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삶을 예배로, 예배를 삶으로"

2026년 6월 21일 주일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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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출 23:14-17, 롬 12:1-2, 요 4:19-24)

설교문

[예배를 되새기며]

운동선수가 매일 반복되는 훈련으로 몸을 만들 듯, 우리의 신앙도 꾸준히 되풀이하는 훈련을 통해 몸에 배어 갑니다. 그래서 저는 적어도 해마다 한 번 이상은 예배에 대한 하늘뜻펴기를 하려고 합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배를 주일 오전 한두 시간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배는 그렇게 가두어 둘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주일에 시작되지만, 주일 하루만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일의 예배가 우리의 월요일을 바꾸고, 화요일을 새롭게 하며, 한 사람의 삶 전체를 거룩하게 빚어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지난해에도 우리는 이런 예배의 의미를 여러 차례 함께 나누었습니다. 작년 2월 9일 하늘뜻펴기에서는 예배의 본질이 무엇이며, 첫 그리스도인들이 성서 읽기, 하늘뜻펴기, 성찬을 통해 신앙인의 정체성을 어떻게 세워 갔는지, 세상과는 다른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어 갔는지 말씀드렸습니다. 작년 11월 23일에는 우리 향린교회 예배의 특징과 소중함을 다루었습니다. 지난주 화요일에 메일 한 통을 받았습니다. 5월 17일 홍콩중문대학교 숭기학원(香港中文大學 崇基學院) 학생들을 인솔해서 우리 교회 주일예배를 드리신 토비아스(Tobias) 교수님이 보내신 것입니다.

"향린교회 방문은 우리 학생들에게 의미 있고 영감을 주었고, 한국 기독교의 다양성을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교회의 역사와 광주항쟁의 기억을 함께 기념하는 교회 창립 73주년을 함께 하게 되어 행운이었습니다. 민중신학의 창시자인 안병무 선생이 세운 교회를 방문하면서 우리 학생들은 한국 전통음악 예배에 대한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The visit to Hyangrin Church was both meaningful and inspiring for our students, helping them to better appreciate the diversity of Christianity in South Korea. We were especially fortunate to join the 73rd anniversary of the church, commemorating both the church's history and the memory of the Gwangju Uprising. Visiting a church founded by the founding father of Minjung theology, Ahn Byung Mu, also gave our students a very special experience of Korean traditional-music worship.)

그 짧은 편지를 읽으며 새삼 감사했습니다. 우리가 지난 세월 오래도록 예배 안에 우리 역사와 문화, 그리고 이 시대의 아픔을 담으려던 그 노력이 교회를 방문한 이들에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 등 역사적 아픔을 겪으며 우리말과 전통을 많이 잃어버리고 또 잊어버려서 지금은 우리 가락과 문화가 도리어 낯설게 느껴집니다. 또한 독재정권의 오랜 억압 때문에 우리 사회의 현실을 냉철하게 비판하고 분석하고 새롭고도 창의적인 실험을 하는 것에도 다소 어려움을 겪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의 예배는 대체로 예배 신학적 성찰 없이 유행에 휘둘리거나, 서양의 것을 무(無)비판적으로 수입하여 사용하는 데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의 우물을 빌려 쓰기보다, 우리가 판 우물에서 생수를 길어 올리려 애써 왔습니다. 저는 그것이 앞으로도 향린교회가 지켜야 할 중요한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삶을 지탱하는 첫 번째 실천입니다. 주일 공동체 예배를 소홀히 할 경우, 인간의 자기애적 성향으로 인해 자기 확신이나 교만에 빠지기 쉽고, 세속적 물결에 휩쓸릴 수 있습니다. 예배를 통한 신앙적 성찰 없이 이루어지는 선교와 활동은 위선과 독단으로 바뀔 수 있으므로 모이는 예배는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일예배를 사모하고 기쁘게 드리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다음 과제는 주일 공동체 예배를 어떻게 주중의 일상에서의 예배로 이어지도록 할 것인가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교회력과 삶의 리듬]

옛 신앙의 백성들은 그 방법을 '절기' 속에서 발견했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절기는 단순히 달력에 표시된 종교행사가 아닙니다. 신앙을 몸으로 기억하게 하는 시간입니다.

제1성서의 주인공들인 유대인의 가정에서 유월절이 되면 아이들이 묻습니다. "왜 오늘은 평소와 다른 빵을 먹어요?" 그러면 부모는 애굽에서 탈출했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는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끄셔서 해방시켜 주셨지."

제1성서에서 절기는 단순히 과거를 기억하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후손들의 몸과 기억 속에 새겨 넣는 교육이었습니다. 그래서 절기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하그'(חג)는 단순한 축제가 아니라, 반복하여 순환하는 삶의 리듬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신앙이 한순간의 감동으로 끝나지 않고, 계절을 따라 반복되는 삶 속에 스며들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무교절은 '기억'의 절기입니다. 누룩을 넣을 새도 없이 급하게 애굽으로부터 탈출해야 했던 그 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억압받던 노예에서 해방의 주체로 거듭나게 되었던 그 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맥추절은 "오늘 내가 흘린 땀방울 하나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합니다. 맥추절의 자리는 노동이 곧 예배가 되는 자리입니다. 수장절은 "한 해의 끝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감사를 드리게 합니다. 인간이 계획했을지라도 이끄시고 완성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배우는 것이지요. 이렇게 신앙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있었던 농경문화 속 절기를 자신들의 신앙과 연결 지어 일상을 거룩하게 하는 장치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절기는 시간을 거룩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교육 방식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교회력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세상 달력을 따라 살아갑니다. 입학식과 졸업식, 승진과 휴가, 연말정산과 실적평가 및 인사고과가 우리의 시간을 결정합니다. 그러나 교회력은 우리에게 세상과는 다른 시간을 선물합니다. 대림절은 기다림을 배우게 하고, 사순절은 절제와 회개를 배우게 하며, 부활절은 절망보다 생명이 크다는 사실을 몸으로 기억하게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시간을 통해 우리를 천천히 빚어 가십니다. 예배는 한두 시간의 사건이 아니라, 한 해의 시간을 따라 우리를 새롭게 만드는 하나님의 훈련장입니다.

특히 우리 교단과 우리 교회가 기억하여 지키는 역사와 사회적 사건들은 개인적 신앙이 우리 사회와 역사 안으로 뿌리내리도록 도와줍니다. 오늘은 민족화해주일입니다. 우리는 이날을 보내며 아직도 우리를 옭아매는 분단 체제의 모순을 돌아보고, 어떻게 정전협정을 넘어 평화협정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다시 묻게 됩니다.

한편 오늘은 우리 향린공동체가 정한 '성정의 주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늘뜻펴기를 마칠 때 향린공동체 교회가 함께 작성한 기도문을 우리 모두 한목소리로 낭송합니다. 이런 시도가 예배가 주일 하루에 그치지 않고 일상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모든 노력의 하나입니다.

1년의 주기를 신앙의 주기로 삼아 삶이 곧 예배가 되도록 조율한다면, 하루하루를 예배로 만드는 길은 아침기도와 저녁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 하루를 마치는 것입니다. 이슬람교 신자들인 무슬림은 하루에 다섯 번, 동틀 때, 정오, 늦은 오후, 일몰 직후, 취침 직전 메카에 있는 카바 신전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을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또한 신심이 깊은 불자들은 삼보(三寶)에 귀의해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을 끊기 위해 3배를 올리거나, 중생이 살아가는 삼세 동안 끊이지 않고 반복되는 번뇌를 지우기 위해 108배를 하거나, 과거나 현재, 미래에 출현하는 모든 부처님을 생각하며 3,000배를 올리는 몸의 수행을 통해 신앙이 몸에 배도록 합니다.

몸의 수행이 없는 종교는 없습니다. 우리 또한 아침저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몸을 바로 하고, 숨을 고르며, 머릿속 잡념을 비우며 하나님과 하나 되는 기도, 나를 하나님께 맡기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과 소명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훈련과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일예배가 주일에만 머물지 않고 일상으로 이어지게 하는 길입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수가성 여인과 만난 예수님은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이 대화 속에서 우리가 먼저 배우는 것은 예배가 어느 한 장소에만 머물러 드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느 때든지 모든 장소에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에게는 장소에 구애됨이 없다는 것이지요. 장소에서 시간으로의 전환은 신학적으로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공간 중심의 예배는 배타적이기 쉽습니다. 이곳이냐 저곳이냐, 우리 성소냐 너희 성소냐, 둘 중 하나만 택해야 하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다릅니다. 어떤 공간 안에서든지 새로운 시간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할 때가 온다."는 예수의 선언은 예배 자체의 성격을 바꿉니다. 예배는 이제 '어디서'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와 '언제'의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예수는 말합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νῦν ἐστιν). 미래만이 아닙니다. 이미 지금, 이 우물가에서, 이 대화 안에서 그 새로운 예배의 시간이 열리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유대인 남성 사이의 경계선 위에서, 오랜 반목의 역사를 가로질러, 예수는 지금 그 '때'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주일예배만이 아니라 모든 때를 새로운 예배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 새로운 때의 예배는 어떤 예배일까요?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4:23) 오늘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영(πνεῦμα)'과 '진리(ἀλήθεια)', 이 두 단어가 짝을 이루어 등장합니다.

영으로 드리는 예배는 무엇일까요? 그에 대한 답은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존재론적 진술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 장소에 묶여 계시지 않습니다. 그리심산에 한정되지 않으시고, 예루살렘 성전에 갇혀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방식 자체가 영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 또한 영적이어야 합니다. 제도와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 자체를 향하는 예배, 그래서 오늘 수가성 여인처럼 그곳이 어디이든지 인생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 바로 그것이 영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또 무엇일까요? 진리는 요한복음의 핵심 단어 중 하나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진리는 '참된 이치'라고 하는 명제적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계시(啓示)인 예수, 곧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입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2)고 선언하며, "진리의 영이 오셔서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16:13)이라고 하시는데, 여기서 진리는 모두 예수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용례에서 진리는 관계적이고 인격적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예수 안에서 속임 없이, 예식의 껍데기 뒤에 숨지 않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전 존재를 드러내놓고 예배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공동 번역 성경은 이 구절을 "영적으로 참되게"로 번역했습니다. 그 번역이 우리가 말하려는 한 측면을 잘 보여줍니다. 영(靈)과 진리(眞)는 서로 분리된 두 조건이 아니라 함께 예배의 본질을 이루는 한 쌍이기 때문입니다. 진실함 없는 영성은 공허하고, 영성 없는 진실은 차갑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의 사마리아 여인은 이 진리를 몸으로 살아낸 첫 증인입니다.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난 뒤,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갑니다.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4:29) 그녀는 주일예배를 드리고 나서 일상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와의 만남 자체가 그녀의 삶 전체를 바꾸었고, 그 바뀐 삶이 곧 선교가 되었습니다. 물동이를 버렸다는 것은 다시는 목마를 일 없는 생수를 얻었다는 것이고, 더 이상 이전 방식으로 살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이렇게 삶 자체가 달라집니다.

예수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도전으로 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 산이냐 저 산이냐'를 묻고 있습니까. 어느 교단이냐, 어느 양식의 예배냐, 어느 공간이냐, 이런 물음들이 예배의 본질을 가릴 때, 예수의 말씀이 다시 들려옵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주일 오전 한두 시간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월요일 아침에도 계속됩니다.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할 때, 가족들에게 사랑의 말을 전할 때, 약한 사람의 편에 설 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양심을 지킬 때, 우리는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일예배는 물론 예배당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예배는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시작해 우리의 삶이 펼쳐지는 이 세상 속에서 완성됩니다.

[삶이 예배로, 예배가 삶으로]

마지막으로 바울 사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겠습니다. 우선 오늘 바울은 명령하지 않습니다. 권면합니다. 파라칼로(παρακαλῶ), 이 단어는 지시가 아니라, 곁에 다가와 간곡하게 청하는 몸짓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권면의 토대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이 자비(οἰκτιρμῶν)는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 펼쳐진 하나님의 구원 역사 전체를 한 단어로 압축한 것입니다. 죄인을 용서하시고, 죽음 속에서 생명을 여시고, 버림받은 자를 품으시는 그 자비입니다.

헌신의 동기는 여기에 있습니다. 율법의 강제가 아니라 은총에 대한 응답, 두려움이 아니라 감사, 의무가 아니라 사랑. 바울이 먼저 하나님의 자비를 말하는 것은, 우리의 헌신이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려서 관계를 유지하는 거래가 아님을 명백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미 사랑을 받은 자가, 그 은총의 풍성함에 이끌려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예배의 출발점입니다.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왜 몸일까요? 우리는 몸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몸으로 일하고, 몸으로 밥을 먹고, 몸으로 아이를 안고, 몸으로 눈물을 흘리고, 몸으로 이웃의 손을 잡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만이 아니라 우리의 몸을 원하십니다. 예배는 한 시간의 종교행사가 아닙니다. 내 손이 하는 일, 내 입이 하는 말, 내 발이 걸어가는 길, 내 눈이 바라보는 방향까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몸을 드린다는 것은 삶을 드린다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는 또 말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마십시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자기 틀 속에 넣으려 합니다. 더 많이 가져야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더 빨라야 성공한다고 말합니다. 남보다 앞서야 가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복음은 묻습니다.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을 닮아가고 있느냐?" 예배는 세상이 만들려는 저 사람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빚으시는 이 사람이 되는 훈련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십시오." 마음이 바뀌면 삶이 바뀝니다. 삶이 바뀌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바뀝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뜻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변화해야 할 목적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기 위해서"입니다. 분별(δοκιμάζειν, 도키마제인)은 금속을 제련하여 순도를 시험하는 용어입니다. 무엇이 진짜인지, 무엇이 가짜인지를 검증하는 행위가 분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는 것은 고요히 앉아 계시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선택의 갈림길 앞에서, 관계의 복잡함 속에서,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인지 아닌지를 민감하게 가려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분별은 마음이 새로워진 사람에게 열리는 능력입니다. 이 시대의 풍조에 물든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뜻과 세상의 논리를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고, 자기 몸을 드리는 헌신 속에서, 마음이 날마다 새로워지는 사람은 점차 더 예민한 분별의 감각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바울은 세 가지 형용사로 하나님의 뜻을 묘사합니다. 그것은 선하시고(ἀγαθόν), 기뻐하시고(εὐάρεστον), 완전하시고(τέλειον)입니다. 이 세 단어는 단순히 하나님의 뜻이 좋다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善)은 도덕적 올바름을, 기뻐하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적 일치를, 완전함은 목표에 이른 성숙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얽매는 규정이 아니라, 우리를 온전히 피어나게 하는 생명의 방향입니다. 그 뜻 안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가장 자신다워집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로마서 12장 1-2절은 매우 짧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신앙의 전 구조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시작하여(은혜), 몸의 헌신으로 나아가고(응답), 세상의 논리를 거부하고(비순응), 내면의 변화를 받아(성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지혜), 삶으로 나아가는(선교) 순환의 고리가 담겨 있습니다.

주일의 예배와 한 주간의 삶은 하나의 흐름입니다. 주일에 함께 모여 하나님을 만나고, 그 만남이 가슴 안에 새겨져 월요일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직장에서의 성실함, 가정에서의 온유함, 이웃을 향한 공정함, 이것이 몸으로 드리는 산 제물의 구체적 형태입니다.

주일예배와 한 주간의 삶이 하나의 순환고리가 되어 지속적으로 훈련할 때 우리의 신앙은 좀 더 세밀해지고 단단해지고 자연스러워질 것입니다. 중국의 고전 『장자』에는 '포정해우(庖丁解牛)'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문혜군이 한 요리사(庖丁)가 소를 잡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칼이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고, 리듬은 한편의 음악 연주와 같았습니다. 너무도 아름답고 자연스러워 왕이 감탄하며 말했습니다.

"아! 훌륭하구나. 기술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

그러자 요리사(庖丁)는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제가 추구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도(道)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에는 소 전체만 보였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난 뒤에는 온전한 소는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신묘함으로 소를 대하고,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기관의 지각 능력이 활동을 멈추고, 대신 신묘한 작용이 움직이면 자연의 결을 따라 근육과 뼈 사이에 있는 커다란 틈 사이로 칼을 움직이지요. 솜씨 좋은 요리사는 보통 일 년에 한 번은 칼을 바꾸는데 살코기를 베기 때문이고, 보통의 요리사는 한 달에 한 번씩 칼을 바꾸는데, 뼈를 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칼은 19년이 되었고, 그동안 잡은 소가 수천 마리인데도 칼날은 여전히 날카롭습니다.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칼날 끝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가지고 틈이 있는 사이로 들어가기 때문에 넓고 넓어서 칼날을 놀리는 데 반드시 남는 공간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 때문에 19년이 되었는데도 칼날이 마치 숫돌에서 막 새로 갈아낸 듯합니다. 비록 그러하지만 매양 뼈와 근육이 엉기어 있는 곳에 이를 때마다, 저는 그것을 처리하기 어려움을 알고, 두려워하면서 경계하여, 시선을 한 곳에 집중하고, 손놀림을 더디게 합니다. 칼을 매우 미세하게 움직여서, 스르륵 하고 힘줄을 자르면 고기가 이미 뼈에서 해체되어 땅으로 후루룩 떨어집니다."(『莊子』의 「養生主」 중에서 각색)

이 이야기는 단순히 뛰어난 기술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반복된 훈련이 몸을 바꾸고, 몸에 밴 훈련이 한 사람의 삶을 바꾸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예배도 그렇습니다. 주일 한 번으로 사람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매주 하나님 앞에 서고, 매일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고, 날마다 기도로 마음을 다듬는 사람은 어느 순간 신앙이 머리에서 몸으로 내려옵니다. 용서가 몸에 배고, 감사가 몸에 배고, 겸손이 몸에 배고, 사랑이 몸에 배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는 억지로 그리스도인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먼저 복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예배가 삶이 되고, 삶이 예배가 되는 길입니다.

삶이 예배가 되고, 예배가 삶이 된다는 것은 거창한 이상이 아닙니다. 매일 아침 자기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조용한 결단, 이 시대가 조장하는 논리에 밀려가지 않으려는 작은 저항, 마음이 새로워지기 위한 꾸준한 노력, 그것이 쌓여 한 사람의 신앙이 되고, 그 신앙이 모여 공동체가 되고, 그 공동체가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빛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도 여전히 바울 사도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울리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믿음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으십시오.

세상 풍조에 휩쓸리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십시오.

여러분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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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이성 중심 신학에서 영성신학으로

신학의 형성 과정에서 영성적 차원이 있음을 탐구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인수 교수(감신대, 교부신학/조직신학)는 「신학과 실천」 최신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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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신학, 세계 신학의 미래 여는 잠재력 지녀"

안병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하엘 벨커 박사(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명예교수, 조직신학)의 특집논문 '안병무 신학의 미래와 예수 그리스도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