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대학교 설립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우원사상연구소가 제41회 국제학술세미나를 마련하고 “세계화와 에큐메니컬 운동”이란 주제로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모임에 초청을 받게 되어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바이다. 한국 교회의 정서로 볼 때 에큐메니컬 운동에 관한 논의를 회피하려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강남대학교 우원사상연구소는 학문공동체로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하여 이처럼 토론의 장을 마련한 것에 우선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바라기는 강남대학교가 에큐메니컬 운동을 이끌어가는 일에 앞장설 뿐만 아니라 신앙과 학문적인 바탕을 꾸준히 제공함으로써 한국 에큐메니컬 운동을 활성화하는데 크게 기여해 주기를 바란다.
에큐메니컬 운동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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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재웅 박사 ⓒ베리타스 DB |
에큐메니컬 운동 혹은 에큐메니즘(ecumenism)은 그리스어의 오이쿠메네에서 유래되었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주제 가운데 화두로 떠오른 “세계화”는 이미 오이쿠메네라는 단어 한 마디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사람이 살고 있는 땅”은 초대교회의 선교적 과제인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는 선교적 열정이 세계화와 관련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오이쿠메네라는 “오이코스”(oikos) 즉 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지구라는 집에 기거하는 모든 생명체는 말할 것도 없고, 온갖 종류의 피조물들이 마치 한 식구처럼 평화롭게 살아가는 지구 공동체 건설이 바로 에큐메니컬 운동의 관심이라 하겠다.
세계화는 초대교회의 선교 전략과도 일맥상통한다. 왜냐하면 초대교회의 성격은 전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고 결국 선교를 세계화의 한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325년에 소집된 “제1차 에큐메니컬 협의회”만 보더라도 흩어져 있는 교회를 하나로 묶고 신앙의 정통성을 통일하기 위하여 모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에큐메니컬 협의회는 일곱 차례나 지속되었고 함께 교리를 다듬고, 교회의 일치를 추구하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일을 주도했다. 그러나 교회는 교리의 문제와 교권의 소재로 말미암아 결국 로마 카톨릭 교회와 정교회 그리고 개신교로 크게 갈라지게 되었다.
비록 “교리는 갈라졌지만 봉사는 함께 한다”는 구호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핵심적인 메시지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엡5:23)에서 보듯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하나가 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데 이것이 에큐메니컬 운동의 실천적 과제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전 교회”가 “전 복음”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는다. 그래서 에큐메니컬 운동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갈3:28)라는 성경ㅇ의 보편적 가치를 온 세계에 실현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전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소위 선교에 열정을 쏟게 된다. 또한 18세기의 경건주의와 복음주의가 대 각성운동을 주도하면서 선교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게 되었다. 마침내 대 각성운동은 사회개혁에 관심을 쏟게 되고 초교파적인 선교 협력을 주도하게 된다. 그러나 교파별로 만든 선교단체들은 앞을 다투어 선교사를 전 세계에 파송하게 된다. Stephen Neill 『기독교 선교사』를 보게 되면 개신교 선교단체들이 유럽을 중심으로 많이 설립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영국침례교선교회(1792)이고 그 다음이 런던선교회(1795), 성공회복음주의선교회(1799), 영국해외성서공회선교회(1804) 등이 영국에서 시작했다. 미국의 경우는 조합교회해외선교회(1810)와 미국침례교선교회(1814)를 꼽을 수 있으며 독일은 벌린선교회(1815) 그리고 스위스는 바젤선교회(1815) 등이 생겨났다. 그 밖에 덴마크는 1821년, 프랑스는 1822년, 노르웨이는 1842년에 선교회가 조직되었다.
이렇게 생겨난 선교단체들은 서로 경쟁을 하면서 전 세계를 향해 선교의 열정을 쏟게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선교지에서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치게 되자 서로간에 협력을 모색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결과 국제 선교사대회 혹은 선교정책모임이 주선되는데 1878년 런던에서 첫 번째 모임이 회집되었고, 1888년 런던에서 두 번째로 모이게 되었다. 또한 1900년 뉴욕에서 계속적으로 모임이 이어졌으며 이 때의 모임 성격을 “에큐메니컬선교협의회”로 규정했다. 이런 과정을 겪어오다가 금세기 에큐메니컬 운동의 효시로 불리는 “세계선교협의회”가 1910년 에든버러에서 개최됐다. 통상 교회사는 에든버러협의회를 에큐메니컬 운동의 본격적인 출발로 기술하고 있다.
1921년에는 “국제선교협의회”가 생겨났고, 1925년에는 “삶의 사업” 운동이, 그리고 1927년에는 “신앙과 직제” 운동 등이 에큐메니컬 운동을 활발하게 주도했다. 그리고 세계 YMCA(1844)나 세계YWCA(1854)와 세계학생기독교연맹(WSCF,1895) 등의 기독청년 학생운동 출신의 지도자들이 또 하나의 축을 이루었다. 마침내 1948년 에큐메니컬 운동의 본부로 불리는 세계교회협의회가 교단대표들과 함께 위에서 밝힌 여러 에큐메니컬 기구들의 협력을 바탕으로 창설되었다.
아시아 개신교의 경우는 서방교회 선교사들이 기독교를 소개하면서 교회를 세우게 되는데 인도(1793), 스리랑카(1804), 중국(1807), 미얀마(1813), 태국(1831), 인도네시아(1833), 일본(1859), 한국(1884), 필리핀(1899), 라오스(1902), 베트남(1911), 캄보디아(1911)의 순으로 복음이 전래됐다. 아시아의 개신교 지도자들은 아시아교회가 서로 친목을 도모하고 복음의 효율적인 증거를 위해 아시아교회 협력기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마침내 1957년 아시아 개신교의 본부라 할 수 있는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의 전신인 동아시아기독교협의회(EACC)가 지역 에큐메니컬 기구로는 제일 먼저 창설되었다. 그 다음 유럽과 기타 대륙의 에큐메니컬 기구들이 속속 조직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에큐메니컬 운동이 고백하는 신앙적 자세는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그 지체이므로 교회는 “하나”이며 “거룩”하고 “공교회적”(Catholic)인 반면 “사도의”(Apostolic) 전통을 이어가는 우주적 신앙공동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에큐메니컬 운동은 교회일치 운동을 통해서 갈라진 교회를 하나로 묶고 흐트러진 교회를 새롭게 추스르는 교회의 갱신운동에 전심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오늘의 현실
엘빈 토플러는 부인과 함께 최근 『부의 미래』라는 책을 써서 또 한 차례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 토플러는 앞서 『미래충격』과 『제3물결』 그리고 『권력이동』 등의 저서로 세계를 놀라게 한 주인공이다. 토플러는 21세기가 되면 “초국적 기업과 종교”가 세계를 지배하는 원동력이 될 것으로 예견했다. 오늘의 현실을 보게 되면 토플러의 예견이 그대로 적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토플러는 『부의미래』라는 책의 첫 번째 부분에서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여기에서 다루는 부는 보이는(visible) 부와 보잊 않는(invisible) 부 모두를 포함한다. 이런 혁명적 형태의 부는 수년 내에 우리에게 빠르게 달려와 개인의 삶과 기업, 세계를 재편할 것이다”(21쪽) 새로운 세계는 “심약한 사람들에게 반갑지 않은 미래가 될 것”(22쪽)이라는 경고를 하고 있다. “위태로운 경제상황과 제도적인 실패가 결합되어 개인들은 절망적인 상황으로 내몰리게 될 것이며… 우리는 과연 지갑이나 간수할 수 있을까?”(23쪽)라는 자괴적인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
그는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부 창출 시스템은 여전히 신 경제(new economy)로 불리게 되며”(26쪽) “우리에게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 것은 디지털 혁명에 국한되지 않고 지식 기반이 전방위적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32쪽)고 내다봤다. “지금은 혁명이 진행 중이다. 그 혁명과 더불어 일어나는 문명은 우리가 알고 있던 부에 관한 모든 사실에 도전을 가할 것이다”(35쪽)라고 간결하게 설파함으로써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다.
그는 동양과 서양이 종교에 관해서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지적도 하고 있다. “일부 종교에서는 욕망에 오명을 씌운다. 금욕적인 믿음은 ‘많이 바라지 말라’ ‘최서한의 것으로 살라’라고 설파하며 가난을 인내하고, 욕망을 채우려 하기보다 줄임으로써 행복을 추구하라고 전한다. 오랜 세월 동안 인도가 바로 그렇게 살아왔다. 이에 비해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오히려 정반대의 메시지를 전파했다. 물질적인 욕망을 억누르는 대신 ‘열심히 일할 것’ ‘집약할 것’ ‘정직할 것’이라는 윤리를 설파했다. 그리고 이를 지키면 하나님의 욕망을 채우도록 도와 주실 것이라고 약속했다. 서량에서는 대부분이 이 가치관을 받아들여 부를 키웠다”(38쪽)는 것을 밝히고 있다.
토플러는 “제1물결의 부 창출 시스템이 주로 키우는 것을, 제2물결이 만드는 것을 기반으로 했다면, 제3물결의 부 창출 시스템은 서비스하는 것(serving), 생각하는 것(thinking), 아는 것(knowing), 경험하는 것(experiencing)을 기반으로 한다”라고 분석했다. “제3물결의 부 창출 시스템은 이전 시스템이 창출해 낸 부의 양을 왜소해 보이게 만든다. 물론 제3물결의 부 창출 시스템은 금전적인 부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부, 즉 우리 자신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만들어 내는 비화폐적인 부도 증대시킨다”(49쪽)라고 요약했다.
이 책은 크게 “속도의 충돌”과 “공간의 확장” 그리고 “지식에 대한 신뢰”를 설명하기 위해 책 전체를 할야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말하자면 세계화의 단면을 집약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지각 변동”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있는데 “중국은 또 다시 세계를 놀라게 할 것인가?”라든가, “일본이 넘어야 할 고비” 또는 “한반도의 시간과의 충돌” 그리고 “유럽이 잃어버린 교훈”을 예리하게 파헤치고 있다. 계속해서 “미국의 내부와 외부 정세”를 분석하고 “NGO의 역할”을 부각시키며 그 중심에 종교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토플러는 아시아에서 동북아시아로 불리는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을 따로 조명한 것도 이 책의 특이한 점이다. 그는 중국에 관해서 남다른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중국은 1980년대 개혁을 시작으로 1990년대 해외 자본에 대한 문호개방과 세계무역기구 가입, 수출입 물량의 엄청난 성장을 통해 외부 세계와의 연결을 하루가 다르게 깊고 폭넓게 확산시키고 있다”(457쪽) 중국은 제조 분야는 물론 전자, IT, 금융, 교육, 군사, 외교 등 전방위적인 세계화 전략을 펴고 있다. 과학 기술과 경제에 대한 혁명은 중국의 미래를 판가름하는 척도가 될 것이다. 그라나 “신화통신 사설에 등장한 내용처럼 중국은 ‘성장의 황금기’를 누리거나 ‘분쟁에 찌든 시대’의 혼동에 빠질지도 모를일이다”(466쪽)라는 상반된 전제를 앞세운 주장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중앙 정부의 장악력이 그만큼 떨어지고 있음을 암시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중국은 마오쩌둥의 혁명기반인 농민과 노동자를 세력기반으로 삼아 국가를 통치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왜냐하면 빠르게 성장하는 지식 기반의 경제가 국가 동력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농촌과 도시의 대립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종교나 인종간의 갈등이 또 다른 요인으로 제기되고 있다. 그것은 파룬궁을 탄압하는 국가의 정책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파룬궁은 규모가 클 뿐 아니라 그 영향력이 전국적으로 미치고 있다. 더욱이 파룬궁 수행자 중 상당수가 경찰이나 군인이라는 점이 우려를 더하게 만들었다”(467쪽)라고 지적했다. 이렇게 보면 파륜궁이 중국 공산당보다도 더 큰 세력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라 하겠다.
또 다른 세력은 기독교의 급성장이다. 소외계층을 끌어들이기 위해 기독교 종파간에 경쟁을 벌이고 있다. 결과적으로 기독교의 교세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중국의 역사를 보면 “사교적 종교집단운동이 거대한 유혈 사태를 촉발시켜 정부를 전복시키고 중국을 조각조각 절단하려고 시도했던 일이 한두 번 있었던 것도 아니다”(469쪽) 홍수전이 일으킨 태평천국의 난과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중국이 세계 초강국으로 발전하는 과정은 여러 해에 걸쳐 왜곡되고 둔화되며 퇴보할 수도 있고, 비극으로 점철될 수도 있다...중국의 물결 분쟁은 우리의 직업과 주식 투자, 제품, 권리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아이들이 입게 될 옷이나 그들이 사용할 컴퓨터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제 우리 모두의 일부분이 되었다”(471쪽)는 것이 토플러의 중국관이라 하겠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