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교회여성의 사회참여, 되돌아보고 내다보기
-최소영 목사(한국교회여성연합회 총무)
-2009년 11월 27일 한국여신학자협의회 제 23차 한국여성신학정립협의회에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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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여성의 사회참여, 되돌아보고 내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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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여성연합회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벌써 6개월이 지났다. 교회여성들의 삶의 흔적을 되돌아볼 때마다 감탄하기도 하고 혀를 내두르기도 한다. 동시에 교회조직과 관습의 높은 벽을 실감할 때는 때로 막막하기도 하다. 그래도 교회여성들을 불러내는 목소리, 때로 신음소리는 끊이지 않는다. 이 글은 그래서 선배여성들의 흔적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과제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혼잣말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 과정에서 뭔가 얻어지는 것들이 있다면 그 또한 하나님의 은혜요 부르심일 게다.
1. 교회와 사회참여
교회는 사회와 동떨어진 ‘구원의 방주’인가 아니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사회 안에서 하나님의 선교,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시키도록 부름 받은 공동체인가? 교회를 구원의 방주로 보는 이들은 교회의 정체성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고 멸망에 이를 사람들을 열심히 건져 올리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다. 반면 교회가 사회의 한 구성원이면서 하나님의 선교와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해 부름 받았다고 고백하는 이들은, ‘불의에 대한 공분과 시대에 대한 아픔’으로 교회의 역할을 찾으려 할 것이다.
예전엔 이 둘 사이의 구분이 참 쉬웠는데 요즘에는 좀 더 복잡해진 듯하다. 우선, 종교와 세속의 엄격한 분리를 주장하던 이들 역시 자신들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기 시작했다. 성과 속의 경계를 엄격히 지킨다는 것도 하나의 정치적 선택임을 자각하든 아니하든, 자신들의 신앙고백을 사회에서 관철시키기 위한 직접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다. 반면, 사회참여를 교회의 중요한 소명이라고 생각하던 이들 또한 각각의 부문운동이 활성화되면서 교회공동체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새롭게 고민하며 여러 모양으로 분화해 왔다.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든 이미 여러 모양으로 사회참여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전반적으로는 오늘날 21세기의 전지구적 생존을 걱정하는 이들이 늘어났는데, 지구 전체가 생명공동체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 생태계 파괴를 통해 점점 실감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한반도 역시 매년 기온이 올라가고, ‘제주에서 생산되던 귤, 충주에서 생산되던 사과’ 같은 말들이 무너지고 주생산지가 점차 북상하고 있음을 본다. 아무리 ‘구원의 방주’ 안에 머물러 있더라도, 지구의 생태계 파괴나 핵전쟁의 위협 같은 것들에서는 결코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지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교회는 사회와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할까? 교회는 사회의 한 구성원이면서도 사회를 넘어서는 신앙과 삶을 사회 안에서 실천해야 하는 공동체다. 문을 닫아걸고 ‘끼리끼리’만 모여 있어도 안 되고, 단순히 사회적 가치에 휩쓸려서도 안 된다.
교회가 성속 이분법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오히려 세속적인 가치를 따르는 경우가 많다. 탈정치적이라고 생각되던 교회에서 금권선거, 탈법선거 등이 목격되고, 직분 하나 받으려고 해도 헌금액수나 사회적 신분(계층)이나 성공이 따라줘야 한다. 더구나 사회에서도 질타받기 쉬운 대형교회의 세습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측면에서든, ‘성화(聖化)와 완성’이라는 측면에서든 사회에서보다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 곧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라는 보다 성숙한 삶으로 사회적 가치와 삶을 성숙시켜야 할 사명이 교회에 주어져 있다.
물론 우월한 입장에서 내려다보며 이끌어준다는 오만함은 버려야 한다. 교회의 죄책 고백과 뿌리 깊은 내 안의 죄성(罪性) 인식은 교회를 겸허하게 해줄 것이다. 교회는 사회 안에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역사의 성숙과 발전에 한 몫을 해야 한다. 높은 가치를 추구하되 가장 낮은 곳에서 일해야 한다. ‘아픔이 있는 곳이 바로 몸의 중심’이라고 하지 않던가! 이처럼 교회의 사회참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의미나 예수 공동체의 본질을 끊임없이 성찰하면서 개체교회의 벽을 넘어 지역공동체 혹은 지구공동체 안에서 일하는 것이다.
2. 교회여성들의 사회참여
교회여성들의 사회참여는 어떠했는가? 초기 한국교회에서부터 여성들은 그동안 시야를 좁혀왔던 가족과 친족집단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적ㆍ민족적 역할을 감당할 만한 역량과 지도력을 익혔다. 3ㆍ1운동에서부터 농촌운동, 민족운동, 교육운동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은 여성들의 힘을 필요로 하는 곳에 항상 있었다. 한국역사에서 교회여성들의 활동은 교회에서 속회나 구역회, 여성연합회 등을 통해 참여와 조직운영 경험, 생명 살림의 실천을 통해 양성된 지도력을 바탕으로 여성들의 연대를 거치며 사회영역으로, 나아가 더 넓은 통찰과 활동으로 확대되곤 했다. 이는 한국교회여성연합회를 위시한 여러 교회여성단체들의 활동에서도 드러난다.
1967년 교회여성들의 연합인 한국교회여성연합회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민주화투쟁과 여성노동자투쟁을 지원하고 민족차별에 저항하는 활동을 했으며, 이는 곧 보다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참여로 발전했다. 기생관광 반대운동은 일본군 성노예, 곧 ‘정신대’ 할머니들과의 연대로,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발족시켜, 일본정부의 사과와 배상요구, 국제전범 재판회의와, 곧 900회에 이르게 되는 18년간의 수요시위로 이어졌고, 성매매 반대운동은 청소녀쉼터 등으로 분화되고 건강한 성문화, 양성평등문화운동으로도 이어졌다. 원폭피해자들과 2세 환우들에 대한 교회여성들의 관심과 돌봄은 문제의 발굴과 실태조사, 서로의 삶을 나누는 만남에 이어, 반핵ㆍ반전ㆍ평화 활동으로 이어지고,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여성들의 노력은 평화통일 희년운동으로, 세계여성들과의 교류로 확장됐다. 환경보전활동으로 시작된 여성들의 생명살림 실천도 생명밥상운동으로, 생명강 살리기로 깊어지고 있으며, 폭력 추방, 최루탄 추방운동에서 비폭력대화와 파병반대운동, 그리고 이주여성노동자들과 결혼이민자들, 다문화가정, 새터민여성들과의 연대까지, 여성들의 사회적 참여는 일상에서 시작되어 세계와의 연대로 확장되고, 다시 세계적 통찰에서 일상의 실천으로 이어지며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한편 사회참여활동의 전문적 분화는 오히려 교회여성들의 사회적 역할 축소로 이어지기도 했다. 교회여성들의 연합운동에서 출발한 사회참여가 전문적인 시민단체로 발전하면서 사회참여에 적극적인 여성지도력이 교회여성대중들과 멀어지는 경우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는 교회가 사회참여를 위해 자기를 비우기보다 현재 한국사회의 근본문제 중 하나인 성장제일주의를 추구하며 ‘전도’(자기교회의 성장)와 약간의 ‘구제활동’(시혜적 돌봄)으로 자기 역할을 축소했기 때문에 더 가속화됐다.
교회는 여성지도력이 단순히 순종적이고 교회의 활동에만 적극적으로 봉사하길 바래왔다. 교회의 구조는 목사나 장로 같은 ‘계급’과 ‘권력’에 여성들이 길들여지길 원했고, 개체교회의 벽을 넘어 연합이나 연대활동, 곧 ‘바깥으로 나도는 것’을 경계했다.
그러나 고인 물이 썩듯 여성들의 에너지와 재능을 가둬두면 가족, 자신, 교회를 괴롭히는 힘이 될 수도 있다. 여성도 살고 교회도 살고 사회도 사는 길, 여성도 성장하고 교회도 성장하고 사회도 성장하는 길은 울타리를 넘어 ‘소통’하는 것이다.
불의를 알아채고 이를 고발하며 정의의 회복을 요구하는 과정을 통해 여성들은 스스로의 한과 상처를 치유하며 신앙과 삶을 살아 있게, 건강하게 하는 길을 발견해왔다. 울타리를 넘어 다양한 경험을 가진 여성들과의 만남과 연대는 여성들의 인식의 지평, 삶의 지평을 넓혀서 여성들의 지도력을 성장시킨다. ‘내 아이’ ‘내 가족’ ‘내 교회’ 돌보기를 넘어 사회적 ‘돌봄’, 공동체적 ‘돌봄’에 눈을 뜨면, 생명ㆍ평화 영성이 깊어지기 때문이다.
3. 좀 더 나아가기 위해
여성들의 헌신이 없다면 교회의 사회참여, 아니 교회의 존재 자체가 힘들어질 것이다. 하지만 교회는 여성들의 ‘지도력’을 키우고 함께 성장해가기보다 ‘사용’해온 것이 사실이다. 극소수 여성들을 ‘토큰’처럼 끼워주거나 여성들의 특성을 잘 ‘활용’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관대했다면, 여성들이 성인지적인 자각을 하거나 주체적인 성장을 해갈 때는 오히려 걸림돌이 된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여성들의 사회참여나 지도력의 성장은 교회개혁, 양성평등 실현과 맞물려야 한다.
이것이 전제된다면, 건강한 여성지도력의 사회참여는 ‘생명살림’이나 ‘사회적 돌봄’이 될 것이다. 권위적이고 성공지향적이며 개발성장 중심의 사회가치가 삭막하고 소외와 불평등이 심화되는 현재의 사회를 만들었다면, 그 대안은 여성주의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 ‘살림과 돌봄’이다.
요즘엔 성장의 감옥이 되어버린 ‘국민총생산’(GNP)이나 GDP를 뛰어넘어 ‘비시장적 활동’, 곧 가사노동이나 자원봉사 등의 경제가치를 인정하는 대안적인 지표로 삶의 질을 측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이 비시장적 활동은 단순히 여성, 특히 전업주부의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교회 구성원 모두가 사회적 돌봄, 공동체적 돌봄의 주체가 될 때 교회의 사회참여는 의미가 있다.
과거의 사회참여가 정의를 세우기 위해 ‘대항폭력’을 불사했다면 교회여성들은 꾸준히 돌봄과 살림의 정신을 놓지 않았다고 본다. 여성들의 돌봄과 살림이 공동체적 돌봄으로 성화(聖化)된다면, 불의와 소외, 착취로 죽임의 고통이 드리워진 곳에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공감(共感)과 공생(共生)’을 통한 사회참여가 새로운 사회변혁운동이 되어야 한다.
또한 이런 생명살림과 공동체적 돌봄은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교회대중들과 함께 성장해가야 한다. 신학대학에 다닐 때 총학생회의 구호가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을!”이었다. 후에 “한 사람의 열 걸음과 열 사람의 한 걸음을!”이었어야 했다는 반성이 있었는데, 구호나 이론으로가 아니라 ‘함께’ 성숙해 가야 한다는 면에서 다시금 되새겨봐야 할 듯하다.
대안적이며 대중적인 교회여성지도력을 함께 고민하고, 예수의 식탁공동체가 어디로 확대돼야 하는지를 함께 둘러보고, 삶의 현장 곳곳으로 파송된 ‘살림이’, ‘돌봄이’들로 서로를 지지하며 격려해가야 한다. 작은 모임에서부터, 일상의 소소한 실천에서부터, 우리 자신과 사회의 성화를 위해 교회여성들이 변혁의 주체로 함께 나서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