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수 23:2-11, 요일 4:7-12, 막 12:28-34)
설교문
[세계 성만찬 주일과 향린 공동체의 과제]
우리 향린 공동체는 세계 성만찬 주일(World Communion Sunday)에 함께 모여 연합예배를 드립니다. 10월 첫 주가 세계 성만찬 주일이지만, 올해는 추석 명절과 겹쳐서 오늘 예배하게 되었습니다. 세계 성만찬 주일은 1936년 미국장로교회에서 시작했고, 1940년 미국교회협의회(Federal Council of Churches)가 교회력에 포함한 후 1982년 남미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열린 세계 교회 협의회(WCC) 모임에서 개신교와 가톨릭을 포함한 전 세계 교회들이 10월 첫째 주일을 성만찬 주일로 지키기로 결정하여 전 세계 교회가 함께 지키는 주일이 되었습니다.
세계 교회가 모두 인정하는 신조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자 참 인간이시며 '빛 중의 빛'이라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 본질이라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 신경에는 교회에 대해서도 매우 중요한 4가지 표지를 말합니다. 사도신경에는 "거룩한 공교회"라고 해서 교회의 '거룩함'과 '보편성'만을 언급하지만,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은 "우리는 하나이고, 거룩하며, 세계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교회는 한 몸이며,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목격자들인 사도의 전승을 이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세계 성만찬 주일에 주님의 몸과 피를 함께 나누면서 주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식탁을 떠올리고,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셨기에 감당하셨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회상합니다. 동시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온 우주의 주인이 되시고,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을 평등한 식사 자리에 모두 부르신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다른 언어와 전통, 다른 문화를 지니고 있지만, 전 세계 24억의 그리스도인이 함께 한마음으로 주님께서 베푸신 이 축제의 잔치를 거행함으로써 그리스도인 모두가 하나님의 한 백성이며, 사도들의 전승을 이어 거룩한 영의 세계적 공동체 일원임을 되새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개신교 다수의 면면을 돌아볼 때, 공동의 성찬을 통해 지구적 연대성을 회복하기는커녕 과연 한국교회가 하나 될 수 있을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는 형편입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과연 갈릴리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감리교를 제외하고 지난달에 각 교단의 총회가 끝났는데, 극우 정치 세력과 한 몸 된 전광훈이나 손현보 같은 이들과 절연하지 못했고, 시대를 거슬러 가부장적 교회 질서를 공고히 했으며,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고, 평등하고 민주적인 교회 운영 절차를 만드는데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한국교회에 대한 민주 시민들의 시선은 끝을 모르는 불신으로 가득하고, 그래서 교세는 날로 감소하는데, 그럼에도 긍정적 변화의 모습을 전혀 보여 주지 못하는 개신교 전체 분위기 속에서 우리 향린 공동체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 사회는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살얼음을 걷듯 매우 아슬아슬한 위기의 순간들을 지나고 있습니다. 밖으로는 전 세계를 상대로 날강도짓을 서슴지 않는 트럼프가 우리를 심하게 압박하고 있고, 일본은 극우성향의 다카이치 사나에가 자민당 총재가 되어 어쩌면 일본 최초로 여성 총리가 탄생할 수 있지만, 우리와의 관계는 좋지 않게 흘러갈 수 있습니다. 북한은 우리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기존의 모든 통일 논의를 뒤집고 있습니다. 안으로는 민주 시민의 힘으로 간신히 계엄 정국은 막았지만, 기존의 내란 세력을 청산하고, 기득권 세력의 부정부패를 처리하는 과정은 쉬워 보이지 않습니다.
한편 오늘날 시대의 세속화는 걷잡을 수 없는 거세한 물결이 되어 도도하게 흐릅니다. 현대를 열었던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한 이후 서구는 물론 한국 사회는 그 어떤 곳보다 빠르게 종교에서 이탈하고 있습니다. 기존 제도 종교에는 소속되기 싫지만, 그래도 천박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영성의 감각을 가지고 거룩한 삶을 살고 싶은 이들에게, 생태계 위기 및 인공지능 시대의 도래, 인터넷 발달로 감당할 수 없이 넘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과연 종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미셸 푸코가 말한 것처럼 19세기 이후는 주로 물질처럼 눈에 보이는 것만을 추종하는 시대가 되어, 초월이나 무한을 말하는 종교는 문명 발전을 저해하는 장애물이며, 광신과 무지, 미신과 뒤떨어진 구습으로 몰린 상황에서 기존의 제도 종교 전통에 있는 그리스도교는 과연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까요?
우리는 기존 교회들과는 전혀 다르다고 아무리 말해도 개신교에 대한 싸늘한 전체 사회의 시선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생태 위기와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세속적 윤리 이상의 원칙과 지침을 통해 도덕적으로 책임지는 삶을 살도록 돕고, 급변하는 기술과 과학의 발전에 대해서, AI의 의사결정 구조와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 인간의 선택권과 AI의 알고리즘 간의 갈등 속에서 벌어지는 확증편향의 문제에 대해서 신학적 또는 신앙적으로 해석하고 진단하여 방향을 제시해야 하지만, 이 또한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땅의 향기로운 이웃'으로 존재하기]
한편 신을 죽인 세대가 겪고 있는 홍역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오늘날 사회의 단면을 보여 주는 이야기 하나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친구 둘이 정글 속을 걸어가다가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A는 자기들이 함께 숨을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B는 샌들을 벗고 잘 달릴 수 있는 운동화로 갈아 신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A가 B에게 물었습니다. "너 무슨 생각이니? 사자보다 빨리 달릴 수는 없어!" 그러자 B가 대답합니다. "나는 사자보다 빨리 달릴 필요는 없어. 단지 너보다만 빠르면 돼!"
이 이야기는 수학의 천재이자 '컴퓨터 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앨런 튜링(Alan Turing, 1912-1954)의 삶을 다루는 <이미테이션 게임(The Imitation Game)>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짤막한 농담입니다만, 사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A는 위기 앞에서 자신과 친구 모두가 살 방도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B는 적자생존의 방식, 친구를 죽게 함으로써 빠른 자기가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습니다. 안타깝게 오늘날은 사회의 공공선을 생각하며 모두가 함께 살 방도를 찾는 사람보다 아주 사적인 자기 이익을 기준으로 능력 있고 잘 적응하는 자만 살아남는 사회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당면한 과제들을 함께 힘 모아 풀어보려는 사람들은 적어지고, 모두 다 경쟁의 사다리에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만 발버둥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쟁의 사슬에 매여 있는 현대인들은 경쟁에서 탈락할까 하는 두려움과 불안, 경쟁에서 밀려났을 때의 좌절과 무력감 그리고 분노의 감정에 너무 자주 휩싸이게 됩니다.
오늘날은 과거와 비교하여 놀라운 물질문명을 구축하였기에 정말 편리하고 발전한 것 같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외로움과 불안에 싸여 살아가고, 언제든 허무와 무의미의 늪에 빠져 헤매는 것이 현대인의 삶입니다. 변화가 빠른 현시대의 인간은 가상 세계와 다양한 현실 상황에서 주어지는 여러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매 순간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는 멀티 페르소나를 지녀야 합니다. 매번 자기를 바꾸어도 인스타그램이나 소셜 네트워크에 등장하는 다른 이들을 따라가기에는 벅차다고 느끼기 때문에, 매번 다른 가면을 쓰는 것도 지치고, 그렇다고 더 나아지는 것 같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은 이렇게 묻곤 합니다. "진정으로 나는 누구인가?"
기계가 인간의 육체노동을 대신하는 것을 넘어서, 이제 인간처럼 생각도 하겠다는 세상이 되니, 우리에게는 다시 "사람의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생겨납니다. 진정으로 자신을 알아가고 싶은 욕구와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단순히 이기주의나 나르시시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면, 진실하게 나 자신을 찾고 이해하며, 진정한 삶의 가치나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 좀 더 성숙하고 괜찮은 사람으로 살고 싶은 이들 또한 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함께 머무를 안전한 공동체를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바울 사도가 로마교회에 쓰는 편지에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롬 8:19)고 했는데, 오늘날도 지구의 모든 생명체와 참되게 살고 싶은 사람들은 진정으로 함께 친구하고 싶은 이들, 일상에서 소소한 구원이라도 얻게 해 줄 수 있는 공동체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향린 신앙 공동체는 바로 이런 이들에게 향기로운 이웃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강남향린교회는 1. 선교하는 교회, 2. 민중, 민족과 함께하는 교회, 3. 삶을 통해 예수를 증언하는 교회, 4. 민주적인 교회, 5. 에큐메니컬한 교회, 6.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교회, 7. 성차별이 없는 교회, 8. 항상 젊어지는 교회, 9. 가족적인 공동체로 지난 30년이 넘는 세월을 지내왔습니다. 2004년 11월 강남향린교회로부터 분가한 들꽃향린교회는 강남향린교회와 동일한 아홉 가지 선교 방향을 가지고, 지난 20년이 넘도록 가장 낮은 곳에 피는 들꽃이 되어 어디를 가나 평화와 생명의 씨앗을 퍼뜨리는 목회 사역을 줄곧 해 왔습니다. 섬돌향린교회는 별스럽지 않은 평범하고 소박한 돌이지만 초가집의 마당과 마루 사이에 놓이면 긴요하게 쓰이는 섬돌처럼 안과 밖에 경계를 넘나들고, 땅과 하늘을 이으며, 벽과 담을 허물고, 몸과 마음이 어우러지며, 남과 북 분단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평화를 이루는 목회를 10년 넘게 해 오고 있습니다. 섬돌향린교회는 자기를 밟고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몸을 내어주며 끝없이 이어지는 수많은 발길에 닳고 무뎌지면서도 감싸 안는 품을 배우는 공동체입니다. 향린교회는 평신도교회, 생활공동체, 입체적 선교, 독립교회라는 네 가지 창립 정신 위에 교회 예배와 문화에 민족 정서를 도입하고, 민주적으로 교회를 운영하며, 선교지향적 공동체로 끊임없이 갱신하고, 21세기를 맞아 특별히 생태적 목회와 선교를 새로운 과제로 삼고 나아가려는 교회입니다.
지난 세월 우리 향린 공동체의 이런 목회와 선교는 곳곳에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많은 이웃들에게 향기를 전한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향린 공동체는 다른 교회들이 생각지도 못한 시절에 이미 민주적으로 교회를 운영하고, 평신도가 주체적으로 사역을 하며, 하나님의 선교 신학에 기반해 사회선교를 해 왔고, 고통당하는 이들의 곁에 머무르는 민중신학적 지향의 목회를 꾸준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냉정하게 우리들 자신을 살펴볼 때, 우리가 애써 우리 모두가 동의하여 지향하고 바람직하다고 여긴 목회와 선교를 실행함에도 불구하고, 함께 사역할 신앙의 동지들을 불러 모으고,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확장하는 데는 여전히 아쉬움이 남습니다. 무엇이 부족했던 것일까요?
[아마도 사랑이 부족하기에, 그런데 어떤 사랑이 부족한가?]
지금 우리의 형편을 외부의 상황이나 여건, 물적 토대나 양적인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고, 오로지 우리의 신앙의 관점에서 냉철하게 성찰해 보면, 결국은 우리의 사랑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서의 본문은 모두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핵심은 1) 하나님을 사랑하고 2) 이웃을 사랑하고 3)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무엇인가를 열심히 했는데도, 그 열매가 왠지 부족해 보인다면, 그것은 바로 이 세 가지 사랑 중 한두 가지가 여전히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다시 우리들 스스로를 돌아보며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계명인 사랑을 되살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사랑하기 위하여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집에는 넓은 마당이 있었고, 그 마당에는 아름다운 잔디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 잔디밭을 매우 아꼈습니다. 매일 물을 주고, 잔디 깎는 기계로 예쁘게 깎아 깔끔한 잔디밭을 가꿔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잔디밭에 민들레가 수북이 자라났습니다. 그는 잔디를 망치고 있는 그 민들레를 없애려고 온갖 방법을 써 보았지만, 민들레는 사라지지 않고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농수산부에다 문의 편지를 썼습니다. 자신이 시도해 본 모든 방법을 열거한 다음, 아래의 질문으로 편지를 맺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랬더니 절차를 밟아서 농수산부로부터 답장이 왔습니다. "민들레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기의 첫 번째 순서는 사랑하리라고 마음먹는 것입니다. 제가 그동안 안팎에서 경험하고 듣고 보아 온 향린 공동체 식구들은 이 땅에서 고통받는 이웃들을 사랑하리라고 마음먹은 사람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고통의 현장에서는 늘 향린 공동체 구성원을 만나곤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전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교회가 전쟁 후의 야전병원이라고 봅니다. 심각하게 부상을 당한 사람에게 고지혈증과 당뇨가 있는지 묻는 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그의 상처를 치료해야 합니다."(2013년 8월19일 안토니오 스파다로 신부와의 인터뷰)
향린 공동체 교회들은 전쟁 후의 야전병원처럼 아프다는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부지런히 나서는 교회들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잘 따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럼, 이제 다른 사랑을 점검해 봅시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1서의 말씀은 "서로 사랑하라"고, "서로 사랑하는 곳에서만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향린 공동체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십니까?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으로 사랑을 하고 있습니까?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의 <사랑의 노래>라는 시가 있습니다.
바라만 보아도/ 좋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느낄 수만 있어도/ 행복한 이가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어떠한 고통이나 절망이/ 가슴을 어지럽혀도/ 언제나 따뜻이 불 밝혀 주는/ 가슴 속의 사람 하나/ 간직해 둔 마음이 있다는 것은/ 실로 소중하다.
한번도 드러내지 못한다 해도/ 사랑은 말하지 않아/ 더 빛나는 느낌
바라볼 수 있는 사람 있어/ 행복하다.
생각하면 언제나/ 정다운 사람 있어 행복하다.
우리가 같은 믿음의 형제자매로서, 바라만 보아도 즐겁고, 말하지 않아도 더 빛나는 그 느낌, 생각하면 언제나 정다운 사람이 우리들의 공동체에 있습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마음입니까? 어떤 고통이나 절망이 가슴을 어지럽혀도 내 맘속에 따뜻이 불 밝혀 주는 가슴속의 사람이 바로 우리 공동체 구성원인가요?
또 한편의 시를 읽어드리려고 합니다. 박노해 시인의 "누군가 죄를 지었을 때"라는 시입니다.
누군가 죄를 지었을 때 - 박노해
아프리카의 바벰바인들은/ 누군가 죄를 지었을 때/ 곧바로 처벌하거나 추방하지 않는다/ 우선 마을의 큰 나무에 묶어 놓아/ 놀라고 흥분된 심신을 안정시킨 다음/ 마을 사람들이 동그랗게 둘러앉는다./ 그리고는 한 사람씩 일어나/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동안/ 남을 도와주고 선한 일을 하고/ 친절하고 다정했던 일들을 발언한다./ 죄를 지은 사람은 흐느껴 울며/ 만약 자신이 용서를 받는다면/ 어떻게 해원(解寃)해 갈지를 고백한다.
우리 향린 공동체 식구들은 세상의 고통을 야기하는 불의한 자들에 맞서 싸우는 정의를 추구하는 이들입니다. 용기를 지니고 불의 앞에 물러서지 않으며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잘못한 행동을 한 이들과 싸우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에 싸움하는 버릇이 스며들기도 합니다. 이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이해하는 마음보다 투쟁하는 마음으로 같은 교인들과도 싸우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동지이지만 마치 적을 대하듯, 같은 신앙의 거룩함을 추구하는 믿음의 사람인데도 마치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과 싸우듯 매몰찬 언어와 분노가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한없는 연민과 사랑의 마음을 지니는데, 교회공동체 안에서 힘들어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할 때가 생깁니다. 아프리카의 바벰바인들만의 경우가 아니라 우리도 옛날에 한 마을을 이루고 살았을 때, 그래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누구네 집의 사정이 이렇고 저렇고, 제삿날까지 다 알고 지냈을 때, 그 공동체는 이렇게 서로 품어주는 넉넉함이 있었습니다. 우리 향린 공동체도 서로를 품어주고 사랑하는 넉넉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향린 공동체 교우 여러분! 여러분 마음에 손을 얹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공동체에 마음을 터놓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보여도 괜찮을 믿음의 동지들이 몇이나 있나요? 또 나는 누구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있나요? 혹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사이의 서로 사랑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사랑받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런데 이 시점에서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깊이 치열하게 고민하게 되는 것은 과연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호수아가 자기 후계자들에게 유언처럼 남긴 한마디의 핵심은 '삼가 조심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도 율법 가운데 가장 으뜸 되는 첫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이 계명, 가장 중요하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은 오늘날 우리에게 이해하기도 어렵고 실천하기도 힘든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실제 내용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눈에 보이는 내 가족이나 친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어떻게 사랑할 수 있나요?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선물도 주고, 만나기도 하고, 전화도 하고, 서로 손도 잡고, 따스한 체온을 느끼기도 하지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잡을 수 없는 존재인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게다가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보다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또한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으니 갚아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조건을 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에 우리가 무엇으로 갚을 수 있다는 것일까요? 그리고 사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이야기보다 더 많이 들은 이야기는 하나님을 믿고 경외해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의 하나님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실로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진지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보다 1600년 전에 이 문제를 숙고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하나님! 내가 나의 하나님이신 당신을 사랑한다고 할 때, 나는 도대체 무엇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우리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과연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사랑했던 것일까요? 어느 유명한 목사가 쓴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저는 요즘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고 삽니다.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시고, 나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또 말씀으로 내게 음성을 들려주시며, 매일 나의 삶을 인도해 주십니다. 그분은 나에게 사랑스러운 관계들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놀라운 것들을 준비해 놓고 계십니다."(<크리크토프 블룸하르트 - 행동하며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 p 15에서 재인용)
이 고백은 신앙 좋은 사람의 간증처럼 들리고,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이 글에는 온통 자기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서 도래한 하나님 나라가 그저 한 개인의 응석을 받아 주시고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것으로만 축소되어 있습니다. 과연 이 사람이 사랑한 것은 하나님일까요? 자기일까요?
우리조차도 '생명'과 '평화'와 '정의'의 이름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지만, 그 속에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이념을, 자신의 가치를 사랑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첫째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나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이지요. 믿음의 선배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대로 우리는 성서를 통하여, 기도를 통하여, 그리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내 욕망과 이기적 마음과 편향된 생각을 잠시 멈추고, 나 자신을 내려놓고 온전히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부터 하나님 사랑하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에게 관심을 보이고, 온통 내 지향이 그에게 쏠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원 시절 들었던 다양한 수업 중에 한 교수님께서 지나가시는 말로 하신 한 마디가 가슴 깊이 박힌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들이 예수와 친구 하고 싶다면 예수가 친구 했던 사람과 친구가 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다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놀랍게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사랑하시는 분이시고, 피조 세계 전체, 만물을 아끼시고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상대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려거든 하나님처럼 사랑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함께 아파하시며, 자유와 용기를 지니고 활동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사랑이 공감과 자유와 용기 속에서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처럼 조건 없는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 가끔 저녁에 어린이 성경을 읽어 주곤 했습니다. 한번은 사도행전을 읽던 중, 이런 구절이 나왔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세운 여러 교회에 편지를 썼어요. 그 편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믿음을 굳게 지켜나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것이었지요."- 사도행전 "로마에 간 바울"중에서[<어린이 성경>(베르너 라우비 지음/손성현 옮김 · 안네게르트 푹스후버 그림, 북극곰, 2012. 11. 26.) 322쪽]
이 부분을 읽어 주고 있는데, 다섯 살 둘째 아이가 "굳게"라는 말이 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굳게'라는 건, 그러니까 믿음을 굳게 지켜나간다는 건 뭐랄까? 굳게는 확실하게, 힘차게, 잘 믿는다는 거지. 씩씩하게 믿는 거야."라고 말했더니, 둘째 아이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아 ~ 그러니까 달리다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또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또 또 넘어져도 계속 일어나서 끝까지 달리는 것처럼 말이지!"
그렇습니다. 존경하는 향린 공동체 여러분! 우리 모두 굳세게 사랑해 봅시다. 달리다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또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또 또 넘어져도 계속 일어나서 끝까지 사랑해 봅시다. 그렇게 힘껏 사랑하시고,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껏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이 언제나 함께 하시길 빕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믿음의 동료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사랑의 불길을 지피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 사랑이 활활 타오르게 하십시오.
사랑하고, 그 다음에 하고 픈 일들을 마음껏 하십시오.









