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위기 극복을 위한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만남
-최 현 민(서강대 종교학과 대우교수, 씨튼연구원 원장)
-발표 : 2009년 11월 9일 씨튼연구원 '2009년 종교대화 강좌'
서론
우린 이미 생태위기의 위험수위에 대해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이에 위기감을 느끼고 대처하는 사람들이 그리 늘지 않는 것 같다. 왜 우리는 그 심각성을 알면서도 이에 대처하지 않는 것일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산 쇠고기 수입조건 재협상을 요구하는 촛불집회와 4대강건설에 대한 사람들의 입장표명의 차이는 무엇?
여기서 우리가 숙고해야 할 문제는 어떻게 하면 개인주의를 넘어설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결국 생태문제는 인간들의 손에 달려있다. 아니, 우리의 마음가짐에 달려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개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을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영성 안에서 찾고자 한 것이다.
1. 불교를 통한 개인주의 극복
불교의 기본 가르침이 연기(緣起)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불교는 삼라만상을 관계적 존재로 봄을 의미한다. 그러나 연기라는 불교교리를 알기에 생태문제에 솔선수범하는 이들이 얼마나 있나? 나의 존재와 불가분의 관계성을 지녔기에 자연을 보호함은 곧 나를 보호하는 것이라 여기고 자연보호에 앞장서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이는 무엇을 말하나? 무엇을 안다는 것 그것이 곧 우리를 행하도록 촉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연기를 아는 것, 그 자체가 실제로 인간의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마음을 극복해주진 못한다는 것이다.
4월 강좌에서는 四聖諦, 八正道의 가르침을 통해 생태문제의 해법을 제시했다. 붓다는 현실 안에 드리운 苦라는 문제를 푸는 길로 팔정도를 제시했다. 이는 계정혜(戒定慧)의 三學으로 요약할 수 있다. 계율을 지키고 선정을 통해 지혜를 얻는다면 생태문제뿐 아니라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는가? 이는 결국 불교는 생태문제해법을 마음의 문제로 보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는 5월 종범스님의 강의 ‘선과 생태영성’에도 확인된다. 중요한 것은 반야심-애증심을 일으키지 않는 마음이다. 그래서 반야심은 평상심이고 무분별심이다. 반야심을 지닌 사람이면 현 생태문제에 대해 깊은 책임의식을 지니고 실천하리라고 본다. 이렇게 보면 결국 생태문제는 마음문제이고 마음 닦음 곧 수행의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린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범부들의 경우 마음닦음이 쉽지 않지 않나? 그들의 마음 깊이에 놓인 이기심, 개인주의의 뿌리를 어떻게 단절할 수 있나? 이것이야말로 생태문제가 우리에게 어려운 문제임을 시사해주는 것이 아닌가?
앞서 말했듯이 삼라만상은 얽히고 설킨 관계망 속에서 함께 살아간다. 그러나 생태문제는 이 관계망이 끊어져 가고 있음을 말한다. 그 주범이 바로 인간이고 이를 풀어갈 수 있는 것도 인간이다. 이는 생태문제는 결국 인간문제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생태문제를 푸는 해법은 인간문제를 풀어감에 있다고 본다. 생태문제의 해결방안은 불교를 통해 살펴본 우리는 이제 그 문제의 근원지는 다름아닌 우리 내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눌선사는 <修心訣>에서 “수도를 원하는 자들은 밖에서 찾지 말라”고 했다.(願諸修道之人 切莫外求) 즉 근원적인 문제해결은 밖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안으로 自性을 닦아야함이야말로 생태문제의 해법을 찾고자 하는 우리가 해야할 일인 것이다. 팔정도를 실천하고 識心에서 禪心으로 나아가는 것, 도겐이 말한 我見을 버리고 회심, 發心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수행을 통해 인간의 본래성을 회복해 가는 길이 결국 생태문제의 근원적인 해법이 될 수 있음은 불교만이 제시하는 해법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역시 이와 유사한 해법을 제시한다.
2. 그리스도교를 통해 본 생태문제 해법
1) 예수가 믿고 신뢰한 하느님 아버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는 기존 포도주와 다른 “새 포도주”였다. 어떤 의미에서 새 포도주였을까?
그것은 바로 하느님에 대한 그의 인식이다. 그는 하느님을 압바, 아버지로 보았다. 이것은 구약성서나 랍비들을 통해서 배운 것이 아니라 그의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아니 깨달은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그의 세례 장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예수는 “하느님의 음성을 (내적으로) 들었고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여기서 두 가지 점에 주목해 보자. 하나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당신이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들었다고 하시는 이 말씀은 바로 그분이 자신의 아버지임을 깊이 자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예수의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오는 체험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세상과 하느님 그리고 인간과 맺는 관계의 핵심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예수가 세례 받을 때, “하늘이 열렸다”는 기록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약은 '하느님 경외'사상으로 집약되나, 예수께서는 주로 '하느님의 부성적인 사랑의 돌봄'이 드러난다. 이것이 아버지로서의 하느님 이해이고 예수가 말한 새 포도주이다. 우리는 여기서부터 예수의 가르침을 알아들어야 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가 말씀하신 하느님은 인간의 아버지만이 아니라 우주의 아버지, 자연의 아버지이다. 모두에게 비와 햇빛을 주시는 분...이런 점에서 하느님은 인격적인 부성뿐만 아니라, 우주적인 부성 또한 지니셨다. 즉 하느님은 동물과 식물에게도 하느님의 부성을 제공하시며, 더 나아가 해와 비를 악인과 선인 모두에게 다 비추고 내리시는 분(마 5,43-48)이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인간중심적(또는 의인중심적)인 협의적 의미를 탈피한 우주적 부성으로서의 하느님의 모습에 대한 강조이다. 예수가 깨달은 하느님은 부성의 사랑으로 자연의 질서를 보존하시며 그것을 모든 인간에게 공평한 복을 제공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아버지가 되신 창조주 하느님이신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이 예수의 특이한 점이다.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신뢰! 예수 자신이 깨친 하느님께 대한 신뢰는 그가 사람들을 향해 가르친 첫 마디가 되었다. “회개하고 하느님을 믿으라” 이것이 그의 가르침의 핵심이요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당시 유다인들은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길 힘들어했나? 무엇이 장애가 되었나? 유다인들은 감히 입으로 이름을 말할 정도로 하느님은 경외로우시고 가까이 할 수 없는 분으로 여겨왔다. 그런데 압바라니....이런 버릇없는 가르침이 어디 있나? 그들이 생각하던 하느님과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은 달랐다! 그들의 하느님은 두려워해야 할 분, 경외로운 분이시다. 이에 반해 예수가 말한 하느님은 어머니 같은 분, 아버지 같은 분이시다.
2) 예수의 ‘하늘’ 의미
‘주의기도’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호칭에서 ‘하늘’이 무슨 의미인가?-- 이는 계속되는 청원인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짐’을 비는 간구와 관련해 이해할 필요 있다. 하늘이 장소개념이 아니듯, 땅도 장소개념이 아니다. 하늘이 하느님 계신 곳이듯이 땅도 하느님 계신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땅을 하느님이 머무시고자 하는 곳으로 만들기를 간구하는 예수의 기도야말로 생태적 기도가 아닐까?
3) 예수의 ‘자연’ 의미
예수의 비유의 대부분은 자연을 소재로 하고 있다.
예) 가뭄 겨자씨 곳간 광양 구름 까마귀 누룩 무화과나무 벼이삭 백합 비 뿌리 씨 씨뿌리는 사람 포도 포도주 꽃 나뭇가지 농사 소금 빛.....
자연의 비유 대부분이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느님 나라와 자연간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예수의 자연이해는 그가 하느님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그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깨달은 위에 자연과 역사의 사건들을 재조명하셨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자연은 그에게 하느님나라를 설명하는 소재가 된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비유에 나타나는 것(예: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마 5,13.14; 씨 뿌리는 비유: 마 13,3 이하; 겨자씨 비유: 마 13,31 등)은 자연의 속성과 특징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비유를 설명한다. 그것이 단순히 자연현상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성을 설명하는 지혜적 말씀의 성격을 띄고 있다. 이와 같이 예수는 하느님나라를 자연을 통해 설명함은 생태문제를 다루는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하느님이 머무시는 곳이 ‘하느님나라’라면 그 나라를 예수는 자연의 섭리로 설명하고자 하셨다. 즉 예수는 하느님나라와의 연결선상에서 자연을 바라보신 것이다. 그에게 있어 하느님이 머무시는 곳은 곧 자연의 섭리가 머무는 곳이다. 자연의 섭리가 살아나는 곳이고 자연의 순리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것이 예수가 말한 하느님 나라이다. 왜? 바로 그 자연이 하느님이 섭리하시고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섭리가 살아있는 곳이 하느님나라라면, 그리스도인의 생태살림은 하느님나라 건설과 직결되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2. 하느님의 협력자로서의 인간
1) 예수 기적의 새로운 의미
그의 기적은 바로 그와 하느님과의 관계로부터 나온 것이다. 하느님을 철저히 신뢰했기에 예수는 하느님의 힘으로 일할 수 있었다. 바로 아버지에 대한 신뢰에서 치유의 힘, 치유의 능력에서 기적이 나온 것이다.
『생태주의자 예수』를 쓴 프란츠 알트는 예수는 기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자연의 법칙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에게 있어 자연은 이미 그 자체로 기적이었다. 예수에게 전혀 기적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예수의 기적이다.
예수께서 이적을 행하실 때 어떻게 하시는지 잘 보라! 그가 눈먼 이를 고쳐주신 사화를 보라(요한 9, 1-9) 예수께서 땅에 침을 뱉아 친히 손으로 흙을 개어서 소경의 눈에 바르셨다. 이와 같은 그의 손길은 곧 하느님의 손길이다. 또한 죽음의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자를 일으키는 그의 손 역시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어 주는 창조주의 호흡을 매개하는 것이다.
그 밖에 모든 기적 사건이 마찬가지다. 진물나는 문둥병자를 치유하는 손이나, 듣지 못하는 자의 귀를 손가락으로 막고 '에바다'(막 7,34)하므로 열리게 하는 것이다. 또한 죽음에 처한 소녀를 향하여 '달리다굼'(막 5,41)이라고 외치는 그 모든 행위와 말씀은 창조를 가능케 하던 하느님의 행위였고 말씀이었다. 이러한 예수의 병치유 기적은 하늘과의 길이 막힌 상태를 뚫어주는 것이었다. 처음 창조되었을 때 보시니 좋은 바로 그 상태로의 회복! 이것이 바로 예수가 행하신 행적들이다. 하늘과의 통함이다. 天理의 상통, 佛性의 상통, 하느님 모상이 다시 그 모습을 회복하고 드러난 것이다. 인간의 죄악과 타락으로 말미암아 왜곡되고 파괴된 하느님의 첫 창조가 다시 새로워지는 행위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수의 기적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적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바로 자연과 하느님 그리고 인간이 예수를 통해 다시 통하게 된 상태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예수는 하늘과 통하는 통로가 되셨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창조를 지속시키는 예수의 행적을 의미한다. 예수는 이 일을 위해 그의 제자들을 택한다(마르 3,14).
2) 제자들이 베푼 기적
하늘과 통하는 예수의 통로는 이제 그의 제자들에게로 이어졌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베푸는 기적들이 이를 말해주지 않는가?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살아있을 때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 후 그들은 깨달았다. 그 후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시작된 하느님의 창조행위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베드로의 이적---- 죽은 사람을 살리고 앉은뱅이를 고침 (사도행전 3 :1-8)
3. 생태문제의 해법
1) “밖에서 찾지 말라(切莫外求)”
생태위기를 풀 수 있는 해법은 밖에 있지 않다. 따라서 “밖에서 찾지 말라(切莫外求).”
중세 십자가의 성요한은 말한다. “너희는 열고 깊음으로 들어가라. 모든 종교의 지류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근원적 흐름을 그 깊음 속에서 찾게 될 것이다. 이 깊음에서 우리는 생태위기의 해법을 발견한다. 안으로 들어가라. 이것이 바로 생태문제의 해법이다.
환경위기는 곧 내면세계의 위기라 할 수 있다. 이는 종전에 통했던 세계가 지금은 불통이 되어버렸다는 얘기이다. 종래 사람들에게 통했던 하늘과의 상통이 이젠 전혀 통하지 않게 되었다. 오염물질로 꽉찬 땅은 스스로 하늘과의 길을 막아버렸다. 땅에 사는 사람들은 하늘과 상통했다. 그러나 이제 땅의 사람들은 스스로 마음의 빚장을 걸어 잠근 채 하늘과의 상통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예수는 바로 이 막힌 하늘과의 소통을 다시 여신 분이다. 이것이 그의 세례때 ‘하늘이 열린’ 것으로 상징적으로 등장했다. 예수가 가르친 주의 기도에서 그는 당신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임하시며” (마태 6, 10)라고 하셨다. 하늘과 땅을 다시 소통케 하신 것이다.
발전지상주의는 끝없이 우리를 밖으로 내몰았다. 우리는 이제 발전의 길은 생태파괴의 길이었음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발전하지 말라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발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발전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내면이 황폐할대로 황폐해진 상태에선 진정한 의미의 발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수 없다고 하셨다.” 우리 앞에 양자택일의 길이 있다. “재물이냐 하느님이냐.”
2) 호모 심비우스로서의 인간의 본래성 회복
지금까지 고찰을 통해 우린 생태문제가 결국 우리 내면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자기 본래성 상실이 곧 생태파괴를 가져왔음을 깨닫게 된다. 이제 생태회복은 바로 인간의 자기 본래성 회복의 길임을.........인간의 본래성은 더불어 사는 것이었으나 세상은 어느새 ‘함께’가 아니라 ‘따로 따로’를 외쳤고 그 ‘따로 따로’가 서로 경쟁해야 발전한다고 속여왔다. 우리가 자각하고 회복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린 ‘더불어’ 살아야만 생존가능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바로 이 인간의 본래성 회복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생태문제의 해법이다.
우리는 자연을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의 결전장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이 시대에 경쟁논리를 불러일으킨 대표적인 사람들로 찰스 다윈과 토머스 멜서스를 들 수 있다.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1789년)
맬서스론은 인간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인간은 식량위기에 직면할 것이며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인구감축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요약된다.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 어느 순간 식량이 부족한 사태를 맞게 될 것이다. 여기서 다윈을 생존경쟁개념을 생각하게 되었다. 기린을 예를 들면 기린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 유난히 목이 긴 기린이 좀더 높이 위치한 잎을 따먹을 수 있기에 생존에 유리할 것이고 살아남아 후손을 이어갈 수 있다. 환경의 영향에 따라 특정개체가 선택적으로 살아남는다는 자연선택의 토대가 여기에서 기인한다. 찰스다윈은 맬러스의 <인구론>에서 진화와 생존 경쟁의 관계를 알아냄으로써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통한 무한 경쟁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우리가 자연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무기는 ‘공생’밖에 없다. 혼자서 살아남으려고 한다면 인류는 곧 멸망하고 말 것이다.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이 무차별적 전투가 아니다. 그보다 오히려 다른 생물들과 동맹을 맺은 생물들이 더 잘 살아남는다.
--공생의 예) 현화식물과 곤충, 소와 인간, 곡류식물과 인간
인간이 이번 세기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다시금 공생인간, 즉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로 거듭나는 일이다. 현생 인류의 학명은 알다시피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다. 이는 ‘현명한 인간’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요사이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결코 현명해 보이지 않는다. "인간이 현명하다면 과연 자기 집인 지구를 불태우겠는가"
이런 점에서 '현명한 존재'를 뜻하는 '호모 사피엔스'를 넘어 새롭게 등장한 인간에 대한 학명이 '호모 심비우스'이다. 이는 '공존하는 지혜'를 가진 존재라는 의미이다. 이제 인간은 21세기에 걸맞는 호모 심비우스로 거듭나야 한다.
호모 심비우스는 '통섭(consilience)'할 수 있는 존재이다. 통섭이란 모든 것은 연결시켜 이해함을 말한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모든 문제는 상호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다. 이것이 바로 통섭이다. 대운하 건설이 단순히 토목공사가 아니고 온갖 문제들-하천 수질 홍수 생태-이 모두 연결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 이것이 '통섭'이다.
4. 결론
달라이라마는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오늘의 종교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창조질서의 보존을 위해 일하는 종교만이 종교라는 명칭을 달고 다닐 수 있다.” 생태위기시대에 생태적 종교만이 치유의 종교 우리를 건강하게 하는 종교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생태적 예수에게 뿌리를 내릴 때 비로소 생태적 종교가 될 수 있다. 생태적 깨달음이 없는 종교는 스스로 부패해질 뿐 아니라 남까지 부패하게 만든다.
예수가 이해한 종교(religion=다시 묶다)는 우리 자신을 아버지 창조자 창조세계 자연 생명과 다시 묶는 것이다. 우리가 이 religion을 하느님 자연 생명과의 연결로 이해한다면 여기에는 하나의 윤리적 의무가 뒤따른다. 즉 우리 자신과 우리 후손과 모든 생명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존하고 창조세계의 보존을 도와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이것은 세상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이성의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도 인간과 동등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각 교의 안에 생태적 해법을 지니고 있다. 생태문제를 자신들의 문제로 삼는 것, 그것이 바로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자기정체성을 회복하는 길이 될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연기사상을 통한 자연과 인간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깊은 자각, 선수행을 통한 깨침을 통해 반야심으로 살아감은 분명 생태적 혜안이다. 그러한 주체적 삶을 사는 사람은 임제선사가 말한 無位眞人의 삶이 되겠다. 이는 불성을 회복한 존재라 한다면, 그리스도교에서 예수가 추구한 길과 만날 수 있다고 본다.
하늘과 통하고, 그래서 이 땅에 하느님나라를 구현하기를 희망한 예수, 바로 그 분은 그의 제자들에게 그 일을 이어가도록 당부하셨다. 바로 그 하느님 나라의 구현이 곧 생태회복의 길임을 우린 오늘 다시금 깨닫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