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사 52:1-7, 롬 12:14-21, 마 5:38-48)
설교문
[종교체험]
어떤 종교인에게는 자기 존재를 뿌리로부터 흔들리게 하는 체험이 있습니다. 매우 두렵고 떨리는 경험이지만, 한편으로 너무나 황홀하고 매혹적입니다. 그 경험은 한 사람의 생애를 뒤바꿔놓고, 평생 그 사람의 삶을 지탱하게 합니다. 위기가 찾아왔을 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을 때, 내면을 습격한 불안으로 잠 못 이루고, 바닥 모를 허무에 빠질 때,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자기편이 없다고 생각될 때도, 이 체험은 그 사람을 깊은 늪에서도 버틸 수 있도록 해줍니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그 한 번의 경험으로 제 인생은 목표를 찾았고, 어렵고 힘들 때도 그때를 떠올리며 잘 견뎌왔습니다.
그런데 보통 이런 경험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불현듯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에, 똑같은 경험을 반복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때 느꼈던 감정, 다짐, 원초적 느낌을 재현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살짝 그 마음에 다가가도록 도울 수 있는 것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바로 음악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명곡이 있지만, 그 첫 종교경험을 했을 때의 마음에 닿도록 저를 흔드는 몇 개의 곡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피곤하고 지칠 때, 저는 저를 찾아주셨던 주님으로부터 생기를 얻기 위해 종종 그런 음악들을 찾아 틉니다. 언제 들어도 정말 질리지 않는 첫 번째 곡은 이탈리아의 영화 음악 작곡가인 엔니오 모리코네(Ennio Morricone)의 가브리엘 오보에입니다. 1986년에 개봉된 영화 미션에서 가브리엘 신부 역을 맡았던 제레미 아이언스가 낯선 선교지의 숲에서 과라니족의 마음을 얻기 위해 조용히 연주했던 곡이지요. 잠깐 들어 보실까요?
또 하나의 노래는 한국 가수의 곡인데, 이미 세상을 떠난 신해철 씨의 곡입니다. 신해철은 대학에서는 철학을 전공하고, 대학가요제를 통해 음악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 매우 다양한 음악 장르를 실험하였고, 작사, 작곡, 악기 연주는 물론 프로듀싱과 엔지니어링 및 음악 작업을 위한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까지 한 만능 뮤지션이었습니다. 세상의 인습에 저항하면서 거침없이 말도 잘하고 토론에도 능했기 때문에 손석희 씨가 진행했던 MBC 백분 토론에도 곧잘 등장하곤 했지요. 신해철의 노래는 일반 대중가요에서는 보기 드문, 철학적 노랫말이 많이 나옵니다만 제가 좋아하는 이 곡은 매우 평범한 가사임에도 제게는 매우 큰 울림이 있었습니다. 이 노래도 조금만 들어 보겠습니다.
"산책을 하고 차를 마시고 책을 보고 생각에 잠길 때 요즘엔 뭔가 텅 빈 것 같아 지금의 난 누군가 필요한 것 같아 친굴 만나고 전화를 하고 밤새도록 깨어 있을 때도 문득 자꾸만 네가 생각나 모든 시간 모든 곳에서 난 널 느껴 내게로 와 줘 내 생활 속으로 너와 같이 함께라면 모든 게 새로울 거야 매일 똑같은 일상이지만 너와 같이 함께라면 모든 게 달라질 거야"
"난 내가 말할 때 귀 기울이는 너의 표정이 좋아 내 말이라면 어떤 거짓 허풍도 믿을 것 같은 그런 진지한 얼굴 네가 날 볼 때마다 난 내 안에서 설명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져 네가 날 믿는 동안엔 어떤 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야 이런 날 이해하겠니"
"일상으로의 초대"라는 노래의 가사를 잘 들어 보면, 사랑에 빠진 한 사람의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한 사람을 떠올리고 있는데, 그는 자신이 어떤 말을 해도 귀를 기울이며 들어 주었던 사람이고,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면 자신도 모르게 자기 내면에 존재하는 힘센 기운이 솟아나게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오면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달라질 것 같은 기분이고, 그가 자신을 믿어 준다면 어떤 일도 해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마치 이 노래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큰 실망과 좌절에 빠져 있던 제자들, 특히 베드로가 느꼈을 법한 그 어떤 마음을 노래하는 듯 들렸고, 저의 청소년, 청년 시절에 예수는 바로 제게 이런 분이었습니다.
저는 비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가정의 분위기를 따라 살았다면 유교적 상식을 가지고 일상을 소소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예수를 만난 뒤로 저는 끊임없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씨름하며 살았습니다. 스님들이 평생을 붙들고 살아가는 화두처럼, 참된 사람이 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참사람이 되기 위해 예수를 따르기로 했는데, 그런 결정이 내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하고는 무슨 차이가 나는가를 물었습니다. 목사가 되어서도 이 질문은 여전히 계속됩니다.
종교적 질문은 사실 답이 없습니다. 답이 없기에, 종교적 질문에 너무 쉽게 결론을 내는 순간 오히려 진리가 왜곡되거나 겉핥기에 그치고 맙니다. 빨리 끓는 냄비가 금방 식어버리듯이, 진리를 살아낸다는 것은 정답 없는 삶 속에서 끊임없이 묻는 것입니다. 계속 묻다 보면 더 깊고 넓고 큰 물음 속에서 이전의 물음이 해소되는데, 바로 이런 경험을 통해 인격이 무르익고, 삶의 폭과 깊이가 더해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종교인의 삶입니다.
[진지하게 예수님 생각하기]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예수를 통해 그런 길을 발견했고, 또 발견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하나님을 조금씩 알아갑니다. 예수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불렀는데, 예수의 아빠 하나님은 그를 키웠던 유대교 종교 전통이나 문서 자료에서도 발견할 수 없던 새로운 하나님이었습니다. 예수 당시 어떤 나라를 막론하고 대체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이나 '하나님'의 일반적 이미지는 자연의 다른 모든 힘들을 압도하고 통제하는 강력한 힘의 이미지입니다. 출애굽기의 열 가지 재앙이나 홍해의 기적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자연과 역사를 넘어서는 초자연적 능력의 화신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의 아빠 하나님은 친밀함과 따뜻한 아빠, 어쩌면 갓난아기를 대하는 어머니의 이미지에 훨씬 가깝습니다.
예수는 어떤 조건도 달지 않고 사랑 그득한 눈길과 손길로 보호하고 함께 아파하고 울어주는 아빠 하나님을 믿었고, 그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우선 예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연결하고, 고통당하고 소외당하는 자들의 이웃이 되어 주며 경계 없는 사랑, 계속해서 담을 허무는 사랑을 보여줍니다. 선생인데도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며, 나를 따르는 사람은 이렇게 서로 섬기며 사랑해야 한다고 새로운 계명을 선포하고,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서처럼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원수 사랑"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원수 사랑"이야말로 예수의 특허 상품이나 전유물이라고 해도 되는 것인데, 예수는 이 말씀을 하시면서 결론으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라고 말합니다.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모두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는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사랑을 베푸는 사랑을 넘어서서 완전한 사랑에 이르라고 우리 주님이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세상 속에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이 말씀은 실현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어려운 과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조차도 너무 쉽게 포기해 버리고,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경우를 정말 많이 보게 됩니다. 앨버트 놀란 신부님께서 <오늘의 예수>라는 책에 썼듯이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정말로 예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뺨을 돌려대 주지도 않고,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하지도 않으며, 나를 저주하는 사람에게 축복을 빌어 주지도 않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내 것을 나누어 주지도 않으면서 우리는 성인(聖人)이 아니라고 그럴 듯하게 변명을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능력을 잃어버린 것 아닌가 합니다.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정말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것과 씨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와 우리 세대들이 당면한 문제도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지 정말 끈질기게 고민하고 붙들고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한 것일까요? 예수님이 이 말씀을 통해 진짜 원하셨던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고민과 계획 속에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폭력의 악순환을 막기 위하여]
오늘 마태복음서 본문에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출애굽기 21장 24절과 레위기 24장 20절에 나오는 이 율법 조문은 매우 원시적이고 과격한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동태복수법(lex talionis)이라고 불리는 이 법 조항은 당시에 꽤 합리적인 조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갈등이 분쟁으로, 분쟁이 더 큰 싸움으로, 그 싸움이 끝을 모르는 복수로 확대되며 이어지는 것을 막아 주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동태복수법은 과도한 폭력의 사용을 예방하는 효과도 있었습니다. 제1성서에 등장하는 동태복수법 조항들과 비슷한 고대 근동 제국의 법전들, 즉 우르-남무 법전, 에쉬눈나 법전, 함무라비 법전을 보면 가해자가 피해자의 코나 귀, 손가락, 팔을 부러뜨리거나 다리를 부러뜨렸을 경우와 상처를 입혔을 경우 피해자에게 얼마큼의 손해배상을 해야 하는 지를 판례로 소개합니다. 특히 함무라비 법전을 보면, 같은 계급인 귀족과 자유민 사이에서 벌어지는 가-피해 상황에서는 동태복수법을 적용하지만, 일반 평민이나 노예에게 해를 입혔을 때는 금전으로 배상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1성서는 금전 배상을 제외함으로써 높은 계급이 낮은 계급의 사람에게 과도한 폭력을 행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특히 종을 다치게 할 경우, 성경은 그를 자유민으로 풀어주라고 했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한 대 맞으면 두 대를 때리게 되는 것일까요? 어디서든 분쟁이 일어난 곳에서 중재를 해보면 늘 느끼는 것이지만, 인간은 놀랍게 자신에게 일어난 문제를 크게 확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남을 때린 것보다는 자신이 맞은 것이 언제나 더 크게 느껴진다는 말입니다. 피해가 발생하면 분명히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기 마련이고, 어떤 경우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한데도 막상 그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보면 가해자 또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고 느끼고, 자신의 가해 사실에 대해서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 듭니다. 한편 피해자는 가해자가 사과를 하고 진정성 있게 잘못을 뉘우쳐도 자신이 당한 피해에 비해서는 터무니없는 불성실한 사과라고 느낍니다.
어떤 경우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불분명합니다. 가-피해 사건이 터졌지만, 그 원인을 캐고 들어가면 누가 진정한 피해자이고 가해자인지 헷갈릴 때가 있고, 가해를 했지만 그것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더 큰 분쟁과 싸움이 이어지고, 상호 공격으로 상처를 주고받는 경우에는 양쪽 모두 자신이 더 큰 해를 입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결국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분노를 표현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작은 폭력은 더 큰 폭력을 불러오고, 그렇게 폭력은 악순환되면서 복수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학자인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책 <어제까지의 세계>를 읽어 보면, 구석기시대부터 인류는 다툼과 분쟁의 상황을 잘 해결하지 못하고 끝없는 전쟁으로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복수를 일삼아 왔습니다.
그리고 분쟁과 갈등은 갈등 당사자, 분쟁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부부가 서로 싸움을 했다고 해 봅시다. 남편이나 아내 둘 중 누군가가 먼저 잘못된 행동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같이 살아오면서 서로에게 쌓인 감정이 있고, 그것이 어떤 계기를 통해 촉발된 것이라면 문제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싸움이 쉽게 끝나지 않고, 말이 꼬리를 물면서 감정이 격해집니다. 부부싸움을 하면서 가장 큰 상처를 입는 이들은 바로 당사자들입니다. 그런데 둘 사이에 오간 거친 말들과 냉랭한 기운, 크고 화난 목소리는 가정에 있는 아이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아이들은 불안하고, 두려움에 떨고, 생명에 위협을 느끼기까지 합니다. 어릴 때부터 자주 부모의 부부싸움에 노출된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공격 충동, 충동조절장애, 우울증 등을 겪는 경우가 일반인보다 훨씬 높게 나타납니다.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것에도 매우 서툴고, 타인과 갈등이 생겼을 때도 그것을 잘 해결하지 못합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라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讎法)은 우선 폭력으로 인한 피해를 확산하지 않도록 방지하면서, 최소한의 정의와 인권을 지키려는 노력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원수 사랑"]
실제로 오늘날 우리가 대체로 경험하는 모든 사법 체계는 동태복수법의 논리를 따릅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행한 범죄만큼 그에 합당한 처벌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고 된 부분을 공동번역성서는 "앙갚음 하지 마라"로 번역하고 있는데, 공동번역성서가 원어의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예수님은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식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가만히 들어 보면 피해자가 자신이 당한 피해를 더 이상 피해로 여기지 않으면서 매우 넓은 포용의 힘으로 자신에게 가해를 한 사람을 품어줄 수는 없을까를 고민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는 폭력적 행위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지요. 바울 사도도 이런 예수님의 정신을 이어받으려고 합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셈이 될 것이다"(롬 12:20)
고대의 형벌 중에 한낮에 숯불을 머리에 이고 일정한 거리를 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 벌을 받는 사람은 얼굴이 붉게 되지요. 이것이 속담이 되어 부끄러워 얼굴이 붉게 변할 때도 이런 말을 사용했습니다. 원수에게도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할 때도 마실 것을 준다면 즉 악을 선으로 갚는다면 원수라도 마음에 찔리는 것이 있어서 부끄러움을 알게 될 것이고, 그것을 통해 마음의 변화, 삶의 변화를 도모해 보자는 것입니다.
예수의 정신을 오롯이 지키려는 그리스도인은 폭력의 악순환, 악의 증가를 막으려는 노력, 해를 당한 사람이 용서와 사랑을 통해 잘못한 행위를 한 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하는 그 도전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동물처럼 반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의 능력을 가지고 가능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는 책임질 줄 아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원수 사랑에까지 나아가려면, 우선적으로 우리가 당한 그 피해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억울함, 서운함, 피해 의식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 부분이 정말 어렵지요. 제가 지난봄에 "예수와 공자" 강좌를 할 때, 이 원수 사랑 부분을 강의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사회적 협동조합 길목 이사장인 섬돌향린교회 김영국 님께서 제게 이런 질문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원수 사랑까지는 엄두도 못내겠고, 어떻게 하면 삐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삐지지 않는 것 하나도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세사표(萬世師表)라고 불린 공자마저도 "남이 알아주지 않을 때도 속으로부터 서운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야 진짜 군자"라고 말했지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한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라고 하신 예수님이 생각하신 경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어떻게 피해 의식을 넘어서서 넘치는 사랑의 능력을 확보할 것인가? 남 탓 하지 않고, 환경이나 주변 탓 하지 않고, 내 사랑의 능력을 확대하는 도전과 모험으로 모든 사태를 맞이할 수 있을까?
그런데 평범한 우리도 해를 입고 고통을 당하면서도 참아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갓 돌이 지난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있다고 합시다. 아기는 이제 막 걸어 다니기 시작합니다. 아이와 놀다 보면 매우 당황스러운 일들을 겪게 됩니다. 아이는 말썽꾸러기이고, 온갖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흩트려 놓고, 함께 장난치다 보면 발버둥 치는 아이의 손이나 발에 얼굴을 한 대 맞을 때도 있지요. 그럴 때는 짜증도 나고 지치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그렇다고 돌 지난 아이를 마구 두들겨 패는 부모는 거의 없습니다. 웬만하면 그냥 다 받아 줍니다. 아무리 엄하고 무서운 할아버지도 계속 수염을 잡아당기는 손주를 보며 즐거워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높은 귀족적 자존감을 지닐 때, 우리는 때때로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신을 힘들게 한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더 관심을 두려고 하는 것은 한 개인의 수양을 통해 높은 인격에 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오늘 제가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의 새로운 관점이고, 그 관점이 공동체와 이 사회의 악을 어떻게 제거하고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악한 자와 맞서지 말라"고 하셨는데, 저는 이 말이 이렇게 들렸습니다. "네가 속한 공동체에 갈등과 분쟁이 발생하거든,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아니면 실수라도 누군가에게 해를 입혔다면, 너는 가해자와 맞설 생각을 말아라. 더 중요한 것은 해를 입은 사람이고, 그 피해를 어떻게 극복할지 고민해야 한다." 즉 가해자를 처벌하는 데 신경 쓰는 것보다는 해를 당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그 피해를 극복하는 일에 더 마음을 두어라는 말씀으로 들린 것입니다.
방금 부부싸움의 이야기를 들려 드렸지만, 갈등과 분쟁, 폭력의 악순환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 일들이 발생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따라 우선적으로 피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향린 교우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원수인 사람은 없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관계 속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그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원수를 만들게 됩니다. 원수라는 말이 좀 과하지요. 우리는 자신과 다른 낯선 사람들과 만날 때 어색함을 느낍니다. 자신과 성향이 다르면 불편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과는 친해지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다른 성향의 사람들하고 지내다가 상대편의 잘못으로 인해 내게 피해가 발생하고 상대가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피해를 준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과는 원수가 됩니다. 때로 먹고 살기 위해 남을 등쳐먹는 나쁜 놈들도 있지만, 매우 친하게 지내고 친구로 오래도록 사귀다가도 어떤 사건을 통해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하면서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만약 그런 사람을 정말 다시 보지 않을 수 있다면 다행인데, 그렇지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약 가족이 원수가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서로 얼굴을 맞대고 계속 지내야 한다면 어떻게 그 사람과 함께 잘 지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원수 사랑 이야기는 우리에게 바로 이런 지점들을 생각해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분쟁이 생기고, 그래서 교인들끼리 싸우거나, 목사와 교인들이 언성을 높이는 일이 생기면, 많은 경우 교회는 분열되고,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는 일이 생깁니다. 안 보면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 그런 과정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서로 주고받은 상처, 공동체 전체가 입은 아픔과 고통을 함께 극복하는 일에 마음을 두지 못하고, 잘못한 사람을 찾고 그 사람의 잘못을 들추며 비난하고 처벌하는 일에 더 관심을 두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우리의 모습을 치유하시려고 합니다. 사랑은 가해자를 처벌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사랑은 잘못된 행동으로 발생한 피해를 줄이며 원래의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데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 경지에 이르도록 노력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실제로 사랑의 능력이 발휘될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믿고 있고, 실제로 그런 훈련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또한 그런 능력을 키우시길 바랍니다.
원수 사랑까지 가기 위해서 먼저 내 자신을 내가 통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만감이 아니라 자존감을 높여야 합니다. 음악이나 취미 생활, 또는 기도나 찬양, 말씀 묵상이나 침묵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조절하면서 예수님께서 세우신 푯대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원수 사랑 계명은 그저 꿈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랑의 능력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함께 노력하면 우리는 더 넓고 깊은 사랑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사야서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놀랍고도 반가워라! 희소식을 전하려고 산을 넘어 달려오는 저 발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복된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면서, 시온을 보고 이르기를 '너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하는구나." 우리는 언제 이런 선포를 할 수 있을까요?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복된 희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산을 넘어 달려옵니다. 즉 평화의 복음은 발로 뛰는 것이지,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를 이루려면 우리는 몸소 사랑의 능력을 개발하고 사용해 봐야 합니다. 사랑의 능력은 사용할수록 넘쳐날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넘치면 생명을 살리게 될 것이고, 우리 향린 신앙공동체는 더 단단해질 것입니다.
향린 교우 여러분!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한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도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하지 마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믿음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힘차게 그리고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랑의 능력을 보여 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