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박일준]논문 <가난, 영성, 그리고 혼종성> 전문(2)

11월 6일 민중신학회 발표 논문 (향린교회)
가난, 영성, 그리고 혼종성:
토착화 신학 3세대의 이중적 극복 과제(2): 지구촌화, 탈식민주의 그리고 가난한 자”

― 박일준 (지식유목민/감리교신학대학)

* 본고는 발표용으로 작성된 글로서 출판을 위한 교정과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은 원고이므로, 인용이나 비평을 위해서는 저자(iljoon85@naver.com)에게 문의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2-3. 저항의 전략으로서 모방과 혼종성―호미 바바

호미 바바는 이정용의 중심/주변의 이분법을 제국/식민지의 이분법으로 보았다. 제국/식민지의 이분법은 제국에 대항하는 담론으로서 민족 담론을 탈식민지 담론으로 삼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제국/식민지의 지배/종속 구조를 근원적으로 극복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구조에 길들여지도록 만든다. 힐라스가 60-70 년대의 대항 문화 운동이 자본주의 문화와 불가분리의 관계 구조를 형성한다고 말했듯이 말이다. 바바의 관점으로 지금까지 계급 해방운동이나 성 해방운동 등은 지배 구조에 반하여 대항 담론의 구조를 형성해 왔기 때문에 그 이분법적 구조를 탈주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그 구조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속성을 담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바바는 탈식민주의 담론의 현장에서 제국 담론에 역설적으로 종속되는 대항 담론이 아닌 제삼의 담론 형성을 추구하면서, 탈식민주의 운동의 주체를 새롭게 정위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말하자면, 그것은 계급과 성 범주의 특이성으로부터 “주체 정위”(subject position)으로의 이동이었는데, 그 이동은 “본래적이고 시원적인 주체성들의 이야기들을 넘어” 사유할 필요를 불러 일으켰고, 이 필요성은 특별히 문화적 차이들이 세밀하게 느껴지는 자리에서 더욱 절실해 지고 있다. 이 문화적 차이들의 “틈새들”(interstices)이 드러나는 자리에서 이전 시대의 담론의 경계들, 특별히 민족과 공동체와 문화 담론들의 경계들은 서로 간주관적으로 협상(negotiate)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며, 그 협상의 경계선들 위에서 주체는 인종적, 계급적, 성적 차이를 구성하는 부분들의 총합 “사이에서”(in-between) 또는 그 총합을 초과하는 잉여로서 형성되어진다. 이 “문화적 약정의 조건들”(terms of cultural engagement)은 “수행적으로(performatively) 생산되어진다.” 말하자면, 문화적 차이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체들의 협약을 통해 수행적으로 생산되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곧 문화적 차이와 주체의 특이성은 “복잡하고 계속적인 협약”으로서 역사 형성 과정(들)을 통해 “문화적 혼종성들의 인가를 모색하는” 과정임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지배자의 주체와 종속자의 주체는 서로 절대 구별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구조 안에 상대방의 구조를 반영 반추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서로 대적할 때 조차도 서로를 바라보며 각자의 정체성을 협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협상을 통해 그 주체들의 문화는 혼종화(hybridization)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고, 이 혼종화 과정을 통해 문화는 시대의 주체를 새롭게 형성해 나아간다. 이러한 문화적 혼종성의 역동성은 곧 그 시대 체재 속에서 소수자의 삶에 동반되는 “우발성과 모순성의 조건들”(the conditions of contingency and contradictoriness)을 통해 정체성의 경계를 재기입(reinscribe)하는 전통의 힘에 기반한다. 이 역동성을 통해 한 문화의 과거는 새로운 자리에 정초되어지며, 이는 곧 이질적인 문화적 시간들을 전통 체재에 도입하여 새롭게 만들어내는 과정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 혼종화 과정의 주체는 기존의 지배 문화가 아니라, 안정적으로 정주하기를 희구하는 기존의 지배 문화를 뒤흔들어 이질적인 문화의 시간들을 기존 전통 속으로 재기입할 필요성을 창출하는 피지배자들의 주체이다. 종속된 자들은 그렇게 지배 문화를 유인하기 위해 힘으로 지배자의 주체를 뒤흔들기 보다는, 오히려 유혹하고 모방하고 그리고 교묘히 혼합한다. 그래서 그들의 주체성을 발휘하는 전략은 언제나 지배 담론의 구조를 그대로 모방하지만, 그 모방 속에 해학과 풍자를 담아 뒤집기(subversion)를 시도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문화적 차이는 “소수자의 정체성들의 생산”(the production of minority identities)으로서 집단이 표상되는 과정에서 분열되어 독자성을 확보한다. 이 ‘차이’를 생산해 내는 “사이 길”(interstitial passage)은 전통 체재의 고정된 ‘정체성들’ “사이”(between)에서 유래하며, 바로 그 ‘사이’에서 “가정되거나 부여된 위계질서 없이 차이를 받아들이는 문화적 혼종성(cultural hybridity)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문화 속에서 융합 혹은 혼종의 가능성이란 곧 기존 체재나 관념들의 경계를 넘어 가는 것을 의미하며, 이 경계 “너머”(beyond)는 때로 진보나 미래의 약속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문화적 혼종의 맥락에서는 현재와 혹은 현재로부터 “분리와 탈구”를 의미한다. 우리 시대 문화를 표기하는 용어들 “post-”는 ‘이후’(after)라는 의미보다는 이 ‘너머’의 뜻에 더 가깝다. 이 ‘너머’가 현실적으로 구체화되어지는 곳이 바로 국경이다. 그 국경 지대에서 우리 시대 지구촌은 “탈식민지 이주의 역사, 문화적 정치적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들, 소작농과 토착 공동체들의 거대한 사회적 퇴거(displacement), 추방자와 망명자의 시학, 정치경제적 난민들의 냉혹한 산문”으로 구성되어진다. 그리고 바로 그 국경에서 혼종성의 출현을 가능케 하는 어떤 것이 출현한다. 이 경계선 너머로부터 도래하는 혼종성(hybridity)은 현 경계선을 구성하고 유지하는 현 체재의 담론을 조롱하며, 그 핵심 담론인 ‘순수성의 신화,’ 예를 들어 ‘순수한 백의 민족’과 같은 순혈주의 민족주의 담론의 기반에 도전하고 있다. 그 경계선 상에서 순수성 담론을 넘어 새로이 등장하는 혼종성의 운동은 결코 매끄러운 전이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제 추방과 분리의 과정”이다. 순수성의 체재를 지키려는 경계 체재는 이질적인 것과의 교합을 부인하고 억압하지만, 그러한 부인과 억압은 금지된 것을 수행하고자 하는 욕망과 그를 실현할 자유를 부추김으로써, 그것이 억압하고자 하는 이종교배(hybrid)를 막지 못한다. 이 이종교배를 통해 탄생하는 혼종들은 기존 경계 체재로부터 비하적으로 외면당하고, 그들은 늘 시스템의 경계 밖으로 추방되어,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 살아간다 (인도의 달릿, 이주민 노종자, 외국인 며느리, 화냥년, 정신대 등). 이 혼종성의 시공간은 결국 집과 세계의 재배치를 의미하는데, 이는 그 ‘너머’의 개입이 야기하는 “현존성”(presencing) 때문에 창출되는 “낯설음”(unhomeliness)을 의미한다. 이 낯설음은 노숙자(the homeless)의 삶이 갖는 낯설음과는 다른 낯설음이다. 이 낯설음은 우리가 친숙한 것으로 여겨왔던 ‘세계’ 속에서 문득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어떤 이질적이고 새롭고 그래서 낯선 것을 찾게 되면서 생기는 낯설음이다. 이는 경계의 내외가 이원적으로 분활되어 이중의 시간(차이)로 구성되면서 생기는 낯설음이다. 경계 내의 친숙함과 경계 밖의 낯섬(strangeness)은 내외를 인식하는 주체에게 친숙함 속의 낯섬 혹은 동일성 속의 차이를 야기한다. 그리고 이 낯섬과 친숙함 ‘사이’가 야기하는 차이가 그 차이를 다루어가는 전략으로서 혼종성을 배태한다. 이 낯섬과 거리를 야기하는 경계 밖 혹은 경계 너머는 실재의 바깥 혹은 세계의 바깥 혹은 집 바깥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태를 인식하는 우리의 인식 체계 너머로 추방되어 복귀를 거부당한 ‘나’ 혹은 ‘우리’의 거절당한 자아의 일부를 가리킨다. 그렇게 그 ‘바깥’은 우리의 체재가 정의하는 바깥(the outside 혹은 the beyond)이다. 그러나 실재 세계에는 내/외가 그렇게 말끔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이 낯섬의 타자성은 곧 저 바깥에 놓여진 전적 타자가 아니라 오히려 내부에서 “괄호쳐진”(in parentheses) 그래서 이질적이고 낯선 것으로 체재에 의해 규정된 타자이다. 그래서 신체적으로는 추방되어 거리감 있게 느껴지며 접촉성을 상실한 타자이지만, 그러나 체재 담론의 틈새에 배어 있어, 비존재로 규정되면 될수록 도리어 그 비존재에 대한 지시를 통해 언제나 체재의 존재 담론에 기생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바바에게 진실(the true)이란 “대립적이고 상극적인 요소들의 (부정이 아니라) 협상 조건들 안에서 아고니즘(agonism)의 행위로 사건 도중에 대항 지식들(counter-knowledges)을 구성하는 의미들의 생산성, 즉 창발 과정 자체의 양가성(ambivalence)에 의해 언제나 표시되고 고지된다.” 이는 곧 진실은 사건 발생 과정의 바깥에서 판별되기가 쉽지 않으며, 또한 진실에 대한 앎(knowledge)은  재현(representation) 과정의 외부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지식 담론은 그 안에 쉽사리 참/거짓, 아군/적군을 분별할 수 없게 만드는 양면성(ambivalence)을 담지하고 있다. 이 진실의 복잡성과 중층성은 그 글쓰기의 형식이 일구어가는 무늬의 역사를 통하여 드러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곧 부루조아지의 논리와 노동자의 논리, 제국의 논리와 식민지의 논리를 말끔하게 선을 그어 분명케 할 수 있는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 경계에서 제국의 논리와 식민지의 논리는 서로 교합하여 혼종화(hybridization)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층성 때문에 역설적으로 정체성의 위기(crisis of identification)는 특정한 정치 시스템의 의미 작용 “내에서 특정한 차이를 드러내는 텍스트적 차이”로부터 비롯된다. 말하자면, 정체성의 경계를 확고히 하려는 기입의 행위가 도리어 정체성의 위기를 촉발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비평의 언어가 중요하고 효력을 갖게 되는 것은 그 언어가 주인과 종의 언어를 명확하게 구별시켜 주기 때문이 아니라, “기존의 대립 근거들을 극복하면서 번역의 공간을 열어주”기 때문인데, 바바는 이 번역의 공간을 동일자의 자리도 타자의 자리도 아닌 제삼의 공간, 즉 “혼종성의 자리”라고 부른다. 대립적이고 상극적이고 모순적인 요인들의 협상이 바로 이론이 일으키는 사건이며 이를 통해 새로운 번역, 즉 혼종의 공간이 열리고, 지식과 대상 혹은 이론과 실천 사이의 부정적인 양극성이 분쇄된다. 여기서 바바의 이 혼종성의 자리는 데리다의 차연(différance)의 자리에 매우 근접하다. 왜냐하면 협상은 승화나 초월의 궁극적인 자리를 가리키지 않으며 우리의 모든 (협상) 시도가 끝없는 “반복의 구조”(the structure of iteration)를 갖고 있음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협상의 반복적 구조는 우리가 정치적 이상으로 삼는 순수한 대상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이상과 입장은 “의미의 번역과 전이 과정” 속에 있고, 번역된 의미는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협상 환경 속에서 언제나 지워지기 마련이라서, 대상은 언제나 타자와의 관련성 속에서만 드러나며 비판 행위를 통해 전치되어진다. 결국 고정된 가치와 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치와 질서와 이상이란 언제나 타자와의 관련성을 통해서만 의미 맥락을 갖게 되며, 이는 가치의 형성이란 결국 주어진 상황 속에서 ‘정도’를 협상해 나가는 과정을 의미하며, 결국 동일자(the One)도 타자(the Other)도 고정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끝없는 번역과 전이 과정을 배태하는 혼종성(hybridity)으로서 자취를 드러낼 뿐이다. 최종의 목적인은 없다. 단지 과정만이 주어질 뿐이다. 


 여기서 차이와 타자성 조차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차이와 타자성은 “특정한 문화적 공간의 환상 혹은 서구의 인식론적 위기를 분쇄하는 이론적 지식 형태의 확실성”으로 등장한다. 이 차이와 타자성이 모든 시대를 위한 이상과 해결책으로 등장한다면, 이것은 종래의 동일성과 동일자 담론이 구축했던 지배 담론을 타자의 이름으로 반복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결국 차이와 타자성의 담론도 그의 “위치”(location)를 혹은 상황성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말하자면 오리엔탈리즘 담론은 그것이 근대 서구의 관념론을 비판하고 해체하는 “인용의 자리”(a site of citation)에서 조망될 때 적실성(relevance)을 갖지만, 모든 차이와 상황에 맹목적으로 적용된다면 그것은 근대 서구의 지배 담론을 소위 ‘동양’의 이름으로 반복하는 꼴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탈식민지 담론이란 제국의 식민지 담론의 반대 혹은 타자로서 인식되어져서는 안된다. 식민 백성들의 담론은 식민지 권력에 대항하면서 토착 전통의 순수성을 대안으로 내세우는 시도가 아니다. 탈식민지 담론은 식민지 권력의 지배 아래서 식민 백성들의 토착 전통이 일정 부분 “돌연변이와 번역” (transmutations and translations) 과정들을 거친다는 사실을 유념한다. 그것은 곧 제국의 식민지 지배 담론을 모방하여 혼합시키는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출현하는 것은 동일자도 타자도 아닌 바로 그 혼종(hybrid)이다. 


 혼종성을 문화적 다양성의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종교적 혹은 문화적 혼합주의(syncretism)일 것이다. 여기서 바바는 ‘차이’(difference)와 ‘다양성’(diversity) 개념을 구별지어 이해한다. 즉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문화적 차이이지 문화적 다양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문화적 다양성이란 “인식론적 대상”으로서 문화를 “경험적 지식의 한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을 말한다. 즉 문화적 다양성이란 기존하는 문화의 내용들과 관습들을 인지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문화적 차이란 문화를 “문화적 정체성의 체계 구축에 적합한, 진정하고 분별가능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문화를 언명하는 과정이다. 이는 “문화적 권위의 양가성”(the ambivalence of cultural authority)을 주목하는 것인데, 문화적 차이란 사실 다른 문화와의 차이를 드러냄으로서 자신의 문화가 지닌 “주권(supremacy)의 이름으로 지배하려는 시도”이며, 이때 문화의 권위란 차이를 언명하는 과정 속에서 배어나는 것이다. 이 언명은 필연적으로 분열(split)을 낳기 마련인데, 말하자면 문화적 이상으로서 표상되는 모델 즉 전통이나 공동체 등과 같은 것의 고수를 통해 문화적 기득권을 확보하려는 전통주의자와 새롭게 바뀐 문화 환경 속에서 그러한 전통적 가치와 이상에 대한 저항으로서 등장하는 필연적인 부정(negation) 사이의 분열 말이다. 바로 이 분열된 자리에서 문화의 ‘협상’이 시작된다. 이 자리는 불안정하고 혼동스런 자리이지만, 동시에 기존의 기득권으로부터 배제된 자들이 기득권 담론의 모방과 흉내를 통하여 자신들의 존재를 해방시키는 자리, 곧 “해방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자리를 바바는 “문화적 불확실성의 시간”이라 말한다. 결국 문화적 차이의 언명은 이 분열 즉 과거와 현재의, 그리고 전통과 현대의 그 이원적 분활을 문제삼는 것인데, 이는 “현재를 의미화하는 가운데 어떤 것이 전통의 이름으로 어떻게 반복되고, 재배치되고 그리고 번역되는가의 문제”를 말한다. 이는 전통이라는 가면을 쓰고 반복되는 착취와 지배의 굴레를 어떻게 벗겨낼 것인가의 문제 뿐만 아니라 또한 부여되는 문화적 상징들과 아이콘들의 획일화 효과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 갈 것인가에 대한 의식을 포함한다. 바로 이 자리에서 문화는 단순히 무의식적으로 만개하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정치적 투쟁으로서 문화”(culture-as-political-struggle)임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문화는, 바바의 표현에 의하면, “그 자체로 일원적이지도, 또한 타자(Other)에 대한 자아(Self)의 관계 속에서 단순히 이원적이지도 않다.” 기득권 담론의 모방과 흉내가 기득권으로부터 배제된 자들의 해방의 수단이 되는 것은 바로 우리 언어와 표현이 단순한 반복의 구조가 아니라, 데리다의 말처럼, 차이 혹은 차연의 구조를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의 차연 구조를 통해 표상되고 전달되는 의미도 단순한 모방이거나 절대적 투명성을 확보할 수는 없다. 


 언어의 차이 구조는 근원적으로 “명제의 주체와 언명의 주체 사이의 분리”를 통해 일어난다. 즉 문장의 진술 속에 표시되는 ‘나’는 그 명제를 언명하고 있는 ‘나’와 전적으로 동일하지 않으며, 이 언명의 주체로서의 ‘나’는 진술 속에 표상되어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주체는 진술 안에 체현되어 언명하는 주체가 귀속된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명제의 주체로 혹은 명제의 주체의 행위인 듯이 노출한다. 의미의 생산이란 곧 이 두 자리, 즉 명제의 주체의 자리와 언명 주체의 자리가 “문장 속에서 제삼의 공간(a Third Space)을 통해 동원되는(mobilized)” 것인데, 이 제삼의 공간은 “그 자체로 의식적일 수는 없”다. 이 제삼의 공간은 재현되어지지 않으며, 문화의 의미와 상징 구조가 고정되지 못하도록 만들며, 양가적 과정을 통해 의미와 상징들이 전용되어 번역되고 새롭게 역사적으로 적용되어지게 한다. 이 제삼의 공간에서 명제의 주체, 즉 진술되는 명제의 ‘나’는 결코 언명의 주체인 ‘나’에게 말을 걸지 못하고, 언명의 주체는 결코 드러나지 않지만 “담론의 도식과 구조 속에 공간적 관계로 머무르고 있다.” 이 주체의 분열은 언설의 의미가 결코 “동일자나 타자”의 것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하며, 오히려 의미는 언제나 양가성을 담지 할 수 밖에 없음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명제의 내용은 그 명제의 위치성의 구조를 드러낼 방법이 없으며,” 또한 “상황(context)은 그 내용(content)으로부터 모방적으로 읽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분열된 주체는 곧 “혼종적 정체성의 담지자”가 된다. 두 부열된 주체 ‘사이’는 간주체적(intersubjective) 공간이 되며, 이 “사이”(in-between) 공간은 주체가 그의 분열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협상해 나가는 공간이 된다.

3. 집없는 자들의 집을 위하여

우리 시대, 즉 탈근대의 시대 혹은 포스트모던의 시대를 특징짓는 ‘곤궁’은 바로 ‘모든 곳에 귀속되어 있지만 동시에 그 어디에도 귀속되지 못하는 역설적 귀속감’(belonging)이다. 전통적인 형식의 귀속감을 부여하던 체계는 이미 무너져 내렸고, 그래서 새로운 질서가 우리를 귀속하고 있지만, 그 체재는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귀속할 시간과 공간을 특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는 자유로운 체재이지만, 역설적으로 그 누구에게도 진정한 귀속을 허락하지 않는 그래서 모든 이들을 체재로부터 소외시키는 혹은 추방하는 체재이다―지구촌 상업적 자본주의의 체재. 이렇게 모든 것이 ‘우리’를 추방하는 체재 속에서 우리에게 귀속감을 부여하는 ‘집’(home)을 찾는 것은 “집만한 곳은 없다”는 막연한 우리의 원초적 갈망이 아니라 ‘더 이상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처절하고 치열한 의식이다. 그러한 치열함을 살아나가다 보면, 결국 진정한 ‘집’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살아갈 그 모든 곳이 집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의 여부는 결국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모든 창조성은 결국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어떤 비범한 능력’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예전의 것을 편집하고 구성하는 눈썰미이다. 하지만 (왜곡된 동기로부터) 우리의 학문적 업적을 평가하고 저작권 문제를 중시하는 현재 우리의 지적 환경은 마치 창조성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적인 작업으로 숭앙받으면서, 그러한 경지를 드러내지 못하는 거반의 학인들을 ‘학문의 이름으로’ 억압하는 억압기제가 되어간다. 그러한 억압 속에서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집이 더 이상 집이 아님을 절감한다. 집이 낯설어 지면 .... 


 이상의 세 학인들의 글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필자는 그들이 공통적으로 연출하는 기제를 보게 된다: 이중 구속(double bind). 힐라스는 소비적 자본주의와 표현주의적이고 인문주의적인 가치가 이 관계 속에 있다고 보았고, 이정용은 중심 담론과 주변부 담론이 이러한 관계 속에 있다고 보았고, 바바는 제국 담론과 탈식민지 담론이 이 관계 속에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그들 각각은 바로 우리 삶 속에 주어진 그 이중 구속의 관계를 넘어 ‘해방의 길’로 나아가는 탈주로를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들뢰즈(Gilles Deleuze)는 정주민의 문화와 유목민의 문화 간의 이 이중 구속적 관계를 간파하고, 시대를 넘어서려는 이들은 이 이중 구속 관계를 벗어나는 탈주로(line of flight)를 모색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힐라스는 그 탈주로를 전일주의적 영성(holistic spirituality)에서 찾는다. 이중 구속이 낳는 괴리와 역설을 전일성의 회복으로 극복하고자하는 뉴에이지 영성들은 소비적 표현주의와는 달리 내/외의 뒤집기(inside out/ outside in)를 시도한다. 그 뒤집기를 통해 이중 구속을 유지하는 체재 담론의 위선과 괴리를 고발하면서 내외의 일치를 시도한다. 하지만 힐라스의 시도는 가난의 해소에 대한 너무 막연하고 낭만적인 기대감을 담고 있다는 점이 눈에 뜨인다. 또한 ‘가난’을 생명과 삶의 근원적 조건으로 보기 보다는 여전히 전일주의적 영성의 추구를 통해 극복해야 할 그 무엇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가난을 구체적으로 주제화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즉 가난은 ‘전일주의의 소비에 참여하는 자아’에게 여전히 ‘문제’로 남아있다는 점에서 불만족스럽다. 하지만 우리가 ‘가난’과 ‘민중’을 신학의 주제로 삼아갈 때에 갖게 되는 결정적 오류, 즉 가난의 반대인 ‘소비주의’를 무조건 지배의 담론이나 폭력의 담론으로 규정하고 그의 부정적인 측면만을 부각시키면서 (우리도 인지하지 못하는 새에) 가난과 민중의 담론을 그에 대항하는 상화에서만 의미있는 ‘편협하고 치우친’ 담론으로 만들어 가는 오류를 시정해 주고 있다고 보여진다. 아울러 소비 문화 속에서 양극화 현상이 진행될 때에 어째서 보수적 기독교가 보수 교회가 득세하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 


 이정용의 공헌은 그가 ‘인간의 근원적 모습’을 사이, 즉 그의 용어로는 in-between, 필자의 용어로는 ‘betweenness’에서 보았다는 점이다. 먼저 이정용은 그 사이의 존재가 갖는 부인된 존재감, 즉 neither-nor의 경험, 그 어디에도 귀속되지 못하고 떠돌아야 하는 존재의 경험을 중첩의 경험(in-both)으로 긍정적으로 승화시키고, 이를 다시 억압의 조건마저 가슴에 품는 초월의 방식(in-beyond)으로 풀어주면서, 신학과 영성의 자리를 강조해 주고 있다. 그에게 가장 시원적인 ‘주변인’(a marginal person)은 예수이다. 갈릴리에서 아비 없이 태어나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정당한 일원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그렇다고 당대 주류 문화인 제국 로마의 일원도 아니면서, 고향의 사람들로부터 미친 자로 취급받던 그 사람의 모습 속에서 이정용은 ‘주변화’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신학적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하지만 그의 ‘사이’는 일종의 너무 순수하고 투명한 ‘사이’여서 그 사이 공간에서는 정체성의 그 어떤 혼합이나 협상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21세기 지구촌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은 끊임없이 협상을 요구하고 있고, 그러한 요구 이전에 스스로 협상해 나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 국경을 넘어 이주하는 유목민들의 숫자와 비율은 이전 그 어떤 시대보다도 높으며, 어쩌면 정주민이 아니라 유목민이 수적으로 더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발생하는 문화적 혼종화의 가능성을 부정적으로 보았던 것은 이정용이 ‘순수성’과 ‘단일성’ 민족의 신화를 주입식으로 물려받았던 세대에 여전히 속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해 본다. 


 바바는 ‘사이,’ 그 제삼의 길을 흉내내기와 협상을 통한 혼종화의 길로 보았다. 그는 차이들 속에 나있는 “사이 길”(interstitial passage)을 걸어 나가면서 배어드는 문화적 혼종성을 통해 제국과 탈식민주의 담론의 이중 구속 관계를 넘어가면서, 우리 시대 불법 체류와 이주민 노동자의 문제 그리고 소위 외국인 며느리의 문제들이 결코 단순하게 ‘문제’로 간주되고 해법이 제시될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밝혀준다. 요는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원자적 인간 이해, 즉 개체 중심적 인간 이해를 해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유기체 개체로서의 인간을 그를 이해하는 가장 근원적인 기본 단위, 즉 원자 단위로 설정하고 이해할 경우, 우리는 이 혼종화(hybridization)나 차연(différance)은 근원적 운동이 아니라 부차적 운동으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데리다와 들뢰즈 같은 이들이 우리의 근대적 인간 이해의 해체를 주장하고 나섰던 이유이다. 하지만 바바는 혼종화를 부각시키느라 이정용이 전개하였던 만큼의 ‘사이’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아마도 ‘사이’가 낳는 치열함을 ‘서로 간의 흉내내기와 협상을 통한 혼종화’로 설명하느라, 사이의 치열함을 부각시키는데 한계를 느꼈을 런지도 모른다.

우리 시대 “가난한 자”를 말하는 방식은 더 이상 단순 소박할 수 없다. 인간의 삶이 단순하고 직선적이기 보다는 복잡하고, 다양하고, 중첩적이고, 혼성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가난도 삶의 한 길이 아니던가! 가난을 말하면서, 우리는 왜 민중 신학과 토착화 신학이 구사하던 대항 담론의 전략이 실패했는지를 반추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21세기 지구촌 자본주의 체재에서 대항 담론은 결국 제국의 지배 담론을 배경으로 해서만 자신의 고유한 자리를 부여받는다. 민중 신학과 토착화 신학이 지난 20여 년 간 바로 이 지배 담론 체재 안에서 대항 담론으로서의 자리에 정주하려는 안일함이 배어들었던 것은 아닌지를 현대의 건설 장비를 녹색 성장으로 덧칠하는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야 반성하게 된다. 그들이 말하는 지난 10년간 진보 신학은 “가난”을 잊었었는지도 모른다. 가난의 치열함이 망각되었을 때, 신학은 쾌락주의의 담론보다 세상을 설명하는데 무능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다스리는데 힘을 갖고 있지 못하며, 인문학의 담론보다 논리적으로 치밀하지 못하다. 신학 담론은 원래부터 그 무능한 자리에서 시작되고, 끊임없이 그 무능하고 가난한 영혼들의 자리를 찾아가는 데에서 그 존재 이유를 갖는다. 가난을 말하는 다양한 담론의 필요성은 우리 시대 가난의 형상들이 다양하고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모든 억압 중에 성적 억압이 가장 치밀하고 철저하기 때문에 우선권이 부여되어야 한다는 전대의 페미니즘 논리처럼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추구하는 담론이 전대 체재의 지배 담론을 반성 없이 그대로 반복하는 일이 지속된다면, ‘진보’란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은지도 모른다. 가난을 잊은 진보 신학은 지배 담론에게 더욱 강력한 표심을 심어줄 뿐이기 때문이다.


< 인용 도서 >

박일준. 「화이트헤드와 바디우의 주체 개념 비교―창조성의 주체와 공백의 주체」 『화이트헤드 연구』 18집(2008), 9-47.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제국』(Empire). 윤수종 역. 이학문선1. 서울: 이학사, 2001.

Bhabha, Homi K. The Location of Culture. London: Routledge, 1994.
Brah, Avtar and Annie E. Coombes, eds. Hybridity and Its Discontents: Politics, Science, Culture. London: Routledge, 2000.
Deleuze, Gilles and Felix Guattari,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c 2. trans. by Brian Massumi.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7.
Heelas, Paul. Spiritualities of Life: New Age Romanticism and Consumptive Capitalism.  Oxford, UK: Blackwell Publishing, 2008.
Lee, Jung-Young, Marginality: The Key to Multicultural Theology.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5.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만인·만유구원론 보다는 천국, 지옥 복음 선포해야"

칼뱅의 이중예정론의 결과인 이중심판론에 대한 비판으로 제시되는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은 성서 신학적으로 많은 찬반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신학대학 살아남으려면 여성신학 가르쳐야"

신학대학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여성신학 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백소영 교수(강남대 조교수, 기독교사회윤리학)는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한국교회 성장 이끌었던 번영신학, 이제 힘을 잃었다"

이원규 감신대 은퇴교수가 '기독교사상' 1월호에 기고한 '빨간불이 켜진 한국교회'란 제목의 글에서 한국교회의 미래가 어둡다고 전망하며 그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하나님과 사람에게 소외 받은 욥은 멜랑콜리커였다"

욥이 슬픔과 우울을 포괄하는 개념인 멜랑콜리아의 덫에 걸렸고 욥기는 멜랑콜리아를 극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지혜서라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학문적 통찰이 없는 신념은 맹신이 될 수 있지만..."

장공 김재준의 예레미야 해석을 중심으로 예언자의 시심(詩心) 발현과 명징(明徵)한 현실 인식에 대한 연구한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윤식 ...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폴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3집(2023년 12월)에 발표된 '폴 틸리히의 성령론: 경계의 신학에서의 "영적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