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이사야 9:1-7, 요한1서 1:1-4, 누가복음 1:26-38
설교문
성서에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실려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두 명의 여성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임신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 매우 '비정상적'인 것이었습니다. 한 명은 도저히 임신이 불가능한 나이였고, 다른 한 명은 너무도 나이 어린 소녀였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누가복음서를 보니, 엘리사벳은 임신한 사실을 알고 다섯 달 동안이나 숨어 있었습니다.(누가복음 1:24)
마리아 역시 크게 놀랐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누가복음 1:28, 30)라고 했을 때 마리아는 이를 기이히 여겼습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마리아는 겨우 12~13살 된 소녀였습니다. 오늘날 중학생 정도의 나이에, 요셉과는 아직 정혼한 상태에서 그런 엄청난 일을 예고 받았으니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겠습니까. 천사는 마리아의 친척인 늙은 엘리사벳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임신했음을 알려주면서,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다"(누가복음 1:37)라고 일러줍니다.
마리아는 지금 무언가 엄청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했습니다. 그리고 대답했습니다. 한 어린 소녀의 담대한 응답입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누가복음 1:38)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새번역)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성탄 이야기를 익숙하게 알고 있습니다. 많이 들어서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칫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다 정해 놓으셨고, 마리아는 그 계획에 사용된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성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수태고지(受胎告知)했을 때, 그 고지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완성된 결과의 통보가 아니라, 하나님의 초대였습니다.
마리아는 로봇이 아니었습니다. 선택권이 없는 도구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두려웠고, 당황했으나, 질문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은 불신의 질문이 아닙니다. 현실을 아는 사람의 정직한 질문입니다. 그 질문 앞에서 천사는 말합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을 것이다." 말이 쉽지, 이건 마리아의 인생 전체를 뒤흔드는 말입니다. 평범한 일상이 무너질 수도 있고, 사람들의 시선과 오해를 감당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을 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내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말은 체념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는 운명에 대한 포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적극적인 응답입니다. 하나님의 초대에 대한 자발적인 수락입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이 혼자서 밀어붙인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만으로 이루어진 하늘의 쇼가 아닙니다. 성탄은 하나님의 초대와 한 용감한 인간의 "예"(yes)가 만난 자리에서 시작된 구원의 대역사입니다.
이 이야기는 마리아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각자의 삶 속으로 들어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초대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관계의 회복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용서라는 어려운 부르심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가보지 않은 길로 초대하며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 초대는 늘 반갑지만은 않습니다. 대부분은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고, 모른 척하고 싶은 초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혹 다른 사람이면 안 될까요?' '조금 더 준비되면 그때 하겠습니다.' 마리아도 그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성탄의 기적이 이루어졌습니다.
누가가 전하는 놀라운 성탄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저는 한 춤이 떠오릅니다. 바로 '탱고'(Tango)라는 춤입니다. 탱고는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나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와 같은 항구 도시, 이민자 밀집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중심이 아니라 주변부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럽에서 건너온 가난한 이민자들, 아프리카계 후손들, 사회적으로 밀려난 사람들, 그리고 집과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 바로 그곳이 탱고의 출발점입니다.
탱고라는 춤은 혼자 출 수 없는 춤입니다. 무조건 두 사람이 필요합니다. 한 사람이 다가와 초대하고 다른 사람이 그 초대를 수락할 때 비로소 춤이 시작됩니다. 이때 중요한 건 힘이나 기술 혹은 화려함이 아니라 신뢰와 경청과 응답입니다. 좋은 탱고에서 리드(lead)는 강요하지 않고 제안합니다. 팔로우(follow)는 수동적이지 않고 창조적으로 응답합니다. 그래서 탱고는 누가 더 많이 움직였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서로를 잘 느끼고 반응했는가로 평가됩니다. 이것이 탱고가 '초대와 응답의 춤'이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
탱고에서 중요한 건 미리 동작을 다 아는 게 아닙니다. 앞으로 어떤 스텝이 나올지 완벽하게 예측하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건 단 하나입니다. 상대의 리드를 신뢰하는 것, 그리고 그 순간순간에 몸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성탄은 바로 이런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마리아에게 설계도를 먼저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을 미리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손을 내미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땅끝까지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내민 그 손을 잡았습니다. 두렵고 떨렸지만 담대하게 그 손을 잡았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그 순간, 놀라운 춤이 시작되었습니다. 여태껏 그 누구도 보지 못한 가장 아름다운 춤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신-인간의 춤 이름이 바로 성탄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 각자의 삶 앞에서 손을 내미십니다. 어디로 가는지 다 설명하지 않으시고, 그 길이 어떤 길인지 다 말해 주시지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말씀하시며 그리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나를 믿고, 나와 함께 이 길을 걸어보지 않겠니?'
아르헨티나 탱고 〈Por Una Cabeza〉는 많은 영화에 사용된 음악입니다. 오늘 특주 시간에 '카스타냐 탱고'가 들려주신 곡입니다. 우아하고, 낭만적이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묘하게 긴장감이 흐릅니다. 한 발짝 잘못 디디면 균형이 무너질 것 같은 불안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긴장 속에서 탱고는 가장 아름다워집니다. 〈Por Una Cabeza〉의 선율처럼 성탄은 부드럽지만, 절대 가볍지 않습니다. 아름답지만, 위험을 감수하는 춤입니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물러서지 않았고, 그의 "큰 예"(Big Yes) 위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이번 성탄에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내미시는 손을 잡아보시지 않겠습니까? 그 손을 잡는 순간,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일이 시작될 것입니다. 마리아처럼 '하나님, 다 이해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당신을 신뢰합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내 삶에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우리가 고백할 때 성탄은 2천 년 전 어느 과거의 기념일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에서 다시 일어나는 놀라운 기적이 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바로 이런 성탄의 기적이 일어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