨다. ‘믿음’이 구약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장면은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가 손을 들고 있는 순간이다.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 (모세의) 손의 ‘버티는’ 힘이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더라. 모세가 손을 들고 끝까지 끈질기게 버팀으로써 이스라엘은 아말렉과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7.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게 하라(17:14)
아말렉과 싸움을 승리한 후 ‘기록하라, 기억하라, 귀에 두라’는 권면으로 그 단락을 마감한다. 이렇게 동사가 세 차례 이어지는 것으로부터 이스라엘의 독특한 역사관을 살펴볼 수 있다. 즉 역사의 연구가 우선은 기록에서 시작하고, 두 번째로는 기억한다는 것, 그리고 ‘귀에 심어두라’는 세 단계의 훈련과정을 거치게 한다는 점이고, 나아가 신앙적인 의무 사항으로 권고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물론 이와 같은 과거 회상이 병적인 집착으로 오해할 필요는 없다.
일상적으로 ‘기념하라,’ 또는 ‘기억하라’로 번역하는 히브리어 자카르(זכר)는 단순한 지적인 행위나 과거에 있었던 사건을 회상한다는 의미거나, 역사의 창고 한켠에 먼지 뒤집어 쓰고 있는 정보와 자료를 캐내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기억’은 인식적인 회상, 정보의 재생산이 아니라 ‘염두에 두다’로 옮기면 그 본래적인 의미가 분명해질 것이다. ‘염두에 두다’는 의식적으로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이며 적극적인 관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기억하는’ 태도는 자발적이며 과거의 ‘그것’이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상대가 된다. 따라서 ‘기억하라’에는 의식적으로 머릿속에 두고 주의를 기울이며 관심을 갖고 책임적으로 참여하라는 의미로서 결국 ‘준수하다, 실천하다’와 교환 가능해진다.<241>
*remember → ‘기억함’으로써 다시 제자가 된다?
8.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제사장 나라가 되며’(19:5-6; 벧전 2:9)
엄격한 의미에서 ‘제사장 나라’는 있을 수 없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제사장은 아론과 그의 후손에게만 허락된 지위였다. 여기에서 사제 계급의 특징은 제사를 전담하였다는 표면적인 현상을 넘어선다. 즉 그들은 읽고 쓰는 능력을 가진 특수한 계급이었다.
‘상형문자’란 ‘사제의 문자’를 의미한다. 즉 영어 clerical은 ‘성직에 연관된,’ 혹은 ‘서기나 필사자에 연관된’이란 뜻이다. 이것은 중세의 유산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성직자들의 당시 교육을 독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사장 나라’는 문맹이 아니라 ‘글을 읽고 해석할 수 있는 문해력’으로 풀이해야 한다. 고대 사회일수록 글은 특정 사제 계급만 독점하였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제사장 나라’는 모든 사람이 글을 배우고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공동체와 사회를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제사장 나라’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읽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특히 지금 우리는 수없이 많고 많은 이른 바 ‘말씀’과 사설(邪說)의 홍수 가운데 살아간다. 더구나 인터넷의 발전은 이와 같은 말씀과 사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어디나 스며들어 혼란에 빠뜨리며 어지럽히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제사장 나라’는 홍수처럼넘실거리는 지식과 정보를 읽고 아는 수준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신비한 운행 계획과 섭리를 알아차리고 식별한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9. 토라 - 삶의 뿌리
이스라엘의 모든 삶은 근거는 토라, 곧 ‘율법’에 두고 있다. 흔히 ‘율법’으로 번역된 토라는 본래 ‘가르침,’ ‘교훈’ 등을 뜻하는데 동사 ‘야라’(ירה)에서 비롯된 낱말이다. 히브리어 사전에 따르면 야라는 구약성서에서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① (활을) 쏘다, 던지다 (삼상 20:20,36; 삼하 11:20; 욥 30:19)
② 비가 내리다, 물을 뿌리다 (호 10:12; 사 55:10-11)
③ (기둥을) 세우다 (창 31:51), (주춧돌을) 놓다 (욥 38:6-7)
④ 가리키다, 제시하다 (창 46:28; 잠 6:13)
⑤ 지도하다, 감독하다 (레 10:11, 신 33:10; 삼상 12:23; 사 28:9)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야라’에는 주어가 지시하는 방향(direction)과 동시에 목표에 이르기 위한 움직임(movement)이 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동사 야라는 손가락으로 어떤 지점을 막연히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면 본 뜻을 놓치게 된다. 여기에는 반드시 지시하는 방향과 목표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이 동반된다. 그렇다면 야라 동사는 무엇을 지시하며 어떤 행동이 포함되는 것일까?
히브리어 부모(הורה), 교사(מורה), 토라(תורה)의 어원은 하나의 뿌리, 즉 ‘야라’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세 단어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우선 부모는 자녀가 태어나는 순간 신체적인 안전과 건강에 최우선적인 관심을 둔다. 부모는 자녀의 ‘육체적인 생명’을 위하여 존재한다.
한편 교사는 학생에게 인간의 윤리관과 인생관을 가르치며 역사관을 심어준다. 그럼으로써 학생은 스승에게서 인륜을 배우고 역사를 바르게 볼 수 있는 지혜와 시각을 갖추게 된다. 이런 점에서 교사는 학생의 ‘윤리적인 생명’을 가르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하여 토라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바로 설정하고 약속의 땅에서 지키고 살아가야할 신앙의 방향을 제시한다. 특히 이스라엘에게 토라는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 곧 신앙, 윤리, 생활, 경제 등에 있어서 건강하고 바른 질서를 가르치는 데 그 방향은 ‘영원한 생명’을 지시한다. 따라서 토라는 현세의 삶을 바르게 살 수 있게 하는 토대와 기초(욥 38:6)인 동시에 영원한 삶을 가르치는 안내자(요 12:50)가 된다.
↗ 부모 - 신체의 건강한 발육과 정서적인 안정을 통한 육체의 성장(physical life)
야라 → 교사 - 윤리 의식, 역사의식을 심어줌으로써 윤리적인 삶을 지향(moral life)
↘ 토라 - 하나님과 이웃의 바른 질서를 실천하여 영원한 삶을 소망(spiritual life)
다시 말해서 부모, 교사, 토라에는 일정한 방향과 그 목표에 이르게 할 움직임이 공통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부모는 자녀의 안전과 건강, 그리고 번영을, 교사는 학생의 인생관과 역사관을 지시한다면, 토라는 이스라엘이 가야할 바른 길과 신앙의 길잡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부모는 자녀의 안전한 생명을, 교사는 학생의 바른 생명을, 토라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생명을 가리키는 안내자가 된다.
10. 나는 …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20:2)
전통적으로 유대교에서는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를 제1계명으로 간주하였다. 11세기 랍비 이븐 에즈라는 이 구절이 하나의 “계명”으로 보기 어렵지만 모든 계명의 근본이며 권위의 원천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즉 이 구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명령하는 것과 같다고 이해한 것이다. 한편 대부분 기독교 신학자들은 “나는 …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구절을 단지 십계명의 서문으로 여기고 원래 <십계명>과 아무 상관없는 구절이었으나 나중에 편입되었을 것으로 단정한다.
이 구절이 제1계명이든 서문이든 <십계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중차대하다. 즉 “나는 …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하는 유대교의 제1계명 혹은 기독교의 서문은 나머지 계명들 앞에서 길을 인도해주는 향도(嚮導)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차일즈는 <십계명>에서 열 가지 계명은 모두 “서문”(혹은 제1계명)에서 밝히고 있는 하나님의 정체성과 떼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유지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열 가지 계명은 다음과 같이 이해하여야 한다. 즉
나는 …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 그러므로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나는 …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 그러므로 너는 너의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 일컫지 말라.
나는 …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 그러므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나는 …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 그러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나는 …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 그러므로 살인하지 말라.
… …
그러므로 유대교에서는 “나는 …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 이 구절을 <십계명>을 이끌어내는 단순한 서문이 아니라 첫 계명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믿으라는 권유적인 명령이 아니라 ‘신앙고백적인 계명’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