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잠 22:1-9, 딤전 6:17-19, 눅 16:1-13)
설교문
[향린에서 1년을 보내며]
내일은 제가 향린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한 지 딱 1년 되는 날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1년이 지난 듯 합니다. 제가 생명사랑교회를 떠날 때, 원로목사님이신 문대골 목사님을 찾아뵈었습니다. 향린에 가게 되었다고 말씀드리면서 저는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생명사랑교회에 올 때는 이제 막 싹을 틔운 주님의 몸을 살리려 왔는데, 향린에 갈 때는 죽으러 갑니다." 비유로 말씀드린 것이지만 실제로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의 심정이라고나 할까요? 십자가의 길이 뻔하지만 가지 않을 수 없는,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부임한 지 한 달 만에 윤석열 전 대통령이 계엄 선포를 했고,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1년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죽지 않고 너무 잘 살고 있습니다.
부임하자마자, 장로임직식을 해야했고, 연말당회와 70주년의 남은 행사들, 미래선교위원회 사업들, 도농 30주년 행사, 헌당 예배, 민중신학 태동 50주년, 노회 총회를 비롯해 함께 연대하는 많은 단체들과의 만남, 찾아오는 손님들 맞이하기 등 10년 떠나 있던 세월의 낯섦을 줄이며 저도 교회에 적응하고, 교인들을 만나 뵙고, 목회팀, 직원들과도 차근차근 깊은 신뢰의 터전을 닦아야 했지만, 밖으로는 거리에서 내란 세력과 싸워야 하고, 안으로는 밀려드는 온갖 목회 사역들로 하루하루 정신없이 보내면서 지난 1년을 쏜살같이 달려 온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의 건강 걱정을 해 주시는데, 저는 매일 아침의 묵상과 여러분들의 사랑과 지지, 기도 덕에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많은 믿음의 식구들이 향린을 찾아 주셨고, 온오프라인 모두 목회가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으며, 향린이 해야 할 사역들도 하나둘씩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1년을 보내면서 제가 평신도로 향린에 처음 왔던 2002년이 떠올랐습니다. 모든 게 마냥 신기했던 그때, 향린은 언제나 새로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존 교우들의 신앙의 무게와 새 교우들의 생기, 누구 하나 허투루 살아오지 않은 묵직한 인생들이 여기에 모였기에, 사귐이 많아지고 깊어질수록 늘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향린의 목회는 지루할 틈이 없고, 늘 도전과 모험 한복판에 있습니다. 그러나 두렵지도 불안하지도 않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궁극적으로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맡은 자리에서 충실하게 따르면 될 뿐입니다.
지난 1년만을 되돌아 보았을 때, 여러분이 저를 선택하신 것이나, 제가 다시 오기로 선택한 것은 모두 '슬기로운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목회와 선교 사역도 우리 모두가 슬기로운 선택을 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저는 언제나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슬기로운 선택이 무엇인지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가장 어려운 비유]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의 말씀은 예수님의 많은 비유 중에 가장 어려운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어렵게 느끼는 이유는 8절 때문입니다. "주인은 그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였다. 그가 슬기롭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슬기롭다."
비유의 내용에서 청지기는 분명 불의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오늘말로 하면 사문서위조에다가, 명백한 배임 횡령입니다. 그런데 8-9절을 보면 이 불의한 일이 마치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제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주인이 칭찬하는 것이 도무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8절에 청지기가 칭찬받은 것은 반어적 표현이라는 주장도 있고, 그가 한 행동의 윤리성을 따지기보다는 위기 상황을 돌파하는 결단력이 돋보였기 때문에 칭찬받은 것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성서 본문을 읽으셨을 때 어떤 생각들이 떠올랐나요? 가장 이해되지 않는 지점을 말씀드렸지만, 이 외에도 다른 질문들이 생겨납니다. 왜 이 청지기는 불의한 청지기라고 불리는 것일까요? 주인에게 해고 통지를 받기 전에 행한 행동 때문일까요? 아니면 해고 통지를 받고 나서 행한 행동 때문일까요? 아니면 또 다른 의미가 있을까요? 불의하다는 말이 청지기 말고 재물에도 쓰이고 있는데 그렇다면 주인은 어떤 사람으로 보아야 할까요? 그는 불의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은 사람일까요? 아니면 의로운 사람일까요? 청지기는 노예였을까요? 아니면 자유인이었을까요? 누가복음서에서 15장 잃은 양과 잃은 동전과 잃은 아들을 찾는 비유는 예수님을 비난하던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하신 것인데, 16장은 제자들에게 하신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꼭 제자들에게 하신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비유를 통해 제자들이 깨달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정말 끊임없이 질문들이 이어집니다.
성경을 읽을 때는 이렇게 다양한 관점에서 계속 물어야 합니다. 묻지 않으면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특히 자기 삶에서 우러나오는 질문이 없으면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자기 실존을 걸고 물을 때 성경은 답을 합니다. 설교 시간은 여러분을 대신해서 목회자가 질문하고 대답하는 과정을 통해 청중들과 함께 성경을 살피는 시간이지만, 여러분은 목사의 설교에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질문을 하면서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깨달음을 얻어 삶에 적용하셔야 합니다. 그것 없이 신앙 성숙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누가복음의 본문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과 함께 진지하게 읽어나가고 싶습니다. 저 혼자 말을 하겠지만, 여러분도 함께 생각하시면서 제 설교에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본문으로 들어가 볼까요!
[본문 속으로]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청지기를 하나 두었습니다. 오늘의 등장인물은 부자 주인과 청지기입니다. 이 부자 주인은 어느 정도나 부유하였을까요? 그 사람이 부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일까요? 아니면 또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부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우리는 본문 속에서 이 사람의 부의 정도와 사람의 됨됨이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이 사람은 청지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청지기는 글을 읽고 쓸 줄 알고, 이 부자에게 빚을 진 사람들도 모두 글을 읽고 쓸 줄 압니다. 고대 사회는 문맹률이 97-98%에 달합니다. 그러니 청지기나 빚을 진 이들은 모두 배움이 없는 소작농, 또는 소농이 아닙니다. 청지기가 주인에게 해고 통지를 받고는 "땅을 파자니 힘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몸으로 노동을 해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동시에 이 사람은 빌어먹는 것이 얼마나 낯부끄러운 일인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집회서라는 유대 문헌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들어라, 너희는 남에게 구걸을 하지 말아라. 빌어먹고 사느니 차라리 죽어라. 남의 식탁을 기웃거리는 사람은 제대로 산다고 할 수가 없다. 그는 남의 음식으로 자기 영혼을 더럽힌다. 그러므로, 현명하고 교양 있는 사람은 그것을 경계한다. 사람이 염치가 없으면 얻어먹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 뱃속에서는 불이 붙고 있다."(집회서 40:28-30) 부자 주인과 청지기, 그리고 이 부자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은 모두 오늘날로 보자면 노동자나 농민과 같은 대다수의 일반 민중이 아니라, 전부 화이트칼라 계열의 사람들로 당시 사회에서 3% 안에 드는 지배 계층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 그러면 이제 등장인물들의 빚의 규모를 살펴봅시다. 두 경우가 나오는데 한 명은 기름 백말을, 또 다른 한 명은 밀 백섬을 빚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기름 백말의 규모는 약 3,9킬로리터입니다. 감람나무 146그루에서 짜낼 수 있는 기름의 양이며, 당시 돈으로 환산하면 약 1,000데나리온에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밀 백섬은 39킬로리터의 양으로 약 12만 7049평의 땅에서 거둔 양입니다. 이것을 당시 돈으로 환산하면, 약 2,500데나리온에 해당합니다.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이니까, 기름을 빚진 사람은 노동자의 3년치 임금을, 밀을 빚진 사람은 노동자의 8년 정도의 임금을 빚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보았을 때 지금 이 부자는 엄청난 부자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세기의 갈릴리 지방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여건 아래서 어떤 사람이 이런 정도의 엄청난 빚놀이를 할 수 있는 처지라면 그 사람이 쌓은 부는 개인이 열심히 노동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분명 어떤 사회관계 속에서 얻은 특혜의 산물일 확률이 높습니다. 아마도 이 부자는 현장 관리인을 둔 대지주일 것입니다. 이 당시의 갈릴리는 농업의 상업화가 강하게 추진되었고, 자영농민들의 작은 농지는 사라지고, 청지기들이 관리하는 대규모 사유지에 흡수되었습니다. 농부들은 땅을 떠나도록 강요받거나 대규모 농장의 계약직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직접 농사를 짓던 자영농이 몰락하고 땅이 합병되는 경우는 대부분 빚으로 인한 경우였습니다. 로마에 바치는 공물, 헤롯 정권에 바치는 세금과 기존에 유대인으로서 내왔던 예루살렘의 십일조까지 갖가지 세금을 내야 하는데, 흉년이라도 들면 농부들은 빚을 얻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빚을 얻는 해의 추수 때에도 수확이 신통치 않으면 그들은 빚을 갚을 수 없었고, 오래되지 않아 농토를 몰수당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시절 누군가가 이 정도의 재물을 가지고 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빚에 허덕인다는 것을 곧바로 드러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부자의 재물에 대하여 불의하다는 형용사를 쓰셨던 것입니다.
정당한 노동과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아서 삶을 유지하고 생의 기쁨을 누리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부동산 투기나, 정경유착 등등의 방법, 즉 불로소득으로, 돈이 돈을 버는 방식에 기대어 돈을 버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정직한 노력의 땀방울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권력을 이용하거나, 세금 탈루, 법망을 피해서 교묘한 수법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그 사회는 타락하고 건강하지 못한 사회입니다.
오늘날이야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서 좋은 아이디어나 지식정보의 힘으로 갑자기 돈방석에 앉는 경우도 생기지만 농사를 지어서 부를 축적해야 하는 1세기 갈릴리 사회에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의 경우는 분명 옳지 못한 방식으로, 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면서 거대한 땅을 소유한 것이었고, 그런 지점에서 본다면 오늘의 주인공 청지기의 행위는 부의 사회적 환원이라는 차원에서 윤리적인 것이었다고 재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율법인 토라에서는 같은 동족에게 이자를 받는 것을 금하고 있기에(레위기 25:35-38; 신명기 23:19-20), 오늘 이 청지기의 행위는 바로 그 높은 이자 부분을 감해 준 것이라고 학자들이 보고 있습니다. 기름의 경우 쉽게 상할 수 있기에 이자 비율이 50%나 되었던 것이고, 밀은 20%가 이자였는데, 지금 청지기는 바로 그 이자 부분을 제하여 줌으로써, 빚을 진 사람들에게는 경제적 부담을 줄여주었고, 또 주인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지 않았다는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청지기의 행동이 칭찬할 만한 것이었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꽤 있습니다.
특히 누가복음에서는 삭개오의 경우에서와 같이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기의 것을 나누는 행동이야말로 참된 자비의 행동이고, 구원의 징표라고 말하고 있기에 이 청지기의 행위는 다른 관점에서 보면 위기를 모면하는 슬기로운 행동일 뿐만 아니라, 자비로운 행동으로까지 이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무슨 말씀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고 싶습니다.
[예수께서 하고 싶으셨던 말씀]
지금부터의 해석은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깨달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또 여러분 나름대로 다르게 깨닫고 다르게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은 말씀을 가지고도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축복입니다. 물론 아전인수격의 해석은 성경 말씀을 제멋대로 읽는 잘못이 있지만, 깊은 묵상과 연구 가운데 나온 다양한 성경 해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게 합니다. 같은 말씀이라도 다양한 깨달음을 지니고 있다가 예기치 못하는 상황에서 이것저것을 모두 꺼내어 쓸 수 있다면 좋은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주의 깊게 읽어야 하는 구절이 9절과 13절이라고 생각합니다. 9절과 13절이 본문의 비유를 해석하는 하나의 기준점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9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13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그가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떠받들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우선 13절의 말씀의 뜻은 분명합니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섬겨야지 돈을 섬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돈은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잘 사용해야 하는 수단입니다. 오늘의 주인공 청지기는 어쩌면 그동안 돈을 섬겼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자기 생계에 위협을 느끼자, 돈을 잘 사용했습니다. 돈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잘 쓰는 것일까요? 돈은 우선적으로 자기 생존과 타인의 생존을 지키는 데 써야 합니다. 즉 삶을 유지하고 보존하는데 돈이 쓰여야 합니다. 오늘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부자 주인은 자기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만 듣고 청지기를 해고합니다. 이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지도 않고, 이 청지기가 앞으로 어떻게 살 수 있는지를 고려하지 않고 곧바로 내보냅니다. 지금 이 주인의 행동은 돈을 지키기 위해 그것도 소문만 가지고 사람의 앞길을 막막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지기는 이런 위기 상황에서 돈이 원래 기여해야 하는바 사람들을 살리고 사람들의 관계를 새롭게 형성해 주는 방식으로 돈을 사용합니다. 위에서 설명드린 대로 관점을 바꾸면, 이 청지기는 율법에서 금하는 이자 부분의 빚을 탕감함으로써 자기 생존의 길과 타인 생존의 길, 그리고 부자 주인의 명예까지 회복시켰던 것입니다. 돈 때문에 생긴 인간관계의 갈등과 불화와 불평등을 돈을 없앰으로써 제자리로 돌려놓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사람이 이렇게 한 가장 큰 이유는 자기 생계를 위함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지금까지 부자 주인의 편에서 불의한 재물을 관리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불의한 일에 가담할 수밖에 없는 불의한 청지기였습니다. 이 사람이 그동안 그렇게 한 것은 재물이 자기 목숨을 지켜주고 생명을 유지시켜 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이 사람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즉 돈이 사람을 상품이나 물건처럼 취급할 때,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돈을 사용해서 다시 사람 사이의 관계를 얻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 행동이 칭찬받는 지점입니다.
그런데 우리 9절을 다시 한번 자세히 읽어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정확하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지금 예수께서는 영생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영생의 조건은 "불의한 재물을 다 써서 친구를 사귀라"는 것입니다. 9절과 13절을 연관 지어 생각해 보면,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바로 재물을 사용하여 친구를 사귀는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즉 재물의 원래 목표, 사람을 살리는 일에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 사이에서만 사람일 수 있기에,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평등하고 바른 인간관계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친구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입니다. 우리의 관심이 돈에 가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리게 될까요? 그렇습니다. 신뢰가 무너집니다. 불의한 재물을 다 없애서 온 세상 사람들과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돈 때문에 사람을 다치게 하고,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가지고 사람을 살리고 서로 상생하는 데에 쓴다면 바로 그것이 영생의 길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던 것이고, 그것을 누가가 전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자녀들도 자기 목숨을 살리기 위해 돈을 사용할 줄 아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는 어때야 하겠는가? 우리는 진정으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정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가 인간들이 사는 이 세상에서 이루어진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돈이 숭배되는 곳일까요? 아니면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곳일까요?
[하나님인가? 돈인가?]
오늘 불의한 재물로 번역된 재물을 뜻하는 단어는 맘몬입니다. 맘몬이란 돈을 인격화하여 신처럼 부르는 말입니다. 즉 돈은 언제든지 하나님 자리를 꿰차고 신처럼 행세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바로 그 속임수에 넘어가서 돈을 숭배합니다.
사탄이 어느 날 한 젊은이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열 개의 병을 보이면서 "여기 아홉 개의 병에는 꿀물이 들어 있고, 한 개에만 극약이 들어 있는데 열 개 중에 아무거나 하나를 마시면 엄청난 돈을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청년은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아무리 돈이 좋지만 생명과 바꿀 수는 없지."
그러나 사탄은 계속 유혹했습니다. "열 개 중의 하나야. 겨우 하나일 뿐이야. 10분의 1인데‥" "그래 딱 한 번만 하는 거다. 이번 한 번이면 평생 안 해도 될 테니까." 이 사람은 떨리는 손으로 진땀을 흘리며 한 병을 골라 마셨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야! 내가 살았구나, 자칫하면 죽을 뻔 했어. 자 어서 돈을 내어놓아라." 그리고 사탄에게 말하였습니다.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마라."고 말입니다.
사탄은 엄청난 돈을 주고는 "다음번에 언제라도 아홉 개 중의 하나를 골라 독이 없는 병을 골아 마시면 이제 돈을 곱으로 주겠다"는 말과 함께 웃으며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갑자기 돈이 많아진 이 사람은 마음껏 돈을 쓰며 자신을 육체적 욕망과 쾌락에 맡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돈이 떨어질 때마다 사탄을 불렀습니다. 어느덧 이 젊은이는 백발노인이 되었습니다. 사탄의 유혹하던 병도 이제 딱 두 개가 남았습니다. 방탕한 생활로 폐인이 된 노인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그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했습니다. 노인은 마침내 마지막 잔을 마셨습니다. "아! 이겼어, 나는 끝까지 살아남고야 말았다! 내놔라, 돈! 이것으로 끝이다."
이때 사탄이 남은 마지막 한 잔을 '훅' 하고 들이마시며 말했습니다. "이 어리석은 자야! 처음부터 극약은 없었다. 진짜 극약은 바로 네게 준 그 돈이었지!!"
[부자들에게 주는 교훈]
디모데전서의 말씀은 바울 사도가 지도자로 성장한 디모데에게 하는 충고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로 하여금 부자를 올바른 길로 이끌라고 하면서 부자들에게 명령하라고 말합니다. 디모데는 젊은 사람이었지만, 교회를 책임지는 지도자로서 그리스도의 진리라는 권위를 가지고 부자들에게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부자들이 들어야 할 첫째 교훈은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덧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겸손하게 선을 행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여 즐겨 나눌 줄 아는 부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참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바울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공자 제자 중에 재리(財利)에 밝아 젊은 나이부터 부자가 되었던 자공(子貢)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한 번은 공자 선생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공자가 말합니다. "그 정도면 괜찮지.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도를 즐길 줄 알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 같지는 못하다."(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논어> 學而 15편)
동서양을 막론하고 돈을 많이 소유한 사람이 보이는 행태는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이 곧 힘이요, 자기 목숨을 유지해 주는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 바로 거기에 소망을 두고 생명이 돈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고, 돈이면 다 된다는 착각을 하게 만듭니다. 돈에 소망을 두는 순간, 이웃이나 형제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돈 때문에 존속살인도 일어나고, 온갖 죄악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6장 10절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복음서에 등장하는 주인처럼 남에게 빚 놀이 할 만큼 부자는 아니지만, 우리 또한 교만해지거나 덧없는 재물에 소망을 둔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무능력하거나 게을러서는 안 되지만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재능을 모두 돈 버는 데만 쓰는 것이 과연 옳은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돈을 버는 목적이 오로지 또 돈에만 있다면 그건 문제입니다. 우리는 돈을 가지고 사람을 살리는 일들을 찾아 나서야 하고, 우리는 돈의 노예가 아니라 돈의 주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저는 향린교회의 담임목사로서 여러분들이 가난하게 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청결과 타인의 행복을 위해 순결한 마음으로 자발적 가난을 택한 분이 계시다면 그것은 참으로 고귀한 것이지만, 저는 여러분이 빈곤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해 불편하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보내길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에게 하나님께서 물질의 복을 주셔서 모두 안정적인 삶을 살기를 진정으로 원합니다.
그러나 돈이 많아지는 순간, 돈의 노예가 되고, 교만해지고, 자꾸 덧없는 돈에 소망을 두는 일이 생기고, 욕망이 더 커지고, 그래서 다시 돈에 대한 집착이 늘어나면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함께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공자가 자공에게 말했듯 가난한 삶 속에서도 진리를 추구할 줄 알고, 부자가 되었을 때는 이 사회가 더 나은 사회가 되기 위한 가치를 좋아하고, 그 가치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을 돈을 버는 데만 쓰는 것이 아니라 그 돈을 가지고 사랑하는 가족에게, 친구들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잘 사용하는 일에도 써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돈을 버는 일에만 내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자신을 더 멋지게 그리고 깊이 있게 만드는 일에도 사용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웃과 이 사회를 더 아름답고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도 사용해야 합니다. 특히 어려움을 당해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사회적, 국가적 폭력으로 인해 상처 입은 자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느라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생기를 북돋아 주는 일에 우리의 시간과 능력과 받은 달란트를 사용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향린교우 여러분! 참된 생명이 어디에 있는지를 진정으로 고민하시고, 앞날을 위하여 정말 든든한 기초를 쌓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청지기는 불의한 재물을 잘 사용하여 사람을 얻었습니다. 여러분 또한 슬기로운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모든 소유물을 잘 사용하여 사람을 얻고 살리고 생명을 풍성히 누리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믿음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힘차게 그리고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슬기롭게 선택하여 든든한 기초를 쌓으십시오.
그래서 참된 생명을 얻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