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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정]여성과 지도력

제목 : 여성과 지도력
-조헌정 목사(향린교회, NCCK 양성평등위원)
-2009년 11월 27일 한국여신학자협의회 제 23차 한국여성신학정립협의회에서 발표




 

여성과 지도력

 


 

우선 남성으로 여성들의 잔치에 초대를 받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KNCC 양성평등위원회에 남성들의 잘못(나를 포함한)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참석에 의의를 두고 열심히 한 결과라 여겨집니다. 제가 이 자리에 무슨 얘기를 한다는 것, 특히 여성 리더십에 관련하여 어떤 발제를 한다는 일은 주제 넘는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만, 순종하는 마음에서 참석하였습니다.


제가 본회의 사무총장님으로부터 오늘의 발제를 부탁받은 그날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09년 세계 성 격차 보고서’에서 남한은 134개국 가운데 115위라는 매우 부끄러운 순위를 기록했다. 종교, 문화적으로 여성의 권리가 오랫동안 제약된 중동과 아프리카의 몇몇 나라를 제외한다면 사실상 꼴찌에 가깝다. 그런데 이보다 더욱 부끄러운 것은 이 순위가 해가 거듭할수록 하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여성의 경제적 참여와 기회, 교육 수준, 보건 및 수명, 정치적 권한 등 네 부문을 지수화해 산출한 ‘성 격차 지수’에 부가적으로 모성 보호, 여교사 비율, 여성 실업률, 기본권 등을 반영한 것이다. 정치 분야에서 세계 최하위권을 기록했고, 경제적 참여와 기회에서도 심각한 불평등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이명박정권 들어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교회 안에서의 성 격차 지수를 추가한다면 순위는 더 떨어질 것이다.




❖ 남한교회내의 성차별


모두가 아는 얘기이지만, 남한 교회에서의 여성은 남성에 비해 그 구성원이 훨씬 많다. 그러나 교회(장로교의 경우)의 실제 권한을 행사하는 당회나 노회, 총회의 구성원들을 보면 남성 일색이다. 여성장로가 없는 교회 또한 다수이지만, 총회 총대의 경우 올해 예장 통합이 0.87%, 기장 2.3%, 감리교 4.3%였다. 미국장로교만 하더라도 여성 총대는 반이 넘고 여성총회장 그것도 장로가 총회장으로 선출된지 오래되었고, 여성과 남성이 번갈아 한다는 보이지 않는 원칙을 지켜가고 있다. 발제자는 20여 년 전 미국장로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을 당시 40대의 여성장로가 노회장으로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현재 남한 교회에서는 노회장인 남성장로의 안수조차 거부하고 있다. 왜 신학과 목회의 방식은 미국교회로부터 열심히 배우면서 장로와 목사는 각각 치리하는 장로와 가르치는 장로로(장로교의 경우) 교회 직제에 있어 동등하며, 여성과 남성 또한 하느님 앞에서 생리적인 것 외에 전혀 차이가 없다는 진리를 거부할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남한교회 (남성) 지도자들은 성서가 그렇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성서를 볼 수 밖에.




❖ 복음서와 여성


다 살펴볼 수는 없으니 네 복음서에서 여성에 관련한 첫머리 기사만을 살펴보도록 하자. 마태복음은 긴 예수 족보로 시작한다. 그런데 이 족보에는 4명의 여인들의 이름이 나타난다. 유대 족보는 본래 남성 이름으로만 되어 있으니 여성의 이름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는데, 왜 언급을 할까? 그것도 이들은 모두 이방여인들일뿐더러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다말’과 유다의 관계는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관계였고, ‘라합’은 창기였고, ‘룻’은 과부였고, ‘우리야의 아내’는 말할 것도 없이 남편이 살아 있던 남의 부인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예수의 조상이 된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아브라함의 족보가 남성들의 폭력과 야망으로 인한 더러움의 역사임을 폭로한 것이다. 그리고 이 족보는 마리아의 동정녀 예수 탄생 얘기로 넘어간다. 남성이 배제된 여성만의 출산(동정녀 혹은 성모 마리아에 관련한 교리적인 논쟁은 피하자!)을 얘기하는 것은 예수에 의해 새롭게 펼쳐질 하느님의 나라는 (더러움의 역사를 만들어 온) 남성 없이 시작되고 있음을 선포하는 것은 아닐까?


마가복음 5장 24절 이하는 열두 해 동안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고침 받은 기록이다. 처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많은 의사에게(남성명사)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였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남성)의사들은 이 여인에게 있어서는 괴로움을 더해줄 뿐더러 가진 것을 다 빼앗아간 나쁜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여인은 (옷자락에 닿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예수의 병 고치는 능력을 모든 군중들 앞에 드러나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이때 남성제자들은 오히려 예수를 힐난한다. “무리가 에워싸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남성들의 ‘착취’와 ‘믿음 없음’ 그리고 여성의 ‘피해’와 ‘믿음 차있음’을 대비하고 있다.


누가복음 1장은 천사의 수태고지에 대한 ‘제사장 사가랴’의 믿음 없음과 ‘마리아’의 순종의 믿음을 말한 이후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마리아의 찬가’로 이어진다.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권세 있는 자는 누구이고 비천한 자는 누구인가? 주리는 자는 누구이고 부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이 마리아의 선포야 말로 이후 펼쳐지는 예수 사역의 핵심이 아닌가? 결국 저자 누가는 마리아의 입을 통해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의 방향을 지시한 셈이다.


요한복음은 가나의 혼인잔치(예수의 어머니는 예수의 신적 본체를 드러내도록 만드셨다)를 건너뛰면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로 간다. 이를 그보다 앞서 얘기된 남성 니고데모와 비교해보면 그 역할의 중요함은 더욱 높아만 간다. 사마리아 여인은 니고데모와 달리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동네 사람들에게 전함으로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를 믿게 된다. 이는 예수께서 원하셨던 제자와 사도의 본이 아닌가? 그리고 그를 통해 수백 년 간 원수시 살아온 남북의 화해가 일어난다.


이상 네 복음서의 그 시작만 보아도 성서는 예수 사역에 있어 여성의 지도적 역할을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었는지를 알 수 있다. 성서로 하여금 말하게 하라!




❖ 비판적 소고


그렇다고 발제자가 현존하는 교회와 사회의 성 차별에 눈을 감고 여성 찬사만 늘어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래 요청도 그러하니 비판 한마디를 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여성들이 공적 영역에 관심하는 일이 적다. 예를 들면 남성들은 모였다하면 정치를 비롯한 사회 전반에 걸친 공적 영역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결코 칭찬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 여성들은 자신 주변에 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한다. 여성들의 공적 관심도가 떨어지는 것이 단지 성차별의 문화와 역사만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인가? 어떤 여교수의 얘기에 의하면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실패를 내면화 할 여지가 크다고 한다. 곧 어떤 문제를 사회 구조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문제의 원인이 자신이라고 탓할 여지가 크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 면도날 회사가 남성들과 여성들에게 결함이 있는 면도날을 주고 뒤쪽에서만 볼 수 있는 거울을 통해서 이들의 반응을 관찰했다. 남성들은 면도를 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이 면도날 망가졌잖아!’ 하면서 이를 쓰레기통에 던지는데 반해, 여성들은 자신이 면도를 잘 하지 못해서 그랬다고 자책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한 예로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말할 수 없다. 오히려 발제자가 아는 몇몇 여성들은 남편보다 더 사회적이고 공적 영역에서 더 큰 책임감을 갖고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해 정국을 뒤흔든 촛불은 여학생들로부터 시작을 했고, 육아와 요리를 전문으로 하던 여성들이 인터넷카페에서 만나 이에 주도적으로 참여를 했고, 사회적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향린교회에 새롭게 등록한 분들 가운데 여성들이 더 많은 것은 이를 반증하는 예이다. 그러나 여전히 전체적으로 보면 여성이 남성에 비해 공적 영역에 관심하는 바가 적다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여성 리더십을 이야기함에 있어 중요한 출발점은 여성들이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때, 이를 단지 나의 문제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모두에 관한 사회구조적 문제로 인식을 전환하고 공적 영역에 관한 대화를 보다 의도적으로 하는 데 있다고 본다. 여성 리더십이란 수적으로 많은 여성들을 세우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여성 스스로가 해방적 시각을 먼저 갖는 일이다.




❖ 탄력ㆍ 치유ㆍ 온전


발제자는 다음 달 초에 세계교회협의회 여성부가 주관하고 아시아교회협의회가 주최하는 Gender Justice Workshop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 모임은 양성 평등을 위한 manual(WCC와 WARC 공동사용)을 발간하기에 앞서, 남성들의 시각을 고려함으로 남성들의 협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다. 그런데 WCC 여성부가 2011년에 열고자 하는 International Ecumenical Peace Convocation의 첫 번째 목표를 “women's spiritualities of resilience, healing and wholeness"로 요약하고 있다. 여기에 여성들의 영성 곧 여성 지도력을 ‘탄력ㆍ 치유ㆍ 온전’ 이라는 세 단어로 압축하고 있음에 유의한다. 여성에 관련하여 자주 쓰이는 용어인 ‘치유’ 그리고 ‘온전’이라는 단어 외에 resilience라는 용어를 선택하고 이를 다른 두 단어에 앞서 두고 있는 것이다. ‘탄력’은 용수철과 같이 처음 물리적 힘(남성들로부터)이 가해졌을 때에 이를 수용하는 자세를 지닌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수용이 아니다. 내적으로 힘을 비축하는 일시적인 수용이다. 그 이후 더 큰 힘으로 되튀어 잘못된 것들을 바로 편다. ‘탄력’은 그간 여성다움으로 얘기되어 오던 ‘수용’ 혹은 ‘포용’과는 다른 정의로운 힘을 언급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여성지도력을 박용길 장로님(문익환 목사님의 부인)이나 이소선 여사(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에게서 발견한다. 두 분에게는 여성으로서의 부드러움, 어머니로서의 따스함이 있다. 그러나 투쟁의 현장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아니 처음에는 물러선다. 그러나 끝내 이를 되받아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낸다. 이분들은 투쟁의 현장에서 남성들의 분산된 힘을 하나로 이끌어낸다.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모계사회가 먼저 있었음을 알고 있다. 박홍규 교수는 최근 펴낸 <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란 책에서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는 건국 당시 인디언 사회를 벤치마킹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인디언들은 연방정부를 수립하고 그 밑에 민족, 씨족으로 구성되었다. 연방은 전쟁과 평화 및 조약 체결과 같은 대외 문제만 관장하고, 각 민족의 장들 또한 그 민족과 타 민족 사이의 문제에만 관여했다. 그리고 내치는 씨족의 전권사항이었다. 그런데 이 씨족은 ‘씨족 어머니’를 우두머리로 하는 결속력 강한 모계제의 정치집단을 형성했다. 여성의 투표로 결정되는 씨족 어머니는 남성 사절을 대표로 임명하고, 그 남성이 씨족을 대표해 민족회의에 참가했다. 여성은 지도자인 남성을 지명하거나 파면하고, 전쟁에 대한 동의를 했다. 민족장은 씨족 어머니들이 임명했다. 그리고 연방은 각 민족대표 8-15명이 참석했는데, 만장일치제였기에 대표 수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연방회의에는 대표들뿐만 아니라 일반 남성, 씨족 어머니, 여성, 아이 등 성별, 연령 불문으로 참가할 수 있었다.


경색된 남북관계가 군사대결로 출렁이고 있다. (잃어버린?) 10년 아니 60년 전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남과 북의 평화적 통일, 나아가 전쟁 없는 세계평화는 과연 불가능한 꿈일까? 인디언들은 백인들이 들어오기 전까지 오랜 세월동안 권력의 횡포가 없는, 국가와 시장의 착취가 없는 평등평화 사회를 이룩했었다. 거기에는 모계사회라는 발판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평화를 향한 거보의 첫걸음은 여성들로 하여금 지도력을 회복케 하는 일이 우선이다. 남성들이 지배해온 전쟁과 지배의 역사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교회 또한 마찬가지이다. 성장논리에 묻혀온 분열과 ‘개독교’라는 오욕을 마감하기 위해, 이제는 여성들에게 바통을 넘겨줄 때가 온 것이다. 복음서는 부활의 새 아침의 역사는 생명과 사랑의 원초적 담지자인 여성들로부터 시작하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끝으로 한국여신학자협의회에 한 가지 제안이 있다면, 주기도 첫 문장에 등장하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칭호 문제이다 (이하 희랍어 본문에도 없는 ‘당신’을 ‘아버지’로 바꾼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양성평등의 입장에서 글쓴이는 오랫동안 “하늘에 계신 우리 하느님”으로 바꿔 기도하고 있다. 성서신학적으로는 문제가 되기도 하겠지만, 성서의 세계가 갖고 있는 (잘못된) 가부장적인 입장을 고수하여 여성차별을 무의식화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글쓴이의 생각이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유일신 개념을 강조하는 ‘하나님’ 용어는 다원화되어가는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피해야 할 용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같은 뿌리를 갖고 있는 이슬람교ㆍ유대교ㆍ기독교는 이 유일신 개념으로 인해 세계를 전쟁이라는 구렁텅이로 계속 몰아가고 있지 않는가? 이 세 종교가 고백하는 유일신은 평화를 원하고 있다. 자신의 이름과 그 신학적 개념을 수호하기 위해 자기의 딸과 아들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하는 일을 결코 원하지 않고 계시다! 그에게 이름이 어떻게 불리든 무슨 상관이 있을까? 아니 그분은 본래 이름이 없다고 말씀하신 분이다.(‘야훼 아세르 야훼’ ‘나는 곧 나다.’ 공동번역 출 4:14) 유일신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나 사고로 규정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일반 민속 개념에서 보는 ‘하늘에 계신 님’ 혹은 절대공간을 뜻하는 ‘한’과 절대시간을 뜻하는 ‘늘’이 합쳐진 철학적 개념으로 보더라도 ‘하느님’이 타당하다. ‘유일’은 ‘절대’로 이어지고 절대는 상대를 거부하는 ‘차별’로 필연적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끝으로 시를 하나 소개한다. 제목은 <여성, 사랑스러운 존재>이다.

하느님!
이 시대의 여성들이 해방되도록
그들이 하느님 앞에서 자유로운 존재로 서 있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도록
왜곡된 환상과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힘을 주소서!


이 시대의 모든 여성들에게
여성의 내면에 감추어진 찬란한 성령의 선물을 깨우쳐 주시며
그 선물을 통해 남성과 교회와 세계에 유익이 되게 하소서!
여성 각자에게 오시어
여성의 원초적인 순수성을 회복시켜주시어
생명의 표징, 생명의 어머니가 되게 하시며,
자유로운 하와, 행동하는 하와가 되게 하소서!


오시어 여성의 시선과 몸과 마음을 정화시켜 주시며
여성의 내면에 감추어진 하느님의 영광을
해방시켜주소서.


하와들이여!


자유하십시오!


하느님의 존귀하신 딸들이여!


행동하십시오!


여성들이여!


연대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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