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이화대학교회 장윤재 담임목사] "오늘"

2025년 10월 13일 주일예배 설교

jangyoonjae
(Photo : ⓒ베리타스)
▲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레위기 25:8-11, 히브리서 3:7-13, 누가복음 4:16-21

설교문

저는 기차 여행을 좋아합니다. 지방 강연 요청이 오면 틈이 나는 대로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납니다. 요즘 ktx는 얼마나 쾌적하고 편리한지요. 부족한 잠도 채울 수 있고,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사색도 할 수 있고, 밀린 업무도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차를 타고 가다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기차가 내 인생 기차가 아니어서 참 다행이다.' 기차를 타면 부산이든 여수든 어디를 갔다가도 다시 출발역인 서울역으로 되돌아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돌아오기 위해 여행을 떠납니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열차는 왕복승차권이 없습니다. 어디로든 한번 떠나면 다시 출발역으로 돌아올 수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인생이라는 기차를 타고 지금도 어디론가 향하고 있습니다. 기차의 속도는 각자 다르지만 이미 떠나버린 출발역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기차를 타고 있는 지금의 이 순간을 기뻐하고, 옆자리에 동행하는 이를 소중히 여기며,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 하나하나에 사랑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 일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삶은 미래가 아닙니다. 지금의 이 순간입니다. 행복은 이다음에 이루어야 할 목표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사렛 동네의 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나사렛은 예수님이 자라나신 곳입니다. 성경을 읽으려고 서셔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찾아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18-19) 책을 덮으시니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이제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가 그의 입을 주목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누가복음 4:21)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공동번역)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누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공생애 첫 번째 말씀입니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이 글이" 곧 "이 성서의 말씀이"라는 말이 먼저 나오고 있지만, 헬라어 원문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언급된 첫 번째 낱말은 '오늘'입니다. 직역하면, "오늘 이 성서의 말씀이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입니다. 누가는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던지신 첫 단어가 '오늘'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서에서 '오늘'은 매우 특별한 말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후서 6:2)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곧 '오늘'을 강조합니다. 은총과 구원의 날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믿겠다', 혹은 '언젠가 바르게 살겠다' 미루지만, 성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은 오늘 찾아온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놓치면 하나님의 구원을 놓치는 셈입니다.

또 히브리서는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3:15) 했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에만 말씀하신 분이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완고하여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오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열린 마음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또 예수님은 기도할 때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태복음 6:11)라고 기도하라 가르치셨습니다. 내일 먹을 양식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 가르치셨습니다.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누가복음 12:19)라고 말하는 어느 부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누가복음 12:20) 하신다는 비유를 드시며 예수님은 다시 오늘의 무게를 일깨워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오늘 밤 일수 있습니다.

불의한 재물로 부자가 되었으나 사람들에게 따돌림 받던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을 때 예수님은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누가복음 19:5) 하셨습니다. 그가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였을 때 고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고 만약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회개했을 때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누가복음 19: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그날, 삭개오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옆에 달린 한 강도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누가복음 23:42) 간청했을 때 예수님은 무어라 하셨습니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43) 하셨습니다. 내일이 아닙니다. 오늘입니다. 죽음 직전의 순간에도 예수님은 '오늘'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오늘은 단지 하루가 아닙니다. 오늘은 하나님 나라와 맞닿은 시간입니다. 영원으로 이어지는 문턱입니다.

보십시오. 이렇듯 성서의 '오늘'은 은혜의 시간입니다. 지금이 은혜 받을 때고, 오늘이 구원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오늘'은 결단의 시간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이사야 55:6) 했습니다. 오늘이 그 때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이 계십니다. 성서에서 '오늘'은 또 변화의 시간입니다. 삭개오처럼 오늘이 새 삶의 출발점이 됩니다. 그리고 성서에서 '오늘'은 하나님 나라로 이어지는 시간입니다.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시간입니다.

감옥 이야기입니다. 재소자들이 영화를 볼 때의 이야기입니다. 옛날 영화에서는 세월이 지나간 것을 보여줄 때 우선 꽃이 가득히 피어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그다음에 눈이 내리면서 꽃이 지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것을 두 번쯤 보여준 다음에 '십 년 후'라는 자막이 화면 가득히 나옵니다. 그러면 재소자들은 한숨을 푹 내쉽니다. '내 징역도 저렇게 빨리 갔으면'하는 뜻이지요. 그때 간수가 이렇게 물어봅니다. '너 내일 아침 십 년 후가 되면 좋겠어? 그러면 출소할 수 있는데.' 사실 말도 안 되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그 사람의 나이도 열 살을 더 먹는다는 조건입니다. 만일 어느 재소자가 지금 서른다섯이면 내일 아침에 마흔다섯이 되어 출소한다는 뜻입니다. 괜찮지 않을까요. 하지만 재소자들이 얼른 대답을 못 한다고 합니다. 좀 생각해 보아야겠다고 말합니다. 아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십 년이 어떤 세월입니까. 행복한 시간은 절대 아닙니다. 감옥에 갇혀서, 춥고, 외롭고, 배고픈 10년입니다. 어디를 갈 수도 없고, 누구를 만나지도 못하는 10년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선뜻 버릴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오늘이 소중합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오늘은 버릴 수 없습니다. 그것이 오늘입니다. 인생이라는 열차에는 왕복승차권이 없습니다. 어디로든 한번 떠나면 출발역으로 되돌아올 수 없습니다. 오직 기차를 타고 있는 지금의 이 시간을 기뻐하고, 옆에 앉아 함께 여행하는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차창 밖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풍경 하나하나에 고마움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 일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지금 이 시간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 중에 가장 젊은 시간입니다." 누구나 가장 젊을 때는 지금입니다. 지금의 이 순간이 지나가 버리면 그만큼 젊음도 지나가 버립니다. 오늘이 당신의 남은 인생 중 첫날입니다. 그러니까 가족과 사진도 많이 찍고 행복을 즐겨야 할 시간과 장소는 바로 지금이며 여기입니다.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더 나은 점이 있지요. 아이들은 현재의 순간을 신나게 즐기거나 누릴 줄 압니다. 아이들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고 오직 현재만 있습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현재에 있으면서도 어느새 과거로 가서 고통스러워하거나 미래에 가서 불안해합니다. 사실 누군가(로버트 기요사키)의 말처럼 "삶에서 가장 파괴적인 단어는 내일입니다." 우리는 '내일', '내일' 하면서 삶의 수많은 것들을 미룹니다. '내일', '내일' 하면서 오늘에서 도피합니다. 삶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인데, 삶은 '오늘'이 쌓여서 '내일'을 이루는 것인데,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내일'을 미리 불안해하거나 가불해 사용합니다.

하지만 정말 '내일'은 없는 걸까요? 오늘이 힘들 때마다 '그래도 내일은 좀 괜찮아지겠지' 하며 내일에 대한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사는 우리들은 어리석은 존재일까요? 내일은 없다고, 그러므로 미래에 매달리지 말라고 말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결국 오늘과 내일이 구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속에 내일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이 바로 내일입니다. 오늘의 삶에 최선을 다하면 내일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열심히 살지 않으면 내일을 열심히 살지 않는 것과 같고, 오늘을 잃으면 내일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내일을 꿈꾸기보다 오늘을 꿈꾸며 살아야 합니다."(정호승)

홍수희 님의 <오늘을 위한 기도>입니다. "나로 하여 / 오늘을 살게 하소서 / 내일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 내일이 오면 / 또 그 내일이 온다는 / 안일함으로 // 오늘 내게 주어진 / 소중한 작은 것들을 / 부디 잃지 않게 하소서 // 더러는 / 마음 상하는 일이 있었더라도 / 나보다는 너의 편에서 / 이해할 수 있는 여유를 // 더러는 / 우쭐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도 / 칭찬은 너에게로 / 돌릴 수 있는 따스한 용기를 // 날카로운 시선에는 / 오히려 부드러움을 / 미움에는 오히려 / 베푸는 향기를 // 나로 하여 / 오늘을 그렇게 살게 하소서 / 내일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 지나고 나면 다시는 / 오지 않을 오늘이라면 / 지금 이 시간 사랑으로 / 절박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히브리 노예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했을 때, 홍해 바다 앞에 가로막혀 뒤쫓아 오는 파라오의 군대에 몰살의 위험에 처했을 때 그는 백성들 앞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애굽기 14:13) 광야의 호렙산에서 하나님께서 새 계명과 규례를 주신 후 모세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명기 6:4-9) 40년간의 긴 광야 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 모세는 백성들 앞에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신명기 30:15-19). 보십시오. 모세는 이집트를 탈출할 때, 광야에 머물 때,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의 그 모든 시간이 '오늘'이었습니다. 40년의 긴 시간이 언제나 '오늘'이었습니다. 모세의 메시지의 핵심은 '오늘'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해방과 자유와 은총은 언제나 '오늘'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주의 은혜의 해'(The Year of Lord's Favor)를 기다렸습니다. 눈이 빠지게,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주의 은혜의 해는 다른 말로 '희년'(禧年, Jubilee)입니다.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레위기 25:8-11) 희년은 한마디로 땅과 땅의 모든 거류민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는 은총의 해입니다. 그래서 '주의 은혜의 해'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은 이 해를 50년마다 기다려야 했습니다. 허리가 휘는 부채와 가혹한 노역과 땅이 망가져 찾아오는 굶주림에서 자유와 안식과 구원을 얻으려면 최대 반 백 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주의 은혜의 해'가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제 주의 은혜의 해를 손꼽아 기다려야 하는 미래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늘 이루어진, 지금 실현된 은총의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찬송가(438장) 가사처럼,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만 하신 것이 아니라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해주셨습니다. 스스로 거동하지 못하는 한 중풍병자를 그의 친구들이 예수님 계신 곳 지붕의 기와를 벗기고 침상 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을 때 예수께서 그를 고치시니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감격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탄성을 질렀습니다. 그 순간을 성서가 이렇게 기록합니다.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누가복음 5:26) 그랬습니다. '오늘'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놀라운 일을 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와 자유와 해방을 경험할 것입니다.

지금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넌센스 퀴즈 '세 가지 금'에 나오는 이야기이지요. 이 세상에서 정말 귀한 것은 소금인데, 소금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지요. 바로 황금입니다. 황금을 주면 소금을 살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황금보다 더 중요하게 있다지 않습니까. 바로 '지금'이라고 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태복음 6:34) 하셨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십시오.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지만 하늘 하나님께서 기르십니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십시오. 수고도, 길쌈도 아니하지만 솔로몬이 입었던 그 화려한 옷도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며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마십시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태복음 6:32) 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을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항상 기뻐하고, 오늘 쉬지 말고 기도하고, 오늘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이라고 하는 그날그날, 서로 권면하여, 아무도 죄의 유혹에 빠져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히브리서 3:13, 새번역)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 바로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애굽기 3:12) 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숨 쉬고, 일하고,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평범한 하루를 날마다 그렇게 거룩한 순간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우리는 인생이라는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습니다. 기차의 속도는 저마다 다르지만 이미 떠나버린 출발역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여기에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기차를 타고 있는 지금의 이 순간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내 옆자리에 동행하는 이를 소중히 여기고 아끼며,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며 사라지는 아름다운 풍경 하나하나를 안타까워하며 사랑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 일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오늘 이 성서의 말씀이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와 기쁨과 행복과 은총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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