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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틸리히 자서전 : [경계선에서] 2

교회와 사회 사이에서 비록 나는 가끔 교회의 교리와 관습을 비판해 왔지만 교회는 늘 나의 보금자리였다. 그 같은 사실은 새로운 이교적 이념들이 교회로 밀려들어오던 즈음과 내가 나의 정치적이고도 종교적인 보금자리를 잃어버리게 되지는 않나 하고 두려워하던 즈음에 더욱 뚜렷하게 되었다. 그 위난(危難)으로 나는 내가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느낌은 나의 어렸을 적의 경험 - 프로테스탄트 목사의 집이라는 데서 온 그리스도교적 영향 하며 19세기 막바지의 동부독일의 조그마한 도시가 가질 수 있었던 비교적 잘 이어온 종교적 관습등 - 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교회 건물과 그것의 신비로운 분위기며 예배, 음악, 설교 그리고 어느 해의 며칠 동안, 때로 몇 주 동안의 읍내 생활을 장식했던 그리스도교의 큰 축제들에 대한 나의 사랑은 교회적이고 예전적(禮典的)인 것에 대한 잊을 수 없는 감명을 내 마음에 심어 주었다. 또 이런 것들 위에 그리스도교 교리의 신비라든가 그것이 어린아이의 맘속에 끼친 영향, 또 성경에 나오는 말이며 거룩함, 죄, 용서 따위에 대한 가슴 설레던 경험 등이 보태져야 하리라. 이 모든 것은 내가 신학자가 되어 그 길을 걷고자 마음먹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내가 성직을 받고, 목사로서 활동하고, 대학이란 환경에 들어가서까지도 오랫동안 설교와 예배에 대한 관심을 이어온 것은 모두 내가 교회에 속해 있다는 깨달음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나는 경계선 위에 있었다. 일종의 소외감이 교회의 교리와 제도에 대한 나의 커가는 비판을 대동하고 나왔다. 교회 밖의 지식인과 무산계급을 만난 것이 이 점에 있어서는 결정적인 것이었다. 나는 신학 공부를 끝마친 훨씬 뒤에야 비로소 교회 밖의 지식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 만남에 있어서 나의 태도는 그 때의 접경적 입장에 따라 호교적이었다. 호교적이 된다는 것은 견해에 있어서 통속적 척도를 가진 상대편의 앞에서 스스로를 방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대 교회의 호교론자들이 공격해 오는 이교주의 앞에서 스스로를 옹호하고 있었을 때, 공통된 척도는 이론적이고도 실천적인 이치인 로고스(Logos)였다.

호교론자들이 그리스도를 로고스와 같이 여기고 신의 명령을 자연의 합리적 법칙과 같이 여겼기 때문에 그들은 이교적인 반대자들 앞에서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실천에 대한 까닭을 변론할 수 있었다. 우리들의 시대에서 그리스도교 옹호론은 현존하는 지적, 도덕적 입장들에 반대하면서 새로운 원리들을 내세우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의 임무는 고개를 드는 상반된 입장들에 맞서서 그리스도교의 원리를 감싸는 일이다. 옛날의 호교론자들에게나 오늘날의 호교론자들에게나 마찬가지로 결정적인 문제는 공통된 척도, 곧 논쟁이 가라앉을 수 있는 재판정의 문제이다. 그 일반적인 척도를 찾는 가운데에서 나는 계몽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오늘날의 사상적 경향은 비록 그것이 교회중심적 그리스도교에 비판적 태도를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리스도교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현대의 사상적 경향은 가끔 그렇게 불리듯이 이교적인 것은 아니다. 이교주의 - 특히 국가주의적 치레를 한 - 는 1차 대전 후에 그리스도교적 인본주의가 여지없이 붕괴된 것과 관련하여 처음으로 나타났다. 이런 류의 이교주의 앞에서도 호교론 같은 것은 없었다. 유일한 문제는 죽어갈 것인가, 살아남을 것인가였다. 이 문제는 악마적 다신주의에 대항해 싸우던 예언자들의 일신주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대에 있어서 호교론이 가능했던 것은 단지 다신주의가 인본주의로 채워져 있었고 그 인본주의 안에서 그리스도교와 고대가 그들 마음대로 공통척도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대 호교론이 근본적으로 이교적인 인본주의에 부닥쳤던 반면 오늘날의 호교론의 남다른 점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교적인 인본주의에 부닥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문제를 나의 글 "렛싱과 인류 육성의 이념(Lessing und die Idee der Erziehung des Menschengeschlechts)"에서 다루었다. 마음속으로 그런 관점을 품고 나는 여러 가지 사적인 일로 베를린에 머무르면서 호교론에 관한 강좌와 토론회를 꾸려나갔다. 이런 모임들의 결과는 복음주의 교회의 지도부에 제출한 보고서로 간추려졌다. 이런 활동은 후에 국내(미국) 전도단에 호교론위원회를 세우는 데로 이어졌다. 전쟁 후에야 비로소 그리스도교적 인본주의의 실제와 성격이 내게 아주 친숙해졌다.
 
노동운동이라든가 소위 반그리스도교적 민중들과의 만남은 나에게 거기에도 역시 그 인본주의적 성격이 비록 예술과 과학에 의해 오랫동안 불신되어온 유물론적 철학인 것처럼 보여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적 바탕이 인본주의의 안에 감추어져 있음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민중들에 대한 호교적 메시지는 지식인들에게보다 훨씬 더 아쉽고도 어려웠는데 그것은 민중들의 반종교성이 계급적 반목에 의해 드높아졌기 때문이었다. 계급갈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교회가 호교적 메시지를 초잡으려 한 것은 애초부터 실패가 예정된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에서 그리스도교를 방어한다는 것은 계급 갈등 속으로 적극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 오직 종교사회주의만이 무산대중에게 호교적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다. "뛰어든 전도(inner mission)"가 아닌 종교사회주의는 노동계급 가운데에서의 그리스도교적 활동과 호교의 필연적인 형식이다. 종교사회주의의 호교적 요소는 자주 그 정치적 모습에 의해 가리어져 왔던 탓으로 교회는 그 자신의 활동에 있어서 종교사회주의의 간접적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 점은 사회주의자들 자신이 더 잘 이해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가끔 내게 종교사회주의가 대중을 교회의 그늘 아래에 데리고 가서는 사회주의 정부를 이룩하려는 투쟁으로부터 그들을 떼어놓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비치곤 했다. 교회마저도 종교사회주의를 거절했는데 이는 그런 움직임이 전통적 상징들과 교회적 사고 및 실천의 개념을 버리고 말거나 혹은 그런 것들을 어느 정도의 바닥 다지기를 한 뒤에서야 쓰지 않을 수 없었던 때문이었다. 또 그런 것들을 대중없이 함부로 썼다면 무산계급은 자동적으로 그것을 배척했을 것이다.

종교사회주의의 임무는 노동운동의 그리스도교적 인본주의 속에 함축된 것과 교회의 아주 다른 예전적 형태 속에 함축된 것이 같은 본질임을 내보이는 일이었다. 많은 젊은 신학자들이 그리스도교적 인본주의에 대한 이 같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교회 성직자들이 도저히 손잡을 수 없는 자들에게 종교적 감화를 주겠다는 뚜렷한 목적으로 성직이 아닌 자리를, 특히 사회봉사의 영역에 있어서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깝게도 그런 기회들은 몇몇에게만 이용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교회와 인본주의 사회의 문제와 교회와 무산계급의 문제는 바르트 학파의 젊은 신학자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그 틈은 결코 교회에 의해서 해결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분열된 인본주의 사회는 새로운 이교적 경향 아래에 무더기로 희생되고 말았다. 교회는 그같은 경향과 싸우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래서 더욱 더 반(反)인본주의적인 것처럼 보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무산계급은 종교적 소극성의 등뒤로 가라앉았다. 비록 지식인들이 국가주의적 이교주의에 대항해서 교회의 존립을 지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교회 쪽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교회가 수호하는 교의는 그들에게 먹혀들지도 않았고 또 그렇게 될 수도 없었다.

이런 부류들에게 손을 뻗치기 위해서 교회는 교회적이 아닌 인본주의가 알기 쉬운 언어로 복음을 선포해야만 했다. 교회는 지성인들에게도 대중에게도 복음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확신시켰어야 했었다. 그러나 그런 확신은 고백교회의 실랄한 반인본주의적 역설 때문에 주어질 수 없었다. 그같은 역설을 일으키게 한 현실이 먼저 검토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브룬너(Brunner)라든지 고가르텐(Gogarten) 같은 신학자들은 그런 검토를 시도하지 않았다. 그것을 부정함으로써 그들은 오히려 인본주의에 얹혀 살았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의 선포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그들의 표현은 그들이 반대하고 있던 것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부인하는 식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노이베르크라이스(Neuwerkkreis)나 나의 오랜 친구이자 이런 노력에 있어서의 동료인 헤르만 샤프트(Hermann Schafft)가 편집한 같은 이름의 잡지에서도 다루었듯이 그리스도교 복음의 언어 문제가 진지하게 거론될 때마다 심각한 문제들이 떠올랐다.

전래적인 종교적 성서용어나 옛 교회의 예배가 다시 들어설 수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가 언젠가 내게 말했듯이 인류가 종교적인 원형적(原型的) 언어를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원형적 언어들은 모든 것을 객체화(客體化)해버리는 우리들 사고의 틀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과학적 파악방식에 의해 그 전래적인 힘을 빼앗기고 말았다. 합리적 비판주의는 원형적 언어인 "신"의 의미 앞에서는 아무 힘이 없다. 그러나 무신론은 "객체적으로" 존재하는 신이라는 앞 뒤 막힌 생각에게는 지당한 대답이 된다. 말하는 사람은 그 말을 전래적인 상징적 의미에서 쓰지만 듣는 사람은 그 말을 그 시대의 과학적 의미에서 듣는다면 실로 진풍경이 벌어지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왜 언젠가 자극시킬 목적으로 교회는 일체의 원형적 언어에 대해 30년 동안의 사용금지령을 내려야 한다는 말을 꺼냈던가 하는 이유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만 한다면 몇몇 경우에서 그러했듯이 교회는 새로운 용어를 개발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고전적인 예배언어와 성경말을 오늘날의 말투로 너무 심하게 옮기려 하던 노력은 비참한 실패를 하고 말았다. 그러한 시도는 새로운 창조를 가져오지 않고 의미의 손상을 가져왔다. 신비적 용어의 사용마저도, 특히 내가 가끔 시도했던 바와 같이 설교에서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용어들은 그리스도교 복음의 모든 본질을 다 담기는 거의 불가능한 그 어떤 다른 내용을 전한다. 유일한 해결책은 그 원형적 종교용어를 그대로 쓰면서 동시에 그것의 그릇된 사용을 거부함으로써 그 전래적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우리는 전래적인 원형적 언어를 그 경계선 위에서 되찾기 위해 고전용어와 현대용어의 사이에 서야 한다. 사회의 현존하는 위난은 많은 것들을 종교언어가 다시 그 고유한 의미로 들릴 수 있는 이 경계선으로 몰아왔다. 만약 눈멀고도 오만한 정통파가 이들 용어를 독점함으로써 종교적 실제에 민감한 자들을 놀라게 해서 쫓아버리거나 또는 그들을 몇몇 현대적 이교주의에로 몰아 넣어서 결과적으로 그들을 교회에서 몰아내는 일이 있게 된다면 그것은 통탄할 일일 것이다. 교회와 사회의 문제는 나로 하여금 "교회와 인본주의 사회(Kirche und humanistische Gesellschaft)"라고 이름한 글에서 "드러난(manifest)" 교회와 "숨은(latent)" 교회 사이에 구별을 짓게 했다.

이것은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라는 낡은 프로테스탄트적 구별이 아니라 보이는 교회 안에서의 이중성을 다룬 것이었다. 그 글에서 내가 보여준 것과 같은 식의 구별은 교회의 바깥에 존재하는 그리스도교적 인본주의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조직화된 교파들과 전통적인 신조(creeds)로부터 소외된 자들을 비교회적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한 평생의 반 동안을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오면서 나는 그들 안에 얼마나 많은 숨은 교회가 있는 지를 배웠다. 나는 거기에서 인간실존의 유한성에 대한 체험이며 영원하고 조건 없는 것에 대한 물음이며 정의와 사랑에 대한 절대적 이바지며 이상향의 배후에 놓인 소망이며 그리스도교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며 그리고 국가와 교회의 상호침투 속에서 그리스도교가 이념적으로 잘못 쓰여지는 것을 아주 예리하게 인식하는 모습 등을 만날 수 있었다. 때때로 내게는 그 "숨은 교회" -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찾아낸 것을 이름지은 것 - 가 조직화된 교파 교회보다 더 참다운 교회인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 구성원들이 진리를 가지고 있는 척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조건에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몇 해는 조직화된 교회만이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교적 침략에 맞선 싸움을 끌고 갈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숨은 교회는 이 싸움에 필요한 종교적 무기도 조직의 무기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드러난 교회에서 이 같은 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교회와 사회 사이의 틈을 더 크게 벌일 우려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숨은 교회의 개념은 우리들 시대의 수없이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운명적으로 걸어야 할 경계선의 개념이다. 종교와 문화 사이에서 만약 레베나의 모자익 작품이나 시스틴 성당의 천장화나 혹은 만년의 렘브란트가 그린 초상화에 깊은 감명을 받은 사람에게 그 같은 체험이 종교적인 것인지 문화적인 것인지를 묻는다면 그는 대답하기 곤란할 것이다. 그 같은 체험은 형식에 있어서는 문화적이고 내용에 있어서는 종교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대답일 것이다. 그것은 특수한 의례적 행위에 딸린 것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는 문화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인 것과 인간 실존의 유한성을 다룬다는 이유에서는 종교적이다. 그림에서와 마찬가지로 음악이나 시, 철학, 과학에 있어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리고 세계에 대한 이러한 직관과 이해에서 진실이 되어 있던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법률과 관습을 만들어내는 실제적인 일이나 도덕과 교육, 공동체와 국가에 있어서도 진실이 되어 있다. 인간실존이 궁극적인 물음 아래에 종속되어 있고 그리하여 초월되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지 문화는 종교적이다. 그리고 조건적인 의미만을 가진 일들 속에 무조건적인 의미가 보여지는 곳이라면 거기서도 또한 문화는 종교적이다. 문화가 본질적으로 종교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체험하는 가운데에 나는 종교와 문화의 경계선에로 나아갔고 그리고 결코 그 곳을 떠난 적이 없었다. 나의 종교철학은 주로 이 경계선의 이론적 측면에 관계되어 있다. 종교와 문화 사이의 관계는 그 경계선의 양 쪽 측면으로부터 규정되어야만 한다.

종교는 절대적인 것을 포기할 수 없으며 그리하여 신의 개념 속에 표현된 보편적 주장을 버릴 수 없다. 종교는 문화 속의 한 특수한 분야가 되어서는 안 되며 또 문화의 옆자리를 차지해서도 안 된다. 자유주의는 종교를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자 해 왔다. 어떤 식으로 하든 종교는 불필요하고 사라져야만 한다. 문화체계가 종교 없이도 완전하고 자기충족적(自己充足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는 종교에 대하여 문화의 자율성, 곧 문화 그 자체를 포기하지 않고는 굴복할 수 없다는 항변권을 갖고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문화는 절대적인 내용을 포함한 모든 내용들이 스스로를 나타낼 형식을 결정하여야 한다. 문화는 진리가 정의와 종교적 절대라는 구실 아래에서 희생되는 것을 내버려 둘 수 없다. 종교가 문화의 본질이듯이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 오직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종교의 뜻하는 바는 본질로서 그것은 무조건적인 원천이자 의미의 심연이며 문화 형식이 그 본질의 상징으로써 봉사한다. 문화가 뜻하는 바는 형식으로서 그것은 조건부 의미를 뜻한다. 무조건적 의미를 뜻하는 본질은 문화가 승인해 준 자율적 형식의 매체를 간접적으로 통해서만 간파될 수 있다. 문화는 인간 실존이 완전하고도 자율적인 형식의 틀 안에서 그 유한성과 영원에 대한 갈구에 있어서 이해될 때 그 최고의 표현을 얻는다. 반대로 종교가 그 최고의 표현을 얻자면 그 자신 안에 자율적 형식, 곧 로고스 - 초대 교회가 그렇게 불렀듯이 - 를 품고 있어야 한다. 이런 생각들이 종교와 문화에 대한 나의 철학의 기본 원리를 구성했으며 종교적 관점에서 문화사를 이야기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이것이야말로 왜 나의 책 "종교적 상황(The Religious Situation)"에는 좁은 의미의 종교적 문제가 적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 반면, 가까운 지난날의 지적 사회적 움직임이 광범위하게 고려되고 있는가 하는 이유이다. 나는 그 같이 하는 것이 오늘날의 사실상의 종교적 상황에 맞먹는 일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정치적 사회적 관심은 무수한 유럽인들과 미국인들에게는 종교적 이상과 정치적 이상이 합치한다는 정도로까지 종교의 힘을 흡수해버렸다. 국가의 신화와 사회정의의 신화는 그리스도교의 원칙과 널리 바꿔치기되고 있으며 그것들이 문화적 형식을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으로 여겨질 수 있을 만한 효력을 갖게 되었다.

내가 "문화 신학의 이념에 관하여(Uber die Idee einer Theologie der Kultur)"라는 강의에서 전개했던 문화에 관한 신학적 분석의 개요는 최근 역사의 흐름을 고찰하고 있다. 그 중 세속주의에 대한 프로테스탄티즘의 관계를 다룬 한 항목에서 나는 이러한 고찰의 신학적 결론을 그려 보였다. 거기에서 나는 만약 프로테스탄티즘이 그 어떤 지배 열망을 갖는다면 그것은 세속적인 것에로 향해서 존재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생각은 카톨릭이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갈라놓는 것을 근본적으로 배척한다. 무조건적인 것(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용어로 하면 신의 주권)의 출현 앞에서는 어떠한 우선권 있는 영역도 있을 수 없다. 거기에는 스스로 거룩한 어떠한 인물도, 경전도, 공동체도, 제도도, 행위도 있을 수 없으며 스스로 세속적인 그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 세속적인 것은 거룩함의 질을 고백할 수 있고 거룩한 것은 세속적이기를 그만두지 않는다. 사제는 평신도이며 평신도는 언제라도 사제가 될 수 있다. 나에게 있어서 이것은 신학적 원칙일 뿐만 아니라 전문인으로서 그리고 개인으로서 지켜온 입장이기도 하다. 성직자로서 또 신학자로서 나는 나의 신학적 고투를 숨길 의향 따위는 갖고 있지 않다.

도리어 나는 그런 고투가 쉽사리 감추어질 수 있는 영역, 예를 들면 철학교수로서의 나의 활동 등에서 그런 고투를 자랑해 왔다. 그러나 나는 나를 세속적 삶으로부터 떼어놓으면서 나로 하여금 "종교적"이란 꼬리표를 달게 할지도 모르는 신학적 체질에 젖지 않기를 바랐다. 종교는 세속적인 것을 분열시키고 변형시키면서 그것으로부터 뛰쳐나올 때 그 무조건적 성격이 훨씬 더 드러나 보이는 듯이 여겨진다. 또한 나는 어떤 제도나 인격이 스스로 종교적인 듯이 여겨질 때야말로 종교적인 것의 역동적 차원은 배신당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성직자를 직업상의 필요로 신앙을 갖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신성모독에 가깝다. 독일 교회의 의식(儀式)을 개혁하려는 노력들에 대한 나의 응답은 이 확신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나는 빌헬름 슈태린(Wilhelm Stahlin)과 칼 리터(Karl Ritter)가 이끄는 이른바 베르노이헨(Berneuchen) 운동에 가담했다. 이들은 다른 어떤 개혁집단들보다 더 종교적인 개혁들을 추구했으며 또 의식의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무엇보다 먼저 개혁을 위해 선명하게 정의된 신학적 기반을 형성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나는 보람있는 신학적 협력을 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의식적 행사나 형식이나 태도들은 그것들이 만약 원래대로 즉 우리의 전체 실존을 지탱시키고 있는 종교적 본질이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 특유의 방법인 상징적 형식으로 이해되기만 한다면 "세속적인 것에 대한 열망"과 모순되지 않는다. 의식이나 예전적 행사의 의미는 스스로 거룩한 그런 행사는 아니며 오직 홀로 거룩할 뿐만 아니라 모든 것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없기도 한 무조건적인 것의 상징이다. 베르노이헨회(會)의 위원회에서 행한 "자연과 성례전(Natur und Sakrament)"이란 강의에서 나는 프로테스탄티즘과 인본주의의 비예전적이고 지적인 사고방식과 중세 말기에 사라진 예전적 사고방식의 전래적 의미 사이의 차이점을 설명하고자 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틀 속에서는 이것은 어렵지만 필요한 일이다. 어떠한 교회도 거룩한 것의 성례전적 표현 없이는 불가능하다. 나를 베르노이헨회에 관여케 한 것은 이런 확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세속적인 것과 거룩한 것 사이의 경계선에 대한 우리들 공동의 관심을 멀리 떠나 예배 형식(때로는 고대 예배 형식)에 대한 배타적 선입견에까지 흘러가게 되자 나는 그들과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서 다시 나는 경계선에 서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루터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칼빈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옮아가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며 특히 칼빈주의의 좀 더 세속화된 형태에 있어서 그러하다. 루터주의의 노선에서는 사회주의로 가기란 매우 어렵다. 나는 출생으로 보나 교육, 종교적 체험 기타 신학적 생각으로 보나 루터주의자다. 나는 한 번도 루터주의와 칼빈주의의 경계선에 섰던 적은 없으며 그것은 내가 루터주의의 사회윤리가 비참한 결과에 이르는 것을 경험하고 사회문제 해결에 있어서 칼빈주의의 신의 나라라는 이념이 갖는 한량없는 가치를 깨달은 뒤에도 여전히 그러했다. 나의 종교적 바탕은 루터주의이고 지금도 그렇다. 루터주의는 실존의 파탄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으며 각종의 사회 이상향(진보주의의 형이상학을 포함한)의 거부, 실존의 비합리적 악마적 성격에 대한 깨달음, 종교에 있어서의 신비적 요소에 대한 인식, 사적 공적 삶에 있어서의 청교도적 율법주의에 대한 거부 등을 갖고 있다. 나의 철학적 사고 또한 이 특유한 내용을 표현한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독일 신비주의의 철학적 대변인인 야콥 뵈메(Jacob Boehme)만이 유일하게 루터주의에 대한 특별히 철학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다. 뵈메를 통하여 루터주의의 신비주의는 쉘링과 독일 관념론에 영향을 끼쳤고 쉘링을 통하여 루터주의는 이번에는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나타난 비합리주의 및 생기론(生氣論:vitalism)의 철학에 영향을 끼쳤다. 많은 반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비합리주의와 생기론에 기반을 두게 될 만큼 루터주의는 사회주의를 점검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뿐만 아니라 철학을 통해 간접적으로 일해 왔다. 전후 독일 신학의 과정은 종교에서 사회주의에로 옮아가는 것이 루터주의자로 교육된 사람에게는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매우 뚜렷이 보여준다. 루터주의에 속하는 두 신학적 운동이 종교적 사회주의에 대립되었다.

그 하나는 "젊은 루터파" 신학으로 자칭한 종교적 국가주의였다. 그 주된 제창자는 엠마뉴엘 히르쉬(Emmanuel Hirsch)였는데 그는 한 때 나의 동료학생이자 친구였으나 후에는 신학적 정치적 대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하나는 "변증법적 신학"으로 불리는 바르트주의 신학이었다. 비록 바르트의 신학은 칼빈주의적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지만 신의 나라에 대한 그의 강한 초월적 이념은 분명히 루터적이다. 사회문제에 대한 바르트 신학의 무관심과 국가주의에 대한 히르쉬의 신성화는 독일의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전통과 너무나도 일치되어 있어서 종교사회주의로서는 그들을 반대한다는 것이 아무 성과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독일적 풍토에서 종교사회주의가 가망이 없다는 사실은 종교사회주의가 신학적으로 틀렸다거나 정치적으로 불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종교와 사회주의를 묶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앞으로 언젠가는 독일 역사에 있어서의 비극적 요소로 깨달아질 것이다. 루터주의와 종교사회주의 사이의 경계선에 서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유토피아주의의 문제와 비판적으로 마주설 것을 요구한다. 인간에 대한 루터주의적 원칙은 생기론 속에서 취한 자연주의적 형태에 있어서조차 모든 유토피아주의를 부정한다. 죄, 탐욕, 힘에의 의지, 무의식적 충동 혹은 인간의 상황을 그리기 위해 사용된 용어라면 그 어떤 것들도 인간과 자연의 실존과(물론 그것들의 본질이나 타고난 천성과가 아니라) 너무나도 연관되어 있어서 변질된 현실의 영역 안에서 정의와 평화의 왕국을 세우고자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의 나라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는 결코 이룩될 수 없다. 모든 유토피아주의는 형이상학적 실망에로 운명지어져 있다. 아무리 인간의 본성이 바뀔 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본성이 근본적인 도덕적 시정에 순종하는 것은 아니다.

교육과 환경에 있어서의 개선은 인간의 일반적 윤리수준을 높이고 그 야성의 거칠음을 도야하는 데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개선은 인간이 어디까지나 인간인 한 자유에 영향을 미쳐 선과 악을 행하게 하지는 않는다. 인류는 더 나아지지는 않는다. 선악은 단지 더 높은 국면으로 끌어올려질 뿐이다. 인간 실존에 관한 루터적 이해로부터 직접 끌어온 이 같은 고찰을 가지고 나는 사회주의적 사고에 점점 더 중요해져 가는 문제, 그리고 종교사회주의에게는 특별한 관심 영역인 인간 원칙의 문제를 다루어 왔다. 나는 그릇된 인류학이 종교사회주의로부터 그 설득력을 빼앗았다고 굳게 믿고 있다. 인간에 관한 진리(루터의 표현대로 하자면 "인간 안에 있는 것")를 받아들이지 않는 정치가는 성공할 수 없다. 다른 한편 나는 루터주의적 생각 - 특히 그 자연주의적 변형, 곧 생기론과 파시즘의 경우 - 이 인간에 대한 최종적 결어(結語)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예언자적 메시지는 다른 곳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그런 사고방식을 겨냥하게 될 것이다. 예언자적 메시지는 인간 본성이 모든 본질과 함께 변화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기적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인간을 변화시키려 노력하면서도 그 본성은 그대로 둘 수밖에 없다는 관점보다는 훨씬 현실적이다. 그런 자들은 유토피아주의자를 뜻하며 예언자적 기다림의 역설을 뜻하지는 않는다. 유토피아주의에 대한 인류학적 의미가 두드러지게 부각되기 훨씬 이전에 유토피아의 문제는 종교사회주의 운동의 중심문제였다. 우리는 1917년의 러시아 혁명 바로 후에 종교와 사회주의를 의논하기 위해 만났다.

그 처음 몇몇 모임에서 우리의 근본문제는 몇 가지 사회적 유토피아주의에 대한 종교의 관계라는 점이 드러났다. 내가 신약성서의 카이로스(Kairos:때가 참, the fullness of time)의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이 그 때였는데 그것은 종교와 사회주의 사이의 경계선적 개념으로서 그 후 독일 종교사회주의의 품질보증서(hallmark)가 되어 왔다. "때가 찼다"는 개념은 새로운 사회질서를 위한 투쟁이 신의 나라라는 관념으로 표현된 류의 성취를 지향할 수는 없으며 신의 나라의 특수한 측면이 우리를 위한 요구와 소망이 되듯이 특수한 때에 특수한 임무가 요구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신의 나라는 늘 초월적인 채로 남아 있을 것이나 그것은 주어진 사회형태 위에 심판으로 나타나며 다가오는 사회를 위해서는 규범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회주의 사회가 신의 나라로부터 영 동떨어진 것일지라도 종교사회주의자가 되겠다는 결단은 신의 나라를 위한 결단이 될 것이다. 내가 편집한 『카이로스』에 나는 제1권 "정신의 상황과 정신의 변화에로(Zur Geisteslage und Geistwendung)" 제2권 "비판과 자기확립으로서의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us als Kritik und Geistaltung)"의 두 권을 기고했는데 거기에서 카이로스의 개념은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전제들과 의미 가운데에서 고찰되고 있다. "카이로스"라는 생각에 얽힌 매우 중요한 개념은 악마적이라는 개념이다. 나는 그것을 "악마적인 것에 관하여(On the Demonic)"이란 글에서 논하였다. 이 개념은 루터적 신비주의와 철학적 비합리주의가 놓아준 발판이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악마적인 것은 개인적, 사회적 삶 속에 깃든 창조적이면서 동시에 파괴적인 어떤 힘이다. 신약 성서 안에는 귀신들린 자가 정상적인 자보다 예수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내적 분열을 맞는 까닭에 그런 깨달음을 자신에 대한 저주로 생각한다. 초대 교회는 로마제국을 스스로 신과 같이 여긴다 하여 악마적이라고 불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황제를 위해 기도하였고 또 그가 보장해주는 도시의 평화에 대해 감사를 드렸다. 비슷하게 종교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국가주의가 동시에 파괴적이면서 창조적인 점에서 악마적 세력들임을 보이고자 하며 그들의 가치체계에 신성을 베풀고자 노력한다. 유럽 국가주의와 러시아 공산주의의 과정, 그리고 그들의 거짓 종교적 자기합리화 과정은 이 진단을 넉넉히 확인해 주었다. 종교와 문화,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 타율과 자율 등에 관한 나의 이전의 생각들이 종교사회주의에 대한 나의 성찰에 합류해 들어가서 이제 그 문제가 나의 모든 생각의 초점이 된 것은 놀랄만한 일이 못 된다. 무엇보다 사회주의는 내가 신율적 역사철학을 이끌어내고자 했을 때 이론적 바탕과 추진력을 마련해 주었다. 물리적 시간이나 생물학적 시간과는 구별되는 "역사적" 시간을 분석함으로써 나는 요구되면서도 기다려지는 새로움에로의 움직임을 구성요소로 하는 역사의 개념을 전개시켰다. 역사로 하여금 그리로 움직여 가게 하는 새로움의 본질은 역사의 의미와 목표가 명백해지는 구체적 사건들 속에 나타난다. 나는 그런 사건을 "역사의 중심"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 중심은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나타나심이다. 역사 속에서 서로 투쟁하는 세력들은 그 보여지는 양상에 따라 서로 다른 이름들을 얻을 수 있다.

악마적-신적-인간적, 예전적-예언자적-세속적, 타율적-신율적-자율적 따위로 각각의 가운데에 놓인 말은 양단의 종합명제를 나타내며 그것을 향하여 역사는 때로는 창조적으로, 때로는 파괴적으로 그러나 결코 완성되는 일은 없이 항상 예상되는 완성의 초월적 힘에 의해 치달리며 스스로를 전개해 나간다. 종교사회주의는 새로운 신율에로 움직여 가는 그러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새로운 경제체제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현실의 깊이 있는 이해이며 우리가 가진 현재의 카이로스에 의해 요청되고 기다려지는 신율의 형식이다. 관념론과 마르크스주의 사이에서 나는 독일 관념론의 분위기 속에서 자랐으며 거기서 배운 것을 과연 잊을 수 있을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무엇보다도 나는 칸트의 지식 비판의 은덕을 입고 있는데 그것은 나에게 경험적 지식의 가능성에 대한 문제는 대상의 영역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경험에 대한 온갖 분석과 실재에 대한 온갖 체계적 설명은 주관과 객관이 만나는 곳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내가 관념론적 자동률(自同律:principle of identity)을 이해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고찰의 한 예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지식의 근본 성격을 분석하는 원리다. 오늘날까지 관념론에 대한 비판이 없다는 것은 나로 하여금 그 과정이 옳지 않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었다. 이 원리를 나의 결별의 입장으로 삼음으로써 나는 형이상학적이거나 자연주의적인 실증주의의 모든 형태들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만약 관념론이 사고와 존재의 합일(identity)을 진리의 원리로서 주장하는 것을 뜻한다면 나는 인식론상으로는 관념론자다. 나아가 자유의 요소는 주관적이고도 객관적인 경험에 가장 잘 부합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관념적으로 개념화하는 가운데에서 그 표현을 얻는 것처럼 내게는 여겨진다. 사람은 질문을 한다는 사실, 사고와 행동에서 절대적 요구(범주적 명령)를 깨닫는 것, (현대 형태심리학 이론에서처럼) 자연과 예술, 사회에서 뜻있는 형식을 인식하는 것 - 이 모든 것들을 인간의 원리가 자유의 철학이어야만 한다는 확신을 주었다. 나는 의미의 개념 속에서 아마 가장 적절하게 표현되었다싶은 인간 정신과 현실과의 사이에 어떤 공명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 점이 헤겔로 하여금 절대정신 안에서의 객관정신과 주관정신의 합일을 말하게 하였다. 관념론이 실재의 다양한 영역들에 의미를 주는 범주들을 고안해 낼 때 관념론은 철학을 합리화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도 한 그 임무를 완수코자 노력했다. 좀 색다른 문제점이 나를 관념론의 문 앞에로 이끌었다. 관념론자들은 그들의 범주체계가 실재와의 명백하고도 실존적으로 제한된 만남의 표현이라고 하기보다는 전체로서의 실재를 그대로 그린 것이라고 주장한다. 쉘링만이 그의 철학 발전의 제2기에서 관념론적이거나 본질론적인 체계의 한계를 깨닫고 있었다. 그는 실재란 순수한 본질의 표출일 뿐 아니라 그 모순이기도 하며 무엇보다도 인간 실존 그 자체가 그 같은 본질 모순의 한 표현임을 깨달았다. 쉘링은 사고 또한 실존에 매여 있으며 그 본질 모순(반드시 그 자체가 흠 있는 것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쉘링은 이 경이로운 생각을 펼치지는 못했다. 헤겔처럼 쉘링도 그 자신과 그의 철학은 실존 속의 모순이 극복되고 절대적 관점이 얻어진 역사 발전의 끄트머리에 서 있다고 믿었다. 쉘링의 관념론은 실존적 생각을 향한 그의 내적 노력을 압도했다. 관념론적 본질 철학의 닫힌 체계를 처음으로 깨어 부순 사람은 키에르케고르였다. 삶의 불안과 절망에 대한 그의 불꽃튀기는 해석은 실로 실존주의라고 불릴만한 철학을 창도했다. 전후 독일 신학과 독일 철학에 미친 그의 저작의 중요성은 결코 과대평가가 될 수 없다. 학창시절의 마지막 무렵(1905-1906)에 벌써 나는 그의 파고드는 듯한 변증법의 영향 아래에 들어갔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존재에 대한 관념론적 철학에 대한 반동이 또 다른 방향에서 불붙기 시작했다. 헤겔의 불같은 추종자들이면서도 그 선생에 대항해서 나왔으며 "관념론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자들이 관념론의 범주 내에서 이론적 실제적 유물론을 소리높이 외쳤다. 이 부류의 한 사람이었던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그보다도 한 발 더 앞섰다. 그는 관념론의 범주들이나 그것을 유물론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을 배척했으며(그의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반론"을 보라) 그런 철학에 맞서서 한 입장을 주창했다.

이 새로운 입장은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바꾸려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철학 - 그는 철학을 본질의 철학과 똑같이 여겼다 - 은 실재 속의 모순을 은폐하려 할 뿐 아니라 인간 존재, 곧 세계에서의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사회적 모순에 실제로 중요한 것들을 추상화하고자 한다. 이 모순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사회계급간의 투쟁은 관념론이 이데올로기라는 것, 곧 현실의 양의성(ambiguities)을 은폐하는 기능을 가진 개념체계임을 보여준다. (비슷하게 키에르케고르는 본질의 철학이 개인적 실존 속에 있는 양의성을 감추고자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먼저 나는 마르크스의 덕분에 관념론은 물론 종교적, 세속적인 모든 사고체계들이 가진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통찰할 수 있었는데 그 성격이란 힘의 체계(power structure)를 가지게 되면서 오히려 그 때문에 실재의 보다 올바른 조직화가 (무의식적일지라도) 가로막히게 되는 성격을 말한다.

루터가 "제 스스로 만들어낸 신(self-made God)"에 대해 경고했던 것은 철학에 있어서 이데올로기가 갖는 의미에 상응한다. 진리에 대한 새로운 정의는 본질주의의 닫힌 체계를 거부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 진리는 그것을 깨닫는 사람의 상황에, 곧 키에르케고르에 있어서는 개인의 상황에, 그리고 마르크스에 있어서는 사회의 상황에 달려 있는 것이다. 순수한 본질에 대한 앎은 실존 속에 있는 모순이 깨달아지고 극복되는 정도에 따라서 가능한 것이다. 절망(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모든 인간존재의 조건)의 상황에 있어서나, 계급투쟁(마르크스에 따르면 인간 본성의 역사적 조건)의 상황에 있어서나 닫힌 채로 조화된 모든 체계는 비진리다. 그러므로 키에르케고르와 마르크스 양자는 구체적인 심리적 혹은 사회적 상황에 진리를 관련시키고자 한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서의 진리는 주체성으로서 그것은 자신의 절망을 부인하지 않고 본질 세계로부터 쫓겨났음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그 조건 안에서 진리를 뜨겁게 확신한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의 진리의 소재는 계급갈등을 극복해야 한다는 스스로의 운명을 깨닫게 된 계급, 즉 비이데올로기적 계급의 계급적 관심이다. 두 경우를 통하여 우리는 놀랍게도 - 그리스도교적 입장에서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만 - 비이데올로기적 진리를 얻는 최대의 가능성은 가장 깊은 무의미의 영역에서, 가장 깊은 절망을 통하여, 가장 비참한 본성으로부터의 소외 가운데에서 주어진다는 사실을 배운다. "프로테스탄트 원리와 무산계급의 상황(Das Protestantische Prinzip und die proletarische Situation)"이란 제목의 글에서 나는 이러한 생각을 프로테스탄트 원리와 인간의 경계선적 상황을 다루는 그 교의(敎義)에 관계시켜 보았다. 물론 그런 일은 무산계급이란 표현이 유형학적으로 쓰이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때때로 실제의 무산계급보다는 몇몇 유산계급적 집단 - 예를 들면 자신의 계급적 상황을 넘어서서 무산계급들로 하여금 자기의식을 가지게 할 수 있는 경계선적 상황에까지 나아가는 지식인들 - 이 더 무산계급적 유형에 부합되기도 한다. 우리는 무산대중을 마르크스가 사용한 유형학적 개념의 무산계급과 똑 같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보통 이해되기로는 마르크스주의란 "경제적 물질주의"를 뜻한다. 그러나 고의든 아니든 이 같은 어휘 구성은 물질주의라는 말의 양의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만약 물질주의가 오직 "형이상학적 물질주의"만을 뜻할 수 있을 뿐이라면 나는 마르크스주의의 경계선에 설 수 없었을 것이며 또 물질주의와 관념론 둘 다에 대항해 싸웠던 마르크스 자신도 결코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경제적 물질주의가 형이상학이 아니라 역사 분석의 방법임을 기억해야 한다. "경제적"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인간 실존의 모든 측면에 관련된 복합적 요소로서 역사 해석의 유일한 원리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무의미한 주장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물질주의는 역사적 시간 속에서 사회적, 지적 형태가 결정지어지고 변동이 엮어져나가는 데에 있어서 경제체제와 경제적 동기들이 갖는 근본적 중요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경제적 요인과 무관한 채로 사고와 종교의 역사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며 그리하여 관념론이 소홀히 하여 다루지 않았던 신학적 성찰, 곧 인간은 하늘 위에 사는 것이 아니라 땅 위에 산다는 사실(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본질의 영역에 사는 것이 아니라 실존하는 가운데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다. 마르크스주의는 실재의 감추어진 지평들을 열어 보이는 한 방법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 점에 있어서 마르크스주의는 정신분석학과 비교될 만하다. 열어 젖힌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며 어떤 경우에는 파탄을 초래하는 일이기도 하다. 오이디푸스왕의 전설과 같은 고대 그리스의 비극은 이것을 뚜렷이 보여준다. 인간은 자기지신의 실제적 본연이 드러나는 것을 가능한 한 오랫동안 막는다. 오이디푸스왕처럼 자신의 삶을 유지시켜주고 자기의식을 지탱해 주고 있던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파멸되고 만다. 내가 자주 만나보았던,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에 대한 격렬한 배척은 그들을 파탄시킬지도 모르는 열어 젖힘을 피하고자 하는 개인 및 집단들의 시도였다. 그러나 이 괴로운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그리스도교 복음의 궁극적 의미는 인식될 수 없다. 그러므로 신학자는 실존의 양의성(兩義性)을 얼버무리는 관념론이나 퍼트리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드러내 보이기 위하여 할 수 있는 한 자주 이들 수단을 사용해야만 한다. 그는 경계선이라는 그의 위치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 - 그는, 나 자신도 애썼던 것처럼, 정신분석학이 부분적으로 녹슨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비판할 수 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유토피아적이고 교조적 요소를 물리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과학적 타당성이 없는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사적인 이론들을 거들떠보지 않을 수도 있다. 신학자는 형이상학적 물질주의와 윤리적 물질주의에 대해 그것이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든 아니든 간에 저항할 수 있으며 또 저항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는 이들 두 움직임이 이데올로기를 퍼뜨리고 인간실존의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어 준 데 있어서 보여준 효능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폭로하는(unmasking)" 효과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요구와 기대를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것으로서 그것은 역사 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쳐왔고 또 앞으로도 끼쳐갈 것이다. 관념론이 동일 원리 속에서 이루어진 한 신비적이고도 예전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는 반면 마르크스주의에는 예언자적 정열이 있다. 나의 책 "사회주의적 결단(Die Socialistische Entscheidung)"의 중심적 부분에서 나는 마르크스주의가 훨씬 원대한 종교적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보다 진지하게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나는 또 사회주의적 원리에 대해 그것을 유대교-그리스도교적 예언주의의 교리와 비교함으로써 새로운 이해를 얻고자 노력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나를 관념론적이라고 비난할지도 모르며 관념론자들은 나의 물질주의를 들어 불평을 늘어놓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실로 그 둘 사이의 경계선에 서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정치적 반대자를 비방하는 표어가 되어왔다. 내가 마르크스주의의 경계선에 서 있다고 인정한 것은 종교사회주의에 대한 나의 관계에 대한 앞에서 말한 바와 정치적으로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것은 나를 그 어떤 정당에 속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만약 어느 두 정당 사이에 서 있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그런 "사이"는 이 책의 딴 곳에서 쓰여진 것과 다른 뜻으로 설명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정치적 영역에 있어서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정당에서는 결코 충분히 표명되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에 나는 맘속으로 어떠한 정당에도 속하지 않고 또 결코 속해본 적도 없었다.

나는 어떤 정당에도 매이지 않은 한 협력체 - 비록 그것이 다른 정당보다 어느 한 정당에 더 가까운 것일지라도 - 를 열망하며 또 늘 열망해 왔다. 예언자적 정신 속에서 그리고 카이로스의 요구에 부응해서 세워지는 이 단체는 보다 올바른 사회 질서를 위한 선구자가 될 것이다. 고국과 타국 사이에서 타국 땅에서 이 자화상(self-portrait)을 그리는 것도 모든 참다운 운명이 그러하듯이 동시에 자유를 뜻하는 한 운명이다. 고국과 타국 사이의 경계선은 자연과 역사가 그어놓은 단순한 외적 경계선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내적인 두 힘, 인간 실존의 두 가능성 사이의 경계선인 바 그것의 고전적 형식은 저 아브라함이 받은 명령이다. "너의 집 …… 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는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한 약속 때문에 그의 본토와 가족, 종파의 공동체, 그의 백성과 나라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의 본토와 가족, 종파의 공동체, 그의 백성과 나라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의 복종을 요구하는 신은 타국의 신이며 이교적 신들처럼 어느 지역에 매인 신이 아니라 땅 위의 모든 민족들을 축복한다는 역사의 신이다.

예언자와 예수의 신이기도 한 이 신은 모든 종교적 민족주의 - 그가 끊임없이 반대한 것이며 이교도들의 것이며 또 아브라함에 대한 명령에서 거부된 것이기도 한 유대 민족주의 - 를 철저하게 좌절시킨다. 어떠한 고백 그리스도교에서도 이 명령의 의미를 논박할 수는 없다. 그는 그 자신의 나라를 떠나 그에게 지시될 땅으로 가야만 한다. 그는 순전히 초월적인 한 약속을 믿어야만 한다. "본토"의 참 뜻은 개인의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그것은 그의 출생지일 수도 있고 그의 국가공동체일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물리적 이민"이 대답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나라로부터 떠나라는 명령은 지배적 권위와 기존의 사회적 정치적 양식과 결별하고 그런 것들에 피동적으로든 능동적으로든 저항하라는 요구인 경우가 많다. 그것은 로마제국에 대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태도이기도 했던 "정신적 이민"에의 요구다. 타국 땅으로 가는 것은 또한 전적으로 개인적이고 내적인 무엇을 의미하기도 하고 믿고 생각하는 종래의 노선을 떠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며 분명해 보이는 것의 한계선을 넘어서 밀고 나가는 것이나 새롭고도 미지의 길을 열어 젖히는 뜨거운 물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니이체적 표현으로 하자면 그것은 "우리 자녀들의 땅"에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땅"을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시간적 이민이며 지리학적 이민이 아니다. 낯선 땅은 미래 가운데에 놓여 있으며 "현재를 넘어선" 나라다. 그리고 우리가 이 낯선 타국 땅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또한 우리에게 가장 가깝고도 친근한 것마저도 낯설음의 요소를 포함한다는 인식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실존주의가 인간 유한성의 표현으로서 채택한 바의 것이기도 한 세계 속에서 오직 홀로 존재한다는 형이상학적 체험이다. 여러 가지 의미로 볼 때 나는 항상 고국과 낯선 타국 사이에 서 있다. 나는 결코 외국에 대해 배타적으로 결정한 적은 없었으며 "이민"의 두 양태를 모두 경험했다. 나는 실제로 내가 고국을 떠나기 훨씬 전부터 개인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이미 한 "이주민"이 되어가고 있었다. 산천경계나 언어, 전통, 역사적 운명의 공유성으로 보나 조국의 땅에 내가 뿌리박고 있는 것은 항상 너무나 본능적이어서 나는 왜 그것이 특별한 주목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국민교육에 있어서나 지적 창출에 있어서 문화적 민족주의를 과대하게 강조하는 것은 민족적 단결에 대한 불안정의 한 표현이다. 나는 이 같은 과대강조가 경계선(외적이거나 내적이거나)으로부터 밀려온 개인들과 자기자신과 남들에게 스스로의 애국심을 합리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강박적으로 느끼게 개인들 가운데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들 또한 경계선에로 되돌아가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면서부터 항상 독일인임을 철저히 느껴왔기 때문에 충분히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처할 수 없었다. 출생과 운명의 조건을 제대로 물어볼 수 없었다. 우리는 대신 이렇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주어진 이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이 사회와 정치를 평가하고 지적, 도덕적 수양과 문화적, 사회적 삶을 평가하는 척도인가? 그 환경에 태어난 것은 그런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구성되지 않으며 그 까닭은 물음이 그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전제들이 대답으로 그릇되게 취급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의 악순환 속에 갇혀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인 바, 그 악순환이란 우리의 민족적 본질의 힘에 대한 확신의 결여로 판명되어 언젠가는 민족적 삶의 무서운 공허성으로 끝날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민족적 감정으로 칭송되고 있는 그것이다. 나는 그 같은 민족주의적 경향에 대한 반대를 나의 프랑크푸르트 공개교육 강좌 "사회교육(Socialpadagogik)"에서 발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민족주의의 문제는 주로 경제적 정치적 문제다. 나는 그것에 대해 변화된 태도를 보여왔다.

전체주의 국가와 교회의 요구에 관한 한 항목에서 나는 유럽에 있어서의 군사적 전체주의의 원인과 그것이 자본주의의 붕괴에 대해 가지는 관계를 논하였다. 나의 글 "힘의 문제(Das problem der Macht)"는 힘의 의미와 한계를 그것이 존재에 대한 일반적 물음, 곧 존재론에 관련된 것으로 다루고 있다. "사회주의적 결단"에서 나는 민족주의의 인류학적 뿌리와 정치적 결과를 들춰내어 보이고자 했다. 1차 대전의 경험은 나의 입장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민족적 힘에의 의지가 가진 악마적이고도 파괴적인 성격을 드러내었는데 특히 그들의 민족적 원인을 가진 정의 가운데에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전쟁에 열광적으로 뛰어들었던 자들에게 그러했다. 비록 결과적으로 민족주의가 불가피하다고 느끼고는 있지만 (혹은 불가피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나는 유럽 민족주의를 유럽의 비극적 자기파괴의 도구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통찰이 결코 나를 엄격한 의미의 평화주의자로 만들지는 않았다. 평화주의의 어떤 형태는 그 대표자들의 나약한 성격 때문에 내게는 아무래도 의심스럽다. 승리의 개가를 올려서 만족에 빠진 국가들이 제창하는 류의 평화주의는 이데올로기적이고도 위선적인 오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런 국가들의 평화주의는 정직하기에는 너무 실리적이기 때문이다. 형식적 평화주의는 그 의도와는 반대되는 결과로 끝나게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세계에서는 국제평화뿐만 아니라 국내평화까지도 평화를 교란하는 자를 통제하는 힘에 달려있다. 나는 민족적 힘에의 의지를 정당화시키면서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그 배후에 인류의 자기파멸을 막을 수 있는 힘이 틀림없이 있는, 내적 연관을 가진 그 어떤 세력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오늘날 "인류"라는 이념은 공허한 표현 이상의 무엇이다. 그것은 경제적, 정치적 현실이 되었다.

왜냐하면 세계의 어느 부분의 운명은 다른 어떤 부분의 운명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인류 통일에 대한 날로 커가는 인식은 말하자면 모든 나라와 모든 민족이 속하게 되는 신의 나라에 대한 믿음에 담긴 진리를 표출하고 또 고대한다. 인류 통일을 목표로 삼는 것을 부인한다는 것은 고로 신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부인하는 것이다. 나는 아이가 지금 살고 있고, 미국인의 호의를 입고 있는 이 신대륙의 경계선에서 비극적 자기분할에 빠진 유럽의 영상보다는 하나의 인류라는 영상에 더 가까운 한 이상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행복했다. 그것은 모든 국가와 민족의 대표자들이 그 시민이 되어 살 수 있는 하나의 국가라는 영상이다. 비록 여기에서도 이상과 현실의 간격은 무한히 깊고 그 영상은 때때로 어두운 그늘 속에 가리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그것은 "인류"라고 불리는 역사의 최고의 가능성에 대한 일종의 상징이며 또한 그 자체가 현실을 넘어서는 것을 가리키는 무엇 - 신의 나라 - 인 것이다. 그 최고의 가능성 속에서 고국과 타국 사이의 경계선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회고 : 경계선과 제한 정신적 물질적인 인간 실존의 많은 가능한 양태들이 이 책에서 논의되었다. 어떤 것들은 내 전기의 한 부분이면서도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도 있다. 또 상당한 부분은 나의 생애와 사상의 줄거리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취급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논의한 각각의 가능한 양태를 나는 다른 가능성과의 관계, 즉 그들이 서로 대립되는 길이자 서로 상관될 수 있는 길이기도 한 관계성 속에서 논의해 왔다. 이것이야말로 변증법으로서의 삶의 각각의 가능성들은 저절로 경계선에로 흘러들며 또 그 경계선을 넘어 그 가능성들을 제한하고 있던 무엇과 만나게 되는 곳으로 흘러들게 된다. 많은 경계선 위에 서있는 사람은 동요와 불안정과 갖가지 실존의 내적 제한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평화와 안정과 완성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사고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서 왜 내가 열거한 경험과 생각들이 결국 단편적이고 임시적일 뿐인지를 잘 말해준다. 이런 생각들에 명확한 형태를 주고자 한 나의 열망은 내가 신대륙의 풍토 위에 던져졌다는 경계선적 운명에 의해 다시 한 번 꺾어지고 말았다. 그 같은 일을 최선을 다해 완수할 수 있을 것인지는 나이 50이 가까워지자 더욱 불확실한 희망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일이 성취되든 안 되든 인간의 행위의 경계선 - 이제 더 이상 두 가능성 사이의 경계선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인간의 가능성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 곧 영원의 손길에 의해 모든 유한한 것 위에 내려진 제한 - 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영원, 그것의 앞에서는 우리 존재의 한복판마저도 단지 한 변두리이며 우리들의 성취의 최고의 수준까지도 한 조각의 단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역자 후기 20세기가 낳은 세계 최고의 지성,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1886년 독일 브란덴베르그의 슈탈체델에서 태어났으며 베를린 대학, 튀빙겐 대학, 할레 대학 등에서 공부한 후, 베를린 대학, 마르부르그 대학, 푸랑크푸르트 암 마인 대학 등에서 교수로 활약하다가 나찌 정권에 의해 국외로 추방당했다. 1933년 라인홀트 니이버 형제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이민온 그는 유니온 신학교와 콜롬비아 대학을 거쳐 1955년에는 하바드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교수했으며 그로 인하여 하바드 대학 내에 한때 종교부흥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시카고 대학을 마지막으로 1965년 79세의 나이로 별세한 그는 그리스도교적 전통에 서있었지만 한 종교의 폐쇄적 체계에 빠지지 않았으며 그의 철학적 깊이는 서구 정신사를 그 최고봉에 있어서 관철하고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그의 실제에 걸맞는 역사적 평가가 내려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는 아직 그가 생존하고 있던 때부터 그를 주목하는 신학자나 철학자들이 있어 간간이 그의 저서가 번역 소개되었는데 여기에 번역 소개하는 그의 철학적 자서전 "경계선에서(On the Boundary)"는 아직까지 국내에 번역, 출간된 바 없는 것으로 필자가 약 20년 전 대학 졸업 직후 공부삼아 번역했던 것이다. 이번에 낡은 스프링 노오트에서 찾아내어 신학이나 철학을 공부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까 하여 입력, 소개한다. 개인적으로는 틸리히의 온갖 저서들을 젊은 열정으로 탐독하고 번역되지 않은 것들은 원서를 구해 밤을 새워 읽던 시절이 새삼 그립기도 하고 덧없이 흘러간 세월이 안타깝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당시에 심취했던 주제들에 다시 한번 몸을 담그어 보고 당시에 느끼지 못했던 것을 새로운 깊이로 느껴본 즐거운 시간이 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직역이 많은 셈이라 난삽해 보이거나 얼른 의미가 간취되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런 부분은 몇 번 되풀이해서 읽으면 곧 의미가 드러나리라 생각한다. 정리하면서 오역을 더러 바로잡기도 했는데 놓친 오역이 역시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틸리히의 정신적 편력을 개관하는 데에는 크게 부족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참고로 국내에 번역된 틸리히의 다른 번역서들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궁극적 관심 : 현대총서 문화의 신학 : 현대총서 (현대의) 종교적 상황 : 전망신서 새로운 존재 : 현대신서 종교란 무엇인가? : 전망사 프로테스탄트 사상사 : 한국신학연구소 그리스도교 사상사 : 한국신학연구소 문화와 종교 : 전망사 기독교와 세계종교 : 현대신서 조직신학 : 성광문화사  
 

출처: 한국신학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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