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선악과를 따먹는 사람들

창세기 2~3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신 후에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하시지만 선악과는 절대로 따먹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신다. 하지만 아담과 이브는 뱀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 탐스럽기 짝이 없는 선악과를 따먹은 죄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된다. 이것이 시발점이 되어 인간의 역사는 걷잡을 수 없이 죄의 수렁에 빠져든다.


그런데 기독교의 소위 정통 교리 중의 하나인 '원죄론'에서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래 인류는 영원히 원죄의 저주 아래 있으며, 이 끔찍스러운 저주로부터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뿐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정통 교리와 신학의 틀에서는 선악과 사건은 예수의 대속적 십자가 죽음과 직접 맞닿아 있을 만큼 매우 중대한 사건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것이 왜 그리도 큰 죄악인가 하는 궁금증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나님이 아담에게 내리시는 준엄한 명령이 인간은 선악에 대한 분별력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라면,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우리의 자애로우신 창조주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없다. 왜? 선악도 분별하지 못하는 인간, 도덕관념이 없는 인간이란 하나님이 그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로봇 같은 존재이지 주체적이고 능동적이며 창조적인 인간은 결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따먹는 것은 다른 각도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선악과를 따먹는 것을 선악의 기준을 제멋대로 정한다는 의미로 풀이해보면 어떨까. 이런 맥락에서 선악과 이야기를 재해석하면 원죄에 대한 아주 새롭고 신선한 통찰력에 가 닿게 될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선악과를 따먹는 자들, 선악의 기준을 자기 멋대로 정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가진 자들, 한 시대를 풍미하는 지배자들과 권력자들과 부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풍부한 물적(物的) 토대를 바탕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의 영역, 즉 도덕과 이념과 가치와 법의 세계 또한 빈틈없이 지배한다. 물론 그들이 정하는 선악의 기준의 밑바닥에는 그들의 기득권을 안전하게 유지하려는 음흉한 발톱이 숨어 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가끔 문제가 되는 소위 '악법'은 그들의 지독한 탐욕이 법이라는 그럴 듯한 옷으로 치장한 것이다.


인간의 역사가 물질적·정신적으로 눈부시게 발전한 오늘날에도 선악과 사건이 비일비재로 벌어지고 있음을 감안할 때, 창세기가 기록될 당시의 역사에서는 선악과 사건이 더욱 노골적이고 폭력적인 형태로 벌어졌을 게 틀림없다. 지상의 왕이 신성불가침의 거룩한 존재로까지 행세할 수 있었던 저 옛날, 권력을 틀어쥔 자들의 억압과 착취와 횡포는 오늘날보다 수십 배, 수백 배 더 악랄했을 것이 뻔하다.


그렇다. 창세기가 인간의 원죄로 고발하고 있는 선악과 사건은 모든 역사적 비극과 죄악의 중심에는 권력 독점 혹은 권력 남용이 도사리고 있음에 대한 날카로운 고발이었을 것이다. 만약 창세기 저자가 오늘날 선악과 이야기를 새로 쓴다면 아마 '권력 독점과 권력의 무분별한 남용이야말로 인간 역사의 비극의 뿌리'라는 주석을 살짝 달지도 모른다.


선악과 사건에 대한 이렇듯 새로운 풀이에 기대어 이 땅의 역사 현실을 진단해보자. 굳이 멀리까지 갈 것 없이 1945년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된 이래 이 땅의 현대사는 독재자들과 그들의 하수인들이 끊임없이 선악과를 따먹은 범죄로 얼룩진 비극의 역사였다. 그들은 선악의 기준을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 자유자재로 바꾸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데 혈안이 되었다. 그들이 정한 선악의 기준에 도전하는 자들을 가차 없이 고문하고 옥에 가두고 죽음으로 내몰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땅 어딘가에서 은밀히 선악과를 따먹으며 희희낙락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교회는 창세기 저자의 예언자적 고발정신을 본받아 그들의 정체를 온 세상에 드러내어 역사의 경종을 울려야 하리라.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창 2:9), 이 두 그루의 나무는 서로 상극인 것을!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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