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사 65:17-25, 행 17:16-25, 마 7:1-8)
설교문
[주일 예배의 중요성]
우리 교회의 정관 제3장 교인의 11조 책임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교인은 정기 예배에 성실히 참여하고 교회의 정신을 존중하며 헌금과 봉사를 통해 하느님의 나라를 확장할 의무를 가진다." 우리 모두가 함께 약속한 정관에 따라 향린교회의 구성원이자 그리스도인으로 지녀야 할 첫째 의무와 책임은 바로 '정기 예배에 성실히 참여하고'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2,000년이 넘는 그리스도교 전통은 '주님의 날'에 함께 모여 예수의 삶과 그분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정체성을 만들고, 삶을 지탱해 왔습니다. 교회는 선교하는 공동체로서 존재 이유와 목적을 지니지만,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우고 십자가를 통해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부활하는 예배 없이는 제대로 된 선교가 이뤄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은 그 시작부터 지금까지 줄곧 정해진 시간에 한 공간에 모여 드리는 공동체의 예배만을 온전한 예배로 인정했습니다. 전 세계를 강타했던 코로나 19라고 하는 특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가상 공간이나 각 가정에서 홀로 또는 소수가 모여 예배할 수밖에 없었지만, 교회가 하나님 백성들의 모임, 즉 공동체라는 정신은 변함이 없습니다.
공동체를 무시하고, 저 홀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지만, "하나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눅 17:21),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마 18:20)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어긋나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연대하는 공동체 정신에도 어긋납니다. 또한 공동체 예배를 소홀히 할 경우 모든 인간이 지닌 깊은 자기애적 성향으로 인해 하나님을 따르기보다는 자기 확신의 늪으로 빠져들 확률이 높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며 자기를 비우고, 믿음의 식구들에게 자기를 비추어 내 연약함과 부족함을 채우고, 교만함과 오점들을 씻어내지 않으면 절대로 예수께서 보이신 믿음과 사랑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모이는 예배 공동체와 흩어지는 선교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선순환을 이루며 주님의 몸인 교회 공동체를 단단하게 세워 갑니다. 주일 예배에만 머물러 선교하지 않고, 신앙생활이 생활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한국 개신교회가 지닌 심각한 문제이지만, 동시에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한자리에 모여 예배함 없이 이뤄지는 모든 활동은 놀랍게도 세속적 물결에 휩쓸리거나 개인의 독단적 편협함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행위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지만,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자신을 내려놓는 신앙적 성찰 없이 섣부르게 하는 행동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빠지고 자기 신념과 자기의(自己義)만 드러내려 하고, 예수께서 그렇게도 싫어하셨던 바리새파와 율법 학자의 위선이, 사두개파의 교만과 독단이, 엣세네파의 고립과 딱딱함만이 남게 됩니다. 이렇게 예배가 중요합니다.
[신학과 신앙이 깊이 스며있는 주일 예배]
우리가 주일에 한 번 드리는 이 예배는 "예배 중의 예배"라고 불립니다. 그래서 예배 순서 하나하나, 예배를 이끄는 모든 예배 위원의 마음가짐과 태도, 예배하는 모든 이들의 정성과 주님을 향한 깊은 사랑의 마음이 한데 어우러지도록 세심하게 다뤄져야 합니다. 매주 드리는 예배의 일관성은 믿는 이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 되고, 함께 드리는 예배는, 모여서 하나가 될 때만이 주어지는 벅차오름과 초월의 감각을 만들어 주고, 잘 짜인 예배 순서는 흐트러진 시간을 조율하여 신앙생활의 균형감각을 되찾아 줍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예배의 요소들이 반복되면서 내용은 잊은 채 형식만 남는 경우도 있고, 타성에 젖어 하나님을 만나기는커녕 어떤 감동이나 깨우침도 없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특히 신학적 근거가 없는 예배는 깊이를 상실하여 인간의 말초적 감각만을 건드리면서 감정의 흥분을 신앙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우리 교회의 예배는 깊은 신학적 고민과 다양한 시도와 시행착오를 거친 매우 알찬 형식과 내용을 지니고 있습니다.
20세기 들어서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한 예배 신학의 성과가 이미 우리 예배 안에 녹아 있습니다. 우리 예배에는 그리스도교가 자라온 서구 문화에 대한 존중과 더불어 우리 전통이 지니는 깊이가 함께 담겨 있고, 세상을 향해 선포되는 하늘뜻펴기와 하나님을 향해 올려 드리는 목회기도 및 감사기도가 서로 씨줄과 날줄을 이루며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넘나들고, 하늘과 땅이 소통하는 예배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나올 때, 주님 말씀 앞에서,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세상으로 나아가라는 보냄의 말씀을 들을 때 모두 일어섭니다. 우리가 만든 삶에서 우러나온 우리만의 신앙고백을 드리며, 주님을 기억하는 주기도문이 예배의 찬송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평신도와 목회자가 모두 예배에 골고루 참여할 수 있도록, 예배 인도자와 회중이 서로 주고받도록, 침묵과 말이 조화를 이루며 리듬을 잃지 않도록 예배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것이라 확신하고, 우리 또한 이 예배를 통하여 깊은 신앙의 바다로 풍덩 빠져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실제로 기존 교우들뿐만 아니라 새 교우들도 우리 교회 예배에 깊은 인상을 받고, 함께 예배하며 큰 기쁨과 감격을 누립니다. 그러나 예배 또한 공동체의 상황에 따라, 세상의 흐름에 따라 그에 알맞게 변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지난 1년간 예배하면서 생각해 온 한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을 반영하여 내년부터는 예배에 작은 변화를 주려고 합니다.
첫째는 예배의 부름에서 예배 인도자가 낭송하는 시편의 길이를 짧게 2~3절로 줄이려고 합니다. 우리 교회 예배 특징 중 하나는 모임 예전에 해당하는 부분이 너무 많고 복잡하다는 것입니다. 주보에 나와 있는 징울림 이전에 예향의 입례 연주와 목회자의 예배 인사가 있기에, 예배 위원의 등단부터 시작하면 모임 예전에만 모두 11개의 순서가 있습니다. 예배 신학적으로 말씀을 듣기 위해 우리는 참으로 많은 준비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선 예배 인도자의 예배 부름의 시편을 짧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격월로 부르는 신앙고백송과 주기도송을 응답찬송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말씀 예전이 들어가기 전에 신앙고백을 하는 것은 아직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이에게 말씀을 들을 기회를 박탈하게 만듭니다. 주어진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서 읽기와 선포된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하늘뜻펴기를 듣기도 전에 신앙고백을 먼저 하라고 하는 것은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 가혹합니다. 우리교회가 지니는 역사적 무게와 실천의 강도를 생각할 때, 태신자보다는 기존의 신자들 그것도 다른 지교회에서 이미 상당히 훈련받은 교인들이 더 깊은 데에서 그물을 던지기 위해 오라고 한다면 지금의 예배 순서가 타당하지만, 그렇지 않고 누구나 와서 함께 예배하자고 한다면 신앙고백송은 하늘뜻펴기 뒤로 가야 합니다. 말씀을 먼저 듣고 그 응답으로 신앙고백을 할 수 있기 때문이고, 또 그렇게 신앙고백을 한 사람만이 주님의 몸과 피를 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봉헌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은 그리스도교 예배 전통에서 성찬 예전에 포함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찬이야말로 주님의 몸과 피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기억하고 그분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재현하겠다는 다짐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들은 성찬식을 하면서 주님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때문에 신앙고백송과 주기도송은 내년부터 하늘뜻펴기 뒤에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임 예전의 복잡함을 줄이고, 누구나 와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신앙고백에 이르도록 초청하는 예배가 되고자 합니다.
셋째 우리 예배가 모임 예전의 구성 요소가 이렇게 많은데도 개신교 예배 전통에 있는 것이 우리에게는 빠진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죄의 고백과 용서'의 순서입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자 깔뱅이 루터의 만인사제설에 힘입어 예배를 인도하는 사제가 예배 전에 드렸던 기도를 예배 안으로 편입하여 모든 성도가 주님 앞에 나올 때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개신교에서는 그동안 너무 '죄'를 부각시킴으로써 해방과 자유의 복음이어야 할 그리스도교 신앙을 억압하고 주눅 들게 하는 가학적 신앙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그런 치우친 한국 개신교의 과오를 바로잡고자 예배 순서에서 '죄의 고백과 용서'를 뺏습니다만, 이렇게 하다 보니, 모임 예전에서 매우 중요한 순서, 자기를 돌아보고, 지난 일주일의 삶에서 일어났던 많은 잘못과 실수, 죄들을 주님 앞에 고백하고 용서받는 중요한 시간을 놓쳤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자칫하면 교만의 그물에 걸리게 하는 요인도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목회기도 안에서 장로님들에게 요청하여 반드시 포함할 수 있도록 하려고 합니다. 예배 순서 안에 새롭게 편입시키지는 않지만, 목회 기도자의 기도 속에서 우리의 유한성을 성찰하고 주님께 다시 받아들여지는 감격의 순간을 만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에게 어떻게 예배하고 있는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말씀을 하늘뜻펴기의 주제와 연결지어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렇게 자문할 수 있습니다.
"과연 오늘 우리는 누구에게 예배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하는 예배가 사람의 전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고 있는가?"
사도행전의 말씀은 바울 사도의 그 유명한 아레오바고 법정 연설입니다. 사도 바울은 베뢰아에서 전도를 하다가 박해를 받아 고대 그리스 철학과 문화의 영광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아테네에 이르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유대 신앙 전통에 서 있던 사람이지만, 당대 로마와 그리스 등 주변 세계는 여러 신을 믿고 섬겼습니다. 매우 다양한 신들의 동상과, 그 신들을 나타내는 온갖 상징들로 가득한 곳에서 바울 사도는 매우 참담한 심정으로 광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열띤 논쟁을 벌입니다. 그중에는 스토아와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자들도 있었고, 특별히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바울의 주장이 무엇인지를 듣고자 하는 이들이 바울을 아레오바고 법정으로 데리고 갑니다.
법정 한가운데 선 바울은 이렇게 연설을 시작합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종교심이 많습니다. 내가 다니면서, 여러분이 예배하는 대상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그 대상을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바울 사도의 이 심정이 오늘 저의 심정입니다. 저마다 다른 신들을 섬기며 제 나름의 신념을 가지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그리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지만, 지금 누구에게 예배하고 있는지 마치 알지 못하는 한국의 교인들에게 절규하는 마음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오늘 바울 사도께서 아테네 시민들과의 접촉점을 만들기 위해 언급했던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왜 그곳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까지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낸 것일까요?
바울 사도는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하며 하나님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만드신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하늘과 땅의 주인으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슨 부족한 것이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말합니다. 바울의 이 말씀은 당시 신앙의 풍조를 깨려는 의도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유한성을 자각한 종교적 인간은 자기에게 닥친 재앙을 멀리하고, 자신보다 더 힘센 신의 도움을 얻어 좀 더 편하고 좋은 삶을 살기 위한 방편으로 신들을 모십니다.
고대인들은 삶을 살다가 닥치는 여러 문제를 풀기 위해 그것을 해결해 줄 여러 신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리고 온갖 자연재해나 원인을 알기 어려운 고통들, 즉 질병이나 갑작스러운 재난은 모두 신들이 화가 나서 내린 일종의 벌, 또는 화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들을 인간들과 같은 존재로 여겼던 다신론적 세계 전통에서는 더욱더 그러하였습니다. 인간과 같은 성정을 지닌 신이 분노하거나 노여움을 타지 않도록, 신의 기분을 잘 맞추어서 신이 가진 능력으로 복을 얻기 위해 당시 그리스-로마 세계의 사람들은 열심히 제단을 쌓고 제물을 바치며 제사를 지냈던 것입니다.
만약에 예배가 이런 것이라면, 가능한 많은 신에게 제사를 지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많은 신들의 도움을 받을 것이니,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요. 그런데 만약 내가 알지 못하는 신이 있다면 어떻게 하나요? 다른 신들은 다 나를 좋게 봐줬는데, 만약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신이 나를 좋게 보지 않는다면 그동안의 모든 노력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세계관 속에서 드리는 예배는 결국 제물을 통해 신을 통제하려는 생각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마치 상거래 하듯이 신과 거래하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가치관에 격분하였고,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어떤 것도 받을 필요가 없는 분임을 말합니다. 그분은 오히려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창조주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의 신앙이 말하는 예배는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에 감동하고, 모든 피조물을 아끼고 돌보시는 그 분의 뜻에 순종하여 모두가 함께 더 풍성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는 일에 나서는 것을 말합니다. 신을 조종하여, 신의 마음을 달래서 재앙을 피하고 물질적 풍요와 일상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신과 거래하여 개인의 복을 쟁취하려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를 창조하고 돌보시는 주님과 함께 공공의 이익을 위해, 창조의 처음 그 아름다운 세계의 질서 회복을 위해 자신을 미지의 세계로 던지도록 준비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예배인 것입니다.
한편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하나님의 전통을 따른다면서 결국은 사람의 전통을 따르고 하나님의 계명은 어기고야 마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통렬한 비판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언자 이사야의 언어를 빌어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 두렵고 떨리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의 예배가 혹시 '알지 못하는 신'에게 드리는 예배가 된 것은 아닌지,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고 찬양을 부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지만 혹시나 헛되이 예배하면서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친 것은 아닌지 정말 깊이깊이 성찰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자기 우물에서 생수를 길어 올려야]
한국 개신교의 예배가 성찰 없는 형식과 내용 없는 잡담으로 전락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자기 우물에서 생수를 길러 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하나님의 신탁을 받아 전합니다. 그것도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는 역사 변혁의 순간에 하늘로부터 내려온 계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시는 새 역사, 새 세계의 특징은 바로 이것입니다.
"집을 지은 사람들이 자기가 지은 집에 들어가 살 것이며, 포도나무를 심은 사람들이 자기가 기른 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 자기가 지은 집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 살지 않을 것이며, 자기가 심은 것을 다른 사람이 먹지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자기가 지은 집, 자기가 심은 나무, 자기가 판 자기 우물에서 자기의 생수를 길어 먹는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판 우물을 남이 먹지 않고, 남의 우물에서 남의 물을 먹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한국 개신교회의 예배는 물 건너온 남의 예배, 선교사의 콧김에 휘둘리고, 딸라의 유혹에 넘어가서 예배가 아니라 거의 숭배에 가까운 종속적 예배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을 숙고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무분별하게 종교 장사가 될 것 같으면 마구 수입해서 배포하는 예배, "하나님 사랑"한다고,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돌린다."고 두 손 들고 소리를 높이지만 정작 이웃 사랑은 없었던, 하나님의 높은 윤리적 이상은 내팽개쳤던 예배가 마치 현대적인 감각의 예배인 양 그렇게 행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창립 40주년을 맞이하여 교회 갱신 선언을 하면서 우리 삶과 몸과 마음, 피와 살에 녹아 있는 우리 정서를 예배 안에 녹여 보자고 다짐했고, 그리해서 만들어진 우리 가락 예배로 30년을 지속하여 왔습니다. 쉽지 않았고, 오해도 있었고, 고민도 많았습니다. 국악선교회 예향이 유지되는 것 자체가 정말로 대단한 일입니다. 예배에 우리 악기로 찬양을 드리고 연주하려면 정말 오랜 세월 힘써서 배워야, 성실하게 연습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도전하고, 계속 노력하고, 지금도 애쓰고 있는 이 모든 수고에 찬사를 보냅니다.
그런데, 정말 속 터지고 괴롭고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우리 우물이 뭔지, 우리 우물에서 건져 올린 샘물이 너무 낯설다는 것이지요. 일제 35년 식민 치하에서, 총칼로 힘으로 마구 들어온 서구 제국주의의 세력 앞에서 우리는 순식간에 지난 100년 동안 우리 우물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우리 전통이 유물이 되어 발굴해야만 얻어지는 것이 되었고, 발굴해도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 낯선 것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퀴즈를 내 보려고 합니다. 우리말 퀴즈입니다. 우리말 겨루기에서 달인의 경지에 오르신 김영민 집사님은 손 드시면 안됩니다.
1번 문제입니다. "자외선을 순우리말로 뭐라 부를까요? 넘보라살"
2번입니다. "'몸집이 크고, 행동이 점잖고 무게가 있다'는 뜻의 형용사는 무엇일까요? 거방지다."
3번입니다. "'남에게 넘겨씌우거나 남에게서 넘겨받은 허물이나 걱정거리 또는 억울한 누명이나 오명'을 뜻하는 명사는 무엇일까요? 덤터기"
여러분은 '가대기' '되곱쳐' '닷곱방', '대모하다', '다지르다'의 말뜻을 아시나요? 순우리말을 찾아보기 시작하면 저나 여러분이나 아는 말보다 모르는 말이 훨씬 더 많이 나옵니다. 매우 낯설고 어렵고 어색합니다. 최근에 <마가복음 전남방언>이라는 책이 나왔고, 제가 사서 우리 목회자들에게 모두 주었습니다. 오늘 예배에서 복음서를 읽을 때, 그것으로 읽어 볼까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전라도 출신이면 조금이라도 시도했겠지만, 억양과 뉘앙스, 어투가 영 어색하고, 우리말인데도 남의 말 같았기 때문이고, 아마 읽었다면 코미디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조선에서 대한제국,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넘어오는 시기에 우리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것들을 지니고 이어갈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남의 것에 눈이 뒤집혀서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의 소중함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우리 문화가 지닌 그 다양성과 고유함, 독특성들에 대해 우리는 너무 무지합니다. 오늘날 그냥 음악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서양 음악을 떠올리면서 우리 가락을 다시 '국악'이라고 불러야 하는 서글픈 현실을 맞이한 것입니다.
지금은 이미 세계가 하나가 되어서 서로 교류하고, 한 지역에서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환영할 일이고 반가운 일입니다. 그런데 자기 뿌리를 잃은 채 남의 것만을 흉내 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 향린교회는 바로 이 부분을 깊이 고민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우리 것에 대한 발굴과 계승이 세계의 다양성 확보에도 도움을 주는 것이라, 이 부분은 포기할 수 없고, K 문화를 비롯해 다양한 방면에서 한국적 특색이 세계인들에게 신선한 감각을 일깨울 때, 우리 또한 우리의 예배, 우리의 신앙, 우리의 하나님 이해를 더 깊이 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는 지난주에 이어 낯섦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워서 낯선 것이 아닙니다. 잃었기에 되찾아도 낯설게 된 것이고, 그래서 우리 것을 찾아낼 때마다 마주할 수밖에 없는 낯섦입니다. 그래서 지난주 예향 북토크에서 라예송 전 예향 악장이 말한 대로 더 이상 낯선 것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애써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악선교회 예향이 창단되고, 처음으로 우리 가락 예배를 시도했을 때 많은 교인이 낯설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예배도 우리에게 매우 낯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30년 동안 이런 낯섦들을 넘어왔고, 그래서 지금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향린의 예배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또 다른 낯섦을 마주합니다. 그러나 이 낯섦을 넘어설 때, 우리는 더욱 놀라운 생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미처 몰랐지만, 우리에게 딱 들어맞는, 그래서 우리의 깊은 곳을 건드리고, 우리의 토대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 줄 보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씀하신 대로 우리 생수를 우리 우물에서 길어 먹을 때만이 "우리는 나무처럼 오래오래 살겠고, 우리가 수고하여 번 것을 오래오래 누리게 될 것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믿음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힘차게 그리고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우리 우물에서 생수를 길러 마십시다.
어색함에 굴복하지 말고 기대하며 도전합시다.
주눅 들지도 말고, 부끄럽게 여기지도 말고,
그렇다고 교만하지도 말고, 우리 것을 신나게 누려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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