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시편 36:5-9, 에베소서 5:1-2, 8-9, 요한복음 1:1-5
설교문
어느덧 주현절의 한가운데에 이르렀습니다. 주현절은 어떤 절기입니까? 주현절(主顯節, Epiphany)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신 것을 기억하고 묵상하는 절기입니다. 주현절은 어둠 속에서 빛을 기다리는 절기가 아닙니다. 주현절은 빛이 이미 나타났음을 기뻐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주현절의 첫 문장은 단순합니다. "빛이 왔다."
이 말씀이 바로 요한복음 1장 5절 상반절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여기서 '비치다'(φαίνει)라는 동사의 시제는 현재형입니다. 빛이 지금도 "비치고 있다"(공동번역), 혹은 계속해서 "빛나고 있다"(새한글성경)는 뜻입니다. 주현절은 아직 오지 않은 빛을 애타게 기다리는 절기가 아닙니다. 이미 세상에 와서 지금도 비추고 계신 빛을 다시 바라보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아주 이상한 말이 이어집니다. 요한복음 1장 5절 하반절입니다.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성서에서 가장 슬픈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만약 제게 성서에서 가장 슬픈 문장을 하나 뽑으라 하신다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이 구절을 고를 것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라는 선언 바로 뒤에 이어지는 이 말,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깨닫지 못하다'(οὐ κατέλαβεν)는 과거 완료형입니다. 빛은 지금도 계속 비치고 있는데, 어둠은 그 빛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멈추지 않고 비치시는데, 어둠은 그 빛을 받아들이지도, 알아보지도 못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빛이 비치고 있는데, 어떻게 어둠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까? 어둠은 빛과 대등한 실체가 아니라, 그저 빛의 결여가 아닙니까? 악이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선의 결핍인 것처럼 말입니다.
어둠은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낼 능력이 없습니다. 어둠은 독립적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요한은 마치 어둠이 빛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일까요? 빛이 약해서일까요? 아니면 빛이 패배했기 때문일까요?
요한이 말하는 어둠은, '빛을 거부하는 인간의 상태'입니다. 어둠 그 자체가 힘을 가져 빛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에 머무르기를 선택한 인간이 빛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악은 실체가 아니지만, 인간의 의지는 선을 떠날 수 있고 그 떠남(defectio) 자체가 악이 되듯이, 어둠은 실체가 아니지만 인간의 의지는 빛을 거부할 수 있고 빛으로부터 이탈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눈이 병들면 마치 빛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문제는 빛이 아니라 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빛은 여전히 비치고 있지만, 눈이 그 빛을 아프게 느끼거나, 왜곡되게 인식하거나, 외면해 버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어둠이 이것입니다. 요한이 바라본 인간의 조건의 이것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어둠은 악한 실체다."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빛이 비치고 있는데도, 사람들이 그 앞에서 눈을 감는다."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1장 5절은 악의 실체를 설명하는 구절이 아니라, 인간 비극의 조건을 드러내는 구절입니다. 어둠이 강해서 빛을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둠은 빛이 없을 때만 존재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빛을 거부하는 이유는 빛이 너무 밝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오랫동안 어둠에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은 세상을 미화하지도, 과장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말합니다. "빛은 왔다. 그러나 모두가 그것을 반긴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요즘 세상이 너무 어두워서요." "하나님이 잘 느껴지지 않아서요." 그런데 요한은 조용히 질문의 방향을 바꿉니다. "정말 빛이 없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편안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어둠은 편안합니다. 숨길 수 있고,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변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빛은 불편합니다. 드러나고, 질문을 받고, 달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요한복음 3:19, 공동번역)
우리는 또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이 정도면 그냥 살 만하지요." "괜히 건드리지 않는 게 편하잖아요."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어둠이 편안한 이유는 그곳이 좋은 곳이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곳에 오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방에 오래 있으면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점차 그 어둠에 익숙해집니다. 편안해집니다. 그러다 갑자기 불을 켜면 눈이 아픕니다. 그때 우리는 말합니다. "불 꺼요. 눈 아파요." 문제는 불빛이 아닙니다. 눈입니다. 눈이 아직 어둠에 익숙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대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굽은 존재'(homo incurvatus in se)입니다. 자기의 중심으로 말려 들어간 인간에게 빛은 위로가 아니라 침입입니다. 그래서 빛이 왔는데도 사람들은 어둠을 사랑합니다. 빛이 비치는데도 사람들은 빛을 등집니다.
어느 날 밤,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경건한 바리새인이었고 유대인의 지도자였습니다(요한복음 3:1). 그가 "밤에"(요한복음 3:2)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자신의 방문이 대낮처럼 드러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적 어둠 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라고 말씀하셨지만, 니고데모는 그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겠습니까?"(요 3:4) 하고 되묻기만 했습니다. 끝내 거듭남을 이해하지 못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서에서 가장 사랑받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이 말씀 뒤에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목적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 구원하려 하심이라고 하시면서,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3:17-18). '앞으로'가 아니라 '이미' 정죄를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빛은 이미 왔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요 1:9)이 밝게 비추고 있습니다. 어떤 조건도 예외도 없습니다. 이것이 요한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정죄의 출발점은 빛의 부재가 아닙니다. 빛의 현존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습니다. 여기서 요한은 매우 급진적인 진단을 내립니다. 사람들이 어둠에 머무는 이유는 무지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약해서도 아닙니다. 무엇입니까? 어둠을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헬라어로 '사랑하다'(ἠγάπησαν)는 의지적 선택을 포함한 사랑입니다. 즉,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기에 어둠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더 편하다고 여겼기에 어둠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요한이 말하는 죄입니다. 요한복음은 죄를 도덕적 실패로 보지 않습니다. 사랑의 왜곡으로 정의합니다.
사람들이 어둠을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라고 요한이 말합니다. 여기서 악은 단순히 흉악한 범죄를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는 삶, 하나님 앞에 서기를 거부하는 삶, 빛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등 돌리는 삶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말씀하신 '정죄'가 무엇인지 분명해졌습니다. '정죄'(κρίσις)는 '형벌' 이전에 '드러남'입니다. 정죄는 하나님이 사람을 벌하시기 위해 내리신 판결문이 아닙니다. 빛 앞에서 드러난 사람의 선택입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라는 말씀의 뜻은 "사람들이 심판받는 이유는 이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이렇게 마무리하십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요 3:20-21)
사람들은 흔히 "빛이 무서워서 못 간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말합니다. "빛을 미워하기 때문에 가지 않는다"라고. 그것이 진실입니다. 빛은 위협이 아니라 거울입니다. 빛은 사람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드러냅니다. '드러나다'(ἐλεγχθῇ)라는 말은 폭로이면서 동시에 깨닫게 함입니다. 빛은 망신을 주기 위해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치유를 시작하기 위해서 비춥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예수님은 사람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나누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빛을 피하는 사람'과 '빛으로 오는 사람'으로 나누십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라고 하셨습니다. 빛으로 오는 사람이 진리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따른다는 것은 완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진리를 따른다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빛으로 오는 사람은 자기 의로움을 증명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삶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이루어졌음을 고백하려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빛으로 오는 사람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방어하지도 않습니다. 빛 앞에 선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다 드러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안에도, 그리스도교의 역사 속에도 어둠이 편했지만 아파도 빛으로 나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높은 나무 위에 숨어 있는 것이 편했습니다. 보이지 않으면 책임질 필요도 없고 상처받을 일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를 부르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그는 내려옵니다. 부끄럽고, 두렵고, 아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 이후 삭개오는 말합니다. "주님, 내 삶이 달라졌습니다." 빛은 그를 더 부자로 만들지 않았지만, 자유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도 같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젊은 시절 쾌락과 성공의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행복'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깨달았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내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도 몰랐다." 빛으로 나오는 과정은 불안했고, 흔들렸고, 아팠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했습니다. "진리는 나를 괴롭혔지만, 거짓은 나를 잠들게 했을 뿐이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회복된 사람들은 말합니다. 어둠 속에서 빛으로 나온 사람들은 말합니다. "예전이 더 편하긴 했어요. 하지만 지금이 살아 있는 느낌이에요." 빛의 세계는 늘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참 기쁨이 있습니다. 기쁨이 무엇입니까? 기쁨이란 아무런 문제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더 이상 숨지 않아도 되는 상태입니다. 더 이상 숨기지 않아도 되는 상태입니다. 더 이상 연기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입니다. 강한 척, 아닌 척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했습니다. 성서에서 가장 슬픈 문장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은 결코 절망의 선언이 아닙니다. 이 문장은 오히려 가장 고귀한 희망의 선언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도, 지금도 비치고 있는 '빛의 끈질긴 사랑'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깨닫지 못하지만 지금도 빛이 어둠에 비칩니다. 어둠은 여전히 제 안으로 숨어 들어가지만 지금도 빛은 절망하지 않고 어둠을 비춥니다. 이 끈질긴 사랑이, 이 집요한 은혜가, 이 변치 않는 생명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5절의 말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를 우리는 이제 거꾸로 읽어야 합니다. "어둠이 깨닫지 못해도 빛이 계속 비추시더라!" 교우 여러분, 이것이 복음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빛으로 세상에 나타나신 주님을 기리는 주현절에 들어야 할 기쁜 소식이 아니겠습니까.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어느덧 주현절의 한가운데에 이르렀습니다. 주현절은 어둠 속에서 빛을 기다리는 절기가 아닙니다. 빛은 이미 왔습니다. 빛은 지금도 환히 비추고 있습니다. 주현절은 빛이 이미 나타났음을 기뻐하는 절기입니다. 이와 같은 주현절은 오늘 우리를 이렇게 초대합니다. "빛은 이미 와 있습니다. 조금만 눈을 떠보지 않겠습니까?"
눈이 부셔도 괜찮습니다. 조금 아파도 괜찮습니다. 빛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 비추는 게 아니라 치유하고 회복하고 살리기 위해 비춥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 어둠 속에 숨지 않고, 빛을 향해 등 돌리지 말고, 용기를 내어 한 걸음만 더 빛 쪽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많이도 아닙니다. 교우 여러분, 한 걸음만 더 빛을 향해 나아가실 수 있겠습니까? 그 귀한 한 걸음을 옮기는 데 주님이 도우시고 힘주시고 인도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